은유가 된 독자

   
알베르토 망구엘(역:양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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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B
   
15000
2017�� 09��



■ 책 소개

 

책 중독자들을 위한 변명이자 헌사

 

『은유가 된 독자』는 서양문학을 근간으로 독서와 독자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 왔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이를 위해 망구엘은 서양문학의 원류인 성서에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대변되는 중세 교부철학, 셰익스피어 문학, 현대문학까지 총망라한다. 『은유가 된 독자』는 한마디로, 기존 문학 작품들을 독서 또는 독자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망구엘은 작품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태도와 행동을 세밀히 분석해 독서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독서와 독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설명한다.


망구엘은 전자책과 종이책을 비교하면서 현대인에게 뼈아픈 일침도 가한다. 전자책이 전통적 지식 섭취 수단인 종이책을 대체할 경우 나타날 부작용을 우려한다.

 

■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다. 자신의 직업을 ‘독서가’라고 할 정도로 다독가로도 유명하다. 학창 시절 서점 점원으로 일하다 대문호 보르헤스와 인연을 맺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은유가 된 독자』에서 망구엘은 서양문학을 근간으로 독서와 독자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 왔는지 조명한다. “세계 최고의 독서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서양문학의 원류인 구약성서에서부터 중세 교부철학, 셰익스피어 문학, 현대문학까지 총망라하며 특유의 통찰력을 번득인다. 독자들은 망구엘의 어깨에 올라 책과 독서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 한 수 배우게 될 것이다. 그의 방대한 독서 편력과 해박한 지식 덕분에 서양문학사 및 문화사에 대한 일가견을 갖게 되는 것은 덤이다. 대표작으로 『독서의 역사』 『밤의 도서관』이 있고, 『독서의 역사』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을 받았다. 현재 캐나다 국적으로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 역자 양병찬
역자 양병찬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기업에서 근무하다 진로를 바꿔 중앙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약사로 일하는 틈틈이 의약학과 생명과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자연의 발명』 『가장 섹시한 동물이 살아남는다』 『곤충 연대기』 『매혹하는 식물의 뇌』 『핀치의 부리』 『물고기는 알고 있다』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부. 여행자로서 독자
세상이라는 책
텍스트를 여행하는 독자
인생길
인터넷 여행

 

2부. 상아탑 속의 독자
우울한 탑
학구적인 왕자
망루

 

3부. 책벌레
책으로 빚은 피조물
마법에 걸린 독자


에필로그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은유가 된 독자


여행자로서 독자

세상이라는 책

책은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다. 기억의 저장소,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 계승과 창조의 장(場), 자신 및 타인의 경험의 보관소, 깨달음과 행복과 (때로는) 위로의 원천, 과거/현재/미래 사건의 연대기, 거울, 동료, 교사, [사자(死者)의 혼령을 부르는] 심령술사, 엔터테이너…. 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토판부터 전자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며 핵심적인 개념과 행동의 메타포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초의 필경사들은 신기술의 마력을 재빨리 간파했을 것이다. 코드를 마스터한 사람들에게 글쓰기 기술은 장문(長文)의 텍스트를 충실하게 전달해 줌으로써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메신저의 부담을 덜어 주는 수단이었다. 또한 글쓰기는 기록된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발화된 단어(spoken word)가 활자화됨으로써 구체성과 현실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권위의 왜곡이나 약화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말씀과 세상을 연관시키는 메타포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지만, 기원전 6세기 들어 유대인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고대 유대인은 대부분 추상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어휘력이 부족했다. 새로운 개념에 대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보다는 종종 구체적인 명사를 이용한 메타포를 선호했고, 이러한 명사들에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세상을 살며 신이 부여한 의미를 도출하려고 노력한다’는 복잡한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신의 말씀을 담고 있는 저술’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성서를 차용했다. 그리고 살아 있음(삶 자체)이라는 까다로운 개념을 일컫기 위해 독서 행위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여행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산다’는 것은 곧 ‘세상이라는 책을 여행한다’를, 이와 반대로 ‘책을 독파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 살며 이곳저곳을 여행한다’를 뜻하게 되었다.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화자와 청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나 가능하지만, 기록된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시공간적 제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독자는 과거(읽은 페이지)와 미래(읽을 페이지)를 넘나들 수 있는데, 이는 과거의 행적을 돌아보고 미래의 행로를 예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청취란 대체로 수동적인 활동이지만, 독서는 (여행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인 활동이다. 독서와 실생활의 관계에 대한 후세의 인식과 달리,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기록된 말씀이 행동을 이끌어 낸다’고 가르쳤다. 예컨대 신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한다. “너는 이 묵시(vision)를 판에 명백히 기록하여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달리게 하라.”


우리는 세상을 여행하듯 텍스트를 여행한다. 페이지를 넘기는 데서 오는 지적 경험은 물리적 경험으로 전환되어 전신 행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손가락으로 텍스트를 더듬고, 예민해진 몸을 다리로 떠받치고, 의미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한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순간과 직면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인터넷 여행

노터봄은 전형적인 21세기 여행가다. 일단 그는 뭐든 받아들이는 모험가다. 다른 한편으로 노터봄은 전통적인 구도자로, 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그는 『산티아고 가는 길』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증명할 수 없지만, 믿는 게 하나 있다. 세상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신비롭게 부풀려진 여행지가 몇 군데 있다는 것이다. 새털처럼 가벼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암스테르담 눈물의 탑 주변 공기에서 미세한 인력(引力)을 느낄 것이다. 그 인력은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슬픔이 누적되어 생긴 것이다.” 또 덧붙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인력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장기적으로 여행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행선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며, 똑같은 곳을 나중에 다시 여행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자=여행자’라는 이미지가 과거만큼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노터봄이 분명히 한 것처럼, 바뀐 것은 ‘독서=여행’이라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여행 자체의 개념이다. 현대사회의 모든 것이 “인간은 ‘준불멸적 존재’이고, ‘영원한 현재’에 보존되며, 모든 순간의 행동(독서 포함) 하나하나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믿도록 부추긴다.


요컨대 우리는 오직 확실성만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했던 것과 달리, 우리에게 변화란 기대의 영역을 줄이는 동시에 기억의 영역을 늘려 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순간들이 그늘을 드리우는 일은 없으며, 미래의 순간들이 연상되는 일도 없다. 이는 ‘끊임없는 현재’라는 환상을 만든다. 우리는 눈앞에서 늘 깜빡이는 스크린의 상징에 사로잡혀 ‘기억은 컴퓨터에 맡기면 되니 장서/기록물/어른들 기억/내 과거는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행자로서 독자’에게 부여된 자유를 빼앗긴다. 전자책 같은 기술장치 사용법이 엄격하고 세부적으로 마련되어 있어,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수시로 제한을 받거나 불편을 겪기 때문이다. 전자책으로 나와 있는 단테의 『신곡』을 예로 보자. 전자책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균일한 품질을 제공하면서 제한 없는 여행을 허용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스치듯 넘기는 페이지에는 주석용 여백보다는 다른 페이지나 (시선을 분산시키는) 광고와 연결된 하이퍼링크가 더 가득하다. 주석이 달려 있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읽어야 하는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에서는 스토리를 물리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물론 전자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유용하지만, 그 서비스들은 다른 한편으로 독자의 재량권을 제한하는 요인이 된다.


프랑스의 전자공학 분석가 장 사르자나(Jean Sarzana)는 동료 알랭 피에로(Alain Pierrot)와 함께 최근 구글의 진화가 일반 독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즉,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시야가 좁고, 전자책을 읽는 독자는 시야가 넓다는 것이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하는데,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종이책을 들고 읽으면 물리적 특징과 물적 존재를 의식할 수 있으므로,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를 다른 페이지, 심지어 다른 책과도 연관시킬 수 있다. 둘째, 논점과 캐릭터를 마음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셋째, 광대한 정신 공간에서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연결할 수 있다. 반면 전자책을 읽을 때 우리는 대체로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개념상으로만 봐도 현실감이 부족한 가상공간이다. 한마디로 유령 같은 존재여서 전통적인 연상 기능이 부족하다. 전자책도 독자에게 정신여행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부수적인 기능일 뿐이다. 따라서 스크롤을 계속하는 독자들은 진행 과정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지금 종이책과 전자책의 가치를 비교하는 게 아니다. 본질과 방법을 비교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며,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오늘날의 여행에는 목적지가 없다. 진정한 여행에는 목적지가 있어야 하고, 숨 가쁘게 이동하지 말고 경유지에서 매번 진득하게 머물면서 명상을 즐겨야 하는 데도 말이다. 똑같은 말이지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쉴 새 없이 이동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시공간 이동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여행 방법이 독서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우리의 생각, 자아성찰 능력, 지적 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올바른 세상 이동과 페이지 이동 방법은 길가메시의 점토판 시대 이후 발달되었지만, 스크린 시대에 이르러 상실되었다. 전광석화 같은 스크롤과 쓸어 넘기기가 판치는 오늘날, 우리는 천천히, 깊게, 철저히 읽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상아탑 속의 독자

우울한 탑

특정한 메타포는 느리게 형성된다. 그것이 묘사하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사회적 상상물로서 풍자나 상징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더라도, 메타포적 전환이나 언어적 고착화 작업은 한참 후에 이루어질 수 있다. 죽음(death)과 수면(sleep, 이후 꿈)이 대표적인 예다. ‘가는 길도 주변 경관도 모른 채 난생처음 발을 들여놓는 영토’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된 죽음은 초기 수메르 문헌에서 나타나 거의 모든 문학에 전파되었지만, 죽음을 “미지의 나라”로 부르며 “일단 들어가면 어떤 여행자도 살아 나올 수 없다”는 설명을 붙인 사람은 셰익스피어였다. ‘꿈꿀 때 연극을 창작하고,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하나의 스토리를 실연(實演)해 보인다’는 아이디어는 일찍이 『길가메시 서사시』, 초기 이집트 문학, 앵글로색슨의 시에서 언급되었지만, 꿈을 극작가에 비유한 사람은 16세기 스페인의 귀족/정치가/작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Francisco de Quevedo)였다.


상아탑이라는 메타포도 늦게 형성된 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풍자문학에서는 “세상사에서 벗어난 괴짜로, 세상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냉담하고 거만하고 오로지 책만 보는 독자들”을 조롱했다. 이런 ‘상아탑 속의 독자’를 조롱하는 분위기는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다 상아탑이 ‘세상에서 벗어난 독자의 지적 안식처’를 의미하게 된 것은 19세기다. 상아탑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1837년 프랑스의 비평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로, 그는 알프레드 드 비니의 추상적인 시와 빅토르 위고의 정치적 의미가 담긴 서정시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책이 사랑받는 성역’을 상아탑이라고 하면서, ‘지식인들이 정숙한 분위기에서 효율적으로 지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학구적인 지식인의 호젓한 장소’로 통하던 탑이 안식처가 아닌 ‘은신처’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탑이 ‘세상의 의무를 기피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다. 대중은 상아탑을 거리의 삶을 외면하는 피신처로, 그 속에 안주하는 지식인들을 속물, 무기력한 인간, 기피자, 인간 혐오자, 민중의 적으로 여겼다.


유럽에선 오랫동안 “역사는 ‘생각하는 창조적 엘리트’와 ‘소심하고 상황 파악에 서투른 대중’ 간의 대립과 반목이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캐리는 1930년에 발간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셋의 『대중의 반란』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에서 가셋은 이렇게 지적한다. “1800년까지 유럽의 인구는 1억 8000만 명을 넘지 못하다가 1914년까지 4억 600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지식인들은 이러한 대중의 존재를 혐오스럽게 여겼다.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는 동시에 지식인들은 상아탑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몸을 숨겼다.” 현대에 이르러 ‘대중의 개방된 공간’은 ‘우울한 지식인의 상아탑’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민중은 상아탑을 향해 밀실혐오증을 드러내며 분개하고, 지식인들은 얼굴 없는 대중의 광장을 향해 광장혐오증을 드러내면서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학구적인 왕자

상아탑의 이중적 이미지, 즉 ‘학구적이고 호젓한 안식처(위험이 수반됨)’와 ‘책임과 행동을 회피하는 은신처(죄책감이 수반됨)’라는 모순된 이미지는 『햄릿』에서 잘 드러난다. 햄릿은 질질 끌고, 충동적이고, 명상적이고, 폭력적이고, 철학적이고, 경솔한 인물로,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다.


고중세(High Middle Ages) 시대에는 언어에 능숙한 자(성서학자를 의미한다)를 ‘어진 사람’으로 칭송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기독교 교리』 4장 12절을 보면, ‘언어에 능숙한 사람은 가르치고, 기쁨을 주고, 변화시키기 위해 말하라’고 적혀 있다. 이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따분한 자를 즐겁게 하고, 게으른 자를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어가 우리의 이해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독자의 정신이 텍스트를 걸러 내는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우그스티누스는 육신의 부활만이 궁극의 행복이라고 믿었지만, 세속의 여행자들도 독서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그와 비슷한 상태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최후의 심판 때 마지막 나팔소리가 들리며 언어가 또다시 불필요하게 되면, 독서와 글쓰기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수단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 있는 동안 유일한 유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독서는 긍정적 행동을 유도한다. 독서를 거듭하면서 독자는 ‘책 속의 말 → 생각 → 생각을 넘어선 영역 →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의 순서로 생각과 이해가 점점 더 깊어진다.


햄릿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학문적 가르침에 잔뜩 얽매여서다. ‘대학의 교리문답서를 모두 잊고, 현실의 경험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기 못했기 때문이다.


견과류 껍데기라는 장서 속에 갇힌 햄릿에게 책 밖에 버티고 있는 현실 세계는 자신을 옥죄는 악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왕의 영혼은 햄릿에게 ‘끔찍한 해방’인 것처럼 보인다. 영혼은 햄릿에게 암묵적으로 “지금까지 읽던 책을 덮고, 단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나와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하라”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햄릿은 잔인한 현실(또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비현실)과 마주하면서 그동안 끼적였던 사소하고 허황된 기록들을 세상의 현실로 교체한다.


역사가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중세 시대부터 상아탑을 긍정적인 장소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시각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상(理想)으로, 대학과 도서관이 연구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생각한 상아탑의 목표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잘 바라보는 것이었다. 자크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독서와 기도에 몰두하는 폐쇄적인 서클을 포기하고 대학과 수도원의 벽 너머에 있는 실증과학과 정치 생활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또 다른 지식인(독자) 그룹이 등장하여 은둔하는 학자의 역할을 맡았다고 분석한다. 그들이 바로 인문주의자들이다. 자크는 16-17세기에 새로 등장한 이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문주의자는 귀족이다. 그들은 교과서와 씨름한다. 그들의 웅변에서는 면학의 냄새가 풍기고, 재치가 번뜩이며, 영혼의 깃발이 펄럭인다.”


인문주의자들은 유럽 어디에서나 침묵하며 연구했다. 연구한다는 사실조차 숨기며 고대 로마인들과 같은 여가 생활을 자랑했다. 15세기 신학자 니콜라 드 클래망지(Nicolas de clamanges)는 장 드 몽트뢰이(Jean de Montreuil)라는 학자에게 쓴 편지에서 “매우 멋지기로 소문난 게으름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그건 위대한 사람들이 늘 즐기는 것이라오”라며 멜랑콜리, 태만, 게으름 같은 덕목을 칭찬했다. 햄릿은 이러한 여가 생활이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언젠가 덴마크 왕으로 군림하게 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서재가 ‘폐쇄된 정원’에 불과하고,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망루

이유와 주장은 다르지만, ‘숫기 없는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조롱받았다. 특히 안토니오 그람시는 지식인의 역할을 햄릿의 정반대 편에 놓고 지식인들에게 “기다리거나 사색하지만 말고, 사회의 복잡한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탐구하고 해결하라”고 강하게 다그쳤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사회주의 국가가 운영되는 데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혁명적 엘리트뿐만 아니라 글 읽는 대중 모두가 의식적으로 지적 재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상아탑이라는 독서 장소는 또 하나의 공간을 상징하게 되었으니, 바로 인터넷 서핑 공간이다. 현대사회는 속도와 간결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 때문에 느리고 강렬하고 사색적인 독서는 비효율적이고 케케묵은 것으로 여긴다. 다양한 종류의 전자책은, 하나의 텍스트를 오래도록 진득하게 음미하는 대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짧게 단편적으로 부지런히 쪼아 먹으라고 부추긴다. 커뮤니케이션 역사학자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특정 디지털미디어 학자들을 이렇게 꼬집는다. “그들은 ‘심오한 독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심오한 독서는 줄곧 과대평가되어 왔다는 것이다.” 카는 그런 학자들의 태도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들의 발언을 ‘지적 성취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중요한 변화 징후’로 받아들인다. 그는 “사람들은 그들의 말 때문에 그런 변화를 쉽게 정당화하고, 웹 서핑이 적절하고 우월한 독서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웹 서핑이 심오한 독서는 물론, 심지어 차분하고 사려 깊은 생각까지도 대체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종이책은 구식인 데다 없어도 무방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려 깊은 독자들이 온라인 생활이 제공하는 영구적인 주의력 산만에 스르르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 무한한 공간의 왕들을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햄릿이 그랬던 것처럼.



책벌레

책으로 빚은 피조물

양피지 두루마리 네 개를 책상 다리로 세워 놓은 다음 그 위에 커다란 책 세 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책상. 주름진, 안경 쓴 남자가 그 책상에서 턱으로 두꺼운 책을 넘기고 있다. 온몸이 인쇄용지로 뚤뚤 말려 있어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남자의 뒤쪽에도, 그 너머 선반에도 온통 책이다. 이 그림은 1842년 프랑스 풍자화가 그랑빌(J.J. Grandville)이 펴낸 『동물들의 공생활과 사생활(Vies Publiques et Privees des Animaux)』에 수록된 삽화로, 그림 속 남자는 ‘책벌레(A bookworm)’다. 이 익살스런 그림의 의미는 명확하다. 여기에 문자 그대로 책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있다. 그는 책장의 단어 속에 파묻혀 있으며, 종이와 글자 외에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책이 중심인 세상에서 그의 육신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삽화에 묘사된 독자의 운명은 상아탑의 부정적인 측면을 설명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현대인이 품고 있는 독자에 대한 이미지가 그 정도는 아니다. 독자들의 행동에는 자신의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 경험을 간직하고, 물리법칙의 한계를 넘어서고, 정보를 번역/재해석하고, 진실을 배우고, 거짓말을 즐기고, 사리를 판단하는 등의 능력 말이다.


집필을 마친 작가와 독서를 위해 책을 펼친 독자 간에는 계약이 성립된다. 계약의 핵심 내용은 자기기만과 상호 가식(假飾)이다. ‘회의적 거부감’과 ‘지나친 신뢰’에 제동을 걸고 움베르코 에코가 말하는 ‘해석의 한계’를 정한다. 따라서 모든 독자가 텍스트에 몰입하는 배경에는 ‘이중 구속’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책장의 내용이 진실이리라는 바람’과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믿음’에 이중으로 얽매이며, 이 같은 이율배반적 구속의 긴장감 속에서 위태로운 여행을 한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독서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들은 멍청하거나 병든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랑빌이 카툰에서 책벌레는 ‘살과 피 대신 종이와 잉크로 빚은 피조물’로 묘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6세기에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에서 처음 등장하는 책바보(Book Fool)라는 인물이 이런 보편적인 천덕꾸러기의 화신이다. 방울 달린 광대 모자를 쓰고 책을 건성으로 훑어보든(브란트의 책에 수록된 알브레히트 뒤러의 삽화), 학구적인 당나귀의 모습으로 등장하든, 책에 쌓인 먼지를 치우는 데 열중하는 도서관 사서로 등장하든 책바보는 문학계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책바보는 특히 잡식성 독자로, 책 사재기를 지식의 축적으로 오해하며,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시의 여신 무사(오늘날로 치면 ‘베스트셀러의 여신’이다)는 독자들을 천박하고 어리석게 하는 반면, 철학의 여신은 독자들에게 풍부한 영감과 영혼의 치유 거리를 선사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상징은 ‘독자가 텍스트를 섭취하는 방법’과 관련되며, 구약성서의 『에스겔』과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에서 유래한다. 천사가 성 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주며 ‘먹어 치우라’고 하자 그는 얼른 먹은 후 “내 입에 당장은 달지만, 내 배에는 쓰구나”고 말한다. 예언서를 먹은 이상 독서의 맛을 즐기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텍스트를 몇 번이고 반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 많은 백성과 나라와 부족과 왕들에게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명한 독자들이 아는 바와 같이, ‘책을 먹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책의 내용을 전파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걸신들린 독자’와 ‘반추하는 독자’의 차이가 모호해진다. 둘 다 책을 먹어 치운다는 점에선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무분별한 책바보’가 ‘현명한 독자’에 그림자를 드리워 흔히 독자라고 하면 책바보를 의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책바보는 사회가 독자에게 투사하는 부정적 의미들을 모조리 뒤집어쓰게 되었다. 단어의 황무지 속에서 길을 잃고, 매일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실용성이 전혀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피조물.


마법에 걸린 독자

독자는 책바보와 책벌레라는 이중의 굴레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책바보가 되고 ‘걸신들린 독자’는 책벌레가 되는데, 둘의 공통점은 ‘책에 사로잡힌 독자’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1605년 세르반테스는 용감한 기사 돈키호테를 이렇게 설명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책에 푹 빠져, 날이 밝으면 새벽부터 초저녁까지, 날이 어두워지면 초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책을 보며 지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면 부족과 과잉 독서로 인해 뇌가 바싹 말라붙어 제정신을 잃었다.” 우리가 아는 돈키호테는 바로 책바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말하고자 한 건 ‘책에 미친 독자’가 아니었다. 독자들도 잘 아는 바와 같이, 그의 본심은 허무맹랑한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첫 장에서, “알론소 키하노(돈키호테의 본명)는 자신이 읽는 스토리가 ‘사실에 기반을 둔 현실’이라고 믿는다”고 분명히 못 박는다. 그 이후, 소설 전체를 통틀어 돈키호테의 세상 인식이 단순한 환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게 명백해진다.


플라톤은 (아마도 출처가 불분명한) 일곱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글로 옮길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설사 글로 옮기더라도, 단지 읽기만 해서는 그런 진리에 관한 지식을 섭취할 수가 없다. 수많은 노력과 경험을 거친 후, 갑자기 스파크처럼 튕겨 일어나 영혼에 옮겨 붙은 지식이라야만 스스로 떠먹을 수 있다.” 이 말은 수세기에 걸쳐 반복적으로 인용되면서, “독서를 통해 가장 진실하고 심오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독서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고 폼 잡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는 주장의 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글로 옮겨진 경험을 습득하는 것은 직관적 학습보다 훨씬 더 든든하다.


플라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글쓰기(그리고 그에 이은 독서)는 교훈과 지식의 수단이 되었다. ‘스토리는 꾸며 낸 것이고, 캐릭터들은 저자의 상상 속에서만 살아간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독자들은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를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의 모델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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