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역:조현욱)
ǻ
김영사
   
22000
2015�� 11��



■ 책 소개

 

인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가장 논쟁적이고 대담한 대서사!
문명의 배를 타고 진화의 바다를 항해한 인류는 이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변방의 유인원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는가? 수렵채집을 하던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한 곳에 모여 도시와 왕국을 건설하였는가? 인간은 왜 지구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동물이 되었는가? 과학은 모든 종교의 미래인가? 인간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가? 멀고먼 인류의 시원부터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쳐 끊임없이 진화해온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 경제학, 종교학, 심리학, 철학 등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하고 생생하게 조명한 전인미답의 문제작. 호모 사피엔스부터 인공지능까지, 기나긴 역사의 시간을 한 권으로 써내려간 문명 항해기. 이제 우리는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가.

 

머나먼 인류의 시원에서 사이보그까지, 한 권으로 읽는 인류의 탄생과 진보 그리고 미래!

 

이 책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유발 하라리의 대담하고 뛰어난 시도이다. 우리가 겪고 있고 만들어야 할 대단한 기술 진보를 위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인간의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이해가능한 틀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허구를 이용해서이고,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를 지탱하는 돈과 법과 인권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중 어떤 것도 사람들이 지어내고 전달하는 이야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 허구를 믿는 능력을 가진 사피엔스는 국가에서 기업까지 모든 권력에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평일에는 회사에 다니고 주말이면 종교 활동을 하는, 오늘날 한국에 사는 사피엔스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책일 수밖에 없다.

 

■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태어나, 20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중세 역사와 전쟁 역사로, 역사와 생물학의 관계, 역사에 정의는 존재하는지,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더 행복해졌는지 등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보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의 세계사 연구는 유튜브 등의 동영상을 통해 알려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전 세계 8만 명 이상이 그의 수업을 듣고 있다. 2009년과 2012년에 ‘인문학 분야 창의성과 독창성에 대한 폴론스키 상Polonsky Prize for Creativity and Originality in the Humanistic Disciplines’을 수상했고, 2012년에 ‘영 이스라엘 아카데미 오브 사이언스The Young Israeli Academy of Sciences’에 선정되었다.

 

인류학, 사회학, 생물학 등 분야를 넘나드는 오랜 연구의 결과물인 《사피엔스》는 처음 이스라엘에서 출간되어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이어 아메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국 30개 언어로 출간되어 전 세계적인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홈페이지 www.ynharari.com

 

■ 역자 조현욱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5년부터 2009년까지 《중앙일보》 기자로 국제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를 지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중앙일보》에 ‘조현욱의 과학 칼럼’을 연재했다. 건강의학포털인 ‘코메디닷컴’의 편집주간을 거쳐 의료 IT기업인 라이프시맨틱스의 홍보 및 콘텐츠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이성적 낙관주의자》 《창조의 엔진》 《메모리 바이블》 《동시성의 과학, 싱크》 《최종 이론은 없다》 《요리 본능》 《의사, 인간을 어루만지다》 《나는 의사다》 등이 있다.

 

■ 차례

한국의 독자들에게

역사연대표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2. 지식의 나무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4. 대홍수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6. 피라미드 건설하기
7. 메모리 과부하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제3부 인류의 통합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제4부 과학혁명
14. 무지의 발견
15. 과학과 제국의 결혼
16. 자본주의 교리
17. 산업의 바퀴
18. 끝없는 혁명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후기_ 신이 된 동물

역자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사피엔스


한국의 독자들에게

오늘날, 인간은 역사상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지구에 있는 생명체들의 진로는 전면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제 인간은 과학을 통해 자연선택을 지적 설계로 대체하고, 유기체가 아닌 생명을 만들기 시작할지 모른다. 과학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역사 과정 동안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 존재했지만 인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다. 몸과 마음은 21세기 경제의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 심지어 죽음조차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기술적 혁신은 거대하고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위험을 낳을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한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를 더욱 압축해서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을 건설할 수도 있고, 지옥을 만들 수도 있다.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그 혜택은 무한할 것이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인류의 멸종이라는 비용을 치르게 될 수도 있다.



제1부 인지혁명
인류는 약 250만 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의 유인원이란 뜻)에서 진화했다. 약 2백만 년 전 이들 원시 남성과 여성은 고향을 떠나 여행을 시작해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여러 종들이 생겨났고, 과학자들은 여기에 거창한 라틴어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들 종을 단일 계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동시에 살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은, 약 7만 년 전 동아프리카의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로 퍼져나갔고 거기서부터 유리시아 땅덩어리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했을 당시 대부분의 유라시아 지역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이미 정착해 있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에는 상충하는 이론이 존재한다. 하나는 교배이론이고 또 하나는 교체이론이다. 최근 몇 십 년은 교체 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는데, 이 논란은 2010년에 결국 끝났다.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되고, DNA 비교를 한 결과,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중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 결과가 유효하다면 교배이론에 근거가 있는 것이지만, 교체이론도 틀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오늘날 우리의 게놈에 아주 작은 양만 기여했기 때문이다.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매우 특별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무리를 지어 두 번째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네안데르탈인을 중동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놀랍도록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까지 배, 기름 등잔, 활과 화살, 바늘을 발명했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이 전례 없는 업적이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에 혁명이 일어난 결과라고 믿는다.


인지혁명이란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원인보다는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지혁명으로 사피엔스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이 생겼고 결국 사자를 피하고 들소를 사냥하는 등의 복잡한 행동을 계획하고 수행할 수 있었다. 사회적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도 생겼는데, 규모가 더 크고 응집력이 더 강한 집단으로 변모가 가능해졌다. 더불어 부족정신, 국가, 유한회사, 인권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도 생겼는데, 대단히 많은 숫자의 낯선 사람들끼리 협력이 가능해졌고, 사회적 행태의 급속한 혁신으로 이어졌다.



제2부 농업혁명

대략 1만 년 전, 이때부터 사피엔스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 데 바치기 시작했다. 인간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갔다. 인간이 생활하는 방식의 혁명, 즉 농업혁명이었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기원 후 1세기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그런데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 중에 농업과 목축에 맞는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이들 종은 특정 장소에 살았고, 그 장소들이 바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그러나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들을 낳아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취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그 대가는 더 열악한 식사였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1만 년 전 밀은 수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이고 중동의 일부지역에서만 살고 있었지만,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사피엔스를 길들여)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인간과 곡물 간의 파우스트적 거래가 우리 종의 유일한 거래는 아니었다. 양, 염소, 돼지, 닭과 관련해 또 하나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가축화된 동물은 식량(고기, 우유, 달걀), 원자재(가죽, 양모), 근력(노동)을 공급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축화된 동물들에게 농업혁명은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들의 복사본 개수가 늘어났다는 진화적 성공도 무의미하다. 좁은 상자 안에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보다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농업 혁명 이후 수천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발명품을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다. 그 망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그 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상의 집단으로 나눴다. 상류층이 특권과 권력을 향유하는 동안, 하류층은 차별과 압제로 고통을 받았다. 귀족은 좋은 것을 모두 가졌고, 평민은 그러고 남은 것을 가졌으며, 노예들은 불평을 하면 채찍질을 당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이런 위계질서는 모두 상상의 산물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보자. 정말로 브라만과 수드라가 원시적 존재의 각기 다른 신체부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두 계급 사이의 차별은 약 3천 년 전 인도 북부에서 인간이 발명한 법과 규범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결론은,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제3부 인류의 통합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20세기 전반의 학자들은 모든 문화가 완전하고 조화로우며 언제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불변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오늘날 문화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실은 그 반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문화는 나름의 전형적인 신념, 규범, 가치를 가치고 있지만,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환경의 변화나 이웃 문화와의 접촉에 반응해 스스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는 것이다. 안정된 생태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존재하는 문화조차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완전히 무작위적일까? 아니면 뭔가 전체적인 패턴이 있을까? 다시 말해 역사에는 방향이 있을까? 대답은 있다이다. 수천수만 년에 걸쳐, 작고 단순한 문화들이 점차 뭉쳐서 더 크고 복잡한 문명으로 변했다. 그래서 세계의 메가 문화의 개수는 점점 적어지는 동안에 각각은 점점 더 크고 복잡해졌다.


역사의 전반적인 방향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한 순간에 지구라는 행성 위에 각기 분리된 채 공존했던 인간 세상들의 개수를 세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행성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만, 사실 지구는 각기 격리된 수많은 인간 세상들로 구성된 은하와 같다.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그랬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구적 통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제국들이 커지고 무역이 활발해진 지난 몇 세기 동안 진행되었다. 그래서 멕시코의 고추가 인도 음식에 들어가고 스페인의 소가 아르헨티나에서 풀을 뜯게 되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욱 중요한 발전이 기원전 첫 밀레니엄(기원전 1000년∼기원전 1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바로 보편적 질서라는 개념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을 우리와 그들로 나눠서 생각하도록 진화했다. 우리란 누구든 내 바로 주위에 있는 집단을 말했다. 그들은 그 외의 모든 사람이었다. 사실 어떤 사회적 동물도 자신이 속한 종 전체의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지혁명을 시발로, 호모 사피엔스는 이 점에서 점점 더 예외가 되어 갔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형제나 친구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형제애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건너편 골짜기 어딘가, 혹은 저 산 너머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초의 파라오 메네스가 기원전 3천 년경 이집트를 통일했을 때 이집트인들이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은 이집트에 국경이 있으며 그 너머에는 야만인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지난 3천 년간 사람들은 이런 지구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점점 더 야심 찬 시도를 했다.



제4부 과학혁명

지난 5백 년간 인간의 힘은 경이적으로, 유례없이 커졌다. 1500년에 지구 전체에 살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의 수는 5억 명이었다. 오늘날에는 70억 명이 산다. 1500년 인류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총 가치는 오늘날의 화폐로 치면 약 2,500억 달러였다. 오늘날은 60조 달러에 이르렀다. 현대의 전함 한 대가 콜럼버스 시대로 옮겨진다면,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니냐, 핀타, 산타마리아 호를 몇 초 만에 널빤지 조각으로 만들 수 있다. 현대 화물선 다섯 척이면 당시 세계의 모든 상단이 실어 나를 모든 짐을 실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백 년간 가장 눈에 띄는 단 하나의 결정적 순간은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였다. 정확히 그때, 미국 과학자들은 앨러머고도 사막에 첫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그 순간 이후 인류는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뿐 아니라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앨러머고도로, 그리고 달로 이끈 역사적 과정이 과학혁명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대 과학을 소화하기 힘들어한다. 사용하는 수학 언어가 우리의 머리로는 파악하기 어렵고, 그 연구 결과가 상식과 배치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 70억 명 중에서 양자역학이나 세포생물학, 미시경제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과학은 막대한 특권을 누린다.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군들은 핵물리학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어도 원자폭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잘 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인류문화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난, 질병, 노화, 죽음은 인류의 피치 못할 운명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현재 우리는 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 속에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고 믿는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면 그들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여타 인간 활동보다 상위에 있는 고도의 도덕적, 정신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업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과학에는 돈이 매우 많이 든다. 지난 5백 년간 현대 과학이 놀라운 업적을 성취한 것은 주로 성부와 기업, 재단, 민간 기부자들이 과학 연구에 기꺼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덕분이었다. 순수한 목적의 투자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과학연구에 자금이 지원되는 이유는 그 연구가 모종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누군가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학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능력도 없다. 순수한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가령 늘어난 유전학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치 않다. 한마디로,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를 정당화한다. 여기에서 특히 두 가지 힘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하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다. 과학과 제국과 자본 사이의 되먹임 고리는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아마 지난 5백 년간 역사의 가장 주요한 엔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류가 주변 생태환경에 예속된 상태에서 대체로 해방되었지만, 인류는 숲을 베어내고, 늪의 물을 빼고, 강을 댐으로 막고, 들판에 물을 대고, 수십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로를 놓고, 고층빌딩이 즐비한 거대도시를 건설하면서, 즉 세상을 호모 사피엔스의 필요에 맞게 변형하면서, 서식지는 파괴되고 종들은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


미래의 사피엔스는 온갖 새로운 원자재와 에너지원의 보고를 손에 넣되 이와 함께 겨우 남아 있는 자연 서식지를 파괴하고 대부분의 종을 멸종시킬지 모른다. 사실 생태적 혼란은 호모 사피엔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미래에 인류의 힘과 인류가 유발한 자연재해는 쫓고 쫓기는 경쟁의 나선을 그리며 커질지도 모른다.


지난 5백 년간 과학과 산업혁명 덕분에 인류는 초인적 힘과 실질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사회질서는 완전히 바뀌었으며 정치, 일상생활, 인간의 심리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3만 년 전 쇼베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모를 수렵채집인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농업과 도시, 글쓰기와 화폐 제도, 제국과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재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 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40억 년 가까운 세월동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적용된 자연 선택의 법칙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지적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인 새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그 방법은 세 가지인데 첫째가 생명공학, 둘째가 사이보그 공학, 셋째가 비유기물공학이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를 주물럭거린디고 해서 반드시 멸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은 있다.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종말의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과학이 발전할 경우,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대체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그 존재는 체격뿐 아니라 인지나 감정 면에서 우리와 매우 다를 것이다. 오늘날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들이 이것을 정말 실현할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미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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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신이 된 동물과 같다. 현재 우리는 기술을 발전시켜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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