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북에서 다시 쓴 열하일기 上

   
김재원
ǻ
매일경제신문사
   
20000
2015�� 11��




■ 책 소개


조선의 지식인과 대한민국의 정치인, 연행길에서 만나다!


2008년 7월 김재원 의원에게는 큰 시련이 닥쳐온다. 마흔넷의 나이에 자신을 가다듬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홀연히 떠난 그는 운명처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만났다. 조선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행기이자 최고의 문장으로 손꼽히는 <열하일기>에 홀연히 빠져든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게 된다.


230년 전 중국을 방문한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중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박지원이 걸었던 연행길은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까? <열하일기>에서 고발한 조선의 문제점은 현 사회에도 유효한가? 열하일기에 담긴 박지원의 문제의식은 230년 후의 김재원에게도 가슴 깊숙이 자리 잡았다.


전략기획통으로 불리는 김재원답게 답사도 남다르게 계획했다. 1780년 6월 23일 압록강을 건넌 연암처럼 음력 6월 하순에 압록강을 출발했고, 8월 9일 박지원이 열하에 도착한 일정에 맞추어 그도 음력 8월 10일경에 하북성 승덕시(열하)에 도착했다. <열하일기> 속 등장한 장소와 현재의 지명과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려고 중국의 포털사이트 바이두의 지도와 내비게이션을 활용하기도 했다.


■ 저자 김재원
서울대 법대와 동 대학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무조정실에서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제3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서울지검 · 부산지검에서 검사로 재직했다. 17대,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아 당의 주요 전략과 중장기적 기획업무를 총괄했다. 2015년에는 대통령정무특별보좌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연구학자와 푸단대 한국연구소 고급고문으로서 연구활동을 했다. 196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산을 누비며 자랐다. 매사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 차례
들어가며 연암을 읽고 오늘을 생각하다
추천사 ‘길 위의 작가’ 김주영
추천사 푸단대학 한국연구소 소장 쩡찌융 박사
≪열하일기≫에 대하여
조선 사행단의 구성
당시 국내외 정치상황


도강록
一 연암 박지원, 압록강을 건너다 二 호랑이를 쫓으며 이틀간 노숙하다 三 책문에서의 청나라 입국심사 四 봉황성을 지나 송점에서 머물다 五 통원보에서 홍수로 엿새 동안 발이 묶이다 六 연산관에서 고향집에 날아가는 꿈을 꾸다 七 청석령을 넘어 낭자산에 이르다 八 드디어 일천 이백리 요동벌판에 서다 九 요동성에 입성하다 十 태자하를 건너 십리하에 이르다


성경잡지
十一 혼하를 건너 심양성에 입성하다 十二 심양행궁을 돌아보다 十三 상인들과 밤새워 필담을 나누다 十四 잠에 취해 낙타를 놓치다 十五 백기보에서 참외장수의 속임수에 당하다 十六 비로소 기상새설의 의미를 간파하다


일신수필
十七 광녕성에서 실사구시를 설파하다 十八 북진묘를 찾아가다 十九 수레를 논하다 二十 신광녕을 출발하며 계문연수를 목격하다 二十一 대릉하를 건너며 쌍림을 비평하다 二十二 호란의 치욕을 생각하다(1) 二十三 호란의 치욕을 생각하다(2) 二十四 영원성에서 조대수 일가를 비판하다 二十五 동관역에서 이틀간 머무르다 二十六 중후소에서 국부유출을 걱정하다 二十七 산해관에 이르러 강녀묘를 둘러보다 二十八 산해관에 입성하다 二十九 산해관을 지나며 오삼계를 생각하다


관내정사
三十 무령현에서 서학년의 집을 찾아가다 三十一 영평부에 이르다 三十二 난하를 건너 이제묘에 이르다 三十三 야계타를 지나며 비바람을 만나다 三十四 진자점을 거쳐 풍윤현에서 묵다 三十五 박절한 조선인들을 탓하다 三十六 옥전현에서 호질을 만나다 三十七 계주에서 독락사를 둘러보다 三十八 안록산과 양귀비의 사당을 비판하다 三十九 노하를 건너 영통교를 지나다 四十 동악묘에 이르러 연경 입성을 준비하다 四十一 조양문을 지나 서관에 들다 四十二 유리창에 달려가다(1) 四十三 유리창에 달려가다(2)


 




열하일기 上


도강록_압록강에서 십리하까지 5일간의 기록(1780년 6월 24일 ~ 7월 9일)

연암 박지원, 압록강을 건너다

청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가는 조선의 사절단을 연행사 했다. 연행은 정월 초하루에 맞춰 가는 정기사행과 황제의 생일 등 수시로 발생하는 일에 따라 구성되는 임시사행이 있었다. 명나라 때부터 해마다 신년 축하사절로서 동지 즈음에 출발하는 동지사冬至使, 황제와 황후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 1년마다 공물을 바치는 사행인 연공행年貢行 등 정기사행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청나라 황실은 이를 통합하여 1년에 한 번 조공 받는 것으로 간소화 했다.


임시 사행으로는 청나라의 정책이나 외교적 조치에 감사하는 사은사謝恩使, 국가 중대사를 청원하기 위해 보낸 주청사奏請使, 황제의 칠순이나 팔수 등 경사가 있을 때 보내는 진하사進賀使, 청 황실의 상에 문상하는 진위사進慰使, 국장에 문상하는 진향사進香使 등이 있었다.


서울을 떠나 연행길에 오르는 연행사는 압록강의 의주부에 이르러 최종점검을 했다. 창덕궁을 출발해 의주에 이르기까지는 약 15일에서 20일이 소요된다. 이 기간에 각종 물자들이 모이고, 사신은 개성과 평야의 명소를 들러가며 의주에 이르는 것이다. 의주에 도착한 연행사 일행은 이곳에서 약 10여 일을 머무른다. 정사 박명원 등을 수행하는 연암 박지원도 열흘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수행원들을 모으고, 봉물을 확인해서 포장하고, 청나라 황실에 보내는 문서를 최종 검토했다. 이렇게 정리정돈이 끝나면 기상상황을 보아 강을 건너기 좋은 날 출발하게 된다.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의주성의 성문을 나오면 강변 가까이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 앞이 나루터였다. 구룡정에서는 주연이 베풀어지고 의주의 관기들이 무복을 입고 말을 타고 칼춤을 추면서 깃발을 뽑아오는 기마검무 놀이를 행하기도 한다. 이 사이에 수행원들과 하인들은 통관검사를 받는다.


1780년(정조 4년, 건륭 45년) 음력 6월 24일 연암 박지원 일행은 의주성을 나서 압록강을 건넌다. 이를 기록한 <열하일기>의 첫 부분 도강록은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압록강을 건너는 생생한 장면을 읽어본다.


<열하일기> 도강록 6월 24일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를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고, 모래톱마저 흔적이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하면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역관들은 다투어 옛 일을 끌어대어 날짜 늦추기를 청하고 의주부윤 이재학 역시 비장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했으나,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하여 장계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정사가 먼저 의주성을 나가고 나서 부사의 행차가 성에서 나가자 내가 말고삐를 잡고 구룡정에 이르니, 여기가 곧 배 떠나는 곳이다. 이때, 의주 부윤은 벌써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관은 새벽에 먼저 나가서 의주부윤과 합동으로 수색하는 것이 전례이다.


사람과 말을 세워놓고 검열하는데, 사람은 성명, 거주지, 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삼고 휴대품을 뒤지니, 금지하고 있는 물품으로 황금, 진주, 인삼, 수달 가죽 등 수십 종에 달하므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하인들에게는 웃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에게는 행장을 끌러본다. 이불 보퉁이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곽이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사람들은 제각기 주워담으면서 흘깃흘깃 서로 돌아보곤 한다. 수색을 하지 않으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하자면 이렇듯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의주의 장사치들이 검색에 앞서 몰래 강을 건너가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다과상을 내왔으나 강 건너기에 바빠 수저를 드는 이가 없다. 배는 다섯 척뿐인데 한강의 나룻배 보다 조금 크다. 먼저 방물과 하인들과 말을 건너게 하고 정사의 배에는 표자문과 수역을 비롯하여 정사의 하인들이 함께 타고 부사와 서장관과 그 하인들이 또 한배에 탔다.


의주부의 관리들과 기생, 평양 관아의 관리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하고, 사공이 삿대를 들어 물에 넣는다.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오고 배는 번개처럼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지난 듯했다. 저 통근정의 기둥과 난간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배가 맞은편 언덕에 닿았다. 갈대가 짜놓은 듯 빽빽이 들어서서 땅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하인들이 얼른 배를 내려서 갈대를 꺾고 배 위에 깔았던 자리를 펴고자 하나, 갈대 한 그루가 칼날 같고, 진흙에 발이 빠져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정사 이하 모두가 우두커니 갈대밭에서 서 있을 뿐이다.


군뢰 두 명이 말을 타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하고, 다른 두 명은 갈대숲을 버스럭거리며 헤치며 길을 인도한다. 내가 말위에서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 보니,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두꺼워서 화살을 만들 수는 없으나 붓자루를 만들기에는 알맞을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머리를 나는 새처럼 빠르게 갈대를 뛰어넘어가니 일행이 모두 놀랐다.


10리를 가서 삼강에 이르니, 강물이 비단결같이 잔잔하다. 이름은 애랄하愛剌河이다. 어디서 발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십 리 가량에 불과한데도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음을 보아 서로 근원이 다른 줄을 알겠다. 놀잇배처럼 생긴 단단한 배 두 척이 보인다. 사공은 모두 봉황성 사람으로 사흘 동안을 여기서 기다리느라 식량이 다하여 굶주렸다고 말한다. 이 강은 통행금지 구역이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의 외교문서를 불시에 교환할 일이 생기므로 봉성장군이 배를 준비해 둔 것이라 한다. 애랄하의 너비는 우리 임진강과 과 비슷하다. 여기서 곧 구련성으로 향한다.


연암 박지원 일행이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의주성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도착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성경잡지_십리하에서 소흑산까지 5일간의 기록 (1780년 7월 10일 ~ 7월 14일)

심양의 상인들과 밤새워 필담을 나누다

1780년 7월 10일 심양에 도착한 조선의 사행단은  7월 11일에도 심양에 머무르며 이곳저곳을 유람했다. 연암 박지원도 심양행궁과 거리의 풍경들을 둘러보고 청나라 사람들을 만나서 필담을 했다. 연암은 예속제라는 골동품전과 가상루라는 비단가게에서 오촉의 상인들과 이틀 밤 동안 만나 필담으로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열하일기> 서경잡지 속 속재필담과 상루필담이 바로 그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필담을 하면서 가장 관심을 보인 주제는 중국에서는 사, 농, 공, 상의 신분제도의 실상은 어떤가였다. 이들과의 필담을 <열하일기>에 기록하면서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떠돌이 장사꾼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중국 사람의 입을 통해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열하일기> 성경잡지 상루필담

나는 "여러분은 모두 오吳와 촉蜀의 사람들인데 이렇게 멀리 와서 장사를 하면, 고향 생각이 간절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항주 사람인 오복이  "고향 생각으로 정말 괴롭습니다"라고 답했다. 옆에 있는 사천 출신인 동야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정신이 나갈 지경입니다. 땅끝까지 와서 조그만 이익을 다투느라, 해 질 무렵이면 모친이 부질없이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게 만들고, 젊은 아내는 독수공방하고 있지요. 고향에서 오는 편지도 끊긴지 오래이고, 꿈속에서마저 아내 얼굴이 떠오르지 않으니 어찌 머리털이 하얗게 세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달 밝고 바람 잔 날이나, 낙엽이 지거나 꽃피는 계절이면 더 견딜 수 없어집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 정도라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를 돌볼 것이지, 어째서 고향을 떠나 하찮은 이익을 좇아 헤매고 있단 말입니까? 비록 재물이 옛적의 부자의 돈만큼 많아지고, 명성은 도주공과 같아진다 한들 그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동야가 답한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고향의 선비 중에는 허벅지를 찔러가며 졸음을 쫓고 반딧불 빛으로 책을 읽으며, 아침에는 나물국을 먹고 저녁에는 소금 반찬을 먹어가며 견디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이 가엾게 여겨서인지 때대로 그들이 미관말직에 등용되는 수가 있습니다. 허나 벼슬을 하러 고향을 떠나 만리타향으로 가기는 마찬가지이고, 객지에서 부모상을 당하든지 파직되든지 하면 고생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벼슬아치는 죽을 때까지 직분을 다하는 경우도 있지만, 허물이 있는 때는 장물을 추징당하고 그간의 공적을 엎어 버리니, 형장에 끌려가며 자식의 손을 잡고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야 배운 것도 없이 벼슬할 기대는 진작 끊었지만, 그렇다고 피땀 흘려 가며 몸이 앙상해질 때까지 곡식을 수확하며 평생을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마치 여름철의 애벌레가 얼음을 알지 못하듯이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점포를 열어 물건을 파는 것을 하류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장사란 하늘이 극락세계를 열어 주고 땅이 지상낙원을 열어 준 것입니다. 수레나 배를 타고 사방을 다녀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습니다. 넓은 도시라도 즐거운 곳이 바로 내 집이지요. 긴 처마와 화려한 집에서 된서리가 오거나 뜨거운 햇살이 비쳐도 내 편한 대로 지낼 수 있습니다."


내가 "중국에서는 사, 농, 공, 상의 사민으로 직분이 구분되지만 귀천의 차별이 없다고 하던데, 혼인을 하거나 벼슬하는 데 구애받는 것이 있는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동야가 "우리나라에서는 벼슬아치들이 장사치나 장인들과의 혼인을 금하고 있습니다. 학문을 귀하게 보고 장사를 천하게 여기며, 농업을 북돋우고 상업을 억누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안 대대로 장사를 해왔으니 선비 가문과는 혼인을 할 수 없습니다. 재물을 바치면 생원이라도 해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서울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한번 생원이 되면 선비로 행세할 수는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동야가 답한다. "그렇습니다. 한번 생원이 되면 온 집안을 빛나게 하지만 대신 사방의 이웃들은 해를 입게 됩니다. 관청을 끼고 동네에서 온갖 권세를 부리니, 그게 생원의 알량한 재주입니다. 선비에도 세 등급이 있습니다. 상등은 벼슬을 해서 녹봉만을 받는 선비이고, 중등은 학관을 열어 생도를 모집하는 선비이고, 최하는 남에게 손을 벌려 빌어먹는 자들입니다. 당장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으니 염치없이 남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고 분주히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얘기를 꺼내려 망설이지만 벌써 속내가 다 들여다보이게 됩니다. 이들이야 애당초 선비라고 할 수도 없지만, 결국 천덕꾸러기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적어도 장사를 하는 우리는 이런 괴로운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한편 연암 박지원은 심양에서 성자사, 만수사, 실승사라는 사찰을 둘러보고 따로 성경가람기를 남겼다. 심양시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성자사와 만수사는 모두 헐리고 흔적이 없어졌지만, 실승사는 복원되어 남아있다. 실승사에 대해 <열하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열하일기> 성경잡지, 성경가람기

실승사는 현판에 연화정토蓮花淨土라 하였고, 숭덕 3년에 세웠다. 지붕은 모두 푸른색과 황색 유리기와로 덮었다. 이는 청태종의 원당願堂이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공했던 1636년의 병자호란 무렵은 청나라가 이미 몽골 서북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히고 있었다. 몽골의 각 부족들은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청나라 조정은 그들의 종교인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실승사는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 숭덕 원년에 청태종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해서 숭덕 3년 즉 병자호란 2년 뒤인 1638년 8월에 준공했다. 준공 법회에는 당시 심양에 포로로 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참석했다.


북경 천도 후에는 강희제와 건륭제 등 역대 황제들이 심양에 와서 조상의 묘소인 복릉과 소릉에 제사를 지내며 실승사에도 들러 예불을 했다. 이에 실승사는 청나라 말기까지 대단히 번성했다. 청나라 당시에는 실승사에 황금 1,000냥으로 주조된 원나라 때의 불상을 바롯해 각종 보물들이 많았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남아있는 보물은 없다.


심양시 정부청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실승사는 오늘날에도 황사라는 현판이 함께 붙어 있다. 여러 라마승들이 살고 있고, 예불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연암 박지원은 대웅전과 절집이 모두 파랑색과 노랑색 유리기와를 얹었다고 묘사했는데 실승사의 실제 모습이 꼭 같아서 놀라웠다.



일신수필_신광녕에서 산해관까지 9일간의 기록(1780년 7월 15일 ~ 7월 23일)

광녕성에서 실사구시를 설파하다

7월 15일 새벽에 연암 박지원은 박래원, 변관해, 조달동과 함께 소흑산을 출발한다. 북진묘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당초 정해진 길에서 20리를 돌아가야 하므로 일행보다 먼저 나서 길을 재촉한 것이다. 이날 연암 일행은 중안포에서 점심을 먹고 일행보다 먼저 출발해 광녕성을 거쳐 북진묘를 구경하고 신광녕에서 숙박했다.


중앙포는 오늘날의 중안진이고 광녕성은 오늘날의 북진시 광녕향이다. 먼저 흑산현에서 북진에 이르는 길을 지도상에 표시해 본다.


북진은 오래된 도시이지만 이제는 현대적 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다. 우선 연암 박지원이 광녕성을 묘사한 부분을 읽어보자.


<열하일기> 임신수필 7월 15일

구광녕성은 의무려산 밑에 있는데, 앞으로 큰 강이 열리고 강물을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으며, 탑 두 개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에 못 미쳐 몇 마장 되는 곳에 큰 사당이 하나 있어 단청을 새로이 하여 찬란하게 눈에 든다. 겹문을 들어가서 거리를 지나니 점포가 요동에 못지않게 번화하다. 성북쪽에는 영원백寧遠伯 이성량의 패루가 서 있다. 성이 겹으로 되었는데 내성은 온전하나 외성은 많이 헐었다.


오늘날의 북진 시내에는 명나라의 동북방면총사령부가 있던 광녕성의 서쪽 성벽이 조금 남아있다. 광녕성에는 명나라 말기에 요동지방의 군정을 장악했던 이성량의 공적을 기린 패루가 있다. 이성량의 패루는 1580년(만력 8년) 요동에서 여진을 격퇴한 그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만력황제의 명령으로 조성했다. 2013년과 2014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는 아직도 보수공사 중이고 일대를 재개발하고 있어서 패루의 상단부만 노출되어 있었다.


요동왕으로 불렸던 이성량은 명나라 초기에 중국인으로 귀화했던 조선인 이영李英의 후손이다. 이성량은 1570년에 요동총병이 되어 30여 년 동안 요동의 방비와 몽골, 여진과의 교역을 총괄했다(임진왜란으로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인 이여송이 바로 이성량의 장남이다).


한편 이성량은 청 태조 누르하치와의 인연이 깊다.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와 아버지 타크시는 건주여진의 부족장으로서 명나라에서 지휘사라는 작위를 받아 이성량의 휘하에 있었다. 여진족의 입장에서 명나라의 작위는 부족을 통솔하는 권위의 상징이자 명나라와의 무역허가증이었다.


누르하치는 1559년에 타크시이 아들로 태어나 성년이 될 무렵부터 이성량 진영 내에서 볼모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1582년 여진족의 추장 아타이가 일으킨 반란사건에 이성량이 진압군 총병으로 출전하고, 그 전쟁에서 진압군의 향도로서 종군한 기오창가와 타크시가 이성량의 지시를 받은 여진족장 니칸 와이란에게 피살된다. 기오창가와 타크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이성량은 당시 23세의 청년 누르하치에게 무역 허가증이라고 할 수 있는 칙서 30점과 말 30필을 보내며 기오창가와 타크시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누르하치의 집안은 갑옷 13벌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그에게 심적인 부담을 진 이성량의 도움으로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 건주여진의 군소부락을 통합하고 1584년에는 철천지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인다. 이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도독으로 임명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녔던 지휘사의 작위도 계승하게 된다.


5년 후 1589년에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하여 건주좌위 도독첨사, 1595년에는 용호장군의 작위를 받는다. 1615년 이성량이 북경에서 사망하자, 3년 후인 1618년(만력 46년) 누르하치는 이른바 명나라에 대한 7가지의 큰 원한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무순을 공격한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영원백 이성량의 패루는 내성의 중심에 있는 점장대의 남쪽에 세워져 있다. 연암 박지원은 광녕성에 이르러 말을 타고 갈 때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하고, 시정의 온갖 잡재들이 떼를 지어 말 앞을 둘러싸는 바람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경이다."라고 설명한다. 오늘날에도 광녕성 안에는 수많은 상가와 노정삼이 어지럽게 얽혀있고, 점장대 앞에도 많은 노점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중국의 어떤 성곽 앞에서도 이처럼 어지러운 노정상을 본적이 없다.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라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팻말이 무색하다.


점장대의 남쪽 벽면에는 유주중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즉 유주중진은 유주의 두터운 진지라는 의미이며, 유주는 오늘날의 하북성 지역이다.


한편 연암 박지원이 구광녕성에 들어서는 대목에서 쌍탑이 공중에 솟아 있다고 했는데 이는 광녕성 동북쪽의 승흥사의 쌍탑을 묘사한 것이다. 둘 다 전형적인 8각 13층 구조로 된 요나라 시대의 불탑으로서, 동쪽 탑의 높이는 43m, 서쪽 탑의 높이는 그보다 1m 낮은 42m이다.


한편 이곳에서 연암은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정신을 설파한다. 그는 중국에서 무엇이 가장 볼만하던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써 조선의 선비를 세 개의 등급으로 분류한다.


중국에서는 황제와 백관이 모두 변발을 했으니 개돼지와 같다고 내뱉는 자는 일류 선비, 명나라 멸망 후 중국은 오랑캐가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쓸어낸 다음 에야 중국의 본모습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춘추대의에 파묻힌 자는 이류 선비, 반면 깨진 기왓조각이나 냄새나는 똥거름조차 모두 철저하게 활용하는 중국의 문물제도를 본받으려 하는 자는 연암 박지원 본인과 같은 삼류 선비라고 주장한다. 그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삼류선비라고 지칭하면서 그 본질을 설명한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7월 15일

우리나라 선비는 연경을 처음 다녀온 사람을 만나면 "제일 볼만한 것이 무엇이더냐"고 묻곤 한다. 일등 선비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얼굴빛이 변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볼만한 것이 없다. 황제가 변발을 했고 장수와 재상으로부터 하급 벼슬아치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변발투성이다. 공덕이 은나라와 주나라에 이르고 부강함이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른다 한들 사람이 생겨난 이래 변발을 한 천자는 없었다. 한번 머리를 깎으면 이것은 호로가 아닌가. 호로는 개돼지 같은 짐승일 터이니 개돼지에게 무슨 볼거리를 찾는단 말인가?"


이등 선비는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의 성곽은 만리장성의 나머지요, 궁궐은 아방궁의 찌꺼기이다. 명나라가 망하니 중국 산천은 날고기의 노린내 나는 땅으로 변했다. 성인의 전통은 묻히고 언어조차 야만인의 말씨가 되었다. 무슨 볼만한 것을 찾는가. 진정 십만 대군을 얻을 수 있다면 산해관으로 들어가 온 중국을 말끔하게 씻어낸 뒤라야 장관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삼등 선비이다. "장관은 깨진 기와조각에 있고 똥거름에 있다. 기와조각은 사람들이 버리는 물건이지만 담장을 장식하면 천하의 훌륭한 그림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고 문 앞에 깔아놓으니 비에도 땅이 질척이지 않는다. 똥오줌은 가장 더럽지만 거름으로 쓰이면 금싸라기처럼 귀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기와조각이 장관이고 똥거름이 장관이라고 말하는 거시다. 어찌 성곽과 연못, 궁실과 누각, 점포와 사찰, 목축과 광막한 벌판, 환상적인 숲의 풍광만이 장관이겠는가."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를 살찌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랑캐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본받아야 한다. 옛날 성인이 <춘추>를 지은 본뜻은 존화양이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혔으니 중국에서 본받을 만한 것조차 내버리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국의 방법을 모조리 배워서 어리석고 고루한 우리의 습속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밭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고, 쇠 녹이는 풀무질에서부터 공업을 고루 보급하고 장사의 혜택을 넓게 하는 것까지 그들에게 배우지 않을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우면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먼저 우리 백성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을 유람하면서 왜 그토록 쉴 새 없이 관찰하고 기록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명분론에 휩싸여 가당찮은 실력으로 북벌론을 제기하는 조선의 선비들을 바라보며, 연암 박지원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이 묻어난다. 그의 생각은 앞으로 연경을 거쳐 열하에 이르기까지 펼쳐진다.



관내정사_산해관에서 연경까지의 11일간의 기록(1780년 7월 24일 ~ 8월 4일)

야계타를 지나며 거센 비바람을 만나다

1780년 7월 26일 이제묘에서 점심을 먹고 길을 재촉한 조선의 사행단은 야타계野鷄垞를 거쳐 사하역에 이르러 숙박한다. 야계타의 오늘날 이름은 야타계진野鷄垞鎭, 사하역은 사하역진이다.


이날 연암은 정 진사, 노이점, 변계함 등과 먼저 이제묘를 출발해서 야계타에 도착할 무렵 갑자기 거센 비바람을 만난다. 민가가 근처에 있었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는 바람에 앞을 분간하지도 못하여 꼼짝없이 한길에서 비를 맞았다. 야계타에서의 이 실감나는 장면을 읽어본다.


<열하일기> 관내정사 7월 26일

야계타에 이르니 날씨는 찌는 듯하고 바람 한 점 없다. 정 진사, 변계함, 노이점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있는데 갑자기 손등에 찬물 한 종지가 떨어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을 끼얹는 사람은 없었다. 또 주먹 같은 물방울이 떨어지며 하인 창대의 모자 챙을 탕 소리가 나도록 때리고, 노이점의 갓 위에도 떨어졌다. 그제야 모두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니, 태양 옆에 바둑돌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나고 은은히 구르릉하는 소리가 나더니, 삽시간에 사방의 지평선에 까마귀 머리 같이 독해 보이는 구름이 일어난다. 곧이어 검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한 줄기 흰 번갯불이 버드나무 위에 번쩍하더니 그 속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마치 명주를 찢는 듯하다. 수많은 버드나무 잎마다 번갯불이 번쩍인다.


일제히 채찍질을 하며 길을 재촉하나, 등 뒤에는 수많은 수레가 다투어 달리고, 산이 미쳐 뒤집히는 듯, 성낸 나무가 부르짖는 듯하니, 하인들은 손발이 떨려 기름종이로 만든 우장을 꺼내지도 못한다. 비, 바람, 천둥, 번개가 한꺼번에 휘몰아치니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말은 모두 사시나무 떨 듯하고 사람은 숨길이 급하다. 할 수 없이 말머리를 모아서 빙 둘러 섰는데 비치는 데 보니, 노이점은 새파랗게 질리어 두 눈을 꼭 감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조금 뒤에 비바람이 좀 멎자 서로 바라보니 얼굴이 모두 흙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양편에 있는 집들이 보이는데 불과 사오십 보밖에 안 되는 곳에 두고서도 비가 막 쏟아질 때에는 피할 생각을 못했다.


사람들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숨이 막혀 거의 죽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모두 가게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금세 비바람이 그치고 해가 맑게 비추기 시작해서 가게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출발했다. 길에서 가마를 타고 오는 부사를 만나서 "어디서 비를 피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부사가 "가마의 창틀이 바람에 떨어져 빗발이 들이치는 바람에 한길에 나앉아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소. 빗방울이 술잔만 하니 대국은 빗방울조차 무섭네요"라고 한다.


이제묘가 있던 손설영촌에서 다시 102번 국도로 돌아오는 길목에 야계타진이 있다. 야계타진은 아직도 비포장도로가 시가지를 지나고 있고, 2014년 여름에 찾아갔을 때는 마침 수도관이 터져서 시가지 전체가 온통 진흙탕이었다. 이날 연암이 미처 피하지도 옷하고 한길에서 맞이했던 비바람의 위력은 다음 날 보니 사방 백여리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뽑힐 정도였다고 한다.


야계타의 점포에서 잠깐 쉰 연암 박지원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해 사하역의 성 밖에서 숙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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