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전략적 일상’을 원하는 시대, 제자백가 12인의 지략을 만나다!
『난세의 인문학』은 난세 중의 난세, 춘추전국시대에 꽃피운 제자백가 12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통해 국가와 기업, 개인에 이르기까지 적용 가능한 ‘천하경영’ 이론을 제공한다. 「한비자」를 통해 결단과 타이밍의 의미를 이해하고, 「손자병법」을 통해 복잡한 세계 경제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찾아내며, 「논어」를 통해 신용을 근본으로 삼는 신뢰경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나아가 제자백가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모택동의 ‘신 중화제국 창립’ 배경, 애플제국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성공비결 등 역동적 혁신의 지혜를 읽어낼 수 있다.
■ 저자 신동준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10여 년 동안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1994년에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일본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현재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으로 격동하는 21세기 동북아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고자 동양고전의 지혜를 담은 한국의 비전을 꾸준히 제시하고 있으며, 서울대·고려대·한국외대 등에서 동아시아 3국의 역사문화와 정치경제사상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무경십서』,『후흑학』,『사마천의 부자경제학』,『조조의 병법경영』,『팍스 시니카』,『열국지 교양강의』,『조선국왕 VS 중국황제』,『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등 60여 권이 있으며, 역서 및 편저로는『자치통감 삼국지』(전2권),『춘추좌전』((전3권)),『국어』,『전국책』,『초한지』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난세의 인문학을 논하다
一. 신사론(紳士論): 배움의 자세를 견지하라
공자와 문학
독서와 선비
二. 명실론(名實論): 합리적으로 현실을 보라
순자와 역사학
이성과 합리
三. 정략론(政略論): 칼자루를 넘겨주지 마라
한비자와 정치학
국가와 정치
四. 협상론(協商論): 계책을 세워 마음을 얻어라
귀곡자와 외교학
책략과 유세
五. 화전론(和戰論): 이기는 판세를 조성하라
손자와 군사학
전략과 전술
六. 변법론(變法論): 때로는 과단성 있게 시행하라
상자와 법률학
법치와 개혁
七. 부민론(富民論):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케 하라
관자와 경제학
기업과 경영
八. 복지론(福祉論): 타인도 나를 돌보듯 하라
묵자와 사회학
복지와 겸애
九. 도덕론(道德論): 도덕적 우위를 점하라
맹자와 윤리학
도덕과 종교
十. 문화론(文化論): 문명과 문화를 구분하라
노자와 인류학
인간과 문화
十一. 허무론(虛無論):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라
열자와 철학
공상과 창조
十二. 자유론(自由論): 무위의 자유를 만끽하라
장자와 예술학
자유와 예술
맺음말: G2시대, 제자백가의 인문학에 난세의 타개방략이 있다
부록-춘추전국시대 연표
참고문헌
난세의 인문학
신사론 - 배움의 자세를 견지하라
공자와 문학
과거 대영제국의 상징어는 젠틀맨이었다. 젠틀맨은 동양 전래의 신사紳士를 직역한 말이다. 신사는 벼슬을 한 대부大夫와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인 사인士人을 총칭한 말이다. 사대부士大夫와 같은 뜻이다. 명청대 이래 신사라는 용어가 널리 유포됐다. 신사, 즉 사대부 개념을 정리한 사람은 멀리 춘추시대 말기의 공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는 21세기 현재까지도 만세萬世의 사표師表로 불린다. 시대를 뛰어넘는 스승의 표상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이른바 오월시대吳越時代라는 난세 속에서 진정한 군자君子의 롤 모델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그의 이런 노력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지나지 않았다. 14년간에 걸친 천하유세가 실패로 돌아간 게 그렇다. 그런데도 그는 왜 현실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군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일까? 여기서 공자가 정립코자 한 이른바 군자학君子學의 성립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주의할 것은 공자가 생전에 그토록 찾고자 노력한 군자의 모습이 바로 명청대 신사의 원형原型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모두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인 14년간의 천하유세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큰 틀에서 보면 공자의 천하유세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공자는 천하유세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의 위정자爲政者가 디ㅗ어 자신의 뜻을 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의 치국평천하 사상만큼은 더욱 정치精緻하게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천하유세를 끝내고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온 뒤 차분한 마음으로 고전을 정비하며 제자들을 육성한 덕분이다.
공자의 학문은 한마디로 군자학君子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자 이전까지만 해도 군자는 문자 그대로 군주의 아들로 군주의 친척을 의미했다. 이는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 즉소인과 대비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의미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후 군자는 학덕을 겸비한 이상적인 위정자를 지칭케 되었다. 21세기 학술의 관점에서 보면 군자학은 문학과 사학 및 철학을 통칭한 인문학에 해당한다. 군자는 곧 인문학을 익힌 사람이 된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을 통해 인문학의 요체를 통찰한 독서인讀書人이 바로 군자다, 이는 공자사상에서 나타나는 기본정신이 인간의 이지理智를 갈고 닦는다는 취지의 인문주의人文主義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공자가 말한 문학은 서양의 리터러처를 직역한 서학보다 훨씬 폭넓은 개념이다. 실제로 『시』는 공자학당에서 가르친 『시』, 『서』, 『예』, 『악』 의 4과四科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과목이었다. 공자가 천하유세를 마치고 돌아온 뒤 개설한 공문에서 가르친 『시』는 현존 시경의 체제와 거의 변함이 없다. 『시』의 교재만큼은 『서』와 『예』, 『악』 등 다른 교과목의 교재와 달리 당시에 이미 완벽한 체계를 갖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자가 말한 인문학은 독사와 독경을 문文으로 감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학문을 인문학 가운데 특히 문학에 가깝다고 평하는 이유다. 공자의 문학은 문사철을 하나로 묶는 인문주의人文主義를 뜻하는 동시에 인간을 우주만물의 중심에 놓고 사물을 해석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내지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인간주의人間主義에 해당한다. 모두 같은 말이다.
독서와 선비
공자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군자유君子儒가 될 것을 강조했다. 현실적으로 위정자가 되지 못할지라도 정신적인 위정자로서의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공자에 의해 군자가 새로운 의미로 통용됨에 따라 유가의 행동규범에 따르지 않는 군주들은 자동적으로 비군자, 즉 소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런 풍조가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공자는 군자를 이상적인 위정자의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군자학君子學으로 정의했다. 군자는 치국평천하를 본령으로 삼는 까닭에 군자학은 곧 위정자를 위한 군주학에 해당하는 셈이다.
군자에 대한 공자의 새로운 해석은 21세기 G2시대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천민賤民 자본주의에 올라탄 소인배의 천박한 행보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기업 CEO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인문학 열풍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결코 인문학이 치부의 기술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
명실론 - 합리적으로 현실을 보라
순자와 역사학
순자는 맹자보다 1세대 뒤에 태어났다. 그는 맹자에 의해 철학적 삶을 추구하는 수신제가로 왜곡된 공자사상을 원래의 모습인 정치적 삶을 지향하는 치국평천하로 되돌려 놓은 당사자다. 그를 두고 전국시대 최후의 대유大儒로 평하는 이유다. 그가 왕도를 역설한 맹자를 속유俗儒로 질타하며 난세에는 패도를 통한 천하통일도 가하다며 이른바 선왕후패先王後覇를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순자는 공자사상의 정맥을 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맹자는 겉으로만 공자사상의 수호자를 자처했을 뿐 그 내막을 보면 묵자의 사상적 후계자에 속한다.
21세기 학술의 관점에서 공자의 학문을 인문학으로 규정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순자의 학문은 문사철로 요약되는 인문학 가운데 역사학에 가장 가깝다. 주목할 것은 역사학이 문사철로 상징되는 인문학 내에서 정치학과 가장 관련이 깊은 학문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유수대학이 정치학을 역사학과 통합해 가르치는 게 그렇다. 실제로 조선조 때 현실참여파에 해당하는 기호학파의 태두 이율곡은 경서 못지않게 사서를 중시했다. 경서를 극단적으로 중시한 영남학파의 거두 이퇴계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인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공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학 가운데 문학에 가깝다. 이에 반해 맹자는 철학에 심취했고 순자는 맹자와 정반대로 역사학에 방점을 찍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 위정에 나오는 시삼백時三百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인문교양의 핵심을 문학에서 찾았다. 반면 맹자는 인의예지로 상징되는 4단설四端設 등 형이상의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상징되는 형이상의 세계를 극도로 꺼린 것과 대비된다.
맹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요순 등의 전설적인 인물이 구현한 정치를 현실의 위정자를 통해 구현코자 한 데 있다. 이른바 법선왕法先王 사상이다. 신화와 전설 속에 나오는 성왕의 정사를 닮고자 하는 것을 말하다.
순자는 이와 정반대되는 법후왕法後王 사상을 역설하며 이를 질타했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선왕의 정사를 현실에서 구현코자 할 경우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오히려 혼란만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가 법후왕을 언급하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현실에 뿌리를 내린 가운데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그는 역사학파의 선구자에 해당한다.
이성과 합리
순자는 모든 신분이 만족하는 평등을 지평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공권은 『중국정치사상사』에서 순자의 4민론 내에는 불평등 속의 평등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가공동체 성원 간의 역할분담을 강조함으로써 위로는 덕을 가진 자가 지위를 얻어야 하다는 공자의 이상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평민이 경상卿相이 되는 새로운 기풍을 열었다는 게 그의 평가다.
순자의 4민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배분적 평균 주장과 취지를 같이하는 것이다. 치자와 피치자 모두 자신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만 통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순자의 이런 분업사상은 기본적으로 공자의 군군신신君君臣臣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공자의 군군신신 사상을 보다 정치하게 다듬은 것이 바로 순자의 4민론이다. 4민론에 입각한 그의 분업사상이 역대 중국정권의 기본적인 통치이념이 되었다. 소프트웨어가 모든 산업을 주도하는 21세기 스마트혁명 시대는 이를 더욱 강조하는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정략론 - 칼자루를 넘겨주지 마라
한비자와 정치학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의 원래 이름은 한비韓非로 오랫동안 한자韓子로 불렸으나 당나라 때 들어와 한유韓愈를 높여 한자로 부르면서 한비자韓非子로 비칭卑稱되었다. 남송 때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의 뿌리가 한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법가사상의 추락을 시사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설파했듯이 치국평천하를 지향하는 정치적 삶 대신 수신제가를 추구하는 철학적 삶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다.
형이상의 세계에 방점을 찍고 있는 철학의 관점에서는 진일보로 평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형이하의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정치학이 관점에서 보면 이는 커다란 후퇴를 의미했다.
실제로 위정자인 사대부들은 절간의 승려처럼 『대학』에 나오는 수신제가의 뿌리인 정심성의와 격물치지의 탐구에 매달렸다. 이는 치국평천하의 방략을 우습게 여기는 잘못된 풍조를 만들었고 아편전쟁을 계기로 동양을 서구 열강의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종오는 중국의 전 인민이 면후술面厚術과 심흑술心黑術을 결합한 후흑술로 무장해야만 서구 열강의 침탈로부터 중국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후흑구국厚黑救國이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 유비가 구사한 후흑술인 이른바 가인술假仁術과 사뭇 닮아 있다. 속으로는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인자한 척하는 것을 말한다.
이종오는 『후흑학』에서 유비의 가인술을 이같이 분석해 놓았다.
"유비의 특기는 보통 뻔뻔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는 조조를 비롯해 여포와 유표, 손권, 원소 등에게 붙으면서 이쪽저쪽을 오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남의 울타리 속에 얹혀살면서 이를 전혀 수치로 생각지 않은 것은 물론 울기도 잘했다. 훗날 명대의 나관중은 『삼국연의』에서 유비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봉착하면 사람들을 붙잡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해 즉시 패배를 성공으로 뒤바꿔 놓았다고 묘사해 놓았다. 그래서 유비의 강산은 울음에서 나왔다는 곡출강산哭出江山의 속담이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본래 영웅의 모습이다. 그는 조조와 쌍벽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술을 먹으며 천하의 영웅을 논할 때의 모습을 보면 조조의 속마음은 가장 시꺼멓고 유비의 낯가죽은 한없이 두꺼웠다.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던 이유다."
『한비자』「외저설 좌상」에 나오는 황혼은 난세, 소꿉장난은 유가에서 역설하는 덕치의 키워드인 인의를 상징한다. 성리학의 등장을 계기로 동양이 철학적으로는 진일보했는지 몰라도 정치학적으로는 국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하가 태평할 때는 위정자들이 맹자의 왕도 주장을 좇아 절간의 승려처럼 면벽수도를 할지라도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천하가 들썩이는 난세의 시기다. 이때마저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의 탐구에 침잠한 나머지 맹자처럼 하필왈리 운운하는 것은 나라를 통째로 적에게 넘기는 짓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조선은 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맹자의 왕도 이념에 기초한 성리학의 폐해가 이토록 컸다. 한비자가 맹자의 왕도 주장을 비롯해 성선설과 폭군방법론 등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이유다. 말할 것도 없이 난세에는 한비자의 주장이 타당하다. 난세에는 오히려 치세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난세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스승인 순자의 예치禮治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법치를 역설한 이유다. 그러나 그의 법치는 사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상앙의 법치法治사상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의 본령은 중국의 초대 사회과학원장을 지낸 곽말약이 지적한 것처럼 신하들을 제어하는 통치술, 즉 술치술術治術에 있다.
21세기 학술 차원에서 볼 때 한비자사상을 정치학, 특히 국가 통치에 관한 연구를 본령으로 삼는 국가학의 출발로 간주하는 이유다. 마치 서양에서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등장을 계기로 플라톤의 『국가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뛰어넘는 근대 국가론이 등장케 됐다고 평하는 것과 같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은 이상과 현실을 엄히 구분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국가와 정치
한비자는 유가와 달리 아예 성선설의 상징으로 간주한 요순堯舜 등의 성인과 이익을 향해 무한 질주하는 이른바 호리지성好利之性의 화산인 범인凡人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요순 같은 성군과 걸주桀紂 같은 폭군의 출현은 매우 특이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결과다. 그가 초점을 맞춘 것은 요순도 걸주도 아닌 바로 평범한 군주인 용군庸君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한비자』「난세」의 해당 대목이다.
"요순 및 걸주와 같은 인물은 1천 년 만에 한 번 나올 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꿈치를 좇는 것처럼 잇달아 나오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통상 중간 수준의 군주가 연이어 나온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권세는 바로 이런 중간 수준의 군주인 용군을 위한 것이다. 중간 수준의 용군은 위로는 요순과 같은 성군에 못 미치고 아래로는 걸주와 같은 폭군에 이르지 않는 군주를 지칭한다."
한비자는 신하를 군주에 의해 고용된 가신家臣으로 간주했다. 신권의 상징인 승상 역시 군주의 집안을 돌보는 집사에 불과했다. 집사가 주인 행세를 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런 기미를 보일 때는 상벌권을 발동해 과감히 제거해야만 한다. 군주는 집사가 은밀히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일꾼들과 연계해 집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시 감시하는 방안을 제시한 이유다. 이를 뒷받침하는 『한비자』「팔경」의 해당 대목이다.
"군주는 아랫사람들과 연계해 상관의 비리를 고발토록 조치해야만 한다. 재상은 조정 대신, 조정 대신은 휘하 관속, 장교는 병사, 현령은 지방 관속, 후비는 궁녀들로 하여금 고발케 한다."
이는 『예기』「예운」에서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역설한 것과 대비된다. 천하는 군주의 것이 아니라 신민 등과 함께 보유한 것이라는 취지다. 성리학자들은 천하위공을 근거로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를 질타했다. 천하를 군주의 사유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유물은 임의처분 대상을 말한다. 한비자는 천하를 군주의 사유물로 간주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화전론 - 이기는 판세를 조성하라
손자와 군사학
병가는 제자백가 가운데 국가 존망을 좌우하는 전쟁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학단이다. 공자와 묵자 및 노자 등이 각각 유가와 묵가 및 도가의 사상적 효시로 간주되고 있는 것과 달리 병가는 아직까지 누가 효시인지에 대해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춘추시대 말기 오자서伍子胥와 함께 오왕 합려闔閭의 패업을 도운 손무孫武를 들고 있다.
전국시대 초기 위문후魏文侯의 패업을 도운 오기吳起와 전국시대 중기 제나라에서 활약한 손빈을 드는 견해도 만만치 않으나 통설은 손무다. 그러나 손무의 사적이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은 미스터리다. 손무는 과연 실존인물일까, 아니면 가공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사기』「손자오기열전」과 『오월춘추』 등에 나와 있는 기록을 토대로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손무는 가공의 인물이고 손자병법 역시 후대인이 전래의 여러 병법 이론을 요약해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대략 손자병법은 춘추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병서를 누군가 정리한 뒤 손무라는 이름에 가탁해 펴냈을 공산이 크다. 손무라는 이름 자체가 실존인물인 손빈에서 손이라는 글자를 따오고 병서를 뜻하는 병과 같은 의미인 무자를 덧붙여 창작해냈을 공산이 크다는 추론이 그럴듯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현존 『손자병법』은 이름만 손자병법일 뿐 조조의 『손자약해孫子略解』를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손자약해』는 삼국시대 당시 위나라 조조가 82편에 달하는 기왕의 『손자병법』을 새롭게 편제해 펴낸 것이다. 당시 조조는 온갖 잡문이 끼어들어 원문의 6배 이상 부풀려진 기존의 『손자병법』을 대대적으로 손질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내면서 정밀한 주석을 가했다.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탁월한 사상가였기에 가증한 일이었다. 그는 현존 『손자병법』의 사실상의 저자에 해당한다.
원래 조조는 이론과 실제를 겸한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인 것이 사실이나 그가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모든 전쟁에서 승리 거두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도 패배를 거울삼아 필사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적벽대전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런 경험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탁월한 군사전문가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그가 온갖 잡문이 끼어들어 크게 훼손된 『손자병법』에 대대적인 손질을 가해 『손자약해』를 펴낸 근본배경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병가의 성전으로 칭송받고 있는 『손자병법』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코자 한 것이다.
『손자병법』을 비롯해 『오자병법』과 『손빈병법』 등의 역대 병서 모두 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제자백가서의 꽃에 해당한다. 난세를 타개할 수 있는 뛰어난 방략이 대거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학술차원에서 볼 때 손무를 비롯한 역대 병가의 사상 및 이론은 군사학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들 병서는 종횡가의 기본텍스트인 『귀곡자』와 『전국책』과 짝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21세기 현재 G1 미국의 행보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듯이 군사와 외교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같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외교를 배제한 군사는 맹목적이고 군사를 배제한 외교는 공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략과 전술
현존『손자병법』의 사실상의 저자인 조조가 보여준 뛰어난 방법은 크게 전략과 전술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조조가 수많은 참전 경험을 통해 얻어낸 최고의 전략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장수보다 모신謀臣을 중시하고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게 그것이다.
먼저 모신을 중시한 사례를 살펴보자. 건안 8년인 203년에 조조는 표문을 올려 순욱을 3공으로 천거한 바 있다. 조조는 이 표문에서 기이한 계책과 은밀한 계모를 뜻하는 기책밀모奇策密謀의 효용을 이같이 강조했다.
"전략을 짜는 것이 전공의 으뜸이고 계책을 내는 것이 포상의 기본이 되니, 야전에서 얻는 공이 묘당廟堂을 넘을 수 없고 전공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나라를 세운 공보다 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둘째, 조조가 실전에서 보여준 전략 차원의 뛰어난 병법가 면모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 데서 찾을 수 있다. 신상필벌은 상벌을 엄히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가와 병가가 동시에 중시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여기의 신信은 필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의 뜻을 지닌 부사어다. 당시 조조는 신상필벌을 역설한 손자병법의 주문을 그대로 좇았다. 자치통감에 나오는 사마광의 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조는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고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공도 없이 상을 받으려는 자에게는 한 오라기의 털조차 나눠주지 않았다. 법을 집행하는 것이 엄려하고 긴박해 범법자는 반드시 주살되었으니 비록 범법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 할지라도 종내 사면치 않았다."
이상이 조조가 구사한 전략의 대체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조조가 실전에서 보여준 전술 차원의 뛰어난 병법가 면모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임기응변이다. 당시 조조가 임기응변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자치통감』「황초 원년」조에 나오는 사마광의 다음 평이 뒷받침한다.
"조조는 적과 대진하여 싸울 때 태연자약하여 마치 싸우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기회에 결단하여 승세에 올라타는 결기승승決機乘勝의 시기에는 기세가 용솟음쳐 마치 돌을 뚫는 듯했다."
결기승승은 조조가 구사한 임기응변의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조조가 초기에 적은 병력으로 우세한 병력을 지닌 군웅들을 차례로 격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임기응변에 능했기 때문이다. 임기응변에 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과 아군의 전력은 물론 그 장단점을 소상히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구체적인 전술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임기응변을 할지라도 구체적인 접전 상황에서는 승부를 예측키 어렵다.
특히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손자병법』「시계」는 적을 속이는 속임수, 즉 궤도詭道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전술은 필승을 거두기 위한 계책이다. 한 치의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손자병법이 궤도를 해답으로 제시한 이유다. 전장에서 평생을 살다시피 한 조조는 궤도의 달이이었다. 그는 매번 싸울 때마다 궤도를 구사해 객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내 승리를 얻어냈다. 그렇다면 조조가 구사한 궤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는 궤도를 이같이 풀이했다.
"병법의 요체는 일정하게 정해진 모습이 없는 병무상형兵無常形에 있다. 오직 상황에 따라 적을 속여 이기는 궤사詭詐만이 유일한 길이다."
궤도를 임기응변으로 나타나는 무정형의 속임수로 해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조가 말한 궤사를 두고 흔히 간계奸計 내지 휼계譎計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조조가 말한 궤사는 임기응변으로 구사되는 무정형의 모든 계책을 뜻하는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구사되는 무정형의 모든 계책은 적의 입장에서 볼 때 궤사로 보이는 것일 뿐 실상 아군 측에서 파악할 때는 필승지계에 해당한다.
21세기 경제경영 차원에서 볼 때 손무의 이론과 주장은 일종의 전략경영에 해당한다. 전략은 필승을 전제로 한다. 전략경영은 곧 필승경영을 달리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 총력전 양상을 띠고 있는 21세기 경제전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 한복판에 한반도가 있다. 탄탄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독자적인 전략전술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래야만 미중에 휘둘리지 않고 명실상부한 동북아 허브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업 CEO 모두 해당 분야의 세계시장을 석권키 위해 치밀한 전략을 짜는 데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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