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인간의 본질

   
오가와 히토시(역: 김영주)
ǻ
이노다임북스
   
13000
2015�� 08��





■ 책 소개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쾌적하게 살아내는 방법!


‘경제학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본질을 분석한다. 스미스는 인간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동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도덕감정론』에 초점을 맞춰, 그 내용을 소개함과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풀어 나간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타자와도 공존하면서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스미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배워 가고자 한다.


■ 저자 오가와 히토시
철학자. 도쿠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준교수. 1970년 교토부 출생. 교토대학 법학부 졸업, 나고야 시립대학 대학원 박사 후기 과정 수료. 박사(인간 문화). 미국 프린스턴 대학 객원 연구원(2011년도). 상사맨, 프리터, 공무원 등의 이색 이력을 가진 철학자로서, 상점가에서 ‘철학 카페’를 주관하는 등 시민을 위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인생이 바뀌는 철학 교실』 『일주일 만에 갑자기 머리가 좋아지는 책』 『피카소 사고』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역자 김영주
대학에서 불어와 일본어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일본 근현대 문학으로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일본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장안대학 관광일본어과에 출강 중이다. 옮긴 책으로 『세 평의 행복, 연꽃 빌라』 『일하지 않을 거야』 『파이어플라이관 살인 사건』 『괴도 퀸』 『시간을 달리는 소녀』 『헐리웃 헐리웃』 『파프리카』 『태양이 지면 만나러 갈게』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우주 지도』 『꿈틀꿈틀 애벌레 기차』 『혼자 집 보는 날』 등이 있다.


■ 차례
시작하며 도덕감정론이 당신을 구제한다!


1장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 동감이라는 발견
동감이 마음을 고문한다?
자신과 타자와의 경계선
동음이 아닌 협화음을 지향한다
서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란?
마음속에 ‘공평한 관찰자’를 육성하자


2장 올바른 세상이란 무엇인가? - 정의론
사회의 규칙으로 연결되는 자혜와 정의
스미스의 정의론
정의와 의무의 관계란?
자혜 정신


3장 규칙을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 완전한 사회 질서
규칙이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손’에 담긴 진의(眞意)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


4장 왜 우리는 노력하는가? - 인간에게 동기 부여가 되는 칭찬과 비난
타인의 평가를 먼저 의식하는 리스크
인정받고 싶은 욕구보다 앞선 것
여론보다 스스로의 양심을 우선시하자


5장 돈벌이는 나쁜 것인가? - 돈벌이와 양립하는 덕
돈은 마음의 평정을 약속해 주는가?
덕(德)이란 무엇인가?
‘재산을 향하는 길’과 ‘덕을 향하는 길’
허영심을 에너지로 바꾼다


6장 글로벌리즘에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 덕의 보편성
조국애와 글로벌한 덕은 양립하는가?
스미스의 코스코폴리타니즘


마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연결하는 공공 철학


 




애덤 스미스, 인간의 본질


시작하며_ 도덕감정론이 당신을 구제한다!

경제학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애덤 스미스가 왜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의문스럽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본질이라고 하면 좀 딱딱하게 들릴 듯하지만,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타인에 대하여 동감(同感)하고, 그 결과 비난을 피하게 된다거나 오히려 평가받으려 한다거나 자애로움을 갈망하기도 하는…… 바로 그런 인간다움이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그 결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동기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스미스는 그러한 인간의 행위를 정밀하게 분석해야만 경제나 사회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설교나 늘어놓는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안심하셔도 되는 것은, 이 『도덕감정론』은 결코 설교하는 식의 어떤 규칙을 설명한 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윤리관의 흐름을 설명하는 것이라서,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을 반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기심을 좇아 일을 하고, 야심을 가지고 돌진하는 그런 허영에 빠진 당신을 인정해 주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 없이 그저 돌진하기만 한다면 어딘가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가 지나쳤던 탓에 자신이 궁지에 빠질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자신과 주위 모두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이기심이나 야심, 허영 같은 감정을 잘 길들여서 보다 발전적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것이야말로, 여기서 말하는 도덕의 의미입니다. 최근 출판된 평전 『애덤 스미스와 그 시대』(하쿠스이샤)의 저자 니콜라스 필립슨은 『도덕감정론』을 가리켜 자신과 주위 환경에 있어서 쾌적하게 생활하는 기술을 분명히 하는 이론이자, 그것은 윤리학 이론임과 동시에 사교성 이론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도덕감정론』이라는 저서가 애덤 스미스의 주요 저서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잘 아려진 것은 『국부론』입니다만, 『도덕감정론』에는 스미스가 일생에 걸쳐 주장해 온 주제가 몇 번의 개정을 거듭하며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스미스에 대한 인식을 뒤엎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도덕감정론』에 초점을 맞춰, 그 내용을 소개함과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풀어 나갈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_ 동감이라는 발견

동감이 마음을 고문한다?

자기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인간이지만,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투성입니다. 왜 슬픈 마음이 드는 건지, 왜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지, 그걸 알 수 있다면 후회하는 횟수도 훨씬 줄어들겠지요. 인간에게 있어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이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계속 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이기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은 영원한 난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타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이 질문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모두(冒頭) 제1부 제1편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본성에는 몇 가지 원리가 있는데, 이 본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행운이나 불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들의 행복을 관찰하는 쾌락 이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타인의 행과 불행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본성에 속하는 것인 연민과 동정인데, 이것은 타인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보거나 마음속에서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스미스·상, p,23)


요컨대, 인간은 결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상황을 통해서도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의 마음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요. 게다가 스미스는 이에 대해서는 증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한 것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상황에 대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타인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어느 정도 그 사람이 되어 그의 다양한 감동에 대해 어떤 관념을 형성하는"(스미스·상, p.25) 것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동포(同胞) 감정의 원천이라고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마치 타인에게 빙의하여 스스로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 같은 이미지이지요.


분명, 우리는 비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들은 것뿐인데 마치 유사한 체험을 한 것 같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교통사고, 유괴, 살인……. 스미스가 그야말로, "공포와 걱정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거대한 고문자(拷問者)"(스미스·상, p.33)라고 표현한 것처럼 생판 모르는 남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상상력이 마음속에 고문을 가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반대로 타인이 기뻐할 때나 자랑스러워할 때는 우리도 또한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자기 나라의 국가 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을 때, 마치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럽게 느껴졌던 적이 있지 않은가요?


이런 타인의 감정이나 행위에 대해 적절성을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을, 스미스의 동감(sympathy)이라고 일컬었습니다(물론, 공감이라는 번역도 있으나 여기서는 동감으로 통일합니다).


동감이라는 개념 자체는 당시 도덕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졌던 것으로, 스미스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다만, 이 책의 시작하며에서도 소개했던 『애덤 스미스와 그 시대』 중에서 필립스는 스미스의 개념의 신기성(新奇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미스는 이 친숙한 사고방식을 단순히 이해하고 있었다기보다 많을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훌륭한 공적은 이것을 상업의 일반 이론의 ㅌ대가 되는 사교성 이론의 지배적인 원리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애덤 스미스와 그 시대』 p.196)


즉, 스미스는 동감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사교성 이론의 지배적 원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역사상의 대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쨌든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이래, 나 즉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해 온 철학의 역사를 대전환시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동감이라고 하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주목함으로, 스미스는 오히려 인간이 복수(複數)의 사람들 사이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간주관적(間主觀的)인 존재, 또는 사회적 존재인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실제로 스미스는 이 동감이라고 하는 개념이 사회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도덕감정론』의 주제이고, 또한 이를 경제 질서에 대해 응용한 것이 바로 『국부론』인 것입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는 이 스미스가 말한 동감이 부족한 점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제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입니다. 즉, 공감 능력이나 상상력의 결핍이 여러 가지 문제의 근원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가 제각각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강화되고,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게 삭막해져 버린 것은 공감 능력이나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올바른 세상이란 무엇인가?_ 정의론

스미스의 정의론

최근에 종종 정의를 주제로 한 책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정의론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정당한 세상을 만드는가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배분적 정의란 문자 그대로 부와 자원의 배분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비례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교정적 정의는 배분이 아니라 정당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런 경우, 정확한 의미에서의 이해 균등을 도모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해를 본 것을 메워 주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미스의 정의론은 기본적으로 교정적 정의의 의미로써 정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국가 질서는 이런 의미의 정의가 바탕이 되어 구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스미스도 국가의 위정자와의 관계에서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자에게는 부정(不正)한 행위를 억제하여 공공의 안전을 유지시킬 권력뿐만 아니라, 선량한 규율을 확립하고 모든 종류의 악덕과 부적절한 행위를 막아 공공 사회의 번영을 촉진시킬 권력도 신탁되어 있다. (중략)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면 공공 사회는 수많은 질서가 파괴되며 충격적인 범죄에 시달리게 되고, 그것을 지나치게 밀고 나아가게 되면 모든 자유와 안전, 그리고 정의는 파괴하게 될 것이다.(스미스·상, p.212~213)


정치를 하는 자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정의는 파괴되고, 사회 질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폭군은 물론, 어리석은 정치가에게 놀아나는 국가에 정의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의가 없는 국가에서 질서가 만들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겠지요.


이것은 정치를 하는 자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정의를 소홀히 하는 사회는 이미 무정부 상태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더욱 특별한 것입니다. 다음의 표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스미스는 정의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정, 인간애, 친절, 관용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를 결정하는 일반적 규칙은 더욱 막연하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와 다른 또 하나의 덕이 있는데, 이 덕의 일반적 규칙은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외적 행위를 최대의 정확성으로 결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이다.(스미스·상, p.369)


세상을 규정하고 있거나, 적어도 규정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규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스미스가 예를 들었던 우정이나 인간애, 친절이나 관용 등의 덕입니다. 모두 분명히 중요한 덕이며, 실제 세계는 이러한 덕이 있기에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도 막연할 뿐입니다. 이에 비해 명확하게 세상을 결정하고 있는 규칙, 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의에 어긋나는 위반 사항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처하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정의의 절대성입니다.


정의의 법들이 아주 잘 지켜지지 않고서는 사회는 존속할 수 없고, 서로를 침해하는 행위를 자제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교류도 발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고려가 바로 우리가 정의의 법들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정의의 법을 강제하는 것을 시인(是認)하는 근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스미스·상, p.227)


정의는 사회 존립의 초석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반한 결과로 엄격히 처벌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적어도 스미스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이것은 우리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스미스가 말했듯이 사회의 존립에 위협을 가하는 경우에는 정의의 이름하에 극형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목적은 다름 아닌 사회 존립의 초석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_ 완전한 사회 질서

보이지 않는 손에 담긴 진의(眞意)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유명한데, 사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만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흔히 신의라는 표현이 덧붙여 사용됩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조종되고 질서를 형성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근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학자이기도 한 스미스의 기본 사상으로 보면 역시 신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실제로는 뒤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의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가 이 말을 사용한 것은 『도덕감정론』 속에서도 딱 한 번, 그리고 또 다른 저서인 『국부론』에서도 딱 한 번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사상의 대명사처럼 되었으니 신기할 따름이지요. 그것은 아마도 이 표현이 스미스 사상의 본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먼저, 스미스가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토지의 생산물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그것이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수에 가까운 주민을 유지한다. 부유한 사람은 단지 그 집적 속에서 가장 귀하고 쾌적한 것을 선택할 뿐이다. 그들이 소비하는 양은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천성적인 이기심과 탐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량의 성과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중략)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대지가 모든 주민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나누어졌을 경우에 나눈 것과 거의 같게, 생활필수품을 분배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것을 의도하지도, 알지도 못한 채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종(種)의 번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스미스·하, p.23~24)


여기서는 토지의 생산물을 예를 들어 논하고 있지만, 스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요컨대, 부유한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인해 많은 생산물을 손에 넣지만,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며, 그러한 행위로 자연스럽게 세상 전체의 번영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자들의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자들의 이기심으로 여분의 부를 얻어, 그것을 이용해 소비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사회의 번영으로 이어졌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흡사, 신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회의 번영을 인도하는 것인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꼭 이기심(利己心)이 나쁜 것만은 아니게 됩니다. 오히려 이기심이 결과적으로 사회 번영으로 이어진다면, 심지어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평소 우리가 악(惡)이라고 치부하는 이기심, 야심, 허영……. 그러한 모든 것이 어쩌면 이 세상을 번영시키는 계기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언급된 다른 구절인,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말한 다음의 표현을 보면 명백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든, 그해의 연간 수입은 언제나 그 사회의 노동이 매년 생산하는 생산물 전체의 교환 가치와 정확히 같다. 혹은 그 교환 가치와 정확하게 동일한 산물이다. 따라서 각 개인도 가능한 한 자신의 자본이 국내의 노동을 지탱하게 함으로써 동시에 그 생산물이 최대한의 가치를 가지도록 이 노동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것에도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추진하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어느 정도 추진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국외 노동보다는 국내 노동을 지탱할 것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단지 그 자신의 안전만을 의도하는 것이며, 또한 그 노동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추진하게 된다. 또 그것이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반드시 사회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그는 종종 실제로 사회의 이익을 추진하고자 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추진한다.(『국부론』 2권, 제4편 제2장 p.303~304)


여기서, 개인의 이익 추구는 의도치 않게 사회의 이익 촉진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다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을 조금 다른 시간으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함으로 인해 자기 배를 채우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사회의 번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셈이니까요.


단지, 문제는 사회의 번영이 어디까지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며, 전체적으로는 번영하더라도 그 알맹이까지 두루 살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른바, 격차의 문제입니다. 격차는 산업 혁명 이후부터 있어 온 오랜 문제이지만,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매우 긴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