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의 지혜

   
김기태
ǻ
판미동
   
15000
2015�� 06��




■ 책 소개


분별의 프레임을 넘어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내면의 힘
최고(最高)의 문자 『신심명』에서 무분별의 지혜를 배우다!


『신심명』은 중국 선종의 제3대 조사 승찬이 쓴 것으로, 마음의 근본에 관한 짧은 시문이다. 『신심명』은 최상 법문으로 칭송받으며 1400년간 널리 읽혀 왔다. 유불도를 넘나들며 동양 철학을 강의해 온 저자는 이 경전의 핵심인 ‘분별을 버리면 마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메시지에 주목했다. 저자는 이를 ‘무분별의 지혜’라 이름 붙이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프레임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스스로 만들어 낸 기준 때문이라고 말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적인 기준을 자기에게 들이대고 요구하며 거기에 맞추려 애쓰기 때문에 삶이 한없이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의 여정을 끝내려면 이분법적인 사고에 근거한 ‘분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완전과 불완전,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로 존재하는 힘, 그것이 바로 무분별의 지혜다.
 
■ 저자 김기태
논어, 중용, 도덕경, 금강경 등 유불도를 넘나들며 20년째 동양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윤리 교사, 신문사 교열부 기자로 일했으나, 내면의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대관령에서 목부로, 수도원의 수사로, 공사판 막노동꾼으로, 배 타는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서른네 살 되던 해에 그는 삶의 진리를 깨닫고 모든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95년 향교에서 논어를 함께 배우던 동문들의 추대로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대구, 서울, 부산, 청주, 산청 등 전국 각지에서 고전 읽기 강의를 통해 CEO부터 교수, 교사, 공무원, 택시 기사, 주부, 대학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가장 완전하다.’는 진실을 나누고 있다. 저서로는 『종교 밖으로 나온 성경』『지금 이 순간이 기회입니다』『지금 이대로 완전하다』가 있다.
 
■ 차례
들어가며 - 무조건적인 행복이란
강의에 앞서 -『신심명』에 대하여


1부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1강 왜 무분별인가
2강 지금 여기, 당신으로 충분하다


2부 그저 자기 편이 되어 주면
3강 자신을 믿는다는 것
4강 진실은 단순하다


3부 분별에서 무분별로
5강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용기
6강 저항을 그치는 순간


4부 내 안을 직시하는 힘
7강 잠시 발걸음을 멈출 때
8강 무언가 더하려고 했기에
9강 예, 그 마음이면 됩니다


5부 나로서 살아가는 행복
10강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11강 본래 부족한 것이 없었다
12강 내가 곧 사랑이기에


부록 - 신심명 73수 전문  


 




무분별의 지혜


강의에 앞서 -『신심명』에 대하여

승찬(僧璨)은 중국 남북조 시대와 수나라에 걸쳐 살았던 사람으로서, 나이 마흔이 넘도록 심한 풍질을 앓고 있었다. 풍질은 문둥병을 가리키는데, 이로 인해 그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승찬은 중국 선불교의 제2대 조사(祖師)인 혜가(慧可) 스님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혜가는 달마 대사로부터 법(法)을 이어받아 당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설법하고 있었다. 고통에 찌든 얼굴에 더러운 옷차림을 한 승찬은 혜가를 만나자마자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절박하게 그의 발 아래 엎드리며 말했다.


"스님, 저는 지금 이렇게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혜가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혜가가 말이 없자 승찬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혜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죄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을 없애주마."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 죄는 다 없어졌다. 찾을 수도 없는 죄에 묶여 헛되이 고통받는 일은 이제 그만 하라."


그 말에 승찬은 크게 깨쳤다. 그날 이후 승찬의 병은 점차 나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몇 년 뒤 그는 혜가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아 중국 선종의 제3대 조사가 되었다. 승찬은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승찬 스님은 은둔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가 남긴 『신심명』은 지금도 영원한 행복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빛이 되어 주고 있다. 『신심명』은 146구 584자로 이루어진 사언절구의 짧은 시문이다. 승찬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은둔 생활을 하면서 선종의 근본 뜻을 73수의 시에 담아 나타낸 것이다. 600자도 되지 않는 작은 소품이지만, 『신심명』에는 선(禪)의 요체가 잘 나타나 있어 중국에 불법(佛法)이 전래된 이후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는 찬사를 받고 있으며, 선종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선시(禪詩) 가운데 하나로서 초기부터 널리 읽히며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왜 무분별인가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택하지만 말라 :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도란 결코 특별하거나 신비로운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평범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다. 도란 바로 현존(現存, 지금 있는 것) 혹은 있는 그대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존, 그것이 바로 도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도를 깨닫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도를 깨닫기란 얼마나 쉬운가?


참된 행복은 어떤 조건이나 상태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참된 행복은 결코 소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존재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며, 따라서 삶에는 온통 행복할 것들밖에 없다.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살다 보면 때로 외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우울하기도 해서 그 때문에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할까 눈길을 어디에 둘까 하며 괜스레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다는 것, 또 때로 찾아오는 불안에 마음 스산해하며 안절부절못할 수도 있다는 것, 한없이 약해질 수도 있고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순간순간 긴장하며 쩔쩔맬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도 얼굴 찌푸리며 싸울 수 있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그것 때문에 여러 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룬 채 하얗게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한다는 것! 이 모든 일 또한 우리가 살아 있기에 경험하는 소중한 순간이요, 우리 마음의 다양한 모습이며, 그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의 현재 속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도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많은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것은 오직 가려서 택하는 마음 때문이다. 매 순간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경험하고 다만 그 순간의 현재 속에 올올이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을 둘로 나누어 놓고는 하나는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려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올 때 바로 그 순간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따뜻이 안아줘 보라. 그런 자신을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며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에게 찾아온 불안을 진실로 받아들여 온전히 그것과 하나가 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 마음을 더욱더 깊이 허용해줘 보라. TV를 켠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든가 혹은 다른 일을 함으로써 그 순간의 불안을 잊거나 덮어 버리려 하지 말고, 그 불안과 함께 잠시만이라도 가만히 있어 보라. 불안 이외의 어떤 것도 택하지 말고 그것을 향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보라. 진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그다음 순간 이미 불안하지 않은 자신을, 어느새 편안하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이로 이완된 자신의 마음을 문득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몹시 미운가. 그 때문에 마음이 무척 힘들고 괴로운가. 어떻게든 그 마음을 해결하여 더 이상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거나 용서하고 싶은가. 그래서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다시 얻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를 온전히 미워하라. 그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상대방을 용서하려 애쓰지 말고, 지금을 거부하여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먼저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그 미움을 깊이 존중해줘 보라. 미워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가만히 내려놓아 보라. 그리하여 미움과 하나가 되고 미움 자체가 되어 보라. 바로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하여 마음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미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득하게만 여겼던 사랑과 용서가 저절로 자신 안에 가득히 채워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참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지는가? 그런 자신을 비난하거나 내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껴안아 주라. 자신에게 못났다고 스스로 돌을 던지지 말라. 왜 꼭 잘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야만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남들도 진실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초라함과 보잘것없음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렇게 자신에게 정직할 때, 뜻밖에 조금도 초라하지 않은 자신을 문득 깨닫고는 스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승찬 스님도 애틋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가려서 택하지만 말라.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속에서 넉넉히 얻게 될 것이다"라고.



그저 자기 편이 되어 주면

자신을 믿는다는 것

인연을 좇아가지도 말고 빈 곳에 머물러 있지도 말라 : 막축유연(莫逐有緣) 물주공인(勿住空忍)

매주 정기적으로 『도덕경』을 강의하는 대구 모임에 어느 날 새로운 사람이 왔다. "선생님, 요즘의 저의 결론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의 마음의 평화랄까, 자유랄까, 진리랄까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많은 스승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늘 현재에 존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밥을 먹을 때는 오직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길을 걸을 때는 걷는 동작에만 마음을 모으며, 심지어 오줌을 눌 때도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오줌만 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당신은 현재란 이런 것이다라는 상(相)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거나 놓치지 않은 순간만을 현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런 분별 때문에 오히려 현재라는 것에 갇히게 되고, 그럼으로써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거나 길을 걸을 때 혹은 오줌을 눌 때 당신의 마음이 그 순간에 있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거나 과거나 미래로 가 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생각의 내용을 보면 과거나 미래 혹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 나타나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시점을 보면 언제나 현재입니다.


다시 말해 알아차리고 있거나 놓치고 있거나 혹은 잡생각을 하고 있거나 망상에 빠져 있거나에 상관없이 당신은 언제나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단 한 순간도 현재를 떠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는 것은 어떤 노력이나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거나 이루어 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져 있는 존재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당신이 기울이고 있는 그런 노력과 수고를 내려놓기만 하면, 매 순간의 이 자리가 바로 도달하려는 그 자리인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승찬 스님은 말한다. "인연을 좇아가지도 말고, 빈 곳에 머물러 있지도 말라"고. 이때 인연이란 우리 내면의 인연, 곧 분별심을 가리킨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건만 우리는 언제나 여기와 도달해야 할 저기를 나누고, 지금과 미래를 나누며, 됐다-안 됐다, 이다-아니다, 좋다-나쁘다, 구속과 자유, 중생과 부처 등으로 나누고 분별하면서, 그중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리려고 애쓰는데, 바로 그런 모양으로 마음이 지어내는 인연을 좇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그 분별심을 하나만 내려놓으면 우리는 본래 아무런 일 없는 평화로운 존재인 것을, 오히려 그 허망한 마음을 좇아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가운데 보다 충만하고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만 하니,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격이요, 자기 집 안에 있으면서 자기 집을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뿐이니,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분별심을 내려놓고 완전한 무분별(無分別)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즉 매 순간의 지금으로 돌아와 보면, 여기서 또 한 번의 비약이 일어나는데, 무분별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온갖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다시 일체를 분별하며 살아가지만, 또한 분명히 분별심을 내려놓았기에 그 모든 분별에도 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불가에서는 불이비일(不二非一,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이라고도 한다. 승찬 스님도 "빈 곳에 머물러 있지 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온갖 것을 분별하면서도 분별하지 않고 또한 분별하지 않으면서도 일체를 분별하는 이 이치는 알지 못한 채, 단지 분별이 없는 빈 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이다.



분별에서 무분별로

저항을 그치는 순간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 경유능경(境由能境) 능유경능(能由境能)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故有無相生 難而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지만 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알지만 이는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하기에 없다는 것이 생기고

어렵다고 하기에 쉽다는 것이 이루어지며

길다고 하기에 짧다는 상대도 만들어진다

높다와 낮다도 서로 가능하게 해 주고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이라고 하기에 뒤라는 것도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객관이라고 하기에 주관이라는 것이 생기고 주관이라고 하기에 객관이라는 것도 있게 되지만, 사실은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두 끝을 알고자 하는가? 원래 하나의 공(空)이다 – 욕지양단(欲知兩段) 원시일공(元是一空)

두 끝이란 주관과 객관,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앞과 뒤, 앎과 모름, 옳음과 그름, 좋은 것과 나쁜 것, 이것과 저것 등과 같이 둘로 분별된 개념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모두가 하나의 공(空), 즉 인연 따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어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 실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즉시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삶의 신기루와 같은 두 끝에 마음이 더 이상 꺼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실상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일체가 모두 공할 뿐임을 깨달아 수많은 두 끝 속에서도 조금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어느 순간 누구에게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마음의 질적인 변화, 즉 가려서 택하는 이원의 분별심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현존, 즉 지금 있는 것에 대한 저항을 그치는 순간에 기적처럼 일어난다.


지금 있는 것 – 고아이든 불면이든 불안이든 그밖에 무엇이든 – 이 바로 도요 진리요 자유인데, 우리 눈에는 그것이 구속이요 고통이요 힘겨움으로만 보이기에 끊임없이 거기에 저항하는 가운데 지금 없는 것을 바라고 원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괴로움만 더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그 저항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속이니, 더욱더 힘을 내가면서까지 우리는 도를 버리고 도를 구하며 자유를 내팽개치고 자유를 찾아다니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있는 것이 바로 공(空 )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저항이라는 힘을 우리가 가하는 순간 그것은 꼭 그만큼의 힘을 얻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색(色)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오직 저항을 그칠 때, 색이 곧 공인 실상을 깨닫게 되어 스스로 묶이고 괴로워했던 마음의 모든 짐을 온전히 내려놓게 된다. 그렇게 저항을 그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의 공이 두 끝과 같으니 삼라만상을 다 머금는다 –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空)이다. 이 공이 우리 안팎의 삼라만상을 다 머금는다. 그래서 일체개공(일체개공)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모든 것은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만 집착을 내려놓고 매 순간 지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경험하고, 사랑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을 조금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그것이다.



내 안을 직시하는 힘

잠시 발걸음을 멈출 때

본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니 한가하고 번뇌가 끊어진다 –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본성에 맡긴다는 것은 곧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맡겨야 할 본성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우울할 땐 나를 온전히 우울에 맡겨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요, 불안할 땐 그냥 그 불안 속에 있을 뿐 그것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이며, 슬플 땐 그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여 마음껏 슬퍼하고, 누군가가 밉거나 화가 날 땐 그 소중한 감정을 백 퍼센트 내 안에서 허용해 주는 것이다. 기쁘고 즐거울 댄 다만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 그것을 유지하려 하거나 쌓아 두려 하지 않고, 외롭거나 공허하다고 생각될 땐 그것을 달래거나 벗어나거나 다른 감정으로 바꾸려는 일체의 몸짓을 정지하고 다만 그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며, 쩔쩔매며 안절부절못하는 순간이 오면 오히려 마음을 돌이켜 그 힘겨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렇듯 지금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하거나 저항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만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본성에 맡기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도에 합하는 길이다. 도란 바로 매 순간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렇게 본성에 맡겨 보면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희열이, 쉼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기쁨 같은 것이, 이제 비로소 힘겨운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우리의 영혼을 조금씩 적셔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그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했을 뿐인데, 마음은 한가해지고 번뇌는 저절로 끊어지는 신비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도를 깨닫기란 얼마나 쉬운가!


무언가 더하려고 했기에

생각에 매달리면 참됨과 어긋나 어두움에 빠져 좋지 않다 – 계념괴진(繫念乖眞) 혼침불호(昏沈不好)

생각으로는 결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언제나 이원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매 순간의 지금에 대해 항상 옳으니 그르니, 있다느니 없다느니, 깨끗하다느니 더럽다느니, 부족하다느니 완전하다느니 끊임없이 헤아리고 분별할 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모른다. 그런데 실상은 그런 헤아림과 가려서 택하는 노력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드러나는 것이기에, 생각에 매달리면 참됨과 어긋나 어둠에 빠져 좋지 않다.


참 다행스럽고도 안심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 속에서 길을 잃는 순간에도 실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실상인 매 순간의 지금 속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만 그 헤아림만 그치면, 가려서 택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우리는 곧 실상이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확연히 알게 될 것이다.


 

나로서 살아가는 행복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지혜로운 사람은 일부러 하는 일이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를 얽어맨다 – 지자무위(智者無爲) 우인자박(愚人自縛)

지혜로운 사람이란 한 수레를 얻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그는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 일부러 하는 일이 없다. 백장 스님처럼 슬프면 울고 우스우면 웃고, 배고프면 밥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다. 즐거울 땐 즐거워하고 우울할 땐 우울해하고, 재미있을 땐 재미있어하다가도 심심할 땐 그냥 좀 심심해한다. 혼란스럽고 답답할 땐 그 혼란과 답답함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 가만히 있어 볼 뿐 그것을 못 견뎌 하며 벗어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강할 땐 강하고 약할 땐 약하고, 따뜻할 땐 따뜻하고 차가울 땐 차갑고, 사랑할 땐 한없이 사랑하지만 누군가가 미울 땐 그냥 미워할 뿐 그 마음을 용서나 사랑으로 바꾸려 애쓰지 않고, 넉넉할 땐 넉넉하고 초라할 땐 초라하고 편안할 땐 편안해하지만 불편할 땐 또 좀 불편해하고, 당당할 땐 당당하고 경직될 땐 경직되고, 분명할 땐 분명하고 모호할 땐 모호하고…….


그렇듯 그는 일부러 하는 일 없이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인데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참된 평화와 고요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쉽고 가볍겠는가! 우리 안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온갖 다양한 것들을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험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풍요롭겠는가!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얽어맨다.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려 애쓰고, 약함을 강함으로 고치려 노력하고, 게으름을 성실로 변화시키려 다짐하고, 미움을 용서나 사랑으로 바꾸려고 몸부림치고, 내면의 혼란과 답답함을 얼른 정리하려 안달한다. 외로움을 달래려 어딘가로 달려가고, 들끓는 잡생각과 망상을 고요하게 하려 수행하고, 초라함을 채워서 충만하게 하려 하고, 불편함을 못 견뎌 하며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편안한 존재가 되려 노력하고, 번뇌를 못 견뎌 하며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 하고…….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다만 메마르기만 할 뿐 진정한 평화와 고요와 자유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고 고치고 바꾸려 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이것 속에 그가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넘치도록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자신을 영원토록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줄 보물들을 스스로 버리고 떠났으니 그 마음이 몹시도 가난하고 메마르게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본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여우 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올바른 믿음이 알맞고 바르게 된다 – 호의진정(狐疑盡淨) 정신조직(正信調直)

과연 지금 이것이 전부일까? 똥 누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이 하찮은 일상이 어떻게 불법(佛法)일 수 있는가? 늘 흔들리는 내 마음이 있을 뿐인데 그 마음과 계합할 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얻게 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우울해하고 긴장하며 또 죽 끓듯 하는 잡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지금 이대로가 어떻게 완전한 자유이며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이상의 것을 찾고 구하는 마음이 바로 여우 같은 의심이다. 이 마음을 달리 말해 분별심(分別心)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는 늘 그렇듯 늘 지금을 믿지 못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인해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여우 같이 의심하는 그 마음 하나가 깨끗이 사라질 때 우리 안에는 비로소 올바른 믿음이 알맞고 바르게 된다. 동시에 우리 안팎의 모든 삶이 완전히 소생(蘇生)하게 되어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온 세상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근본으로 돌아온다 – 시방지자(十方智者) 개입차종(皆入此宗)

온 세상의 모든 지혜로운 이들이 돌아오는 근본의 자리란 바로 매 순간의 지금이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미 그 자리에 도달해 있지 않은가? 매 순간의 현재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지금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더 찾고 무엇을 더 구해야 하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다만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될 뿐!


지공화상은 『대승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몽시몽중조작 각시각경도무

夢時夢中造作 覺時覺境都無

번사각시여몽 전도이견불수

翻思覺時與夢 顚倒二見不殊

득리반관어행 시지왕용공부

得理返觀於行 始知枉用工夫

단무일체희구 번뇌자연소락

但無一切希求 煩惱自然消落


꿈꿀 때는 꿈속에서 조작하지만

깨어난 때는 깨어난 표시가 전혀 없다

깨어난 때와 꿈꿀 때를 뒤집어 생각해 보니

뒤집힌 두 견해가 다르지 않구나

이치를 깨닫고 돌이켜 수행을 살펴본다면

공부한다고 헛되이 애쓴 줄 비로소 알리라

다만 아무것도 바라거나 찾지 않으면

번뇌는 저절로 없어지리라


내가 곧 사랑이기에

다만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끝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 단능여시(但能如是) 하려불필(何慮不畢)

진정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미 모든 추구가 끝나 있기에 다만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매 순간 삶을 노래하며 기뻐하며 배우며 성장하며 사랑하며 나누며 감사하며 살아갈 뿐 달리 더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한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오직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인데, 삶의 이런저런 질곡 속에서 괴로워하며 목말라 하다가 문득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나면, 자신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며 사는 일이다. 우리는 오직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의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아, 삶이란 얼마나 단순한가!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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