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스티븐 존슨(역: 강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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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16000
2015�� 06��





■ 책 소개


세상을 바꾼 6가지 혁신!
탁월한 아이디어의 기원을 찾다


인간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혁신’은 무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외려 당시에 존재하던 물건과 개념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때, 혁신은 탄생한다. 이산화규소가 발견되면서 유리가 발명됐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안경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유리 제조에도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다. 또 안경, 즉 렌즈의 발명은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유리, 냉기, 소리, 청결, 시간, 빛이라는 6가지 부문의 혁신을 소개한다. 혁신에 관련된 기술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나서 발전했으며, 우리 사회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추적한다. 각 분야의 혁신에서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부터, 그 아이디어가 어떤 변화를 겪으며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줬는지, 그리고 인간의 삶은 결국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한다.


■ 저자 스티븐 존슨
<뉴스위크>가 선정한 ‘인터넷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50인’에 포함된 과학 저술가. 브라운대학교에서 기호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바탕으로 저널리즘스쿨계의 명문 컬럼비아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그의 저서는 모두 온·오프라인 매체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이머전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대표작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는 아마존 ‘최고의 비즈니스 도서’, 800-CEO-Read가 선정한 ‘최고의 비즈니스 도서’,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올해의 책’으로 뽑히기도 했다.


온라인 매거진 〈피드〉를 창간하고 편집장을 지냈으며 인터넷 포럼 사이트 플라스틱닷컴(Plastic.com)을 개설했다. <와이어드>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온라인 도시지리정보 포털사이트 아웃사이드인(outside.in)을 운영하기도 했다. 과학전문잡지 〈디스커버〉에 ‘최신 기술’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뉴욕타임스〉〈월스트리트〉〈가디언〉〈랑구 아프랑카〉〈하퍼스〉 등을 통해 과학 대중화에 공헌하는 글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공기의 발명』『굿바이 프로이트』『바보상자의 역습』『감염지도』『이머전스』『바이러스 도시』 등이 있다.


■ 역자 강주헌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브장송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등에서 언어학을 강의했으며,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어와 불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유럽사 산책』『문명의 붕괴』『어제까지의 세계 『생각의 해부』『습관의 힘』『인간이란 무엇인가』『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1. 유리 GLASS

이산화규소, 리비아사막의 잿가루에서 스마트폰으로
현대 유리가 탄생하는 순간 | 진정한 과학의 탄생 | 유리로 이뤄진 세상 | 처음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다 | 산 정상의 구름 위에 걸터앉은 타임머신 | 첫 유리 조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2. 냉기 COLD
얼음 혁명, 삶의 지형을 바꾸다
장구한 역사의 유일무이한 돌연변이 | 얼음 위에 세워진 도시 | 말라리아와 전쟁으로 시작된 인공 제빙의 역사 | 직관적 통찰 vs 느린 직감 | 에어컨, 우연한 발명 | 공기의 순환에서 인간의 순환으로 | ‘롱 줌’ 역사로 본 얼음 혁명


3. 소리 SOUND
소리 테크놀로지, 오작동과 예측 불가능성의 세계
최초의 음성 기록 장치, 포노토그라프 | 전화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아이디어 팩토리 | 디지털 세계의 혁명 기념일 | 보이지 않는 공중의 제국 | 라디오, 장벽 없는 자유의 매체 | 테크놀로지의 오작동이 열어젖힌 예술의 세계 | 음파탐지와 초음파, 기술 발전의 빛과 그림자


4. 청결 CLEAN
하수관에서 청정실까지, 양극단을 오가는 청결의 세계
근대 도시의 진정한 연쇄살인범 | 포말 전염설 vs 세균설 | 비키니는 염소처리법 덕분에 등장했다 | 너무 깨끗해서 병에 걸리는 시대 | 청정실과 하수관


5. 시간 TIME
갈릴레오의 제단등에서 스푸트니크 호까지
58년간 숙성된 정확한 시계의 아이디어 | 산업혁명의 도약대, 시간의 규격화 | 정오가 두 번 있던 날 | 수정시계,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에 대한 마지막 치명타 | 손바닥 위, 숨겨진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총합 | 과거를 비추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 | 긴 현재의 시계


6. 빛 LIGHT
새로운 빛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인공조명 때문에 멸종할 뻔한 향유고래 | 사방을 환히 밝힌 동화의 나라 | 전구! 천재의 발명인가, 네트워크화된 혁신의 산물인가 | 사회 개혁의 밀알이 된 섬광 사진술 | 네온광과 포스트모더니즘 | 레이저광선, 소설 속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다 | 레이저, 바코드, 인공 태양


결론_ 시간 여행자들의 역사 | 감사의 말 | 옮긴이의 말 | 주 | 참고문헌 | 이미지 출처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유리 GLASS

이산화규소, 리비아사막의 잿가루에서 스마트폰으로

약 2600만 년 전, 사하라사막의 동쪽 끝에 있는 삭막하고 메마른 리비아사막의 모래밭에서 어떤 현상이 벌어졌다. 이산화규소 알갱이들이 적어도 섭씨 500도를 넘었을 뜨거운 열기에 녹아 합해졌다. 이산화규소는 물처럼 고체 상태에서는 결정체를 형성하고 열을 받으면 녹아 액체가 된다. 그러나 이산화규소는 물보다 융해점이 훨씬 높다. 정확히 말하면, 물의 융해점은 섭씨 0도이지만 이산화규소의 융해점은 섭씨 260도 이상이다.


그러나 이산화규소가 지닌 정말로 특이한 속성은 식을 때 나타난다. 액체 상태의 물은 온도가 다시 떨어지면 얼음 결정체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산화규소는 어떤 까닭인지 결정체로 원상 복구되지 않고, 고체와 액체 사이의 어중간한 상태인 새로운 물질을 형성한다. 엄청난 열에 가열된 그 모래 알갱이들이 융해점 이하에서 식으면, 광활하게 펼쳐진 리비아사막은 요즘 우리가 유리(glass)라 부르는 것들로 뒤덮였다.


수천 년쯤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약 1만 년 전 리비아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은 이런 커다란 유리 조각을 우연히 보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유리 조각은 초기 문명의 시장과 사회에서 유통됐고 결국에는 풍뎅이 모양으로 조각되어 어떤 브로치의 중앙을 차지하는 장식물이 됐다.


유리가 장식물을 넘어 첨단 테크놀로지의 재료로 처음 사용된 것은 로마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로마 시대에 창유리가 처음으로 만들어지면서 요즘 세계 전역에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반짝거리는 유리 고층 건물의 기초를 놓았다.


장인(匠人)들이 이산화규소를 녹여 물잔과 술잔, 창유리를 만드는 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이런 물건들은 오늘날 우리가 유리의 용례에서 본능적으로 연상하는 것들이다. 다음 천년 시대가 되고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몰락한 뒤에야 유리는 지금의 유리, 즉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변화무쌍한 물질이 됐다.


현대 유리가 탄생하는 순간

1204년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인류 역사를 뒤흔든 사건으로, 그 영향이 세계 전역으로 파급됐다. 터키에서 소수의 유리 제조인이 동쪽으로부터 지중해를 건너와 베네치아에 정착해 장사를 시작했다. 그들의 이주는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에서 비롯한 수많은 이주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지만, 수 세기가 지난 뒤에 돌이켜보면 무척 의미가 있는 이주였다. 그들은 유리를 다루는 뛰어난 솜씨로 베네치아 상인들이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며 판매할 만한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유리 제조업은 상당한 돈벌이가 되는 만큼 골칫거리도 있었다. 이산화규소를 녹이려면 섭씨 500도까지 열을 발산하는 용광로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베네치아는 거의 대부분 목조 건물로 이뤄진 도시였다. 따라서 유리 제조인들은 베네치아에 새로운 재원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걸핏하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드는 달갑지 않은 사고를 일으켰다.


1291년, 유리 제조인들의 솜씨를 보존하는 동시에 시민의 안전을 보호할 목적으로 베네치아 정부는 그들을 다시 도시 밖으로 강제로 내보냈다. 다행히 이번에는 베네치아 석호를 1.5킬로미터만 건너면 되는 무라노 섬까지의 짧은 여정이었다. 무라노 섬의 인구 분포 덕분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신속히 섬 주민 모두에게 전해졌다. 14세기 초가 되자 무라노 섬은 유리의 섬으로 알려졌다. 무라노에서 제작된 화려한 꽃병과 아름답고 정교한 유리 제품은 서유럽 전역에서 신분의 상징이 됐다.


무라노의 유리 제조인 안젤로 바로비에(Angelo Barovier)는 온갖 화학 실험을 거듭하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치른 끝에 산화칼륨과 망간이 풍부한 해초를 찾아냈다. 그는 그 해초를 태워 재로 만든 뒤에 녹은 유리에 그 재를 첨가했다. 그렇게 혼합한 물질이 식자 놀랍게도 맑은 유리가 됐다. 석영 중에서도 가장 맑은 수정에 버금가는 투명도에 놀란 바로비에는 그 혼합물을 크리스탈로(cristallo)라 불렀다. 마침내 현대 유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유리로 이뤄진 세상

물리학자 찰스 버넌 보이스(Charles Vernon Boys)는 1887년 물리학 실험의 일환으로, 아주 작은 물리력이 물체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정교한 유리 조각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는 유리에서 가늘게 뽑아낸 섬유를 저울대의 재료로 사용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리에서 얇은 실을 뽑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유리로 얇은 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험실에 특수한 활을 설치하고 그 활에 적합한 가벼운 화살을 제작했다. 우리 막대의 끝에 화살 하나를 봉랍으로 고정한 후 유리에 열을 가했다. 그리고 유리가 흐물흐물해지자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은 표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며, 활에 매달린 녹은 유리로부터 섬유를 뽑아냈다.


유리섬유의 가장 놀라운 속성은 무척 강하다는 것이다. 같은 굵기의 강철 가닥에 버금갈 정도로 강하다. 이제 유리는 강도 때문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쯤, 유리에서 뽑아낸 경이로운 신물질인 유리섬유는 가정용 단열재, 옷, 서핑보드와 호화 요트, 헬멧, 컴퓨터칩을 연결하는 회로판 등 온갖 곳에서 사용되었다.


얄궂게도 이런 응용물들은 빛을 전달하는 이산화규소의 특이한 속성을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유리섬유라는 혁신적인 물질이 탄생하고 수십 년 동안 이처럼 불투명성이 강조된 이유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빛이 창유리나 렌즈를 통과하는 건 당연하고 유익하게 여겼지만, 빛이 머리카락보다 가는 섬유를 굳이 통과하도록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우리가 디지털 정보를 부호화하는 방법으로 빛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유리섬유의 투명성이 다시 장점으로 부각됐다. 1970년, 현대판 무라노 섬이던 코닝 글래스 워크스(Corning Glass Works_현 코닝 주식회사)의 연구원들이 경이로운 유리를 개발해냈다. 얼마나 맑고 투명했던지, 버스 길이에 버금갈 정도로 두껍게 만들더라도 일반적인 창유리를 통해 보는 것만큼이나 투명한 유리였다.


그 후 벨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이 맑은 유리에서 뽑아낸 섬유에, 이진부호의 0과 1에 해당되는 광신호에 변화를 주며 레이저광선을 쐈다. 이처럼 아무런 관련성도 없어 보이는 두 발명품, 즉 빛을 한곳에 모은 레이저와 맑디맑은 유리섬유를 결합한 결과가 결국 광섬유(fiber optics)가 됐다. 오늘날 전 지구를 망라하는 인터넷망은 광섬유 케이블로 연결돼 있다. 대략 10개의 광섬유 케이블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를 오가는 거의 모든 목소리와 데이터를 운반하고 있다. 


휴가를 떠나 멋진 곳을 배경으로 찍은 셀피(selfie_우리나라에서는 셀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인다)를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그 사진은 다른 사람들의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전송된다. 손바닥 크기로 소형화된 디지털 컴퓨터, 인터넷과 웹의 등장,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 접속 등으로 나타난 혁신의 결과를 습관적으로 즐기다 보니 이런 행위가 이제는 우리에게 거의 제2의 천성이 됐다.


하지만 유리가 이런 관계망을 어떻게 떠받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유리 렌즈를 통해 사진을 찍고, 유리섬유로 만들어진 회로판에 그 사진을 저장하며, 광섬유 케이블을 통해 그 사진을 세계 전역으로 전달하고, 역시 유리로 만들어진 화면에 그 사진을 띄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산화규소가 빠지는 데가 없다.



냉기 COLD

얼음혁명, 삶의 지형을 바꾸다

1834년의 초여름, 돛대가 세 개인 범선 마다가스카르 호가 터무니없는 화물을 가득 싣고 리우데자네이루 항구로 들어왔다. 문제의 화물은 꽁꽁 얼어붙은 뉴잉글랜드의 호수에서 잘라낸 얼음이었다. 마다가스카르 호에 실린 화물의 주인은 보스턴의 진취적이고 고집스러운 사업가, 프레더릭 튜더(Frederic Tuder)였다.


북부 기후권에 살던 부유한 가문이 대부분 그랬듯 튜더 가족도 꽁꽁 얼어붙은 호숫물을 덩어리로 잘라내 얼음 창고에 보관했다. 90킬로그램짜리 얼음덩어리는 놀랍게도 무더운 여름이 닥칠 때까지 녹지 않았다. 프레더릭 튜더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커다란 얼음덩어리는 햇살을 피해 보관하면 한여름까지 유지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프레더릭 튜더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북부에서 서인도제도까지 어떻게든 얼음을 운반할 수 있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일부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1805년 11월, 마침내 프레더릭은 둘째 형인 윌리엄과 사촌을 선발대로 마르티니크 섬에 보내면서 수개월 후에 도착할 얼음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얼음덩어리가 다른 모든 사치품을 압도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마르티니크 섬 사람들은 얼음덩어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프레더릭의 형 윌리엄은 얼음의 마법적인 힘에 대한 섬 주민들의 무관심 때문에 얼음을 독점적으로 판매하겠다는 상인을 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얼음이 열대의 뜨거운 열기로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프레더릭은 거의 4,000달러를 손해 보았다고 일기에 썼다.


얼음 위에 세워진 도시

프레더릭이 마르티니크 섬에 얼음을 처음 소개했을 때 맞닥뜨렸던 멍한 눈빛은 더디지만 점차 사라졌고, 얼음에 대한 의존성은 점점 커져갔다. 얼음으로 냉장한 음료수가 미국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생활필수품이 됐다. 1850년쯤에는 프레더릭의 성공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서, 한 해에만 약 10만 톤의 얼음이 보스턴 항구를 출발해 전 세계로 운송됐다. 1860년에는 뉴욕에서만 세 가정 중 두 가정이 매일 얼음을 배달받았다.


얼음을 이용한 냉각은 미국의 지도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시카고만큼 얼음의 혜택을 누린 곳은 없었다. 지형적인 행운도 있었지만 19세기에 벌어진 대대적인 토목공사로 교통 중심지가 된 시카고는 주변의 비옥한 땅에서 수확한 밀을 북동부의 인구 밀집 지역까지 운송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육고기는 부패라는 문제 때문에 운송이 쉽지 않았다.


이런 난관을 해결할 방법을 내놓은 것이 바로 얼음이었다. 1868년, 돈육왕 벤저민 허친슨(Benjamin Hutchinson)이 포장 공장을 세웠다. 허친슨의 포장 공장은 결국 시카고만이 아니라 미국 중부의 자연경관까지 바꿔놓은 혁명의 시작이었다. 1871년의 사카고 대화재가 발생한 지 몇 년 뒤, 많은 사업가가 허친슨의 냉각실에 영향을 받아 얼음으로 냉각하는 시설을 식육 각종 사업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1878년, 구스타부스 프랭클린 스위프트(Gustavus Franklin Swift)는 기술자를 고용해 첨단 냉각차를 만들었다. 냉장차가 냉장선으로 자연스레 발전해서, 시카고의 소고기가 네 대륙으로 수출됐다. 이처럼 소고기 무역이 국경 너머로 확대되면서, 미국 평원 지역의 풍경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철도의 발명과 이리(Erie) 운하의 건설로 시카고라는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게 이 도시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시카고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다. 향신료는 냉장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어디에나 보낼 수 있지만, 소고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얼음이 새로운 유형의 식량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해준 셈이다. 우리는 시카고를 넓은 어깨의 도시(칼 샌드버그가 시카고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옮긴이), 철도 제국의 도시, 도축장의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시카고는 수소의 사면체 결합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에어컨, 우연한 발명

1950년대 미국의 전형적인 가정에서 냉동 관련 최첨단 장치는 냉동 생선살을 보관하거나 마티니에 얹을 얼음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니라 집 전체를 시원하게 해주고 습기를 제거해주는 기계였다. 1902년에 발명된 이처럼 공기를 다루는 장치를 가장 먼저 꿈꾼 사람은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라는 젊은 공학자였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캐리어는 브루클린의 인쇄공장에서 일하며, 수 개월 동안 계속되는 습한 여름에 잉크가 번지는 걸 방지할 방법을 개발하고 있었다. 캐리어의 발명품은 인쇄실의 습기를 제거했을 뿐 아니라 공기까지 시원하게 했다. 캐리어는 모든 직원이 인쇄기 옆에서 점심을 먹으려 하는 것을 보고, 실내 공간의 습기와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년 후에 캐리어는 그런 테크놀로지를 산업용으로 이용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캐리어는 1925년 현충일 주말에 첫 데스트를 시도했다. 이날, 캐리어는 패러마운트 영화사가 맨해튼에 새로 마련한 주력 영화관인 리볼리 극장에서 실험용 공기조절 시스템(air conditioning system, AC)을 선보였다. 그때까지 여름이면 극장은 숨이 막힐 것처럼 후텁지근한 곳이었다. 따라서 맨해튼의 극장들은 19세기에 얼음을 이용한 냉각 방법을 실험적으로 사용했지만, 예상대로 실내가 눅눅해지는 부작용만 가져왔다.


따라서 캐리어는 패러마운트 영화사의 전설적인 창립자인 아돌프 주커(Adolph Zukor)에게 영화관에 중앙냉방장치를 설치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캐리어와 그의 팀원들은 에어컨 시스템을 설치하고 가동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극장을 가득 매운 손님들은 미친 듯이 부채를 부쳐댔다. 훗날 캐리어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무더운 날에 관객들로 신속히 채워진 극장의 온도를 낮추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천천히,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부채가 무릎에 올려지며 에어컨 시스템의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휴게실로 나가 주커 씨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우리를 보고는 그의 의견을 물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간단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군요."



청결 CLEAN

하수관에서 청정실까지, 양극단을 오가는 청결의 세계

근대 도시의 진정한 연쇄살인범

150년 전만 해도 세계 전역의 도시에서 식수는 러시안룰렛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19세기 도시의 연쇄살인범을 생각할 때면 우리는 런던 길거리를 헤집고 다녔던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은 진정한 연쇄살인범은 오염된 물 공급에서 비롯된 질병이었다.


1870년대 초에 시카고의 수돗물은 개수대와 욕조에 죽은 물고기가 둥둥 떠다닐 정도로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시카고의 악몽은 세계 전역에서 재현됐다. 대도시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수도관과 상수도관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미생물의 차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했다. 다시 말해, 미생물에 의해 질병이 발생한다는 세균설(germ theory of disease)을 알아야 했고, 그런 세균이 우리 건강을 해치는 것을 예방하는 법을 알아야 했다.


포말 전염설 vs 세균설

세균설에 의한 의학계의 첫 반응을 살펴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요즘 상식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헝가리 의사 이그나즈 필리프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가 1847년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에게 환자를 진료하기 전에 손을 씻자고 처음 제안했을 때 의료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제멜바이스의 사례는 지난 150년 동안 청결에 대한 우리 생각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걸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청결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기본적인 감수성이 19세기 조상들의 감수성과 상당히 달라진 부분 중 하나다. 유럽에서는 중세시대부터 시작해서 20세기까지, 몸을 물에 담그면 위생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고 심지어 위험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땀구멍을 때와 기름으로 막아야 질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런 편견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개혁가들은 도시 빈민가에 대중목욕탕과 샤워장을 짓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목욕의 장점이 자명하지는 않았다. 사회 개혁이라는 수단과 입소문을 통해 목욕의 장점을 사람들에게 깨우치고 알려야 했다. 물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목욕의 전도사들은 과학과 테크놀로지에서 위생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발전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사회 기반 시설이 갖춰지면서, 사람들은 욕조를 채울 수돗물을 집 안까지 끌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수돗물이 수십 년 전에 비하면 훨씬 더 깨끗했고, 무엇보다 세균설이 주변 이론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으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런 새로운 인식 세계, 즉 세균설은 두 가지 유사한 연구를 통해 완성됐다.


첫째로는 런던에서 전염병의 경로를 추적한 존 스노(John Snow)의 연구가 있었다. 스노는 런던의 소호 지역에 발생한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함으로써, 콜레라의 원인이 오염된 물이지 더러운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입증해낸 의사였다.


당시의 현미경으로는 박테리아를 관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스노는 콜레라의 직접적인 원인인 박테리아를 보지 못했다. 따라서 스노는 그 전염병을 일으킨 유기체를 극미동물(animal-cule)이라 불렀다. 그러나 스노는 사망자의 분포를 분석함으로써 그 유기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포말 전염설을 대신하게 된 현대 세균설, 즉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질병의 원인은 더러운 냄새가 아니라 오염된 물에서 번식하는 보이지 않는 유기체라는 이론은 다시 한 번 유리의 혁신에서 나왔다. 독일의 렌즈 제작사 차이스 옵티컬 웍스(Zeiss Optical Works)는 1890년대 초에 새로운 현미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새 현미경 덕분에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같은 과학자들이 미생물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됐다. 코흐와 그의 숙적이었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세균설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코흐는 박테리아를 찾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정한 양에서 박테리아의 밀도를 측정하는 정교한 도구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코흐는 오염된 물과 투명한 젤라틴을 혼합한 뒤, 그 혼합액을 유리판에 올려놓고 증식하는 세균 집락(集落)을 관찰했다. 그 결과 어떤 양의 물에도 적용할 수 있는 측량 단위를 확립했고, 밀리리터당 세균 집락이 100이하인 물은 마셔도 안전한 물로 여겨졌다.


뭔가를 새롭게 측정하는 법을 찾아내면, 그와 관련된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균 양을 측정할 수 있게 되자 공중위생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현미경과 세균 양 측정법의 개발로 세균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전선이 신속히 형성됐다. 요컨대 세균과 싸우지 않고 새로운 화학물질을 사용해 세균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식수에서 세균을 박멸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뉴저지의 의사 존 릴(John Leal)이었다. 릴은 박테리아를 죽이는 많은 과학적 기법을 실험했는데, 1898년 초부터 하나의 독성 물질이 유난히 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클로르석회로도 알려졌지만 요즘에는 염소로 더 많이 알려진 치명적인 화학물질인 차아염소산칼슘(Calcium hypochlorite)이었다.


이 화학물질은 당시에도 공중위생의 해결책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다. 예컨대 장티푸스나 콜레라가 발생한 지역이나 집은 예외 없이 이 화학물질로 소독했지만, 수인성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는 전혀 없었다. 물에 염소를 섞는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때였다. 게다가 의사나 공중위생 당국자도 대부분 그런 접근법을 반대했다.


그러나 장티푸스와 이질 같은 질병 뒤에 감춰진 병원균을 찾아내고, 물속에 존재하는 병원균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춘 릴은 염소를 적절하게 투입하면 다른 어떤 수단보다 효과적으로 위험한 세균들을 물에서 제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됐다.


마침내 릴은 저지시티 수도 회사에 일자리를 얻어 퍼세이익(Passaic) 강에서 공급받는 70억 갤런의 식수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새로운 일자리는 공중위생의 역사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대담한 실험을 위한 무대를 릴에게 마련해줬다. 정부의 허락도 없이 시민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릴은 비밀리에 염소를 저지시티의 급수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투입되는 클로르석회의 양을 정확히 조절하지 못하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잔류된 염소가 저지시티의 가정에 유입되면, 그것으로 실험은 실패라는 걸 릴은 알고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 도시의 급수장에 대대적으로 염소처리법이 시행된 사례였다. 하지만 소문이 새어나갔다면 릴은 미치광이나 테러리스트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몇 잔의 차아염소산칼슘을 마시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릴은 충분한 실험을 반복한 끝에, 극소량의 화합물은 인체에 해롭지 않지만 많은 형태의 세균에는 치명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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