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탄생

   
케빈 애슈턴(역: 이은경)
ǻ
북라이프
   
16800
2015�� 06��



■ 책 소개


케빈 애슈턴이 밝히는 창조의 연금술
‘창조성’의 비밀을 밝힌 가장 위험하며 혁신적인 책!


‘사물 인터넷’을 창시한 IT 분야의 거장 케빈 애슈턴의 첫 대중 교양서로, ‘창조’ 및 ‘창조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어째서 사물 인터넷이 아닌 그 실체도 모호한 창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저자는 세상을 바꾼 ‘멋진 결과물’ 그 자체보다 혁신적이라고 불리는 그 기술을 선보이기까지 겪었던 그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새로움’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 창조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결과에 도달하는가? 그들은 정말 타고난 천재였을까? 이 책은 신화적인 인물들과 그들의 창조, 발명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들려준다.


모차르트에서 우디 앨런, 아르키메데스부터 스티브 잡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부터 코카콜라에 이르기까지 고대와 중세, 현대를 넘나들며 예술, 과학, 철학, 기술, 산업 분야를 망라하여 창조성을 빛낸 인물들의 빛나는 사유와 위대한 발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 저자 케빈 애슈턴
기술 혁신가 겸 기업가.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개념을 창시한 관련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다.


런던 대학교 졸업 후 프록터 앤드 갬블(P&G)의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던 당시 선구적인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전파식별) 네트워크 개발을 이끌었고 ‘향후에는 RFID와 기타 센서를 일상생활에서 쓰는 사물에 결합한 사물 인터넷이 구축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처음으로 ‘사물 인터넷’이라는 개념과 용어를 창안했다.


1999년 이 사물 인터넷 시스템을 실현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산제이 사르마, 데이비드 프록, 서니 시우와 함께 오토-아이디 연구소(Auto-ID Center)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가장 혁신적인 MIT 미디어랩’으로 꼽히며 다수의 국제 단체와 연구를 진행했고 10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을 스폰서로 유치했다. 연구소 소장을 퇴임한 후에는 기업가로 변신, 미국의 RFID 개발업체 씽매직(ThingMagic)의 부사장, 세계 최대의 에너지 수요관리 전문업체인 에너낙(EnerNOC)의 부사장을 거쳐 2009년 에너지센싱 기업 젠시(Zensi)를 창립했다. 젠시가 미국의 IT 업체 벨킨(Belkin)에 인수되면서 현재는 벨킨의 청정기술 사업부문의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벨킨에서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가전제품을 원격 제어할 수 있는 홈 오토메이션 플랫폼인 ‘위모’(WeMo)를 개발했으며 청정기술의 핵심 시스템인 스마트에너지 그리드(Smart Energy Grids)와 선진 계량(Metering)에 동력을 제공하는 센서 기반 기술을 개척하기도 했다.


최신 IT 트렌드와 경영혁신 전략에 대한 그의 글은 《뉴욕 타임스》, 《애틀랜틱》, 《쿼츠》, 《미디엄》 등에 실렸으며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IT 및 혁신기술 등을 주제로 한 정보기술 컨퍼런스에 기조 연설자로 서고 있다.


■ 역자 이은경
연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영문 에디터로 근무하며 바른번역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바른번역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나와 마주서는 용기』『누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가』『스노든의 위험한 폭로』『적응력이 실력이다』『거대권력의 종말』『리버스 이노베이션』『값싼 중국의 종말』『보수는 어떻게 국민을 속이는가』『미국쇠망론』(공역) 등이 있다.


■ 차례
서문_‘천재적 재능’에 관한 신화


제1장 창조에 마법의 순간은 없다
에드몽의 손짓 | 평범한 창조자는 존재하는가 | 창조는 모든 인류의 공통 언어 | 창조, 특별한 종류의 문제 해결 활동 | 높은 IQ는 창조의 전제조건인가 | 창조는 평범한 행동에서 비롯된다


제2장 생각은 걸음과 같다
카를 던커의 행적: 베를린에서 미국으로 | 관찰과 추론, 우리를 창조로 이끄는 것들 | 단계를 거치면 창조에 이를 수 있다 | ‘유레카’ 역시 평범한 사고일 뿐 | ‘왜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까?’와 스티브 잡스 | 브레인스토밍은 과연 파격적인 방법인가 | 말이 하늘을 날게 만드는 법 | 칸딘스키의 스물한 단계 여정


제3장 역경을 예상하라
혁신은 반복되는 실패의 결과 | 끈기는 모든 것을 진보로 바꾼다 | 거절이 당신을 창조로 이끈다 | ‘현상 유지’라는 거대한 벽에 맞서는 법 | 창조자를 유혹하는 쥐덫을 피하라 | 가치를 지니는 거부 | 우리는 익숙함을 선호한다 | 거부의 본질 | 창조의 역경에 제대로 대응하는 법


제4장 창조의 본질은 ‘주목하는 눈’이다
없던 것인가, 못 본 것인가? | 눈과 인식 사이의 거리 | 선택적 주의의 함정 | 예상치 못한 것을 보려면 아무것도 예상하지 마라 | 패러다임의 전복 | 전문지식의 마지막 단계는 초심으로 가는 첫 단계 | 확신을 적으로 만들고 의심과 친구가 되라


제5장 모두가 인정받지는 못한다
로잘린드 프랭클린: 생명의 비밀을 밝힌 여성 과학자 | 도둑맞은 노벨상 | 연구를 빼앗긴 여성 과학자들 | 해리엇 효과: 가장 유명한 사람이 더 많이 인정받는다 | 거인의 어깨는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탑 |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올라선 어깨의 목록


제6장 연쇄의 미학
새로운 도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 툴 체인: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 | 문제는 해결로, 다시 문제로 이어진다 | 새로움은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 도구의 연쇄는 결과의 연쇄를 낳는다


제7장 당신을 창조로 움직이게 하는 것
보상은 창조성을 흐린다 | 보상은 과연 성과를 촉진하는가? | 악마는 게으름 속에 있다 | 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 열정의 두 얼굴 | 중독의 다른 말은 열정 | 공백을 깨트리는 법 | 열정을 에너지로 만들라


제8장 창조적인 조직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창조적인 팀은 어떻게 일할까? | 증명해봐 | 진실을 말하는 자는 환영받지 못한다 | 빠르게, 조용하게, 제 시간에 | 파트너십: 《세서미 스트리트》의 비밀 | 창조적 파트너십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 사회적 기술과 반사회적 행동 | 추측을 저지하고 행동을 개시하라 | 상호작용 의례 | 실행하는 조직은 무엇이 다른가


제9장 창조는 우리의 본성이다
굿바이, 천재 | 창조의 어머니는 바로 당신 자신


감사의 말

참고문헌


 




창조의 탄생


창조에 마법의 순간은 없다

평범한 창조자는 존재하는가

르네상스 시대 이전에는 저작권이나 발명권 같은 개념, 즉 창작권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스승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auctor에서 유래한 저자(author)라는 단어는 15세기 초까지 아버지라는 의미였다. 찾다라는 의미의 invenire에서 유래한 발명가(inventor)는 1550년대까지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라는 뜻이었다.


이는 우리가 1300년대 말 이전에 누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거의 알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모든 것은 인류의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을 지닌다. 문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창조하는 사람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우리가 누가 무엇을 만들었는가와 관련하여 알고 있는 지식은 13세기 중반부터 쌓이기 시작하여 14~17세기까지 이어지는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증가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증가해 왔다.


창조자를 집계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창조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011년에는 나스카(NASCAR, 미국 스톡 자동차 경주 협회에서 주최하는 자동차 경주 대회-옮긴이)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특허를 받았다. 창조는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해당하는 행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발명이 극소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반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창조적일까? 그 답은 의외로 아주 뻔하게도 우리 모두이다. 창조 행위의 결과는 때때로 특별하기도 하지만 창조 행위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창조는 인간 본연의 행위이다. 우리 모두가 창조할 수 있다.


창조, 특별한 종류의 문제 해결 활동

창조 행위는 천재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믿음은 17세기 계몽주의, 18세기 낭만주의, 19세기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는 와중에 계속 이어졌다.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모든 사람이 창조를 할 수 있다는 대안적 입장이 초기 뇌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1940년대에 뇌는 불가사의한 대상이었다. 수백 년에 걸친 의학 발전으로 인체의 비밀들이 밝혀졌지만 움직임이 없이 의식을 생성하는 뇌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는 창조에 관한 이론들이 마법에 의지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창조의 군주인 뇌는 1,360그램의 이해할 수 없는 회색빛 미스터리였다.


서구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원상 복구하던 무렵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는 컴퓨터였다. 이 기계가 등장한 덕분에 비로소 뇌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희망이 생겼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엘렌 뉴웰(Allen Newell)이라는 인물이 이 시기 학문 시대의 산물이다. 그는 물리적 우주에서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가?라는 단일 과학적 의문에 자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뉴웰은 이 작업에 착수하면서 창조 행위에 천재적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1959년에 발표한 <창의적 사고의 과정>(The Processes of Creative Thinking)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창조 작업에 관한 심리학 데이터가 얼마나 적은지 검토한 다음 "창조적 사고는 그저 일종의 특별한 문제 해결 행동일 뿐이다."라는 급진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는 천재와 창조의 끝을 알리는 서두였다. 컴퓨터의 발달은 사고를 연구하는 데 전에 없는 엄밀함을 요구했다. 창조 능력은 점점 더 비범한 능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고 표준적인 지식만으로도 가능한, 즉 인간 뇌에 내재된 선천적 기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뉴웰은 모든 사람이 창조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이 지닌 여타 능력과 마찬가지로 창조 역시 사람마다 그 역량에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누구나 창조할 수 있다. 창조할 수 있는 사람과 창조할 수 없는 사람 사이에 한쪽은 천재, 다른 한쪽은 범인(凡人)과 같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공 지능 분야 학자들의 연구와 더불어 뉴웰의 연구는 창조성 신화를 파헤쳤다. 그 결과 차세대 과학자 일부는 창조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 대학교의 인지심리학과 교수인 로버트 와이스버그(Robert Weisberg)였다.


와이스버그의 관점은 간단하다. 그는 창조적 사고는 문제해결과 동일하다는 뉴웰의 주장에 기반을 두고, 한발 나아가 창조적 사고는 일반적 사고와 동일하나 창조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평범한 사고 그 자체가 대단히 풍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때때로 비범한, 즉 창조적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과정은 필요하지 않다.


창조는 평범한 행동에서 비롯된다

천재 가설을 반박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창조자가 있고 수많은 창조물이 있으며 운명이 미리 결정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창조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해답은 창조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있다. 창조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떤 경로를 따른다. 창조는 목적지이고 그 자체로는 하찮게 보이는 행동들이 축적되었을 때의 결과가 세상을 바꾼다. 창조 행위는 평범한 행동이고 창조물은 그 행위가 내놓는 특별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 행위가 쉽지만은 않다. 마법 같은 순간과 타고난 천재, 이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노동이다. 노동은 창조의 핵심이다. 비결이란 없다. 창조는 곧 노동이다. 이는 그처럼 단순하고 또 힘들다. 천재적 재능이나 통찰 없이 창조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창조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창조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핑계는 수도 없이 많다. 그중 창조는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창조는 쉽지 않다. 이는 노동이다.


우리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지만 이는 지금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특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창조성 신화는 비범한 인물이 비범한 행동을 통해 비범한 결과를 낸다는 주장 혹은 편견을 설명하려는 데서 기인한 실수, 창조가 평범한 사람과 평범한 노동에서 비롯된다는 진실에 대한 오해이다. 특별함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역경을 예상하라

거절이 당신을 창조로 이끈다

한번은 헝가리의 한 심리학 교수가 유명한 창조자들에게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책을 위한 인터뷰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요청을 거절할 것인가였다. 그 교수는 창조적인 인물 275명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중 3분의 1은 거절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였다. 3분의 1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거절조차 하지 않은 이유 또한 시간이 없고 아마 비서도 없기 때문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시간은 창조를 이룩하는 원료이다. 창조와 관련된 마법과 신화를 모두 지우고 나면 노동만이 남는다. 연구와 연습을 통해 전문가가 되는 노동, 문제를 푸는 해결책과 그 해결책의 문제를 찾는 노동, 시도하고 착오를 겪는 노동, 생각하고 완성해가는 노동, 창조하는 노동이다. 창조 행위는 시간을 소모한다. 창조자들을 연결하는 공통맥락은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이다. 당신이 무엇을 읽든,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든 거의 모든 창조자들은 그들의 시간 거의 전부를 창조를 위한 노동에 사용한다.


거절은 아이디어, 통찰력, 재능을 결합한 것보다 더 큰 창조력을 지닌다. 거절은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인 시간을 보장해준다. 시간의 수학은 단순하다. 생각보다 쓸 수 있는 시간은 적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앞선 헝가리 교수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유명하고 성공한 교수가 정중하게 몸소 편지를 보내 잠깐 시간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중 3분의 2가 거절했고 대부분이 답변을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거절 의사를 보내는 등 대답하는 데 잠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창조자들은 어떤 일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묻지 않고 그 일로 인해 얼마나 창조를 덜 하게 되는지 생각한다. 이를 거절하지 않으면 나는 얼마나 덜 창조하게 될 것인가? 그들은 거절하는 방법을 알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방법을 안다. 거절은 냉담하고 지루하고 무례하고 쌀쌀맞고 이기적이고 비사교적이며 무정하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며 온갖 모욕의 창고이기도하다. 그러나 거절은 우리를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거부의 본질

원론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환영하면서도 실제로는 거부하는 경향은 오류가 아니라 특색이다. 모든 종에는 적소(niche)가 있고 모든 적소에는 위험과 보상이 존재한다. 인류의 적소는 새로움이라는 적소이다. 우리가 얻은 보상은 적응이다. 새것을 원하는 우리의 선천적인 욕구가 하나도 억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멸망했을 것이다. 거부 본능은 몸조심을 하면서도 새것을 만들어야 하는 우리의 문제에 진화가 내놓은 해결책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거부하도록, 혹은 적어도 의심하도록 무장하고 있다. 우리가 익숙한 상황에 있을 때는 새로운 상황에 놓인 경우에 비해 해마(hippocampus)라고 부르는 부위의 세포가 수백 배 빠르게 흥분한다. 뇌가 반응하면 우리도 반응한다. 새로운 대상을 접할 때 해마는 이와 연결되는 기억을 거의 찾지 못한다. 이때 해마는 편도체에 생소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그 결과 우리는 불확실성을 느낀다. 불확실성은 혐오스러운 상태이다. 우리는 피할 수 있다면 이런 상태를 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에 좋지 않은 편견을 지니지만 창조적 아이디어에 대해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에도 직면하기 때문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이렇게 느낀다고 인정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창조력을 발휘하는 행위가 나쁘다는 뜻을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창조를 싫어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진심으로 창조를 좋아한다고도 믿지만 구체적인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시받았을 때 우리는 자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를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새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인간이 타고난 본성이다.


창조의 역경에 제대로 대응하는 법

거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된 반사 작용이다.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든지 우리가 새것을 처음 보았을 때의 반응은 의심, 의혹, 공포이다. 이는 올바른 반응이다. 창조자들은 거부를 예상해야 한다. 가장 좋은 형태일 때 거부는 정보가 된다. 거부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준다. 거부는 핍박이 아니다. 거부에서 독성을 빼내고 나면 남는 부분은 유용할 수도 있다.


창조물은 창조자가 아니다. 위대한 창조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자기가 만든 발명품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창조물은 바뀔 수 있다. 문제-해결 고리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실패는 남이 없는 곳에서 했을 때 가장 좋은 일종의 거부이다. 가장 위대한 창조자들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가 한 일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유심히 살피며 더 정확한 기준과 비교하여 시험한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 대부분을 그 일부든 전체든 다른 사람들이 거부하기 전에 이미 수차례 거부한다.


세상은 이미 당신을 거부하고자 한다. 필요 이상으로 그럴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말라. 남이 없는 곳에서 할 수 있었을 실패라면 절대 공공연한 곳에서 하지 말라. 남이 모르는 실패는 회복하는 데 더 빠르고 더 저렴하며 덜 고통스럽다.


우리 본능은 우리를 돕지 않는다. 자존심과 그 반대인 수치심은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고 거부에 발끈하게 만든다. 우리의 자아는 거부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천재, 깨달음의 순간, 여러 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창조성 신화는 노력 없이 이기고, 땀 흘리지 않으면서 얻고,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 안의 일부분에 호소한다. 이 모든 일은 불가능하다.


위대한 창조자들은 가장 훌륭한 전진이란 면밀히 조사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잘못과 오류를 발견하고, 도전하고 변화하기 위한 일보 후퇴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안다. 거부는 교육한다. 실패는 가르친다. 둘 모두 아픔을 준다. 거부와 실패는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다.


우리가 창조자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우리가 얼마나 지적인지, 얼마나 재능을 갖췄는지, 혹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가 아니라 창조의 역경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세상을 바꾸기가 왜 그렇게 어려울까? 세상이 변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의 본질은 주목하는 눈이다

예상치 못한 것을 보려면 아무것도 예상하지 마라

초심은 초심자의 마음이 아니라 대가의 마음이다. 이는 전문지식이 야기하는 선택과 맹시 너머까지 미치는 주의, 아무것도 추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식하는 주의이다. 초심은 신비롭거나 종교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 초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대상을 보는 것이다.


미국에 처음으로 선종을 전파한 승려 중 한 명인 센자키 뇨겐(千崎如幻)은 한 공안(公案, 선종에서 불도의 진리를 깨닫도록 돕기 위해 내는 문제-옮긴이)으로 초심을 설명한다.


일본인 승려 난인이 산에 대해 묻기 위해 찾아온 한 대학 교수를 맞이했다. 난인은 차를 대접했다. 그는 손님의 잔이 가득 차도록 차를 따르고도 계속해서 차를 부었다. 그 교수는 차가 넘치는 광경을 보고 있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말했다. "차가 넘칩니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난인은 "이 잔처럼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의견과 집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 잔을 먼저 비우지 않는다면 제가 어떻게 당신에게 선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물고기 농담을 통해 이와 같은 요점을 말했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함께 헤엄을 치고 있다가 우연히 반대편에서 헤엄쳐 오는 좀 더 나이 많은 물고기를 만난다. 그 물고기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며 "얘들아, 좋은 아침이네. 물은 어때?"라고 말한다. 어린 두 물고기들은 잠시 헤엄을 치다가 결국 그중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건너다보며 "도대체 물이 뭐야?"라고 묻는다.


창조는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문제를 보고 눈에 띄지 않는 대상을 인식하고 무주의 맹시에 숨겨진 부분을 찾는 행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어떤 발견이나 발명이 마치 그동안 내내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명백하게 보인다면 아마도 우리는 옳을 것이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초심이다. 예상치 못한 것을 보고자 한다면 아무것도 예상하지 말자.


전문지식의 마지막 단계는 초심으로 가는 첫 단계

세계를 바꾸기에 충분할 정도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인간의 감각기관이 온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닐 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현재 미국자연사 박물관 소장-옮긴이)은 2006년 솔크연구소에서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눈은 찬양하는 소리가 넘쳐나지만 전자기 스펙트럼 전체 폭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장이나 전리 방사선, 라돈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혹은 메탄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느낄 수 없지만 이를 들이마시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대상을 감지하는 도구를 개발해왔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이나 감지기 혹은 둘 모두를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가 탐지하는 내용과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에 따라 제한을 받는다. 눈과 정신 사이에는 선이 존재한다.


창조는 이 경계를 개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해를 재형성함으로써 우리가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대단하거나 특별할 필요는 없다. 앞서 겉보기에는 일상적인 무엇인가를 소개하기 위해 인용했던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물고기 농담처럼 말이다. 무엇이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는지도 바뀐다.



당신을 창조로 움직이게 하는 것

열정의 두 얼굴

필리핀 군도에서 가장 큰 섬은 루손 섬으로 마닐라에서 중국과 타이완을 향해 날개 모양으로 뻗어 있다. 애빌라오(Abilao)족 혹은 이탤론(Italon)족, 영어권에서는 보통 일롱고트(Ilongot)족이라고 알려진 토착민이다. 일롱고트족은 이웃을 살해해 목을 자르고 그 머리와 때로는 심장과 폐까지도 기념으로 간직하는 머리 사냥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1967년 뉴욕 출신 일류학자 미셸 로살도(Michelle Rosaldo)가 일롱고트족과 생활하러 갔다. 로살도는 그곳에서 인간 본성을 독특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문화를 발견했다. 일롱고트족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은 베야(beya), 즉 지식과 리겟(liget), 즉 열정이라는 두 종류의 심리적 힘이 작용한 결과라고 믿었다. 인생에서 성공은 열정을 지식으로 누그러뜨릴 때 비롯된다. 지식이 동반된 열정은 창조와 사랑을 가져온다. 지식이 없는 열정은 파괴와 증오를 가져온다.


그들은 열정이 타고나는 성질이며 심장 속에 머무른다고 믿었다. 일롱고트족에게 삶의 목적은 자기가 지닌 열정을 공익을 위한 창조에 사용하고 이에 필요한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행한 머리 사냥과 다른 여러 형태의 폭력은 지나친 열정과 부족한 지식이 빚은 결과였다.


열정은 보상이 없는 선택의 가장 극단적인 상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정은 보상 그 자체, 잠을 못 자고 가난해지고 친구를 잃고 피를 흘리고 멍이 들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결과에 신경 쓰지 않는 에너지이다. 이는 새로운 정의가 아니다.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는 고뇌를 의미하는 라틴어 passio에서 유래했다.


1677년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역작 『윤리학』(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에서 열정을 부정적인 상태로 정의했다. "어떤 열정 혹은 감정의 힘은 인간의 나머지 행동 혹은 힘을 압도할 수 있으므로 그 감정은 사람에게 완고히 굳어지게 된다. 스피노자는 열정이 이성의 반대이며 광기를 향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와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열정에 의해 오도될 수 없다. 열정은 우리 영혼에 너무나 가깝고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잠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도 영혼이 정말로 이런 열정을 내부에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슬픔을 느끼거나 다른 어떤 열정에 감동할 수 없다. 즉, 열정은 영혼의 목소리이다.


20세기 들어 긍정적인 관점이 더 인기를 얻기 전까지 열정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의는 대립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열정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 일롱고트족이 그 답을 알려준다. 열정은 에너지이다. 창조로 이어지지 않으면 이는 해를 불러온다.


열정을 에너지로 만들어라

새로움은 다름이고 따라서 다름은 새로움을 만든다.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졌든 산에 의해 만들어졌든 우리 모두는 다르며 그래서 우리가 창조할 때 우리 각각은 이 세상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 안에 존재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가 다른 어떤 아이와도 다르며 나름의 독특한 재능, 성향, 특성,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 지구상의 대기 속에서 숨 쉬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전에 그 누구도 가진 적 없고 이후에 그 누구도 다시 가지지 못할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간직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기 위한 재능이다. 우리가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과학 법칙을 발견하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새로움이 존재한다.


내가 오랫동안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동네에는 빵집이 하나 있다. 자리가 40석 혹은 그보다 적은 아주 작은 가게다. 애니 밀러라는 여성이 2000년에 그 빵집을 열었다. 빵집 내부 장식은 예술미가 넘치고 고상하며 개성이 있다. 아마 당신이 아는 곳에도 애니의 빵집 같은 곳이 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애니처럼 단순한 프랜차이즈나 판에 박힌 듯한 점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움과 독특함을 반영한 옷집, 카페, 꽃집, 식당, 그 외 수많은 지역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조는 우리의 본성이다

굿바이, 천재

대서양에 접한 아프리카 해변을 따라 길이 1,600킬로미터가 넘는 사막이 있다. 그 사막은 나미브 사막이라고 하며 힘바(Himba)라는 부족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1850년에 힘바족은 모래 언덕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흰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의복을 두르고 모래 언덕을 가로질러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마르고 초초해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힘바족 사람들은 그가 계산과 측량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었다. 그는 나중에 힘바족이 관리 받을 필요가 있는 야만족이며 그들의 음식과 소지품은 강탈할 수 있고 우리 앵글로색슨 민족이 견디도록 교육받은 지속적인 노동을 인내하지 못한다고 썼다. 그는 자기가 만난 힘바족을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사람들에 관한 편견을 영국에 퍼트렸다.


1859년 그의 사촌이었던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출판한 이후 골턴은 이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궁극적으로 우생학이라고 부르게 된 선택 번식이라는 발상을 홍보하기 위해 인류를 측정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골턴의 1869년 저서 『유전하는 천재』(Hereditary Genius)에서는 인간의 지능이 곧바로 유전되며 열성 번식에 의해 낮아진다고 주장한다.


골턴은 타고난 우월한 능력을 지닌 천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 자기 자신과 같은 남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한 능력(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을 타고났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아주 확신한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타고난 능력은 열등한 인종에 비해 현대 유럽인들이 평균적으로 훨씬 더 많이 보유한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로 현대 유럽인들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이 능력은 선택 번식을 통해 향상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달리 말해 소를 더 크게 개량할 수 있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 역시 더 우월하게 개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증거도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그는 최고의 흑인은 F등급 소가 될 수 있는 반면 최고의 백인은 X등급 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X등급은 F등급보다 두 등급 더 높고 따라서 백인은 흑인보다 두 등급 더 높다는 의미다.


가설은 불쾌하거나 끔찍하다는 이유로 거짓이 되지 않는다. 천재를 오로지 백인 남성에게만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타고난 특출한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인류의 이익을 위해 백인 남성만이 자녀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골턴의 주장이 틀린 이유는 비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틀렸다. 골턴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는 자기 확신뿐이었다.


모든 증거는 골턴의 주장과 정반대임을 드러낸다. 타고난 능력은 온갖 유형의 사람들 사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성공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인간 DNA 청사진을 밝혔을 때 그녀는 특출한 능력은 인종에 따라 결정된다는 골턴의 가설이 숨을 곳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21세기에 골턴이 정의한 천재가 있을 곳은 없다. 이는 천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천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창조의 어머니는 바로 당신 자신

골턴과 우생학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는 누구나 천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천재라는 단어의 우선적 정의는 고대 로마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정신 혹은 영혼을 의미했다. 이것이 창조적 천재의 참된 의미이다. 인간의 창조 행위는 새에게는 비행과 같다. 창조는 우리의 본성이자 정신이다. 종족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앞에 살았던 2,000세대에 이르는 조상들이 그랬듯이 미래 세대를 위해 새롭고 향상된 예술, 과학, 기술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모두 창조적이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위대한 발명가들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반으로 쌓아올린다. 창조는 공헌이다. 우리가 한 공헌의 무게를 미리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창조를 위한 창조를 하고 우리가 한 창조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치리라 믿으며 가장 위대한 공헌은 가장 기상천외한 결과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창조 행위에서 비롯된 가장 큰 결과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창조의 연쇄에는 수많은 고리가 존재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조한 한 고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창조자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같은 진실을 말한다. 즉, 창조 행위는 특별하지만 창조자는 그저 사람일 뿐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옳은 점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있다. 그리고 진보는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다. 창조의 어머니는 필요가 아니다. 바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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