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철학

   
제럴드 베네딕트(역: 박수철 외)
ǻ
지와사랑
   
12000
2015�� 02��



■ 책 소개

 

나는 누구일까? 우리는 왜 욕망할까?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마음속 의문들에 5분만 투자해보자, 답은 우리 안에 있다!

 

영국의 석학 제럴드 베네딕트 특유의 명쾌하고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총 80가지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 된 이 책은 지식, 자아, 우주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우리의 궁금증에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법한 질문들과, 답할 수 없는 80가지 이야기를 읽어 가면서 독자 스스로가 자신만의 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하루 5분의 시간을 통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최고의 지혜와 최선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마중물로 삼아 답이 있는 곳에 독자들과 함께 가고 싶어 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삶의 큰 화두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자가 설정한 이 책의 방향이자 우리의 목표이다. 하루 5분, 당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왜?”라고 질문해보자! 그 5분이 쌓여 당신의 인생이 확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 저자 제럴드 베네딕트
저자 제럴드 베네딕트Gerald Benedict는 런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제네바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영국의 개방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주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 지금은 프랑스에 살면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종교와 세속의 믿음에 관한 왓킨스 사전The Watkins Dictionary of Religious and Secular Faith』『2012년 마야 예언The Maya Prophecies for 2012』 등이 있다.

 

■ 역자 박수철 외
역자 박수철은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언어의 역사』『노암 촘스키의 미디어컨트롤』『시카고학파』『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역자 정혜정은 성신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통번역자로 활동했다. 현재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이방인은 없다』『당신은 코끼리를 잡을 것인가 개미들과 씨름만 할 것인가』『덕의 기술』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차례
서문

 

1장 지식
지식이란 무엇일까? 알고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까?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리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미래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위대한 지식은 위대한 지혜이기도 할까?

 

2장 자아
나는 누구일까? 전생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 자아란 무엇일까? 나의 자아는 몇 개나 될까? 나는 나를 알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다른 사람과 나는 어떻게 다를까?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일까?

 

3장 우주
우주는 시간 속에서 시작되었을까? 우주는 무한할까?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을까? 지구에 미래가 있을까? 우주의 주인은 누구일까? 우리는 우주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이 우주의 유일한 생명체일까?

 

4장 인간
인간은 또 다른 동물에 불과할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사후에도 삶이 있을까? 삶에 목적이 있을까?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희망은 위험한 망상일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마음이란 무엇일까?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지능은 과대평가된 것일까? 우리는 왜 욕망할까? 과도한 물질주의는 위험할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5장 영성
정신은 무엇일까? 우리는 신의 뜻을 알 수 있을까? 신이 정말 있을까? 신은 인격적 존재일까? 우리는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을까? 신은 자연의 총체일까? 다윈주의는 곧 신의 죽음을 뜻하는 걸까? 우리의 정신도 몸처럼 진화한 걸까? 나에게 영혼이 있을까?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갈까? 영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신이 없다면 뭐가 달라질까?

 

6장 종교
종교는 무엇일까? 종교로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될까? 종교는 다 옳을까? 종교들은 왜 선교에 매달릴까? 사람들은 어쩌다가 근본주의자가 되는 걸까? 구원이란 무엇일까? 악은 정말로 존재할까? 고통은 왜 있는 걸까?

 

7장 신앙
믿음이란 무엇일까? 종교 없이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까? 기도란 뭘까? 신비체험은 어떤 걸까? 깨달음이 뭘까? 환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홀로 하는 영적 수행은 자기탐닉 아닐까? 불가지론은 타당할까? 무신론은 믿지 않을 용기일까? 이성으로만 살 수 있을까? 직관이 논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믿음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을까?

 

8장 행위
도덕률은 필요할까? 절대적인 도덕규범은 과연 있을까? 법은 반드시 종교적 원리에 입각해야 하는 걸까? 법을 어기는 것이 옳을 때도 있을까? 전생의 업이 지금의 행위를 결정할까? 무엇이 본질적인 가치일까?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 있을까? 우리는 항상 진실해야 하는 걸까?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어디까지일까? 누군가 용서가 안 된다면 잘못인 걸까? 우리는 자신을 용서해야 할까? 사랑이 최고의 가치인 이유는 뭘까?

 

감사의 말 더 읽을 책 인명색인 사항색인




5분 철학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냥 죽을 뿐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삶의 종결인 죽음은 죽어 있는 상태이며, 유기체의 살아 있음을 규정하는 생물학적 기능의 중단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은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며, 이에 대한 합의된 사항은 없다. 죽음이 생명 유지의 핵심이 되는 신체기능의 중단이라고 말한다면 핵심이 되는 신체기능은 무엇일까? 보통 생명이 없는 상태는 심장과 뇌가 모두 기능을 멈춘 것을 말하며, 뇌와 심장이 인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나 상태가 개선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삶을 지탱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된다. “뇌사”라는 용어는 1976년 영국에서 회복 가능성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를 구별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뇌사” 판정을 받은 환자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사람일 뿐 죽은 사람은 아니다.


삶의 목적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배우는 일이라고 한다. 우울한 과제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듯 삶을 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종교가 죽음의 지평선을 바라보되 언제 죽게 될까 초조해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자 수사 데이비드 슈타인들-라스트는 “생의 매 순간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려 삶을 보다 충만하게 하라”라고 충고했다.


“죽음은 자유를 향한 여정의 마지막 관문, 마지막 축제다.”

-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삶에 목적이 있을까?

삶의 의미와 목적은 우주의 의미와 목적에 얽혀 있다. 우리는 전체의 일부이며 가없는 은하들과 동일한 물질의 법칙에 매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적도 그 밖의 것과 따로 있을 리 만무하다. 물질계에서 “목적”은 물리학의 원리들, 즉 조화롭게 작동하는 전체의 기능적인 부분이 되는 것이 기준이 된다. 그러한 목적은 자연법칙에서 유출되지만, “목적”이라는 표현은 자연법칙을 드러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인간의 경우 목적은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네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우주 환경을 지배하는 물리학 법칙들이 우리 삶의 변수를 규정하고, 또 유전 코드가 우리의 삶을 한정한다는 것도 염두에 둔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삶이란 우리에게 닥친 사건이다. 요컨대 우리는 삶에 의미가 없는 듯 살아가거나, 삶 속에서 목적을 찾거나 삶에 목적을 부여하거나이다.


“인간의 마음은 유한하다. 하지만 이 유한의 조건에서도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에 에워싸여 있다. 이러한 무한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붙드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


종교에서 말하는 삶의 주된 목적은 신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지만 신과의 합일에 이르는 데는 대개 장벽이 있다. 성서 기반 종교에서는 죄, 동양에서는 무지와 착각이 그것이다. 이런 장벽은 넘어야 할 대상이며, 이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삶을 이끄는 목적이 된다. 삶에 목적을 제공하는 다른 요인들은 많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있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를 묻지 않고 여기에 있는 동안 무엇으로 최선을 다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사는 이유는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여 사는 동안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서 산다. 그런가 하면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재미와 즐거움에 골몰하는 일종의 쾌락주의이다. 우리는 태어나 죽는데, 유대인인의 잠언을 빌리자면 그 사이에 약간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주어진다.


알베르 카뮈는 “삶의 의미를 구한다면 삶은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문제에 골몰하다 답을 그치는 꼴 아닐까? 그러나 사는 이유를 알면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했던 니체의 말은 옳은 것 같다.



우리는 왜 욕망할까?

철학, 사회학, 인류학, 진화론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제각각 설명을 내놓는다. 필요 이상의 물질에 대한 욕망은 어린 시절의 선물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그럴 것이 선물은 “나”에 대한 누군가의 관심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선물이 내 마음에 들수록 기쁨은 커진다. 돈이 생기는 순간 물질을 향한 욕망은 커지고, 우리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의 일개 부품으로 편입되게 된다. 우리는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또 으스대고 과시하려고 물건을 사들인다. 불필요한 구매도 이런 면에서 굉장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


“세상을 꾸미는 아름다운 물건들 사이를 걸어가는 일이 좋다. 그러나 사유 재산이나 개인 소유를 사양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나의 자유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 조지 산타야나(1863∼1952)


욕망의 심층심리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미국의 과학 전문 기자 멜린다 베너 모이어는 “내가 특정 조건에서 취하는 행동이나 나타나는 편향을 스스로 예측할 수 없다. 이런 성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잘 모른다”라고 지적했다. 또래집단이나 사회에서의 위치를 말하는 “지위”에는 차, 집, 옷 등 우리의 소유물도 들어 있다. 우리가 욕망하는 이유는 소유가 주는 자신감에,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든 집착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가치관 혼란에 빠진다. 이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으로 이어지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무엇이 불만을 일으키는지, 왜 실용성을 떠나서 물질을 욕망하는지는 낱낱이 해명되지 않았다. 뉴욕대학교 사회학 교수인 돌턴 콘리는 “무엇이 우리의 욕구를 몰아가는지 사회학자, 진화론적 심리학자, 경제학자들이 온갖 의견을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핵심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채울 수 없는 물욕은 오래된 문제이다. 가톨릭 사제이자 인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말했다. “오늘날 성속을 막론하고 소유욕이 불같이 일어나, 자연조차 이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모은 재산이 도리어 그 주인을 소유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집착… 그보다 자유롭고 고귀한 삶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라고 버트런드 러셀은 말했다.



불가지론은 타당할까?

그리스어의 아그노시스(a-gnosis)에서 유래한 단어 불가지론(agnosticism)은 “지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불가지론이 반드시 의심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지식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가지론은 마음을 열게 하다. 즉, 불확실한 앎에서 확실한 앎으로의 이동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용어는 헉슬리가 1876년 형이상학회의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영성을 지식의 범주에서 제외하면서 “불가지론”이라는 용어를 썼다. 불가지론이 꼭 무신론은 아니지만, 무신론자는 불가지론을 펼 수 있다.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불가지론”은 현재의 지식 상태로는 “알 수 없는”, 그러나 새로운 “증거”나 정보가 나타나면 충분히 바뀔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낼 때 쓰인다. 불가지론은 예를 들어 “내 생각으로”를 단서로 단 주장처럼 불완전하고 잠정적일 수도 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성스러운가?’

달마가 말했다. ‘진리는 공(空)합니다. 전하.’

황제가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했다. ‘모릅니다.’

- 『벽암록(碧巖錄)』(1300년경)


불가지론은 형이상학과 신앙주의를 향한 철학의 도전이다. 그러므로 불가지론의 역사는 헉슬리가 이 말을 쓴 시점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가지론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회의론과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에서 출발한다. “앎은 확실한가”라는 주제는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지식을,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방법을 겨냥한다. 넓게 보면 불가지론은 철저한 종교적 헌신과 모순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추기경과 로마 주교 총대리였으면서도 기독교적 불가지론을 대변했다. 쿠자누스의 사고 원칙 중 하나는 그가 인간 정신이 진리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는 길로 여기고 ‘박식한 무지’를 생각의 기본으로 삼았다. 불가지론적 유대교는 유대교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율법학자 식의 유대교를 실천하지 않는 집단을 말한다. 스티븐 배첼러는 불가지론적 불교를 제안하면서 이렇게 썼다. “심오한 불가지론은 삶이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나는 정말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무지 위에 서 있는 것이리라.”


불가지론은 지식 일반을 의심해보는 “건강한 회의론”과 결부될 때도 있다. 그것은 판단의 유보 상태, 즉 어떤 관념이나 사실의 타당성이 입증되거나 오류가 드러날 때까지 “건전하게” 열린 마음을 견지하는 “관망적” 태도이다. 불가지론은 흥미진진한 관점이다. 불가지론에서 볼 때 종교적 삶은 고정된 관념이나 규율 체계가 아니라 발견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여정을 통해 우리가 발견한 것이 우리가 찾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성으로만 살 수 있을까?

이성에만 의지해 산다면 인생은 지루하고 뻔할 것이다. 이성은 감정, 상상력, 직관, 비합리성 등과 공존하는 정신의 부분으로 이 모든 것이 결합해야 삶은 온전해진다. 비평가이며 작가인 시릴 코놀리의 말처럼 “이성에 근거한 삶은 난폭한 비합리적 감정의 분출로 균형을 찾기 마련이다. 본능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성으로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성이 우리의 정신작용 가운데 최고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 이성과 상충하는 경험까지 끌어안게 하려는 것이다. 이성은 비합리의 영역이 틀리다고 간주한다. 마르틴 루터가 이성을 믿음의 적으로 간주했다면, 벤저민 프랭클린은 “믿음을 통해 보는 것은 이성의 눈을 감는 것”으로 보았다.


이 같은 이성과 믿음 사이의 팽팽한 김장은 선과 악, 영과 육 등 서양문화를 추동해온 “메울 수 없는 심연” 즉, 이원론의 징표를 지니고 있다. 별개의 지각 양식이 상대 영역을 침범할 때 문제가 일어난다. 믿음에 이성의 잣대를 들이댄다거나, 상상력의 영역에 이성을 들여놓는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이성을 예술의 주된 원리로 삼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경험적 이성으로 검증할 때 쓰는 이성(reason)과 원인으로서의 이유(reason)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 가톨릭 신자, 정통 유대교 신자, 사이언톨로지교(론 허버드가 창시한 종교운동, 과학적 정신위생) 신자라면 답을 제공하는 분명한 조직, 권위에 대한 심리적 필요성 때문인지 모른다. 이러한 것이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이유는 되겠지만, 교황의 무오류성, 율법의 불가침성, 론 허버드의 다이어네틱스(dianetics, 해로운 심상을 제거해서 병을 치료하는 심리요법) 따위를 믿는 합리적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이성의 궁극적 기능이다.”

- 블레즈 파스칼(1623∼1662)


마하트마 간디는 이성과 믿음을 갈등관계로 보기보다, 오히려 이성이 믿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시대에 종교 교리가 보편성을 얻으려면 이성과 보편적 정의의 매서운 검증을 받아야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우리 시대에 믿음이 타당성을 갖추려면 이성, 직관, 상상력 같은 정신의 개별 범주에 한정되지 않는 정신 전체이 작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C. S. 루이스는 “이성은 진리의 자연적인 이치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의미를 부여하는 기관이다”라고 했다. 믿음도 이러한 “의미기관”의 하나이다.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믿음도 온전하려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성적 진리와 손잡아야 한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