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

   
알렉스 수정 김 방(역: 이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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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15000
2014�� 10��



책 소개

 

, 방금 나 뭐 하려고 했지?’

산만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당신을 위한 진단과 조언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아 난감할 때가 있다. 이 만성적 산만함은 단순히 내 머리 탓일까?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는 산만함의 원인을 디지털 기기에서 찾는다. 전자 기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림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깜빡임 등으로 우리 마음은 침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충실한 연구 자료와 흥미로운 일화를 가미하여, 디지털 기기 과용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기기의 막무가내식 훼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또한 기술 혐오증이나 신경과학에 쉽게 기대지 않으면서 관조적 컴퓨팅이라는 해법을 조심스러우나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동안에도 명료하고 차분한 생각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고무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저자 알렉스 수정 김 방

퓨처리스트. 지난 20여 년 동안 사람과 기술과 그 기술이 만든 세계를 탐구해왔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과학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을 지냈고, 스탠퍼드대학교와 옥스포드대학교의 객원 연구원, 그리고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싱크탱크인 스트래티직 비즈니스 인사이트Strategic Business Insights의 선임 컨설턴트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American Scientist>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북리뷰Los Angeles Times Book Review>와 그 밖의 여러 학술지에 기고하고 있다.

 

역자 노태복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한 후 뉴욕 <한국일보> 취재부 차장과 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의 양서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공감의 시대》 《2030 에너지전쟁》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시장의 배반》 《갈등의 전략》 《세계 일주의 역사외 다수가 있다.

 

차례

들어가는 말_ 내 안의 두 마리 원숭이


1장 호흡

이메일무호흡증이 말해주는 것 > 도구와 인간의 얽힘 > 우리 몸의 일부가 된 휴대전화 > 기억을 기기에 아웃소싱하는 사람들 >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활동 > 산만함은 호흡으로 드러난다

 

2장 단순화

모자람 > 멀티태스킹의 재정의 > 문제는 스위치태스킹이다 > 젠웨어의 등장 > 집중력을 돕는 프로그램들 > 명경지수와 몰입


3장 명상

가만히 앉아 천천히 숨 쉬기 > 명상이 두뇌 구조를 바꾼다 > 스님에게 물어보세요 > 산만함은 PC가 없어도 존재한다 > 관조적 수행이라는 툴


4장 프로그램으로부터의 탈피

컴퓨터가 우리를 프로그래밍한다 > 가상 세계와 나 > 기술과 사용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 기억과 기록 > 컴퓨터가 사용자의 유형을 결정한다


5장 실험

이메일을 확인하기 전에 > 세심하게 관찰하기 > 행동유도성을 인지하라 > 기술 혁신의 실상 > 깨어 있는 마음으로 트위터하기 > 기술로 마음을 확장시킨다는 것 > 이메일 사용 습관 확인하기

 

6장 초점 재조정

관조적 컴퓨팅의 의미 > 상공에서의 몰입 경험 > 다윈의 생각하는 오솔길 > 걸으면 해결된다 > 관조적 공간 조성의 중요성 > 짧은 휴식의 가치


7장 휴식

끄기 > 디지털 안식일 운동 > 안식일 선언하기 > 능동적 안식일의 권유

 

8장 관조적 컴퓨팅을 위하여

여덟 가지 원칙

 

부록_ 테크 일지 작성법, 마음을 일깨우는 소셜미디어를 위한 규칙, 디지털 안식일을 위한 지침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


내 안의 두 마리 원숭이

원숭이마음

일본의 고도 교토의 서쪽 외곽에 우뚝 서 있는 아라시야마의 능선에는 이와타야마 원숭이공원이 있다. 이 공원의 가장 큰 매력은 그곳에 살고 있는 짧은꼬리원숭이들이다. 이들 중에는 목욕을 즐기고, 눈뭉치도 만들고, 먹이를 씻어 먹고, 물고기를 잘 잡으며 심지어 바닷물을 조미료로 사용하는 녀석들도 있다. 우리 인간만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들 중 일부를 이와타야마 원숭이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와타야마 원숭이들이 인간을 빼닮은 점은 또 있다. 이와타야마 원숭이들은 똑똑하지만 한군데 진득하게 집중하지 못한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재잘대며,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린다. 원숭이들의 행동거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원숭이마음 바로 그대로다. 내가 즐겨 쓰는 은유인 원숭이마음은 절제되지 않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감이 심하다는 뜻이다. 마음이 잠시도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몸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인간은 깨어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의식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차분해진 순간에도 마음은 여기저기를 떠돈다. 전자 기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알림음, 받은 편지함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깜빡임, 음성메일 도착 신호 등으로, 우리 마음은 트리플 에스프레소를 마신 듯 침착할 수가 없다.


이와타야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교토대학교의 로봇 실험실에는 아이도야라는 이름의 붉은털원숭이가 제어하는 로봇이 있다. 그런데 원숭이 아이도야는 일본에 없다. 믿기지 않지만 아이도야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듀크대학교의 신경과학 실험실에서 산다. 아이도야의 두뇌는 인터넷을 통해 교토대학교의 로봇과 연결되어 있다. 이곳의 원숭이는 생각만으로 로봇의 팔을 움직인다. 원숭이의 두뇌는 로봇의 팔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팔로 여긴다. 적어도 두뇌에서만큼은, 원숭이의 팔과 로봇 팔은 같은 신체의 일부가 된다.


아이도야와 이와타야마의 원숭이들은 인간 마음의 두 가지 다른 면, 즉 정보통신기술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 대조적인 면 그리고 두 가지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다를 떠는 보통 원숭이는 훈련이 안 된 반응 심리이고, 자극을 좋아하지만 한 가지 생각을 꾸준히 유지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반면에 사이보그 원숭이는 기술에 제압당하지 않는 마음을 보여준다. 사이보그 원숭이는 의식적인 노력과 주의가 요구될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은 더 이상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조적 컴퓨팅

관조적 컴퓨팅? 언뜻 보면 모순어법처럼 들리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창의력을 발휘하고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정보통신기술을 접하는 것을 말한다. 관조적 컴퓨팅은 새로운 과학과 철학을 결합하고 집중력을 기르고 마음을 관리하는 매우 오래된 방법을 사용하여, 정보통신기술로 얻은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야 제대로 해낼 수 있다. 관조적 컴퓨팅은 여러 기기와 인터넷과의 관계를 사용자에게 유익한 쪽으로 작동하도록 재설정해준다. 관조적 컴퓨팅은 우리가 정보통신기술과 더 건강하고 더 균형 잡힌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하나의 약속이다.



호흡

이메일무호흡증이 말해주는 것

잠깐 책을 덮고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나 랩톱을 들고 이메일을 확인해보라. 아마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일일 것이다. 시계를 쳐다보는 것처럼 몸에 밴 자동적 습관이다. 알림음을 보내는 기기와 이메일 계정이 여러 개라는 것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메일함을 들락거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메일을 확인해보라. 하지만 이번에는 받은편지함에서 기다리는 메시지나 답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신을 잘 살펴보라.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관찰하라. 컴퓨터가 당신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당신이 컴퓨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라.


특히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살펴보라. 숨을 참고 있는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주 작은 습관에 불과하지만 실은 큰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이다. 그 창은 물리적 세계와 실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 실체도 없는 정보 전환이 어떻게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을 갖는지 보여준다. 기술은 확장된 마음과 기억으로 바뀐다. 기술은 그렇게 우리와 얽힌다.


이메일무호흡증은 정보통신기술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중요한 면을 드러낸다. 즉 우리의 몸과 마음과 기술이 어느 정도 얽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람은 기억된 규칙이나 잠재의식에서 인지 기능의 일부를 내면화하고, 다른 기능은 기술에 아웃소싱하거나 기억과 기기를 결합하여 일을 끝낸다.


산만함은 호흡으로 드러난다

과학자들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동안 숨을 더 잘 쉴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요령을 배우기 위해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니마 모라베지가 주도하는 연구팀을 방문했다.


나는 평정의 의미를 물었다. "한마디로 평온한 각성입니다." 모라베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만성적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더 산만해지고 깊이 집중하지 못하여 생산성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산만함은 호흡으로 드러납니다."


호흡의 변화가 꼭 무의식적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라베지는 이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깨달았다.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는 심장박동률이나 혈압과 달리, 호흡은 집중하면 조절할 수 있다. "호흡은 몸과 마음이 만나는 곳입니다. 호흡은 자신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간편한 메커니즘입니다."  모라베지는 이렇게 설명했다.



단순화

모자람

다음에 컴퓨터 앞에 앉으면 두 가지 소프트웨어를 받아보기 바란다. 하나는 프리덤이라는 것인데, 최대 8시간까지 인터넷 접속을 막아주는 프로그램이다. 또 하나는 다크룸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깔끔하고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갖춘 프로그램이다. 이들 프로그램과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쓰기 능력과 집중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당신 자신에 관한 정보도 몇 가지 알게 해준다. 관조적 컴퓨팅에는 실험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것이 확장된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고, 확장된 마음을 발전시키고 창의적이고 집중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술의 용법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집중해야 할 때는 모자람이 풍족함이라는 사실을 프리덤은 보여준다. 라이트룸도 같은 기능을 한다. 워드 같은 프로그램은 더 단순하고 소박한 시스템이 제공하는 계몽적 미스터리를 찾을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헤퍼넌의 말을 빌리면 기술의 부정적인 면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처럼 더 안전하고 더 생산적으로 고안된 기술도 본의 아니게 우리의 능력과 직관을 무디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빠르고 복잡한 소프트웨어 중에서 우리의 삶을 더 낫게 해주는 것을 우리가 직접 찾아내야 한다.


멀티태스킹의 재정의

우리는 멀티태스킹이란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멀티태스킹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생산적이고 두뇌를 적극적이고 두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일하는 사람을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산만하게 하며 기운이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아주 비생산적이다. 우리가 멀티태스킹이라고 말하는 활동은 대부분 두 번째 것이다. 좋은 멀티태스킹은 석기 시대의 멀티태스킹이다. 그것은 사람을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멀티태스킹이다.


여러 가지 기기와 매체를 놓고 주의력을 분산시키며 작업을 하는 멀티태스킹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쓰는 것은 고등학교 동창생과 페이스북으로 채팅을 하고 아이폰으로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브라우저에 웹페이지 두 개를 띄워놓고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것들은 두뇌를 써야 하는 하나의 과제로 귀결되지 않는 독립적인 활동일 뿐이다. 이는 그저 내가 동시에 하려고 하는 다른 것들일 뿐이다.


이런 활동은 정확히 말하자면 스위치태스킹, 즉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이때 뇌는 서로 다른 활동을 토글링하면서 끊임없이 초점의 방향을 바꾸고 한 가지 일을 쪼개고 다른 일을 처리한다.


문제는 스위치태스킹이다

왜 스위치태스킹이 문제인가? 스위치태스킹은 창의력과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비효율적이며, 우리를 자기기만하게 만든다. 두뇌도 그런 일은 쉽게 관리하지 못한다. 컴퓨터에 띄워놓은 창들을 옮겨 다닐 때마다, 또는 이메일을 읽다 화상회의로 눈과 귀를 옮길 때마다 두뇌는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아마 일하다가도 이런 일로 잃어버리는 시간이 꽤 될 것이다. 이런 일은 생산성을 높여야 할 바로 그런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실수도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스위칭태스킹을 할 때에는 창의력도 위축된다. 우리는 멀티태스킹이 아이디어끼리의 특이한 조합을 만들 확률을 높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활동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한 것일 때만 통하는 말이다. 스위치태스킹은 결코 창의력을 높이지 않는다. 스위치태스킹을 하는 동안 두뇌는 기본적인 관리를 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전에 보이지 않았던 연결성이나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영역을 따로 마련하기가 어렵다.


명경지수와 몰입

확장된 마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더 새롭고 보다 세련된 기술이나 오프로딩 임무를 클라우드에 넣는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버릇을 바로 세우고 인지 능력을 확립하여 정신적 역량을 객관화하고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기술을 선택하는 문제다. 자동화된 시스템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의 판단과 그 경험이 위력을 발휘하듯, 우리가 개발하는 정신적 기술은 디지털 기술보다 더 유연하고 임기응변에 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기술 간의 관계다. 중요한 의미에서 관조적 공간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관조를 지원해주는 장소를 설계할 수도 있고 그곳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장소가 정작 효력을 발생하려면 이용하는 사람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그곳을 사용해야 한다. 선원禪院을 만들어 놓아도 그곳에 아무도 없으면, 그것은 선원이 아니다. 다시 말해 관조적 컴퓨팅을 실천할 작정이라면, 관조적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명상

가만히 앉아 천천히 숨 쉬기

명상의 기초를 익힐 수 있는 위파사나 명상법은 명사의 어려움과 미덕을 동시에 알려준다.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종류의 명상을 수행한다. 명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몰아의 경지가 떠오른다. 아무런 상념도 생각도 없는 텅 빈 마음의 경지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도 여러 해 동안 명상을 해오고 있지만, 매번 잡념과 씨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명상을 하다 보면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위파사나 명상법은 정신건강과 관조적 컴퓨팅에 필요한 도구를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명상을 통해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모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우리는 그런 상태를 보통 관조적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을 통해 관조와 각성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이 특별히 좋은 것은 명상을 하면 관조적 현상을 따로 떼어내 그것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상은 훈련이고 공부이자 자아를 관찰하는 일이다.


관조적 수행이라는 틀

인터넷은 문자 발명의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간의 두뇌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꾼 일련의 기술의 현대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절반밖에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절반의 역사와 나란히 달리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관조적 수행을 통해 집중력을 함양하고 고요함을 권하고 주의력을 회복시키는 기술적 변화와 복잡성과 동요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역사다. 세속적인 산만함과 관조적 수행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구체화한다. 혼을 빼놓는 요즘의 산만한 세상에서 고대의 관조적 수행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관조적 수행은 요즘 같은 세상과 우리 같은 마음을 위해 만들어진 툴이다.



프로그램으로부터의 탈피

컴퓨터가 사용자의 유형을 결정한다

지능이 가변적이 아니라 고정적이라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이 우리가 만든 디지털 창작품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미래가 우리의 것이 아닌 기기들의 세상이 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실제로 그런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능력과 컴퓨터의 능력을 빗대고 과거와 미래를 비교하면 씁쓸한 절망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는 업그레이드와 영원한 부적합과 진기함의 홍수, 끊임없는 산만함으로 특징 지워지는 미래의 모습일 뿐이다.


컴퓨터가 우리를 어떻게 프로그램할 것인지를 알게 되면 그런 비교와 절망의 순환 고리를 끊고 컴퓨터를 좀 더 사려 깊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면 인간의 능력과 디지털의 능력을 각 관점에서 따로 평가할 수 있다.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가 상호 보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 자신을 우리의 기기와 비교하는 버릇을 버리고 생물학적인 능력과 인공적인 능력의 장점을 조화시키고, 확장된 마음을 추구하면서도 산만해지지 않는 쪽으로 갈 수 있다. 그런 시도의 핵심은 우리의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우리보다 더 똑똑해진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우리의 기억을 갖고 있는 기계를 바라보며 앞으로는 이런 기계와 함께 살 수밖에 없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실험

이메일을 확인하기 전에

이메일을 열어보자. 망설이지 말고 열어보자. 어차피 곧 열어볼 것 아닌가. 숨 쉬는 것도 잊지 말고. 앞으로 며칠 동안 평소에 하던 대로 온라인에 들어가라. 그러나 자신이 이메일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자.


사소한 관찰과 실험도 이메일 습관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소해 보여도 결과는 대단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확장된 마음을 다시 바로 잡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의 버릇을 관찰하고, 기기를 만지작거리는 습관을 바꾸고, 그런 다음 앞으로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사용할지 신경 써서 선택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실험이 필요하다.


자기실험은 자신뿐 아니라 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여러 가지 환경에서 기술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기술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관찰해야 한다. 따라서 자기실험은 막연했던 신기술의 혜택과 대가를 찾아내고, 그 기술이 우리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고, 우리가 개발하려는 매우 소중한 기술을 예기치 않게 찾아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기술 혁신의 실상

기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좀 더 생태적인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기기나 미디어는 특정 과제를 쉽고 빨리 처리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런 특성이 오히려 우리의 일과 생활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


기술은 상황 속에서 작동하고 종종 더 큰 기술이나 생산체계의 일부가 된다. 그 결과 하나의 체계에서 어느 일부를 향상시키는 행위는 다른 부분에 영향을 주는데, 때로는 그 영향이 부정적인 경우도 있다. 일반 브레이크보다 안전 기능이 훨씬 뛰어난 브레이크잠김방지장치를 장착한 운전자는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예전처럼 조심을 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과속을 일삼으면서도 브레이크가 사고를 방지해주리라 믿는다. 미식축구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수십 년 사이에 보호대와 헬멧은 더욱 정교해지고 튼튼해졌지만 부상률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선수들이 그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경기 분위기도 더욱 격해졌지 때문이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트위터하기

진지한 일을 하다 잠깐 쉴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마음을 거의 챙기지 않을 때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연다. 트위터와 소셜미디어에 참여할 때 내 인격의 어둡고 불쾌한 면을 드러내지 않고 온라인에서든 실생활에서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할 수 있을까?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사용하면서 관조적이 될 수 있을까?


깨어 있는 마음으로 트위터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도를 분명히 안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왜 온라인에 있는지 알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뭔가를 읽고 비꼬는 댓글을 달거나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면 잠깐 멈추고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텍스트를 처리하거나 사람들과 상호교류를 할 때에도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술과 언어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진짜 사람이 쓴 것들을 읽고 팔로잉하고 리트윗한다. 기술 매체를 통해 교류한다고 해서 그들의 인간성을 못 보는 것은 아니겠지만 관계의 양이 아니라 질에 주의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디지털 상가에서는 생활이 우선이고 트위터는 나중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리 신기하고 재미있다 하더라도 일일이 실황중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생활 속의 일화에서 하나를 차분히 다듬어냄으로써 나타낼 수 있는 기쁨과 통찰력이 있다. 그렇게 사건과 거리를 유지하게 되면 그 사건에 명료함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당장은 재앙인 것처럼 보이는 일도 멋진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반면에, 승리는 나중에 패배의 빌미가 될 수 있다. 그것을 설명의 나열에 그치고 만다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써야 할 것을 경험하고 쓸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그것을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 빨리 쓰고 많이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수명이 짧은 소셜미디어의 무상함을 알게 되면 그것을 계속 따라가려는 노력을 포기하기가 쉬워진다. 내가 쓰는 것 대부분이 언젠가는 접속할 수 없게 되고 또 나 자신의 생각도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결함이 아니다. 마거릿 만토-라오는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의 개인적인 견해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판은 어쨌든 재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평판에 집착하고 평판을 지키려는 것, 그건 더 재미없습니다." 낡은 생각이 사라지면 새롭고 더 좋은 생각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이메일 사용 습관 확인하기

지금은 나도 메일을 확인할 때 화면을 그 자리에서 계속 쳐다보지 않는다.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거나 아이폰을 내려놓거나 랩톱 화면에서 고개를 돌리고, 이메일이 배경에서 작동하는 동안 다른 어떤 일에 집중한다. 이메일이 접속되는 과정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해서 더 빨리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인터넷에 휘둘리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에 집중하겠다는 소박한 선언이다. 그것은 내 일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궁극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생각해보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는 툴을 바꾸는 것, 이것이 확장된 마음을 향상시키고 현실에 더욱 충실한 사람이 되고, 확장된 마음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장인이 되는 길이다. 올바른 기술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면 도움이 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깨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로그를 하는 수도승들은 우리에게 모든 기기가 늘 켜진 세상에서도 배우고 다듬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관조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또한 이메일 알림음, 팝업, 텔레마케터, 그리고 고양이 동영상, 엘리자베스 여왕 같이 차려입은 개의 동영상 링크 등을 지워버린다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집중력은 뚜껑을 열면 용수철이 튀어나오는 장난감 상자처럼 다른 자잘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을 때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집중력은 분명한 목적으로 좁혀놓은 세상의 한구석에 적극성을 가지고 기술적으로 몰두하는 것이다. 설계는 기술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도록 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하게 방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술을 사용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다.



초점 재조정

걸으면 해결된다

산책은 생각을 자극한다. 산책은 저술, 작곡, 복잡한 계산 등 집중력을 요하는 고된 작업에 잠깐 휴식을 주지만, 마음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그것은 몸과 마음과 세계가 하나로 조율되는 상태다. 몸은 움직이고 눈은 신기하거나 낯익은 광경에 가 닿고,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까다로운 문제나 완고한 표현에 초점을 맞춘다.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와 씨름하다 늘 다니는 익숙한 오솔길을 걸을 때, 오솔길은 산책하는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들어온다. 그러나 길이 마음 전체를 빼앗는 법은 없다. 길은 단지 산책자의 잠재의식이 딜레마를 다루고 해법을 시험하고 궁지를 벗어나게 해줄 정도의 자극만 제공한다.


관조적 공간 조성의 중요성

관조적 공간은 일부러 단순하게 조성한다. 그렇데 조성된 공간은 기본적인 설계기법과 색상과 반복기법을 사용하는 반면, 공원이나 정원은 시선을 끌기 위해 필요한 장소에 의도적으로 화초나 나무를 사용한다. 소리를 차단하고 음영과 그림자를 만들면 시각적 청각적 충격을 줄이고 찾는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집중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단순하다는 것이 반드시 삭막하다거나 공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은자의 방에도 창문과 족자나 십자가 정도는 있는 편이다. 관조적 단순성은 박물관의 단순성과 비슷한 점이 많다 박물관의 공간은 몇 가지 대상에 초점이 맞춰지도록 단순화된다.


관조적 공간은 또 다른 특징은 대조법이다. 작은 수도원의 정원은 산으로 그늘이 드리우고, 돌길은 물가로 이어진다. 좁고 컴컴한 통로는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광장을 향해 열려 있고, 사원의 스카이라인은 하늘과 맞닿는다. 이 모든 것은 소우주와 대우주를 한 자리에 모아 움츠러드는 어둠과 팽창하는 빛 또는 인간과 자연 같은 요소들을 대비시킨다. 자연적인 공간과 조성된 공간을 대비시키거나,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또는 어둠에서 빛으로 방문자를 이동시킬 때 관람은 하나의 작은 순례행위로 바뀐다.


관조적인 장소는 그곳이 더 큰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거나 우리 삶의 일부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멀리 벗어났다는 느낌을 제공할 때가 많다고 크링키는 말한다. 수천 년 전에 신성한 장소를 찾아 동굴로 들어갔던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비한 기운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 장소와 자신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심의 공원은 그곳을 찾는 사람의 평범한 생활과 물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뭔가 색다른 분위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회복 효과를 발휘한다.


짧은 휴식의 가치

우리는 휴식과 안정을 스위치를 끄는 행위로 생각한다. 우리에겐 일하거나 일하지 않는 것 두 가지밖에 없다. 추진력이나 경쟁심이 남다른 알파형 인간에게 휴식은 인간이라는 운영체제에 끼어든 애석한 결함이다. 그러나 회복 경험은 마음의 스위치를 끄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회복 경험은 일을 열심히 하려는 창조적인 마음 때문에 어수선해지지 않는다. 회복 경험은 조용하면서도 소중한 또 하나의 상태를 만들어내고, 창조적인 마음은 그곳에서 일을 계속하면서 이전과는 조금 다른 좀 덜 지향적인 방법으로 일을 한다.


좀 더 차분하고 깊게 성찰하고 생각하는 분위기로 들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상태는 마음먹는다고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명상을 할 때 몸이 차분해지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몇 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 후에야 마음을 비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관조적 상태와 회복 공간을 조성하는 요령도 하루 이틀 사이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항공여행을 몇 해 하고 나서야 비행기 안에서 창의적으로 일하는 요령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원을 완전히 끄는 작업이 아니라 저단 기어로 바꿔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회복 환경 속에 몇 분 동안 깊이 침잠하여, 휴식과 중단을 재충전의 기회로 바꾸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배워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에겐 회복을 설명할 만한 어휘가 빈약하다. 때로 산만함이란 말이 회복과 같은 뜻으로 쓰일 때도 있지만, 여러 친구들과 메시지를 동시에 주고받으며 유튜브에서 포커게임을 하는 강아지 동영상을 보는 것과, 사무실에서 걸려온 긴급한 전화를 처리하고 산책을 계속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회복 활동과 회복 환경은 의식을 차지하되 무의식은 자유롭게 풀어주어 힘들이지 않고 활동하게 놔둔다.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짧은 휴식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늘 가지고 다니는 기기나 와이파이, 화면이 있는 것들, 그리고 산만함을 유발하는 것들을 모두 하루 정도 끄면 된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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