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독자적인 마음치유 체계를 창안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우울증을 탁월하게 치료한다는 평을 받아온 저자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사회치료 처방’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인문이란 무엇인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때로는 차가운 이성으로, 때로는 뜨거운 감정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사회치료 처방전’의 핵심은 ‘원효’다. 현재 인문치료, 철학치료라고 불리는 수많은 상담 혹은 멘토 프로그램에서는 니체, 프로이트, 융, 칸트, 헤겔 등의 서양철학을 바탕으로 문제의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땅의 문제를 ‘이 땅의 인문’인 원효로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원효가 당시 신라 백성의 아픔을 돌보려고 노력했던 사례를 들어 왜 원효가 이 땅의 실천적 인문학자인지를 설명하고, 원효로부터 이어진 고유의 ‘한사상’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가장 필요한 사상체계임을 설파한다.
■ 저자 강용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삶의 주체성에 대한 화두와 맞닥뜨렸다. 고뇌 끝에 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늘의 길에서 오히려 이 땅의 사회·역사 문제에 눈을 떠 자신이 속한 생명공동체의 고유함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유함에 깃든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사십대 중반에 수능시험을 쳐서 한의대에 입학하였다. 한의학을 중심으로 우리의 생태에 맞는 사상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한의사가 된 뒤 만성우울증에 시달려 온 자신의 삶과 그동안 섭렵한 3대 신성 학문을 가로질러 접목시킨 독자적인 마음치유 체계를 정립했다. 원효의 화쟁사상에 터 잡은 그의 상담은 현재 한국 사회 전반을 휘감고 있는 마음병에 탁월한 접근일 수 있다는 것이 저간의 평가다. 아픈 사람의 마음을 일일이 보살피는 것과 불의한 사회를 준열하게 비판하는 것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는 이 땅에 새로운 생명연대를 꿈꾸며 인문한의학의 길닦기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 『안녕, 우울증』 『강쌤의 마음수업』 『송화분-자연치유의 동반자』가 있다.
홀가분한의원이 그의 개인 진료실이다.
■ 차례
마중 말_‘이야기하는’ 한의사 인문을 이야기하다
1장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인가
공포, 탐욕, 무지 증폭구조가 인문학의 위기를 몰고 오다
2장 인문, 인문치료 열풍은 과연 인문적인가
왜, 지금, 하필, 인문치료인가?
인문치료는 과연 치료인가?
무엇이 인문치료인가?
3장 우리의 인문, 원효를 이야기하자
원효를 찾아서
비대칭적 대칭의 진실: 원효 이해의 디딤돌
인문 원효를 말하다
4장 의학에 과연 인문을 어떻게 들여 놓는가
의학은 안녕한가?
무엇이 의학적 인문인가?
{생태(사회)}인문한의학은 어떤 각성을 담는가?
5장 인문한의학적 치료란 무엇인가
원효의 화쟁사상을 치료로 실천하다
배웅 말_‘이야기하는’ 한의사 인문세상 여는 열쇠를 건네다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인가
공포, 탐욕, 무지 증폭구조가 인문학의 위기를 몰고 오다
인문학의 위기. 이 말은 인문학과 직접 상관없는 그 누구에게라도 이미 익숙한 말입니다. 대학과 교수가 연상되는 인문학. 그 인문학의 위기는 우선 대학과 교수에게 큰 부담일 테지만, 현실의 주류적 분위기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막상 당사자들은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거니와 제도 밖에 있는 사람이나 인문학과 좀 더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 더 안타까워하는 분위기인 듯 느껴지니 말입니다.
인문학이란 평범한 시민이 뭐가 인간다우냐, 어찌 하면 그럴 수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어 소통하는 대화 체계를 말합니다. 그런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대화를 통한 소통이, 소통을 통한 평범한 시민의 자유롭고 안락한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평범한 시민의 삶을 자유롭고 안락하게 하려고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정치 행위를 하는 것이고 보면 결국 인문학의 위기는 곧 정치의 위기입니다.
붓다의 가르침과 연결해서 이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펼쳐보겠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삼독(三毒)이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 또는 조건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탐(貪), 진(瞋), 치(痴)의 셋입니다. 탐(貪)은 탐욕입니다. 진(瞋)은 성냄입니다. 치(痴)는 무지, 즉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가르침이 붓다의 원음(原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瞋)이 문제입니다. 성냄의 근원에 공포, 즉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내용과 순서를 바꾼 삼독은 포(怖), 탐(貪), 치(痴)입니다. 이 삼독은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자 인간을 인간답지 못 하게 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요인입니다. 이것들이 병적인 상태로 날뛰는 현실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입니다.
공포, 탐욕, 그리고 무지라는 인간의 운명적 조건을 병적으로 조장하고 부추김으로써 사회를 더욱 더 반인문적 질곡으로 몰아가는 부도덕한 매판적 국가권력, 신노예제 사회를 꿈꾸는 자본주의, 그리고 영혼을 돈과 권력에 팔아먹는 맹목 종교, 이 셋이 이루는 삼각동맹체제가 우리 앞에 펼쳐진 인문학의 위기의 본질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필 인문학의 위기라고 표현할 때 우리가 가리키는 바는 이제 인문적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러니까 이른바 인문장이마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성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이 통찰은 인문학적 사유 그 자체를 대상을 삼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문제 삼고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이제는 인간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권력, 자본주의, 맹목 종교가 합작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인간의 위기가 인간 바깥에서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학이 인간 안에 있으면 안 되는, 인간 바깥을 말해야 하는,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생태학적 상상력 없이 더는 인간을 말할 수조차 없는 큰 위기 앞에 닦아세워진 극한의 상황인 것입니다.
인문, 인문치료 열풍은 과연 인문적인가
무엇이 인문치료인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허무감을 극복하게 한다는 로고테라피 치료는 인간이란 본디 의미를 추구하고 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유의지를 발현시키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이런 기품 있고 결곡한 인간관은 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랑클 자신의 처절하면서도 기적적인 삶을 반영한 것입니다.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귀족적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인간관의 보편적 내용을 곱씹어보면 인문치료 전반에 두루 통용되는 전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내 삶의 타협할 수 없는 가치인가,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가와 같은 이런 고뇌에 빠져 일상이 흔들리고 사회적 삶이 진행되지 않는 사람 곁에서 스스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 이게 인문치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 전체가 배움의 과정일 것입니다. 완성된 인간이란 없으므로 죽는 날까지 교육 받는 것일 테지요.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병, 특히 마음과 관련된 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치료든 넓은 의미의 교육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치료라고 돋을새김 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반영하는 사회 전체의 부조리 정도와 거기서 시달리는 개인의 고통 정도를 감안할 때 병이라고 따로 이름 할 만하며 거기에 대한 치료라 이름 할 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의 심각성에 걸맞는 각성이 필수적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남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구나 하는 의학적 마음가짐, 즉 의자(醫者)적 감수성이 온 영혼에 깃들도록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에서 인문치료는 인문적으로, 치료적으로 창조될 터입니다. 이렇게 인문치료는 미리 규정된 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에서 생성되어가는 동사적인 무엇입니다.
이런 인문치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형태, 어떤 내용이든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에 깃든 병적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전형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하든 듣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치료의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과 치료의 공통 본질이 바로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을 읽고 쓰는 하는 모든 행위가 인문치료의 방편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을 바탕으로 한 연극, 영화, 드라마도 인문치료의 훌륭한 방편이 됩니다. 나아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쓰인 역사학, 철학, 종교학, 신화학 등의 모든 내용이 인문치료에 이바지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철학은 직접적으로 사람과 삶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학문이어서 인문치료의 고갱이를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여기서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방편이 더 있습니다. 현재 인문학의 위기가 포괄하는 자세는 분과 학문으로서 인문학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과 관련됩니다. 이미 일부학자 집단에서는 이른바 사회인문학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정치경제학, 법학, 사회학과 같은 이른바 사회과학적 안목 없이는 제대로 인문정신을 회복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융합학문을 거론하는 것이니만큼 치료에도 이런 융합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문, 원효를 이야기하자
비대칭적 대칭의 진실: 원효 이해의 디딤돌
원효와 붓다, 그리고 예수
제 사유의 흐름에서 불교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붓다의 생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붓다에 대한 관심은 원효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원효에 대한 관심은 한국적인 의학 패러다임, 특히 마음치료, 지금 우리의 화두인 인문치료의 틀과 내용을 찾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한국적 마음치료, 인문치료의 틀과 내용에 대한 관심은 제 인생 전체가 걸린 화두의 구체적 소산입니다.
원효만으로 사실 저는 족합니다. 그는 누가 뭐래도 보편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붓다를 넘어선 붓다입니다. 다만 우리 사회도 또 대부분의 우리 불자들도 더군다나 세계 불자들도 이를 모를 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붓다를 면밀하게 찾는 까닭은 이미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는 붓다 사상의 진실, 그 타당성이 어떻게 원효와 만나는지 보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상담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일을 하는 자로서 주의 깊게 본 한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붓다가 설법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고, 그 생각과 삶을 바꾸어 내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 네 가지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자주 보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보여줌, 즉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비실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동요를 유발시키려고 한다… 세 번째의 단계에서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제시됨으로써 동요가 곧 가라앉게 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붓다는 설법을 듣는 사람을 굳이 자신의 사유방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매우 놀랍게도 붓다의 이런 방식은 제가 상담 치료를 8단계로 나누어 한 상담이라 이름 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론 저는 초기 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설법 방식을 전혀 모른 채, 원효사상에 터 잡아 큰 얼개를 잡고 그것을 다시 세분화하여 나름대로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원효사상과 붓다 사상의 근본적 일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자,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보편적 이치를 염두에 둘 때 한 사회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이른바 헤게모니 블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실체, 본질, 토대 개념으로 구성된 절대주의를 구축하게 마련이고 문자 또한 거기에 복무하도록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붓다 당시 아리안 기원의 베다-우파니샤드에 기댄 브라흐만 사상 그것을 기록한 고급 산스크리트어가 바로 그런 예이고 원효 당시 흉노적 기원을 가진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경주 김 씨 신라와 대당 유학승 중심의 대승불교 사상 그것을 기록한 의상 부류의 시적 한문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이 절대주의에 정면 도전을 감행하며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 사상을 펼친 것이 붓다이며 원효입니다. 붓다는 동북 인도 지방의 토속어로 설법했으며 원효는 소로써 민중지향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두 분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원효를, 붓다를 이리도 공들여 붙잡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의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원효의 상황은 거의 정확히 오늘 우리의 그것과 같습니다. 통일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대립, 통치 집단의 행태, 지배 엘리트의 학문적 정체성과 그 어법, 바람직한 대안…. 이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원효를 그리고 붓다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무명의 의자(醫者)야 이렇게 큰 담론을 견딜 수 없고 다만 마음 아픈 사람 상담으로 치료하는 일이나마 원효의 길, 붓다의 길을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럼 예수는 어떠신가?라고 물어올 텐데, 통속 기독교인의 생각과 달리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 또한 붓다처럼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정도(正道)로서 중도(中道)를 산 스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문한의학적 치료란 무엇인가
원효의 화쟁사상을 치료로 실천하다
애당초 가로지르기부터 시작해서 한의사가 인문학의 위기와 더불어 인문치료를 입에 올린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위기에 대하여 한의학적 관점을 지닌 시민으로서 문제의식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문학 위기의 대안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하필 치료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의료인의 처지에서 입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준 것이 제 개인적 삶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로 한의사이면서 이미 인문치료를 실천에 옮기고 있으며, 그 요체가 우리 겨레 고유의 한 사상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녹여낸 원효사상이라는 이야기를 여태까지 해온 것입니다.
한 손: 화쟁 손
저는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에게 될 수 있는 한 몸 치료를 병행합니다. 그게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병과 직결되는 몸 부위가 분명히 있습니다.
가령 양의든 한의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이지만 목뼈 가운데 일부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거의 대부분 이 곳을 통해 세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진단하고 손 치료를 합니다. 무엇보다 손으로 살갗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피부는 또 다른 뇌이기 때문입니다.
피부에 가닿은 치료자의 손은 단순히 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치료합니다. 그 효과는 실로 대단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복부 진단을 하기 위해 따스한 마음으로 배에 손을 얹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이 마음에까지 가닿는 것입니다.
한 침: 화쟁 침
침은 침의 전문가인 저도 놀랄 만큼 치료 효과가 뛰어나며 치료 범위도 넓습니다. 침으로 마음의 병도 치료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마음 치료를 표방한 어떤 한의사도 주목하지 않는 한 곳에 저는 침을 놓습니다. 그곳은 기존의 혈 자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이름이 없습니다. 저는 거기가 한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가장 보배로운 자리입니다.
한 약: 화쟁 한약
한약 처방 가운데 비대칭적 대칭성이 가장 잘 구현된 것으로 소시호탕을 꼽습니다. 이 또한 『상한론』에서 유해란 천하의 성방입니다. 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바, "더없이 현명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 말하자면 온갖 유형의 인간에 대한 촉각기관을 지닌 사람"을 이 처방에 그대로 옮기면 "더없이 현명한 처방은 누구보다도 모순으로 가득 찬 처방, 말하자면 온갖 유형의 질병에 대한 촉각기관을 지닌 처방"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처방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시호제로 우울장애를 포함한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화쟁으로 구현되는 참된 과학은 다만 좁은 의미의 과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화쟁은 보편적 이치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작동 방식이므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문화, 교육, 사회, 종교,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과학성을 갖추게 하는 방편이자 기준이자 과학성 형성과정 자체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과학성을 잃고 권력과 자본과 종교의 수탈처가 된 까닭은 화쟁이 구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고 당당하며 따뜻한 화쟁을 통해 비대칭적 대칭의 진실을 복원하는 일이 바로 총체적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치료하기 위한 인문운동이자, 의학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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