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 고종석의 글쓰기 강의를 녹취 정리한 것으로, 공학적 측면을 넘어선 글쓰기 기술의 심원한 풍경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강연은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모두 열두 차례에 걸쳐 숭실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이 책은 앞의 여섯 강을 정리한 것이며, 둘째 권은 뒤의 여섯 강을 묶어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다.
고종석은 매 강연의 절반 이상을 인문 교양과 언어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데 할애했다. 이는 좋은 글쓰기가 글쓰기 자체의 전문 지식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깊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중에 쏟아지는 숱한 글쓰기 책들은 자잘한 작문 테크닉과 실천적 조언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종석은 그것이 글쓰기 기술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며, 교양 지식을 좋은 글쓰기의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운다.
■ 저자 고종석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와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서른 해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어 크로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어루만지다』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사회비평집『서얼단상』 『바리에떼』 『자유의 무늬』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경계 긋기의 어려움』, 문화비평집 『감염된 언어』 『코드 훔치기』 『말들의 풍경』, 역사인물 크로키『여자들』 『히스토리아』 『발자국』, 영어 크로키『고종석의 영어 이야기』, 시 평론집 『모국어의 속살』, 장편소설『기자들』 『독고준』 『해피 패밀리』, 소설집『제망매』 『엘리아의 제야』, 여행기『도시의 기억』, 서간집『고종석의 유럽통신』, 독서일기『책 읽기, 책 일기』, 인터뷰 『고종석의 낭만 미래』 등이 있다.
2012년 절필 선언 이후 ‘고종석 선집’(전5권: 소설, 언어, 시사, 문학, 에세이)이 기획되었으며, 현재 첫째 권인 소설집 『플루트의 골짜기』가 발간되었다.
■ 차례
1강 글은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 |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 | ‘정치적인 글’의 예술화 | 사물의 언어와 도구의 언어 | 자동사적 글쓰기와 타동사적 글쓰기 | 재주는 타고난 것인가? | 글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렸다! |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선전’과 ‘선동’ | 뛰어난 선동문 세 권 | 인상적인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 선동가 마르크스에 대해 | 『러브스토리』와 『이방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
글쓰기 이론 - 수사학과 논리학
글쓰기 실전
2강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Ⅰ
유럽의 3대 천재 가문 | 언어학사의 두 거성, 소쉬르와 촘스키 |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 기호는 자의적이다 | 감탄사, 의성어·의태어는 반드시 자의적이지는 않다 | 자의적이지 않은 음성상징 | 사피어-워프 가설 | 언어결정론과 멘털리즈 | 한국어의 풍부한 색채어휘 | 난학에서 온 한자어
글쓰기 이론 - 접속부사와 쉼표 | 일본식 접시마 ‘적’ | 일본식 조사 ‘의’ 한국어의 수
글쓰기 실전
3강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Ⅱ
한자어는 명백한 한국어 | 한국어의 세 가지 층: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 한자어와 고유어가 합쳐진 동의첩어 | 한국어의 특징, 명사문: ‘모양’ ‘예정’ ‘것’
글쓰기 이론 –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 보조사 ‘는/은’과 주격 조사 ‘이/가’
글쓰기 실전
4강 JS느님, SNS를 부탁해!
랑그와 파롤 | 파롤의 실천성과 창조성 | 방언과 언어의 경계 | 제주어는 언어인가, 방언인가? | 지리적 방언과 사회적 방언 | SNS는 한국어를 파괴하는가? | 세종은 왜 한글을 창제했는가? | SNS는 민주주의에 기여할 것인가, 파시즘에 기여할 것인가?
글쓰기 이론 - ‘로서’와 ‘로써’ | 명백한 오문: ‘~하는 이유는 ~ 때문이다’
글쓰기 실전
5강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꼽아보기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무엇일까? | 한국어와 한글은 다르다 | 한국어인가, 한국어 ‘들’인가? | 한국어를 ‘고아 언어’라고 하는 까닭
글쓰기 이론 – 단위를 나타내는 불완전명사 | 주요 문장 성분의 배치에 관하여
글쓰기 실전
6장 고종석과 함께하는 작문 수업
표준어를 쓰는 것이 원칙이다 | 정치적 올바름은 글쓰기의 미덕 | 잘못된 표현, 어색한 표현, 불필요한 표현
글쓰기 이론 – 글쓰기와 교양 | 단문과 복문 | 한국어의 경어법
글쓰기 실전
작문 실전 - 『어느 완벽한 교토의 하루』, 임경선 | 고종석의 평
- 『행궁동의 가을』, 한현희 | 고종석의 평
고종석의 문장
글은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
지금 여러분은 글을 쓰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 했습니다. 자제하기 어려운 자기표현 욕구, 그러니까 마음속에 뭔가가 있는데 이걸 표현하고 싶다라는 욕구가 첫 번째 이유고, 그걸 씀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읽혀야겠다라는 욕구가 두 번째 이유입니다. 옳습니다. 사람들은 그 두 가지 욕구 때문에 글을 씁니다. 그걸 자기 나름대로 명료하게 정리한 사람 얘기를 한번 들어 봅시다.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 아시죠? 『동물농장』『1984년』을 쓴 조지 오웰 말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소설가로서도 아주 좋아하지만, 에세이스트로서 저널리스트로서 더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 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짧은 에세이를 썼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whyiwrite?)』라는 에세이입니다. 이글을 표제로 삼은 『나는 왜 쓰는가』(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2010)라는 책도 번역돼 나와 있습니다. 그 책 안에 이 글이, 아주 짧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이미 오웰이 만년에 들었을 때니까, 물론 지금 기준으로는 젊은 나이지만, 자기를 한번 돌아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자기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좀 있어다는 식의 회고를 한 다음에, 일반적 얘길 합니다. 자기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오웰은 생계 때문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네 가지 동기에서 글을 쓴다고 정리 했습니다.
첫 번째 동기는 순전한 이기심입니다. 순전한 이기심이라는 건 말 그대로 돋보이고 싶은 욕망입니다. 나는 이렇게 똑똑하다는 겁니다. 좋은 글을 쓰면 남들이 알아주니까요. 그리고 죽은 다음에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니까요. 순전한 이기심이라는 건 아주 사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일종의 복수 행위가 되기도 합니다.
오웰이 생각한 글쓰기의 두 번째 동기는 미학적 열정입니다. 예컨대 금강산에 가보니 그 풍치가 너무 아름다운 겁니다. 그 아름다움에 홀려서 금강산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는 거지요. 꼭 자연만이 아닙니다. 파리에 놀러갔는데 노트르담성당을 봤어요. 바티칸에 갔더니 성베드로성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예쁜 겁니다.
저는 세계를 그렇게 많이 돌아다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제가 가본 곳 중에서 제일 아름 아름다운 데가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있는 알라브라궁전이었습니다.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규모도 서울에 있는 궁들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아름다움에 취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 뭔가를 쓰고 싶어진다는 거지요. 대상이 꼭 눈에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바흐나 모차르트의 어떤 음악을 들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거기에 대해 뭔가를 쓰고 싶게 되는 것, 이것이 미학적 열정입니다.
오웰이 세 번째로 거론한 글쓰기의 동기는 역사적 충동입니다. 이건 간단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아마 신문기자들이 제일 많이 느낄 겁니다. 물론 제대로 된 신문기자들 얘기입니다. 자기가 본 사실 그대로를, 이건 꼭 당대 독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잊히지 않도록 꼭 남겨 놔야겠다는 욕망으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을 계속 쓰는 게 중요합니다. 꾸준히 써보는 것,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하더라도 남의 글을 쓸데없이 필사하거나 하진 마십시오. 제 경험으론 그렇습니다. 저는 필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흔히 좋다는 글을 많이 베끼고 그렇잖습니까? 저는 그게 글쓰기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해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보다는 그 시간에 자기 글을 쓰고, 무엇보다도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쓰기 위해서는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글이나 막 읽지는 마세요. 아무 글이나 막 읽으면 글이 외려 나빠집니다. 정말 잘 쓰인 글을 많이, 되풀이 읽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Ⅰ
한국어의 풍부한 색채어휘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사실 사피어-워프 가설 얘기를 꺼낸 건 한국어의 색채어휘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컨대 영어로 붉은색을 뜻하는 형용사가 얼마나 될까요? 저는 red와 reddish(불그스레한) 정도밖에 안 떠오릅니다. 프랑스어로는 몇 개나 될까요? 역시 rouge와 rougeatre(불그스레한)밖에 안 떠오릅니다.
그러면 한국어는 어떨까요? 제가 헤아려봤더니, 국어사전에 올라있는 단어만 해도 60개 가까이 됩니다. 조금만 예를 들어볼까요?
빨갛다. 뻘겋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빨그스레하다. 뻘그스레하다. 발갛다. 벌겋다. 발그레하다. 벌그레하다. 붉다. 불그스레하다. 발그스름하다. 벌그스름하다. 빨그스름하다. 뻘그스름하다. 불그무레하다. 불그죽죽하다.
이런 등등의 어휘목록이 길게 이어집니다. 한국어는 자연언어들 가운데 색채언어가 가장 발달한 언어 일 것입니다. 빨갛다(붉다), 파랗다(푸르다), 노랗다, 하얗다, 까맣다(검다) 같은 기본단어들에다가 접두사를 덧붙이거나 모음조화 또는 자음교체를 이용해서 무수한 말이 만들어 집니다. 색깔들이 섞여 있는 것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검붉다, 검푸르다, 희누르스름하다 같은 말들이 그 예입니다.
보통의 자연언어라면 색채어휘가 아주 많아 봐야 열 개 남짓 정도입니다. 그것도 본디 색채어휘가 아니라 어떤 빛깔을 지닌 대상을 빌려와 표현한 말까지 포함해 그 정도라는 겁니다. 반면에 한국어의 색채어휘는 수백 개에 이릅니다. 물론 이 사실이 한국어 화자가 다른 언어화자보다 빛깔을 수십 배 더 섬세하게 구분해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틀린 이론이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어 화자에게 커다란 복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음성상징과 더불어 색채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문장을 한국어답게 만듭니다. 사실 한국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양(의태어를 표현하는 거죠)이나 빛깔(색채어로 표현하는 거죠)이 많거든요. 꿈틀꿈틀이나 너울너울을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누르퉁퉁하다하나 푸르죽죽하다를 외국어로 어떻게 옮길 수 있겠습니까?
가용어휘가 많다는 것은 글쟁이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입니다. 책을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단어를 익히기도 해야겠지만, 때로는 사전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단어들을 익히기도 해야 합니다. 한국어의 의태어/의성어들, 색채어휘에 관심을 쏟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들을 글의 적절한 자리에 사용해보십시오. 생동감 넘치는 한국어 문장을 짤 수 있을 것입니다.
난학에서 온 한자어
제겐 동서의 문명교섭에서 가장 찬란하게 느껴진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눈부시게 찬란하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18세기 말, 일본 막부 말기, 그러니까 쇼군이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즈음에 시작된 난학(란카쿠)의 장면입니다. 막부 시대는 천황에게 아무런 힘이 없던 시절입니다.
천왕이 힘을 가지게 되는 건 메이지유신 때부터입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 돼 천황이 국가의 실질적 우두머리가 되기 전의 일본은 당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예외를 뒀습니다. 나가사키예요. 막부는 오직 이 항구 도시에 오직 네덜란드 사람들만 들어와서 교역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럽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곳의 일본인 통역사들과 에도(지금의 도쿄)의 지식인들이 힘을 합쳐 네덜란드 배우기 운동을 벌입니다. 이것을 난학이라고 합니다.
이 난학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네덜란드마이 아니라 서양문물 전체를 연구하는 양학(요가쿠)으로 발전합니다. 미국으로부터 강제로 개항을 당하고 보니, 아, 네덜란드보다 센 놈들이 많구나, 영국이나 미국은 네덜란드보다 훨씬 세구나 하는 걸 알게 되지요. 아무튼 난학에서 시작된 양학은 그 뒤 일본의 탈아 입구 노선을 뒷받침합니다.
난학의 시작이 네덜란드어 사전편찬이었듯, 난학을 포함한 양학의 요체는 번역이었습니다. 번역이라는 게 본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본의 난학자들이 수행한 번역은 특히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그때가지 동아시아에 없던 개념들을 번역해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난학자들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양학자들은 두 세기에 걸쳐서 서양문명 전체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의 수단이 한자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유럽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유일한 문명권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에 앞서서 유럽을, 서양 세계 전체를 한자로 번역해버린 겁니다. 그 한자어가 바로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한자어의 상당수는 심지어 한자의 원산지인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원래 우리가 쓰던 한자어는 중국 한자어와 구조가 많이 닮았었는데 지금의 한자어는 대부분 일본 한자어와 구조가 같습니다.
일요일·월요일·화요일…같은 요일 이름들, 수소니 산소 같은 원소 이름들, 연설이니 재판소 같은 말들은 죄다 네덜란드어를 일본 사람들이 한자어로 옮긴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우리식 발음으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극단적 국어순수주의자들, 순혈주의자들처럼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하나도 쓰지 말자고 결심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단 30초도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사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말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한자어입니다. 이런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하는 주장, 곧 언어민족주의라는 말도 일본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어 민족 주의 모두 일본 사람들이 유럽어를 번역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제든 중국제든 한자어를 쓰지 말자는 것은 입 다물고 살자는 뜻입니다.
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Ⅱ
한자어는 명백한 한국어
한국어 문장은 번역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글을 쓸 때 번역 문투를 완전히 파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설령 번역 문투를 피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해도, 고유어만으로 된 문장을 쓰는 건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떤 글이든, 그것이 진지한 논문이든 아니면 비교적 가벼운 기사 글이든, 글에서 쓰는 말은 우리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 한자어들의 70~80퍼센트는 19세기 말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자어는 1800년대 말까지는 아예 없었던 말들입니다. 한자어 중에서 개화기 이래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어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전에 중국어를 통해서 들어온 말도 있습니다. 천지 세상 부모 같은 말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은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한국과 일본에서도 쓰이게 된 말입니다. 일본에서 낙학을 포함한 양학이 개화하기 전의 한자어는 거의 다 중국 사람이 쓰는 말을 한국이나 일본 사람이 빌려서 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이후 한국이 일본의 정치적·문화적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면서 한국어에서는 일본제 한자어들이 중국제 한자어들을 압도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이제 한국어가 되었습니다. 완전한 한국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화라는 말은 영어 culture를 일본사람들이 文化라고 번역한 것이 우리말에 수입돼 우리식 발음으로 읽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는 일본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한국어입니다.
文化를 문화라고 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국어 사용자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글에서 한자어를 쓰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을 지닐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자어는 우리말입니다. 명백한 한국어입니다. 사실 한자어를 전혀 안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우리는 두세 문장도 쓰기 어려울 겁니다.
한국어의 세 가지 층: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고대 이래로 중국에서 한자어가 천천히 차용되면서, 그리고 19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 한자어가 급속히 차용되면서 한국어 어휘에는 층이 생기게 됐습니다. 고유어와 한자어의 층이 생긴 거지요. 그 위에는 외래어가 있습니다. 고유어와 한자어와 외래어는 차례로 한국어 어휘부를 형성했습니다. 맨 아래에 고유어가 있고, 그 위에 한자어가 있고, 맨 위에 외래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그 세층의 단어들은 유의어를 이루기도 합니다. 예컨대 소젖(쇠젖)과 우유와 밀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래어는 한자어만큼 많지는 않으니까 이런 세층의 유의어들은 드물고, 고유어와 한자어 두 층으로 이뤄지는 유의어쌍이 한국어에는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름옷과 하복, 겨울잠과 동면, 가을밤과 추야, 봄바람과 춘풍, 가슴둘레와 흉위, 몸무게와 체중, 뺄셈과 감산, 곱셈과 승산, 덧셈과 가산, 나눗셈과 제산, 제곱과 자승, 세모꼴과 삼각형, 가로줄과 횡선, 세로줄과 종선, 아침밥과 조반, 배앓이와 복통, 살갗과 피부, 온몸과 전신, 엉덩이와 둔부, 누에치기와 양잠, 피와 혈액, 목숨과 생명, 사람과 인간, 날씨와 일기, 값과 가격, 곳과 장소, 새와 조류 따위가 그렇습니다.
이런 유의어쌍들을 보면 고유어들은 대체로 친숙한 느낌을 주고, 한자어들은 공식적인 느낌을 줍니다. 나쁘게 말하면, 고유어들은 좀 없어 보이고, 한자어들은 좀 있고 보입니다. 이렇게 고유어와 한자어가 유의어쌍을 이룰 때 문장에서 한자어를 쓸 것이냐 고유어를 쓸 것이냐는 개인적 판단입니다. 어떤 경우엔 한자어가 더 적절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엔 고유어가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나라사랑이 지나쳐서 될 수 있으면 고유어만 쓰겠다. 라고 마음먹은 사람은 그래도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자어는 절대 안 쓰겠다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건 한국어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에서는 한자어라고 부르는 단어들을 일본어에서는 간고라고 부릅니다. 일본어에서도 간고는 좀 있어 보이고, 고유어는 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없어 보이는 대신에 친숙함과 정감이 있지요, 이것은 한국에서나 일본어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리고 세상에 동의어라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유의어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앞에서 예로 든 고유어와 한자어들의 쌍도 동의어가 아니라 유의어일 뿐입니다. 이 말들이 똑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의미와 뉘앙스를 지니고 쓰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뜻이 비슷한 말은 존재해도 뜻이 완전히 겹치는 말은 없습니다.
JS느님, SNS를 부탁해!
SNS는 한국어를 파괴하는가?
트위터 언어를 포함한 인터넷 언어는 표준 한국어에서 많이 일탈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SNS 언어는 한국어를 파괴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방언이 그렇듯, SNS 언어도 사용자들끼리 유대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바깥세상의 규율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맛보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트위터에서 "내 최애캐는 지금 영화배우 ○○○과 썸타고 있는 롯데의 ○○○선수야. 난 꼴리건이거든"이라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사람이 직장의 입사원서를 내면서 자기소개를 그런 식으로 쓸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SNS 언어가 한국어를 파괴하기는커녕 외려 한국어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리적 방언들이 한국어를 풍성하게 만들듯이 사회방언, 특히 SNS 언어들도 한국어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더 중요한 점은, 지금은 SNS에서만 쓰는 말들 가운데 상당수는 언젠간 분명히 표준어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많은 사람이 걸으면 길이 되고, 많은 사람이 말하면 표준어가 됩니다. 표준어에 대한 최종 심판관은 언중입니다. 그래서 저는 SNS의 사회방언들을 대할 때 흐뭇합니다.
영어나 다른 외국에서도 SNS 사회방언이 많습니다. 특히 트위터에선 140자 제약이 있으니 말을 되도록 축약합니다. 예컨대 See you tomorrow를 C U Tmr라고 쓴다거나 공화당원이나 민주당원을 rep이나 dem으로 줄여 씁니다. 한글은 로마문자처럼 음소문자지만 그 운용이 음절문자이고, 트위터 본사에서 그 음절(네모난 글자)을 단위로 140자를 허용한 만큼 로마문자를 사용하는 언어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한자를 쓰는 중국인들은 우리들 보다 140자 안에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겠지요.
세종은 왜 한글을 창제했는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애민정신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세종대왕에겐 애민정신이 있었겠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백성을 사랑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세종이 정말 백성들을 사랑했으면 한글을 만들기 전에 일단 노비부터 해방시켜줬어야지요. 오직 백성을 사랑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그저 공식적으로 유통되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러면 세종은 왜 한글을 창조했을까요? 역사학자들이나 언어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꼽습니다. 첫 번째는 백성세계의 의식 성장입니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웠는데 그사이에 백성세계의 의식도 성장한 것입니다. 이 백성세계를 통제할 필요가 있어진 겁니다. 통제를 하려면 통제 대상이 뭘 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까막눈인 사람들은 통제도 못합니다. 말이 전달돼야 통제가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백성세계의 의식 성장에 맞서서 전제군주가 아, 이 백성들 안 되겠네, 자꾸 기어오르는데 좀 다잡아야겠다., 이런 게 아마 첫 번째 이유였을 겁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자마자 『용비어천가』라는 걸 씁니다. 세종의 조상들이 모두 완전히 신이에요. 날아다니기도 하고 호랑이도 때려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용비어천가』는 일종의 건국신화입니다. 조선왕조의 건국신화, 그런데 이걸 애민 운운하면 안 됩니다.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초창기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 세종이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만들었다고 말은 하지만, 물론 어여삐 여긴 마음도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부차적 이유였겠죠.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뭘까요?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이 무슨 뜻이죠. 이걸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다면 바른 소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친다가 되겠지만, 명사구로 생각한다면 백성들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러면 이 바른 소리라는 건 뭘까요?
바로 당대의 중국어 발음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한자가 수입되면서, 수많은 중국어 단어가 한자어의 형식으로 차용됐습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들은 한국어 음운체계에 동화돼 세종 시절에는 중국어 발음과 너무 달라져버렸어요. 지금도 그렇죠. 天을 한국인들은 천이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티엔비슷하게 읽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반포하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죠? 세종은 이걸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의 한국어 한자 발음을 되도록 중국어 원음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알려줘야 하니까 소리글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요. 그러니까 훈민정음에서 정음이라는 건 대체로 중국인들의 발음에 가까운 소리를 말합니다. 그 소리를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겁니다. 그 당시 한자 옆에 표기된 훈민정음을 보면 실제로 15세기에는 그 한자를 그렇게 읽지 않았는데도 되도록 당대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토를 단 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글 창제의 동기는 애민정신이라기보다, 뭐 기본적으로 애민정신이 있었다고 합시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요, 애민정신이 있었겠죠.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백성세계의 의식이 성장해 천한 것들이 대들려고 하니까 이거 중심 좀 잡아야겠네,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당시 사람들의 한자음이 중국인들의 한자음과 너무 달라져 있으니까, 완전히 똑같게는 못할지라도 중국어 발음과 좀 가깝게 가르쳐보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나는 한국어에서 어떤 낱말들을 가장 좋아할까?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골라보는 일은 우리말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꼭 열 개여야 할 필요는 없지요. 행운의 숫자 일곱 개든, 이팔청춘 열여섯 개든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딱 떨어지는 수 10이 좋아서 여러분께 열 개씩 뽑아보라고 말씀 드린 겁니다.
그렇게 고른 단어를 쓰다듬으며 그 말들에서 이런저런 연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좋아하는 낱말들이 더 불어나겠지요. 그게 우리말 사랑의 과정입니다.
저도 예전에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글에서 제가 좋아하는 한국어 단어 열 개를 꼽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고른 낱말 열 개는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넋 그윽하다였습니다. 좋아하는 말이 있으면 글을 쓸 때 그 말을 더 자주 쓰게 됩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선 일단 글의 재료가 되는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가용 어휘가 모자라면 표현이 풍부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휘를 늘리는 방법 하나는 사전을 자주 들춰보는 겁니다. 글을 쓸 때는 꼭 국어사전을 옆에 두세요. 지금은 사전들이 인터넷에 죄다 떠 있으니 꼭 종이사전을 옆에 둘 필요는 없겠네요.
내가 모르는 낱말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말들은 사전을 꼭 찾아보세요. 지금 시중에 유의어사전, 반의어사전이 나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에 가면 있을 겁니다. 연관어사전을 구비해 놓는 것도 좋고요. 그런 사전들은 아마 인터넷에 안 올라 있을 겁니다.
글을 쓰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 윤기가 없어 보입니다. 또 대립되는 개념을 사용하려는데 단어가 안 떠오르면 반의어사전을 이용하세요. 개념을 알고 있는 어떤 낱말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때는 연관어사전이 필요합니다. 사전을 옆에 두고 들춰보는 건 글쓰기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어느 나라 말일까요? 자연언어 중에서 말입니다. 자연언어라는 건 인공언어가 아닌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같은 언어를 말합니다. 유럽에선 이런 말이 있어요. 일종의 농담이죠. 친구와 얘기할 때는 프랑스어로 하고, 애인과 얘기할 때는 이탈리어로 하고, 말과 얘기할 때는 독일어로하고, 하느님과 얘기할 때는 스페인어로 한다. 독일어를 말 울음소리에 비교했네요.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언어를 꼽을 수 있나요? 저는 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자기가 처음 배운 말, 모국어가 가장 아름다울 겁니다. 그러니까 꼭 그걸 모국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제가 한국인인데 우연히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러시아말을 한국어보다 먼저 배웠다면 제 모어는 러시아어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제일 먼저 배워서 제일 익숙한 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교과서에 『마지막 수업』이란 작품이 실려 있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영어로 번역한 텍스트였습니다. 거기 보면 아멜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한 민족이 노예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들이 자기의 언어를 보존하고만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지닌 것과 똑같다." 굉장히 언어민족주의적인 생각입니다.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진 결과로 프로이센 땅이 된 알자스 지방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니까, 거기에 애국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 거지요.
저는 언어민족주의자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국어가 제 모국어가 되고 여러분들의 모국어가 된 건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한국어가 제일 아름답게 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고종석과 함께하는 작문수업
표준어를 쓰는 것이 원칙이다
글을 쓸 때는 표준어를 쓰는 것이 원칙입니다. 소설이나 희곡의 대사가 아닌 다음에야 반드시 표준어를 써야합니다. 아리까리하다라는 형용사는 아리송하다 또는 알쏭달쏭하다의 경상도 방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표준어로 고쳐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분은 아부지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것도 따옴표 안의 인용이 아니라 지문이었습니다. 아버지라고 고쳐야 합니다. 물론 대사에서는 방언을 쓰는 게 허용되고, 방언을 써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은 호남지방이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표준어를 쓴다면, 굉장히 어색하겠죠? 리얼리티가 떨어질 겁니다. 실제로 『태백산맥』은 호남방언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다보면 그 방언들이 입에 척척 감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급의 지식인들은 호남방언을 쓰지 않고 표준어를 씁니다.
이건 『태박산맥』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의 편견이 반영된 것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호남 사람이나 영남 사람이 표준어를 쓰는 건 아니죠. 지식인들은 표준어를 쓴다는 편견이 작가들에게 있는 겁니다. 어려서 배운 방언이 교육을 통해 조금 눅여질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표준어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 점에서 주인공들의 대사에 표준어를 쓴 건 소설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글쓰기의 미덕
몇몇 분은 상경하다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온다는 뜻이지요. 사전에도 올라 있고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준어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이런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상경하다거나 서울에 올라온다는 표현에는 서울을 높은 곳으로 떠받드는 느낌이 있습니다.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중심주의가 짙게 배어 있는 말입니다. 그냥 철원에서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철원으로 갔다, 이런 식으로 썼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이긴 하지만,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명시하는 표현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뜻입니다. 차별적 언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없앨 수야 없겠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간다 부산에 내려간다, 그렇게 쓰고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언어 표현이 사라질 것 같지도 않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글에서든 말에서든 정치적 올바름을 적당한 정도로 실천하는 건 미덕입니다.
한국어의 서울에 올라간다 부산에 내려간다, 이런 표현들은 그 도시들의 위도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해방 전에는 서울에서 평양에 내려간다 평양에서 서울에 올라간다, 이런 표현이 자연스러웠거든요. 분단 뒤에, 위도 개념이 작용해서 북으로 올라간다 남으로 내려온다 이런 표현이 생기긴 했지만요. 아무튼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가는 게 아니라 그냥 부산에 가는 것이고, 부산에서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서울에 가는 겁니다.
잘못된 표현, 어색한 표현, 불필요한 표현
그리고 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건데, 나름은 아직까지 불완전명사입니다. 제 나름대로 그 나름대로라고 쓰는 것이 표준어법입니다. 나름을 완전명사로 보아서 그냥 나름대로라고 쓰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워낙 널리 퍼진 말버릇이니까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겠죠. 그런데 아직 이 단어가 부사로까지 변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닮아 있다라는 표현을 몇 분의 글에서 봤습니다. 뭐 꼭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어투가 짙게 베어납니다. 닮았다로 고쳐 쓰는 게 좋겠습니다. 개는 아빠를 닮았어와 개는 아빠를 닮아있어 사이에 의미 차이가 있나요? 저는 못 느끼겠습니다.
그리고 문단을 나누는 버릇을 들이십시오. 어떤 분은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차례도 문단을 나누지 않고 그냥 내리 쓰셨습니다. 그런 글은 읽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문장 하나 새로 쓸 때마다 행갈이를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런 글 역시 읽기 어지럽습니다. 문단은 생각이나 소주제의 뭉치입니다. 뭐에 대해 한찬 얘기하다가 말머리를 바꿀 때는 행갈이를 해서 문단을 나누십시오. 물론 생각의 덩어리가 한 문장으로 끝난다면, 한 문장짜리 문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역시 일전에 지적했던 건데, 주어 다음에 붙은 로서는은 그냥 는으로 고치는 게 좋습니다. 어느 분이 영어에 얕은 지식을 가졌던 나로서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나는으로 족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주목해주십시오. 이 표현은 전형적인 유럽어 번역투 문장입니다. 한국어답게 고치자면 영어 지식이 얕았던 나는이 적당합니다.
정몽준 씨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이건 유럽어식 표현입니다. 정몽준 씨는 재산이 많다, 이게 한국어신 표현입니다. 이때의 보조사는 는/은을 화제(토픽)표시라고도 합니다. 정몽준 씨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런 뜻이라는 거지요. 물론 학교문법 식으로 설명하면 정몽준 씨는 문장 전체의 주어고, 재산은 많다의 주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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