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당신은 자기 감정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철학자 강신주가 읽어주는 욕망의 인문학!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와 그의 저서 『에티카』는 철학사에서 많은 논란과 동시에 흠모의 대상이다. 이성 중심의 서양 철학 전통에서 ‘감정의 철학자’로 불리게 되는 혁명적인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스피노자가 정의한 48가지 감정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명해 준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탐욕_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 신들이여! 헛되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도 하고, 도둑을 영광스러운 자리에도 앉힌다네. 그리고 원로원 회의에서 도둑에게 작위와 궤배와 권세까지도 부여한다네. 이것은 늙어 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양로원에서 상처로 인해 심하게 곪고 있던 그 과부가, 메스꺼움을 떨쳐 버리고, 향수를 뒤집어쓰고 젊어져 오월의 청춘이 되어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티몬』에서 4막 2장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에도 인간은 돈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돈에 대한 탐욕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 시대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탄식처럼 부유함은 모든 것을 좋고, 젊고, 고귀하고, 심지어 사랑스럽게 만들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탄식 이면에는, 그래도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며 추한 것은 추한 것이라는 역설, 반대로 흰 것은 흰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며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낭만주의적 확신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19세기 이후 산업자본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인간은 그나마 그때까지는 비록 명목상으로라도 유지했던 낭만적인 외투마저 과감히 벗어 버리게 된다. 이제 돈으로 매매할 수 없는 것들은 고귀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동시에 탐욕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지고한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탐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탐욕(avaritia)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처럼 무절제하게 부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탐욕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러니까 탐욕에는 중용이 있을 수가 없다. 탐욕의 상태는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마신 상태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닷물을 마시면 잠시 동안 갈증은 해소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보다 더 강한 갈증이 찾아오게 된다.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는 말이 있다. 목이 마르는 애착이라는 뜻이다. 마실수록 더 마시게 되는, 밑도 끝도 없이 치명적으로 중독적인 욕망이 바로 갈애이자 탐욕인 셈이다. 이제 충분히 돈을 벌었으니 지금부터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자. 바로 이런 절제력이 탐욕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20세기 위대한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민음사)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개츠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형씨."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없어요. 그 애의 목소리에는 뭔가 가득……." 나는 머뭇거렸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갑자기 개츠비가 말했다.
지금 방금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탐욕과 관련하여 셰익스피어의 대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만큼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읽었다. 표면적으로 소설의 줄거리는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진부한 멜로드라마처럼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부와 관련된 인간의 탐욕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어도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데이지에게 톰이나 개츠비는 모두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누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배역의 중요성이 결정되는 꼭두각시 말이다. 현재 자신의 남편 톰도 그래서 매력적인 사람이다. 과거의 가난을 떨쳐 버리고 엄청난 부자가 된 개츠비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심지어 데이지는 톰과의 결별까지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하긴 톰을 통해서, 아니 정확히 말해 톰의 돈을 통해서 꿈꿀 수 있는 것보다 개츠비를 통해 꿈꿀 수 있는 설레는 미래의 삶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테니까.
소설 전편을 통해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데이지의 고뇌는 만족을 모르는 그녀 자신의 탐욕을 개츠비가 충족시켜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사랑의 고뇌 이면에는 탐욕의 고뇌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이것을 눈치 챈 톰은 개츠비의 재산 형성 과정이 불법적이어서 그의 부유함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도 같다고 폭로한다. 그래서 바로 이 순간이 데이지가 개츠비가 아니라 다시 톰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런데 실은, 5년 전 가난한 장교 신분으로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했던 것도 바로 그녀의 부유함이 뿜어내는 환상 때문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당시 개츠비는 데이지를 얻으면 그녀의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결실을 모두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개츠비의 사랑도 탐욕에서 출발했던 셈이다. 그러니 사실 위대했던 것은 개츠비가 아닐 수 있다.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개츠비, 데이지, 그리고 톰을 가로지르고 있는 탐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세 사람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잔혹함_ 사랑의 비극 |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만하면 예술이다. 바람둥이 찰스와 외도한 사실이 들통 나자, 키티는 오히려 남편 월터를 윽박지른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잖아. 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죄다 지루하기만 해." 키티의 말은 반은 진실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이다. 키티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바람둥이를 만난 것이 아니니까. 사실 그녀는 바람둥이를 만나 쾌락에 빠져서 순간적이나마 남편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육체적 욕망 때문에 망가지는 여자가 아니라는 자존심 때문일까? 키티는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라고 강변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말에 무게감을 주기 위해 키티는 지금까지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도리어 역정을 내고 있다.
지금 키티의 모든 말은 비수처럼 월터의 가슴에 하나하나 제대로 꽂혔다. 칼은 칼로 상대하는 법. 자신의 사랑이 조롱당하자, 그토록 배려심 깊었던 월터도 지금까지 키티에게 하지 않았던 말들, 아내에게 한 번도 감히 하지 못했던 잔인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우리는 지금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민음사)에서 가장 서글픈 대목을 읽어 보았다. 『인생의 베일』이 세 번이나 영화화된 이유는 분명하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사랑의 짙은 그림자를 이 소설만큼 제대로 묘사한 작품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애인에게 얼마나 헌신적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놀라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기적이었던 사람도 거의 성인처럼 이타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니까.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애인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경악하는 순간도 분명 경험했을 것이다. 괴물과도 같은 잔혹함이 도대체 어디로 숨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는 독해질 수도 있다.
미성숙한 사람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할 수 있다는 거야? 사랑은 애인을 행복하게 해 주는 감정 아닌가?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다. 애인에 대한 잔인함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잔인함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물론 헤어지는 모든 커플들이 키티나 월터처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 헤어지는 경우라면, 아예 잔인해질 이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아직 애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혹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잔혹함(crudelitas)이나 잔인함(soevi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학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잔인한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그래서 둘 사이를 끈끈히 연결시켜 주고 있던 사랑의 끈을 자르고 싶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 쫒아낸다면,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남지 않게 된다. 당연히 우울함과 슬픔이 기쁨 대신 나 자신을 뜯어먹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잔인함으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러니 잔인함에 사랑의 자살이라는 별칭을 붙여 줘도 되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서글픈 공멸이 잔인함의 최종 목적일 테니까 말이다.
『인생의 베일』에서 세균학자인 월터는 키티를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국으로 데려가 일종의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둘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한때의 열정에 휩싸여 남편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아내나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받아쳤던 남편이나 모두 사랑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합법적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고나 할까? 자신이 바라던 대로(?) 월터는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리고 만다. 흔히 콜레라를 천형(天刑)이라고 동양에서 부른 것처럼, 월터는 제대로 벌을 받은 셈이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던 키티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월터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한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아직도 자신을 경멸하느냐고 묻는다. 죽어 가면서도 월터는 키티에게 잔인하게 군다. "아니. 나 자신을 경멸해.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마침내 월터는 "죽은 건 개였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월터의 마지막 말은 18세기 영국 시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 한 구절인데, 개가 사람을 물었지만 죽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는 내용이다. 그렇다,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다.
끌림_ 사랑으로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 |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끌림(propensio)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을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의 감정은 타자와 마주쳤을 때 발생하는 기쁨으로 설명된다. 그렇지만 타자로부터 유래한 기쁨은 꽃으로 만개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만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자가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후자가 끌림이라는 감정이다. 스피노자의 영민함은 이 두 종류의 기쁨을 구별한다는 데 있다.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우연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기쁨이 필연적일 때, 우리는 이 기쁨을 사랑이라고 한다. 반면 그런 기쁨이 우연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끌림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 사랑은 내게 필연적인 기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게 사랑을 가져다주는 그 사람만이 나의 기쁨을 지속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필연적인 기쁨이다.
반면 우연적인 기쁨에서 연유하는 끌림은 이와는 다르다.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가 가진 유머감각, 혹은 부유함 등이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이 나에게 매력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지금 나의 현재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내가 우울하면, 그녀의 유머감각은 분명 내게 기쁨을 줄 수 있다. 내가 가난하면, 그가 가진 돈이 곧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이것이 우연적인 기쁨의 핵심요소다.
1984년에 출간한 자전적 소설 『연인(LAmant)』(민음사)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추억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 끌림이다. 연인이라는 제목 때문에 작가가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사는 백인들이지만 이미 가세가 기운 집, 그리고 큰오빠만 편애하고 딸을 아끼지 않는 어머니, 이런 조건에서 열다섯 살 어린 소녀가 부유한 중국인 사업가의 아들, 그것도 삼십대 후반의 남자에게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거실 안은 어두웠으나 그녀는 차양을 걷어 올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주 뚜렷한 어떤 감정도 없이, 증오심도, 혐오감도 없이 서 있다. 아마도 어느새 욕망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문제에 아직은 무지하다. 그 전날 밤, 그가 그녀에게 집에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 그녀는 선뜻 승낙했다. (……) 그는 떨고 있다. 처음에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녀의 옷을 벗기지도 않는다. 다만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미친 사람처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주 낮은 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고 나서 침묵한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녀로서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불현 듯 그녀는 알게 된다. 그는 자기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며, 그토록 퇴폐적인 모습들을 인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내고 치러 내야 하는데, 그로서는 결코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깨닫게 된다. 나룻배에서 이미 그가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는 것을. 그가 마음에 든다.
소녀는 열다섯 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성숙함을 보인다. 그 나이의 소녀라면 낯선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읊조리기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감정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우연적인 조건과는 무관하게, 그와 함께 있으므로 인해 기쁨을 느껴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우연적인 조건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와 가족 간의 갈등처럼 집안 사정이 그토록 남루하지 않았다면, 소녀는 결코 나이 많은 중국 남자에게 끌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것 없이는 자신이 제대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만이, 우리는 그것을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어서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인 것이다.
그렇게 동양인 남자에게서 느낀 설렘과 기쁨이 소녀에게는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끌림에 불과하다는 것, 소녀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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