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 꺼낸 책과 연애

   
문아름
ǻ
네시간
   
15000
2013�� 12��



■ 책 소개
연애의 반짝임과 마지막을 함께한 책 속의그들!

프로이트, 쇼펜하우어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 박민규, 김애란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분야를 폭넓고 자유자재로넘나들며 약 100여 종의 책을 서가에서 꺼내고 있는 이 책의 일관된 감성은 연애다. 모든 책을 연애로 읽는다는 독특한 오독의 결과물이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책들을 통해 저자만의 새로운 시각과연애에 대한 담론, 특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책 속 연애 읽기는 기존의 딱딱한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쉽고 부드러우며 세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독서 관련 책들에서 흔히 보이는 책 속 발췌문은 거의 없다. 그 자리는 저자의 젊은 감성과 직설적인 문장, 발칙한 오독의 즐거움이 곳곳에서대신한다.

■ 저자문아름
제주 출생.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방송국을 몇 년 기웃거리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대학원에서 영상 콘텐츠를공부하고 있다. 연애 이후 책 속의 인물들에게 위로를 받으면서 멋대로 오독하는 재미를 알았다. 연애에 목숨 거는 조선시대 여자들과 산도르마라이의 집요함을 좋아한다. 말랑말랑한 공감 능력으로 주변의 연애상담을 도맡고 있다. 한 손에는 책을 쥐었다면, 다른 한 손에는 누군가의 손을잡아야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 차례
프롤로그 - 사적인 연애와 사적인 책 읽기의 만남
하나, 연애는
닮고 싶은 마지막 문장들 ;『클림트』 엘리자베스 히키, 『열정』 산도르 마라이
연애와 책 읽기, 이해 대신 오해를 택하다 ; 『정념론』 르네 데카르트
연애에대한 객관적이고도 차가운 감각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사랑은 없다』 쇼펜 하우어
연애의 철학 ; 『사랑에 관하여 : 플라톤의향연 주해』 마르실리오 피치노, 『독일인의 사랑』 막스 뮐러, 『좁은 문』 앙드레 지드 
그때 루소를 조금만 더 자세히 읽었더라면 ;『에밀』 장 자크 루소, 『덧없는 행복-루소론』 츠베탕 토도로프 
연애를 하면서 프로이트를 읽는 것에 대하여 ; 『예술, 문학, 정신분석』지그문트 프로이트,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지그문트 프로이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 『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오독과 감정의이편과 저편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슈테판 볼만
연애는 연극일까? ;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TV 피플』 무라카미하루키 

둘,감정이었다가
사랑이라는 말에 대한 그리움 ;『사랑으로 나는 : 제14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 김정란 외 , 『이슬의 눈』마종기
‘다시는 그 개새끼랑 만나지 말아야지’ 싶을 때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피아노 치는 여자』엘프리데 옐리네크, 『채털리부인의 사랑』 D. H. 로렌스
연애를 시작하면서 외로워지는 이유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조윤석, 마종기,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
곡선과 나쁜 남자의 참을 수 없는 매력 ;『행복한 훈데르트 바서』 바바라슈티프, 『햄릿』 세익스피어,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지금의 내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섬』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장그르니에
외로운 사람들의 비상구, 사랑 ;『금오신화』 김시습,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조선시대 여자들도 쿨하지 못했는데;『19세기 서울의 사랑, 절화기담 포의교집』 김경미, 조혜란 역 『파멜라』 새뮤얼 리처드슨
내가 당신 앞에서 우는 이유 ;『사랑예찬』알랭 바디우, 『이불』 다야마 가타이

셋,경험이었다가
사랑에 빠진 시선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 고바야시요리코, 구치키 유리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애이고, 섹스였을까? ;『마이 퍼니 발렌타인』 무라카미 류, 『토파즈』 무라카미 류,『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식욕과 성욕의 관계 ;『에로스와 가스테레아 : 끝없는 두 욕망』 윌리 파시니,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에스키벨
취향의 차이는 모든 것의 차이일까? ; 『구별짓기』, 피에르 부르디외,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위대한 개츠비』 스콧피츠제럴드,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면도날』 서머셋 모옴 141
이놈의 구질구질한 연애는 ;『인연』 피천득, 『귀천』천상병
내가 지금 기다려도 될까? ;『낯선 여인의 편지』 스테판 츠바이크
피터 팬은 왜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피터 팬』제임스 매튜 배리, 『피상성 예찬』 빌렘 플루서
이미 지나간 연애를 이야기할 때 ;『달려라 아비』 김애란, 『사라짐에 대하여』 장보드리야르

넷,일상이었다가
다시 일상을 마주하는 법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호시노미치오
밥 같이 먹어요 ;『대지』 펄 벅, 『딸기밭』 신경숙,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세계가 이 모양인데 연애가 다 뭡니까? ;『왜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칩거, 잠수의 유혹 ;『좀머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하는 것을 공유한다는 것 ;『우수』 안톤 체홉,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로제 그르니에 
사랑이변화를 가져올 때 ;『베니스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파이드로스』 플라톤
연애 때문에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달의 궁전』폴 오스터
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 임신! ;『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사벨 아옌데외
짝사랑에도 권태는 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다섯, 책이었다가
다시 일어서고 싶을때, 책! ;『새벽예찬』 장석주, 『바베트의 만찬』 이자크 디네센
책에서 시작되는 관계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셰퍼
지나가고 잊혀진다는 것에 대하여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슐링크
백마 탄 왕자님보다 제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J.M. 바스콘셀로스
천천히 빠져들어갈 수만 있다면 ;『샐러드를 좋아하는사자』 무라카미 하루키, 『붉은 산호』 유디트 헤르만
연애하다 떠오르는 이름, 가족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조제와 호랑이와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이별을 마주할 때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허수경, 『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삼미슈퍼스타즈의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처럼 연애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에필로그 - 안녕과 안녕 사이





서가에서 꺼낸 책과 연애


하나, 연애는

연애의 철학

며칠 전 오랜만에 싸이월드에 들어갔다가 두 손발이 안 펴지는 경험을 했다. 어색한 사진은 물론이고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찰나의 감정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는 다이어리를 보자 조금 부끄러웠다. 글을 쓴 나조차 감정을 따라갈 수 없어 어색한 문장들. 특히 상처받았다고 한 바닥 적힌 글을 읽으면서 점점 이게 내가 쓴 게 맞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언제나 헤어지고 나면 줄기차게 책을 읽어댔던 버릇은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한데 3년 전 겨울의 나는 플라톤의 『향연』을 읽겠다고 꽤 용을 쓴 모양이다. 다이어리에는 플라톤의 『향연』을 주해한 마르실리오 피치노라는 학자가 쓴 서문의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사랑하지만, 그러나 거의 모두가 잘못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만큼 더 잘못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연애의 조언들이 "나를 잃지 말라"라고 말한 반면 플라톤은 당시 질질 짜고 있던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리고 말했다.


"원래 사랑은 시작부터 불완전한 거야. 네가 없는 걸 가진 사람을 찾는 거라고. 애초에 넌 그를 가질 수 없었으니 사랑이 힘든 건 당연하지."


그리고 그는 내게 세속적인 사랑이 아닌 신과 지식을 향한 사랑의 길을 보여주었지만 아직 그 길을 향하기에는 세속적인 사랑이 너무 달콤했다.


철학은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연애 끝 무렵 한 발짝 떨어져서 나를 볼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읽었다. 왜 하필 철학이었을까?


철학은 가장 절실할 때 눈에 들어온다. 나는 철학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진리를 가장 어렵게 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그 진리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실까지 가는 길을 걸으며 날 해석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철학은 감정을 어디에 쏟을 수도 없고 힘들 때 즈음 나를 찾아온다.


연애의 끝에서 내가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상처받았을까? 칼을 품은 것처럼 독기 어린 문장들이 술 마신 것처럼 비틀대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킥킥거린다. 내 삶에서 크게 자리 잡고 있던 사람이 어느새 사라졌고 그 사람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도 사라졌다. 불과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감정이 사라지기 전, 한 발자국쯤 앞에서 나는 이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생각한다.


사랑은 여정일 것이고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성장해가는 단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여정에서 어디쯤 와 있을까를 곱씹으며.


연애를 하면서 프로이트를 읽는 것에 대하여

한때, 프로이트를 읽는 남자를 만난다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것은 무의식에 깔린 성적 억압에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라면 어딘지 부끄럽지 않을까? 나는 남근을 선망한 적도 없고, 나의 모든 대화와 행동이 성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내가 만약 프로이트의 환자였다면 나는 프로이트를 증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프로이트를 읽고 실컷 욕하면서도 어쩐지 자꾸 뒤져보게 되었던 것은.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내 연애의 문제점은 이게 아닐까?를 생각하면서 내 감정의 진창에서 한 발자국 떨어지게 해주고, 비단 나만의 문제라는 아니라는 이상한 고슴도치식 안도감을 들어서게끔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프로이트가 되어 나를 진단한다. 그의 무수한 사례와 딱딱한 문장들은 소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내 마음을 가라앉힌다(이해가 가지 않는다 싶을 때 사례를 적절하게 들어주는 프로이트는 그야말로 밀당의 신이 아닐까? 물론 사례를 읽는다고 이해가 다 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연애를 하면서 프로이트를 읽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보다 다섯 배는 사람을 안정적으로 만든다. 나는 프로이트의 여성관이 마음에 안 들면서도 그의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연애는 나에게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를 보게끔 만드는 거울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연애에 대해, 헤매면서 길을 끊어버리거나 혹은 수많은 갈림길을 만들고 마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프로이트는 내게 다정하게 속삭인다. "이건 다 네가 어린 시절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연애에 지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당신, 프로이트를 만나라!



둘, 감정이었다가

곡선과 나쁜 남자의 참을 수 없는 매력

모든 것이 굴곡지고 자에 댄 듯 재미없는 직선을 가진 사람들과 달라서 모든 것이 힘들었던 남자. 지금이야 이렇게 곱게 말하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나쁜 남자였다.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지독한 병에 걸려 있었다. 비로 걸리면 답도 없고 제 팔자 제 손으로 꼬기 쉽다는 비련의 여주인공병.


나는 당시 내가 지금껏 읽어왔던 모든 비극의 주인공에 나를 대입하며 그를 기다리고 참았다. 『햄릿』의 오필리어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아마 그때만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순종적인 여성들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은 없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연인에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여자. 문제는 연극이 언젠가는 끝나듯이 오필리어로 태어나지 않은 나는 이 인간과 더 만나다가는 정말 내 손으로 내 인생을 꼬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도망치듯 연애를 끝냈다.


과연 나쁜 남자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비련의 여주인공들일까? 소설이 언제나 현실을 닮은 것은 아니지만 이때만큼은 소설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비련의 여주인공들은 나쁜 남자를 단 한 번도 차지할 수 없다. 그런 여자는 『햄릿』의 오필리어가 아니라, 오히려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강한 여자다. 예를 들자면 『제인 에어』의 제인 에어 정도는 되어야 그를 만나는 동안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제인 에어는 단 한 번도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젠가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를. 그녀는 언제나 로체스터 옆에서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제인에어가 로체스터에게 당당하게 나도 같은 인간이라고 화를 낼 때, 나도 모르게 내 상황에 맞춰서 바꿔서 읽어보기도 했고 로체스터가 숨겨온 비밀을 알고 나서 그의 곁에 남을지 떠날지 갈팡질팡할 때 그녀가 떠나기를 진심으로 마음 졸이면서 지켜봤다.


결국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 옆에 남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제인 에어가 만약 오필리어였다면, 로체스터가 다른 여자와 비교하면서 떠볼 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거나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모든 비밀을 알고 나서도 로체스터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사랑이었을까? 로체스터를 만난 오필리어는 농락당하는 것에 그치거나 혹은 트로피 와이프가 되어 그의 곁에 남는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가 당시 나쁜 남자라는 굴곡진 창문을 만나 그 너머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가 아니면 몰랐을 저 너머를, 그를 만남으로 인해서 내 안에 몰랐던 오필리어를 만나던 시간이었으니. 비련의 여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보는 것처럼 마냥 예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 해도 어디야!


지금의 내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연애만큼 나를 반짝이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지만 연애만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연애는 10퍼센트의 반짝임과 90퍼센트의 진창으로 이루어진다. 이럴 때면 나를 반짝이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과도한 반짝임으로 무장한 책은 나를 울게 만들 것이고,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는 책은 내 목을 조를 것이다. 적절한 거리감과 반짝이는 것들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필요하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터널을 통과하는 전철의 불빛을 보는 것 같은.


장 그르니에의 『섬』은 내게 그런 존재다. 그의 섬에 가면 나의 고독도, 나조차 싫어하는 나라는 존재도 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섬에는 슬픔도 기쁨도 동등하다. 특히 그가 소박한 일상에서 찾는 외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그 감정에 거리를 두는 세심함이 아름답다.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외롭지 않다. 내 안에도 장 그르니에 안에도 섬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언제든 나 자신이 싫어질 때 이 책을 아무데나 펼치고 나면 나는 내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된다. 어쩌면 나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그의 여유에 힘을 얻어 한 권 더 볼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장 그르니에의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섬』에서 나의 외로움조차 반짝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면 『일상적인 삶』에서는 새삼 힘든 연애를 하느라 지쳐 있는 우리에게 일상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일상은 소소하다. 독서, 수면, 자정, 정오…. 하지만 그 소소한 일상에서 그는 본질을 꿰뚫어서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독서가 어떻게 위험한 것에서 시작되고 낭독을 거쳐 묵독까지 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고독의 단계들에 따라 사유하다가 결국 인간의 고독은 낭만적인 특정한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르니에의 산문의 특징은 촘촘하면서도 우리가 끼어들어가 상상할 여지가 있게끔 한다는 것이다. 굳이 장면으로 표현한다면 높은 종탑에 서서 밑으로 빼곡한 붉은 지붕집과 멀리 하늘이 보이는 탁 트인 시야가 펼쳐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우울하거나 갑갑할 때 그의 글을 읽으면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지금은 내가 복잡스럽게 골목길을 지나고 있더라도 저 높은 종탑에서 보면 이 골목길도 지평선과 연결되는 어떤 지점이니까. 비록 오늘은 내가 지하철을 기다리다 말고 술기운에 눈시울을 붉히는 어린 청춘이어도, 내 자신이 싫어죽겠는 연애 찌질이어도 괜찮다.



셋, 경험이었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애이고, 섹스였을까?

내가 무라카미 류를 만난 것은 스무 살, 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였다. 그 소설의 제목은 이름도 예쁜 『토파즈』. 만약 아직 무라카미 류를 읽지 않은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시라. 읽다가 황급히 책을 덮게 될 테니.


이제야 19금 농담 따위 술자리에서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언니들과 시시덕대며 주고받을 수 있지만, 여전히 『토파즈』의 기억은 너무 커서 쉽사리 무라카미 류를 펼칠 수도 없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 등장하는 섹스는 음란하지도, 로맨틱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극단에 몰린 사람들이 모여 마지막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자 하는 도구로 선택한 것이 섹스일 뿐.


무라카미 류 연애 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이 퍼니 발렌타인』에서 나는 이제 왜 무라카미 류가 굳이 다른 이들은 넘어가고자 하는 어른들의 흔치 않은 비밀에 대해서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들어갔는지 조금 이해했다. 이전까지 내가 느꼈던 섹스가 변태적이거나 욕망덩어리라고 느꼈다면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의 섹스는 너무 대놓고 욕망을 말한 나머지 그다지 비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섹스에 대해 감추지 않고 드러내기 시작하자,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성적 취향은 인물의 한 부분이 되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되고 그리고 누군가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까지 점점 확장된다.


이 세상 연애가 여러 모습을 갖고 있는 것처럼 섹스도 여러 모습을 갖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고 무라카미 류가 있는 것처럼.


우리 문학에 백신 주사를 놓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백가흠의 단편집, 『조대리의 트렁크』는 무라카미 류처럼 대놓고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불편한 진실의 강도가 남다르다. 영아 매매, 임신 중독과 게임 중독에 걸린 젊은 부부, 애인을 기다리는 동성애자, 군대에서 다리를 쭉 찢는 바람에 장애인이 되어 웹사이트에 야설을 연재하는 남자. 그들 모두 어딘가 비뚤어져 있지만 계속해서 가족을 꿈꾼다.


백가흠과 무라카미 류를 잇는 것은 어쩌면 외로운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외로운 사람들은 한편으로 무라카미 류처럼 섹스를 숨기고, 한편으로는 백가흠처럼 가족을 갈망한다. 과연 지금 너무 외로워 연애를 갈망하는 우리들은 어느 편일까? 혹시 어떤 심리학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 중독은 아닐까? 외로운 게 무서워 어디에라도 달려들려는.



넷, 일상이었다가

칩거, 잠수의 유혹

남들이야 어떻게 말할지 모르지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형편없는 책이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이 책을 내가 싫어하는 이유는 딱 하나, 동굴과 관련된 부분이다. 남자는 동굴에 들어가야 하는 시기가 있고 여자는 그것을 닦달하기보다는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동굴에 대한 인식이 아주 부정적으로 박혔는데 점점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동굴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렇다고 헤어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잠수도 힘들다. 잠수하면 이건 아예 헤어지자는 거니까.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어떨 때 연인이 가장 정 떨어지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잠수할 때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씩 권태기가 온다 싶을 때 잠수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굴은 너무나 절실하다.


연인과의 관계가 아무런 이유 없이 지칠 때면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을 대신 읽는다. 차라리 저 남자가 이래서, 저래서, 라는 이유가 있다면 다른 독서를 하겠지만 정말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비롯한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는 귀 막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는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좀머씨 이야기』는 한 소년의 눈으로 동네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좀머씨 이야기를 관찰한 소설이다. 그렇다고 줄창 좀머씨만 관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 타기를 즐겨하는 소년의 잔잔한 일상에 돌을 던지는 미스 풍켈의 코딱지나, 마음만 먹으면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가벼움. 그리고 그 소년이 나무 위에서 우연히 보게 된 좀머씨의 모습. 소년은 좀머씨와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그 모습을 책 속에서 보다 보면 좀머씨가 필사적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도 무엇도 궁금하지 않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다가 좀머씨가 선택한 길을 걷게 됐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기도 했다. 좀머씨의 삶은 그런 모습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좀머씨가 되었다가 소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좀머씨가 되었을 때 소년처럼 나와의 비밀을 지켜줄 누군가가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 치명적인 잠수의 유혹에서 벗어나곤 한다.


세상이 싫어서 덩달아 연인까지 버거워질 때 공연히 연인을 괴롭히지 말고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만나는 것은 괜찮은 선택이다. 그를 만나고 나면 오히려 세상이 우습다. 그리고 이 우스운 세상 속에서도 옆에 있는 연인 얼굴을 보면 괜히 뿌듯하다. 어쨌든 난 연애는 하잖아.



다섯, 책이었다가

백마 탄 왕자님보다 제제

생각보다 우리는 어렸을 때 더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럴 거야라는 착각 때문에 꽤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했던 후배 A는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책 추천 목록 중 가장 멋진 책 이야기를 들려줬다.


"연애 소설이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요. 남들은 그게 무슨 연애 소설이냐고 그러는데… 저는 그래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후배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기억났다. 뽀르뚜가 아저씨, 밍기뉴, 그리고 사랑스런 제제. 그런데 그 책이 연애라니. 초등학생 이후로 한 번도 읽지 못했던 동화였기 때문에 긴가민가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책장 구석에서 오래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꺼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그것도 내용조차 긴가민가했던 책을 다시 꺼내는 것은 마치 머릿속에서 잊혀졌던 시간을 기억해내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구절과 등장인물을 새롭게 다시 만나다 보면 결국 나는 예전처럼 울보가 되고 만다.


내가 당시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제제가 불쌍해 울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우는 것일까? 나는 이제 제제가 슬퍼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을 알았고,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하지만 여전히 나는 제제였다. 여전히 나는 외롭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제가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천진함으로 밍기뉴를 사랑하고 뽀르뚜가를 사랑하고 또 잃었다면, 나는 연애를 할 때면 지금까지 내가 잊고 있었던 내 안의 어린아이, 제제를 꺼내어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뛰어넘고 만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제제.


그때 나의 제제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닌 그냥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웃기 좋아하는 아이를 좋아했었다. 왜 나는 지금껏 내 안의 제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생각보다 더 근사한 연애를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현대판 신데렐라가 이야기하는 짝퉁 왕자님 말고, 뽀르뚜가 아저씨처럼 악마도 천사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이별을 마주할 때

나의 첫사랑은 대학교 2학년.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은 우습게도 그가 경영학과생 주제에 박민규를 읽었다는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를 읽으셨다고요?"

"어? 그게 되게 유명한 거잖아요."


아, 그 이름도 찬란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내 대학 시절의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 이 소설은 말하자면, 도움 안 되는 막내 외삼촌이다. 울타리 안에서 방황하는 청춘에게서 슬며시 울타리를 치워놓고 옆에 슬그머니 누워서 울타리 치우니까 멀리 보이고 좋지? 그런데… 굳이 멀리 갈 필요 있나?라며 러닝셔츠 안에 손을 넣고 배를 벅벅 긁어대는. 이 얼마나 쓸모없는 위로란 말인가? 그러나 하도 주위에서 대학생은 꿈을 가져야 한다, 취업난에 스펙은 필수다, 꿈꾸는 자는 아름답다고 말하는 종자들 덕분에 꿈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진절머리가 나는 나 같은 학생들은 그에게 환호했다. 어쨌든 나는 당시에 알뜰하게 대학생활을 보내는 경영학과나 광고홍보학과 친구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런 내 눈에 경영학과 남학생은 속물적이고 이기적인데다가 돈 계산만 빠른, 한마디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조연으로도 등장하지 못할 미천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어느 정도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한다. 어쨌든 그런 경영학과생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다니! 반할 만하지 않는가?


첫사랑이 늘 그렇듯이, 나는 그와 헤어졌다. 처음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꼈고,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와 언니는 내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나는 내일같이 학교 도서관으로 출근해 문학 800번대를 표지만 외울 기세로 책장을 서성였다. "남자는 다 똑같다", "연애는 거기서 거기야"라는 말보다 내가 사랑을 했던 거라고 얘기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친구나 선배들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은희경의 『그것은 꿈이었을까』를 만났다. 나는 그 책을 도서관의 낡은 소파에 앉아 단숨에 읽어 내렸고, 옆에 누가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음반 매장에서 책에 나오는 비틀즈의 음반을 사서 밤새 들으며 책을 한 번 더 읽었다. 줄거리는 유치할 수 있겠지만 그건 제정신으로 읽을 때나 판독이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게 나는 첫사랑을 은희경과 비틀즈로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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