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故 이병철 회장이 묻고 철학자 김용규가답하는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 통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직전 24가지 질문을남겼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에서 시작하여 ‘종말은 언제 오나’에 이르는 이 질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신과 인간에관한 절박한 물음이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한 이 숙명적인 문제들을 철학자 김용규가 진지하게 성찰한다.신학과 철학에 대한 저자의 깊은 통찰에는 신의 존재 여부, 종교와 과학의 관계, 영혼의 존재와 역할, 지구의 종말 등 신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또한 최근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지은이의 단호한 일침은 과학과 종교의 소통이 어떻게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우리 시대 인문주의의 정수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일이 헛되고 죽음 후에 찾아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삶의 마지막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답을 갈구할수밖에 없는 근본적 문제들을 다룬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이 숙명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삶의 의미를 곱씹고 그 가치를다시 발견하게 한다.
■ 저자김용규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그에게 신은 다름 아닌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이다.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철학자인 그가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언제부터인가가치들이 소멸하고 삶이 공허해진 이유를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신이 죽고 진리가 사라진 데에서 찾는 그는 동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새롭고 가치 있는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다. 지식의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끊임없이 고민해온 그의 지향은 인문주의에 있다.신을 이야기하면서도 기독교 특정 종파의 관점을 취하지 않고,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부당한 주장과 폭력적 공격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합리적 길을찾는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신과 인간 및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성찰은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불러일으킨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철학카페에서 시 읽기』『기적의 양피지 캅베드』『설득의 논리학』『철학통조림』 시리즈,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데칼로그』『영화관 옆철학카페』『알도와 떠도는 사원』(공저), 『다니』(공저)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죽음을 주었는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수 있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0
영혼이란무엇인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1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2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3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4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5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6
신앙인은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7
천주교와 공산주의는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과 등.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18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0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독신인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1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2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나오는 말
참고문헌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이제부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를 과연 증명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질문에 대한 답도 자연스레 얻게 될 것이다.
신은 바나나도 분홍코끼리도 아니다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은 바나나, 나무, 건물, 사람과 같은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고, 유니콘이나 페가수스 그리고 밀스가 말하는 분홍코끼리와 제우스 같은 전설이나 상상 속의 ‘존재자’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은 스스로 자기를 ‘존재’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그 신을 믿는 사도, 사도교부 그리고 지난 2000년 동안 이 신에 대해 탐구하고 언급해온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신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존재물이나 상상 속의 존재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다양한 방법과 표현으로 누누이 이야기해왔다.
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도무지 그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다. 당연히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신이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면 천둥, 바람, 불 같은 것으로 그 위용과 능력을 보여주고, 어떤 때는 꿈을 통해, 또 어떤 때는 환상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 신은 외부에서 들리는 음성이나 천사들을 통해 자신을 현현한다. 물론 신은 전능하므로 그가 특정 형체를 갖고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은 왜, 그토록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것인가? 설령 신 자체는 무형의 존재라 하더라도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그러했듯 모든 사람에게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준다면 우리가 ‘신’의 존재를 아무 어려움 없이 믿고 그의 말을 어김없이 따를 텐데 왜 그러지 않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우리가 신을 눈으로 보고 만날 수 있게 되면 그를 의심 없이 믿고 그의 말을 어김없이 따르는 것이 필연적으로 강제된다. 이때 신은 전능한 독재자이고 우리는 그의 꼭두각시이자 노예다. 여기서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보지 못하고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거나 그러지 않는 것이 우리의 자유에 속하며, 신이 진정 신이고 인간이 진정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신은 푸른 하늘 어느 한곳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우리가 늘 볼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신을 믿고 따를 수도 있고 부단히 의심하고 거역할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좀 억지 같은가? 그런데 아니다! 앞으로 차츰 드러나겠지만, 이것이 신구약성서와 기독교 신학에 한결같이 나타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 설정이다.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그렇다면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인식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신의 존재를 도대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바로 뒤따라오게 마련인데, 바로 이것이 이 회장의 첫 번째 질문 중 앞의 것이다. 역시나 답하기 쉽지 않은 물음이다. 사실은 모든 증명이 다 그렇다. 그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신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정의한 ‘패러다임(paradigm)’과 견주어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이자 ‘가치체계’이며 ‘문제해결 방법’이다. 우리가 대상을 관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색안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패러다임과 그것을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그 둘은 사실상 서로 뒤엉킨 하나의 혼합물이다. 시쳇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쿤이 증명해낸 것은 과학에서도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경험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정리하자. 신의 존재증명은 이성의 문제도 경험의 문제도 아니다! 신앙의 문제다! 신앙은 쿤의 패러다임(paradigm)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신념’이자 ‘가치체계’이며 동시에 ‘문제해결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달리 말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에 따라 당신의 판단과 삶 그리고 당신이 사는 세계가 완연히 달라진다는 뜻이다.
공리를 바꾸면 전개되는 세계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기독교에서 권하는 ‘회심(悔心)’이 의미하는 바다. 물론 회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쿤도 패러다임 전환을 ‘종교적 개종’ 또는 ‘정치적 혁명’ 에 비유했다. 어떤가? 신은 실제로 존재할까? 내 대답은 이미 들었으니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고대 사람들에게 쾌락주의를 가르쳤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렇다.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고도 하는가?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가?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그렇다면 고 이병철 회장의 이번 질문 역시 이 딜레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한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 죽음과 같은 악한 일이 일어나는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인즉 바로 이것이 무신론자들에게 가장 자주 그리고 맹렬하게 공격받는 ‘기독교 신의 아킬레스건’이다.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니라는 이야기철학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딜레마와 그 변형들에 대한 다양한 답변을 신정론(theodicy)이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용어는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테오스(theos)’와 정의를 뜻하는 ‘디케(dike)’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정의롭고 공정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인데, 철학자들의 신정론은 이른바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두 종류로 나뉜다.
그런데 아쉽게도 둘 다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 주장에선 벗어난다. 정통 기독교 신학은 신이 선하고 악은 없다는 일원론과 악이 존재하고 신은 무능하다는 이원론 모두를 부인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로 난 비좁은 ‘중간길’을 찾는다.
창조의 그늘진 쪽정리하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기독교 신정론은, 어떻게 하면 신의 선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존재를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약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기독교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신에게서 돌아선 인간의 죄 탓으로 돌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2세기에 동방신학(예컨대 정교회 신학)의 기초를 닦은 교부 이레네우스는 악을 신의 구속사(history of salvation) 안에서 성장과 진화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봄으로써 그리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악을 죄와 분리해 선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한 축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문제 자체를 해소하려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앞서 언급한 대로 또다시 근원적 물음에 봉착하게 만들고, 이레네우스와 바르트의 방법은 크든 적든 신의 신성을 제한하고 훼손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려 하는데, 3장 2절에서 이미 언급한 특별섭리와 일반섭리라는 ‘섭리의 이중적 구조’를 통한 해결방안이다. 내 생각에는 지금까지 소개한 세 가지 신정론의 장점을 모두 취하면서도 단점은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섭리’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신학 용어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를 떠받치는 튼튼한 기반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인간과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한다. 따라서 신의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신의 모든 예정은 섭리적이다.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신의 섭리는 이중적이다. 특별섭리와 일반섭리가 그것이다. 특별섭리는 신이 피조물들을 직접 개별적으로 돌보는 의지다. 바다를 가르고 해를 멈추고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 같은 기적은 그래서 가능하다. 반면 일반섭리는 신이 피조물들을 창조할 때 부과한 법칙, 곧 우리가 보통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원리에 위임해 돌보는 의지다. 여기에는 자연의 변화를 지배하는 과학법칙뿐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자유의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악이 발생한다.
이 말은 신은 질병·지진·폭풍·홍수·해일·가뭄 같은 일체의 ‘자연악’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오직 자연에 부과된 자연법칙들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신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 일체의 ‘인간악’과도 무관하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그 모든 도덕적 악이 나온다는 의미다. 요컨대 모든 악은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섭리의 이중구조를 통해 구축되는 신정론이다. 선은 신으로부터 오고 악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는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회장은 또다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 섭리의 교리대로 악은 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낳은 소산이라 하자. 그렇더라도 왜 신은 악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자연과 인간에게 준 것인가? 바꿔 말해 신은 악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배제한 자연법칙과 인간의지를 창조할 수는 없었는가?”
어떤가? 바람직하게 생각되는가신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원리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즉 자연과 인간에게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이다.
영국 태생의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존 힉은 지금의 사실적 세계와는 반대로 악(고통, 불행, 죽음 등)의 가능성이 모두 제거된 낙원을 가정하고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지 생각해보라 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세계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하며, 그들을 창조하고 사랑하여 선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려는 신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힉은 실제적 위험·어려움·고통·실패·슬픔·불행·좌절·죽음의 가능성 등을 가진 세계가 오히려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신이 도덕적·종교적으로 고양된 ‘인간을 만드는’ 데 오히려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미 1장 1절에서 왜 신은 우리 앞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를 역시 반사실적 가정법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때도 답은 우리를 자유롭게 살게 하려는 ‘신의 사랑’이었다. 그렇다. 사랑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신이 자연에는 자연법칙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악이 허용되는 까닭이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종교의 종류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래도 고급종교가 지향하는 가치는 진리·선함·아름다움·정의·사랑·자비·인자함 같은 인류보편적 가치다. 그리고 이런 가치의 최고 형태를 보통 ‘신성’ 또는 ‘성스러움’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종교란 ‘성스러운 가치를 체험하게 하고 그 가치에 의해 생활하게 하는 의례들과 믿음들의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의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가 신이라는 이름 아래 규정한 가치들(곧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신성, 최고 위대,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을 체험하게 하고 그것들에 의해 생활하게 하는 의례들과 믿음들의 체계가 곧 종교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 회장의 “종교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이다.
이 질문에 이어 이 회장은 종교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하고 묻는데.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대답은 종교적 욕구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남부지역과 스페인 북부지역 등 세계 곳곳에 산재한 구석기시대 동굴에서 발견되는 암벽화들을 보면 도구를 들고 사냥하는 내용과 사냥한 동물들을 위해 제의를 행하는 내용의 그림이 동시에 발견된다. 애초부터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일뿐 아니라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다.
그러나 이 같은 대답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 회장은 물론이거니와 당신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좀 더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누스와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종교의 임무는 ‘삶의 방향전환’, 곧 자만에서 겸허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 책 1장 2절에서 언급했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것은 ‘신념’과 ‘가치체계’와 ‘문제해결 방법’의 총체적 변환으로서 기독교 용어로는 회심 또는 회개라고 한다. 이 일은 ‘교훈’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종교가 하는 일은 결국 신앙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삶의 방향을 바꿔주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을 따라 사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가치를 좇아 사는 ‘가치중심적 삶(기독교에서는 신중심적 삶이라고 한다)’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삶의 방향전환’이 이뤄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곧바로 도덕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빛을 향해 돌아섰다 해도 그는 아직 어둠 속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종교인이라 해서 모두가 도덕적이지는 않은 이유다. 하지만 빛을 향해 돌아선 사람은 시간과 함께 차츰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곳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만일 그가 다시 신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라고 물은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할 때가 되었다. 종교란 ‘성스러운 가치를 체험하게 하고 그 가치에 의해 생활하게 하는 의례들과 믿음들의 체계’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삶의 방향을 ‘자기중심적 삶’에서 ‘가치중심적 삶’으로 바꿔놓아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아닌 것 같던데? 무신론자들은 당연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종교가 하는 일이 그리 바람직하다면 종교에 대한 폭넓고 뿌리 깊은 거부감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하는 점이다.
울고 싶던 차에 뺨 때려준 격적어도 2000년을 이어오는 종교에 대한 반감과 거부감은 대부분 종교 자체에서 나왔다기보다 그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과오에서 나왔다.그러나 7장 2절에서 이미 언급했듯 종교를 빌미 삼아 배척과 분쟁, 전쟁과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은-그가 유대교도든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대부분 그들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은 사실상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거나 개인적 원한과 경쟁심 또는 이기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기만하고 선동해 전쟁과 테러와 폭력을 자행한다.
종교가 반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 가운데 근대 이후 특히 부각된 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근대인의 눈으로 보니 종교적 진리는 미신 또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말인데, 바로 이것이 오늘날 무신론자들을 비롯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종교를 꺼리는 이유다.
거울인가 반석인가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과를 사과라 하고 사과가 아닌 것을 사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진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진리를 ‘사실적 진리’ 또는 ‘과학적 진리’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삶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道)에 대한 진술이다. 그래서 ‘삶의 진리’ 혹은 ‘종교적 진리’라고도 한다. 이 진리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명과 윤리의 존재이고, 인간은 이 진리가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만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사실적 진리는 경험할 수 있는 눈앞의 현실과 일치됨으로써 비로소 드러나지만, 삶의 진리는 경험할 수 있는 눈앞의 현실을 바꿈으로써 비로소 드러난다.
종교적 진리는 자연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삶, 바로 당신의 삶과 연관된다. 사실적 진리가 아니라 삶의 진리라는 말이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정리하자면 교회는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한 결과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전조이며 증거이고, 구현하는 도구이며 가꾸는 사역자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시원이자 교회가 떠맡은 사명이며, 도달해야 할 목표이고, 해야 할 사역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다.
현실의 교회는 죄가 많다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기독교인이 “의인이면서 죄인”이듯 교회도 “성도들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규정했다. 같은 의미에서 큉은 “현실의 교회는 죄가 많다”고 인정하며 “순결한 창녀”라는 상징어로 표현했다. “거룩함과 죄 많음은 교회의 양면”이라는 뜻이다. 한국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저자 양희송은 한국 교회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세 가지로 요약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이룬 놀라운 성장은 “교회 성장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으로 간주하고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성장주의에 힘입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스스로 무엇 하는 곳인지를 정의하지 못하고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입하겠다는 의지로” 일구어낸 고속성장은 오히려 스스로 무한증식하는 암세포와 같다는 것이 양희송의 판단이다. 신에게 드리는 예배가 공연 같아지고, 교회행정과 행사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닮아가고, 교회는 사교장이 되어가고 있다.
장승이나 단군상 및 불상 파괴 사건 등으로 드러난, 타 종교에 대해 공격적이고 무례한 프로테스탄트, 정권과 야합하여 정치·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속적 프로테스탄트의 모습은 승리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라고 양희송은 진단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교회사에서 중세 1000년 동안 너무도 익숙하게 보아온 가톨릭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위에서 이미 보았듯 교회는 본디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하는 모임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사명을 어떻게 수행했던가? 예수는 공생애 3년 내내 손수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고 세리와 창녀와 간음한 자와 같이 소외된 자들을 용납하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뿐 아니라 ‘행위’로 알렸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예수의 모든 ‘말’뿐 아니라 모든 ‘행위’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도달하는 결론은 매한가지다. 교회는 성화를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화를 위해 존재한다존 웨슬리는 교회의 본질은 오직 성도의 성화에 있으며, 교회는 단지 성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성화의 핵심은 ‘사랑’이고 사랑의 핵심은 ‘나눔’이다. 결국 성화의 핵심은 나눔이라는 말이다.
정리하자. 예수는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일일이 언급한 다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라고 당부했다. 자, 그럼 이런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만일 예수의 당부를 제대로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우리나라에 1500만 명쯤 있고 이런 성도가 모인 교회가 8만 개쯤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고 이병철 회장이 힐난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회에 만연하던 범죄와 사회적 시련이 확실히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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