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ǻ
아포리아
   
15000
2013�� 03��



■ 책 소개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정치인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와 내놓은 첫 번째 책! 

정치인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온 유시민이 자기 자신의 삶을냉정하게 성찰하면서 인생의 기쁨과 아픔,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을 쓰는 작업은 그에게 자신의미래를 새롭게 고민하고 설계하는 과정이었으며, 그는 책의 결론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렸다. 바로 자기다운 삶,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로 한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시기의 개인적·사회적·정치적경험과 그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삶과 죽음, 개인과 사회, 자유와 공동선, 진보와 보수, 신념과 관용, 욕망과 품격, 사랑과 책임, 열정과재능 등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여러 관념들을 깊게 들여다보면서인간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찬찬히 되짚어본다.

■ 저자유시민
저자 유시민이 말하는 유시민은 

저는 쉰다섯 살 먹은 중년 남자입니다. 고향 경주와 대구에서 20년,서울과 경기도에서 26년을 살았습니다. 5년은 공부하느라 독일에서, 3년은 군 복무를 위해 강원도 화천에서 보냈습니다. 1년은 법무부에서 주는밥을 먹으며 책만 읽었습니다. 대학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읽은 책으로 말하면 역사학도나 문학도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군 복무 시기와유학 시절을 제외하면 성년이 된 후 인생의 절반은 운동(movement)과 글쓰기 사이에서, 나머지 절반은 정치와 글쓰기 사이에서 방황하며살았습니다. 무엇이 줄기였고 무엇이 가지였는지 분명하게 나눌 수가 없습니다. 

조금 늦었다 싶지만 이제부터라도,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것은 책을 읽고 글을쓰면서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일입니다. 십여 년 전에는 분노를 참지 못해 정치의 바리케이드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지금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소망을 버릴 수 없어서 그 바리케이드를 떠납니다. 지식소매상으로서,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나름의 의미와 기쁨을 느끼며 살고 후회 없이 죽는 것이저의 희망입니다. 참고로 지난날 쓴 책 가운데 그나마 덜 부끄러운 몇 권을 소개합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기억하는 자의 광주』 『부자의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후불제 민주주의』 『청춘의 독서』 『국가란 무엇인가』

■ 차례
프롤로그- 나답게 살기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 가는 대로 살자 
내 인생은 나의 것 
왜 자살하지 않는가 
위로가 힘이 될까? 
놀고 일하고사랑하고 연대하라 

제2장 어떻게 죽을것인가 
죽음이라는 운명 
남자의 마흔 살 
나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찬 이성 더운 가슴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 
나는 무엇인가 
레이건의 작별 인사 
존엄한 죽음 
자유의지

제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쓸모 있는 사람 되기 
즐거운 일을 잘하는 것 
재능 없는 열정의 비극 
옳은 일을 필요할 때 친절하게
문재인과 안철수, 도덕과 욕망 
떳떳하게 놀기 
사랑은 싹이 난 감자맛 
아이들을 옳게 사랑하는 방법 
품격 있게나이를 먹는 비결 
글쓰기로 돌아오다 
기적을 일으키는 거울뉴런 
진보의 생물학 
제4장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신념의 도구가되는 것 
불운을 어찌할 것인가 
출생이라는 제비뽑기 
나는 영생(永生)이 싫다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 
육체와분리된 영혼 
이름 남기기 

에필로그 - 현명하게지구를 떠나는 방법 
참고문헌





어떻게 살 것인가


프롤로그 - 나답게 살기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이 책을 쓰기로 한 것이 정말 잘한 결정이었을까? 차라리 지식소매상에게 어울리는 다른 책을 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오래 덮어두었던 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것을 드러낼 용기를 냈다.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감추거나 꾸미는 습관과 결별했다. 내 자신의 욕망을 더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삶을 얽어맸던 관념의 속박을 풀어버렸다. 원래의 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가? 의미 있는 삶,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품격 있는 인생, 행복한 삶에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이것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미 예감한 중년들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내가 나름대로 찾은 대답을 이야기했다. 삶의 기쁨, 존재의 의미, 인생의 품격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빈다. 그 무엇도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그대들을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위로가 힘이 될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생의 품격과 성패를 결정짓는 중대사이다. 그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려는 관념의 유희가 아니다. 부조리 가득한 세상에서 존엄한 인간으로서 품격 있게 살아가려면 나름의 답을 찾아야만 한다.


종종 대학 학생회나 청년단체로부터 강연을 요청받는다. 그럴 때 초대를 한 젊은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지 미리 물어본다.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강연을 원한다고 할 때가 많다. 위로는 좋은 일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아픔을 덜어준다. 아프고 지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은 책도 신문 방송도 모두 힐링(healing)이 대세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가 위로와 치유의 효과를 내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말이 냉정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 말고도 위로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된다. 재산이 적어도 상관없다. 나이도 관계없다. 나는 힐링 열풍이 조금 불편하고 불안하다. 각자 남들을 조금 더 배려하고 제도를 더 합리적으로 바꾸기만 하면 모두가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나 걱정이 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타인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삶의 환경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들 뿐, 그 자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오늘의 청년들 역시 자기 책임이 아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생이 하루라면 20대 청년의 인생 시계는 이제 겨우 오전 9시에 왔을 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김난도 지음, 『아프니까 청춘이다』, 쌤앤파커스, 2010.)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로의 힘은 거기까지다. 아버지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彼岸)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이라는 운명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한 때가 언제였는지는,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긴 시간 진지하게 생각했던 상황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외할머니 장례식이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모두 너무 일찍, 심지어 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외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상실감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냥 다 살고 가셨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오래 살면 돌아가시겠지. 나도 어른이 될 텐데 결국은 죽을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내가 세상에 온 데에는 무슨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걸까?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게 될까? 두서없이 생각을 이어가는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집 뒤 대나무 숲을 쓸어가는 바람소리가 무서워졌다. 정체 모를 두려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청년들은 죽음을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아직은 자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내팽개쳐두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나는 요즈음 죽음에 대해서 예전보다 자주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자꾸 죽음이 생각나서 더 깊게 삶을 고민하게 된 것인지 선후를 알 수는 없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고민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일반적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개별적 주체적 사건으로서의 죽음, 내 자신의 죽음이다. 사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까? 잘 죽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 이런저런 대답을 생각해본다. 답을 꼭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길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더 큰 가치가 있다. 아직 젊은 사람일수록 더 깊이 있게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재능 없는 열정의 비극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우리 집 막내는 열정 넘치는 축구광이다. 공을 차는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유럽 빅리그 시즌이 열리기 직전 유명 선수들의 이적 현황과 이적료, 연봉의 변화, 감독 교체와 선수 부상, 구단의 재정 상태까지 축구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은다. 생중계로 경기를 보다가 선수가 교체되면 다른 선수의 포지션과 팀의 전술 운용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논평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축구이니, 이 아이는 축구 선수가 되는 게 최선이다. 축구를 직업으로 삼아 남들보다 잘하고, 그래서 돈도 벌면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인생은 시험 문제를 푸는 것과는 다르다. 정답을 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실행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천부적 재능이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재능이 있으면 재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더 집중한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결합한 1퍼센트 재능과 99퍼센트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


그런데 재미를 느끼고 집중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취향과 재능이 반드시 함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인생은 종종 비극이 된다. 우리 집 축구광은 공을 그런 대로 잘 찬다. 하지만 축구 선수로 성공할 만한 재능은 없다. 뇌는 리오넬 메시와 동급일지 몰라도 근육과 운동신경이 받쳐주지 않는다. 다 내 탓이다. 같은 조기축구회 회원인 유소년클럽 코치가 말했다. "아드님 공 차는 폼이 아빠하고 똑같아요." 대학생 시절 경제학과 대표 또는 조기축구회 주전 정도가 어렸을 때 못 말리는 축구광이었던 내 재능의 한계였다. 아마 우리 집 막내도 그럴 것이다.


생각이 자라고 사회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알게 된다. 어떤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다른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또 다른 것은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무 살쯤 되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괜찮겠다 싶은 직업 가운데 자기의 환경과 능력에 비추어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쪽으로 마음을 싣는다. 마흔 살쯤 되면 인생을 크게 바꾸는 선택은 하기 어려워진다. 마흔 이후에도 인생을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단이 너무 늦는 법은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자신이 일상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쪽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본다.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재인과 안철수, 도덕과 욕망

문재인과 안철수는 크게 다르면서도 많이 닮은 정치인이다. 두 사람은 삶의 역정과 전문 분야가 크게 다르다. 그러나 지향하는 가치는 비슷하다. 정책 노선도 두 사람 모두 진보적이며 온건하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능력과 태도를 가진 것도 닮았다. 하지만 가장 크게 닮은 점은 욕망이 아니라 도덕과 대의(大義)에 발을 딛고 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국민들도 같은 판단을 했다고 본다. 그래서 수많은 야권의 대선 예비 후보들 가운데 그 두 사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그들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을 출세 또는 권력쟁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를 직업 삼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정치를 한다.


큰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도덕적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대중의 신임을 모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대중의 욕망, 현실의 정치 세력을 구성하는 직업정치인의 욕망도 껴안아주어야 한다. 우리 정치는 이미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다른 정치인과 비슷해 보이게 된다. 도덕이 아니라 정치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불신과 마주치게 된다. 권모술수의 대가(大家)라느니, 대통령병 환자라느니, 김대중 대통령이 생전에 받았던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도덕과 권력, 탈정치와 정치 사이의 딜레마이다. 나는 안철수와 문재인 두 사람이 이런 어려움을 잘 견뎌내면서 도덕적 이상과 현실의 욕망 둘 모두를 이끄는 리더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젠 정치적 자기 검열 없이 정직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참고 견디는 삶에서 벗어나 일상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 야수의 탐욕과 싸우면서 황폐해진 내면을 추스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면이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정치적 욕망의 화신이라는 세상의 비난에 맞서 내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싸움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의심한다. 정치를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세상의 모든 비극과 불의에 대해서 내 몫의 책임이 없는지 살펴야 하는 게 괴로웠다. 왕의 심기를 살피는 신민(臣民)처럼, 변덕스러운 여론을 언제나 최고의 진리로 받들어야 하는 정치인의 직업윤리가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위선으로 보였다.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 삶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인지 모르겠다.


원래 정치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어 정치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던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면 정치가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 아래와 정치 너머의 변화가 없다면 정치도 더는 바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쁘게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두터운 먹구름이 걷혔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진보의 생물학

일과 놀이와 사랑만으로는 인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며, 그것만으로는 누릴 가치가 있는 행복을 다 누릴 수 없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면서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용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품격 있는 인생이다.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내는 아름답고 유쾌한 변화를 진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진보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定義)한다.


나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좋아한다.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 방식이다. 이것 역시 진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혈연 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일반과 비교하면 새롭고 덜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일부 사람들은 진보적인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일을 하지만, 진보주의 그 자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임이 확실하다. 크게든 작게든, 급격하든 점진적이든 생활환경은 늘 변화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필요하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


역사를 보면 진보주의는 패배를 거듭한 끝에 가끔씩만 승리한다. 수없이 많은 저항과 반란이 참혹한 패배를 당한 끝에 겨우 하나의 혁명이 성공한다. 그 혁명 다음에는 흔히 보수의 반동(反動)이 찾아온다. 그러면서도 사회와 문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진보적 사상이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 널리 퍼지고 일상의 행위 양식에 녹아들어간다. 그에 따라 문명은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정의로워진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진보의 거듭되는 패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선의 패배나 악의 승리가 아니다. 진화적으로 익숙한 것이 새로운 것을 이긴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는 전두환처럼 할 수 없었다. 1992년 보수진영으로 투항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는 전임자보다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를 했다. 2007년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를 개인적 수익 모델로 만들었지만 민주주의 정치체제 그 자체까지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2012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의 정책 공약은 5년 전 낙선했던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의 공약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진보 세력은 선거에 졌을 뿐 역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옳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 싶었던 시민들이 멘붕에는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보주의는 만인의 것이다. 누구든 유전적으로 무관한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기꺼이 내놓는 자발성을 발휘한다면 그 사람이 진보주의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와 유전적으로 무관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 그들의 복지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사적 자원을 기꺼이 내놓으려는 자발성, 이 모두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재능이며 본능이다. 이런 이타적 본성,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연대는 일, 놀이, 사랑과 더불어 삶을 의미 있고 존엄하고 품격 있게 만드는 제4원소이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연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금 이곳의 행복이 그들의 것이리라!"


제4장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출생이라는 제비뽑기

출생의 행운과 불운은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불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 받은 어떤 행운도 행복한 생활, 훌륭한 삶, 성공하는 인생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않는다. 출생의 불운도 훌륭한 삶의 가능성을 완전 봉쇄하지는 못한다. 출생의 행운과 불운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바꿀 수 없다. 행운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불운은 온전히 혼자 감당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한다. 누군가 곁에서 거들어 준다면 감사할 일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받은 출생의 행운을 생각하면서 내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어쩌면 내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출생의 불운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1녀 4남 중 넷째, 아들 중에는 셋째였다. 그런데 겨우 세 살 때 동생을 얻으면서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유년기에 심각한 영양실조와 전염병을 앓았다. 병은 나았지만 한쪽 눈이 완전히 실명되는 후유증을 남겼다. 평생을 따라다녔던 위장병도 그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그나마 별로 좋지 않았던 나머지 한쪽 눈의 시력에 의지해 평생을 사셨다.


아버지는 열세 살에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 살림이 어려웠던 탓에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혼자 공부한 끝에 십대 후반 청소년기에 혼자 일본 도쿄에 가서 낮에는 병원 약국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상업학교를 다녔다.


가족이 생긴 이후 아버지의 삶은 세 가지로 채워졌다. 학교, 책, 그리고 아이들. 취미 생활도 따로 없었고 자주 어울리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신혼 때는 출근하면서 어린 아내에게 하루 넉 자씩 한자 숙제를 내고, 퇴근 후에는 반드시 숙제 검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 덕분에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한자를 혼용한 신문을 읽는 데 평생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질을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도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이미 물려받았고 그 덕분에 오늘까지 이만큼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새로 알게 될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부모님은 생물학적 유전자뿐만 아니라 문화유전자(meme)도 물려주셨다.


내 인생에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8할이 행운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 인생은 정말 성공한 것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을 쓰고, 방송 토론 진행자로 유명해지고, 국회의원과 장관을 한 것을 가지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 그리고 내가 한 모든 일에 대해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버지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었을까? 훌륭한 삶이었을까?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한 그 순간 곧바로 의식을 잃었고 한순간도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 채 떠나셨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자평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세계에서 매 순간 충실한 삶을 사셨다. 아버지의 일은 학교, 사랑은 가족, 그리고 놀이는 책과 꽃이었다. 삶의 위대한 세 영역 모두에서 아버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명색이 글쟁이이면서 아버지의 삶을, 어머니의 삶을 한 번도 제대로 듣고 기록한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사진조차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할머니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려면 할머니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평지에 솟아오른 돌멩이가 아니다. 숱한 고비를 넘기며 이어져온 가족사의 굴곡 어디엔가 놓인 존재이다. 그 굴곡을 알아야 내가 진짜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다. 가족사를 탐색해보라. 당신의 내면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