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김정미
ǻ
아름다운사람들
   
16000
2012�� 11��



■ 책 소개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이있었다!
그들은 ‘지금을 사는 나’와 무엇이 다른가?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흐름 속 주요한 곳에는 역사가 된 ‘그들’이 있다. 그들은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손에 쥐었다. 그 방식들은 각자 달랐지만,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세상을 얻은 것이다. 

책에는 자신의 신념에 기반한‘양심’으로 세상을 움직인 빌리 브란트 같은 불세출의 정치가부터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며 기회를 만들어간 로알 아문센 같은 개척자들까지,오로지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손에 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역사가 된 그들’이 살아간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내 삶의방식을 고민하게 하고,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시대를 보는 눈을 넓혀 ‘나’와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게 할것이다.

■ 저자김정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에서 강의를 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작가와 다큐멘터리 작가를 거쳐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역사 속 인물과 사건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이와 관련한 연구를 병행하고있다. 역사를 전공한 이력 탓에 역사 자료에 대한 접근이 용이한 편이라 그 속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인간 군상과 사건들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재가공하여 사람들과 공유하고 공감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중매체 작가의 눈으로 역사 속 인물들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파악하여 역사적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극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특히 역사 속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에 대한자료를 모으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글로 옮겨 소개하는 작업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 「주간한국」에 칼럼 ‘역사 속 여성 이야기’를 연재하였으며,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인물과 역사&& 코너에 역사 속 인물을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공저하였고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어린이 역사인물사전』『천추태후』『연애의사생활』『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를 집필하였다.

■ 차례
들어가면서 
1. 진짜 양심은 세계를 움직인다 - 빌리 브란트
2. 카리스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3. 절대권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 아우구스투스
4. 변방의 북소리가 새 시대를 열다 - 태조 이성계 
5. 큰 비전이 만든 큰 미래 - 오스만 1세 
6. 정복에도 합당한명분이 있어야 한다 - 클로비스 1세 
7. 난세를 극복하고 천하는 덮은 혁신 - 오다 노부나가 
8. 자기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알아야 - 도요토미 히데요시 
9. 기다린 자가 최후에 웃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10. 치욕도 성공의 밑거름 - 누르하치
11. 꺾어질지언정 굽힐 수는 없다 - 그레고리우스 7세 
12. 역사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도 능력 - 필리프 4세 
13.신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 앙리 4세 
14. 개척인가 침략인가 - 바스코 다 가마 
15. 인맥 관리, 그 양날의 검 -호설암 
16. 준비된 시대에 준비된 통치자 - 건륭제 
17. 콤플렉스의 빛과 그림자 - 영조 
18. 뜻을 이룬 대신 시대를놓치다 - 흥선대원군 
19. 목적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 로알 아문센 
20. 이데올로기도 녹여버린 뜨거운 열정 - 체게바라 
21. 꿈의 왕국을 이룬 가장 현실적인 사나이 - 월트 디즈니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진짜 양심은 세계를 움직인다 -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1913∼1992)는 20세기 중후반 동서 냉전시대에 동구권 등 공산국가들을 상대로 긴장 완화를 모색하는 동방 정책을 펼친 정치가다. 그는 냉전의 한가운데서 동서 화해의 물꼬를 튼 평화의 정치가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조국 독일의 1차적 분단 책임은 이데올로기 갈등 때문이 아니라, 지난 시절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일의 뼈아픈 과오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정 어린 사죄와 반성이 있어야만 통일을 향한 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통해 국가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그 새로운 이미지 위에 새로운 독일의 통일 역사를 시작하려 한 것이다.


무릎 꿇은 총리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가 헌화를 하던 도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나치에 의해 희생된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올리는 진심 어린 사죄였다. 빌리 브란트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오랫동안 묵념했다. 12월의 추운 겨울날 위령탑 앞 콘크리트 바닥은 유독 차가웠지만, 빌리 브란트의 참회는 뜨거웠다.


빌리 브란트의 이러한 행동은 폴란드와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졌다. 서독을 대표하는 총리의 과감한 행동은 그동안 전범국가 독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세계인들의 선입견을 바꾸어 놓았다. 빌리 브란트의 진심이 담긴 사죄는 서방국가들뿐만 아니라 공산 진영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흔들어 놓았다.


빌리 브란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세계 언론들은 빌리 브란트의 이 사죄를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독일 통일 프로젝트, 나아가 유럽 전체의 평화와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동방 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동방 정책

빌리 브란트는 1969년 10월 서독 연방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가 되기까지는 몇 차례의 좌절과 정적들의 인신공격 등이 있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세 번의 도전 끝에 기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정치 인생을 살아오면서 생각해왔던 외교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유럽을 향한 화해의 외교정책을 동방 정책이라고 부른다.


1970년 8월에 체결된 서독-소련 조약에서 빌리 브란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동독의 국경선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對)동유럽 화해 정책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간섭 하에 들어간 동독은 그 영토가 전보다 축소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국경선 인정은 서독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정책에 의구심을 갖고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서방, 특히 미국은 빌리 브란트의 이러한 동방 정책에 표 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자 세계인들의 그런 의구심은 불식되었다. 한 나라의 총리로서는 매우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사죄였고 이는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후 동유럽도 서유럽도 빌리 브란트의 화해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외교적인 변화는 독일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유럽 수출의 길이 열리면서 동방 정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독일 산업 및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 동방 정책은 빌리 브란트의 사퇴 후에도 계속되어 서독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1970년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화해의 정책들은 20여 년간 꾸준히 지속되어 동서 간의 냉기를 녹여갔고,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빌리 브란트는 그의 동방 정책으로 인해 1971년 10월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빌리 브란트는 독일 통일의 염원을 이룬 2년 뒤에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빌리 브란트는 여전히 독일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가로 사랑 받고 있다.


현대 정치인들은 수많은 역사의 선택과 판단의 저울대 위에 서 있다. 때론 스스로가 저지른 과오로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그 자질을 의심 받고 함량을 가늠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 빌리 브란트처럼 누구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솔직하게 과거를 청산하고 대중이 들이대는 판단의 잣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정치가로 거듭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파의 이익에 눈이 먼 가짜 정치가가 아닌 진짜로 정치하는 진짜배기 정치가로 말이다.



큰 비전이 만든 큰 미래 - 오스만 1세

오스만제국은 14세기부터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일어나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와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600여 년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16∼17세기가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로 수도는 오늘날 이스탄불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이었으며, 튀르크계의 오스만왕조가 제국을 통치하였다. 전성기 시절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동서로는 카스피 해와 페르시아 만 연안부터 대서양 연안의 지브롤터 해협까지, 남북으로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서 유럽의 오스트리아 경계에 이르렀다.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동서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문화적으로도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다원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렇듯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오랫동안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였던 오스만제국이지만 처음부터 강대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혼란기에 소아시아 지역에서 명멸하던 그저 그런 튀르크계 작은 부족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오스만제국의 창시자인 오스만 1세(1258∼1326)이다. 오스만제국이라는 국명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을 만큼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컸다. 오스만 1세가 통치 초기 내건 국가 비전은 후대에도 계속 지켜졌고 오스만제국의 정체성과 통치 이념이 되었다. 오스만 1세가 후손에게 제시한 국가적 비전은 세계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이자, 오스만 문명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600년 오스만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다

왕국을 세운 오스만 1세에게는 몇 가지 선택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내륙으로 들어가 튀르크족을 통합하여 영토를 확장할 것인가, 지중해 쪽으로 비잔틴의 영토를 넘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스만 1세는 이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비잔틴과의 싸움은 튀르크족 통합보다 더 어려운 전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었다. 오스만 1세의 선택은 탁월했다. 비잔틴 공격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전략이었다. 비잔틴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강해진 오스만의 세력권 안으로 여타 튀르크족은 별 어려움 없이 병합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가 시작한 비잔틴 공략은 훗날 그의 후손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는 결과를 낳았다.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의 탄생이었다.


오스만 1세는 영토 확장 문제 외에 내치에도 큰 틀을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오스만 1세는 스승 에데바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정책 방침을 아들 오르한 1세에게 남겼고 이를 세세손손 계승하게 하였다. 오스만 1세의 정책은 이후 오스만왕조의 중요한 정책 방침이 되었다.


그는 후세의 술탄들에게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올바른 인재의 선택과 학자와 예술가를 잘 대우할 것, 현자들의 가르침을 적극 수용할 것 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알라의 힘에 왕권을 의탁하고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며 이교도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라고 주문하였다. 그의 정책 방침은 이슬람교 안에서 백성을 애민하며 정치적 공정성을 잃지 않고 문화를 부흥시키라는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오스만 1세가 제시한 기본 정책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며 계승하였기에 6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국가 통치에 있어서 애민과 공정성 그리고 문화 육성을 중심에 두라는 오스만 1세의 후대를 향한 국가 비전은 600년간 오스만제국을 지속시켰으며 뛰어난 이슬람 문명을 창조하게 만들었다. 칼로 일어섰지만 칼에 의존하지 않고 종교 앞에 겸손하며, 학자와 예술가를 보호하고 무엇보다도 정치에 있어 공정성을 지켜나갔기에 오스만제국의 600년 역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한 집단의 리더가 후세를 위해 그려주는 비전은 세력을 확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되 먼 비래의 비전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을 이끄는 자의 중요한 자질이다. 역사적으로 비전이 없는 집단의 행보는 한때 영화를 누릴지는 모르나, 결국은 방향성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오스만 1세의 미래를 향한 큰 그림은 6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가능하게 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리고 있는 비전은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자기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알아야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역사 속 일본인일 테지만, 그만큼 가장 악명 높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였던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16세기 한국과 중국과 일본, 즉 동아시아의 역사 판도를 크게 바꾼 사건이었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입장에 따라 그 역사적 인물평이 엇갈리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인생사 하나만 관망해보았을 때도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일본에는 울지 않는 새라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전국시대의 3대 무장인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잡아온 새가 울지 않을 때 각 장군들의 반응에 대한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필요 없으니 죽인다고 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가 울도록 그 앞에서 재롱을 떤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3인 무장의 성격과 그 운명을 잘 표현해주는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국시대 말기의 일본 통일은 성질 급하고 용맹한 오다 노부나가의 맹렬한 통일 전쟁을 통해 그 기반이 닦였고, 뒤이어 지략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계승자를 자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통일된 일본 땅은 결국 때를 오래 기다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졌다.


이 울지 않는 새는 얼핏 마지막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인 듯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다. 오다나 도쿠가와의 방식은 죽이거나 기다리는, 어찌 보면 자신의 입장과 성격에 맞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새를 울게 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울지 않는 새를 울게 하기 위해 새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는 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단시간에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인데, 그 방법이 재롱이라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인물이 미천한 지위에서 일어나 일본 전체를 통일하기까지 그가 살아왔던 인생의 방식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며, 그가 온갖 노력을 다해 얻은 나라를 왜 도쿠가와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 수 있게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택한 일명 재롱이라는 방법은 빠른 시일 내에 원하는 것을 얻는 데는 매우 주효한 방법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얻은 것을 지키고 가꿀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또 새 앞에서조차 재롱을 부릴 수 있는 그 소탈함 역시 아래에서 위로 신분 상승을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의 품위와 인성을 갖추기에는 상당힌 부족한 것이었다. 중심을 잡지 못한 그의 소탈함은 그가 나라를 가졌을 때 경솔과 만용으로 탈바꿈하였고, 그것이 결국 헛된 망상을 품게 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결국은 그 자신이 가졌던 나라마저도 도쿠가와에게 얌전히 양도하는 꼴이 되게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매우 임기응변적으로 일을 완수해가며 눈앞의 목표 달성에는 전력을 다하는 남자였지만, 긴 앞날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지혜와 식견이 없는 근시안적인 사람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나라를 손에 쥐었지만 결국은 잃어버리게 된 이유였다.



역사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도 능력 - 필리프 4세

프랑스 카페왕조(카롤링거왕조를 무너뜨린 위그 카페에 의해 시작된 왕조)의 11대 왕 필리프 4세는 왕권을 신장하여 프랑스의 통일 체제를 갖추고, 로마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분쟁에서 이김으로써 교황권을 누르고 절대왕정 시대로 가는 초석을 놓은 왕으로 평가된다.


필리프 4세(1268∼1314)에 이르러 프랑스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로 가는 길을 닦았다. 필리프 4세의 치세 중에 중앙집권제적인 관료제와 통치 기구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정치·경제적으로 이전의 봉건적 영주제와는 다른 개념의 사회가 시작되려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법에 정통했던 필리프 4세의 관리들은 이전 종교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체계를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필리프 4세의 치세부터 국왕은 하느님이 절대권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도록 임명한 지상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이전에 교황 중심으로 전쟁을 치렀던 십자군 전쟁 시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필리프 5세는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든 것이 왕인 본인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뒷받침할 관료 학자군을 자기 옆에 두었다. 이것은 이전의 봉건 영주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중세적 세계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각이었다. 왕국은 왕의 것이라는 주장 하에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국토 전체에 자신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려 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했다. 또한 신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종교단체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필리프 4세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 이후 팽배해진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왕권 강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욕망 실현뿐만 아니라 중세의 해체라는 시대적 변화를 앞당겼다.


절대왕정으로 가는 첫발을 내딛다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은 봉건적 장원 제도가 붕괴되고 도시가 더욱 성장하였으며 민족과 영토를 중심으로 한 절대왕권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 나아갔다.


필리프 4세는 그 개인적 탐욕이나 정치적 꼼수 등을 볼 때 절대 선량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흐름을 막지 않고 이에 적극적으로 편승해 역사의 발전을 견인한 인물로 평가할 수는 있다. 그는 종교와 귀족 중심의 폐쇄된 사회를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과 상업 인구를 위해 개방함으로써 한발 더 나간 세상을 열었다. 때로 삶은 고결하나 현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 구습을 고집하여 역사를 후퇴시키는 리더들도 있다. 그에 비해 필리프 4세는 자신의 이익에 무심하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챙길 줄 아는 리더였다.


현재의 기득권이나 늘 해오던 구태에 젖어 역사의 전진을 막아서는 리더들의 모습을 우리시대에도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들에게 필리프 4세의 영악하고도 유능한 행보를 일깨워주고 싶다.



인맥 관리, 그 양날의 검 _ 호설암

호설암(1823∼1885)은 19세기 말 중국 청나라를 주름잡던 거상으로,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등 중국사의 혼란 속에서 변화무상한 권력의 지각변동을 잘 이용해 그 속에서 남다른 인맥 관리와 기회 포착을 통해 거부가 되었다.


호설암은 "사업가는 모름지기 칼날에 묻은 피를 핥을 수 있는 배짱을 가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윤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상인의 세계관을 피력한 것이다.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거부(巨富)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도 했다. 그래서 호설암은 상술과 상도를 넘나드는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청나라 말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위치에서 일어나 막대한 부를 쌓은 중국 최고의 상인이 되었고, 또 이로 인해 이룩한 모든 부가 덧없이 사라지는 모습 또한 생생히 목격하고 죽은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장사의 신

호설암은 10년 만에 중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부를 축적하고 심지어는 청나라 정부로부터 상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 수 있는 관직을 받아 홍정상인이 되었다. 그야말로 고속 성장인 것이다.


그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거부가 된 데는 특별한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인맥 관리였다. 호설암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사람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들을 후원했으며, 기회가 생겼을 때 이를 놓치지 않는 기민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변화무쌍한 19세기 중국사를 누구보다 잘 읽어냈으며, 변화의 위기 속에서 이익을 취할 길을 언제나 앞장서 개척해 나갔다. 그는 19세기 말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으며, 그러면서 중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신감을 잃지도 않았다. 가난한 시절을 기억하여 부유한 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한 것도 중국 상인으로서는 호설암이 처음이었다.


상도와 상술을 넘나든 사업가

호설암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돈을 버는 데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상술과 상도를 넘나들며 사업을 확장해간 사업가였다. 그는 비록 관과 결탁하기는 했지만 왕유령, 좌종당 등의 탁월한 인물에게 투자할 수 있는 모험심을 가졌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는 신의도 보여주었다. 시대적 한계로 인해 관상 상인이 되기는 했으나 너무나 부패한 관료들은 멀리 했으며, 제대로 된 인물의 경제적 배경이 되려고 했던 셈이다.


막대한 부는 상인 일개인의 노력이나 탁월함만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분위기와 적절한 타이밍, 개인의 사업 능력 등도 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겠지만,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 개인 개인의 수요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호설암은 청나라 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했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호설암은 장사의 근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호설암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정부와의 결탁만 믿고 무모한 모험을 벌이다 파산하였다. 사람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맞은 당연한 몰락이었다. 장사의 기본에는 사람이 있다.


오늘날의 경제도 호설암의 기본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막대한 부의 배경에는 반드시 이를 지탱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소위 재벌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기업들도 가장 기본적인 이 원칙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을 잊은 호설암이 한꺼번에 몰락했듯, 재물은 이를 가능케 한 사람을 잊을 때 함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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