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것

   
후베르트 필저(역자: 김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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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트리
   
15000
2012�� 06��



■ 책 소개
color=#ff0000>우리의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18가지 인류 최초의 것들!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일구어 낸 크고 작은 것들,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어 낸 크고 작은 변화들을 찾아 가는여정을 담은 책. 우리를 진화시킨 새로운 것은 어떻게, 언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생겨났을까? 
‘타이스 고고학 저술상’을 수상한 세계적 고고학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풍부한 고증자료와탄탄한 학문적 설명으로 인류 최초의 것들을 치밀하게 탐색한다. 최초의 직립보행에서부터 최초의 신전과 예술품을 지나 최초의 수학자에 이르기까지,인류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최초의 것 18가지를 고고학과 역사, 과학 분야의 풍부한 사례를 근거로 명쾌하고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 저자 후베르트 필저(HUBERTFILSER)
우리를 진화시킨 새로운 것은 어떻게, 언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생겨났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직립보행에서부터 최초의 맥주를 거쳐 최초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최초의 것들 18가지를 연대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그 최초의 것들이 발생시킨상황을 재구성하는 동시에 우리의 뿌리 깊은 인간적 특성과 진보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위대한 학자들의 학문적 결과를 바탕으로과거의 흔적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모았을 뿐 아니라, 그동안 잃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삶의 세계들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재구성하고자 노력했다. 이책의 집필을 위해 그는 직접 인류 진화의 옛 현장들을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오래전에 사라진 지형과 그곳에 살던 동물들의 세계를 다룬 수많은원전들을 참고했으며, 수많은 학자들과 많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저자는 또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에서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다. 최초의살인자는 우리가 오늘날 찾아낼 수 있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최초의 말은 녹음될 수 없었다. 근원을 찾아내려는 연구가 어쩔 수 없이 현재초기 단계에 있는 것들도 몇몇 있다.

저자는 인류 최초의것들을 다루는 시도 자체가 주제의 성격상 일시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일찍이 언젠가는엄청난 모험이었고, 그 배후에 선조들의 훌륭한 기량이 숨어있음을 이 책을 통해 보여 준다.

후베르트 필저는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경제 부문 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잡지 「쥐트도이췌 차이퉁 지식」을창간했다. 현재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경제 기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서독 텔레비전방송국의 경제 방송 ‘Quarks& Co’에서 근무하고있다. 2007년 타이스 고고학 상을 수상했다. 현재 뮌헨에 살고 있다.

■ 역자 김인순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칼스루에 대학과 함부르크 대학에서수학했으며, 고려대학교 독문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옮긴 책으로 『깊이에의 강요』『열정』『꿈의해석』『기발한 자살여행』『저지대』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직립 보행 
최초의 도구 
최초의 이주자 
최초의 불 
최초의 언어 
최초의 살인 무기
최초의 예술가 
최초의 옷 
최초의 음악 
최초의 가축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신전 
최초의 정착민
최초의 관리 
최초의 푸른 눈 
최초의 맥주 
최초의 스포츠 대제전 
최초의 컴퓨터 
연표 
참고 문헌





최초의 것


직립 보행

토로스 메날라(아프리카 차드의 주랍 사막에 위치한 지역으로 2001년에 이곳에서 700만 년 전의 원시 인류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의 두개골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모래와 태양이 지배한다. 700만 년 전 토로스 메날라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 그곳은 거대한 호숫가였다.


미셸 브뤼네는 700만 년 전 원인[猿人, 인류의 진화 단계는 보통 원인(猿人,) 원인(原人,) 구인(舊人,) 신인(新人)으로 대별된다.]의 두개골을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 종의 가장 오래된 표본이다. 브뤼네는 그 원인을 투마이, 즉 삶의 희망이라고 이름 지었다.


투마이는 몸집이 작은 편이며 오늘날의 유인원들처럼 전신이 털에 덮여 있다. 연구가들은 투마이가 죽었을 때 겨우 11살이었다고 추정한다. 그의 머리는 작고 뇌의 크기도 350㎤에 불과하다. 그러나 투마이는 이미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투마이가 인간 계보의 처음에 자리한다고 믿는다.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의 이마 뼈는 원숭이처럼 불룩 튀어나왔고, 뒷모습은 유인원처럼 보였다. 그 반면에 약간 닳은 작은 송곳니처럼 보이는 치아의 특성들은 인간 계보에 배열할 것을 시사한다.


일찍이 700만 년 전 거대했던 차드 호수의 퇴적물 속에 사실 투마이의 많은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정확한 분석은 어려운 일이다. 허벅지 뼈는 아예 소실되었고, 두개골은 수백 개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어야 했다.


하지만 작은 송곳니들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흔히 유인원들은 다른 동물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동족들을 위협할 수 있는 커다란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투마이의 경우에는 그 점에 변화가 있었다. 투마이의 조상들이 위협적인 몸짓으로 경쟁자들을 쫓아내 암컷을 감동시켰다면, 이제 분명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신체상의 작은 변화는 엄청난 사회적인 혁신의 표시이다. 송곳니가 작아지면, 그것은 한 집단의 성원들이 좀 더 강력한 사회적인 연합체를 결성해서 서로 협동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것은 서서히 파트너 관계를 맺고 집단의 유대감을 다지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탄생을 의미한다. 연구자들은 작은 송곳니와 직립 보행이 실제로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파악했다. 그것들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투마이와 그의 종족들은 왜 직립 보행을 시작했을까? 베를린의 진화 생물학자 카르스텐 니미츠는 예전에 나무 위에 살던 원인들이 동시에 새로운 환경, 즉 물을 개척했다고 믿는다. 약 800만 년 전 열대 우림의 식량 공급이 줄어들자 원인들은 강과 호수에서 먹을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물리학적으로 보아서 원숭이들이 물속에서 걸을 때는 몸을 똑바로 세우는 편이 더 편하다. 현재도 많은 원숭이들이 그렇게 한다. 그것이 도태의 이점이라고 니미츠는 말한다. 물속에 최상의 식량이 있었고, 그 식량에 접근하는 것은 진화에 유리했으며, 그걸 위해 직립 보행을 배울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직립 보행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물가 이론이 가장 타당성 있다.


처음부터 직립 보행은 성공적인 모델이었다. 아주 많은 이점들을 가져오는 바람에 우리의 몸이 수백만 년 동안 거기에 맞추어 상당히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다리는 점점 길어지고 팔은 점점 짧아지는 형태의 변화뿐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 변화시킨 진화가 우리 인간들에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결국 끈기 있게 달리는 장거리 주자가 되었다.



최초의 도구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는 약 260만 년 전에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초기 인류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최초로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뇌가 커진 덕분이다. 그 당시에 이미 뇌의 크기는 700㎤에 달하는데, 그것은 거의 오렌지 하나의 크기에 맞먹는다. 뇌는 갈수록 인간 스스로 창조자가 되도록 뒷받침해 준다.


원인(原人)이 최초로 사용한 도구들은 돌을 쳐 내 끝을 날카롭게 만든 석기들이다. 그 도구들과 더불어 260만 년 전에 새로운 시대, 이른바 석기시대가 시작된다. 그 당시 원인(原人)들은 뭔가를 발명하고 계속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원인(原人)들은 끝이 날카로운 돌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똑똑히 안다. 예전에는 고기 한 조각을 허겁지겁 이빨로 물어뜯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안전한 곳으로 운반해야 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래서 대개는 그런 모험을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손에 넣기 어려웠던 고기를 이제는 잘라낼 수 있다. 그리고 날카로운 돌들을 이용하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자르기에도 좋다. 커다란 살덩어리는 그야말로 오래오래 씹어야 하는 탓에 고기 조각 자르기는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돌을 이용하면, 뜯어내기 어려운 마지막 살점까지도 뼈에서 발라내거나 또는 뼈에 금을 내어 기름지고 영양가 높은 골수까지도 빨아먹을 수 있다.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서쪽에 위치한 로칼라이나 말라위 같은 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비슷비슷한 패턴에 따라 제작된 듯 보이는 석기들이 나중에 출현한다. 이런 이유에서 학자들은 260만 년에서 160만 년 사이의 도구들을 올두완 문화라는 개념으로 모아 부른다. 이 이름은 최초의 석기들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것에서 유래한다. 그보다 더 오래된 도구들이 아마 앞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흔적에서 이미 숙련된 기술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제가 할 일을 배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260만 년 전의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명한 일만은 아니다. 자동화된 공정에 이르기까지는 안정된 사회 구조 속에서 오랜 시간 훈련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일들은 이미 초기 단계에서 아주 복잡해서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능숙하게 구사하기 어렵다. 그리고 훈련은 기술을 가르쳐 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보고 배울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공동체 없이는 도구도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의 협동만이 이러한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최초의 석기들의 주요 자질은 날카로움과 내구력이었다. 그런 다음 다른 자질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대칭과 색깔. 인간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완벽한 형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의도적으로 돌의 색채를 고려해서 재료를 찾았던 게 분명하다. 차츰 아름다움과 조화에 대한 의식이 깨어난다. 주먹 도끼라는 멋진 도구가 그런 발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주먹 도끼는 인류사의 한 시대를 장식한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100만 년 동안 원인들의 수공업을 좌지우지한다.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의 크리스토퍼 헨실우드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은 수많은 실험을 통해 그 옛날의 테크닉을 재구성했다. 그들은 그 방식을 눌러떼기(Pressure flaking)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발견된 화살촉들이 실제로 불에 달구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섭씨 300도에서 400도 사이의 불은 석영을 함유한 암석의 화학 구조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래층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모닥불에서 얻어 낼 수 있는 더 높은 온도는 돌의 자질을 되레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인간과 물체의 관계는 인류사의 가장 오래된 관계로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를 둘러싼 물체들과 우리의 관계는 정확히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우리 주변의 물체들이 마치 우리 사회의 거울인 듯 보인다.



최초의 살인 무기

유인원들이 지금도 경쟁자를 커다란 송곳니로 물어 죽이듯이 우리의 선조들이 옛날부터 같은 인간들을 죽였을 가능성은 아주 다분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살인적인 무기를 이미 700만 년 전에 상실했고, 따라서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 같은 보조 수단에 의지했다. 송곳니의 상실과 더불어 경쟁자를 위협하는 몸짓도 도태되었다. 위협적인 몸짓이 차츰 줄어들었다는 것은 모종의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차지하기 위한 주도권 싸움에서 위협적인 몸짓을 동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행동 양식이 발달하고, 우리의 선조들은 서로 협력하는 것을 배웠다. 결국 그것은 서로 주고받음, 교환과 소통의 유용성에 투자하는 인간의 전략이다.


특히 여자들을 차지하는 것이 문제되는 경우, 원인(猿人)들이 경쟁자들과 어떤 식으로 대치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우선권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때로는 살인으로 이어졌다고 충분히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있었을 폭력의 흔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인간이 언제 최초로 의도적으로 살인을 자행했는가, 또는 언제 최초로 탐욕이나 살해 욕구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죽였는가, 언제 최초로 교활하고 아주 잔인하게 사람의 목숨을 앗았는가 하는 물음들은 제기할 수 있다. 그런 저열한 동기들은 뇌의 발달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뇌가 서서히 커지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식적으로 석기를 활용하기 시작했던 260만 년 전에 그런 일이 처음 발생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악행을 도모하고 살인을 자행한 최초의 명백한 흔적은 프랑스 모르기우 곶의 동굴에서 발견된다. 그 동굴은 마르세유 동남쪽,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경사진 백색 암벽에 있다. 살인을 묘사하는 그 가장 오래된 그림에서 화살 혹은 창이 살해당한 남자의 가슴을 꿰뚫고 있다. 2만 7000년 전에 그려진 그 벽화는 코스케 동굴 안에 있다. 그 동굴을 발견한 앙리 코스케에 의하면, 석기 시대에 살인이나 사형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인간은 그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인간이 농경과 목축에 눈을 뜨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폭력적인 사망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상호 협력이 커다란 시험대에 오른 게 분명하다. 풍족한 생활과 많은 소유물은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분업을 토대로 발생한 계급 제도는 불만을 낳는다.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은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 귀중한 것,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반드시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 환경은 부정적인 감정들, 질투심과 분노, 노여움, 공격적 태도의 온상이다.


살인 동기들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무기들만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오늘날 살인은 아주 먼 거리에서도 가능한 일이며 컴퓨터 기술에 힘입어 익명의 추상적인 행위가 되었다. 20세기는 살인 통계의 역사에서 슬픈 정점을 표시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1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원시 시대부터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함없다. 모든 살인의 배후에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살인 충동이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뇌에 깊이 자리 잡았으며 오로지 유발 인자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원시 시대 이후로 선과 악의 양극이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다. 널리 알려진 사회 심리학적인 실험을 통해,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지금까지 형법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대학생들이 역할 놀이에서 얼마나 순식간에 잔인한 감독관으로 변모하는지 세상에 보여 주었다. 그러니 나 자신은 절대로 살인을 하거나 살인 조직의 일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살인은 언제나 인류 역사의 동반자였다.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고,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죽음은 살인이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게다가 그것은 정착한 농민 아벨과 떠돌아다니는 목자 카인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인에의 욕망을 제거할 수 없는 탓에 반드시 그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최초의 예술가

블롬보스 동굴에서 고고학자 크리스토퍼 스튜어트 헨실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신구를 발견하고 열광한다. 우렁이 껍질들은 겨우 완두콩 크기만 하고, 오랜 세월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지라 왕실의 보석이라기보다는 칙칙해 보인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고고학자들에게 그 황토로 붉게 칠한 껍질들은 언젠가 그곳에서 현대적인 정신을 지닌 인간들이 작업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그런 종류의 장신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정신적인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자라나는 뇌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십만 년 전의 초기 인류도 그 비슷한 크기의 뇌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은 초기 인류가 남긴 물건들을 통해서만 정신적 발전을 추론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도구들이 더욱 정교해졌다. 예를 들어 기술적인 수단을 동원해 칼날이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들은 집단의 유대를 강화시키면 이롭다는 것을 터득했다. 물건을 교환하고 비상시에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결속이 중요했다. 이런 지속적인 유대감을 위해서 인간은 가시적인 징표를 개발했다. 그것은 아주 독특하고 근본적으로 정신적인 성과이다. 예를 들어 그런 식으로 집단 내에서의 서열을 표출할 수 있다. 또는 그것으로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 주어서 상대방의 호의를 확보하려고 했다. 인간이 아름답게 만든 조개 목걸이를 그러한 최초의 표징으로서 이용했다는 것이 독특하게 감동적이지 않은가?


7만 7000년 전에 해수면은 지금보다 약 25m 정도 더 낮았으며, 당시 해안은 블롬보스 동굴로부터 3km 떨어져 있었다. 동굴 주변에는 샘물이 있었고 과일과 영양이 풍족했다. 당시의 동굴 인간들은 해부학적으로 우리 현대 인간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상징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려 했고 또 표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손재주도 아주 능숙했으며 다양한 재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우렁이 껍질들은 모두 비슷하게 처리되었고 껍질의 가장 얇은 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인간이 비교적 커다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곳, 핵가족을 넘어서는 큰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곳 어디에나 예술과 상징적인 묘사가 존재한다. 그런 생활양식은 더 복잡한 의사소통을 요구하고, 또 그런 의사소통은 예술이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상징을 통해 아마 점점 더 많이 이루어질 것이다. 상징은 동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해석 가능한 것이다. 특수한 표징이나 장신구를 통해서도 특정 집단에 속하는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엄청난 진보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동굴 푸마네에서 발견된 뿔 달린 사람의 그림은 작으며, 예술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그림을 제외하면 인류사의 가장 오래된 그림들은 현재 프랑스의 쇼베 동굴에 전해져 내려온다.


"숯의 짙은 검정색, 점토의 갈색, 붉은 황토나 또는 불그스름한 깨진 철광석. 그는 코뿔소들부터 시작할 생각으로 소나무 숯 조각을 선택한다. 먼저 힘차게 뿔과 주둥이를 그린 데 이어 앞다리와 배를 그린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머지 몸통을 그리는 데 몰두한다. 그런 다음 왼쪽 위로 비스듬히 오록스(중세까지 유럽에 서식했지만 그 후로 멸종한 소)를 그리기 시작해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끝으로 그림 한복판에 비스듬히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네 마리의 말을 그리는 데 전념한다. 그는 다시 왼쪽 위에서 시작한다. 화가는 말들을 그리려고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남겨 두었다. 그에게는 말들이 가장 중요하다. 말들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앞의 소들 쪽으로 콧구멍을 살며시 내밀고 있다. 갈기는 위를 향하고 있다. 말들이 서로 밀착해서 앞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는 오로지 숯만을 이용해 윤곽을 그린다. 처음 선을 그리기 시작할 때와 마무리할 때는 숯을 좀 더 세게 누른다. 그러면 선이 더 굵게 그려지고, 그림에 생동감이 살아난다."


1994년 동굴학자 장 마리 쇼베 팀이 발견한 쇼베 동굴의 역동적인 동물 그림은 3만 5000년 전의 것이다. 깊이 500m 넓이 약 8000㎡ 크기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된 사자, 코뿔소, 매머드, 말, 표범, 부엉이, 곰의 그림 500여 개에 대한 실험실 연구 결과는 아주 매혹적인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예를 들어 벽에서 발견된 수많은 긁힌 자국들은 예술가들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벽 표면을 손으로 말끔히 문질렀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인간들이 수천 년 전 황야 어딘가에서 자신들이 그리는 작품의 높은 품질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리고 일부 사소한 부분을 교정한 흔적이 있긴 하지만, 작품의 대부분은 한 번에 그려진 듯 보인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들이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프랑스와 스페인 북부 지방에는 벽에 신비한 그림들과 함께 상징적인 기호들이 그려진 많은 동굴들이 있다. 그 동굴들은 거주지가 아니었고, 그런데도 인간들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그림들의 메시지는 영적인 사유의 근원이다. 분명 그 동굴들은 사회적인 삶에서 공동체의 종교적인 제식 장소 역할을 했다. 그 예술 작품들은 신화 세계의 일부로서 제식에 포함된다. 그림들은 그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의 기념비와도 같다.



최초의 신전

베를린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16년 전 처음으로 괴베클리 테페를 찾아갔을 때, 터키의 대도시 산리우르파의 성문으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그 얼마나 웅장한 성지가 자리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시설은 엄청난 석조 원형 구조물 20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교하게 깎아 만든 총 200여 개의 기둥과 수 미터 높이 수 톤 무게에 이르는 조각상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것은 영국 남부의 스톤헨지보다 규모도 더 클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7000년 더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만 2000년 전에 그 산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괴베클리 테페는 문명의 근원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최초의 신전을 지었으며, 아마 최초의 신상들도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들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념비들이다.


산 전체가 하나의 독특한 신전인데, 2000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다. 그때 막 농경과 목축을 생각해 냈지만 아직 정착 생활까지는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은 신전이었다. 1년 내내 수천 킬로미터의 지역을 이리저리 떠돌며 흩어져 사는 무리들이 오로지 종교적인 예식을 치르기 위해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 동기는 가령 중요한 씨족장의 죽음이었을 수 있다. 몇몇 원형 구조물 아래에서 어쩌면 인간의 뼈가 놓여 있을지 모를 석판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신전 시설의 겨우 일부만이 개방된 탓에 연구자들은 아직 그 석판들을 연구하지 못했다.


석기 시대에 씨족들은 이곳저곳 떠돌면서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만날 것인지 약속할 수 있다. 오늘날 사하라의 몇몇 유목민 부족들처럼 대자연에서 방향 감각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절의 순환과 달의 운행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언제 어떤 식물들이 싹을 틔우고 또는 언제 새들이 월동지로 날아가는지 익히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드넓은 사바나 지대를 가로질러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길이나 산악 지방으로 가는 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만 이리저리 떠도는 씨족들은 괴베클리 테페의 종교적인 의식이자, 석기 시대의 사냥꾼들이 피안의 다른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의식에 모일 수 있었다.


당시의 풍요로운 생활 조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자신을 넘어서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의문들을 제기했다. "괴베클리 테페는 성지입니다." 슈미트는 말한다. 석조 원형 구조물을 세워서 인공적으로 높이 쌓아올린 산은 석기 시대 사회의 영적인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드넓은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씨족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아마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성대한 의식을 치르고 곡물로 만든 음식과 더불어 고기도 배부르게 먹었을 것이다. 신전 주위에서 나온 15만 개의 동물 뼈 조각들이 그렇다고 암시한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대규모 행사였다.


괴베클리 테페의 인류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최초로 과감하게 능동적으로 확정지었다. 인간은 자연의 강요로부터 폭넓게 자유로워지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존재가 되었으며, 영적인 생각들을 그림이나 조각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건축으로도 바꾸어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종교적인 제식을 위해 천연의 동굴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 직접 신전을 건설했다. 자연을 다스리는 주인이 된 것이다. 조각상들도 점점 더 웅대해진다. 인간이 더 높은 존재들을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그렇듯 거대하게 묘사한 적은 결코 없었다. 5.5m 높이의 T자형 석주들의 발치에 서면, 나 자신이 왜소하고 하찮게 여겨진다.


우리는 괴베클리 테페의 영적인 중심인물에 대해 오로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제물의 피를 받는 돌그릇 말고는 제식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괴베클리 테베의 시설은 그 자체로 종교적인 제식을 위한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오로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성역 출입이 허락되었으며, 안쪽의 원형 지역은 일반 사람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신전의 모든 것은 중심, 즉 석주의 신상들 사이의 장소로 집중된다. 석주의 돌 테두리에 설치된, 제물의 피를 받는 그릇은 제식 행위를 암시한다. 그와 동시에 초월적인 것은 인간에게 도달 가능한 것이 된다.


괴베클리 테페는 아직까지 많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이를테면 산 안쪽의 더 오래된 층들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어쩌면 1만 7000년 전까지 거슬러가는 옛 기념비들이 숨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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