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지금

   
서동철
ǻ
생각처럼
   
23000
2012�� 04��



■ 책 소개
무심히 지나치던 우리문화유산에 작은 의문을 던지는데서 출발한 책. 문화재전문기자 출신의 저자는 이런 사소한 의문을 발전시켜 미술사에 국한되지 않은 역사 종교 민속문학 음악 등 다양한 시각에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42편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펼쳐놓는다.

■ 저자 서동철
성균관대와 고려대를 졸업하고1988년 서울신문에 입사했다. 문화전문기자로 문화재와 학술, 국악, 클래식음악을 오랫동안 담당했다. 사회부와 정치부, 행정뉴스팀에서도 다양한시각을 길렀다. 문화부장과 국제부장,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현재는 경영기획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 차례
서문

옛것에서 길어낸 오늘
석굴암 창조의 고통 보여주는금강역사상
천왕문의 헤라클레스
길상사의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
숙수사터에 세워진 소수서원
‘단종신앙’의성전(聖殿), 영월 영모전
도자기 왕국의 대단원 분원
한국의 정서 달항아리, 일본인의 정서 막사발
명사 20인의 발문이 더욱가치 높인 ‘세한도’
김득신이 포착한 조선시대 도박장의 풍경
혜원이 보여준 조선 후기의 새로운 성문화
신령스러운 땅 계룡산중악당
행담로의 페롱과 강화토의 트롤로프
김해 김수로왕릉의 쌍어문(雙魚文)
한 미술사학자에 대한경의

역사에서 길어낸오늘
소정방 기념탑이 되어 살아남은 정림사탑의 역설
신라 땅에 남은 고구려 조각의 미스터리
다문화 시대의호국사찰 망해사
후삼국 통일의 결전지에 세워진 왕건의 기념비
시스루(see-through) 패션의 아름다운 왕건상
내륙의오지에서 물길의 힘 보여주는 남한강 폐사지
조선왕조의 복잡한 심사 담긴 고려 태조의 사당 숭의전
조선의 역사,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정조의 정치력 보여주는 우암의 사당 대로사
치욕의 역사 극복의 의지 남한산성 수어장대
무오사화의 역사 간직한탁영금
대한제국 자주의식의 상징 환구단
깨져서 더욱 가치 높아진 해인사 홍제암 석장비
반달리즘과 엘기니즘, 엘긴의 변명, 그리고외규장각

불교에서 길어낸오늘
도피안사 철불과 팔레르모의 노신부
관음의 영험을 극대화시킨 파격, 태안마애불
은진미륵의 발가락
부석사무량수전 앞마당이 사다리꼴인 까닭
너무 좋은 것이 좋지 않은 이유, 일연의 부도와 부도비
14세기 인도의 대여행가 지공의 회암사부도
영원히 울리는 법음(法音), 안양 석수동 마애종
‘금오신화’의 무대가 된 남원 만복사
향천사 부도에 새겨진 멸운대사의초상
괘불, 우리가 겪은 비극의 크기 따라 커진 불화
20세기 후반에 부여된 상징성,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20세기 한국 불교의시대정신 보여주는 봉선사 큰법당
원각사 창건의 의미와 십층석탑의 ‘서유기’
삼국 통일의 전기 만든 혁명가 기리는 이차돈순교비

참고문헌





오래된 지금


옛것에서 길어낸 오늘

석굴암 창조의 고통 보여주는 금강역사상

금강(金剛)이란 단단함을 의미합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금강이란 견실함으로 그 바탕을 삼고, 깨뜨릴 수 있는 힘으로 쓰임새를 삼는다. 뚫고 꿰뚫는 용도를 가졌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선정(禪定)을 꿰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금강이란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의 주실 입구 양쪽에는 웃옷을 벗어제치고 주먹을 치켜든 채 기세등등하게 본존불을 호위하고 있는 한 쌍의 금강역사가 있습니다. 불법을 수호하면서,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중생의 미망(迷妄)을 깨어 부수는 부처의 힘을 과시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역사상은 한 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인도와 간다라, 그리고 서역의 금강역사가 보통 혼자서 부처를 호위하는 것은 다른 모습입니다. 역할도 변하여, 인도와 간다라의 금강역사가 부처의 호위무사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사찰 전체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인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석굴암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깨버린 흔적이 역력한 금강역사상의 조각들이 수습됐습니다. 오른쪽 금강역사의 얼굴과 오른팔, 왼쪽 금강역사의 왼손이 그것입니다. 얼굴 부분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금강역사상을 폐기하고 새로 조각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겠지만, 이런 결단이 있었기에 석굴암은 더욱 위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세우는 데는 751년부터 774년 이후까지 최소한 24년이 걸렸습니다. 20대에 토함산에 오른 신라의 석공들이 대부분 같은 자리에서 50대를 맞았습니다. 금강역사처럼 여기저기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치열함의 결과입니다.


지금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이 우리 눈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인다면, 당시의 재조성 결단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역동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재의 금강역사상 대신, 과장을 조금 보태 영국 버킹엄궁의 근위병만큼이나 뻣뻣한 자세의 경주박물관 금강역사라면 석굴암의 긴장감은 훨씬 덜할 것입니다.


석굴암은 신의 솜씨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금강역사상 파편은 석굴암의 완벽함이 치열한 예술가 정신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더불어 망치와 정을 든 석공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단숨에 바위 속에 숨은 부처님의 형상을 쪼아낸 것이 아니라고 일러줍니다. 아직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 석굴암에 인생을 바친 석공들의 시행착오는 금강역사상에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왕문의 헤라클레스

동서양 문화교섭의 결과는 때로 엉뚱한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양상으로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그렇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사리장엄에 등장하기도 했던 헤라클레스가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호위무사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일대를 일컫는 간다라는 BC 327년 그리스의 고대왕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됐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 슬그머니 부처님의 호위무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이에 따른 대대적인 문화융합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몇 간다라 조각은 헤라클레스가 부처님의 권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의 일단을 짐작하게 합니다. 독일 베를린의 달렘 미술관에는 몽둥이와 사자가죽을 들고 있는 험상궂은 표정의 헤라클레스가 사자와 대치하고 있는 듯한 장면을 새긴 조각이 있습니다. 또 부처와 금강역사를 돋을새김한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금강역사는 부처님보다 근육이 조금 더 강조되기는 했지만, 곱슬머리의 그저 온화한 그리스 귀족의 모습입니다.


불교에 편입된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부르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왜(倭)에 전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헤라클레스는 상징하는 사자가 당나라 시대에 이미 장수 갑옷의 어깨 장식이 됩니다.


헤라클레스는 동쪽으로 오면서 다시 금강역사는 물론 사천왕으로도 변신합니다. 신라 문무왕이 682년 세운 경주 감은사 서탑의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금강역사나, 사천왕이나 모두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니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자로 대표되는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는 통일신라 이후에도 줄곧 사천왕상에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의 목조 사천왕상은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불법을 수호케 하는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사천왕상은 지금 봉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여문(眞如門)에 있습니다.


사자 모양의 어깨 장식을 하고 있는 사천왕은 정면에서 보아 진여문의 왼쪽 바깥쪽에 있는 서방광목천입니다. 배에도 사자머리가 장식됐는데, 무섭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는 광목천의 표정에 걸맞게 귀여운 아기 사자의 모습입니다. 사자 머리 아래는 한 마리 분의 사자 가죽이 고리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가죽을 벗겼다는 네메아의 사자일 것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유서 깊은 절이 지금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봉은사 사천왕상을 만든 조선시대 불교조각 장인들은 헤라클레스가 사천왕에 편입된 역사적 유래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명확하게 사자의 이미지를 형상화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른 사찰에서 보이는 사천왕상의 사자가 대부분 무섭기만 할 뿐 매우 모호하게 생긴 귀수(鬼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봉은사 사천왕상에서는 얼굴이나 사자의 모습 모두 만화영화의 캐릭터를 보듯 웃음이 나오게 하는 현대적 감각이 엿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봉은사 스님들도 이 조각이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2001년 조선 영조 22년(1746) 능창군 이숙 부부의 시주로 조성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발원문이 발견되어 사천왕 조각의 실제 나이가 확인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서 달항아리, 일본인의 정서 막사발

달항아리와 막사발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국보로 지정된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달항아리는 물론 한국인의 정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막사발은 우리가 만들기는 했지만, 대부분 일본인의 정서와 유행을 반영한 주문생산품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달항아리가 한국적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막사발이 일본에서 최고의 찻사발로 떠받들어진 것은 4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이 역시 우리 땅에서 평가받은 것은 20세기 이후로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달항아리와 막사발이 닮았다면 닮은 점입니다.


달항아리와 막사발이 걸어온 길은 너무도 다릅니다. 달항아리는 관요에서 만들었고, 막사발은 지방의 미간 가마에서 구웠습니다. 달항아리는 철저한 내수용이었던 반면 막사발은 일본인들의 주문을 받아 수출용으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스스로 찾은 반면 막사발을 평가하는 데는 일본인의 정서에서 거꾸로 영향을 받은 것도 다른 점입니다.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무너지다시피 했습니다. 17세기 후반 철화백자가 나타난 것도 청화의 재료인 페르시아산 안료가 수입되지 못하자, 철사(鐵砂) 안료로 대용한 결과입니다. 일체의 그림을 그리지 않은 달항아리도 이 시기에 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달항아리의 예술성은 세계시장과 소통하지 못한 단절에서 비롯됐습니다. 한마디로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와는 다릅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소외된 상태에서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 고유한 아름다움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 것이 달항아리입니다. 빗장을 걸어잠그는 쇄국정책이 결코 우리 역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런 뜻밖의 결과도 있었습니다.


막사발은 일본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존재입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일본의 차문화와 만나게 됩니다. 일본의 세도가들은 매우 형식을 중요시하는 다도(茶道)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부를 과시하듯 장식적인 찻그릇이 유행합니다. 그런데 16세기가 되면 다도로 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새로운 다도가 퍼져나갑니다. 찻그릇도 조선 도자기처럼 소박한 것이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의 막사발만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필리핀에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질그릇도 다도의 차항아리로 높게 평가되면서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이 센노 리큐입니다. 그가 완성한 와비차는 작은 다실(茶室)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간소한 형식의 다도라고 합니다. 센노가 애용하던 찻그릇이 조선의 분청사기였고, 이후 조선 찻그릇이 아니면 행세를 하기 어렵게 됩니다. 막사발이 일본 다도의 대표적인 찻사발로 변신한데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15∼16세기 조선은 부산, 울산, 김해의 삼포(三浦)를 중심으로 일본과 교역했습니다. 인조 17년(1639) 일본이 부산가마에 찻그릇을 주문할 때는 형태와 문양을 넣은 도면을 보내 그대로 만들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이 이미 분청시대에서 백자시대로 넘어갔음에도, 오랫동안 고흥가마에서 분청사기를 만든 것도 일본 수출용 찻그릇으로는 수요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 유럽과 아라비아의 소비자 취향에 맞추어 제품을 만들었듯이, 조선의 막사발 산업도 수요자의 취향에 맞추어 찻그릇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막사발이라고 불리우는 찻그릇은 조선의 막사발이 원형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의 정치사회적 요구와 그들의 미의식이 가미되면서 변형이 이루어진 일본식 찻그릇으로 보아야 합니다.



역사에서 길어낸 오늘

소정방 기념탑이 되어 살아남은 정림사탑의 역설

충남 부여에 정림사터 오층석탑이 없다면 사비시대(538∼660) 백제의 흔적은 낙화암 전설로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탑이 사비성에서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유적일 만큼 백제 문화는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정림사탑도 나당연합군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서 천상을 어지럽게 하여… 일거에 평정하였다.는 글을 1층 탑신에 새겼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오만한 낙서로 훼손되지 않았다면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라 쪽에서 보면 정림사는 사비성의 한복판에서 백제왕조의 안녕을 빌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정림사를 폐허로 만들었을지언정 소정방 기념탑으로 탈바꿈해 버린 오층석탑은 허물 수 없었습니다. 이후 당나라와 사이가 벌어진 뒤에도 소정방이 새겨 놓은 문구는 백제의 옛 땅에 사는 주민들에게 백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라. 뼈아픈 기억을 잊었느냐.고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없애버릴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백제라지만 남아 있는 석탑은 3기에 불과합니다.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익산의 미륵사터 서탑, 최근에서야 백제석탑으로 제대로 공인받기 시작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그것입니다. 군수리, 능사, 왕흥사, 금강사, 부소산 등 사비성 안팎의 백제시대 절터에서 모두 석탑이 아닌 목탑 자리가 확인되는 것을 보면 백제 말기에도 석탑은 희귀한 존재였던 듯 합니다.


석탑은 목재로 짜맞추던 일종의 다층전각이라고 할 수 있는 목탑을 석조로 번안한 것입니다. 정림사탑만 해도 부재가 159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로 가면 겉모습에서는 목탑의 전통이 유지되면서도 부재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백제탑이 중요한 것은 이처럼 우리나라 석탑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남아있는 백제석탑 모두가 출발점에서 이미 더 이상의 발전된 경지를 상상하기 어려운 완결미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백제계 석탑이 한결같이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 석탑의 기술이 그대로 계승되었겠지만, 이 시기에 세워진 백제계 석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신라의 옛 백제땅에 대한 지배정책이 매우 완고하여, 백제계 석탑의 건립조차 불온시되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백제의 옛 땅이라고는 해도 고려시대에 구식모델일 수밖에 없는 백제계 석탑이 줄지어 세워진 배경에도 정치적 해석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나말여초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견훤을 비롯한 백제 추종세력에 고무 자극된 지역민들의 백제문화에 대한 향수의 발로였다는 것입니다.


정림사탑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데다, 미술사적 중요성도 절대적일 만큼 의미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더불어 수백 년 동안이나 백제의 옛 땅에서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정림사탑이 가진 또 하나의 가치입니다. 문화적 산물이 꼭 문화로 한정된 영향력만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벌써 1400년 전에 보여주었습니다. 하나의 탑이 보여주는 생명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무오사화의 역사 간직한 탁영금

거문고는 우리에게 친숙한 악기처럼 느껴지지만, 이름만 친숙할 뿐 실제로 거문고 음악과 가까워지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연주하는 악기라기보다는, 스스로 성정을 다스리는 선비의 분신이라는 이 악기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 치고 거문고를 가까이 두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흩어질 때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 한 음씩 짚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탁영금을 보면 우리 역사에서 거문고가 차지하는 자리가 보입니다. 이 거문고는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이 타던 것입니다. 후손이 간직하던 것을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김일손과 탁영금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왜 거문고가 정신을 다스리는 악기에서 예술성을 펼치는 악기로 폭을 넓혀가려는 데 비판이 따랐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탁영금은 전해지는 거문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김일손이 27세이던 성종 21년(1490) 만들었다고 하니, 500년이 넘었습니다.


김일손은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연산군 4년 (1498) 탁영을 비롯한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화를 입힌 사건입니다. 탁영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올린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추모하는 조의제문은 단종을 의제에 비유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김일손과 권오복, 권경유 세 사신(史臣)이 대역죄로 몰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습니다. 김일손의 나이 34세였습니다.


김일손의 문집 『탁영집』에는 거문고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다음의 글을 보면, 탁영은 거문고에 풍류를 훨씬 뛰어넘는 정신적 상징성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6현 거문고를 독서당에 마련해 놓고 집에는 5현 거문고를 갖추었는데, 길이가 세 자이고 두께가 여섯 치로 요즘의 잣대를 사용해서 옛 모양을 만든 것이다. 비록 완전히 옛 것과 일치되지는 않지만, 옛 것과 크게 어긋나지도 않는다. 이에 남풍(南風)을 타니 절절하게도 옛적의 소리가 그대로 나는 듯 했다. 어떤 사람이 6현은 공적으로 독서당에 두고 5현은 사적으로 집에다 두니 무슨 의미이냐.라고 묻길래 나는 밖으로는 현재를 따르고 안으로는 옛 것을 따르고자 한다.고 답했다."


"밖으로는 현재를 따르고 안으론 옛 것을 따르고자 한다.(外今而內古·외금이내고)"는 말은, 겉으로는 현재의 세상 흐름을 따라 살아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세속적인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옛사람의 정서를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공적인 자리에서는 6현금을 타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5현금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옛 것의 외면적인 모방보다는 내면의 정신, 즉 본질적인 것을 중시하겠다는 김일손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탁영금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악기이지만, 역사에 구체적인 흔적을 뚜렷이 남긴 젊은 선비의 기개가 담긴 정신적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가장 훌륭한 바이올린을 남겼다는 이탈리아의 현악기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의 걸작보다 훨씬 일찍 만들어졌고, 그것들이 범접하지 못할 스토리를 담고 있는 현악기를 바로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길어낸 오늘

14세기 인도의 대여행가 지공의 회암사 부도

지공선사는 인도 마가다국 출신으로 충숙왕 시대 고려에 왔습니다. 회암사터가 내려다보이는 양주 천보산 기슭에는 그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습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비문에는 나옹화상과 무학대사를 법제자로 둔 고승으로의 발자취 뿐 아니라, 여행가로서 세상편력 과정도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이름을 떨친 거찰이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머물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참례토록 한 것은 물론 상왕으로 물러앉은 다음에는 아예 이곳에서 도를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은 마당에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번성한 회암사는 유생들의 집중 견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유생들의 방화설도 그래서 나온 듯 합니다. 어쨌든, 쇠락해가던 회암사는 조선 중기 이후 어느 때인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공(持空·1300∼1363)은 고려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도의 고승입니다. 온갖 역경을 겪으며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를 오간 만큼 최근에는 그의 발자취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공은 본명이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提納薄陀)입니다. 인도 동북부 갠지스강 유역에 자리잡은 그의 고향 마가다국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자로 태어난 나라입니다. 실제 지공은 마가다국왕의 셋째아들로 석가왕실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남인도의 작은 나라 향지국의 공주입니다.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가 바로 향지국의 왕자 출신이니, 지공은 달마의 피도 이어받은 셈입니다.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이 3년 남짓 머무르는 동안 나옹과 백운, 무학 등이 다투어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공의 가르침에는 개혁사상이 담겨 있었던 듯 나옹은 개혁정치를 시도한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고, 무학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엽니다. 지공은 원나라로 돌아간 뒤 1361년 11월 입적하는데, 1368년 왕조교체의 혼란 속에 유골을 네 사람의 제자가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두 사람이 가져온 유골이 회암사와 장단 화장사, 묘향산 안심사에 나뉘어 안치된 것입니다.


지공의 불교사상은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그의 행적에도 눈길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지공은 인도의 동북부에서 해안을 따라 오늘날의 스리랑카에 이르는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불교공부를 했습니다. 인도사(史)는 14세기 초 인도 대부분은 이슬람 영향권에 들었고, 힌두교가 성행하기 시작했던 반면 불교는 거의 사라졌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공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인도의 동부는 당시에도 불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나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동방에서 인도를 찾아가는 기록이라면, 지공의 이야기는 반대로 인도에서 동방을 여행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지공의 이야기에는 불교를 넘어서는 풍부한 인문학적 자료가 담겨있어, 그를 모로코 탕헤르 출신으로 이슬람세계와 중국을 여행한 이븐 바투타(1304∼1368)에 비견되는 대여행가로 주목하기도 합니다.


괘불, 우리가 겪은 비극의 크기 따라 커진 불화

우리 문화에서 스케일이 아쉬웠다면 괘불(掛佛)은 위안을 주고도 남습니다. 거는 불화라는 뜻의 괘불 혹은 괘불탱은 야외 법회에 쓰이는 대형 불화를 말합니다. 영천 은해사 것이 가장 커서 높이 15m에 너비가 6.07m에 이릅니다. 보은 법주사와 상주 북장사, 하동 쌍계사 것은 13m가 넘고, 부여 무량사와 부안 개암사, 순천 선암사, 김천 직지사 것도 12m 이상입니다.


불화가 커진 것은 우리가 겪은 불행의 크기가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괘불은 17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는데, 1592년의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불교는 비명횡사한 이들의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재로 사람들의 상처 입은 정서를 치유하는 역할에 나섰습니다.


임진왜란 직후의 조정은 유교국가의 수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떠들썩한 불교 집회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대규모 야외 법회를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안식을 찾아야 할 떠도는 영혼이 너무나 많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전쟁으로 죽은 영혼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믿음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니 천도재는 사회불안 요인을 잠재우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괘불은 현재 100점이 조금 넘게 남아 있습니다. 1622년 만들어진 전남 나주 죽림사 괘불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높이 4m에 너비가 2.4m이니 웬만큼 규모있는 사찰의 큰법당 후불탱과 엇비슷한 크기입니다. 그래도 정중괘불세존탱(庭中掛佛世尊幀)이라는 화기가 남아있어 괘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불탱에서 괘불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전란 직후에는 야외 법회에 대웅전의 후불탱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회의 규모가 커지고 정례화되자 아예 야외용 대형 불화를 별도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넓은 마당에서 열리는 야외 법회에서 후불탱에 그려진 크기 정도의 작은 부처님은 참례자들을 위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을 듯, 당당한 모습의 위엄있는 부처님을 원했습니다.


괘불의 유행은 두 차례 전란에서 황폐화된 사찰의 복구 움직임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많은 사찰이 중심 전각을 복구하고, 불상과 후불탱을 갖추고 나면 괘불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코 오래지 않은 전통인 괘불이 불상과 탱화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신속하게 자리잡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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