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노베르토 앤젤레티 외(역자: 정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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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플러스
   
59000
2011�� 02��



■ 책 소개

20세기의 역사는 ‘타임’ 표지에서시작되고 끝났다!

‘타임’이시사주간지라는 새로운 종류의 잡지를 선보인 것은 1923년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헨리 루스와 브리튼 해든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현대인들에게 1주일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한 시간 안에 소화시킬 수 있는 잡지를 내놓았다. 그들은 잡지에 담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독자들의머릿속에 각인시켜줄 알맹이에 신경을 썼다. 그런 취지를 강조한 것이 표지의 빨강 테두리이다. 1927년 처음 선 보인 빨강 테두리는 그 안에담긴 정보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원칙 때문에 미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던시기에 탄생한 ‘타임’의 표지에는 현대사가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임’ 잡지의 표지만 봐도 현대사를 두루 파악할 수 있다.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스캔들, 걸프전쟁, 달 착륙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9.11 테러, 21세기 첫 10년의경제적 쇠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저자 노베르토 앤젤레티 & 알베르토 올리바 (NorbertoAngeletti & Alberto Oliva) 
공동저자인 노베르토 앤젤레티(Norberto Angeletti)와알베르토 올리바(Alberto Oliva)는 42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오고 있다. 두 저자는 미국잡지발행인협회(MPA)를 포함한 많은 국제저널리즘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했으며,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대학과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잡지에 대해 가르쳤다. 그들은 『MakeHistory』(Florida University Press,2004)와 『In Vogue: The Illustrated History ofthe World’s Most Famous Fashion Magazine』(Rizzoli,2006)의 저자이기도하다.

■ 역자 정명진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한 뒤 중앙일보 기자로 사회부, 국제부, LA 중앙일보, 문화부 등을 거치며 20년간 근무했다. 현재는출판기획자와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나는 내가 낯설다』(티모시 윌슨), 『당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심리실험 45가지』(더글라스무크), 『남자, 여자를 해석하다』(허브 골드버그), 『성격의 재발견』(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 『심리학, 생활의 지혜를 발견하다』(찰스 I.브룩스) 등이 있다. 

■ 차례
파트Ⅰ: 새로운 뉴스 스타일의 탄생
Chapter 1. 7일마다 역사를 쓰다
Chapter 2. ‘타임’, 전쟁을 겪으며진화하다
Chapter 3. 성장과 불만, 그리고 위대한 문화의 탄생
Chapter 4. ‘타임’의 커버 아티스트들, 역사의 초상을창조하다

파트 Ⅱ: 격동의 1960년대부터저널리즘의 격변까지
Chapter 5. 뉴스메이커에서 빅 이슈로
Chapter 6. 베트남, 워터게이트와여성해방
Chapter 7. 컬러와 이미지, 디자인 혁명
Chapter 8. ‘타임’, 역사의 장을넘기다

파트 Ⅲ: 새로운 세기를 위한잡지
Chapter 9. 타임의 디지털 혁명
Chapter 10. 관점이 분명한 뉴스와분석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 백과사전

TIME


파트 Ⅰ: 새로운 뉴스 스타일의 탄생

7일마다 역사를 쓰다

창간호

1923년 3월 3일, 시사주간지 타임이 미국 거리에 뿌려졌다. 9,000여 부였으며 가격은 15센트였다. 이리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잡지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표지에는 당시 최장수를 기록한 23선 하원의원으로 얼마 전 은퇴를 선언한 조지프 거니 캐넌의 강인한 얼굴이 별도 제목 없이 목탁으로 그려져 있었다.


요약하면, 22개의 섹션-국내소식, 국제소식, 책, 미술, 연극, 영화, 음악, 교육, 종교, 의학, 법률, 과학, 금융, 스포츠, 항공술, 범죄, 언론, 마일스톤즈, 가상 인터뷰-으로 나눈 32개 면을 통해 타임은 모든 대륙의 뉴스를 풍성하게 전달하고 정치 현장과 생활의 모든 면을 요약했다.


해든과 루스가 잡지계에 불어넣은 혁신은 무엇이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뉴스를 편성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짧은 기사를 다룰 섹션으로 지면을 나눴으며, 사건들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사건이 일어난 곳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뉴스를 맥락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타임은 한 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몇 행으로 요약하고, 그 사건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의견까지 제시했다. 그 외에도 타임은 중요한 혁신을 한 가지 더 이뤘다. 뉴스 뒤의 인간들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뉴스메이커들의 개성이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자들은 뉴스메이커들을 알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것들만이 아니었다. 타임은 혁명적인 글쓰기 스타일을 제시했다. 이 글쓰기 스타일이 타임의 개성을 돋보이게 만들고 새로운 단어들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다른 간행물들과 차별화하고, 무엇보다도 독자적인 개성을 보여주려던 타임의 결단력은 정말 대단했다. 예를 들면, 다른 간행물들과 달리 타임은 첫 페이지에 목차를 넣지 않았다. 대신에 뉴스 요약을 맨 마지막 페이지에 독특한 방식으로, 뉴스에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실었다. 창간호 27페이지를 보면 Point With Pride라는 제목 밑으로 한 단 전체에 걸쳐 아량 있는 시민(Generous Citizen)이라 불리는 가공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이 타임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뉴스들을 선택하고, 그것을 프라이드를 갖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독자들이 그 기사를 찾을 수 있는 페이지를 슬쩍 제시했다. 28면에는 또 다른 가공의 인물 방심하지 않는 애국자(Vigilant Patriot)가 자신의 취향과는 다른 뉴스 아이템을 15가지 나열했다. 그 섹션의 제목은 View with Alarm이었다.


사설 섹션이 없었음에도, 이 잡지의 의견이랄 수 있는 이런 특징들은 게재되는 기사 속에 어김없이 담겼다. 타임은 다양한 각도에서 뉴스를 게재하면서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모든 섹션이 다 그랬다.


루스와 해든이 이제 막 창간한 잡지의 토대를 다지며 추구한 그 질서와 근엄함과 꼼꼼함은 평소 잡지의 편집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잡지는 발간에 들어서기 전 여러 단계의 여과장치를 거쳤다. 그 결과 타임은 정보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팩트체킹(fact checking)을 처음 도입한 잡지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타임의 커버 아티스트들, 역사의 초상을 창조하다

1963년, 5월 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화려한 축하의 현장이었다. 타임 창간 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참석자는 총 1,668명이었다. 그 중 284명이 타임의 커버를 장식한 인물이었다. 그 행사는 다양한 부류의 유명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탈리아 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에서부터 월트 루더, 케이시 스텐겔, 조나스 솔크, 유럽공동시장 개척자 장 모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프랜시스 조지프 스펠먼 추기경, 요한 23세 교황 특사, 린든 존슨 부통령, 기조연설자인 신학자 폴 틸리히까지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모였다. 루스가 건배를 제안하고, 배우 밥 호프가 MC를 맡았다.


케네디 가문에서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에드워드뿐이었다. 대통령은 초청을 받았으나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가 잡지의 일부 비판과 관련해 루스에게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타임의 일부 기사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대한 모든 잡지는 편집인의 긴 그림자이지요. 타임의 경우 특히 더 그러합니다. (…) 타임의 경우 인간 경험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노력하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독자들을 가르치고 즐겁게 만드는 한편 혼란스럽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기도 했지요.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나도 언제나 타임에 동의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거의 언제나 타임을 읽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인 1963년 11월 22일, 그 가공할 만한 사건이 미국을 뒤흔들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이었다. 암살은 미국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웃음짓는 희망 찬 이미지를 내보냈던 텔레비전은 그가 탄 자동차에 발사된 총격과 머리의 상처, 피에 범벅이 된 채 남편을 살리려고 애쓰는 재키의 모습을 끊임없이 내보냈다. 대중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망연자실했다.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타임 콜렉션을 뒤지다 그 사건이 그 주 잡지나 그 다음 주 잡지의 표지에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즉시 실수이거나, 그 주의 잡지가 빠졌거나, 아니면 그 주의 잡지가 매진되어 문서보관소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타임은 편집장 오토 퓨어브린저의 결정 때문에 케네디의 암살에 표지를 내주지 않았다.


창간 이래로 타임은 죽은 사람의 이미지를 표지에 올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지켜왔다. 공식적인 규칙이 아님에도, 그것은 불문율로 내려오면서 오랫동안 지켜졌다. 케네디가 그 잡지의 가장 중요한 곳을 차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때, 그 규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타임이 전에도 그 원칙을 몇 차례 깨뜨렸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유명한 비행사의 아들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가 납치 실종되었을 때, 타임은 1932년 5월 2일자에서 그를 표지로 다뤘다. 1945년 5월 7일자는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소문이 돈 뒤 그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그의 얼굴에 X 표시를 한 이미지를 실었다. 공산당 선언 100주년 특집으로 다룬 1948년 2월 23일자의 표지 인물은 칼 마르크스였다. 1953년 3월 16일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을 커버로 다뤘다.


이런 증거도 퓨어브린저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그는 린드버그의 아들과 히틀러가 커버에 올랐을 때는 아직 그들의 죽음이 추측 단계였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죽은 지 오래되었고, 또 그 표지는 뉴스의 시의성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퓨어브린저는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따라야 할 이유를 몇 가지 제시했다. 첫째는 타임의 전통을 존중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둘째, 곧 음모설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에 커버에 존슨을 놓으면 미국이 대통령 리더십의 연속성을 지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셋째, 퓨어브린저는 그와 비슷한 케이스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시 타임이 그의 후계자 해리 트루먼의 이미지를 실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963년 11월 29일자 표지에 실린 존슨의 이미지는 썩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문장(紋章) 앞에 배치된 존슨의 얼굴은 만족하는 분위기를 풍겼고 입술엔 옅은 미소까지 감돌았다. 그 이미지가 더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죽은 사람의 사진을 커버에 쓰지 않는다는 타임의 원칙은 1960년대 들어 많이 퇴색된 것 같다. 타임은 레닌(1964년 4월 24일)과 윌리엄 포크너(1964년 7월 17일), 리 하비 오스왈드(1964년 10월 2일), 헨리 루스(1967년 3월 10일), 로버트 케네디(1968년 6월 14일)의 이미지를 사후 표지에 실었다.



파트 Ⅱ: 격동의 1960년대부터 저널리즘의 격변까지

베트남, 워터게이트와 여성해방

퓨어그린저와 그룬왈드가 타임 편집장을 맡았을 때는 베트남전쟁이 중요한 주제였다. 그 주제는 미국을 둘로 나눈 것과 똑같이 타임 편집 직원들을 둘로 나누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다. 존 케네디와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등 대통령 3명의 임기에 걸쳐 11년 이상 전개되었다. 수백 명의 저널리스트와 사진작가들이 그 전쟁을 취재했다. 그 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은 베테랑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뉴스 네트워크였던 타임-라이프 뉴스 서비스는 홍콩에 지국을 두고 있었다. 1963년 문을 연 홍콩 지국은 프랭크 맥컬로크가 이끌고 있었다. 홍콩 지국이 맡은 지역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역이었다. 그 지국은 또한 중국 본토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담당했다.


존 쇼와 제임스 와일드, 찰스 모어, 돈 사이더, 조너선 라슨, 도널드 네프, 윌리엄 맥훠터, 브루스 넬란, 마쉬 클라크, 데이비드 드보스, 로버트 샘 앤슨과 제임스 윌워스 등이 타임을 위해 홍콩이나 사이공에서 전쟁을 보도한 특파원들이었다. 사진작가들 중에는 존 도미니스와 폴 슈처, 테리 스펜서, 존 로언가드, 리처드 스완슨, 칼 미단스, 레 민, 데이비드 버넷, 더크 핼스테드와 테드 타이가 두드러졌다. 핼스테드의 경우 사이공 함락 취재로 1975년 로버트 카파 골드 메달을 획득했다. 래리 버로우즈가 타임-라이프를 위해 찍은 무시무시한 전투 장면은 모두를 압도했다. 그는 타임을 위해 전선에서 9년 동안 일하다 1971년 그를 태운 헬리콥터가 라오스를 날던 중 격추 당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전쟁이 가열됨에 따라, 그 전쟁에 대한 타임의 논조도 바뀌었다. 처음 타임은 1956년 신생국 남베트남의 대통령에 선출된 반공주의 지도자 응오 딘 디엠을 지지했다. 그러나 타임 특파원들 거의 대부분은 디엠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전쟁"

1963년 가을, 퓨어브린저의 디엠 옹호가 깨어지고 말았다.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졌다. 사이공의 타임 특파원들이 보내온 정보가 정확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군사정권이 남베트남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새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베트콩이라고 불렸던 민족해방전선, 즉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호치민이 이끄는 북쪽의 공산주의 정권은 여전히 새 정권에 반대했다. 미국에선 린든 존슨이 1964년 배리 골드워터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5년 2월 미 공군의 북베트남 공격이 시작되었다. 1965년 3월엔 미 해병대 2개 대대가 다낭에 도착했다. 사실상 베트남에 도착한 첫 미군 전투부대였다.


타임은 곧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1965년 5월 14일자에 실은 베트남: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전쟁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타임은 이렇게 썼다.


"대체로 미국의 여론은 북 베트남을 공습하며 남쪽에서 지상전을 강화하는 린든 존슨의 전략을 강력히 지지하는 것 같다. 동시에 일관된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 그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인들의 투쟁은 1960년대 중반의 미국에겐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그 전쟁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서 벌어진 적절한 전쟁이다."


특파원들 vs. 라이터들과 에디터들

베트남전 내내 특파원들의 관점과 뉴욕 에디터들의 견해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홍콩 지국장 프랭크 맥컬로크는 본사의 지나친 낙관주의에 대해 늘 불평했다.


베트남에서 나오는 정보는 대체로 워싱턴의 다른 정보원의 확인을 거쳤다. 당시 타임은 존슨 행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타임이 베트남전쟁 초기에 전쟁을 결정적으로 지지한 것이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퓨어브린저는 몇 년 뒤 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그런 해석을 부정했다. "우리의 잘못은 워싱턴 특파원들이 국방부의 소식통들과 린든 존슨을 근거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믿었다는 사실보다는 미국이 모든 힘을 결집해도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다."


타임, 승리를 믿다

타임과 라이프의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퓨어브린저도 특파원들이 내놓는, 승리와는 거리가 있는 정보에 혼란을 느낀 나머지 1965년 11월 베트남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베트남 주군 미군을 이끌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의 환영을 받고, 다른 군 지도자들의 보고를 들었다. 그들은 또한 미국 기술자들이 캄란만에 건설 중이던 거대한 항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 시설들이 퓨어브린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커티스 프렌더개스트의 책 『타임 주식회사의 세계』에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맥컬로크와 함께 캄란만을 보았을 때, 이 모든 전력에다가 과거 우리가 자랑했던 군사기술을 접목시킨다면 우리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 한국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종적인 승리를 믿었다."


루스에 이어 편집인이 된 헤들리 도노번 역시 미국이 베트남에서 이룬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965년 11월 베트남으로 갔다. 도노번은 10일 동안 머물면서 그 나라의 43개 성 중 10여 곳을 돌았고 호치민으로 향하는 길을 폭격하는 임무를 맡은 군용기에 동승하기도 했다. 도노번은 돌아온 뒤 1966년 2월 25일자 라이프에 베트남전은 승리를 거둘 가치가 있다는 제목의 31면짜리 섹션을 싣고 머리말 형식으로 스토리를 썼다.


타임, 어려움을 이해하다

1967년 5월, 도노번은 두 번째로 베트남을 찾았다. 베트남 주군 미군이 40만 명을 넘어섰을 때였다. 그곳에서 그는 군인들과 타임 저널리스트와 다양한 조언자들을 만났다. 도노번의 목표는 전쟁의 전개 양상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었다.


당시 베트남전 참전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워싱턴에서 나오는 장밋빛 정보를 믿으며 승리를 낙관한 반면, 특파원의 보고에 무게를 싣던 전쟁 반대자들은 그 전쟁이 재앙으로 치닫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 방문 기간에 도노번은 메콩 델타에서 국제자원봉사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아들 피터도 만났다. 그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아들의 인상이 그의 미래 입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터는 그 전쟁에 열광했었고, 승리를 굳게 믿었었다. 그러던 그가 1967년 봄 델타의 부패와 상황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전쟁이 쉽사리 결판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임, 승리에 의문을 제기하다

그해 8월 4일자에서 타임은 전쟁에 관한 입장 변화를 처음으로 내비쳤다. 월드 섹션에 실린 그 기사는 남베트남의 전투능력에 대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남베트남군이 잠재력을 전부 발휘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 베트남 사람들은 20년 이상 전투를 벌여왔다. 젊은 세대들은 연속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체 군 조직이 끝이 안 보이는 전쟁의 누적 피로로 손상을 입고 있다.(…)"


기사는 저널리스트 제이슨 맥매너스가 도노번의 지시를 받아 쓴 것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그 전쟁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쓴 기사였다." 동시에 도너번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전쟁에 찬성하던 퓨어브린저에게 전쟁에 관련한 모든 기사에 신중을 기하라는 메모를 보냈다.


라이프, 포문을 열다

1967년 10월 20일자에서 라이프는 베트남전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사설을 내보냈다. 그 사설은 그때까지 여섯 차례 있었던 미국의 공습중단이 실패였다고 인정하고 북베트남에 선의와 협상의 의지를 보이는 뜻에서 7번째 공습 중단을 제안했다.   


라이프,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리다

1969년 6월 27일, 라이프는 전쟁 관련 기록 중 가장 충격적인 그래픽 하나를 실었다. 미군 사망자와 관련한 국방부의 뉴스에 바탕을 둔 포토에세이였다. 1969년 5월 28일부터 6월 3일 사이에 미군 242명이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242명 중 가족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거나 사진을 제공하길 거부한 25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희생자의 사진이 확보되었다. 여권용 사진 크기로 217명의 사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12개 면에 걸쳐 한 줄에 5장씩 나열하고 이름과 나이, 계급과 고향 등을 달았다.


그 외의 다른 글은 일체 덧붙이지 않았다. 사진 자체가 스토리였다. 죽은 자들 대부분이 21세가량이었다. 25명이 흑인이고, 2명은 고등학교 교복과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나란히 놓인 희생자들의 어린 얼굴들이 독자들을 응시했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 그 얼굴 위로 겹쳐졌다. 그 사진들의 충격은 정말 극적이었다. 여론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았다. 6월 27일자 그 포토에세이는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기록 중 가장 강력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철수

평화협상과 더불어, 닉슨 행정부는 2가지 길을 택했다. 점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는 한편 북베트남의 양보를 얻어낼 목적으로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한 공습을 강화했다. 1973년 1월 마침내 휴전협정에 서명이 이뤄지고 3월 마지막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11년에 걸친 미국의 개입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73년 2월 5일자에 12페이지에 걸쳐 실린 커버스토리는 "마침내 휴전이 이뤄졌다"는 글로 시작되었다.


"마침내 휴전이 이뤄졌다. 마침내, 거짓 수(手)들이 오랫동안 오간 끝에 문서에 서명이 이뤄졌다. 여러 해 동안의 살상과 파괴 끝에 4명의 미국 대통령이 국제 공산주의에 맞서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그 전쟁이 막다른 궁지로 몰린 가운데 마침내 끝을 보게 되었다. (…) 베트남 거리에는 춤을 추는 환영도 전혀 없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박수도 없고, 평소와 다른 웃음도 없었다. (…) 미국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담담했다. (…) 많은 생명과 돈을 희생시키며 미국 역사상 가장 길게 이어진 전쟁의 종료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은 축하할 기분이 분명 아니다."



파트 Ⅲ: 새로운 세기를 위한 잡지

타임의 디지털 혁명

타임 편집장을 맡았을 때, 짐 켈리는 46세였다. 그는 1978년 타임에 들어가 다른 신입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출생과 결혼, 죽음, 그리고 다른 인생사들과 관련 있는 뉴스메이커들에 대한 짧은 글을 쓰면서 마일스톤즈 섹션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곧 네이션 섹션의 라이터가 되어 월터 아이잭슨과 리처드 스텐겔과 합류했다. 1988년 그는 월드 섹션 에디터에 임명되었다. 1991년엔 헨리 뮬러가 그를 부편집장으로 임명했다. 1994년엔 제임스 게인스가 그를 잡지의 앞부분을 책임지는 총괄 에디터로 승진시켰다. 이어 켈리는 1996년엔 편집장 대리로 승진했다.


켈리의 재임 기간은 2006년까지 5년이었다. 그 기간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편집 쪽에 혼란이 가장 심했던 때였을 것이다. 엄청난 충격을 안긴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의 잡지 관리 방식과 뉴스를 취재하고 게재하는 방식에 도전장을 세게 던졌다. 켈리의 리더십을 시험한 호가 있다면 그것은 불과 이틀 만에 제작한,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공격을 다룬 특집일 것이다, 그 특집판은 독자들이 그날의 공포에 대한 증거로 간직한 역사적인 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호가 되었다. 가판대에서 무려 325만 9,156부가 매진되었다. 그것은 또한 1927년 이후 빨강 테두리 없이 발행된 유일한 호였다. 빨강을 상징적인 검정으로 바꿨다.


9월 11일 화요일 오전은 타임 사진 부서에도 큰 도전이었다. 공격의 심각성을 간파한 사진 에디터 메리앤 골론은 시민들이 빠져나오고 있던 맨해튼으로 자동차를 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한편 그날 카리브해로 떠날 예정이던 사진작가 제임스 낵트웨이는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가 모든 비행편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트윈 타워 근처에 있던 아파트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순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진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장면들을 찍었다. 그러다 두 번째 타워가 무너질 땐 거의 갇힐 뻔했다. 그가 사진을 넘기기 위해 타임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얼굴과 옷에 묻은 연기와 먼지 때문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러운 공기 때문에 폐가 손상을 입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며 병원에 입원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짐 켈리와 아서 혹스타인, 편집장 대리 스티븐 코엡과 메리앤 골론이 광고 없이 52쪽 전부를 뉴스로만 채워 만든 특집판은 9월 14일 가판대에 깔렸다.


표지 사진은 두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하여 불과 연기와 파편을 날리며 폭발하는 순간을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표제를 달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타임 로고와 두 건물 사이의 공간에 2001년 9월 11일이라고 쓴 작은 설명만 배치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감마 에이전시의 라일 오워코였다.


특집판의 첫 양쪽 2개 면엔 1쪽 반짜리 흑백사진과 편집자의 편지를 배치했다. 이어 4개면에 걸친 사진들은 오로라 에이전시의 로버트 클라크가 찍은 것들로, 두 번째 비행기가 남쪽 타워에 충돌하기 몇 초 전을 단계별로 보여주었다. 그 다음 두 개 면에는 치욕의 날(Day of Infamy)이라는 거대한 제목 밑으로 충돌 결과 생긴 불덩어리 사진을 실었다. 그 다음 24개 면은 폭발과 공포, 먼지, 파괴, 결속과 눈물의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잘 결합했다. 모든 사진들이 어떤 리듬을 갖고 매우 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맨 첫 페이지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면에 걸친 그래픽에 트윈 테러라는 제목을 달고 20쪽에 걸쳐 그날 일어난 일을 세세하게 풀어놓았다. 잡지 뒷면은 영화 같은 결론을 보여주었다. 월스트리트의 빌딩들이 겨우 보일 정도로 시커먼 연기를 배경으로 한 자유의 여신상 사진이었다. 표지와 마찬가지로,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글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가 당장 판을 만들자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그 생각에 신중을 기했다. 모든 직원들이 화요일과 수요일에 전력투구하고, 목요일에 다음 주 잡지를 준비하는 것으로 최종 의견이 모아졌다. 나는 15년 후 읽더라도 독자들이 맞아, 그날 감정이 이랬어.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 타임을 원했다.


그 모델은 나의 과거에서 나왔다. 내가 아홉 살인가 열 살일 때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AP와 UPI가 1964년 봄에 각각 하드커버로 책을 냈는데, 거기엔 1963년 11월 22일 그날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암살사건 6개월 뒤 출간될 책들이 그 사건을 다룬 방식이 바로 내가 그 특별호에서 추구한 것이었다.


나의 임기를 대표할 호를 2개 고른다면, 9/11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다룬 잡지가 될 것이다. 그처럼 큰 사건에 직면하게 되면 당신은 모든 내용을 다 담은, 말하자면 누구라도 읽고 나면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날 잡지를 만들고 싶어질 것이다."


관점이 분명한 뉴스와 분석

타임 베스트셀러 톱 10

타임은 창간호를 낸 1923년 이후로 표지를 4,000건 이상 제작했다. 커버스토리의 주제도 놀랄 정도로 다양했다. 가판대에서 가장 많이 팔린 호들은 요절한 유명인들을 추모하거나 테러리즘과 그 영향, 그리고 역사를 바꾼 정치적 사건들에 관한 스토리를 다룬 것들이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존 F. 케네디 주니어와 존 레논, 다이애나 왕세자비,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특집판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고의 베스트셀리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트윈 타워에 대한 9/11 테러 공격을 다룬 2001년 9월 14일자였다. 베스트셀러 2위 분리할 수 없는 한 국가를 100만 부 이상 앞질렀다. 테러리스트 공격이 있은 직후 발행한 타깃: 빈 라덴 또한 베스트셀러 톱 10에 올랐다.


베스트셀러 톱 10 중에서 정치 쪽 뉴스메이커에 할애한 표지는 2개였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을 축하하는 특집판과 1974년 리처드 닉슨의 사임을 다룬 특집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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