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인생 강의

   
바오펑산(역자: 하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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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15000
2011�� 07��



■ 책 소개
현실을 좇지않고 스스로 길이 된 사람, 공자에게 삶의 길을 묻다! 

열일곱 살에 고아가 되어 칠십 평생 떠돌이 생활을 했으나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 당대에는 변변한업적을 쌓지도, 인정을 받지도 못했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해 자기 성찰과 성숙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인격체로 끊임없이 자신을단련한 공자는 2500년이 지난 지금, ‘만세사표’, 즉 만세까지 귀감이 되는 인물로 우뚝 섰다. 
내가 바른길을 가고 있는지, 어떻게 서야 할지 자신이 없다면 2500년 전, 같은고민을 한 공자의 인생에 조언을 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가 걸었던 길을 좇다 보면 고전 속에나 등장하는 성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아무도 알아주지않아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중국 CCTV <백가강단&&에서 새로운 고전 읽기의 진수를 보여준 저자의 책으로, ‘사람다움’과‘배움’에 뜻을 두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공자가 부단한 자기 단련을 통해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된 과정을 담아냈다. 그리고 공자의삶과 그의 배움, 도전, 열정의 정신을 보며 두려움 없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을 권한다. 
■ 저자 바오펑산
안후이 사범대 중문과를 졸업하고칭하이 교육학교, 칭하이 사범대학을 거쳐 현재 상하이TV대학에서 중국 고전문학과 문화 강의 및 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 중앙방송 CCTV의<백가강단&&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강의는 앞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중톈, 위단의 시청률을능가하며 새로운 고전 해석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강연뿐 아니라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여 중국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의 저작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공자 인생강의』는 CCTV 강의를 엮은 내용으로 공자의 삶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진정한 성공과 삶의 가치를전해주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침묵하는 성현(寂寞聖哲)』『신 논어독법(論語新讀)』『풍류를 좇다(附庸風雅)』『풍류거(風流去)』『중국인의정신(中國人的心靈)』『새로 보는 수호전(新說水湖)』 등이 있고, 그의 글은 인민교육출판사의 전국 중고교 어문교재와 지역 자체 부교재에 다수게재되었다.

■ 역자하병준
경희대학교 경제통상학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좋은 책을독자에게 소개하고 번역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의 ‘백가쟁명’이란 코너에서 중국 고전과 시사를 결합한 글을 연재했고중국의 내면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한 번역과 강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진시황의 비밀』이 있다.

■ 차례
제1장 지우학 - 十有五而志于學 : 학문에 뜻을 두다
출생 미스터리 
홀로서기 
공부벌레 

제2장 이립 - 三十而立 : 인생 목표를 수립하다 
공자, 사학을 열다 
인내의한계 
가정맹어호 

제3장 불혹 -四十二不惑 : 흔들림 없는 주관으로 세상을 판단하다 
지자는 유혹됨이 없으니 
과유불급 
공자와 안회

제4장 지천명 五十而知天命 : 하늘의뜻을 깨닫고 실천하다 
사람이 곧 천명 
세상에 도적은 없나니 
외적을 막고 내부를 안정시켜라 
덕을색만큼 좋아할 수 없으니 

제5장 이순 -六十而耳順 :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다 
세상을 마주한 성인 
덕으로 감싸 안다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다
인을 실천하는 자라면 

제6장종심소욕불유구 -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 
최고의 인생 
천하 영재 
만고의현자 

에필로그 
부록 : 77명 공자 제자 일람표
옮긴이 주 
옮긴이 글





공자 인생 강의


공자가 말했다.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가 확립되었으며,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으며,

60세가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



지우학 - 十有五而志于學 : 학문에 뜻을 두다

공자가 유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 최고의 추앙과 존경을 받은 인물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는 도통(道統)의 상징이자 중국인들의 도덕 신앙 및 문화의 아이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정신적 지주로 살아 있습니다.


공자는 성인(聖人)이면서 범인(凡人)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라 칭해질 만큼 위대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희로애락을 느끼고 칠정육욕(七情六欲)을 느끼는 우리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공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존경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저와 함께 2500여 년 전의 춘추시대(春秋時代)로 가서 공자가 얼마나 대중친화적인 인물이며, 어떻게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다각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양공 22년(BC 551) 9월 28일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 공자의 부친 숙량흘은 예순일곱 살이었습니다. 노양공 24년인 기원전 549년,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때 세상을 뜨면서 공자 집안은 가세가 크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 과부 안징재가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습니다. 힘들게 유년 생활을 보냈던 공자이지만 그 뜻은 남달랐습니다. 말년에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논어』 「위정(爲政)」


이 말이 내 나이 열다섯에 공부를 했다(吾十有五而學)가 아니라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의 일생을 학문 연구에 걸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전문가로 거듭났고, 이를 군주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중앙 정계로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탓에 중책을 맡지 못하고, 계평자가 이끄는 계씨 집안의 위리(창고 관리직-저자 주)와 승전(목장 관리직-저자 주)을 맡았습니다.


공자는 비루해 보이는 회계 업무나 목장 관리도 묵묵히 수행하며 위리나 승전으로서도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공자에게는 더 큰 이상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배움(學)은 관직을 얻어 귀족 사회에 진출해 봉록을 받으며 생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만약 공자가 이런 배움을 추구했다면 학문에 뜻을 두다(志于學)라고 하지 않았고, 출세에 뜻을 두다(志于任)라고 했을 것입니다.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둔 공자는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어 갔습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好學)은 공자가 성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립 - 三十而立 : 인생 목표를 수립하다

이립이라는 말을 하려면 우선 자신만의 주관이나 가치관이 뚜렷해야 하고, 주변의 인정을 확실히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도 주위 실력자들에게 자기 실력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그해,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시 초강대국이던 제나라의 군주 경공과 재상 안자(晏子)가 노나라를 방문했습니다. 노소공과 삼환(三桓)에게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던 공자도 제후 간의 회동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그만큼 입지를 다진 상태였습니다.


제경동은 서부 변경의 야만 국가라고 생각했던 진(秦)나라가 강성해진 연유가 늘 궁금했습니다. 공자는 제경공의 질문에 막힘없이 하나씩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진목공처럼 인재를 아끼고 열린 등용을 하면 패자를 넘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자의 대답에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가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는 처지이지만 어떠한 중책을 맡겨도 능히 감당해 낼 재주와 큰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서른 살이 되면서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첫째, 사학(私學, 개인이 설립한 고대 중국의 학교)을 열었습니다. 사학 운영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를 양성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바를 정했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학문을 꾸준히 갈고닦아 이상을 추구해 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셋째, 타인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 정신적 독립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학을 열면서 심리적 속박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해 더 많은 이들이 자신들과 같이 정신적 해방감을 맛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주나라가 있던 낙읍(洛邑), 즉 오늘날 뤄양(洛陽) 부근에는 시대가 낳은 또다른 현인, 노자가 있었습니다. 공자 일행은 노자를 만나기 위해 주나라로 길을 떠났습니다. 서른 살에 홀로서기를 하겠다며 삼십이립을 선언했던 공자로서는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 노자와의 만남이 필요했습니다.


주나라에 도착해 노자를 만난 공자. 공자는 노자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어려서부터 힘들게 자란 공자는 오로지 노력만이 인생 역전을 이루어 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공자를 단련시켜 준 것은 이런 정신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전에도 앞뒤 양면이 있듯이 공자에게도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했고, 노자가 바로 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공자는 자신의 사상에 노자의 가르침을 적극 반영했습니다. 노자는 자신을 찾아온 공자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는 교만과 욕심, 가식적인 행동과 야망을 버리도록 하시오. 그것들은 그대에게 이로울 데가 전혀 없소. 내가 해 줄 말은 이뿐이오."

- 『사기』「노자·한비자 열전」


노자는 공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조정 내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넘쳤겠습니까? 하지만 자기절제와 융통성 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노자를 만나기 전만 하더라도 자신감과 의지로 똘똘 뭉쳐 있던 공자가 노자와의 독대 이후 차분함과 자기절제를 보여 주었습니다.



불혹 - 四十二不惑 : 흔들림 없는 주관으로 세상을 판단하다

2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서른일곱의 나이에 고국에 돌아온 공자는 이후 14년 동안 제자 양성이라는 한 가지 일에 몰두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왔고 이들의 질문을 하나씩 해결하다 보니 공자는 더욱 박학다식해졌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불혹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했습니다. 그 의미는 단순히 모든 것을 다 아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경지가 아니라 어떤 질문도 그를 난처하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분야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공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절대적 지식의 양은 오늘날 저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공자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알고 체화시키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불혹은 바로 자신이 아는 바를 바탕으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공자는 서른일곱 살에 노나라로 돌아와 쉰 살이 될 때까지 14년 동안 후학 양성에 매진했습니다. 불혹이라 불리는 40대를 모두 교육에 헌신한 것입니다. 『논어』에는 즐거울 락(樂)과 근심 고(苦)라는 글자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염려한다는 의미 우(憂)만 등장합니다[군자는 도를 얻지 못할까 염려할 뿐 가난해질까 봐 염려하지 않는다.(『논어』「위령공」-저자 주). 지나침을 경계한 공자의 의중이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논어』의 「자한」이나 「헌문」에서도 인자는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했을 만큼 나라와 백성을 먼저 걱정하고 개인의 영달이나 이해득실을 멀리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논어』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구절도 공자 스스로 불혹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배우고 익힘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성내지 않으니 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 『논어』「학이」


당시 공자는 요즘 말로 스타 강사였습니다. 여러 제후국에서 인재들이 몰려와 제자가 되겠다고 하니 배우고 가르치기를 즐겼던 공자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 즐겁고 기쁜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능력 있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없는 인물이 자신의 웅지를 펴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분명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이마저도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습니다. 자신을 몰라주더라도 화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군자라면 자신의 불운한 처지를 누구 탓도 하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아는 평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하는 이 세 가지 즐거움은 심오한 학문이나 종교적 신앙이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행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공부하고 친구를 만다고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못 받는 광경,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배움을 통해 자신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절친한 벗과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고, 자기 실력에 비해 못한 대우를 받아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는 자신을 사랑스러워하기가 쉽지 않을 뿐입니다.


일상 속에서 사소한 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스스로 무척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치고 편한 마음을 가진다면 분명 즐거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천명 五十而知天命 : 하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다

사람이 곧 천명

당시에 공자가 주창하던 천명은 허황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천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공자가 어떤 생각으로 천명을 이야기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천명은 한 개인이 타인이나 사회, 자연과 맺는 관계나 운명을 뜻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맺게 되는 관계나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명에는 도덕적 책임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금수는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지천명은 단순히 천명을 아는 것을 넘어서 실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천명을 인지하는 것을 인이라 하고, 천명을 경외하는 것을 예라 하며, 천명을 실천하는 것을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명을 인식하고 경외하며 실천하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혹의 나이가 되었을 때 "배우고 익히기를 거듭하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은가?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노엽지 않으니 어찌 군자라 하지 않으리?"라는 말을 했던 공자는 지천명이 되어서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하늘만은 자신을 알아준다며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천명을 받들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명을 인식한 공자는 보통 사람들을 감지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공자처럼 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은 남달리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천명의 공자는 천명을 받들고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뚜렷한 목표 의식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을 보고 소극적이다 혹은 수동적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공자는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을 묵묵히 실천해 나갔기 때문에 성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서른일곱 살에서 쉰 살에 이르는 14년의 시간 동안 정치적으로 아무런 성취를 거두지 못한 공자였지만 후학 양성과 자기수양에서는 훗날 성현의 경지에 오를 만큼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불릴 만큼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성취, 즉 대성(大成)이라는 말은 자기수양의 궁극적 경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그의 출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니, 예악과 법도가 무너지면서 하극상이 자행되고 이 때문에 천하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 말기가 되면 주나라 천자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됩니다.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때문에 제후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부나 배신들이 제후의 실권을 빼앗는 것도 하극상이었습니다. 노정공의 경우가 대표적인데요. 실권이 대부인 삼환에게 갔다가 배신인 양화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공자는 이제 노나라에서 법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할 조정이 혼란스러우니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리가 없었습니다. 하극상을 일으킨 양화에게 순순히 협조할 공자가 아니었습니다. 왕도를 추구했던 공자가 패도를 이끄는 양화, 삼환과 함께 타협할 리가 없었습니다.


삼환의 수장들은 양화의 난을 겪고 난 후에야 배신에게 절대 권력을 맡기지 말라고 충고하던 공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공자의 뛰어난 정치 감각과 예리한 안목이 향후 국정 운영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어떻게든 조정에 합류시키기로 했습니다. 반란으로 혼란해진 국정을 원활히 이끌기 위한 돌파구였습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시간 외면받던 공자는 드디어 정식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순 - 六十而耳順 :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다

현자는 세상이 무도하면 아예 등을 진다고 했지만 공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설령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혼란한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절대 세상을 등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올바른 도가 아직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경공, 노정공, 계환자, 위령공 등과 함께 구세의 정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인은 세상을 포기하고 피하지만 성인은 맞서 싸웠습니다. 이것이 유가와 도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맞서 싸우면서 후학을 양성한 공자는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순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순(耳順)의 사전적 의미는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린다입니다.


이순의 함축적 의미는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거슬리는 말을 들어도 동요하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 둘째, 자기 중심을 가지고 감언이설에 흔들리지 않는 것, 셋째, 어떤 말을 들어도 자신만의 주관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장자』「내편」소요유(逍遙遊)의 "세상에 이름을 날리더라도 자만하지 않고, 세상에서 명성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울해 하지 않는다"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단테도 『신곡』에서 비슷한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길을 가도록 하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즉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되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중심을 지켜라는 말입니다.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되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융통성이 있으며, 의견 충돌이 있을 경우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이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려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포용할 줄 아는 관용과 배려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주위의 유혹에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고 자기 주관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자가 이순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천하를 유랑하면서 온갖 칭찬과 비난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이순의 경지에 오른 그해 노나라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계환자가 세상을 뜬 것입니다. 공자에게 노나라는 모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비록 은나라 왕실 혈통에 송나라 왕족 출신이었지만 3대조인 공방숙 때부터 노나라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주공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춘추시대 예악의 본산과도 같은 나라였습니다. 노애공 3년, 계환자가 남긴 유언 덕에 이제 그리워하던 노나라로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설레던 귀국길, 과연 무사히 잘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계환자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아들 계손비(계강자)는 공자를 불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강자 입장에서는 부친의 유언을 완전히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자가 아닌 그의 제자 염구를 조정에 등용하기로 했습니다.


노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아쉽기 그지없었으나 제자인 염구가 중앙 조정에 진출한 만큼 기뻐해 주었습니다. 당시는 나이 오십만 되어도 고령자 취급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나이 오십에 방랑길에 올라 어느덧 예순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줄 알았다가 다시 천하 주유에 나서야 했습니다. 심리적으로 무너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공자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만큼 힘든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줄 알았고 넓은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죠.


공자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칙을 끝까지 지킬 줄 알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칙을 지킬 줄 알면 어떤 힘든 상황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종심소욕불유구 -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

노애공 11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청(현재 산둥성 둥아현, 다청허 서쪽) 지역에 주둔시켰습니다. 가신으로 있던 염구 덕분에 제나라 군대를 물리친 계강자는 염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네가 군사에 이리 뛰어날 줄은 몰랐네. 어찌 그리 병략에 뛰어난가?"

염구가 말했습니다. "제 스승님께 배운 것입니다."


계강자는 공자가 자신과 맞서지는 않을까 염려해 8년 전에도 공자를 불러들이려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공자가 이미 예순여덟의 고령이라 정무에 직접 참여해 자신을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자가 혹여 타지에서 숨을 거두면 재주를 시기해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백성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공자를 불러들였습니다. 공자는 오랜 방랑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노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고국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공자는 함께 공부하는 단계, 함께 도를 터득하는 단계, 함께 도에 서는 단계, 그리고 자유자재로 도를 부리는 단계를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 가는 대로 행동해도 추구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에 어긋남이 없는 그런 경지야말로 인생을 살면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지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고 했습니다. 개개인이 모두 이런 경지에 이르면 사회 전체적으로 강제로 규범을 동원해 통제하지 않아도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원리 원칙이 없는 이들을 소인이라 하며, 자신이 가진 원칙과 생각을 가지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들을 현인이라 하며, 정해진 원칙과 기준이 있지만 정도에 어긋남 없이 융통성을 발휘하는 이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관철하려 합니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서 범인들이 생각하는 수준 그 이상의 초연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공자가 시냇가에서 말했다.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밤낮으로 멈추지 않고 흐르는구나."

- 『논어』「자한」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된 공자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자신이 이미 늙어 버린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상한 세월을 야속해 하는 한 늙은이의 탄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탄식 속에는 젊은 시절의 포부나 야망, 우정, 사랑 등이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대한 탄식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더 분발해 자신의 이상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겠다는 생각도 묻어 있습니다. 비록 세월의 무상함 때문에 탄식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자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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