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 51초

   
장경수
ǻ
지식의숲
   
13000
2011�� 06��



■ 책 소개
위대한 지도자들의 성품과생애와 사상을 그들의 연설과 함께 음미하고, 그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세상을 둘러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
책의 전반부에서는 수사학의 아버지라 불린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수단으로 체계화한로고스·에토스·파토스에 맞는 역사적인 스피치를 소개하고, 그 스피치에 쓰인 수사기법을 인물과 사례별로 면밀히 분석·제시한다. 또한 각 연설의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시대 상황과 청중의 심리까지를 파헤쳐 이를 실생활과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후반부에서는 새로운 수사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수사학을 실용적인 학문 차원을뛰어넘어 관계성과 내면의 수사학이라는 새로운 틀로서 제시하고, 여기에 해당하는 스피치 사례를 소개하면서 설득 원리를 규명하는데, 그에 맞춤한모델로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과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를 들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삶과 연설 사례를 통해 전통적 수사학이 미처 품어 안지못했던 동양적 리더십을 느낄 수 있다.

■ 저자 장경수
광주 동중과 광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했다.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KBS 기자로공채 입사하였다. 3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사람 만나는 매력에 한껏 빠졌다.

아라파트 PLO 의장과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등 정상급 인물 12명과 단독 인터뷰에 성공해 방송 인터뷰전문기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오찬 세미나 만찬 세미나를 열어 후배기자들에게 인터뷰 경험담을 공유하는 자리를 열심히 마련하다 보니 ‘세미나장’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이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수사학으로 연결되면서 10여 년 동안의 공부 끝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수사학논문으로 언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경기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 논리가 말한다 - 아라파트의 로고스
①영원한 팔레스타인 해방 전사
② 아라파트의 수사학 
③ 아라파트의 수사학과 유산 

2. 삶이 메시지다 - 마틴 루터 킹의 에토스
①미국의 양심을 깨운 루터 킹 
② 루터 킹의 수사학 
③ 루터 킹과 수사학의 유산 

3. 감동은 울림이다- 오바마의 파토스

① 미국을 울린 오바마의 파토스 
② 오바마의 수사학 
③ 오바마와 설득 리더십 미래

4. 관계성에 호소한다 - 룰라의수사학
① 소통의 리더, 룰라 
② 관계성 언어로 단합하는 브라질 
③ 룰라와 설득 리더십의 앞날

5. 원자바오의 수사학 - 내면을두드리다
① 중국, 中華人民共和國 
② 위기 속에 빛나는 내면의 수사학 
③ 원자바오와 중국의 수사학

6. MB에게서 햄릿이 보인다 -이명박의 수사학

① 수사적 대통령제
② 장고 끝의 악수, MB의 수사학 
③ MB에게서 햄릿이 보인다

에필로그
추천사





위대한 침묵 51초


프롤로그

말에는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게도 그 내용이나 뜻을 뇌리에 각인시켜주는 놀라운 힘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말에는 화자는 물론 청자를 견인하는 힘이 있다. 즉, 화자와 청자를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파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말은 이슈로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유력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이 한 말이 이슈로 떠올라 거의 실시간으로 치열한 인터넷 담론장을 형성하곤 한다.


그런데 말에서 비롯되는 모든 담론은 특정한 대상을 지니고 있다. 선생님은 학생을, 연예인은 팬을, 언론인은 독자와 시청자를, 정치인은 국민을 대상으로 말을 하며 담론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감추고 싶은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다른 담론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발화자의 권위가 상승한다. 즉, 의사소통적 담론이 권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의 위력을 두고 영국의 철학자 오스틴(J. L. Austin)은 언어행위론(speech act theory)으로 정의했다. 즉, 오스틴은 말을 단순히 언어로만 본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동으로 생각한 것이다. 행동은 물리적인 행위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주먹을 날리면 상대방 역시 나에게 주먹을 날릴 것이다. 반면, 내가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면 상대방 역시 손을 내밀 수 있다.


말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자의 말하는 행위는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특정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화자의 행위를 발화효과행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수사학은 사슴의 빠른 발과 같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나, "인간에게 수사학은 하나의 무기이다"라는 르블의 말은 옳다.


말에는 격이 있고 품위가 있다. 그리고 국가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의 말일수록 격과 품위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으로까지 지적된 지도층의 막말과 추태는 도무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나라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지도자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은 담론을 형성하면서 권력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들의 말은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성품, 즉 리더십의 색깔을 드러내는 법이다. 지도자의 말이 반드시 실천담론으로 이어져 스피치의 생명인 신뢰를 확보하는 데 이 책이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 책이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라 할 레토릭 리더십을 우리 사회 각 영역에서 피어나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기를 조심스럽고도 간절히 바란다.


논리가 말한다 - 아라파트의 로고스

영원한 팔레스타인 해방 전사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쳤던 아라파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뛰어난 외교력과 협상력이다. 그의 뛰어난 이들 능력은 그가 평화의 전도사로 변신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를 했다. 자료를 검토하는 중에 아라파트가 매우 뛰어난 연설가라는 점이 나의 흥미를 더욱 끌었다.


"나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투사의 총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를 떨어뜨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위의 명문은 1974년 유엔 총회에서의 연설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1974년은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이스라엘 선수단에 테러를 가해 평화의 제전을 피로 물들게 한 지 불과 2년 밖에 흐르지 않은 시기였다. 이렇게 테러리스트로 유명했던 그가 올리브 가지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평화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 연설은 국제 테러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아라파트가 핍박받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변신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연설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이 평화협상과 무력투장을 병행하는 노선으로 전개될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여기서 아라파트는 올리브를 자신의 손에서 떨어뜨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즉, 힘겹게 선택한 평화의 길을 계속할 수 있도록 호소한 것이다. 이러한 아라파트의 메타포는 평화의 이미지와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적절히 녹여낸 촌철살인의 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그는 비단 외교 협상력뿐만 아니라 외교수사학에 매우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동시에 그는 연설의 힘을 통해 휘하 조직원들의 전투의지에 불을 지피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투쟁사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교전이 있다. 바로 1968년 3월 요르단의 국경도시 카라메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1968년 3월 20일 오후, 아라파트는 그의 전투원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에게는 정확하게 말하면 297명의 대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소년들이고, 정말로 그들 중 몇 명은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이때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의 특공대, 아시파(폭풍이라는 뜻의 아랍어)의 대원들 중 한 명이 과연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했다. 질문을 한 전투원은 뜻밖에도 그 어린아이 중 한 명이었다.


아라파트가 대답했다. "나의 용감한 병사야. 우리는 그들을 패배시킬 수 없단다. 우리는 3백 명도 채 되지 않지만, 그들은 최신 미국 탱크와 다른 무기들을 갖춘 몇 천 명일 것이야. 우리는 그들을 패배시킬 수는 없을 것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교훈을 줄 수는 있단다. 아랍 국가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용기와 위엄을 가진 남자답게 우리의 책임을 맡아야 한다. 우리는 이 국민들 속에 확고한 신념을 불어넣어야 한다. 우리는 무적의 군대에 대한 신화를 산산이 부수어야 한다." 연설이 끝난 뒤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해졌다.


전투를 수행한 결과, 이스라엘 군은 사망이 28명, 부상이 90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물론 아시파의 손실 역시 막대했다. 93명이나 사망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297명의 병사가 최신 무기로 무장한 몇 십 배의 병사를 패퇴시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원자가 몰려들자 아시파는 점차 늘어나 원래의 규모를 뛰어넘는 450여 명의 특공대로 성장했다. 또한 일거에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과 그 수장인 아라파트에 대한 지지도 역시 눈에 띄게 상승했다.


아라파트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호소하는 로고스적 기법을 활용한 연설로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설득의 요소 중 하나인 로고스(logos)는 상대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추구하는 행위가 상대의 이익이 되는 것이 설득의 결정적 증거다. 흔히 이익적 설득으로 불린다. 수사학자들은 로고스, 즉 이익적 설득 기법이 연설장에서뿐만 아니라 협상 테이블에서도 엄청난 파워를 행사한다고 보고 있다.


아라파트의 수사학

왕년의 국제 테러조직 우두머리였던 아라파트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소식에 유엔 총회 앞에서는 데모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아라파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다.


"이 위대한 유엔 건물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모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미국의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 미국에 대해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들과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의 이익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미국과 아랍세계 전체 사이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미국인들의 적대감은 그들의 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역설한 아라파트의 스피치야말로 논리와 이성에 호소한 로고스의 전범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감동은 울림이다 - 오바마의 파토스

미국을 울린 오바마의 파토스

파토스(Pathos)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정립한 개념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이 사전적 의미를 수사학적 의미로 확장시켜 살펴보면 감성의 자극을 받아 인간의 마음이 변화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토스나, 이성적 설득의 성격이 다분한 로고스(logos)와는 달리 파토스는 감성을 중시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나와 청중을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방에게, 나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나의 진정성에 대해 때로는 삶으로 증명하고, 때로는 이성과 감성적 방법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다. 나의 진정성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법, 그것이 바로 파토스다.


오바마의 수사학

오바마는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 추모 연설에서 무려 51초간 침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말을 잇지 못했다. 보통 연설에서 침묵은 곧 실수로 인식된다. 그러나 오바마의 51초에 걸친 침묵은 오히려 추모식장에 모인 청중과 TV를 통해 그를 지켜보던 미국인을 감동시켰다. 무엇이 그들에게 울림을 준 것일까. 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오바마의 연설문과 활자에 드러나지 않은 상황과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는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미국이 크리스티나가 상상했던 대로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가 우리 어린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오바마가 51초 동안 침묵하게 된 것은 총기 난사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인 크리스티나의 꿈에 대해서 위처럼 언급한 뒤의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사건의 희생자 중 가장 어린 9살 소녀였다. 그녀는 무용선수이자 체육선수였고 수영선수였으며, 나중에 메이저리그에서 첫 번째 여자선수가 되길 바랐다고 오바마는 연설의 초반부에서 그녀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자선단체에 참여하는 소녀였다고 했다. 그야말로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소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총기 난사 사고는 소녀의 꿈을 앗아갔다. 민주주의를 막 깨닫게 된 어린 소녀의, 시민의 의무에 대해 막 깨닫게 된 어린 소녀의, 학생회의 임원에 뽑힐 어린 소녀의, 공공봉사란 희망적이란 것을 막 알게 된 어린 소녀의 꿈을 앗아갔다. 그런 소녀를 언급하며 오바마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졌고, 그를 지켜보는 청중도 동일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지 않은 상황과 맥락이 더 있다. 그가 크리스티나와 비슷한 나이의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중 동생인 샤샤 오바마는 크리스티나보다 불과 3달 전에 태어난 또래였다. 오바마는 크리스티나를 언급하며 자신의 어린 딸인 샤사를 떠올린 것은 아닐까? 적어도 추모식장에 모인 청중은, 그리고 TV를 시청하는 미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바마가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부모들은 자식을 떠올리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야말로 진정성 있는 침묵이 미국의 통합을 이루는 데 일조한 것이다.


침묵은 무언의 레토릭에 속한다. 그런데 침묵은 말하지 않는 만큼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같은 침묵이 때로는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때로는 다음 구절을 잊어버렸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침묵이 의도하는 방향대로 해석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상황과 맥락, 그리고 표정과 몸짓이다.


능수능란한 연설가들이 그러하듯 오바마도 상황과 맥락에 맞는 표정과 몸짓으로 유명하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51초의 침묵에서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리고 변화와 희망을 말할 때에는 강한 눈빛과 제스처로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이입시킨다.


오바마는 청중의 욕구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연설의 달인이다. 일례로 2004년 전당대회 연설에서 왼쪽을 더 많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연설장을 살펴보던 오바마가 연설무대가 오른편으로 치우쳤음을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왼편을 더 많이 바라본 결과였다. 모든 대중들을 향해 눈빛으로 소통하려는 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정과 제스처들이 어느 한순간에 갖추어질 수는 없다.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면서 연마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번 준비해야 되는 연설문과 달리 표정과 제스처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별도의 많은 연습을 요하지 않는다.



관계성에 호소한다 - 룰라의 수사학

소통의 리더, 룰라

전통 수사학에 따르면 수사학의 목적은 설득에 있다. 즉, 수사학은 담화를 통해 남을 설득시키는 기술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시각은 남이란 내 필요에 따른 수단이며 그때그때 마음먹은 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일방향의 입장이다. 즉, 서양의 전통적 수사학은 청자보다는 화자에 집중이 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또한 전통 수사학은 설득에 초점을 맞추는 실용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현대의 수사학은 이러한 전통적 요소에 새로운 개념이 많이 추가되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수사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부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중 하나가 관계성에 바탕을 둔 소통의 수사학이고, 다른 하나는 화자와 청자의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중시하는 내면의 수사학이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수사학은 쌍방향성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수사학과는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이들 수사학은 화자와 청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동안 나는 소통의 리더십을 온몸으로 보여준 많은 지도자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 결과, 최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브라질의 룰라(Lula da Silva) 전 대통령을 쌍방향 소통에 합당한 인물로 주저 없이 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사랑받은 대통령이었다. 그가 퇴임할 무렵의 지지율은 무려 87%로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이 퇴임 시에 기록했던 지지율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8년간 이어진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심장에서 우러나는 정치를 내세운 스킨십의 결과였다. 룰라 대통령의 스킨십으로 통하는 소통방식은 현장 제일주의로 잘 나타난다. 8년간 670일가량을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보내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고, 현장에서는 경호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국민 속으로 뛰어들었다.


관계성 언어로 단합하는 브라질

룰라는 취임하자마자 굶주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극빈층 사람들을 먼저 만났다. 이렇게 그들의 요구를 듣고 난 룰라는 우선적으로 추진할 정책과제로 굶주림 제로(Fome Zero)라고 불리는 식량안보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임 카르도수 대통령의 행정부가 만든 빈민층 취학 지원 프로그램을 가족기금이라는 이름으로 확대·개편했다. 이 기금은 빈곤층 1,200만 가구가 일정액의 현금 지원을 받는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가정만이 가족기금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단순한 돈의 재분배가 아니라 교육을 통한 빈곤층의 자강을 도모한 것이다. 이렇게 룰라는 집권기간 내내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굶주림을 퇴치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극빈층에 의한 범죄율 감소 등 치안 안정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도 함께 가져왔다.


룰라의 수사학

스킨십으로 통하는 아날로그식 소통법은 레토릭 용어로 말하면 관계성 수사학으로 볼 수 있다. 관계성은 소속의 욕구처럼 대인 관계 유대를 안정적으로 형성하고 강화하려는 경향성으로, 다른 사람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과 함께 하려는 열망이다.


사실 관계성을 맺는다는 것은 서로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화자의 가슴에서 청자의 가슴으로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성의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열어 서로의 관계를 만들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우리의 형제자매 중 단 한 명이라도 굶주림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에 충분할 이유가 될 것이다."


관계성 수사학의 핵심요소는 민감성이라고 수사학자들은 진단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룰라는 굶주림에 시달린 시민들의 처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룰라를 관계성 수사학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굶주림 극복에 관한 룰라의 말은 저소득층 생계지원프로그램인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국가를 부도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오랜 정치 불안, 심각한 양극화 등을 극복하기 위한 브라질의 대장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직설화법의 설득 리더십

"배부른 소리 마라. 배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위의 말은 룰라의 정책을 비난한 우파에 대해 룰라가 응수한 말이다. 우파는 볼사 파밀리아를 비롯한 룰라의 사회보장정책이 합법적인 유권자 매수라며 맹비난했다. 그러자 룰라는 다시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우파의 공세를 일축한다. 부유한 당신들이 배가 고파보았냐는 것이다.


"브라질의 정치인들이 두 개의 계정(dois caixas)을 가지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니냐."


* 두 개의 계정은 선관위에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계정과 정치인이 따로 관리하는 비밀장부 두 개를 말한다. 국회의원은 돈이 많이 드는 스폿광고 때문에 늘 여윳돈을 모아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해 이권 청탁과 개입을 마다하지 않는다.


2005년도에 소위 월급 스캔들이 터졌을 때였다. 이 스캔들로 인해 룰라는 정치생명에 최대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룰라는 정공법으로 돌파를 시도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치인들이 두 개의 계정을 갖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 만큼 도덕주의로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룰라의 변명은 언론과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그 결과 룰라의 재선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거리의 언어로 솔직하게 말한 룰라식의 수사기법이 통했는지 그의 지지도는 40%대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뒤 지지도는 회복됐고 재선에도 무난히 성공했다. 이렇게 룰라의 수사는 정치인이 사용하는 말 치고는 굉장히 직설적이다. 만약 우리나라와 같았다면 대통령이 품격에 맞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을 것이다.


룰라 대통령과 세종대왕의 리더십

룰라는 브라질을 잘 알기 위해서 수도인 상파울루는 물론 지방 곳곳을 부인 마리사와 자녀 모두를 데리고 다녔다. 교통수단으로서는 기차, 보트, 버스를 이용했으며 여정에 따라 14일에서 15일이 걸리기도 했다. 목적은 오직 하나, 모든 사람과 얘기를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함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느 지도자들의 여정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참으로 색다른 풍경이 눈에 띄었다. 룰라 대통령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세미나가 열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간 모든 곳, 버스면 버스, 도시와 도시 사이에 항상 그 지역, 그 도시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없는 대학교, 대학원 졸업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민을 위한 여정이며, 제가 대통령의 자리로 오르게 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룰라 대통령에게는 모든 장소가 세미나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세미나에서는 현지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소통의 통로가 자연스럽게 열리게 돼 요즘 말로 하면 공론장이 형성됐다는 얘기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공론을 모든 국가의 원기라고 규정했다. 달리 말하면 공론자유국지원기(公論者有國之元氣), 즉 조선시대에는 그처럼 세상에 공론이 활발하게 이는 것은 나라에 기운이 있는 것으로 봤다는 뜻이다. 그리고 왕과 신하들이 국가의 대소사에 관해 토론하는 경연(經筵)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로써 우리 역사에서 공식적 의미의 공론장이 처음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공론장이 가장 활성화돼 국가의 원기가 넘쳐난 시대가 세종 시대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은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국정회의를 달마다 5회꼴로 열었다.


소통 리더십뿐만 아니라 포용 리더십 면에서도 룰라와 세종은 닮은 점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반대파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세종은 자신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정적이었던 황희에게 정승을 맡겨 18년 동안을 국정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 점에서 룰라도 마찬가지였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룰라가 야당 인사들을 요직에 등용했던 포용 인사 역시 인상적이다. 시장경제주의자인 야당 하원의원 엔히크 메이렐리스를 8년 임기 내내 중앙은행장으로 중용한 게 단적인 사례다. 그런 화합과 소통과 포용이 있었기에 상·하원 의석 가운데 20%밖에 안 되는 소수당인 노동당을 이끌고 성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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