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공부방법론 연구

   
송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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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정보
   
15000
2007�� 02��



■ 책 소개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 이 책은 주자의 공부방법론인 거경궁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거경공부는 항상 내 마음을 깨어 있게 해서 외부 사물에의해서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궁리공부는 내 마음의 이치와 외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서 이치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두 가지공부방법론인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로 귀결되는 공부방법론이다. 

■ 저자 송봉구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유학과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동양철학연구회와 한국유교학회의 회원이며,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논저로는 「맹자의 호연지기 연구」「정이천의 심성 거경궁리론 연구」 「주자의 거경에 관한 연구」 외 다수가 있다.&nbsp& 

■ 차례
서문
Ⅰ. 서론
Ⅱ. 주자의수양과 체인의 선하
Ⅲ. 주자의 주정지경론
Ⅳ. 주자의 격물치지론
Ⅴ. 거경공부와 궁리공부를 통한 인격완성
Ⅵ.결론
참고문헌




폭등 시대

주자의 공부방법론 연구

  

서문

이 책은 주자의 공부방법론인 거경궁리에 대해서 서술한 것이다. 거경공부는 항상 내 마음을 깨어 있게 해서 외부 사물에 의해서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궁리공부는 내 마음의 이치와 외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서 이치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두 가지 공부방법론인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로 귀결되는 공부방법론이다.


궁리공부를 하다보면 하나의 이치가 상황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알게 되는 것은 궁극적인 하나의 이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안으로 살피기도 하고 밖으로 살피기도 한 것이다. 밖으로 살피는 공부가 궁리공부라면 직접 내 마음을 살피는 공부방법으로 정좌공부가 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은 요, 순처럼 될 수 있다고 했고, 부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평범한 인간의 성인화를 위한 이 두 철인들의 공부방법을 기가 막히게 엮어서 새로운 시대 흐름을 만든 사람이 바로 주자이다. 그 공부방법의 조화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유학의 공부방법론을 통해서 자기를 변화하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서론

이 연구의 목적은 중국 송나라 때의 유학자인 주자의 거경궁리론(居敬窮理論)을 수양과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주자의 거경궁리론은 평범한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공부방법론이다. 거경공부(居敬工夫)는 놓아버린 마음을 모으는 수양방법론이며, 궁리공부(窮理工夫)는 마음이 모아진 상태에서 세상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인식방법론이다.


공자와 맹자에게서도 거경궁리의 공부방법론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자와 맹자는 경(敬)공부를 두 가지 방면에서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일이 있을 때, 즉 사람이나 일을 마주했을 때, 일이나 상대방을 공경하는 의미로서의 경(敬)이고, 둘은 일이 없을 때, 즉 사람이나 일을 마주하지 않고 자기 혼자 있을 때, 수양하는 방법의 경(敬)이 있다.


이 둘의 공부방법론이 주자에 이르면 정(靜)과 동(動)의 공부방법론으로 종합된다. 정(靜)의 상태에서는 정좌(靜坐)를 통해서 놓아버린 마음을 모으고, 동(動)의 상태에서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이나 상성성(常惺惺)을 통해서 모은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게 하는 공부방법론이다. 그런데 정(靜)의 상태에서 공부하는 정좌(靜坐)의 공부방법은, 공자와 맹자에서 볼 수 없는 주자만의 특이한 공부방법론이다.


주자가 정좌(靜坐)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자가 말하는 공부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 주자가 공부를 통해서 성취하려고 한 것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었다. 주자는 성인을 때에 맞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가 자신을 조절 가능한 사람이 되려면 거경궁리공부를 해야 한다. 이 공부를 하려면 선배들이 기록해놓은 거경궁리공부에 대한 글을 먼저 읽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글만 읽어서는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인 정좌공부를 해야 자신의 욕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진실한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주자의 공부론을 언급할 때, 정좌를 결여하고 경(敬)을 언급한다는 것은 주자의 경을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궁리공부를 통한 거경공부의 확충은 마음이 아직 깨어 있는 상태가 되지 않았는데, 일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일을 궁리하지 않고, 마음을 깨어 있게 한 다음에, 일을 궁리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내 앞에 일이 왔을 때, 일을 피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바로 궁리를 하면 그 궁리한 만큼 내 마음이 깨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궁리공부를 통한 거경공부의 확충은 쉽지 않다. 마음이 아직 깨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면 이치가 파악되는 일은 적고, 자주 사물의 모양이나 이름에 묶여 다른 곳으로 관심이 옮겨간다. 이럴 경우에 정좌를 통한 경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좌를 해서 마음이 완전히 깨어 있는 상황이 된 후에 궁리공부를 하자는 것을 강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인지 그 경계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정좌를 강조하면서도, 정(靜)의 공부에 몰입하면 자기 앞에 다가오는 일 처리를 외면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정좌의 공부 범위를 현실을 경영하는 데 장애를 받지 않고, 경(敬)의 상태로 바뀌는 데 장애를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절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자의 수양(修養)과 체인(體認)의 선하(先河)

경(敬)은 인간이 원시의 종교 신앙으로부터 탈피하거나 독립해 나오면서 생긴 이른바 우환의식을 처리하는 최초의 덕목으로 나온 것이다. 사람의 모든 행위를 자기 책임 아래에 놓고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공덕을 기르는 경덕(施於事)과 명덕(求於心)의 양면적인 의의를 가졌던 것이다. 주나라 후기에 이르면 경의 의의가 후퇴하거나 격하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아마도 이는 주나라 초기에 여러 덕목 중의 하나로 제기된 경(敬)보다 변두리에 속해 있던 인(仁)이 중심 덕목으로 격상함에 따라 경이 주로 사물에 대처하는 몸가짐 같은 바깥쪽으로 밀려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자는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는 경의 의미를 施於事의 측면에서는 일이 있을 때 상대방을 공경하는 의미로서의 敬(有事時의 敬)으로, 求於心의 측면에서는 일이 있을 때 상대방을 공경하는 의미로서의 敬(無事時의 敬)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공자의 공부방법 중에 궁리에 해당하는 것은 박학어문(博學於文)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글을 넓게 배운다는 것이다. 공자는 글을 넓게 배워서 자신의 근본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도 터득했다. 그렇다면 학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공자는 배움을 싫어하지 말고 널리 배우라고 한다. 배운 것을 반드시 생각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워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아울러 배우지 않으면 여섯 가지의 폐단이 생긴다고 한다.


인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어리석게 되고, 지혜를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허황되고, 믿음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해치게 되고, 곧음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급하게 되고, 용맹함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어지럽게 되고, 강함을 좋아하기만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경솔하게 되느니라.


이 폐단을 극복하려면 배워서 이치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배움의 내용을 공자는 시(詩)를 배우는 것, 예(禮)를 배우는 것, 역(易)을 배우는 것 등으로 말하였다.


맹자는 내면을 기르는 공부인 양기(養氣)와 외면의 사물을 탐구해서 본성을 찾아가는 지언(知言)의 관계를 진심(盡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性)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性)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근거가 된다."


매자는 진심(盡心)을 하면 결과적으로 하늘을 알게 되고, 존심(存心)을 하면 하늘을 섬기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둘의 관계는 아는 것과 섬기는 것의 차이가 있다. 맹자의 진심과 존심의 관계도 공자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진심만 하고 존심하지 않으면 사물의 이치에 대해 알 수 없어서 존심의 참된 의미를 실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주자는 이 둘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진심(盡心)·지성(知性)·지천(知天), 이것은 치지(致知)이고 존심(存心)·양성(養性)·사천(事天), 이것은 역행(力行)이다.


결국 주자는 진심과 존심을 치지와 역행의 관계로 풀이하고 있다. 이 둘의 의미를 주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지행(知行)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눈은 발이 없으면 갈 수 없고 발은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후(先後)를 논하면 지(知)가 먼저이고 경중(輕重)을 논하면 행(行)이 무겁다.


맹자에 있어서 양기와 지언의 관계도 내면의 확충과 외면의 탐구를 통해서 나의 본성을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한 중요한 공부방법임을 알 수 있다.


 

주자의 주정지경론(主靜持敬論)

주자 경(敬)공부의 주체는 심(心)이다. 그래서 경공부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심이 무엇인지 그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주자는 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텅 비어 신령스러운 것이 심(心)의 본체이니 내가 텅 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와 눈은 보고 듣는 것이고 보고 듣게 하는 근거가 마음이니 어찌 모양이 있겠는가? 그러나 귀와 눈을 가지고 보고 들으니 모양이 있는 것 같다. 마음은 텅 비어 신령스러운데 어찌 물이 있겠는가?


주자는 또, 마음은 고요할 때도 작용하고 움직일 때에도 작용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요할 때 작용하는 것과 움직일 때 작용하는 것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주자는 이를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말한다.


마음의 온전한 모습은 텅 비고 맑아서 온갖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조금의 욕심이라도 없으며 그것이 유행하면 두루 지나서 동정을 관통하고 그 묘한 쓰임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온전한 전체를 가리키면 성(性)이라 하고, 그것이 이미 드러나서 묘하게 사용되는 것을 일러 정(情)이라 한다.


주자는 성과 정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물에 비유한다.


마음은 관섭하고 주재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이 위대한 이유이다. 마음은 비유하면 물이고 성(性)은 물의 이치이다. 성(性)은 물의 고요함을 세우고, 정(情)은 물의 움직임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욕심은 물이 흘러서 넘치는 것이다. 재(才)는 물의 기운으로 흐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흐름에 급한 것도 있고, 느린 것도 있는 것은 재(才)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주자는 욕심을 물이 흘러서 넘치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 흘러서 넘치는 것이 바로 악(惡)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惡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로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이고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정신 차리고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이 경(敬)에 거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의 본원에 비유되는 성(性)은 무엇이며 마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주자는 성(性)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은 실제의 이치인데 인자함, 의로움, 예의바름, 지혜로움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주자에 있어 성(性)은 실제의 이치다. 이치의 내용으로 인(仁), 의(義), 예(禮), 지(知)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성이 실제의 이치라고 해도 바로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자는 매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가슴 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등의 마음이 드러난 것인데 이 마음이 드러나기 이전의 상황을 주자는 적막하여 고요한 때이지만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살아 있는 그것이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도 살아 있고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주자는 살아 있는 기운 속에 본디 영명한 어떤 것이 있다고 하였다. 바로 기운의 움직임을 주재하는 그것을 성(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마음과 성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이 안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주자는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깨어 있는 공부가 중요한 것이다.



주자의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

송대 신유학적 수양 방법인 경공부란 육체적인 기질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개인적 욕망을 잘 다스려 본성의 이치에 따르도록 선의지(善意志)를 길러나가는 것이다. 개인적인 욕망을 본성의 이치에 따르도록 하려면 먼저 본성의 이치를 직접 알아야 한다. 주자는 이치 체득의 방법과 인격 수양의 방법은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격물궁리는 개개 사물과 개인의 행위를 대상으로 존재원리와 당위법칙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알아내려는 지적활동이다. 거경함양은 마음을 한결 같이 통일하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도덕적 본성(天理)을 체인하며 실제의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이러한 도덕적 본성에 따라 감정이 발현될 수 있도록 경건하고도 진지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덕성공부이다. 이 둘의 관계를 주자는 두 발의 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학자의 공부(工夫)는 오직 거경궁리에 있다. 이 두 일은 서로 드러난다. 궁리공부를 잘하면 거경공부가 날로 더욱 발전이 있고 거경공부를 잘하면 궁리공부가 날로 더욱 정밀해진다. 사람의 두 발에 비유할 수 있는데 왼쪽 발이 나아가면 오른쪽 발은 멈추고 오른쪽 발이 나아가면 왼쪽 발이 멈추어 있는 것과 같다.


궁리공부를 통해서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인식하면 내 마음도 그만큼 성장하는 것이고, 거경공부가 잘되면 마음이 항상 깨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때 더욱 정밀하게 진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궁리공부도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도덕의 본성을 체인하는 공부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궁리공부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목적은 도덕적 본성을 체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자 격물의 목적은 앎의 확장을 통해서 내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지혜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그 방법으로 사물에 접하여 이 이치를 궁구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내 마음이 신령한 지혜를 본래 가지고 있고 천하의 사물도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 마음의 지혜가 곧 사물의 이치(理)이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곧 내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지혜를 이루기 위해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지 말고 내 마음의 이치를 직접 연구해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주자는 이에 대해서 내 마음의 이치를 직접 연구하면 반쪽 공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내 마음을 밝힐 수는 있지만 대상 사물에 대한 공부는 결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 사물의 이치도 밝히고 내 마음도 밝히기 위해서 사물에 나아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치를 연구하라고 한 것이다.


주자는 격물(格物)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격(格)은 이르는 것이며, 물은 사(事)와 같다. <격물>은 궁구하여 사물의 리(理)에 이름으로써 그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


주자는 여기서 격(格) 자를 이르다(至)로 풀이하고, 물(物) 자에 대해서는 일과 같다고 한다. 먼저 격(格) 자의 해석인 이르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주자는 이르다의 의미에 대해 "격물의 격(格)은 이르다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순이 문조에 격했다에서의 격(格)과 같은 의미인데, 이는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주자는 일단 이르다는 의미를 어떤 곳에 도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도달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서 핵심까지 도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자는 서술하고 있다. 


격은 이르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어떤 곳까지 가는 것이다 그것은 남검 사람이 건녕으로 간다고 할 때, 그가 반드시 그 군청까지 도달해야 이르렀다고 하고, 건양의 경계까지 도달했다면 그것을 이르렀다고 하지 않는 경우와 같다.


당시 행정제도상 군수가 머물던 관서를 군부라고 불렀는데, 군청은 그 군부의 대청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상 그 지역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군청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건녕의 핵심에까지 도달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 군청까지 도달해야 이르렀다고 한다는 주자의 말이 비유하는 바는 이르다는 동사가 어떤 것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자의 뜻대로 격물의 격(格) 자를 해석하면, 격물은 물(物)의 핵심에 이르다로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물(物)의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주자는 완전하게 궁구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이치를 알려면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해야 되는가? 그것은 아니다.


궁리(窮理)는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궁구하여 한 이치를 얻으면 곧 그만두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축척한 것이 많으면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자는 물(物)을 일과 같다고 풀이하고, 뒤이어 궁구하여 사물의 리(理)에 이르다라는 격물의 해석에서 물(物) 자에 해당하는 곳에 사물(事物)이라는 용어로 대체해 쓰고 있다. 여기에서 사물이란 것은 "눈앞에 응접하는 것은 모두 물(物)이다"라고 한 것처럼 천하의 모든 사물을 말한다. 주자는 물(物)의 존재원리를 리(理)와 기(氣)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천지간에 리(理)가 있고 기(氣)가 있다. 리는 형이상의 도(道)요 만물을 낳는 근본이다. 기는 형이하의 그릇이요 만물을 낳는 도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과 사물이 생김에 반드시 리(理)를 부여받은 후에 성(性)이 있고 기(氣)를 부여받은 후에 형체가 있는 것이다.


주자는 사람과 사물은 모두 리(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주자에 있어서 기(氣)는 모든 자연물의 질료이다. 그래서 주희는 "천지간에는 기(氣)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기는 또한 모든 자연물과 자연현상의 구성요소이다. 그래서 그는 "맑은 기는 하늘이 되고, 해와 달과 별이 된다." "맑고 굳센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땅이 된다." "서리는 곧 이슬이 응결하여 축축하게 되어 하강하는 것이다." "일식과 월식은 모두 음기와 양기의 쇠미함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구절로 미루어 보면, 우리는 주자가 모든 자연물과 자연현상이 기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 또한 기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氣)가 모이면 태어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 및 신체적 행위 역시 기의 작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릇 사람이 말하고, 행위하고, 생각하고, 영위하는 것은 모두 기(氣)이다."


기는 이와 같이 만물을 생성하면서 동시에 기의 흐리고, 밝고, 두텁고, 얕음에 의해서 만물을 다르게 만들어낸다. 위와 같이 기에 의해서 다양한 차별상을 가지고 있는 물(物)을 주자는 인간의 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옷 입고, 먹고, 움직이고, 짓고, 쉬는 것과 보고 듣고 손발을 놀리는 것이 모두 물(物)이다. 예를 들어 경서를 읽고, 사서를 보며, 사물에 응접하면서 옳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주자가 말하는 물(物)에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위와 같은 범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들은 소홀하게 다루기 쉽지만, 이러한 일상적인 행위를 먼저 잘 단속해야 이차적으로 마주치는 다른 일들에 있어서 내 마음의 욕심을 알아차릴 수 있다.


즉 먼저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관찰해야 욕심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일차적인 내 몸의 변화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전이나 사서 읽기를 통해서 성인의 모든 행동들이 내 생활에서 법칙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실제로 성인의 행동대로 닮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물(物)의 범주이다.


주자는 만물의 쓰임새는 물론이고 수레가 육지를 가는 이유와 배가 물 위를 가는 이유를 모두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현상의 배후까지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物)의 범위가 표면에서 내면까지 들어간 것이다.



거경공부와 궁리공부를 통한 인격완성

주자는 경건함을 유지하는 공부를 통해서 황홀한 깨달음의 경지까지는 가지 말고,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상황에서 멈추고, 그 다음에 경전학습을 통해서 경전이 가지고 있는 이치를 내 마음속에 확충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대상 사물의 이치와 내 마음속에 있는 이치가 만나게 된다. 그러면 대상 사물과 나는 더 이상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없는 조화로운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이러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러나 주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받은 기질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선각자들이 모든 사람이 알맞게 실천할 수 있는 항목을 만들어서, 아직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주자는 그 방법의 하나로 제자에게 먼저 『소학(小學)』을 찬술하라고 지시한다. 『소학』을 통해서 절도와 교양을 가르치기에 전념한다. 

 

다음으로 『가례(家禮)』를 저술하여 명분을 지키고 정(情)을 조절하는 것을 가르쳤다. 주자는 『가례』의 서문에서 예를 만드는 이유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근본적인 것과 또 하나는 근본적인 것에서 파생된 질서를 지키기 위한 문채라 적고 있다. 근본적인 것은 명분을 지키는 것과 애경(愛敬)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채는 인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마땅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주자가 『가례』를 만든 이유를 알 수 있다. 『소학』을 편찬한 동기와 마찬가지로 자기 직분에 맞게 열심히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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