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

   
함규진
ǻ
한국학술정보
   
23000
2008�� 10��



■ 책 소개 
정약용의 사상에 대하여포괄적인 이해를 시도하되, 특히 정치사상 분야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재조명하였다. 그동안 노정된 "모순"과 난제들을 최대한 해결할 것을 시도했다.또한 중심 논의 끝의 소론(小論)으로 정약용 사상의 "근대성" 문제를 간략히 다룬다. 이 소론은 이 연구에서 도출된 결론에 따라 전개되며, 이소론의 내용을 통하여 중심 논의의 이해를 더 심화시키는 효과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nbsp&
■ 저자함규진
성균관대 행정학과 학사, 동 학교 정치외교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이며성균관대, 수원과학대, 용인대에 출강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왕의 투쟁』『역사법정』『108가지 결정』「유교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예의정치적 의미」「다산 정약용의 정론」등이 있으며,&nbsp&역서로는『마키아벨리』『리더십 강의』『팔레스타인』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제1장 서론 
1.연구 배경 및 목적 
1) 정약용 사상에 대한 그간의 연구 경향 
2) 정약용 사상의 "모순"과 난제들 
3) 정약용 정치사상에대한 탐구와 문제점 
4) 본 연구의 목적 

2.연구방법 및 범위 
1) 정약용 사상의 문헌해석학적 이해 
2) 정약용 사상의 역사적 이해 
3. 연구의 구성 및 각 장의 내용

제2장 정약용 사상의 기본적 이해
1. 리에서 상으로 
1) 정약용 사상에서 실과 상 
2) 정약용 사상의 상 중심 이해 
3) 주자학적이기론에서의 이탈 
4) 서구 상식철학 전통과의 비교 
5) 소결 

2. 도에서 덕으로 
1) 도와 덕 
2) 도학 전통에 대한 비판 
3) 정약용의 덕론 
4) 서구덕론과의 비교 
5) 소결 

제3장정약용 정치사상의 이해 
1. 정치원론적 이해 
1) 정치와 자연 
2) 정치와 윤리 
3) 정치와 전통
4) 소결 

2. 정치권력론적 이해 
1)국권론 - 군주와 국가 
2) 민권론 - 신하와 백성 
3) 소결 

3. 국가 체제론적 이해 
1) 경제 체제론 
2) 신분제론 
3) 국방 체제론 
4) 소결

4. 정약용 사상과 근대화 정치 
1) 인문주의적근대와 자연과학적 근대 
2) 초기 공화주의와 "마키아벨리적 순간" 
3) 혁명과 반동의 기로 
제4장 결론: 정약용 사상의 의의

참고문헌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


제1장 서론

연구 배경 및 목적

지금 다산 정약용은 전통 한국의 수많은 사상가들 가운데서도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사람이며, 많이 연구되는 점에서는 그들마저 능가하여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가로서의 명성이 처음부터 한결같지는 않았고 생전과 사후 한동안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의 앞선 평가가 인색했던 데는 그가 정치적으로나 학파적으로 비주류에 머물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남인으로서 정조 치하에 잠시 빛을 보았을 뿐, 생애의 대부분을 유배와 무관심 속에서 보내야 했다. 정치계에서 노론의 헤게모니는 잠깐의 굴곡을 넘어 오래 이어졌으며, 사상계에서 이황, 이이로 대표되는 주자학의 헤게모니는 조선왕조가 종말을 맞은 후에도 이어졌다(한국유학 내지 한국철학의 영역에서). 또한 그의 사상이 세상에 소개되는 일이 너무 더딘 점도 있었다. 반면 후대의 평가가 후한 이유는 그의 사상 중 일부 요소들이 현대 사회에서 매력적으로 비쳐질 요인이 많았기 때문이며 실학이라는 학파를 정리해 볼 때 실학자들 가운데 정약용만큼 방대한 저작을 통해 경학과 경세학을 철저하고 종합적으로 천작한 사람을 달리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전대와 후대의 평가가 크게 어긋나며, 그의 사상이 어떤 사람에게는 진부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혁명적이게 읽히는 사실은 정약용의 사상 자체에 내제된 여러 모순과 난제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순과 난제들은 정약용의 사상을 사상사 속에서 온전히 자리매김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여러 가지 모순 과 난제로 인해 정약용의 사상은 추가 연구 가치를 남기고 있다. 특히 정치사상 분야에 있어서 정약용 사상의 이해는 보다 많은 연구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정약용의 사상에 대하여 경학과 경세학에 걸쳐 포괄적인 이해를 시도하되, 특히 정치사상 분야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재조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노정된 모순과 난제들을 최대한 해결할 것을 시도한다.


연구방법 및 범위

이 연구에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방법에 따라 논의를 전개하되, 문헌 위주의 접근법을 논의의 저변에서 활용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면밀한 문헌 이해를 통해 정약용의 진의를 파악하고 그의 여러 저작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작업을 하지만, 그 결과를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며, 또한 그 결과를 통해 당시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제2장 정약용 사상의 기본적 이해

리에서 상으로

정약용 자신이 스스로의 사상을 상(常)이라는 어휘로 분명하게 정의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이른바 실학파의 최고봉이라는 그가 스스로를 실학자라고 지칭하지도 않았고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도 없듯, 오늘날의 학문체계에 비추어 한국철학 또는 유학 등 학문 분류 속에서 그의 사상을 규정하게 위해서는 단지 그 자신이 실제 사용한 언어를 정리하는 것을 넘어 그 의미를 재해석,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실은 방법론에서의 실사구시, 실천론에서의 이용후생으로 정리되기도 하는데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념을 배제하고 오직 사실에 입각해서 사물을 판단하며,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인 효용성 여부를 실천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상은 실을 포함한다. 그리고 실을 뛰어넘는 의미의 영역을 표상한다. 상에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담론을 꺼리고 실제적, 일상적인 차원에서 논의를 전개하려는 실증적인 태도, 일상생활에서 효용이 있는가를 중요시하는 실용적 태도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인식론적 기초에서 이론 구성을 시작하며 그 기초를 계속해서 반성함으로써 이론의 적실성을 검증하려는 상식철학적 태도 그리고 불변하는 인간성의 기본적인 요소에서 도덕의 원천을 찾으려는 태도까지 두루 포함된다. 실 대신 상을 정약용 사상의 근본 관념으로 설정할 때, 우리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그 사상의 여러 측면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사상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더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기존의 주자학에 비해 정약용의 사상은 현실적이다. 사실을 중시한다. 실용을 모색한다. 정약용의 사상은 상행(常行)을 염두에 두고 상도(常道)를 추구한다. 정약용의 사상은 범상(凡常)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심지어 상스럽다. 그의 사상은 상식적이다. 정약용의 사상은 상식의 사상, 상(常)의 철학이다.


정약용 사상을 한국사상사의 맥락에서, 또 세계사의 맥락에서 바로 이해하려면 상(常) 관념을 중심으로 볼 것이 요청된다. 또한 그것은 서구 상식철학과의 친화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단순한 상식에서 출발하여, 모두가 수긍하는 불변의 도덕 원칙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한 정약용은 실천의 영역에서 덕(德)의 진흥을 중심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도에서 덕으로

정약용 당시의 사상계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주자학에서는 자연의 도와 인간의 도를 구분하지 않는 한편, 도와 덕 사이의 구분도 사실상 없애고, "도에 맞추어 덕을 쌓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갖추어져 있는 덕을 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전의 학습 외에 주경 공부 등 정적· 내향적인 수양이 중요시되었고, 수양의 내용은 자연, 즉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어 궁극의 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 때 선천적으로 주어진 기질의 청탁 여부에 따라 노력의 효율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덕의 의미를 마음을 바로 함과 얻음으로 이해한다. "마음을 바로 하고 행하여"자신에게 얻어진 것이 덕이다. 그 내용은 상, 즉 인륜이 된다. 그런데 정약용은 『대학공의』 첫머리에서 『대학』의 강목을 논하며, 이른바 "대학지도 재명명덕”의 명덕은 곧 효제자(孝弟慈)이며 효제자는 인륜을 요약하는 세 개의 덕이라고 규정했다. 효제자는 합쳐 말해서 효제라 할 수 있고, 더 줄이면 효 한 글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 인의 본질과 같은 것으로 풀이된다. 인은 결국 인륜의 본질이며, 인도를 바르게 걸어감을 의미하는 덕의 본질이다.

 

도와 덕을 미분화하고, 자연계의 이치와 인간계의 이치를 통합해서 보고 있던 주자학적 도덕론에서 탈피한 정약용은 인식론적이고 상식철학적인 성론에 기초해 인간은 선악 모두의 경향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낙선치악의 도심을 갖고, 이를 통해 추구해 나가야 할 덕은 오직 실제 행동을 통해서만 배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덕의 목적은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잘 하려는 것”이었으며, 그 내용은 효제자로 집약되는 인륜이었다. 이 명덕은 타고난 기질이나 신분에 무관하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임금에서 서민에 이르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삶의 질서를 부여하고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정약용의 덕론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적 덕론과 비교해 볼 의의가 크다. 공화주의적 덕론과 유사하면서 일부 자유주의적 덕론의 성격까지 구비한 정약용의 덕론이지만, 상식적 현실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으며,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해 다소 보수주의적인 경향도 보인다.


이 모든 논의는 이 연구의 중심 주제인 정약용의 정치철학을 논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전제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제3장 정약용 정치사상의 이해

정치원론적 이해

정약용의 정치사상은 자연의 이법과 정치를 분리해 본다. 그에 따라 지도자의 수신이나 도야에 앞서 적극적인 실천이 중시되며, 정치란 우주적인 섭리 속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를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된다.


혼란과 부패가 횡행하는 세상을 맞이하여 도덕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 엄격한 리(理) 중심의 도덕론 위에 정치사상을 수립했던 주희와 비슷하게, 정약용 역시 정치와 윤리를 통합해서 본다. 그러나 그때의 윤리는 소극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윤리가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이고 실천지향적인 윤리다. 그런 원칙 아래 경제와 교육, 정치와 도덕이 통합된다.


정약용은 정치를 논하며 전통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민중을 흥기시키고 하나의 정치체를 구성하게끔 동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민중의 폭주를 막고 당대의 권력층을 배려하며 덕의 쇠퇴를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정약용의 사상을 정치원론적 수준에서 정리해 보았다. 이를 토대로 다시 그의 사상을 정치권력론적 관점(누가 권력을 갖는가?)과 국가 체제론적 관점(그 권력으로 무엇을 하는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치권력론적 이해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민주주의, 자유주의로 읽으려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대체로 과장 내지는 비약에 그치고 있다. 오히려 정약용은 위민을 그 존재 의의로 삼는 강력한 왕권을 구상했다. 정약용은 상식철학적으로 권력의 기원을 더듬어 갔다는 점에서 서구의 민권론자들과 비슷했다. 그 결과 서양의 주권과 같은 관념에까지 도달한 점도 같다. 그러나 그가 그 결과 도출한 권력론은 인민주권론을 군거로 군주권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고 매몰되어 있던 군주권을 하나로 취합시켜 황극을 세우는 것이었다. 다만 그의 황극론은 군주 개인의 절대군주화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군주와 정승 등 중앙정부가 일체화되어 정치-교민을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상적으로 성학론, 무위이치론, 세도론 등 군주의 내성을 강조하며 신권을 극대화하려던 주자학적 정치론을 배격했으며, 사(士)를 9직의 하나로 두어 민의 일부에 불과함을 강조했다. 제도적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개량된 고적제를 통해 그 성실한 관리가 가능토록 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병작반수제를 실시해 국가와 서민의 재정에 모두 부담을 지우고 있던 벌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여전제와 정전제를 연계하는 교묘한 전제개혁안을 입안하였다.


이와 같이 정부의 권력이 강화되고 신권이 퇴조함으로써 정약용의 정치권력론은 종래의 군-신-민의 구도를 넘어 국권-민권의 구도로 정리될 수 있었다. 국권의 강화를 위해 인-효제의 덕을 중심으로 사민평등론이 강조되는 한편, 민은 교민-전제 개혁에서의 능동적인 정열의 발휘 주체로 떠올랐다.


그러나 "인에는 서와 사가 따로 없다”, "다 같은 양인으로 군주의 적자”로 규정되었음에도 일반 민중과 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정약용이 그런 벽을 설정한 이유에는 당시의 현실적인 필요성 외에 서민의 의 추구 역량을 불신하고 의와 예에 있어서 사가 도덕의 파수꾼으로 남아야 한다는 보수적 사고도 있었다. 사가 민의 일부가 된 것은 격하의 의미이기도 했지만, 양인 가운데에서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할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정약용의 민권론은 국권론에 비해 빈약한 상태에 그친다. 하지만 이미 일부 민중의 덕이 효제를 넘어 의에까지 닿고, 그 힘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보탬이 될 단이 『경세유표』에 드러나고 있다.


국가 체제론적 이해

정약용 사상에 따르면 바람직한 정치 제제는 군주(국가)와 민이 직결되고,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이 동시에 실현되며, 지극한 공과 덕이 달성되는 체제였다. 그가 구상한 경제, 행정, 군사체계는 모두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도에 따라 편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근대적인 체제의 가능성도 여러 가지로 정립되었다. 상공업의 긍정, 금은화폐 주조, 조세의 금납화, 기술의 수입 및 육성, 불필요한 경비 절감과 행정의 합리화 그리고 평민 가구의 물질적 안정 보장 등은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경제 영역에서 화폐물신성에 착안하지 못했으며, 군사 영역에서도 군의 전문화 필요성을 간과했다. 농민을 비롯한 각 직업 종사자들이 한정된 영역에서 주어진 직무에만 분주하도록 하고, 다시 병농일치제를 수립하는 그의 개혁안에 따르면 중간 세력의 무단적인 착취나 불합리하고 부당한 관의 징세 등으로 인한 농민의 부담은 사라지겠지만, 그 대신 농민이 전통적 농업 외에 상업성이 높은 작물 재배, 가내수공업 경영 등에 여력을 쏟기 어렵게 될 것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의 신분제 관련 구상이었다. 기존과는 다른 접근법이 시도되기는 하지만, 양반도 노비도 그의 정치 체제에서 살아남았다. 중세의 특권 계급과 권리를 박탈당한 계급이 온존한다는 것은 그의 민의 흥기가 결국 정해진 틀 속에서의 흥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또한 그가 끝내 노심자와 노력자의 구분을 상으로 받아들인 사실은 그가 화폐의 자본적 가능성과 전쟁의 전문화 경향에 착안하지 못한 것처럼, 그가 근대(심화된)의 지식인으로서는 미달이었음을 시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덕을 위해서였다. 황극론을 통해 군주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하는 한편 국가 관념을 창립한 것도 양민과 교민을 동시에 실시하여 민의 역동성을 두들겨 깨운 것도, 병농일치제를 부활시켜서 대지에 뿌리박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가정과 향토와 국가를 지키게 한 것도, 사족들의 교육과 소양에 기대하여 그들에게 사회도덕의 파수꾼 역할을 맡긴 것까지, 모두 덕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발로하는 것이었다. 비록 당장의 현실적 제약을 무시할 수 없고, 의와 예에 대해서는 순박하고 무지한 평민들의 역량을 신뢰할 수 없더라도, 끝내는 모두가 선속을 회복해 모두가 더 사람다워지고, 모두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는 믿음이 정약용 사상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 그런 믿음은 양명학이었다면 더 대담하고 거침이 없을 수 있었다. 우직한 농군 수준이 아니라 그 아래의 지적 단계, 즉 어린아이의 마음만으로 양명학자들은 도덕이 성취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절제하고 반성하는 인간의 역량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으며, 그런 의와 예의 덕은 상당 수준의 지적 배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성인이 결국 그런 고민에 따라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감시하고 신칙하는 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우리,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약용의 그런 우려가 상에 통함을 알고 있다.

 

정약용의 구상에 따르면 민은 이미 오래된 관습과 비합리적인 제재에서 벗어나 흥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흥기되고 고양된 인간성은 단지 주어진 틀 속에서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정약용으로서는 유감스러웠을지 모르지만, 인문주의적인 흥기에 따라 오랜 구속에서 벗어난 농민, 상공업, 과학기술 그리고 뭇 평범한 개인들의 욕망은 마침내 고전의 틀을 깨고 의외의 결과를 낳았을지 모른다.


정약용 사상과 근대화 정치

정약용의 사상은 근대적인가? 그의 사상에는 근대적이라는 평가를 선뜻 내리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세 가지 두드러져 있다. 신(上帝), 군주, 천민의 용인 내지 긍정이다.


물론 전혀 동떨어진 문명권에서 형성된 사상이 서구의 그것과 전혀 일치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서구 근대사상과 유사할수록 그만큼 정약용의 사상이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근대적이냐 아니냐가 어떤 사상의 가치를 평가할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약용 사상이 또는 실학이 근대적이냐의 여부, 또한 전통 한국이 또는 전통 동아시아가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해 나갈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지의 여부가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만큼, 그 문제를 여기서 간단히 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으리라.


정약용은 과학과 기술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지만, 결코 자연과학에 자신의 생을 의탁하고 과학이 추구를 통해서만 삶의 보람을 찾는 근대적 과학문명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상식적 실증주의, 실용주의와 함께 상식철학과 상식 윤리학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것은 상 중심의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성격은 심화된 근대의 서구 사상가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우나, 초기 근대와 전환기의 사상가들에게서는 깊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정약용이 새롭게 지향한 민의 흥기 그리고 그에 따라 전개되는 분주하고 열정적인 삶, 그것은 바로 공화정에서만 달성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민중의 적극적인 삶이 아닌가? 일부 제약은 있을지언정 민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 그리고 그 열정의 해방의 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곧 덕의 권화로써 참다운 정치를 행하는 국가에서 성취된다는 생각은 정치를 냉정한 권익의 분배 이상으로 보지 않는 근대 자유주의 또는 국가권력의 음모를 항상 감시하고 그 구속을 거부해야 한다는 근대 신공화주의와는 다른 초기 공화주의의 근본이념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 이념은 바로 서구 근대정치의 여명기의 이념이기도 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자본주의, 심화된 근대화를 노정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서구의 초기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인문주의, 상식철학, 초기 공화주의 등의 사조와는 상당한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만약 그의 개혁안이 현실정치에서 온전히 실현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 결과는 자생적인 심화된 근대화라는 의외의 결과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제4장 결론: 정약용 사상의 의의

정약용은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조선이라는 환경에서 살면서 그 환경에 특유한 선과 악을(개인적 의미와 국가적 의미에서 모두) 두루 맛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배울 수 있었던 모든 것들, 주자학, 양명학, 고증학, 일본 고학, 서학 그리고 선배들의 실학까지 모든 것을 철저히 궁구하고, 자신만의 사상으로 완성하여 『육경사서』와 『일표이서』라는 저작에 체계화했다.


비록 그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근본이념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상은 지극히 평범한 것에 대한 존중에서 지극히 근본적인 것에 대한 존숭까지 두루 포괄한다. 그것은 공허한 이념보다 사실에 입각해서 사물을 판단하려는 상식적 실증주의, 모든 사상과 제도는 그 실용성에 비추어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상식적 실용주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단서에서 출발해 이론을 구축해 나가는 상식철학,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납득될 수 있는 근본 원칙에 충실하게끔 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는 상식윤리학으로 분류된다.


또한 정약용은 자연의 도를 인간의 도와 분리하고, 리를 인간의 도로서의 상에서 축출한다. 그에게 도란 단지 사람이 걷는 길이며, 그것은 곧 교제를 잘 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도 자체에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으며 실제 행동으로 쌓아 나가는 덕이 진정 도덕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이것으로 정약용은 다시 도에서 덕으로 이행했다.


정약용의 정치사상은 그의 경학사상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으며, 당면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고 근본적인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명백한 목적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우선 그는 정치와 자연을 분리하고, 군주를 수신, 성학에 전념할 의무에서 해방시켰다. 또한 정치의 항목을 음양오행에 억지로 결부시키거나, 천변재이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주자학적 정치론을 모두 배격하였다.


경제 체제에 있어서 그는 사족의 특권적 지위를 결하시키고 상공업의 독자성을 강화하는 한편, 금은화폐를 제조·유통시키며 조세를 금납화하는 등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전개될 수 있는 단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중간세력을 억제하고 국가의 역량을 강화하며 민생의 편의를 도모하는 선에서 경제개혁을 입안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격화에 필요한 사상적·제도적 기반 마련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신분제와 국방 체제론에 있어서도, 정약용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그 덕을 보전하는 중심 목표에 충실했다. 그래서 양반과 노비의 존재가 유지되었는데, 다만 정전제 실시 등의 개혁 완료 이후에는 전혀 기능적인 의미로서만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현실적 여건에 따라 여러 조건의 제약을 부가했으되, 병농일치제를 재건함으로써 정치-경제-교육에 이어 군사 부문까지 통합적으로 작동되도록 하며, 민의 덕을 진작하고 보전하려고 했다.


결국 그 시대의 도전에 결연히 응전했던 정약용은 오늘날의 우리의 시각에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오륜과 주례에서 상을 보았고, 그에 따라 일관성 있는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 체계는 그의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근대화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이제 정약용의 시대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난, 그러나 한편으로 비교할 수 없이 상실된 우리의 지적 자산을 모아, 분화된 속에서도 모두가 납득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을 찾으며,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 나갈 현대의 예를 만들어 나갈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노력이 이루어진다면, 그 노력의 과정 자체만으로 삶을 고양시키는 흥기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