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옛집

   
강영환
ǻ
이담북스
   
18000
2010�� 05��



■ 책 소개
color=#ff8040>2010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이 책은 저자와 그의 팀이 지난 1996년부터 약 3년간에 걸쳐 조사한 북한 전통주거의 연구 성과를 대중화하려는 시도에서출발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지역의 전통주거에 대한 연구는 그 명맥이 끊어졌고,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개략으로 작성한 도면이나 해방 이후북한학자들이 민속학적으로 소개한 2, 3권 정도의 책이 인용, 재인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1996년도 시작된 이 연구는실향민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옛집과 건설과정, 주생활 등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북한지역 전통주거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실향민들의 오래된 기억에 의존하였으나, 그들이직접 그려준 도면은 기대 이상으로 상세하고 구체적인 것이었기에 현장에서 실측조사된 것 못지않은 도면자료를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150여 건이넘는 풍부한 도면과 주생활 자료를 얻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1장에서는 북한의 옛집을 재현하기 위해 기억과 재생이라는 연구방법을 선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2장에서는 함경도의 역사와생태환경을 개관하였고 3장에서는 함경도 옛집의 일반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 4장은 3장에 이어 함경도 옛집의 지역적 차이에 대해 기술하였으며5장은 계층적 차이, 6장은 함경도 주택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 있다. 7장과 8장에서는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옛집의 사례들을 실향민들이 기억에의존해 그린 평면도와 이를 보정한 평면도를 함께 실어 이해를 돕고 있다.

■ 저자 강영환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집필위원,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문화관광부 문화재 전문위원, 울산대학교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울산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북한지역 전통주거에관한 연구」 외 논문 30편과 『새로 쓴 주거문화의 역사』 외 저서 10권이 있다.

■ 차례
제1장 기억의 재생이라는 연구방법
 
1. 북한의 옛집, 그30년간의 화두 
2. 기억과 재생이라는 새로운 방법 
3. 재생의 과정 

제2장 함경도의 역사와 생태환경 
1. 함경도의 역사
2. 함경도의 지형과 기후 
3. 함경도의 마을과 생업 

제3장 함경도 옛집의 일반적 성격 
1. 옛집을 분류하는 방법의 문제 
2. 집중형주거, 그 생택학적 적응 
3. 허술한 담장과 대문, 개방적인 마당 
4. 방이 겹으로 배열된 양통집 
5. 함경도 양통집의공간 구성 

제4장 함경도 옛집의 지역적차이 
1. 개마고원 산악지대: 함경도 집의 원초형 
2. 함남의 동해안 지대: 외양간이 돌출된 양통집 
3.강원도 접경지대: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 

제5장 함경도 옛집의 계층적 차이 
1. 대문과 담장의 계층적 차이 
2. 건물과 공간의계층적 차이 
3. 건축 재료와 부재의 계층적 차이 

제6장 함경도 주택의 시대적 변화 
1. 농촌주택의 변화 
2. 도시화에 따른 변화
3. 공업화와 식민화에 따른 변화 

제7장 함경북도 옛집의 사례들 

제8장함경남도 옛집의 사례들 

부록 -북한지역 전통주거에 관한 연구 (1) 
북한출신주민들의 지식체계분석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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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옛집


제1장 기억의 재생이라는 연구방법

기억의 재생이라는 새로운 방법

어느 날 나는 북한 출신 한 분으로부터 노트에 그려진 도면을 받게 되었다. 그 도면은 그분이 살았던 북한의 옛집을 배치평면도로 그린 그림이었다. 그 도면을 받는 순간 번개와 같은 충격이 내게 다가왔다. 30년간의 화두가 한꺼번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물건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현장답사를 통한 주택의 실측조사와 도면작성만을 고집해 왔던 방법론의 껍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주택이라는 물적 대상으로부터 주택에 대한 사람의 기억으로 연구대상을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남한에는 수십만의 월남자들이 생존해 있고, 그들이 해방 이전에 살았던 주택에 대해 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재현해 냄으로써 북한지역의 주택과 주거생활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부산, 경남지역에서 선정된 조사대상자 436명에게 설문지를 발송하던 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과연 몇 건이나 회신되어 돌아올지, 설문지 항목마다 성실하게 답변해 줄지, 무엇보다도 그들이 50년이 지난 주택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지, 그 기억을 정확히 표현해 줄지, 오로지 신만이 아시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삼 일 후 드디어 누런 회신봉투가 편지함에 쌓이기 시작했다.


봉투를 열어 본 순간 그 놀라움과 희열은 연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으리라. 모든 설문항목이 빼곡히 기재되어 있었다. 도면 또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세심하고 상세하며, 정확하게 작도되어 있었다. 어떤 분은 제도판에서 작도한 듯 전문가의 세련된 솜씨로 그려 주기도 하였다. 부뚜막에 솥단지 위치로부터, 마당의 복숭아나무, 심지어 수챗구멍 위치까지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50년의 세월 동안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별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집 주변이나 마을의 환경을 설명해 주었고, 주택의 계층적 차이나 시대적 변화를 설명한 분도 있었다. 그분들은 그런 도면과 설문지를 보내면서도 자신의 기억이 불명료함에 미안해했고, 도면표현이 서투름을 사과해 왔다. 대부분의 설문지는 눈물에 젖은 듯 부풀어 있었다. 그들은 분명 두고 온 옛집을 찾아가고 있었으리라. 그곳에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살아 있고,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있고, 정겨운 가족사가 서려 있었다. 기둥 하나마다 방구석마다 서려 있는 기억들이 어두운 세월의 두께를 뚫고 솟아나오고 있었다. 주택의 형태나 따지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냉정하게 보였다.


날마다 계속되는 회신지를 뜯어보며 우리는 환호와 감탄을 자아내며 부둥켜안고 즐거워했다. 멀리 함경북도 개마고원으로부터 황해도의 옹진반도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주소의 자료들이 쌓여 갔다. 저 개마고원 위의 집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환상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답보상태에 있던 북한지역 전통주거에 대한 연구를 회생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이 자료를 통하여 과거의 연구결과들을 검증해 보고, 새로운 가설들을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기억의 재생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제2장 함경도의 역사와 생태환경

함경도의 역사

함경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멀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지역이 사회집단으로서 영역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삼한시대의 옥저(沃沮)라는 이름이다. 옥저는 예맥(濊貊)계의 우리 선조들이 세운 나라이니 우리 민족의 거주사는 이때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조 500년간 조선팔도의 하나로 단일한 행정구역이었던 함경도는 구한말 고종 대(1896년)에 이르러 함경남도와 북도로 나뉘었다. 이러한 행정개편은 함경도의 내부를 구획한 것이기에 생활문화권의 역사성이나 지역적 동질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북분단 이후 북한정권은 정치상의 목적으로 인위적인 행정개편을 시도했다. 고향의 옛 주소를 들고 생소한 행정구역과 지명을 찾아야 하는 월남자들의 비극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함경도의 지형과 기후

함경도 지방은 대부분의 면적을 해발 1,500미터가 넘는 고원과 고산이 차지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세 지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함경산맥 이북의 개마고원지대와 함경산맥 이남의 좁고 긴 해안지대 그리고 함경남도 남단의 함주, 함흥평야가 그것이다.


함경도는 한반도의 북단으로서 남부지역에 비해 겨울이 길고 추운 지역이다. 전반적으로는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함경도는 특히 냉대 기후구에 속한다. 다만 지형적 요인에 따라 함경도 안에서도 지역적 차이가 나타난다. 함경도를 기후적 특성에 따라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개마고원지대와 함경북도에서 남도에 이르는 동해안지대 그리고 함경남도의 남단지대로 나뉜다.


 

제3장 함경도 옛집의 일반적 성격

집중형 주거, 그 생태학적 적응

함경도 옛집은 본래 모든 주거공간을 한 건물, 즉 살림채에 수용하는 집중형 공간구성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독 북쪽지방에서 집중형 주거가 만들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함경도의 생태환경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의 어느 지역보다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겨울기후도 상당히 추운 지역이다. 이러한 생태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길고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주거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함경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그들은 사냥이나 화전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사냥이나 화전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한 인구가 조밀한 집촌형 취락을 이루기 어렵다. 강원도의 산간마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산골마다 겨우 서너 채의 가옥이 드문드문 만들어진다. 이 경우 산짐승이나 도적의 피해를 마을공동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방어의 효율성, 이것이 함경도인들에게는 필수적인 생태학적 요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난방과 방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거공간을 하나의 건물 안에 모으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만일 주거공간을 여러 채의 건물로 나누어 분산시킨다면 추운 기후 속에서 건물 사이를 드나들기 어렵고, 여러 채의 건물을 감시, 감독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한 건물 안에 주거공간들이 모여 있다면, 모든 주생활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난방을 한 군데에서 할 수 있어 연료가 절약되며, 외벽면적도 줄어 난방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편이 된다. 또한 살림채의 문만 잠그면 인명이나 가축, 식량 따위를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지켜 내기가 훨씬 수월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함경도 사람들은 이러한 생태학적 조건에 적응하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주거형식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가축과 사람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주거형식, 난방과 방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주거공간을 살림채 안에 집중 배치하는 주거형식, 이것이 함경도 옛집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허술한 담장과 대문, 개방적인 마당

모든 주거공간이 살림채 안에 들어 있다면 마당의 영역성도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주생활이 살림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거외곽을 두르는 담장도 아예 없거나 대단히 허술한 경우가 많다. 회신된 도면을 도면 담장이 그려진 경우도 그 재료는 대부분 싸리나무, 수수깡, 판자 등이 주로 사용되는데, 이는 평안도나 황해도 또는 남부지방에서 토담이나 흙돌담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모습과 비교된다.


함경도의 집과 같이 집중형 공간구성을 가지고 있는 강원도나 경북산악지방의 주택들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이 지역의 대목들과 면담해 보면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흙이나 돌을 사용한 담장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담장이 허술하니 대문 또한 튼실할 리 없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주민들은 부엌문을 대문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엌문이 대문이라면 마당은 주택의 외부가 된다. 남부지방의 경우 담장과 대문을 경계로 안마당과 바깥마당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함경도의 사례에서는 마당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살림채를 경계로 앞마당과 뒷마당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주거의 경계가 살림채로 한정되어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울도 담도 없이 툭 터져 있는 집, 이것이 함경도 집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방이 겹으로 배열된 양통집

함경도 집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양통집이라는 점이다. 양통집이라는 용어는 공간의 배열에 따라 외통집과 구분 짓는 말이다. 즉 공간이 외줄로 배열되면 외통집이고, 공간이 겹으로 배열되면 양통집이라고 부른다.


양통집을 생태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역시 난방이나 방어의 효율성에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살림채 안에 모든 주거공간을 수용하는 집중형 주거에 있어서, 공간을 한 줄로 늘어놓으면 긴 살림채가 만들어진다. 방이 길어지면 온돌고래가 길어지고 한 아궁이에서 먼 거리까지 난방하기가 어렵다. 공간을 겹으로 배열하면 이 같은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연료가 절약되고 부엌도 하나로 족하게 된다.



제4장 함경도 옛집의 지역적 차이

개마고원 산악지대: 함경도 집의 원초형

오늘날까지도 함경도 주택의 정주간(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이 없이 부뚜막에 방바닥을 잇달아 꾸민 부엌)은 다기능을 수용하는 통합적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취사와 식사, 접객, 취침 등 거의 모든 주생활 행위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바당이라는 실내마당까지 갖추고 있고, 외양간이나 방앗간까지 개방되어 있다. 회신자들의 표현처럼 정주와 바당, 외양간과 방앗간이 하나의 공간에 들어 있다. 또한 정주간은 온 식구가 모여 잘 만큼 큼직한 공간이다. 남녀의 구분이나 어른, 아이의 구분 등 유교적인 가족관계를 엄격히 지킬 필요가 없고, 경제력이 미약한 서민계층에서는 정주간 이외의 침실구분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주간은 우리 민족이 온돌을 개발한 이후에 만들었던 우리나라 옛집의 원초적 모습을 보여준다.


함남의 동해안 지대: 외양간이 돌출된 양통집

외양간이 돌출한 주택형식은 주로 함경남도 지역에 분포하기 때문에 이를 지역적인 성격으로 이해해 왔다. 이번 연구를 통해서 사례들을 분석해 보면 외양간 돌출형이 함경남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함경남도의 전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돌출형 양통집이 주로 분포하는 지역은 함남의 동해안 평야지대이며, 함남의 내륙 산악지대에서는 ㅡ자형 양통집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는 산악지대와 평야지대의 환경적 차이에서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강원도 접경지대: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

함경남도 원산 밑의 안변군에 이르면 함경도형 양통집과는 성격이 다른 형식의 주택이 나타난다. 안변군은 함경남도의 최남단으로서 강원도와 접경한 지역이다. 이 지역 출신이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4건의 사례 모두가 정주간이 없는 집이다.


정주간이 칸막이로 구획된 사례는 함경도에서 흔히 보이지만 그 칸막이는 미서기문으로서 개폐와 분리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안변군의 사례들은 부엌과 인접한 방이 모두 고정된 벽체로 구획되어 있고 방의 명칭도 정주나 정주간이 아니다. 또한 방의 규모도 정주간처럼 2칸이 아니라 단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택은 정주간이 없는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제5장 함경도 옛집의 계층적 차이

대문과 담장의 계층적 차이

함경도의 옛집은 담장과 대문이 없거나 허약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경제력이 높을수록 견고한 건축 재료와 방식이 사용된다.


소농계층의 주택에서는 담장과 대문이 없는 경우도 보인다. 그러나 어느 시기 이후에는 방풍용이라도 담장과 대문을 만드는 것이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이 담장과 대문의 재료는 경제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함북 길주군 출신인 이덕수 씨는 담장의 차이와 시공방식을 상세히 서술해 주었다.


"담의 재료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5~6분 정도의 송판을 사용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2~3미터 간격으로 통나무로 지주를 세운 다음 그 사이를 대부분 수숫대로 직경 15센티 정도 둥글게 묶어서 높이는 약 2미터 정도로 세운다. 횡으로는 아래, 위 부분에 직경 3~4센티미터 정도의 나무를 앞뒤로 대고 철사로 조여 맨다. 지면에 약 20센티미터 정도의 땅을 파고 그 속에 수숫대를 세우는데, 이렇게 하면 충격이나 바람에도 3~4년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 가을에 추수하면 새 수숫대로 노후한 부분을 교체한다."


부농계층의 사례를 살펴보면 흙돌담을 갖춘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흙돌담은 울타리보다 견고한 구조체로서 상류주택의 폐쇄성을 의미한다.


넓은 마당 또한 농가의 경제력을 반영한다. 농가에서 마당은 농사를 준비하고, 농산물을 갈무리하는 곳이며, 가족들의 보건활동장이며, 가축들의 사육장소이기도 했다. 주수요 씨는 마당의 규모와 경제력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잘사는 집은 부속채가 크고, 안마당이 넓다. 안마당은 생산물의 건조, 갈무리, 수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물의 양과 비례한다. 본인의 집 마당도 가을이면 낟가리로 가득했다."


건물과 공간의 계층적 차이

농업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농가에서 경제력은 경영규모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경영형 부농이든, 지주형 부농이든 경영규모가 증대하면 주택에서 생산공간이나 수장공간의 면적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가축의 수가 많아지면 사육공간의 규모도 커지고, 많은 농기구를 수장하기 위한 공간이나 많은 농작물을 수장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들을 모두 살림채에 수용하면 살림채가 너무 커지고, 마당과의 작업동선도 불리하고, 살림채 안의 취침공간도 청결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에 부농주택에서는 생산, 수장공간을 갖춘 다양한 부속채가 만들어진다.



제6장 함경도 주택의 시대적 변화

농촌주택의 변화

함경도 지방의 전통식 주택은 일제시기에 들어 획기적인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는 생활의 편의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자발적 변화도 있지만, 일제시기에 밀어닥친 도시화(상업화), 근대화(공업화), 식민화 등 외부적 요인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농촌지역보다는 도시지역으로부터 주택의 양식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여파가 농촌지역으로 파급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우선 농촌지역부터 살펴보면 정주간이 부엌과 구획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주택양식의 출현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주택에 칸막이를 설치하는 정도의 변화이다. 실상 개방된 정주간은 함경도 전통주택의 핵심적인 성격이었다. 가축(특히 소)의 보온이나 방도를 위해 부엌 옆에 이러한 시설을 두었고, 거실인 정주간으로부터 쉽게 감시하거나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된 것이었다. 물론 부엌에서 나는 매연이나 외양간의 악취, 방앗간의 소음 등 거주공간의 청결성을 저해하는 요소를 참아야만 했다. 정주의 칸막이는 이러한 불편한 점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정주간의 칸막이와 더불어 외양간의 돌출도 일견 시대적 변화로 보인다. 외양간을 돌출시키는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외양간이 돌출되면 부엌공간이 더 넓어지고 깨끗해진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추정해 볼 뿐이다. 정주간을 칸막이로 구획하여 침실의 거주성을 높이는 경향으로 볼 때 외양간의 돌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도시화에 따른 변화

개항기(開港期)의 거센 바람은 함경도지역에서도 예외 없이 도시화의 과정을 겪게 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제국은 조선반도의 중요한 항구지역에 대해 강압적인 개항을 요구하였고, 동해안에 접하고 있는 함경도 지역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880년 원산개항을 시작으로, 1899년 성진항 개항, 1908년 청진항 개항에 이르기까지 함경도 동해안의 어촌들이 근대항구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개항은 비단 항구도시의 개발이나 외국인 거류지의 설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경영을 위한 상업자본의 유입, 자원개발을 위한 공업화 등 전통적인 농, 어촌 사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도시인구가 급증하고, 도시지역에서는 2차,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도시화는 결과적으로 도시의 주택난이나 도시형 주택의 발생 등 전통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응답자들의 자료에서도 도시 인근에 소재한 주택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읽히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변화는 생업형태의 변화에 기인된 것이다. 전래의 주택이 농업이라는 생산양식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도회지의 생활은 더 이상 농업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농업생산과 관련한 공간이나 시설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중에는 주택 일부에 점포를 두어 상업용으로 개조한 사례도 보인다. 함남 흥남시에 소재했던 박충길 씨 댁이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그의 가족은 공무원으로 일하며, 집에서는 상점을 경영하는 가정이다. 따라서 이 집은 도시 안에 소재한 주상복합의 주택이라고 볼 수 있다.


공업화와 식민화에 따른 변화

개항 이후 이 땅에 외국주택이 건설되면서 새로운 건축부재와 재료가 유입된다. 1900년 부산에 1,000호의 왜식주택이 건설되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일식주택들이 전국에 걸쳐 건설되었다. 이 중에는 일본의 전통식 주택도 있지만 일본이 공업화 과정에서 서구로부터 도입한 건축 재료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재료는 산업설비를 통하여 생산된 공업재료, 즉 시멘트, 유리, 벽돌, 양철, 슬레이트 등 새로운 공업 재료였다. 이러한 재료들이 아직 전반적인 구조나 형태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채용됨으로써 주택의 모습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회신자들의 사례에서도 부분적으로 공업재료의 사용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유리창호의 사용이다. 유리창호는 시각적으로 투명하면서 방음이나 보온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창호지를 대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재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시멘트도 극히 제한된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양철이나 슬레이트는 초가지붕을 대체하는 지붕재료로서 서민계층에서 일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실향민들의 자료 중에는 일제시기 영단주택의 모습을 갖는 것도 볼 수 있다. 영단주택이란 조선주택영단에서 건설한 주택을 의미한다. 영단주택은 시멘트 기와나 콘크리트 기초, 철망식 벽체, 유리창문 등의 근대적 건축요소를 일반에까지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주택문제를 공공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했다는 점, 대규모의 주택단지와 집합주택을 대량으로 건설하여 공급했다는 점 등 도시주택의 근대화에 시발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거문화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해체시키는 데 큰 영향을 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영단주택은 기본적으로 일본식 주택을 모델로 설계된 것이다. 살림채 내부에 모든 주거공간을 갖춘 집중형 주거로서 현관과 중복도, 욕실, 화장실 등이 있고, 다다미로 바닥을 깐 침실이 미닫이문으로 구획되고 있어, 일본식 주거와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표준설계를 일본식 주거로 설정한 것은 식민통치자들의 정략적 의도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영단주책이나 일본식 주택의 건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시대의 주거문화는 한국인들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지거나 도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도시지역의 일부에서 나타나는 부분적인 현상이다. 응답자들이 보내온 대부분의 사례들은 도시지역에서도 전통식의 주거형태와 주거문화가 잔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36년간의 일제식민통치마저도 우리 주거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그것은 이 땅과 사람들이 지속시켜 온 문화의 생명력이다. 해방 이후 너무도 쉽게 서구화되어 버린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함경도의 옛집은 아련한 고향의 모습으로 실향민들의 기억 속에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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