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인간을 어루만지다

   
셔윈 B. 눌랜드(역자: 조현욱)
ǻ
세종서적
   
14000
2010�� 12��



■ 책 소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맞이하는가』와 『사람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를 통해 가슴 저리는 의학 에세이를 선보인 바 있는 셔윈 B. 눌랜드는 『의사, 인간을어루만지다』에서 “진정한 의사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 되어야 한다”며, 진정한 치유자가 되기 위해 의사는 어떠한 모습을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찰한다. 

전작에서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가 죽음과 노후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 책에서는 한 사람의 의사로서 사람들을보다 행복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이 할 일에 관해 고뇌와 성찰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 저자 셔윈 B.눌랜드(Sherwin B. Nuland)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셔윈 B. 눌랜드는『사람은 어떻게 죽음을맞이하는가』로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주는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수상했으며, 같은 작품으로퓰리처상과 미국비평가협회상의 최종 후보에 오른 바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사람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닥터스 : 의학의 일대기』, Lostin America, The Doctors’ Plague, Leonardo da Vinci가 있다. 25개국 언어로 번역되며 세계적인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들은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모든 의학 저술의 표준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역자조현욱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5년부터 2009년까지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국제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를 지냈다. 옮긴 책으로는『메모리 바이블』『동시성의과학, 싱크』『이성적 낙관주의자』 등이 있다. 

■ 차례
이 책의 출간에 부쳐 
머리말 

연구실을 보는 자아도취적 시선
의과대학과 종합대학
진정한 치유자 
근육 운동 
수술실의 침술 
한의학, 서구 과학, 그리고 침술 
모호한 수정구 
누구 의사없나요? 
글쓰기 
시신 도둑질 
마음, 몸, 그리고 의사
위대한 책들 
슬픔과 성찰 : 9 11 이후 
마음에치는 번개 
배변 의학 
다시 찾은 히포크라테스 
예술가와 의사 
사람인가, 타이밍인가? 
심장이식 대기자로부터 온편지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의사, 인간을 어루만지다


의술의 가장 큰 법

히포크라테스가 쓴 것으로 되어 있던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이 그의 사후 2세기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오래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하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자신들이 믿을 만한 기준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떤 핵심적인 부분은 그가 직접 쓴 것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이런 텍스트들을 학자들은 의심스러운 텍스트에서 따로 떼어내 "히포크라테스의 진정한 작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이런 핵심적 가르침의 영역본은 부정확하고 불완전했다. 런던 시드넘 협회가 스코틀랜드 외과의사 프랜시스 애덤스에게 영역본 결정판을 만들라는 임무를 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1849년 애덤스의 노력은 두 권짜리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제목은 『히포크라테스의 진정한 작품들』이었고, 진정한 역사적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사태가 달라졌다. 이들 진정한 작품의 일부를 정전에 포함시키는 근거가 된 증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결한 임상적 경구로 된 책 『아포리즘』은 대부분의 다른 진정한 작품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오늘날 『아포리즘』이 실제로 의학의 아버지에 의해 쓰였다고 믿는 역사학자는 찾을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422개의 경구들이 의학적 진실이라고 믿는 임상의를 찾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위대한 인물의 삶을 알려줄 믿을 만한 정보는 극히 적다. 그는 기원전 460년 경 그리스의 코스 섬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떠돌아다니는 의사였을 것이다. 그는 젊은 의사들을 훈련시키는 학파를 형성하는 데 지도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그 이상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 중에 히포크라테스가 글로 쓴 말뭉치를 하나라도 남겼다는 확고한 증거는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첫 번째 아포리즘은 완벽한 아포리즘의 모델로 꼽힌다. 1934년 판 「의학사 연구소 회보」에 실린 내용을 믿는다면, 모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그보다 앞서거나 뒤에 나타난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홀로 우뚝 서야 한다. 지혜를 담은 간결한 문체로 불변의 진리를 표현해야 한다. 편집이나 해석, 추가 설명은 필요 없다.


첫 번째 아포리즘이 현명하고 경험이 풍부한 의사 한 명이나 여러 명에 의해 쓰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목적은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병자를 돌보려 노력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를 진술하는 것, 단지 그런 의미뿐이었다. 첫 번째 아포리즘은 설교하려 드는 것을 피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는 의사가 자신의 천직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는 증언이며 의술의 상세한 역량에 대한 선언이다. 그 숨은 뜻은 이 책의 제목을 의술에 내제하는 불확실성이라고 정한 기초이자 출처이다.


첫 번째 아포리즘은 의과대학의 모든 신입생에게 첫날 첫 시간에 읽어줘야 할 텍스트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입생은 아직 민간인이다. 과학과 예술의 요동치는 혼합체-의학은 언제나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에 아직은 하나의 입자로서 깊이 빨려 들어가지 않은 인물이란 뜻이다. 첫 수업 이후 의사 공동체의 가치관은 신입생들의 마음과 자아상을 점점 더 깊숙한 곳까지 적시게 된다. 그래서 젊은 신입생은 첫해가 지나면 이전과는 크게 다른 사람이 된다. 이 같은 변화 과정의 첫머리는 첫 번째 아포리즘으로 시작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앞에는 의사가 된다는 과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적 기술과 인간애를 함께 갖추고, 스스로의 한계뿐 아니라 의술의 한계도 역시 용인하면서 달성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서서히 발전되어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할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첫 번째 아포리즘은 이를 가능케 해준다.



근육 운동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는 부드러운 쿠션과 대형 연회보다 헤라클레스의 노동을 선호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권했다. 인간은 나태한 삶보다는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마음(mens sana in corpore sano)"을 가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로부터 1,500년 후 존 로크는 유명한 『교육론』에서 이 라틴어 경구를 영어로 표현해 자기 것인 양 만들었다. 그 이후 모든 세대의 교사들은 이 명제를 찬양해왔다.


시인과 철학자의 이 같은 권고는 연령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 실천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이를 실행하는 것이 좋다. 정신과 육체를 운동시키는 것은 로크가 말한 "현세에서의 행복한 상태"뿐 아니라 수명 연장과 노년의 독립성 유지에도 필수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근래 들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중·노년층이 운동을 활발히 하면 많은 장애와 질병을 부르는 골밀도 및 근력의 저하를 막거나 적어도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다는, 일류 연구진들의 연구 결과가 신문에 자주 실린다.


복잡한 얘기지만 골자는 수많은 매체에 칼럼을 기고했던 현자 앤 랜더스의 조언으로 귀결된다. "사용하라, 그렇지 않으면 잃게 되리라." 이는 일상에서 누구나 관찰하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간단히 말해서, 활동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활동적이다. 랜더스뿐 아니라 여러 연구소, 학식 있는 사람들이 이를 확인해준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생산성의 핵심이 생산성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가 모르던 것은 세부적인 것들이다.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피트니스 전문가들 역시 심신을 괜찮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세부 사항이 무엇인지를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배우고 있다. 아주 늙을 때까지는 그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삶의 최종 시기에 흔히 겪는 중증 장애에 시달리기 전까지는 건강한 심신을 가질 수 있다. 설사 "사용하는 것"이 수명을 연장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정신과 근육을 활발하게 사용하는 것은 건강하게 늙는 비결이자 노인학자들이 "질병의 압축"이라 부르는 것을 이루는 핵심이다. 이들이 말하는 질병의 압축이란, 노년기의 질병 및 장애 발생률을 아주 낮춰서 죽기 전에 상태가 나빠지는 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을 뜻한다. 장기적인 목표는 노인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점차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을 계속 유지하다가 막판에 갑자기 나빠져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다. 설사 사망 시기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사망 시기도 불변이 아니다. 운동을 하면 기대 수명이 늘어난다는 증거는 오랜 시간에 걸쳐 풍부히 쌓여왔다. 운동이 장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새 소식이 아닐지 모르지만, 근력이 떨어지는 것이 노령 장애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은 근래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쇠약해지며, 이 과정은 마침내 이것이-어떤 이름이 붙은 질병은 아니지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유일한 핵심 요소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사이언스」지 1997년 10월호에 실린 논문에서 네덜란드 연구진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최고령층(85세 이상의 노인들)에서 노쇠로 이어지는 근력 상실은 죽을 때까지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제한 요소라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이를 포함한 수많은 연구에서 속속 드러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노인의 무기력은 예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절한 운동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실제로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터프츠 대학교 연구진은 오늘날 흔히 인용되는 보고서에서 86~90세의 남녀 노인 10명의 다리 근력을 평균 174퍼센트 늘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전문가의 감독 하에 고강도 근육 훈련을 하고 식사 및 운동 요법을 8주간 시행한 결과였다. 이들 노인은 전원이 만성 질병이나 장애가 있었지만, 운동 탓에 부상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균형 감각이 좋아졌으며, 보행 속도도 빨라졌다. 터프츠 연구진의 연구 결과가 알려진 이후 9년간 같은 내용을 확인하는 보고서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 측정치나 실제 활동 능력이 얼마나 빨리 좋아지는지 연구한 논문들을 보면, 그 성과에 놀랄 정도이다.



시신 도둑질

인체 해부는 16세기 이전에는 드물었다. 당시까지 의학 이론은 4가지 체액(혈액, 점액, 흑담즙, 황담즙)의 불균형이 병을 일으킨다는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부학적 세부 지식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체 기관이 그려져 있는 교재가 몇 개 있기는 했지만 상세하지 못하고 상징적이었다. 의대에서는 1년에 한두 차례 공개 해부 실습이 허둥지둥 진행되기는 했지만-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이 없는 선생들이 하는 게 보통이었다-그 목적은 환자의 신체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를 개괄적으로 알려주는 데 있을 뿐이었다.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543년이었다. 벨기에의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대표작인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그해 출간되었다. 인체 해부에 기반한 최초의 완벽한 교재였다. 그가 시체를 입수하기 수월했던 것은 1482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발표한 칙령 덕분이었다. 수백 년 묵은 사체 해부 금지령을 철회해 주교들이 해부를 승인할-사체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수 있게 된 것이다. 의사와 예술가들이 범죄자, 신원 미상자, 무연고자, 유언을 남기지 않은 자의 시체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칙령 덕분이었다. 칙령이 철회되지 않았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주요 근육의 형태와 기능을 그렇게 많이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국가에서는 그 같은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18세기 말이 되자, 의학 이론이 충분히 발전해 해부용 시체가 원활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향상심에 불타는 의사들을 적절히 가르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병원에서 일하는 임상의라는 새로운 분파와 병리학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드문드문 생기는 사형수의 시체보다 더 많은 재료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에든버러와 런던에 해부학 교습을 위한 사설 교육기관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들 기관은 서로 경쟁했고 학생들은 해부대 위에 죽은 시민들을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는 기관에 몰렸다.


모종의 신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이를 채워주려는 창의적 기업가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갓 사망한 사람의 멀쩡한 시신을 찾는 수요의 급증도 예외가 아니었다. 18세기 말이 되자 완전히 새로운 전문직이 유럽에서 출현했다. 미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문가의 명칭은 무덤 도둑, 부활시키는 자(시체를 일으켜 세우는 기술 때문에), 가방 운반꾼(사체를 고객에게 배달하기 위해 천으로 된 대형 가방에 넣는 습관 때문에)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이들의 수법은 표준화가 이뤄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직종에서나 그렇듯, 자기 회사를 차리려고 기존 직장을 떠나는 야심찬 젊은이들은 스승에게 배운 기술을 계속 사용한다.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파헤친 흔적을 되도록 적게 남겨야 했기 때문에 특히 신속한 절차가 개발되었다.


이들의 행태가 점차 널리 알려지고 공급이 안정되어짐에 따라 외과의사들은 더러운 일에 직접 연루되는 것을 점차 피하게 되었다. 불법적 상인들과의 거래에 학생이나 조수를 중개인으로 내세웠다. 이런 식으로 연루가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외과의사들은 양심의 가책을 덜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응징을 받을 위험도 줄게 되었다. 몇 명 되지 않는 당시의 저명한 외과의사들은 수입이 엄청났고, 사체 가격도 비싸게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살해당하거나 부상을 입지 않고 가방 하나당 30파운드를 벌 수 있다는 것은 사체 부활자 중 일부 잔인한 자에게 너무나 큰 유혹이었다. 해부 표본에 목을 맨(그리고 크게 양심적이지 않은) 외과의사나 해부학 선생들은 사망할 만한 병리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시체가 이따금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좀 더 원칙주의자인 사람들은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겁에 질렸다. 주간 의학 저널 「랜싯」이 이를 폭로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해부와 사체를 규제할 적절한 법령이 필요하다는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었다.


이 같은 폭로에도 불구하고 해부를 위한 살인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늘어났다. 가장 악명 높았던 인물은 아일랜드인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이다. 그들은 1828년 만성절 밤까지 12개월 동안 최소한 16명의 에든버러 시민을 살해했다. 모두가 의학과 자유 기업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일이었다.


버크와 헤어가 찾은 열성 고객은 로버트 녹스 박사, 에든버러 대학 의대생들이 단골로 다니는 사립 해부학 교실의 소유자였다. 꾸준한 후원자를 보유한 두 모험가들은 벤처 산업의 성공에 희희낙락했다. 그러다 마거릿 도처티라는 늙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는 바람에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졌다. 발견 장소는 이들이 난잡한 정부 두 명과 함께 살던 하숙집의 짚더미 속이었다. 헤어는 공범 버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버크는 2만여 명의 군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떠들썩하게 교수형을 당했다.


버크와 헤어의 악행이 노출되자 해부용 사체를 구하기 위한 살인에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예전 「랜싯」 지에 실린 절제된 사설보다 훨씬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강력 사건이 시민들을 흥분시킬 때까지는 아무런 법령도 제정되지 않았다. 1831년 11월 5일 세 명의 살인범이 이탈리아 이민자인 14세 소년의 사체를 런던 킹스 칼리지 병원의 해부실 잡역부에게 팔았다. 대부분의 다른 잡역부들보다 더 원칙주의자였던 그는 사체에 폭행 흔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부 강사 중 한 명에게 이를 알렸다. 부검 결과 사체의 목이 부러졌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중앙형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살인범 세 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에 따라 두 명은 교수형을 당한 뒤 해부되었고 한 명은 호주 유배형을 받았다.


이제 지옥문이 모두 열렸다.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저명한 외과의사, 다름 아닌 아스틀리 쿠퍼 경이 의회청문회에 출석해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만일 해부하기로 마음먹으면 내가 그 사체를 구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이승에서 그가 어떤 지위에 있었건 전혀 상관없다." 그는 대담하게 그간의 행태를 시인했고 청문회에 출석한 다른 외과의들도 유사한 발언을 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의원들은 1832년 8월 해부법이라 알려진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따라 의료 감독관이 임명되었다. 임무는 해부 교습의 모든 단계와 해부용 사체 조달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해부법은 사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주지는 못했지만 사체 조달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합법적인 해부 표본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 후 수십 년이 걸렸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믿기 힘든 얘기이다. 의사와 의대생들이 배움을 목적으로 범죄자들과 그렇게 쉽게 어울렸던 시절이 불과 150년 전이었다니. 요즘 해부학 강의는 컴퓨터 시연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흔하고, 외과의사들이 가상현실을 통해 기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그렇다.



예술가와 의사

예술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지만 의술은 언제나 그것이 속한 시대의 산물이다. 라틴어 ars는 지식이나 이론에 관련된 정신적 학예를 의미하지만, 이의 복수형인 artes는 예술을 의미한다. 그리스 고전이 영어로 번역되던 초기부터 지켜져 온 관행을 하나 살펴보자. 고대의 저자들은 우리가 의술이라 부르는 지적 학문 분야를 지칭할 때는 이를 대문자로 써 Art로 표기했다. 예술과 달리 의술은 금방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후대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표명하는 역사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서구 의사들이 라틴어로 대화하기 전에 의학 지식은 아랍어와 헤브라이어, 그 이전에는 그리스어로 전달되었다. 예술과 의술에 모두 해당하는 단어를 찾으려면 그리스어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어의 techne는 목수일이나 구두 제조일 같이 유용한 기예를 뜻한다. 화가나 조각가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려면 techne가 필요하다. 의사가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려면 techne-여기서는 기술-가 점점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술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면서 의사는 스스로를 의술을 베푸는 자보다는 과학의 화신으로 보게 되었다. 오늘날 의사는 스스로를 주관과 감정의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둔 응용과학자로 여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는 환상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그의 의술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곤경의 진상을 자각하지 않고서는 애당초 자신을 의학에 이끌리게 한 목표를 달성할 길이 없다. 그 목적이란 무엇보다 먼저 치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학의 즐거움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병상 위를 떠돌아다니는 불확실성에 대처해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하는 데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의술은 불확실한 예술일뿐 아니라 즐거운 곤경이기도 하다. 의술의 가장 위대한 과제는 여기에 있다.


라틴어를 쓰는 의사들이 유럽 전역에 히포크라테스의 학설을 처음 퍼뜨리기 시작한 이래 예술가들은 의술을 행하는 사람들을 주의깊게 지켜보아 왔다. 의사들의 성취에 경탄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허세를 드러내기도 하면서 예술가들은 의술의 승리와 오류, 이 둘 모두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르네상스 이래 수많은 거장 예술가들이 해온 일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다비드 테니르스, 렘브란트 판 레인, 조슈아 레이놀즈, 프란시스코 고야, 루크 필즈, 존 싱어 사전트, 디에고 리베라, 앤드루 와이어스가 그랬고, 토머스 롤런드슨, 오노레 도미에를 비롯한 수많은 풍자화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의 심리를 잘 이해하기로는 19세기 미국화가 토머스 에이킨스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의 작품에는 흔히 외과의사적인 성격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반영되어 있다. 일관성 없고 허영이 복잡하게 얽힌 성격을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는 천재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작품들은 의술의 모든 장점을 찬양함과 동시에 모든 뻔뻔스러움을 폭로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의사들의 성격 속에 들어 있는 모순성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한 것이 에이킨스였다. 그 근거로는 두 편의 작품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걸작 그로스 교수의 초상 즉, 나중에 그로스 클리닉으로 불리게 된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에그뉴 클리닉이다. 둘 다 미국의 일류 외과의사를 담은 초상화이다. 후자는 전자가 완성된 후 15년 후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연원은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건국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 미국 최초의 세계 박람회에 있다. 박람회에 맞춰 미국 의사협회는 국제의사총회를 주최했다. 총회 의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된 것은 71세의 새뮤얼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였다. 그는 반론의 여지없이 당시 미국의 현직 외과의사 중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다. 만일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855쪽에 달하는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가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또한 자신이 소독이라는 신개념을 반대하는 지도급 미국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소독법은 에든버러 대학의 조지프 리스터가 1867년 주창했다. 와인과 맥주를 부패시키는 것이 박테리아라는 루이 파스퇴르의 발견을 통찰력 있게 해석한 그는 이와 유사한 미생물이 수술시 상처에 들어가 수술 후 감염증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업적에 영감을 받은 연구자들은 이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당시까지의 의료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개념이 될 질병의 세균 이론을 탄생시켰다.


세균 이론에 대한 자신의 반대 입장에 자신이 넘친 그로스는 리스터를 초청해 총회의 수술 분과 의장을 맡도록 했다. 세균론에 회의적인 각국 청중들 앞에서 이 영국 의사의 견해를 면전에서 반박하겠다는 의도였다. 리스터는 세 시간 동안 유창하게 연설을 했지만 완고한 반대론자들 중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확신을 가진 그로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토머스 에이킨스는 당시 국제 의료계를 휘젓고 있던 최대의 논쟁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에이킨스는 넓적다리 골수염 수술을 하는 새뮤얼 그로스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정했다. 골수염은 뼈에 심한 손상을 입히며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도 흔하다.


현장에 소독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의사와 조수 세 명 모두가 맨손이다. 게다가 셔츠, 조끼, 넥타이 차림인데다 그 위에는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다. 수술 때마다 입는 것이 분명한 이 코트엔 피와 고름이 더께로 앉아 있다. 소독되지 않은 수술 도구는 뚜껑 없는 도구함 위에 놓여 있다. 씻지 않은 손들이 집어서 사용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리스터는 저주 받으라. 세균 이론에도 지옥 있으라. 이 초상화는 그렇게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에이킨스가 이 걸작에서 정말 나타내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편적인 해석은 건국 100주년을 맞아 그로스와 그가 미국 의료사에 끼친 공로를 찬양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정말 그것이었을까? 이와는 전혀 다른 동기를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방식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라. 관객들은 언제나 그로스의 위대함과 의학이란 학문의 업적과 권위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를 묘사하는 데 있어 에이킨스가 한 일은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실상 그로스 클리닉은 당시 잘못된 길에 빠져 있으면서 우쭐해 하던 미국 의학의 자존자대와 후진성을 폭로하는 그림이었다. 이를 당대 가장 저명한 교수 중 한 명을 통해 예시한 것이다.


에이킨스가 미국의 저명 외과의사를 형상화한 에그뉴 클리닉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그로스 클리닉과는 딴판이다. 세균 이론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중심인물을 모세처럼 미화하는 분위기는 크게 약화되었다. 주인공은 71세의 헤이에스 에그뉴, 펜실베이니아 대학 외과 교수이다. 그는 무균 수술 현장에서 물러나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기신기신 강의하고 있다. 에그뉴의 모습은 별 볼일 없다. 경력이 끝나가는 늙고 지친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와 같은 나이였던 그로스와는 전혀 다르다. 그로스는 자신이 관심의 초점이라는 확신이 주는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으로 묘사됐었다. 토머스 에이킨스는 다시 한 번 진상을 꿰뚫어보고 이를 예술의 대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월트 휘트먼이 자신의 친구인 이 초상화가를 놓고 한 말은 유명하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대로 보려는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가는 내가 아는 한 토머스 에이킨스밖에 없다. 에이킨스는 화가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힘(a for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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