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Why Men Fight

   
버트런드 러셀(역자: 이순희)
ǻ
비아북
   
13500
2010�� 08��



■ 책 소개
20세기 서구 사회를 움직인행동하는 지성, 러셀. 그가 21세기의 자유·평화·교육·분배·종교·정의를 말한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지식인으로 알려진 러셀은 실제로 핵무기 반대운동과 시민 불복종 운동 등으로 몇 번의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기도 한 실천가였다. 


러셀의 사회·정치철학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책은 러셀이 영국 캑스턴 홀에서 "사회 재건의 원칙"이란 주제로 행한8회에 걸친 강연을 묶어 출간한 책으로, ‘전쟁으로 인해 불안과 혼란에 빠진 지식인들과 영국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21세기에도 유효한생각거리들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왜 국가에순종하는가? 교육은 희망 찾기를 못하고 두려움을 벗어나기에 바쁜 것인가? 돈은 인간 본성을 어떻게 왜곡하는가?’ 등 자유와 평화, 종교와 정의,교육과 분배 등의 기본 주제를 대상으로 자칫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 저자 버트런드 러셀
1872년 영국 웨일스출생.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과학을 공부했다. 화이트 헤드와의 공저 『수학원리』를 출간하여 19세기 기호논리학과분석철학의 기초를 만들었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학과 철학뿐 아니라 과학, 역사, 교육,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40권이상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지식을 향한 열정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시작되었다.그는 지식 탐구뿐 아니라 사회주의자, 반전주의자라고 불릴 정도로 현실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평화주의자로 활동했고,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내며 핵무기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해 러셀은 징병 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선고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강의권을 박탈당했다. 2년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의 구금형에처해졌고, 투옥되어 있는 동안 『수리철학의 기초』와 『정신의 분석』을 집필했다. 1950년에는 영국 왕이 하사하는 메리트 훈장을 받았으며,『결혼과 도덕』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 2월, 웨일스에서 사망했다. 대표 저서로는 『서양철학사』『철학이란 무엇인가』『나는 왜기독교인이 아닌가『행복의 정복』『게으름에 대한 찬양』『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 외 다수가 있다.

■ 역자 이순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졸업했고, 현재 전문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제국의 미래』『행복의 정복』『나쁜 사마리아인』『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빌 클린턴의마이 라이프』『알파독』『러셀, 북경에 가다』『기후 커넥션』등이 있다. 

■ 차례
추천의글
서문

1장 성장의 원칙, 충동과 욕구
2장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 국가의 역할 
3장 전쟁은 제도다 - 전쟁의 본질
4장 행복의 조건을 찾다 - 소유와 분배
5장 희망과 두려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교육의 원칙
6장 여성, 권위에 맞서다 - 결혼과 인구 문제
7장 천년왕국의붕괴, 그 이후의 세계는? - 교회와 종교
8장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옮긴이의 말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성장의 원칙, 충동과 욕구

인간의 모든 제도는 그 역사적 뿌리가 권위에서 비롯한다. 동양에서는 전제군주들이 무소불위의 권위를 휘둘렀고 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권위를 발휘했다. 이런 권위는 황제와 교황, 중세의 군주들, 봉건제 시대의 귀족들, 그리고 심지어 아내와 자식 앞에 군림하는 남편과 아버지에게까지 이어졌다.


중세의 제도들은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에게만 자유로운 발전을 허용했고, 태반의 인류는 그 소수의 인간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했다. 아무리 불운한 백성이라도 그 권위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동안만은, 중세 사회는 유기적인 통합을 유지했고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지 않았다. 외적인 복종은 내적인 자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구 기독교왕국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는 이론을 구현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현재의 제도들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 철학은 자유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정의에 대한 요구가 권력자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화, 개인화되었다. 개개인은 유기적인 공통의 목적 아래 단합한 진실한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의 권리를 위해서 싸울 뿐이었다.


이와 같은 공통의 목적 결여가 불행의 원천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환영한 데는 전쟁이 각 민족을 단일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한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은 각 민족을 단일한 목적으로 다시 단합시킨 반면 전체 문명 세계가 단일한 목적을 형성할 단초를 파괴해버렸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개개인이 무정해지고 고립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로 이를 원래 상태로 완전히 되돌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유기적인 사회가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개인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근대적인 감정이 요구하는 개인의 권리를 구체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종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뚫고 투쟁과 새로운 재통합에 다가가는 발전이 목격되고 있다. 이 길고 험난한 싸움 속에서 일반적인 이론은 서서히 망각 속에 묻히고 결국에는 자기주장만이 남는다. 또 억압받는 자들은 자유를 손에 넣으면 예전에 자신들을 억압했던 자들이 그랬듯이 억압을 자행한다.


이것은 민족주의 문제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민족주의 이론은 인간은 공감과 전통에 의거하여 민족이라는 자연발생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각 민족은 하나의 중앙 정부 아래 통일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 이론은 대개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이론은 상당히 개인적인 형태를 취한다.


억압받는 민족주의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공감과 전통에 의거하여 A민족에 속한다. 그런데 나는 B민족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민족주의라는 일반적인 원칙에서 보아도 그렇고, A민족은 관대하고 진보적이고 문화 수준이 높은데 비해서 B민족은 억압적이고 퇴행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A민족은 번영해야 마땅하며, B민족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B민족의 주민들은 당연히 이상적인 정의를 주창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따라서 이상적인 정의를 주창하는 목소리에는 개인적인 적대감과 경멸감이 덧붙여진다. 결국 A민족은 전쟁을 통해서 자유를 획득한다. 그 민족은 거의 예외 없이 자유를 손에 넣은 에너지와 자부심에 탄력을 받아 다른 민족을 정복하려고 하거나 약한 민족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뭐라고? 우리나라의 일부인 C민족이 우리가 B민족에 대항해서 얻어낸 것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C민족은 상스럽고 포악하고 제대로 통치할 능력이 없어. 또 이웃 나라들을 위협하고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하려면 C민족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구."


영국인은 아일랜드인에 대해서, 독일과 러시아인은 폴란드인에 대해서, 폴란드 남부의 갈리시아인은 루테니아인에 대해서, 오스트리아인은 마자르인에 대해서, 마자르인은 세르비아에 동조하는 남부 슬라브인에 대해서, 세르비아인은 불가리아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이론상으로 전혀 반대할 여지가 없는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억압과 정복 전쟁을 야기한다.


공업화의 진전이 낳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 그리고 아직은 초기 단계에 있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이런 여러 갈등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확신하는 원칙,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원칙이다. 각자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면서 전쟁을 벌일 때는 각자의 힘이 우연히 대등한 상황에서만 공정한 결과가 나타난다.


개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숱하게 접촉할 수 있어야 하고, 타인과의 숱한 접촉은 본질적으로 강제적인 복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협동이어야 한다. 권위에 대한 믿음이 존속하던 시절에는 자유로운 협동이 불평등과 복종에 양립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평등과 상호간의 자유 없이는 자유로운 협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개인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제도가 되도록 법률이나 권력자의 인습적인 권위가 아니라 자발적인 결합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제도도 이런 원칙의 적용을 견뎌낼 수 없다. 이런 변화가 이루어질 때만 이 세계가 사람이 만인과 투쟁을 벌이는 강고하고 독립적인 단위로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행복의 조건을 찾다 - 소유와 분배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도덕론자들은 돈을 좋아하는 것을 비난했다. 나는 도덕적 비난을 굳이 할 생각은 없다. 나는 돈의 숭배가 어떻게 해서 생명력 감소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 되는지, 돈의 숭배가 줄어들고 전체적인 활력이 늘어나게 하려면 우리의 제도들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돈을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는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배금주의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배금주의는 모든 가치는 돈으로 측정될 수 있으며 돈이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궁극적인 시금석이라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사실 이는 비록 입 밖에 내지는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배금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배금주의는 특정한 종류의 성장을 지향하는 본능적인 성향과 핵심적인 요구를 무시한다. 배금주의는 사람들이 돈을 손에 넣는 데 방해가 되는 자신의 욕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대개 이런 욕구는 소득의 증가보다 행복에 더 중요하다. 배금주의는 아무런 활력이 없는 획일적인 인격과 의도를 조장하고, 삶의 기쁨을 축소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피로감, 좌절감, 환멸감으로 몰아넣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조장한다.


사람들이 결혼을 늦추는 동기와 가족 수를 제한하는 동기는 동일하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들을 퍼블릭스쿨(public school : 주로 상류층 자제를 위한 영국의 사립 중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질은 그래머스쿨(grammar school : 영국 정부의 관할 하에 있는 공립 중등학교)보다 나을 것이 없고 이곳 학생들의 품성은 그래머스쿨보다 못하다. 그러나 우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퍼블릭스쿨이 최고라고 결정을 내리고 어느 누구도 이 결정에 불복하지 않는다. 퍼블릭스쿨이 최고인 까닭은 등록금이 가장 비싸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장 높은 계층과 가장 낮은 계층을 제외한 모든 계층이 이와 똑같은 사회적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대단한 도덕적 노력을 기울이고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자제력은 창의적인 목적에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 내부에 있는 생명력의 원천을 고갈시키고 그들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천박한 존재로 만들 뿐이다.


배금주의의 폐해는 예전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 산업화로 노동은 예전보다 더 단조로워지고 더 강도가 높아졌으며 돈을 목적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흥미를 제공하는 능력은 줄어들었다. 가족 수를 제한하는 힘은 검약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열어놓았다. 교육과 자기 수양이 보편적으로 확대되면서 갖은 유혹을 떨쳐내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추구하는 능력이 강화되었다. 그 목적이 생명력과 충돌할 경우 그것을 채택한 사람들의 의지가 굳으면 굳을수록 그 목적은 더욱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은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져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을 갉아먹는다.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불행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불행이 된다. 가장 행복한 인간은 돈을 배제하는 적극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돈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제국주의 사상이나 급진주의 사상이나 사회주의 사상이나 가릴 것 없이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사상은 일체의 경제적 욕구만을 중시하고 그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의 분배 체계는 어떤 원칙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복에 의해서 부과된 체계로부터 비롯해서 정복자들이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편성한 제도가 법률에 의해서 정형화된 것으로 단 한 번도 근본적인 개조를 거친 적이 없다. 분배 체계의 개조는 어떤 원리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할까?


분배 체계의 개조 방안으로 가장 널리 주창되는 사회주의는 그 주된 목표를 정의에 둔다. 사회주의는 현재의 불평등한 분배 체계는 부당하다고 보고 이를 폐지하려고 한다. 모든 인간의 소득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의 핵심 이론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핵심 이론은 요구 혹은 수행되는 노고에 편차가 있다는 점에서 불공평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평성 하나만을 경제 체제 개조의 근간을 형성하는 원칙으로 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선구자에게 특징적이던 종교적 열정을 대부분 상실한 채 사회주의를 하나의 뚜렷한 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소득이며 민주적인 정치가는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주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를 견지한다. 나는 이런 생각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요인에 대한 소극적인 관점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산업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빈곤을 줄인다고 행복한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도덕적인 견지에서 볼 때 반격을 가할 여지가 없으며, 편견과 독선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대항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모든 사상들은 노동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고 노동운동을 지탄하는 사상은 전설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운동이 생명에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확실치 않다.


경제 조직들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고 이런 과정이 역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처럼 경제 조직의 규모가 커져가는 이유는 기술적인 것으로 대규모 조직은 문명사회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로서 용인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가 반드시 중앙집권화되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현재의 경제 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창의성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권태감을 야기하는 원천이다. 오늘날 도시에 거주하면서 산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활력을 잃고 끊임없이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도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도피처라 여기고 반가워한다.


국민의 활력을 보전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전혀 변화가 없는 정체 상태에 빠진 중국과 같은 상황으로 전락하지 않고자 한다면 절대적인 권능에 의해서 관리되는 산업 조직은 반드시 일소되어야 한다. 모든 대규모 사업의 관리는 민주적이고 연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임금노동 체제는 사회적인 불공평을 야기하고 영속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그 작업을 수행하는 목적을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지배적인 목표 일체는 자본가에게 집중되어 있고 임금노동자의 목표는 생산이 아니라 임금에 있다.


자본가의 목표는 최소의 임금으로 최대의 노동을 확보하는 것이고 임금노동자의 목표는 최소의 노동으로 최대의 임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의 충돌을 야기하는 체제가 순조롭게 혹은 성공적으로 작동하거나 효율성 면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두 가지 운동(하나는 이미 상당한 발전 상태에 있고 다른 하나는 초기 단계에 있다)은 서로 어우러져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협동조합 운동과 생디칼리슴이다. 협동조합 운동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임금 제도를 대체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철도 등의 사업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분야는 생디칼리슴의 원칙이 가장 쉽게 적용될 수 있다.


오늘날의 제도가 야기하는 폐해는 소비자, 생산자,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각기 갈리는 데서 비롯한다. 이 셋 중 어느 한 주체도 공동체 혹은 다른 주체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 협동조합 제도는 소비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킨 것이고, 생디칼리슴은 생산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킨 것이다. 둘 중 어느 제도도 세 주체의 이해관계를 융합시키거나 산업을 이끌어가는 주체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합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제도도 산업계의 분쟁을 완전히 예방하거나 중재자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방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제도는 오늘날의 제도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고 이 두 제도를 조합하면 오늘날 존재하는 것과 같은 산업주의의 폐해를 대부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산업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세계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까운 장래만은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 우리는 국가 혹은 사유재산 제도의 과도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당장 교육 제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이 나쁜지 알고는 있더라도 평범한 정치적 수단에 의지해서는 이런 폐해를 당장 교정할 수 없다.


우리는 바로 내일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극소수 사람들만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 될 때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용기와 인내심을 가진다면 머잖아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권태와 실망감을 활력과 열정으로 바꾸어놓을 견해와 희망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훌륭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세계가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유용한 정치 이론을 만드는 데 가장 긴급한 것은 이상향을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운동의 진행 방향을 찾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유익한 방향과 또 다른 상황에서 유익한 방향은 얼핏 보기에는 크게 달라 보일 수 있다. 유익한 사고는 지금 상황에서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사고이다. 하지만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 판단할 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반적인 원칙이 언제나 적용될 수 있다.


1.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과 활력은 최대한 장려되어야 한다.

2. 어느 개인 혹은 어느 공동체의 발전이 다른 개인 혹은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키는 일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이 개인 간의 관계에 적용되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중시하듯이 다른 사람의 인생도 똑같이 중시한다는 점에서 존중의 원칙이 된다. 이 두 번째 원칙이 특정한 개인을 넘어서서 정치에 적용되면 그것은 자유의 원칙이 되거나 자유의 원칙을 부분적인 원칙으로 포함한다. 자유 자체는 소극적인 원칙이다. 자유의 원칙은 해로운 정치 및 사회 제도들이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 자리에 대신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 이론이 파괴적인 것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또 다른 원칙이 요구된다.   

 

이 두 가지 원칙을 결합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 두 가지 원칙이 모두 실현될 수 있게 하려면 개별성을 희생하는 일 없이 개개인의 생활, 나아가 공동체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을 통합해야 한다. 개개인의 생활과 공동체의 생활, 인류의 생활은 분리된 여러 개의 조각이 아니라 통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럴 때야 개인의 발전이 촉진되고 다른 개인의 발전과 양립할 수 있다. 두 가지 원칙은 이런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개인의 생활에 통합성을 부여하는 것은 일관된 창조적 목적 혹은 무의식적인 지향이다. 본능만으로는 문명사회의 남성 혹은 여성의 생활에 통합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뚜렷한 목적이나 야망, 과학 혹은 예술 방면의 창조의 욕구, 종교적 교의, 혹은 강력하고 지속성 있는 열정이 있어야만 한다.


내면의 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사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회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저지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 성장의 원칙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행동을 하도록 강요당하는 경우 인간 성장의 원칙은 무너지고 만다.


개인생활의 통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지닌 창조적 충동이 실현되어야 하고, 그 충동을 이끌어내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의 통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닌 다양한 창조적 충동이 모든 구성원들이 개인적인 성취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공동의 생활과 공동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어도 된다)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중요한 충동에서 비롯되는 대부분의 활동은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하나는 창조적인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에 집착하는 활동이다. 창조적인 활동은 자신의 생활은 물론이고 자신과 같은 충동을 지녔거나 똑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의 생활을 진전시키고, 소유에 집착하는 활동은 자신과 다른 충동을 지녔거나 다른 상황에 놓인 집단의 생활을 방해한다.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즐거움과 놀이를 지향하는 일시적인 욕구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인생의 주요한 목적과 본질적으로 해악을 끼치지 않는 즐거움이 쉽게 결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습관적인 음주나 마약 복용, 잔혹한 오락, 가학적인 쾌락 등의 요소들은 본질적으로 해롭다. 그러나 문명인들이 자연스럽게 향유하는 즐거움은 대개 전혀 해약을 미치지 않거나 더 나은 사회에서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결과로 인해서 뜻하지 않게 해를 끼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금욕주의나 생기 없는 청교도주의가 아니라 호방한 창조적 목적을 지향하는 강력한 충동과 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충동과 욕구가 원기 왕성한 힘을 발휘할 때 행복한 삶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은 저절로 충족된다.


쾌락과 진귀한 경험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욕구의 주된 대상이 되는 경우에는 행복한 인생을 창조할 수 없다. 주관주의, 즉 사고와 욕구를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집중시키는 습관은 반드시 인생을 단편적이고 퇴보적으로 만든다.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쾌락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주 접하는 대상에 대한 관심을 서서히 잃어버리기 쉽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단편화하고 고립화하는 것을 방지하고 창조적인 충동을 실현할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는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다거나 그 목적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도와 신념이 충동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나아가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이런 결과를 개선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런 지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강력한 정치 세력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고는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세계는 삶을 증진시키는 철학이나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삶을 증진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삶만이 아니라 다른 소중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삶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삶은 동물적인 삶이고 일체의 인간적인 가치 기준을 지니지 않을 뿐 아니라 권태감과 모든 것이 헛되다는 허무감으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지켜주지 못한다. 삶이 인간다운 삶이 되려면 인간의 삶과는 무관해 보이는 목적, 비개인적이며 인간을 넘어서는 목적, 예컨대 신이나 진리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 속에서 영원한 어떤 것을 구현하는 점진적인 권화(權化)를 지향한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비록 상상 속의 세계이지만) 다툼과 실패와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시간의 무서운 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국에서의 삶으로 그려진다.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은 어떤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 앞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온통 잔혹함과 투쟁과 증오심뿐이지만, 이 거친 세상으로 거룩한 어떤 것을 끌어들이는 데 삶을 바치면서 영원한 것과의 접촉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