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즐거움

   
정제원
ǻ
베이직북스
   
15000
2010�� 12��



■ 책 소개
독자들에게 막연하게 문학의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는 문학의 진정한 효용과 가치를 일깨워 주기 위해 기획된 책이다. 4부 20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부를 시작하는 머리글과 각 장을 시작하는 머리글을 통해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즐길 것인지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하는가 하면, 이념이나 사상과도무관하여 우리의 삶에 용기와 위안을 주기도 한다. 또한 문학은 인간의 상상력을 펼치는 훌륭한 연극무대의 장치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푯대로작용하기도 한다. 문학의 중요성이나 가치가 점점 상실되어 가는 시점에서 문학의 진정한 효용성이나 필요성을 언급함으로써 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문학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생의 새로운 가치 창출에 이바지하는 기회를 부여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 저자 정제원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제련소에서 근무했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동 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하였으며, 동 대학원을 마쳤다. 1999년에월간 「순수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와 백제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글쓰기 입문서인 『설명문 쓰기의 이론과실제』, 시집으로 『사랑을 지키는 사람들』, 에세이로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독서법에 관한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문화체육관광부선정 우수교양도서) 등의 책을 펴냈다.

돈키호테처럼현실에 어깃장 놓기, 에리히 프롬처럼 제자들에게 따뜻한 사람 되기, 신영복 교수님처럼 겸손하게 글쓰기를 희망하고 있다. 반대로 1주일에 1권이상 책 읽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기, 1개월 이상 서울에 머물기를 가장 혐오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과 헨드리크 빌렘반 룬의 『반 룬의 예술사』를 읽고서 글 쓰며 사는 인생을 결심했지만,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한다. 


■차례
서문

제1부문학의 즐거움
1장 문학은 생활의 재발견이다
2장 문학은 수정처럼 맑은 눈물을 준다
3장 문학은 마지막 잎새를떨어뜨리지 않는다
4장 문학은 연애할 때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5장 문학은 삶의 또 다른 시작이다
6장 문학은 미지의 세계를상징적으로 창조한다

제2부 문학의 힘겨움
7장 문학은 슬픔을 보듬어 안는 것이다
8장 문학은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는다
9장 문학은 우리의 부끄러운자화상이다
10장 문학은 일기를 쓰듯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제3부 작가는 누구인가
11장 문학은 고민하고, 공부하는 독자를 좋아한다
12장 문학은상품이 아니다
13장 문학은 불완전한 작가에 의해 도리어 완전해진다
14장 문학은 천년습작의 몸부림이다
15장 문학은 진리가요구하는 정의를 증언한다

제4부 문학이가야할 길
16장 문학은 패자의 기록이다
17장 문학은 훌륭한 도덕 교과서다
18장 문학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인간을 위한 복음이다
19장 문학은 현실 비판과 이상 사회의 열망이다
20장 문학은 생태적인 의미에서인간적이다

에필로그
작품해제





문학의 즐거움

문학의 즐거움


제1부 문학의 즐거움

문학은 수정처럼 맑은 눈물을 준다

수북한 우동 한 그릇

섣달 그믐날 밤, 10시가 넘자 우동집 북해정(北海亭)의 마음씨 착한 주인 부부는 슬슬 문 앞의 옥호(屋號)막을 거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손님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동화 작가 구리 료헤이가 『우동 한 그릇』에서 만들어 낸, 세 모자와 마음씨 착한 우동집 주인 부부의 아름다운 섣달 그믐날의 전설이 시작된다. 삿포로 북해정 2번 테이블의 전설이.


어린 사내 아이 둘과 함께 한 여인이 우동 일인분을 주문한다. 마음씨 착한 주인은 눈치도 빨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우동 한 그릇을 아주 특별히 수북히 만들어 2번 테이블에 앉은 가난한 손님들을 배려했다. 세 모자는 세상에서 가장 수북한 우동 한 그릇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먹고, 150엔의 값을 지불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세 모자에게 주인 내외도 목청을 돋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 해 섣달 그믐날 밤에도 세 모자는 10시를 막 넘긴 참에 북해정에 와 2번 테이블에서 우동 일인분을 시켜 맛있게 먹고 갔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섣달 그믐날 밤에는 아예 주인 내외는 10시가 가까워지자 안절부절못했다. 세 모자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이 왜 이리 가슴 벅찬지 말이다. 2번 테이블에는 이미 30분 전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놓았고, 금년 여름에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적혀 있던 메뉴표도 우동 150엔으로 바꿔 놓았다.


10시를 막 넘긴 참에 세 모자는 어김없이 찾아와 2번 테이블에 앉았지만, 그날은 우동을 이인분 시켰다. 우동 이인분을 나눠 먹으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며 남긴 많은 빚을 얼마 전 모두 갚았다는 기쁜 사연을 두 아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큰아들은 막내 쥰이가 「우동 한 그릇」이라는 감동적인 글로 북해도의 대표로 전국 콩쿠르에 출품하게 된 사연을 어머니께 고백했다. 그 글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우동 한 그릇을 북해정에서 세 모자가 맛있게 나눠먹는 이야기였다.


카운터에 깊숙이 웅크린 채 북해정 주인 내외는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기며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북해정 주인 내외는 배려하는 사람이요 기다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 자격 있는 사람이 눈물을 연신 흘리는 장면을 읽으며, 눈물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동화 작가 구리 료헤이는 일본 삿포로의 수정처럼 맑은 겨울눈을 가진 아름다운 눈물을 이렇게 우리에게 선사해 주고 있다. 


10년 만에 다시 나타난 세 모자

그 후로 10년 동안은 세 모자가 섣달 그믐날 밤에 북해정을 찾지 않았다. 주인 내외의 따뜻한 마음씨 때문인지 우동집 북해정은 장사가 잘되어 번창했다. 그래서 가게 내부수리를 하게 되었지만, 단 하나 2번 테이블만큼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렇다. 배려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은 이렇게 다르다. 그들 세 모자가 언제라도 올 때까지 그들은 배려했고 기다렸다. 그들 세 모자가 마지막 봤을 때보다 더 행복한 모습으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배려하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늙어갔으리라.


그렇게 오랜 세월 삿포로 북해정 2번 테이블의 전설은 아직 결말을 보지 못했고, 배려하는 사람 주인 내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언젠가는 꼭 올 세 모자와의 상봉을. 그리고 끝내 그 날은 왔다. 오버코트를 손에 든 정장 수트 차림의 두 청년이 섣달 그믐날 밤 10시 반쯤에 들어왔다. 가게 안은 북적거리는 손님들로 시끄러웠다. 여주인이 만원이라 자리가 없다며 두 청년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하려는 순간, 화복(和服,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은 부인이 들어와서 깊이 머리를 숙이며 두 청년 사이에 섰다.


그리도 부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우동 삼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북해정 2번 테이블의 전설을 익히 알고 있던 손님들의 시끄러운 이야기들이 멈췄다. 여주인은 남편을 불렀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린 전설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우리 북해정으로 우동 한 그릇 먹으러 갑시다

큰아들로 보이는 청년이 말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일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외가가 있는 시가현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금년에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교토의 대학병원에서 소아과 병아리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4월부터 삿포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인사도 하고 아버님 묘에도 들를 겸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 교토의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서 최고로 사치스러운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니와 셋이서 삿포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삼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


배려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는 사람인 주인 내외의 눈에는 왈칵 눈물이 넘쳐흘렀다. 14년 동안의 전설이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그 얼마나 외치고 싶은 주문이었던가? 북해정에서 가장 낡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2번 테이블에서, 북해정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아니 지축을 흔들 만큼 큰 목소리로 세상에다 외치고 싶었던 주문을, 주인 내외는 눈물을 훔치며 외친다.


네엣! 우동 삼인분!


우동집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눈발도 그치고,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창문의 빛에 비친 북해정이라고 적힌 옥호막이 한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왠지 북해정 2번 테이블의 전설은 마지막에 이르렀다기보다는 이제 막 시작된 느낌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설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몇 번을 이 작품을 읽었지만, 항상 두 뺨에는 상큼한 눈물이 흐른다.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을 읽은 사람들과 우연히 만난다면, 언제라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 북해정으로 우동 한 그릇 먹으러 갑시다."



제2부 문학의 힘겨움

문학은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는다

쉽게 씌어진 시

1942년, 일본 교토, 하숙집 육첩방(다다미 6장이 깔린 여섯 평의 방). 일본 도오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청년은 사색에 잠긴다. 그의 마음은 죄의식과 참회로 갈기갈기 찢어진다. 고국에서 보내주신 학비봉투에서는 땀내와 사랑내가 난다. 영문이 죽은 문자처럼 박혀 있는 자신의 대학 노-트가 부끄럽다. 시인 중에서 가장 하찮은 시인, 시인 중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될 것이란 직감이 번개처럼 그의 마음 한 가운데를 관통한다.


창 밖에 밤비 소리가 속살거린다. 어린 때 죄다 잃어버린 동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청년은 그 부끄러운 대학 노-트에 시를 쓴다. 밤비 소리에 취한 듯, 슬픈 천명에 짓눌린 듯, 무심중에 중얼거리며 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쉽지 않게 시 한 편을 썼다. 어렵게 어렵게 시 한 편을 썼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쉽게 씌어진 시.


시를 읽다 보면 때로 제목에서 어떤 섬뜩함을 느낄 때가 있다. 윤동주의 시 제목, 쉽게 쓰여진 시처럼 말이다. 이 제목에서 우리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를 맞이하게 될 윤동주의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의 단말마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된다.


윤동주의 시는 윤동주의 인생처럼 결코 쉽지 않았다.


재주보다는 도로써

포정(백정)의 소를 잡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장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다. 포정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는 자기를 완전히 잊은 일종의 황홀 상태와 삼매 지경에서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사방을 둘러보고 평상의 의식 상태로 돌아오면 말할 수 없이 흐뭇한 마음을 느끼는 도인이었음을 알게 된다.(장자, 오강남 풀이, 『장자』, 현암사, 1999, 153쪽) 물론 이러한 경지는 자신과 소와 칼을 각각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완전한 합일체로 볼 줄 아는 무위의 도,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 하는 이치를 터득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 그 일의 어려움을 알아채고 두려움을 느끼는 조심스러움까지 갖춘 포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득도의 경지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라고 하는 경험을 스승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음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두려운 마음과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도인은 도인이로되, 두려움조차 자신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한 도인이었다.


설령 도인일지라도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다. 하지만 신이 아니기에, 즉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도리어 완전한 것이 인간이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라도, 신의 정체성에 이르는 마지막 계단을 밟지 않음으로써,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참된 도인이요 성자다.


우리에게 익숙한 위대한 작가들도 포정처럼 분명 도인 혹은 성자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위대한 사상과 상상의 힘으로 그들은 완성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진정한 위대함을 알아야 한다. 그들도 오류와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번민했으며, 마침내 성자의 반열에 오르기 한 발짝 전에서 마치 시시포스처럼 다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자신의 운명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오르고 또 올랐다.


다시 굴러 떨어지는 운명을 정확히 알고도, 묵묵히 산을 오르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시인 장석주 교수가 문장예찬론을 펴냈다. 이 책은 분명 세계문학사의 명문장들로 차려진 진수성찬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었건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다. 아니 더 배고파졌다. 우리가 써야 할 문장들, 우리가 읽어야 할 문장들이 갑자기 더 그리워졌다. 세계 문학 속에서 뽑아낸 보석 같은 명문장들이 이뿐이 아님을 알기에 더 배고프고 더 그리워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알아주는 다독가이자 다작가인 장 교수의 수많은 책들은 대부분 문장예찬론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글을 쓰기보다 자신의 멘토가 되어 준 글을 독자에게 읽어주는 사람이었다. 읽기도, 읽어주기도 바쁜 그에게 세상 아래 장석주 이름 석 자를 내 걸고 글을 쓰는 일이 부끄러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문장예찬론을 읽으며 더 배고파지고 그리워지는 것이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를 처음 읽은 후, 이상하게 바로 책을 덮지 못하고 첫 꼭지의 16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밑줄을 선명하게 그어 놓은 장 교수의 고백을 읽었다. 그리고 몇 번을 더 이 책을 읽었지만,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반드시 첫 꼭지 이 대목을 읽으며 일독을 마쳤다. 보라, 장 교수가 풀어 놓은 주술을.


시인을 꿈꾸던 청년 시절에 『말테의 수기』를 읽었다. 내 마음은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시인 중에서 가장 하찮은 시인, 시인 중에서 가장 못난 시인이 될 것이란 직감이 번개처럼 내 마음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갔다. 나는 아마도 사막의 눈 먼 사자들이 필사적으로 샘물을 찾는 것처럼 시를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과연 나는 그때부터 서른 해가 넘는 지금까지 시를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는 이 주술을 읽으며 다시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이 주술을 읽으며 다시 『장자』의 포정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장 교수가 풀어 놓은 또 하나의 주술, 릴케의 시를 읽어야 한다. 제 안에 거처를 마련한 시마(詩魔)에 시달리며, 처절하게 문장을 가다듬고 문장의 길을 닦고 기어코 문장의 부끄러움 속에서 스러져간 세계 문화의 위대한 작가들의 영혼에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 그들은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는 까닭 없이 닥친 천명(天命)을 부둥켜안았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 세상에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 나 때문에 울고 있다 /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 밤에 이유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 나를 비웃고 있다 //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 정처도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은 / 내게로 오고 있다 /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 세상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 나를 쳐다보고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장석주,『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문학의문학, 2009, 17쪽에서 인용)

과연 그 울음이 나 때문인가? 과연 그 웃음이 나를 비웃고 있는가? 과연 그 정처 없는 떠돌이가 내게로 오고 있는가? 과연 그 죽어가는 사람의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가? 우리에게 결코 납득되지 않는 의문에 "그렇다"하고 외쳤던 작가들의 술잔에 뜨거운 술을 따라줘야 한다. 세계 문학 속에서 끝도 없이 뽑아낼 수 있는, 그리하여 시인 장석주 교수가 열 권이고 백 권이고 써낼 수 있는 문장예찬론을 읽어야 한다.


작가는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는 글을 쓰며, 결코 쉽게 살아지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제3부 작가는 누구인가

문학은 상품이 아니다

문인의 초상

피천득 선생의 시 모음집 『내가 사랑하는 시』를 펼치면 제일 먼저 수많은 시인들의 초상들이 실려 있다. 결국 선생의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선생이 생전에 곱게 액자에 담아둔 수많은 시인들의 초상을 보아야 한다. 선생의 시 사랑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니, 선생은 시를 사랑하시기 전에 시인을 더 사랑하셨나 보다. 선생은 그들의 초상을 서가 한 면 가득 채우고서야 그들의 시를 비로소 아끼며 읽고 섬겨 번역하신 것이다.


사진작가 최민식 씨는 후배들에게 인물사진의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발견하라는 충고와 함께 인물사진을 찍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진과 인간, 예술과 삶 등에 대한 압축적인 충고를 읽고 있자니 피천득 선생의 시인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된다.


단지 인물사진이 좋아 거액을 주고 제법 고급 카메라를 산 후, 서점에서 인물사진 잘 찍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고르다, 아주 깜짝 놀라운 책과 우연히 만났다. 1970년을 전후로 해서 찍은 문인 사진들을 맛깔스러운 글과 함께 펼쳐놓은 육명심 씨의 『문인의 초상』이 바로 그 책이다.


우리는 왜 인간을 찍는가. 인물사진은 예술인 동시에 삶 그 자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물사진은 인간이 걸어온 길의 흔적, 그 의미에 오래 매달려 있는 셈이다. 우리는 진실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인생의 진실은 여기저기 깔려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사진이다. 인물사진이란 인생의 참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최민식, 『사진은 사상(思想)이다』, 분빛, 2009, 176~177쪽)


내가 사랑하는 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시인(혹은 문인)이 테마인 『문인의 초상』을 보고 읽는 동안 때로는 존경하는 문인들의 눈동자를 보며 압도당했고, 때로는 밀려드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한숨지었고, 때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대정신을 읽으며 숙연해졌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보고, 읽고 또 보고 있자니, 저자인 육명심씨의 서문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 책이 담은 사진의 주인공들은 그저 대중목욕탕에서 우리와 만날 수도 있는, 그저 한 인간이었다.


몇 년 동안 문인 사진을 작업하다 보니 대상을 보는 눈이 처음과는 크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시인이면 시인, 소설가면 소설가로만 보였는데 해가 거듭되면서 문인들이 예술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예술가라는 옷을 벗어버린 원래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각각의 몸에서 풍기는 독특한 체취와 숨결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육명심, 『문인의 초상』, 열음사, 2007, 6~7쪽)


가지 않은 길

『문인의 초상』에서 카메라에 담은 일흔한 분의 문인들 중 절반 정도는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시다. 더 이상은 우리의 망막으로조차 찍을 수 없는 분들의 초상을 정성껏 쓰다듬으며 추모와 공경의 염(念)에 젖다 보니,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명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올랐다.


그분들도 그러셨을까? 다음 날을 위하여 남겨두신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우셨을까? 자신의 온 생애가 달라져버린 선택을 한숨 쉬며 이야기하셨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그 험난한 20세기를 굳은 심지 잃지 않고 꿋꿋이 펜 한 자루로 살아내신 그분들 뒤를 이어 후배 문인들이 그 가지 않은 길을 쓰고,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 독자들이 그 가지 않은 길을 읽으면 되지 않을까!


오늘도 노란 불빛의 서점에서는, 한 권의 문학과 한 사람의 독자가 새로운 운명의 날을 시작한다.



제4부 문학이 가야할 길

문학은 현실 비판과 이상 사회의 열망이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

우리는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 봐야

비로소 백사장에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전쟁의 포화가 세상을 날아야

지구상에 영원한 평화는 찾아올까


(중략)


그대 나의 친구여, 부디 묻지를 마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밥 딜런, 「바람만이 아는 대답」


본디 오고 감이 없고, 깊고 얕음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고, 피고 짐이 없고, 얻음과 잃음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고, 멀고 가까움이 없고, 밝고 어두움이 없고, 많고 적음이 없고, 크고 작음이 없고, 길고 짧음이 없고, 끝내는 있고 없음이 없는, 그런 바람. 과연 그런 바람만이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신화 속의 시시포스처럼 무거운 바위를 안고 산 정사에서 골짜기로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운명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불굴의 피조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묻고 또 물을 것이다. 바람만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대답을, 지상의 단 한 명의 작가라도 남아 있는 한, 잔인한 운명의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올릴 것이다. 결코 갈 수 없지만 기어코 가야할 정의로운 세상, 산 정상에 우뚝 솟은 찬란한 유토피아를 향하여!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유토피아 문학

지리상의 발견과 종교개혁, 그리고 인쇄업의 발달로 인해 중세적 질서가 무너지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토머스 모어(1478~1535)의 『유토피아』(1516)는 인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던 그 새로운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리하여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첫 발을 내딛은 이후 반드시 가야 하지만 결코 갈 수 없는 나라, 결코 갈 수 없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나라에 대한 작가들의 열망은 수많은 유토피아 문학을 탄생시켰다.


물론 문학이론가들이 굳이 유토피아 문학이라는 장르를 특별히 설정했지만, 실제로 그 어떤 작가도 유토피아와 무관하게 작품을 쓰는 일은 없을 듯하다. 유토피아를 실제로 그리거나, 유토피아를 동경하거나, 유토피아를 애써 외면하는 것, 이 셋 이외에 작가가 문학 작품을 쓰는 동기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르네상스의 현자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로 기어코 가야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이상향을 그려냈다. 유토피아 섬에는 물욕(物慾)에 감염되지 않은 건강한 정신의 인간들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 있었다.


모어의 『유토피아』가 정치적 이상향을 그렸다면,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는 과학적 이상향을 그린 작품이다. 이제 유토피아는 가야 하지만, 갈 수 없는 역설의 땅이 아니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점차 세계 전체를 장악했던 베이컨의 시대는 그 세계에 대한 실증적 탐구를 요구했다. 맹목적․주술적 개념들은 지구 전체라고 하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아틀란티스』로부터 불과 300년이 지난 후 인류는 절대 가서는 안 되지만, 갈 수밖에 없는 역(逆) 이상향인 디스토피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섬뜩한 디스토피아의 마왕(魔王)은 『멋진 신세계』의 무스타파 몬드나 『1984년』의 빅 브라더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수십만 년 동안 인류의 자애로운 어머니였던 자연이 직접 디스토피아를 쓰기 시작했다. 인류가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위협적인 디스토피아를, 천재 과학자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이 경건하게 기록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에서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1999)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기록자들은 자연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 디스토피아 그 자체가 되었음을 증언했다.


디스토피아에서 다시 유토피아로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개인적 문제, 그리고 현실의 모순까지 떠맡았던 문학이 언제부터인가 협소한 범위로 한정돼 버렸다"며 문학을 버리고 생태운동으로 돌아섰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최근 한국작가회의를 찾아 대지를 떠난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생태문학이 제 소임을 다하여 디스토피아에서 다시 유토피아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하여 문학이 다시 현실 비판과 이상 사회의 열망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은 아닐까? 길을 잃어 영영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밥 딜런의 노래처럼 바람만이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불굴의 피조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상에 문학이 가야할 길을 고민하는 단 한 명의 작가라도 남아 있는 한, 묻고 또 물을 것이다. 바람만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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