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서유기

   
첸원중(역자: 임홍빈)
ǻ
에버리치홀딩스
   
35000
2010�� 05��






&>■ 책 소개
2007년 중국CCTV 학술프로그램 <백가강단&&에 "현장서유기"라는 제목으로 전체 36편의 역사인물 강의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이 책은 소설『서유기』의 실존 인물이며, 당나라 시절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현장법사의 모든 것을 다룬 그 강의의 확장판으로 출간된 것이다. 현장스님의구법 여행과 불경 번역, 그리고 법상종의 개창은 중국 불교 역사의 큰 중심축으로 오늘날까지 동양 불교학의 지표가 되고있다.

『서유기』는 현장법사가 저술한 『대당서역기』와 그의 전기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천재 작가 오승은에 의해 1592년 100회분으로 엮인 후 중국의4대기서로 자리매김해 왔다. 소설 속 삼장법사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81가지의 재난을 헤치고 석가모니가 있는 천축으로 가 불경을구해 오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 일행의 여행길을 방해하는 요괴와 마귀, 태상노군과 옥황상제가 등장해 그들을 온갖 재난에 빠뜨린다.

그렇다면 소설 속 현장법사 일행의 서쪽 구법 여행기는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구사할 줄 아는,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실력파 학자인 저자는 소설 『서유기』의삼장법사로만 알려져 있는 현장스님의 서역 기행을 치밀하고 세심하게 파헤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춤하게 풀어냈다. 진정 지식탐구의 자세로 서역 기행에홀로 나선 열정의 모험가이며 여행가인 현장법사의 모습이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위대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 저자 첸원중(錢文忠)

1966년장쑤성(江蘇省) 우시(無錫)에서 태어났다. 1984년 베이징 대학 동방언어문학과에 입학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를 전공했다. 동양학의 거장인지셴린(季羨林)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 독일 하노버 대학에서 인도학을 전공하고 티베트학과 이란학을 부전공했다.인도학자인 웨즐러(A. Wezler) 교수, 불교학자인 슈미트하우젠(L. Schmithausen) 교수, 이란학자 에머릭(R. E.Emmerick)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96년에는 푸단 대학(復旦大學)에 들어가 역사학과 교편을 잡았다. 2007년에는 CCTV학술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현장서유기’를 강의하며 대중에게 주목받았고, 이후 2009년에는 ‘삼자경(三字經)’ 풀이로 한 차례 더<백가강단&&에 섰다.

현재, 푸단대학 역사학과 교수, 중국문화서원(中國文化書院) 지도교수, 화둥(華東) 사범대학 동방문화연구센터 연구원, 베이징 영화대학원 객원교수, 지셴린연구소 부소장, 베이징 대학 『유장정화(儒藏精華)』편찬위원회 위원을 겸직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구사할 줄 아는 보기드문 실력파 학자로서, 고대 동방사학과 불교사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와부집(瓦釜)』 『마나스(Mannas) 귀의하다(末那歸依)』『계문입설(季門立雪)』 『천축과붓다(天竺與佛陀)』 『국고신지(國故新知)』 『인문도화원(人文桃花源)』 『팔리어 강의고(巴利文講稿)』 『좌간운기(坐看云起)』 『삼자경(三字經)강독』이 있으며, 국내에는 『천고의 명인들』(공저)이 출간된 바 있다.
&&>
■ 역자 임홍빈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구부 전문위원을 거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책임편찬위원과 국방군사연구소 지역연구부 선임연구원을역임했다. 1992년부터 중국의 군사역사, 전쟁사 연구와 중국 고전 및 현대문학 작품 번역에 전념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달빛을 베다』『손자병법 교양강의』 『중국역대명화가선』 『수호별전』 『소설 공자』 『서유기』 『현실+꿈+유머: 린위탕 일대기』 『의천도룡기』 『백록원』(공역)등이 있으며, 한국 고전군사문헌을 현대어로 국역한 『문종진법·병장설』 『무경칠서』 『백전기법』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현대중국어교본』『독학중국어회화』 등이 있다. 

■ 차례

현장스님 서역 기행노선도
머리말

제1강 현장법사의 출신내력
제2강 불문에 귀의하다
제3강 학문 탐구의 길
제4강 변방 관문에 잠입하다
제5강 남몰래 국경을 넘다
제6강변방 관문에서 사로잡히다
제7강 위기는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제8강 절망의 모래바다, 막하연적
제9강 코초 왕국에서 곤경에처하다
제10강 이국의 전설
제11강 쿠차에서의 경전토론
제12강 파란만장한 우여곡절
제13강 적을 벗으로만들다
제14강 인도에 첫발을 들여놓다
제15강 부처님의 그림자에 얽힌 수수께끼
제16강 파키스탄-인도의 기막힌이야기들
제17강 여인들의 나라,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제18강 죽음의 재난에 빠져들다
제19강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벗어나다
제20강 붓다의 고향
제21강 성지를 눈앞에 두고 착잡한 심경
제22강 기이한 인연
제23강 기러기 탑에 얽힌전설
제24강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따르랴
제25강 종파의 다툼
제26강 논전으로 맺은 인연
제27강 두 영걸의실력대결
제28강 생사 결전
제29강 위기 중첩
제30강 귀국 일화
제31강 떠돌이의 귀향
제32강 당 태종과의 첫대면
제33강 넋은 부처님의 참된 경전에 얽매여놓고
제34강 미륵의 진상
제35강 만년에 닥친 풍파
제36강 법사,원적하다

옮긴이 주
옮긴이후기




현장 서유기

현장 서유기


현장법사의 출신 내력

소설 『서유기』 속 당나라 스님과 그의 제자 세 사람이 서역 천축(인도)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달리 당나라 스님만큼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당나라 왕조 때의 위대한 승려로서, 속명은 진위(陳緯, 또는 진의(陣禕)), 법명은 현장(玄奘)입니다. 『대당 서역기(大唐 西域記)』라는 여행 기록을 저술한 그는 중국은 물론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요 번역가이며 불교학자였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400년 전 현장스님은 혈혈단신 아득히 먼 인도에 다다르기까지 구사일생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고 합니다. 그가 혼자 번역하거나 번역을 주재한 불교 경전만 해도 무려 1,300여 권이나 됩니다. 인도까지 가서 새로운 불교 이론과 불교 사상을 많이 가지고 돌아온 그는 법상종(法相宗)을 창설했습니다. 현장스님이 서방세계 여행에 열의를 다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서유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유기』 제8화와 제9화 사이의 부록에서, 현장스님의 출신 내력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장스님의 부친 진광예는 장원급제를 하고 승상의 여식인 은 소저가 던진 비단 공에 맞았습니다. 이 인연으로 은 소저와 혼인을 치르게 됩니다. 당 태종은 장원급제한 진광예에게 강주지부(江州知府)의 직책을 내리며 기한 내에 부임할 것을 명합니다. 진 장원은 아내와 함께 고향 해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강주로 떠났습니다. 도중에 만화점이란 곳을 지나가다 여관에서 머물게 됩니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 장원은 저잣거리에 나가 금빛 잉어를 한 마리 사왔습니다. 그런데 도마 위의 잉어가 눈을 껌벅거렸습니다. 진 장원은 이 물고기를 잡았다는 홍강(洪江)에 도로 놓아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진 장원에게 자신은 만화점에서 지내고 있을 테니 먼저 며느리인 온교를 데리고 부임지로 가라 합니다. 그래서 진 장원은 아내를 데리고 부임지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임길이 엄청난 화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유홍, 이표라는 자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홍강을 건널 때였습니다. 아리따운 온교를 보고 이들은 진광예의 종복과 진광예를 죽여 홍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유홍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두 토막을 내어 죽이겠다며 온교를 안으며 협박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사지육신이 멀쩡해야 후복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온교는 이미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에, 태중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유홍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홍은 진광예가 입던 관복을 차려 입고 임명장까지 챙긴 다음, 임신한 온교를 데리고 진광예의 이름을 사칭하여 강주로 부임해 갔습니다. 그리고 강주지부 노릇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불문에 귀의하다

홍강의 수장은 바로 금빛 잉어였던 용왕이었습니다. 용왕은 진광예의 혼백을 불러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를 돕기로 합니다. 용왕은 시체가 물속에서 수십 년 동안 머물러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해준다는 정안주(定顔珠)란 구슬을 그의 입에 물려, 훗날 넋이 돌아와 원수를 갚는 날까지 기다릴 수 있게끔 해주었습니다.


유홍이 공무 때문에 출장을 떠난 사이 온교는 아기를 낳습니다. 그녀의 귓전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아기는 관음보살께서 점지해주신 아기이니 잘 길러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진 장원이 용왕에게 구함을 받았으니 장차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요, 부자도 상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홍이 돌아와 아기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온교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고, 어린 현장의 왼쪽 새끼발가락을 한입에 물어서 끊어냈습니다. 혈서는 물결에 씻겨내려가면 아기의 종적이 묘연해져 다시 찾을 수 없지만 새끼발가락을 증거물로 남겨두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맞춰볼 생각에서였습니다.


온교가 널판에 현장을 대어 강물에 던져버립니다. 어린 현장은 금산사라는 절이 있는 곳까지 떠내려갔습니다. 절의 법명화상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를 거둡니다. 다 자란 뒤에는 그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해주고, 현장(玄奘)이란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현장스님은 학업에 정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양하면서 자랐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현장스님은 모친 온교를 찾아갔습니다. 온교는 먼저 홍주의 만화점에 가서 할머니를 만날 것과 장안에 가서 외조부 은개산 어른을 찾아 이 일을 고하고 당나라 임금께도 전해 유홍을 잡아 죽이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만화점에 도착해 할머니를 만난 현장스님은 눈이 먼 할머니에게 지난날 사정을 말씀드리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며 불경과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할머니의 눈을 핥았습니다. 할머니의 눈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도성에 도착해 외조부를 만났습니다. 외조부는 이 일을 임금께 아뢴 다음 군사 6만과 강주로 달려가 유홍과 이표를 잡아 죽였습니다.


용왕은 이 소식을 듣고 진 장원의 시신을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혼백이 몸으로 돌아온 그는 물에서 헤엄쳐 나왔고, 일가족은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온교는 정절을 잃은 몸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나 자결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조용히 자진하고 말았습니다. 


현장스님이 낙양에서 머리 깎고 승려가 된 이후,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금산사에서 수행하지도 않았고, 소설에서처럼 어머니를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조정 신하로서 최고위에 오른 외조부도 없었습니다. 그는 형님 장첩법사를 따라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줄곧 낙양에서 불경을 익혔습니다. 사찰 강좌가 열리면 현장스님은 곧바로 찾아가 강의를 들었습니다. 불교 색채가 짙은 낙양의 분위기 속에서, 현장스님은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의 학문과 수양을 쌓아나갔으며 불교학의 기초를 완전히 다졌습니다.



절망의 모래바다, 막하연적

사막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오히려 정상입니다. 가는 길 내내 표지가 될 만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별자리만을 관측하면서 이동합니다. 또 기후는 변덕이 너무 심해 별자리 관측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막은 지형 변화도 일정치 않습니다. 현장스님은 길을 잃고 나자 초조해졌습니다. 그런데 당황해서 설치는 바람에, 물을 마시려다 물주머니를 통째로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불가의 승려는 고난에 맞닥뜨렸을 때 종종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외웁니다. 현장스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 현장은 이 여행길에서 명성을 추구한 것도 아니고 재물이나 이익을 탐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지 무상의 불법을 추구하기 위해 찾아왔을 따름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괴로움과 고난을 겪는 중생을 구해내시고 보우해주셔야 하는 분입니다. 내가 이처럼 간난고초를 겪고 있는데, 보살님, 설마 당신께서 알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호소하자 드디어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머리가 맑아지고 시력도 회복되었습니다. 현장스님이 평안하게 조용히 잠들자 꿈속에서 거대한 신장(神將)이 "어째서 강행하지 않고 계속 누워 있기만 하느냐?"며 그를 꾸짖었습니다. 현장스님은 놀라 깨어났습니다. 그렇게 일어나 10리쯤 나아가자 작은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또 걷다 보니, 현장스님은 드디어 막하연적 대 사막을 성공적으로 횡단하여 이오라고 부르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신장(新疆) 동부에 위치한 그곳은 바로 지금의 신장 위구르 하미 지역 일대입니다.



적을 벗으로 만들다

현장스님이 삽말건국, 오늘날의 사마르칸트에 도착했을 무렵, 그곳은 극성기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현장스님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풍속은 매우 굳세고 사나우며, 국왕은 매우 씩씩하고 용맹스러워 이웃나라들이 그 명령을 받든다. 군사력은 강성하다.……무릇 여러 오랑캐 나라가 있는데, 이 나라가 한가운데에 있어, 그 행동거지와 위엄, 예의범절을 원근의 모든 나라가 본받는다."


그러나 이곳은 국왕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가 불교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돌궐 야브구 카간처럼 불을 섬기는 배화교를 숭배했습니다. 만일 불교를 믿는 승려가 와서 절간에 거주할 경우, 그들은 불을 놓아 쫓아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교는 어둠이기 때문에 불을 질러 사악한 기운을 몰아냈던 것입니다.


현장스님은 매우 위대한 불교 교육자로서 불교 역사상 본래 여러 가지 포교를 강조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십말건국의 임금은 감동을 받았으며,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설복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납득당한 것이라기보다 눈앞에 있는 스님, 중국에서 온 구법승의 훌륭한 풍채와 도량, 패기, 매력적인 면모에 감복된 것입니다. 국왕은 기뻐하며 불교 의식의 일종인 재계(齋戒)를 받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국왕은 현장스님에게 감화를 받은 직후, 불을 놓아 승려들을 내쫓으려고 했다는 보고를 듣자 그를 붙잡아 양손을 도끼로 찍어버리라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이런 잔인한 형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국왕에게 너무 잔혹한 형벌을 내리지 말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리하여 형장에 온 사람들 모두가 부처님의 너그러운 도량과 자비로운 법도를 절실히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국왕은 현장스님의 권고를 받아들여 방화범에게 곤장 몇 대씩 때려 도성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나라 안의 상하 군신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모두들 나그네 승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장스님에게 감화를 받은 국왕이 승려를 선발하여 도성 안에 있는 사찰에 들어가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붓다의 고향

현장스님은 4년이란 세월 동안 도보로 10여 만 리 길을 걸은 끝에, 그가 마음속에 그리던 가장 높은 학문 탐구의 성지, 날란다 사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길 내내 붓다의 유적들이 그의 발걸음을 자꾸만 잡아챘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부처님의 유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현장스님은 불교 유적을 참배하고 불교의 중요한 전설들을 기록했습니다.


1000여 리를 전진하고 나서, 그는 스라바스티에 도착했습니다. 중국의 한자어로 된 문헌에서 이곳은 사위성(舍衛城)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인도의 16개국 가운데 하나인 코살라국의 수도로서, 인도의 수많은 종교적 성지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사위성에서 보내는 동안 많은 교리를 선양했습니다. 초기 불교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원 몇 군데 중 하나인 기원정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정사는 왕사성 죽림정사와 더불어 초기 불교 역사에서 2대 정사로 꼽힙니다.


그러나 붓다가 열반하고 나서 500년 동안, 불교적으로 매우 신성한 이곳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세월 속에서 사위성은 급격한 쇠락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현장스님은 여기서 데바다타란 사람에게 주목했습니다. 데바는 하늘이란 뜻입니다. 다타는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붓다의 사촌동생입니다. 그는 붓다가 불교를 창건한 초기에 붓다가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데바다타는 다섯 가지 계율로 불교에 대항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붓다와 투쟁을 전개하면서 신도들을 쟁탈했습니다. 다섯 가지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을 때까지 누더기 옷만 입는다. 둘째, 죽을 때까지 걸식만 한다. 셋째, 죽을 때까지 한 군데 앉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넷째, 죽을 때까지 노천에서 잠을 잔다. 다섯째, 죽을 때까지 생선이나 고기와 같은 피비린내 풍기는 음식과 소금, 유제품 등을 먹지 않는다.


데바다타가 제기한 이 다섯 가지 계율은 고대 인도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고행을 숭상하고, 고행의 대가일수록 탄복하여 그 사람의 언행을 믿었습니다. 붓다 역시 처음 출가했을 때는 다른 종교가 그렇게 했듯이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도를 깨치고 나서 중도를 제창하며, 너무 지나친 고행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 이후에는 모든 신도와 승려가 고행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초기 인도의 수많은 종파가 붓다에게 불만을 가졌으며, 또 수많은 신도가 그 이유로 석가모니 붓다를 떠나 데바다타의 문하로 투신했습니다.


스라바스티를 떠난 후, 현장스님은 카필라위에 도달했습니다. 이 지역은 기원전 6세기부터 사키야 족의 집단거주지였습니다. 석가모니의 석가(釋迦)는 곧 사키야 씨족 명칭의 음역이고, 모니(牟尼)는 성인, 깨달음을 얻은 자란 뜻입니다. 사키야 족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흥성하고 발달했는데, 인도 북부와 네팔 남부 경계에 이르는 곳까지 번성하며 뻗어나갔습니다. 붓다의 진짜 이름은 싯달다 고타마입니다. 고타마는 그의 성이고, 싯달다는 모든 것이 의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붓다는 모든 정의를 이룩한 태자란 이름을 가진 셈입니다. 붓다가 살았을 무렵, 사키야 족은 가장 번성해 인구가 100만을 넘고 10여 군데에 성을 보유했습니다. 특히 붓다의 고향 카필라 성은 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도시였습니다.


5세기 초엽, 서기 400년경 법현스님은 이곳에 왔을 때 "성안에 국왕의 백성조차 없이 심히 황폐하여, 승려들과 백성들 수십 가호만 있을 따름이다"라고 기술했습니다. 거의 200년이 지나서 현장스님이 도달했을 때에는 "텅 빈 성에 터전만이 십여 군데, 황무지의 자취가 심하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일찍이 그토록 번화하던 도시에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8세기 무렵 현장스님의 뒤를 이어 혜초스님이 여기에 왔을 때는 "그 성은 이미 폐허가 되고, 탑은 있으나 승려가 없으며, 백성들도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카필라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현실은 현장스님이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 또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대하고 바랐던 휘황찬란한 붓다의 고향과 비교해볼 때 실로 그 격차가 너무나 컸으리라고 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따르랴

현장스님은 날란다 사원에서 5년 동안 유학한 후, 이란나발벌다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오늘날 인도 비하르 주 멩겔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는 도중에 비둘기 사원을 지났습니다. 비둘기 사원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산봉우리에 관자재보살상이 있었는데 이 보살상은 유독 영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장스님이 화환을 몇 개 들고 보살상에게 참배의 예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청했습니다.


첫째, "내가 여기서 시작한 학업과 구법은 이제 곧 끝나게 되는데, 만일 귀국하는 길이 평온무사할 수 있다면, 화환이 보살님의 손목에 머물기를 바란다." 둘째, "내 평생 닦은 복덕과 지혜가 나의 소원대로 내세에 미륵보살 곁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다면, 화환이 보살님의 양 팔뚝에 걸리기를 바란다." 셋째, "불교는 이 세상에 아직도 많은 사람이 불성을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 자신도 불성을 갖추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내가 불성을 갖추고 아울러 수행을 통하여 성불할 수 있게 된다면, 이 화환이 보살님의 목덜미에 멈추어서 보살님의 꽃목걸이가 되기를 바란다."


세 가지 소원을 빌고 난 뒤 화환을 보살상에 던져보았습니다. 화환들은 현장스님이 바라던 부위에 모두 걸렸습니다. 세월은 무척 빨리 지나갔습니다. 현장스님의 나이 41세였습니다. 고국을 떠난 지 벌써 10여 년이나 된 것입니다. 이 무렵 그는 승군논사에게서 학업을 닫고 있었는데, 이때 비로소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렬하게 일면서 동녘 땅으로 돌아갈 뜻을 굳혔습니다.



귀국 일화

인도에서 계속 발목 잡힌 상태로 머무르게 되자 현장스님은 마음이 다급해진 끝에, 여러 인도 국왕들에게 고언(苦言)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스러운 심경을 다 털어놓고, 거의 애걸하다시피 놓아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법을 가로막으면, 대대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즉 사람이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하게 가로막으면, 자손 대대로 눈이 없어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으로 인과응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현장스님은 임금들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자신을 억지로 붙잡아두면 고국, 즉 중국(지나국)의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을 배워 익힐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의 자손이 실명하는 업보를 받을 텐데 두렵지 않냐고 말입니다.


이 정도로 결연하게 나오니 인도의 계일왕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법사님, 당신은 어느 길로 돌아갈 생각이시오? 만일 법사님이 남쪽 바다로 길을 잡으신다면, 내가 사자를 보내 전송하리다." 바닷길은 시간과 체력 소모 측면에서 본다면, 상대적으로 여행의 안정성과 휴대물품을 운송하는 편리성에서 모두 육로보다 양호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장스님은 남몰래 국경 관문을 벗어나 서방세계로 구법여행을 떠났을 때 어째서 쉬운 바닷길로 가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현장스님이 몰래 국경 관문을 빠져나올 때, 당나라 제국은 아직 개국 초기여서 바닷길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항구를 통해 밀항하는 노선이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국경을 벗어날 당시 위험과 어려움이 더 많은 육로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인도 최강국의 임금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호송해주니, 사리로 보아 해로를 선택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하지만 현장스님은 이 호의적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해명을 했습니다.


"제가 당초 출국했을 때 당나라 서부 변방을 거쳐 왔는데, 중도에 코츠란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 임금은 부처님의 법을 매우 독실하게 믿어, 제가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왔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기뻐하면서 많은 보탬과 재물을 주었습니다. 저는 돌아갈 때 그곳에 잠시 머무르기로 그분과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온정을 어길 수 없으므로 반드시 왔던 북쪽 길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자 계일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대가 이 여행길에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되겠소?" 현장스님은 "필요한 것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계일왕은 현장스님이 도중에 쓸 수 있도록 많은 돈과 물자를 보시했습니다. 계일왕은 금화 3000잎, 은화 1만 잎, 그리고 현장스님만을 위해 코끼리 한 마리를 따로 골라 그가 당나라까지 타고 돌아갈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마침내 현장스님은 잊지 못할 구법 유학 생활을 보내왔던 인도를 떠나,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여로에 올랐습니다. 계일왕을 비롯하여 인도의 국왕들은 모두 신하를 데리고 몇 십 리나 되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흩뿌리며 헤어졌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정관 15년(서기 641년), 이때 현장스님의 나이 42세였습니다.


법사, 원적하다

당 고종 인덕 원년(서기 664년), 현장스님은 65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옥화사에서 불경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해 정월 초사흗날, 현장스님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대보적경(大寶積經)』을 번역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현장스님은 억지로 첫머리 몇 줄을 번역하고 나서 갑자기 붓을 멈췄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차분하면서도 엄숙한 눈빛으로 제자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암울한 기색으로 모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경전은 『대야반경』과 같다. 나 현장이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이것을 다시 번역하기에는 기력이 닿지 않는다. 죽을 날짜가 이미 이르렀으니, 아무래도 손에서 멀리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


정월 초파일, 현장스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현각법사가 꿈에 장엄하고도 까마득히 높은 부도(浮圖), 즉 불탑이 갑작스레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었습니다. 그는 이 꿈이 자기 신변에 무슨 사고라도 나는 징조가 아닌가 싶어, 황급히 스승인 현장스님을 찾아가서 해몽해달라고 청했습니다. 현장스님은 아주 명확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네 신상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은 내가 죽어 없어질 조짐이다."


바로 다음날, 정월 초아흐렛날, 현장스님이 집 뒤편 작은 개천을 건너다가 물구덩이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저 발목에 사소한 찰과상을 입어 살갗이 터졌을 뿐이었으나, 현장스님은 그로부터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이후 병세가 급전직하로 악화되었습니다.


정월 16일, 현장스님의 병세는 이미 심각하기 이를 데 없어 중태에 빠졌습니다. 생명이 다 끝나가는 임종 무렵, 현장스님은 일세의 고승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정력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증하는 데 아낌없이 쏟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승으로서 수행의 한 부분이었으며, 그의 과제였고 공덕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머무를 시간이 이제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명하여 이날 이때껏 완성된 불경 목록을 짜게 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번역해놓았는지 보고 싶던 것입니다. 통계를 내보니, 서방세계에서 구해 가지고 돌아온 불경 중에 아직도 582부가 미번역 상태였습니다.


현장스님은 다시 여러 승려들에게 분부하여, 자기 자신을 위한 불상 조성과 사경(寫經), 그리고 널리 보시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불교 계율에 따라 자신이 쓰던 물품을 사찰 안의 승려들에게 전부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불경 번역에 종사하던 모든 제자들을 모은 다음, 인간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내 자신의 속된 몸이 깨끗하지 못해 내 이미 혐오해왔다. 나는 이 세상에서 하려던 일을 다 마쳤으니,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 나는 현장 개인을 위해 복덕과 지혜를 닦은 것이 아니니, 내가 닦은 이 모든 것들을 인간 세상에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바란다. 나의 소원은 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미륵보살 곁에 왕생하여 미륵보살을 섬기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발원하노니, 미륵보살이 강생하실 때, 나도 그를 따라 내려와 부처님의 일을 널리 펼칠 수 있기 바란다."


이어서 며칠 동안, 현장스님은 그저 그칠 새 없이 불경을 외우며 미륵과 여래부처에게 귀의하여 미륵정토에 왕생하기만을 바랐습니다. 2월 초나흗날 밤부터 시작해서, 현장스님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그 다음으로 왼손을 길게 펴서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채, 아주 편안하게 오른편 어깨를 바닥에 대고 모로 누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명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돌아눕지 않고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스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줄곧 불경을 외워 이 세상을 떠나려고 준비하자, 그것을 본 제자가 현장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화상께서는 이미 미륵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닙니까?" 현장스님이 대답했습니다. "환생할 것이다(得生)." 이것이 이 세상에 현장스님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습니다.


당 고종은 2월 초사흗날 현장스님이 실족하여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이렛날 어의에게 치료할 약품을 들려 옥화사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의가 도착했을 때 현장스님은 벌써 호흡이 정지되어 있었습니다. 현장스님이 원적했다는 소식이 장안 도성에 두루 전해지면서, 거국적으로 애도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 고종은 "짐이 나라의 보배를 잃었구나!" 하고 애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현장스님을 위해 며칠 동안 조정을 파하기까지 했습니다.


2월 26일, 당 고종은 칙명을 내려, 현장스님의 모든 장례 비용을 조정에서 부담하도록 했습니다. 3월에는 또 명을 내려 불경 번역 작업을 잠정 중단시키고, 이미 완성된 부분은 정부에서 출자하여 초본으로 베끼게 하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은 자은사로 넘겨 잃어버리지 않게 보관시켰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후에 와서 자은사에 보관되었던 산스크리트어 경정 원서가 거의 유실되었다는 사실입니다.


4월 14일, 현장스님이 임종 직전에 한 소원에 따라, 그를 산수 강변 백록원 들판에서 장사지냈습니다. 그곳은 만년현 동남쪽 20리 떨어진 곳으로, 당시 500리 지역 안에서 달려온 장송 인파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현장 서유기』를 여기서 끝마치겠습니다. 이 강의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장스님의 일대기를 복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여러분 모두 현장스님이 1400여 년 전에 겪었던 간난고초와 역전분투, 성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현장스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정신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더욱 바랍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