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행복의 매뉴얼을 담은 많은책은 한결같이 "멜랑콜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즉, 우울증, 상실, 슬픔 등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행복의 적"으로 여긴 채 싸우고있는 것이다. 영문학과 교수인 이 책의 저자, 에릭 G. 윌슨은 상실의 감정과 우울한 정서를 포함하는 멜랑콜리야말로 사람과 문화를 이끌어가는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
멜랑콜리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인간 심리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이다. 슬픔과 상실, 그리고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기꺼이 받아들여창조적 열정을 불태웠던 19세기 예술가들의 예처럼, 멜랑콜리가 창의력의 여신이라고 말한다. 행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우울한마음을 친구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살아있는 감동과 뛰어난 통찰력, 참다운 즐거움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멜랑콜리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과 사례를 통해 삶과 세상에 담긴 모순을 유연하게받아들이려는 자세와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천착을 배울 수 있다. 저자의 행복한 삶에 대한 색다른 시선은 슬픔과 고통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는 이들에게 좋은 처방전이 될 것이다.
■ 저자 에릭 G. 윌슨(Eric G. Wilson)
노스캐롤라이나 주 웨이크 포레스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미국 인문학 센터가 수여하는 1년 과정의 펠로십과 6~7개의 중요한 상들을 받았다. 윌슨은 문학과 심리학 사이의 관계를다룬 다섯 권의 책을 출간했다.
■ 역자 조우석
저널리스트 겸 문화평론가.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화일보」 북리뷰 팀장 겸문화부장, 『중앙일보』 문화 전문 기자를 지냈다. 저서로 『박정희, 한국의 탄생』 『굿바이 클래식』 등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 『미래의저널리스트에게』 『Are You Happy? 행복의 유혹』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 광채나는 우울과 끔찍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완전한 행복의불편한 진실
오늘을 즐기는 지혜, 멜랑콜리
멜랑콜리의 멋진 세계를 체험한 천재들
멜랑콜리에 바치는 노래
끝맺는 말 - 삶은위대한 모험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고급 인문서의 한 정점
멜랑콜리 즐기기
들어가는 말 - 광채나는 우울과 끔찍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우리 시대는 모종의 불길함에 둘러싸여 있다. 뭔가 초조한 기분에 쫓겨 주변을 잠시 둘러봐도 재앙의 징후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분명치 않은 공포감을 견뎌내면서, 무엇이 우리를 짓누를까 추적해보곤 한다.
그중 하나가 지구의 앞날을 위협하는 생태학적 재앙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가 직면한 또 하나의 중대한 위협을 지적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생태학적 재앙을 포함한 모든 묵시록적 변화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하다. 그리고 인류의 너무도 소중한 문화적 원천을 날려버리고 멸종시킬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참담해질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또 다른 멸종 위기의 존재란 바로 우울증, 즉 ‘멜랑콜리(melancholia)를 말한다. 지금처럼 사회의 모든 방향에서 진행되는, 우울증과 싸워서 끝내 없애버리려는 공격이 오래 진행될 겨우, 어느 날 달콤한 슬픔이나 가벼운 상실감 같은 미묘한 심리적 경험이란 지나간 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멜랑콜리를 없애려고 하는 것일까? 슬픔을 모두 추방시켜버리고, 멜랑콜리한 감정 따위를 전부 도려내려는 추동이란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등장하는 것일까? 특히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인 미국은 모두가 멋진 꿈을 꾸고 엄청난 성공을 이루길 바라는 특유의 풍토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결정적 요소인 멜랑콜리를 참아내기는커녕, 불필요한 맹장처럼 쓰레기인 양 도려내려고 한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당연히 미국인들의 최근 사고방식과 정면에 충돌한다. 최근 한 사회 여론조사 기관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85퍼센트가 ‘나는 매우 행복하다’거나 ‘그럭저럭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심리학자들은 일에 대한 몰입과 열정, 그리고 의미를 찾는 노력 등을 통해 행복지수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종류의 다양한 치료법으로 무장한 채 진료와 상담을 해주는 심리학자들은 ‘행복의 과학’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학문의 리더로 떠오르고 있다.
행복은 세속 종교와 마찬가지이다. 도시를 장식하는 광고판들도 한결같이 행복한 삶을 전파하고 있다. 땅 위에서 구해지는 행복, 바다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 아니면 새로 구입한 자동차나 밤하늘의 별빛 아래서 만끽할 수 있는 행복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이런 종류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리 없다는 사실이다. 지구촌을 덮고 있는 하고많은 한가운데에 놓인 우리들이 도대체 어떻게 행복만을 말할 수 있을까? 멜랑콜리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떨림 혹은 흔들림에 다름 아닌데, 그것이 완전히 멸종된다면 인간이 추구해온 장대한 소망이라는 탑은 어느 날 갑자기 휘청거리며 무너지지 않을까?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함께 교차하는 인간 삶의 교향곡은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리지 않을까?
나의 이런 걱정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노이로제가 섞인 불평불만에 불과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두려움의 맨 밑바닥까지 들여다볼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판단해볼 때, 내가 품고 있는 이러한 두려움은 타당하다. 이런 직감은 현재 압도적인 주류를 이루는 미국적 행복이란 너무도 빤하고 진부한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이런 행복이란 사실 겁쟁이의 행복이므로 슬픔과 상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무시해버린다.
미리 밝혀둘 점은 나의 이런 진단이란 다분히 미국식 행복과 이를 둘러싼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라는 점이다. 또 나는 행복에 대한 외곬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의 즐거움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오랜 수난과 고통에서 막 벗어난 사람이 짜릿하게 맛보고 있는 환희에 대해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하고 싶은 대목이 또 있다. 이 책은 멜랑콜리나 상실의 감정, 슬픔과 우울한 마음이 갖는 가치를 옹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료받아야 할 병적인 우울증세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며 찬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고, 이 책에서 던지는 의문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행복 앞으로!”를 외쳐온 미국적인 열광에 취해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집단적인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 진솔하게 삶을 영위하며, 현실을 직시하면서 뛰는 가슴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는 점차 로봇을 닮아가면서, 인위적인 방식으로, 너무도 예측 가능한 선에서만 움직인다. 잘 짜인 행복의 방정식에 맞춰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방긋거리며 만족의 통념에 갇혀 살아간다. 그 결과 낮과 밤, 삶과 죽음, 빛과 그늘처럼 존재하는 아주 중요한 우주의 리듬을 모를뿐더러 다음의 두 가지 요소들도 아우르지 못한다. 이를테면 ‘광채나는 우울’과 ‘끔찍한 아름다움’ 같은 아이러니의 감각을 잘 모른다.
완전한 행복의 불편한 진실
“행복, 너를 거머쥐고야 말겠어.” 그런 행복주의는 한때의 추세가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지복을 누리려는 욕구이다. 멜랑콜리, 즉 상실과 슬픔의 정서를 팽개친 채 ‘고통 없는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을 감지하고 있다. 왜 위험한가? 우선 눈앞의 현실에 눈을 감기 때문이고,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대극적 요소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끔찍하면서도 풍부한 삶의 드라마에 등을 돌린 채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맹목적 행복주의,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 대한 외면의 결과는 무엇일까? 좋고 기쁜 것만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이 남길 부정적 측면은 무엇일까?
본래 세상과 우주는 인간만의 행복과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친절하고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이런 생각은 노자와 장자의 유명한천지불인(天地不人) 철학과 닮았다. 천지불인은 세상과 천지가 인간을 특별히 배려해 돌아간다는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우주관이다]. 그런데도 우주란 나를 위해 돌아간다는 오만함,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에 갇혀 살 경우 이질적이고 풍부한 뉘앙스를 가진 채 굽이쳐 돌아가는 거대한 우주는 아주 작은 미니어처로 변하거나, 아니면 증발될 것이다. 그 안에서는 어떤 것을 보거나 경험할지라도 내 눈의 안경으로 해석하거나, 아전인수 격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듯 보이면서도, 저쪽이 없으면 이쪽도 없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의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균형의 과정도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어느 순간 슬픔, 상실, 그리고 멜랑콜리란 불완전하며 따라서 추방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기는커녕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자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도 알아챈다. 이제부터는 행복에 대한 생각 자체가 바뀐다. 행복이란 어떤 이상적인 형태나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다. 행복이란 한없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서부터 상실과 슬픔에 이르는 또 다른 순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마련인 삶의 모든 과정을 커다란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행복과 함께 행복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어느 순간 버리는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원제(原題)인 ‘진정한 행복에 반대하는(Against Happiness) 태도가 아니라 ’소박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려는(Near Happiness) 몸짓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수백만, 수천 만 명의 미국인들이 따른 것은 브래드퍼드와 프랭클린 식의 행복 모델이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그 반대되는 행복 모델을 실험한 사람들도 미국 문화의 한 전통의 맥을 이어왔다. 그들은 행복에 목을 매는 태도를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저속하다고 본다. 대신 슬픔, 상실, 그리고 멜랑콜리를 끌어안는 태도야말로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삶의 태도라고 규정한다. 이런 행복의 대안 모델은 미국 문화에서 작지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소설 『모디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을 기억해야 한다.
『모디 딕』을 발표한 후에도 작가로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암중모색하던 멜빌이 처해 있던 1856년의 상황을 살펴보자. 그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작가로서의 명성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던 시기였다. 대책 없던 문학청년, 그것이 당시 멜빌의 모습이었다. 세상을 향해 토해낸 작가로서의 시도가 싸늘한 반응을 얻는 데 그치자, 멜빌은 고대 문명이 시작된 황량한 사막을 찾는 어려운 여행을 스스로 찾아간 것이었다. 당시 그의 심정은 모비 딕을 쫓는 에이허브 선장의 젊은 선원 이스마엘과 같았으리라.
소설 속 화자(話者)이자 젊은 항해사로 등장하는 이스마엘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에서 포경선에 올라탔듯이, 멜빌도 거칠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모래언덕에서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며 생존을 시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멜랑콜리 기질이란, 누구나 안전하고 분명하다고 믿기 마련인 세상의 통념 혹은 진리에 쉽게 안주할 수 없는 정신, 바로 그것이다. 멜빌이 창조한 인물인 이스마엘도 그런 사람이다. 멜빌이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놓은 셈이다. 실제로 이스마엘이 포경선에 올라타는 모험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멜랑콜리한 성격이 작용했다. 험한 항해에 시달리면서 이스마엘이 끙끙거린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우주의 실제는 어떠하며, 그 깊이와 신비는 무엇이고, 숨겨진 계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 와중에 그가 던진 질문의 요체란 상실, 슬픔, 그리고 멜랑콜리와 사려 깊음 사이의 함수관계로 요약된다.
멜빌에게서 배우는 교훈은 적지 않다. 말하자면 슬픔과 상실의 정서라는 매개항(媒介項)을 통해 자신, 그리고 눈앞의 거친 현실 사이에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슬픔을 통해 현실 세계의 강물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현실에 몸을 맡기는 순간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스릴 있고 의미 넘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의 심장은 빠르게 뛴다. 굳센 신념과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의구심 사이에서 흔들릴 수 있는 멋진 순간이다. 쉽게 안정되지 않는 당신을 향해 슬픔과 멜랑콜리가 저 멀리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조금 불완전함 속에서 고통을 겪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네.” 슬픔과 멜랑콜리는 여전히 음울한 분위기를 벗어자니 못한 당신에게 미처 못다 한 말도 던져준다. “지금의 이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그렇게 어둠과 몸을 마주 대고 있노라면 점차 환한 빛이 보일 걸세.”
슬픔과 비탄에 조용히 젖어 있을 때 마음 저편에서 즐거운 생각의 한 자락이 솟지 않던가? 사실 우리 모두 다 슬픔에 무릎을 꿇는 순간들을 경험해보았으리라. 그 순간은 슬픔을 떼어내려고 버둥대지 않을 때, 즉 더 이상의 싸움을 접는 순간이다. 그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활력이 샘솟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힘이다. 그때가 삶의 결정적인 흐름이자 가장 심층에 해당하는 멜랑콜리에 접속되는 순간이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의 기분이란 무한한 행복에 겨워한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비극적 즐거움에 더 가깝다. 진정한 삶을 만나는 경험인 것이다.
그 때문에 최악의 비극이라는 비극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역설이지만 행복만을 끌어안으려고 한다면 삶에 대한 증오만이 남는 법이다. 세상에 없는 평화와 안정만을 애써 찾으려고 할 경우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과 거부로 이어진다. 멜랑콜리 혹은 슬픔이란 새로운 승화를 위한 실마리이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의 가슴이 덥혀질 것이다.
오늘을 즐기는 지혜, 멜랑콜리
멜랑콜리나 슬픔을 겪으면서 사람은 훌쩍 성장할 수도 있는 법이다.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낯선 세상에 툭 던져진 느낌, 똑같은 힘으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두 가지 힘 사이에 낀 채 엉거주춤 놓여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우주 안에서 그렇게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는 자각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다. 즉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의 조건이 그것인데, 그것을 깨우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큰 소득이다.
즉 때때로 마주치는 소외의 느낌, 이렇게 닫힌 소외의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두려움과 불안이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책임지라는 요청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진실한 모습으로 삶과 마주하라는 초대장이다. 그것은 일종의 위기가 분명하지만, 동시에 좋은 위기이다. 기회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떨쳐내고, 삶에서 진정 귀중한 요소에 눈이 열릴 수 있는 분기점이다.
이런저런 다양한 소외의 느낌, 문득 멍-해지는 식으로 찾아오는 순간적인 마비, 그리고 엄습하는 불안 등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경험이란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한 줄기 바람이다. 궁극적인 내 모습을 만나는 계기이자, 나라는 존재와 접속하는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만약 지금의 내가 슬프고 멜랑콜리하다면, 주변과의 사이에 모종의 틈이 생겼음을 뜻한다. 어느 순간 멜랑콜리에 사로잡혔을 경우 당신은 주변의 사무용 집기나 가전제품 같은 살림살이는 물론 일가친척들까지 서걱거리거나 멀리 있다는 느낌부터 받을 것이다. 예전처럼 살갑게 느껴지지 않는 돌연한 순간인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동안 닻을 내려왔던 익숙한 그곳을 떠나 내면을 들여다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깨닫는 것은 결국 나는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단지 나일뿐이다. 나만의 유일한 잠재력, 지평을 발견해야 한다. 내 삶을 살아야 하고, 나만의 고유한 죽음과 만나야 한다. 누구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다.
이런 것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란다. 일단 나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어차피 제한된 인생임이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기회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을 끌어안은 채 삶, 그 안으로 분연히 들어가는 것이다. 본디 유한한 삶의 조건을 받아들인 채 존재와 삶의 무한함을 향해 두 발을 감히 내딛는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생각이란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흥분과 함께 자유를 안겨주기 위한 것이다. 즉, 나의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죽음이란 시들고 썩어버리거나, 종국에 도달한 파멸이 아니다. 죽음이란 주어진 삶을 새롭게 살라는 제안을 담은 초청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잡다한 운명을 넘치는 생기와 풍부한 유머 감각을 동원해 받아들이고 돌파하라는 제안이다. 죽음이란 다가오지 않은 미래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낚아챌 기회이다. “오늘을 즐겨라(carpediem)"는 제안이다. 이런 지혜를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19세기 미국 시인 월터 휘트먼이다.
”어서 오라. 사랑스럽고 편안한 죽음이여!“라고 노래했던 그가 볼 때 죽음이란 ”끊임없이 요람을 흔드는 손“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는 뜻인데, 그런 죽음이란 달콤하면서도 낮은 목소리이다. 그것은 큰 바다의 출렁임처럼 우리를 늘 깨어 있도록 만든다. 또 젊은 시절의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온 힘을 다해 멋진 삶의 노래를 부르라는 주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에 어디를 가나 보는 것은 가면을 쓴 모습이다. 행복한 얼굴이라는 분칠, 그리고 그 아래에 보톡스로 잘 다듬어진 얼굴이 보인다. 도시의 대로를 걸을 때 마주치는 것은 매끄러운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뿐이고, 그만의 실존과 분위기를 담고 있는 얼굴을 만나기는 힘들다. 어쨌거나 행복한 그들의 표정에서 우리 시대에 훌륭하게 적응한 표본을 볼 뿐이다. 무표정을 넘어 때때로 거의 금속 냄새를 풍기는 외모에서는 세상살이에서 오는 고투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장식된 표정 앞에서는 질끈 눈을 감고 싶을 정도이다. 더 나쁜 경우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종류의 위인인지 조금 알 경우이다. 그는 아마도 껍데기, 내용 없는 사람에 속할 것이다.
본래 거칠거칠하면서 울퉁불퉁한 것이 세상인데, 그것을 매끈하게 만드는 데 여념이 없는 요즘의 우리는 잠시 탈출을 감행하고 싶어진다. 다듬어지지 않은 세상, 조금은 얼룩도 있고 지저분하지만 그래서 자연스러운 세상 속에 잠시라도 자신을 놓아두고 싶은 것이다. 이사 다니면서 여기저기 찢기고 얼레덜레한 모습으로 다락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흑백사진들을 꺼내 오래 된 얼굴들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싶어진다. 간만에 어디 후미진 곳의 방치된 도로를 찾아 오랫동안 달리고 싶어진다. 허먼 멜빌처럼 사람 뼈가 여기저기 널린 황량한 사막을 횡단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런 탈출을 감행하는 날의 밤 깊은 시각에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욕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다소 슬프고 음울한 표정이다. 당연하다. 행복 나라에서 탈출한 결과 자연스러움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억지웃음으로 잠시 되돌아가 본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이윽고 정상적인 얼굴 표정을 되찾는다. 그렇다. 조금은 음울한 모습, 그것이 진정 아름다움이 스민 우리의 얼굴임을 깨닫는다.
끝맺는 말 - 삶은 위대한 모험
지금 미국 사회를 살펴보면 15퍼센트의 사람들이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응답한다. 물론 멜랑콜리맨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다양한 심리치료나 알약의 도움 아래 조만간 ‘치유’될 것이고, 그러면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행복을 모르는 이들은 사회에서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멜랑콜리한 정서, 멜랑콜리한 기질 자체가 인간의 역사에서 멸종되는 순간이리라.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 아닐까? 향유고래나 검독수리 등 희귀종의 멸종에 비견할 만한, 아니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마음 생태계의 교란’이 아닐까? 만약 그런 세상이 온다면 우리 모두는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상황에 만족한 채 로봇처럼 살아갈 것이다. 어디를 가나 자기만족에서 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채 벙글거리며 사는 곳, 그러나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을 곳이다. 그곳은 SF소설가 필립 K. 딕(Philip K. Dick, 1928~82,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의 원작자로, 주로 음울한 미래상을 전하는 SF 소실 및 단편소설을 남겼다)이 묘사했던 또 다른 지옥인 폴리애나가 아닐까? 폴리애나에서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이 등장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지루한 삶이 되풀이된다. 왜 우리는 지금 이 멀쩡한 세상을 굳이 폴리애나로 만들려고 노력할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런 헛된 노력이란 모종의 공포심 때문에 생기지 않을까 싶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일 얼굴 뒤에 진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다. 세상이 가진 복잡성과 애매모호함,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정면에서 마주 보기가 실로 두려운 것이다. 그들이 자기 얼굴에 그려놓은 거짓웃음 뒤에 내내 숨어 살 경우 끝내 올라설 수 없는 곳이 무수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숨 쉬는 공간인 ‘삶의 불안정성’이라는 무대이다. 또 그들은 고통에 가슴 졸이는 순간도 만날 수 없는데, 실은 그때야말로 우리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아니던가.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이런 상황에서 도피하고 있다. 항상 벙글거리는 대중의 무리에 들어가 끝내 자기를 잃어버리는 선택을 하고 있다. 불안과 슬픔이 더 이상 자기의 꽁무니를 밟지 않겠지 하는 헛된 소망을 품는 것이다.
어쨌거나 ‘행복 완전 정복’만을 부추기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실은 두려움에 떠는 풍토를 만든다. 어쨌거나 단순한 즐거움에 빠져 진정한 삶의 지혜와 용기를 포기할 것인가? 그것을 되물을 때가 지금이다. 우리가 뿌리쳐야 헐 것은 무늬만 그럴싸한 행복, 공허한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가 뻗쳐오는 은밀한 유혹의 손길이다. 지금이야말로 슬픔의 정서, 멜랑콜리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무리 우울하고 뚱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가 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미국식 행복에 반대한다는 것, 손쉬운 자기만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즐거움으로 다가가는 일이자, 결국 짜릿한 황홀경을 끌어안는 일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이라는 삶을 찾아 나서라는 초대장이다. 파편에 불과한 삶이라는 것도 실은 놀라운 자유를 뜻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