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

   
일까 따이팔레(역자: 조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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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2��



>& ■ 책 소개
세계경제포럼(WFF) 발표국가경쟁력 1위, OECD 발표 학업성취도 국제학력평가(PISA) 1위, 국제투명성기구(TI) 선정 반부패지수 1위. 이는 최근 몇 년간 언론을장식한 핀란드의 성공을 대변하는 수치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는 이상적인 나라로만 비춰지는 핀란드라는 나라의 번영의 비밀은 무엇이며, 그원천이 된 사회적 혁신은 무엇인가? 

소소한 일상생활의창안부터 국가행정을 움직이는 시스템까지, 핀란드 최고 전문가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를 만든 핀란드의 100가지 사회적 창안과아이디어를 이야기한다. 어느 한 부분에 특별히 가중치를 부여하지 않고, 크고 작은 제도와 문화와 의식과 아이디어들을 같은 깊이로 고르게포착함으로써, 핀란드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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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일까 따이팔레

1942년 핀란드 헬싱키 출생. 1960년대 학생운동 리더로서명성을 얻었고, 헬싱키 의과대학 졸업 후 내과 전문의로서 주로 각급 병원 내과과장, 원장 등을 역임했다. 1980~86년 ‘핀란드 평화연맹’사무총장, 1997~98년 보건사회부 행정차관을 지냈고, 1971~75년 및 2000~07년 의회 의원(3선) 역임. 현재 헬싱키 대학교수로서(의학 박사) 강의, 자문, 사회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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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조정주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외교관인 부군(이호진 주핀란드한국 대사)을 따라 미국(워싱턴, 뉴욕 UN), 필리핀,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 등 해외에서 생활했다. 2006~07년 글로벌 교육멘토링프로그램인 바틱코리아(Batiq Korea) 교육컨설턴트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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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제1부 국가행정
1. 여성 정치참여 | 2. 헌법 위원회 | 3. 미래위원회 | 4. 지방 자치정부 | 5. ‘연립정부’ 전통 | 6. 3자주의 (노-사-정 위원회) | 7. 여성의 선거권과 40% 할당제 | 8.부정부패 척결 | 9. 이중 공용어 제도 | 10. 올란드섬 | 11. 사미족 | 12. 북방 차원(NorthernDimension)& 

제2부사회정책
13. 사회주택 | 14. 슬럼가 지역이 없다 | 15. Y - 재단 | 16. 학생주택 | 17. 24시간서비스 주택 | 18. 집시(Gypsi)족의 지위 | 19. 주택회사 모델 | 20. 고용(실업)연금 제도 | 21. 어린이 탁아서비스 |22. 가정양육 수당 | 23. 아빠 육아 휴가 | 24. 무료 산모 육아용품 | 25. 무료 학교급식 | 26. 참전 상이용사 후생복지 |27. 어빌리스 재단 | 28. 가정간호 수당 | 29. STAKES | 30. 빈곤 퇴치 | 31. 대출조정과 보증 재단 | 32. 사회신용대출 제도 | 33. 주류판매 국가독점 | 34. ‘11월 운동’ | 35. 3% 이론 | 36. 법률 구조, 범죄피해 보상 | 37. 형사사건중재 제도

제3부국민보건
38. 지역 보건센터 | 39. 임산부와 아동 클리닉 | 40. 대학생 보건진료 재단 | 41. 직업보건 연구소| 42.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절반으로 | 43. 북 까렐리아 프로젝트 | 44. 정신분열증 진료 프로젝트 | 45. 자살예방 국가 프로젝트 |46. 성병 통제 | 47. 담배관련 입법과 소송 | 48. 자일리톨(Xylitol) | 49. 실증 의료지침서

제4부 문화와 교육
50. 핀란드 문학협회 |51. 도서관은 생활의 일부 | 52. 핀란드 ‘종합학교’ | 53. 무상 고등교육 제도 | 54. 핀란드학생들의 학업능력 | 55. 대학교지방분산 | 56. SITRA(국가 연구발전기금) | 57. TEKES(기술혁신 지원청) | 58. 음악 학교 | 59. 성인 교육 | 60.문화단체 정부지원 | 61. 이야기 대화법(Story-craf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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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지방과 시민사회
62. 또르니오-하빠란다 쌍둥이 도시 | 63. 지역 결연원조운동 | 64. 비무장 올란드(Aland) 섬 | 65. 까렐리아 주민 재정착 | 66. 핀란드 비폭력 저항운동 | 67. 단체 공화국 |68. 핀란드 슬롯머신협회 | 69. 노동조합 결성 | 70. 정당 보조금 지원 | 71. 학생회 경제 자치 | 72. 핀란드 청년협조동맹 |73. 핀란드 여성단체연맹 | 74. 개발협력 봉사센터 | 75. 1퍼센트 운동 | 76. 가능성의 시장 | 77. 평화 정거장 | 78.프로메테우스 캠프와 청소년 철학모임 | 79. 공동책임 운동 | 80. ‘단식의 날’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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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일상생활
81. 리눅스 (Linux) | 82.문자메세지 서비스(SMS) | 83. 인터넷 실시간 채팅 | 84. 화염병(Molotov Cocktail) | 85. 핀란드식 품앗이딸꼬(Talkoot) | 86. 사우나(Sauna) | 87. 산타클로스(Santa Claus) | 88. 세우라사아리 섬 성탄절 길 | 89.핀란드 탱고 | 90. 핀란드 가라오께 | 91. 숲에서 나온 빵 뻬뚜(Pettu) | 92. HK 블루 소시지 | 93. 만인의 권리 |94. 얼음낚시 | 95. 얼음수영 | 96. 핀란드 스포츠 뻬새빨로 | 97. 여성 10Km 취미 달리기 | 98. 노르딕 워킹 | 99.식기건조 캐비닛 | 100. 아프리카의 별





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

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

 

핀란드 대통령 추천사 - 참신한 눈으로 세계를 보자

지금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의 도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시야를 더 넓혀야 합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핀란드도 새로운 창안을 촉진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방법과 제도를 창조해왔습니다. 성공이란 것이 과학이나 기술 발명으로만 이루어지진 않지만, 과학과 기술이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핀란드의 경쟁력과 생활수준은 북유럽 복지사회 모델 덕택입니다. 이는 각 개인의 노력과 자기계발을 북돋아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원조를 가능케 해줍니다. 민주주의, 인권 존중, 입헌국가의 원칙들, 그리고 올바른 정치 등은 견고한 사회의 기반입니다. 핀란드에서는 국가와 지방정부가 사회복지, 보건, 교육과 연구개발에서 긴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민들 또한 스스로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에 가입해 선구자로, 또 봉사활동 참여자로 제반 사회제도를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북유럽 5개국 모두 경쟁력, 지속적인 개발, 국가청렴도 등의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다양하고 흥미로운 핀란드의 사회적 창안 100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핀란드 사회가 기능하는 모습을 통찰하게 해주는 이 책에서 독자들은 다른 나라에도 적용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사회적 창안 상당수는 보편성을 띠고 있지만, 재미있고 색다른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사회적 창안들 다수는 핀란드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실행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화 과정에서 우리가 대처해야 할 도전은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에 맞는 새로운 창안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미래를 향한 우리의 목표는 복지사회에 경쟁력을 더하는 일이며, 이 두 개념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 관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책은 독자 여러분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 많이 솟아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참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1부 국가행정

여성의 선거권과 40% 할당제

그동안 핀란드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증가했지만 정치세계에서는 오랫동안 남녀의 영역이 구분되어왔다. 여성의 영역은 주로 사회문제, 보건, 교육 분야였지만 핀란드 여성들은 국방부, 재무부와 같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분야에서도 성공적으로 일해왔다. 실제로 여성들은 의사결정자로, 전문가로 남성과 똑같은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경제 분야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핀란드의 여성운동은 보통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1905년 여성 근로자들은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그것은 바로 핀란드 여성들이 공직 선거에 관한 참정권을 획득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와 함께 핀란드는 대의정치제도를 네 개의 사회계급에 따라 구성되었던 계급의회를 혁파하고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단원제 의회로 바꾸었다. 처음 실시된 의원 선거에서 19명의 여성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전체 의원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정치권력이 점점 여성들에게 집중되면서 핀란드 사람들은 2000년 대선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 후보 따르야 할로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재선에 나선 2006년에도 그녀를 선택했다. 리이따 우오수까이넨은 1994년부터 2002년까지 8년 동안 최초의 여성 의장을 지냈고, 안넬리 얘떼엔매끼는 2003년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되었다. 빠아보 립뽀넨 총리의 제2기 정부가 시작된 1995년에는 장관급 직위를 차지한 여성의 비율이 내각의 40퍼센트를 넘었으며, 드디어 2003년 얘떼엔매끼 총리는 처음으로 남녀 장관의 수가 똑같은 내각을 구성했다.


의회의 경우 여성 의원의 비율이 꽤 오랫동안 낮은 숫자를 이어오다가 1962년부터 1992년까지는 13.5퍼센트에서 38.5퍼센트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런데 2007년 총선에서 의회에 진출한 여성은 41.5%에 이르렀다. 여성 의원 할당제 없이도 총선에서 여성 의원 당선율은 계속 증가했다. 지방선거에서도 여성의 진출이 꾸준히 늘어났는데, 2008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당선된 시의원 중 여성은 40.9%를 차지했다.


핀란드에서는 1995년 이후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간접 선출되는 의사결정기구에 성별 할당제가 적용되고 있다. 일반원칙으로 양성평등을 위해 어느 성별이라도 최소한 40퍼센트 이상의 대표 진출이 요구된다. 그 밖에도 양성의 균형이 의무화되고 있는 기관이 많다. 중앙 또는 지방정부가 대주주인 회사의 의사회, 집행의사회 등의 의결 또는 집행기구들이 이에 속한다. 현재의 반하넨 총리 정부 역시 국영기업의 이사회를 구성할 때 여성의 비율을 늘려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경제 분야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문제는 단연코 경제적 이해관계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민간기업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안이다.



제2부 사회정책

사회주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에서는 주택이 크게 부족했으며, 사회의 구조적 변화로 인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증가하면서 주택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와 함께 일반 은행들이 자금 대출 가능성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9년 아라바(ARAVA)라는 주택공급공사를 설치하고, 소위 사회주택(Social Housing)을 건축/공급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시중 은행들이 위험성이 높은 2순위 대출을 매우 꺼렸기 때문에 아라바 제도는 대출을 핵심 기능으로 채택했다. 초기에는 국가예산에서 자금이 지원되었지만 1990년대부터는 일반 금융시장이 공급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 제도는 건축주가 자신이 살아갈 집을 짓는 경우에 융자를 제공했다. 이러한 주택정책 목표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에게 주택 구입에 앞서 자금을 저축하도록 장려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지속적인 경제 발전과 은행 시스템 강화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매우 중요한 방안이었다.


우선 합리적인 이자율로 공공대출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적인 구상이었다. 이 제도는 중산층과 저소득 봉급생활자들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결과 자가 소유 주택의 비율이 비교적 빠르게 상승해 전체 주택 중 70퍼센트를 웃돌게 되었다. 이 제도는 수십만 핀란드 사람들의 사회적 안정과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핀란드에서 교육제도와 더불어 평등사회 구축을 목표로 하는 정부 정책의 가장 중요한 기둥 중 하나가 되어왔다.

아라바 시스템은 주택의 품질과 새 주택단지 지역의 기능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주택 건축의 질과 비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아이디어는 새로 조성하는 주거단지와 동네는 다양한 사회적 구조를 갖추도록 건설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모든 주거지역은 보조금 지원 건축과 그렇지 않은 건축이 동시에 포함되어야 하고, 건물 형태도 다양하게 분산되어야 한다는 계획상의 원칙을 세웠다. 아파트 건물은 비교적 낮게, 거의 예외 없이 3층 또는 4층 규모로 건축되게 했다.


아라바 주택이 품질 대비 가격이 저렴한 점과 다른 주택보다 융자가 저렴한 점을 감안하면, 최고 구매자뿐만 아니라 범위를 더 넓혀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뒤에 이사 오는 사람들에게도 합리적인 가격의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원칙이 정해졌다. 아라바 제도에 의해 소유/거주하는 주택은 지자체(시/군) 당국이나 지자체가 정해준 매입자에게만 팔 수 있고, 주택가치 상승분을 제외하고 물가 상승분만 적용된 가격으로 매매하게 했다. 이러한 관행은 매도인이 매수인을 선택할 수 있을 때 항상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불법적 가격의 거래를 뿌리 뽑았다.


1980년대 말 이후 핀란드의 금융제도가 완화되었을 때 아라바 제도에 개혁이 이루어졌다. 일종의 회전자금으로서 핀란드 주택기금 창설이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였다. 이 기금은 수입이자와 분할상환금을 기금의 소득으로 재사용되게 하는 모델이었다. 또한 이 기금은 일반 금융 또는 자본시장으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이자 보조금 대출이 기금의 직접대출을 대체하는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자 보조금 모델의 경우, 주택기금은 개발업자에게 제공하는 상업대출에 대해 이자 보조금을 주는 제도다. 이렇게 대출 이율 혜택을 받으려면 공개입찰에 참여해야 가능하다.


아라바 제도로 건축된 주택 중 절반 정도가 자가 소유 주택이고, 나머지 절반은 임대주택이었다. 전체 주책 중 약 17퍼센트가 아라바 임대주택이다. 임대주책 중 60퍼센트 이상을 지자체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비영리 단체가 소유하고 있다. 이들 비영리 단체 중 일부는 노년층, 학생, 그리고 빈곤층의 주거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아빠 육아 휴가

핀란드에서 아빠의 육아휴가 권리는 새로운 남녀평등의 문제를 포함해 10년 넘게 토의된 후 1978년부터 부여되었다. 1985년 출산수당이 엄마의 동의하에 아빠도 일부 받을 수 있는 부모육아수당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에는 더 많은 아빠들이 이 혜택을 받도록 제도가 개혁되기도 했다.


핀란드에서 부모육아수당은 근무일(working day) 263일간의 휴가 기간에 대해 지급된다. 처음 105일(출산휴가)은 엄마에게(출산수당) 지급되고, 이후 158일은 부모의 육아휴가 기간으로 엄마 또는 아빠에게 지급된다.


이 부모육아수당 지급 기간 동안 아빠는 18일까지 휴가를 받을 권리(아빠 육아휴가)가 주어진다. 이것은 엄마 출산휴가 또는 부모 육아휴가 둘 중 어느 기간에라도 쓸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아빠 육아휴가 이용률은 일정 수준에 머물고 있는데, 아빠가 되는 남자들 중 약 3분의 2가 아빠 육아휴가를 택했다. 2003년 통계로는 약 4만 4,500명이 아빠육아수당을 청구했고, 평균 휴가 기간은 14일이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빠들이 주어진 휴가 기간을 모두 사용하지 않는 건 육아수당이 같은 기간 동안 직장에서 받는 소득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신의 경력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연속되어야 하는 업무적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설문에 응한 아빠들이 지적한 내용이다.


나 역시 빠아보 립뽀넨 총리 정부에서(립뽀넨 총리 자신도 아빠 육아휴가를 사용했다) 법무부 장관을 맡고 있을 때 두 번이나 아빠 육아휴가를 받아 흔쾌히 다녀온 적이 있다. 두 딸이 태어났을 때 나는 곧바로 1주일간 아빠 육아휴가에 며칠을 더 합해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부모로서 동등한 자격을 갖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한다.



제3부 국민보건

자살예방 국가 프로젝트

자살은 국민보건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다. 세계적으로 매년 약 100만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데 유럽 전체에서는 10만 명 이상, 유럽연합 국가에서는 약 6만 명, 그리고 북유럽 4개국에서는 약 4,000명이 매년 자살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4년 핀란드의 자살 사망률은 10만 명당 20.4명이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라는 범국가적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했다. 자살 예방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 이미 여러 해 동안 핀란드에서 발생한 모든 자살사건을 철저히 조사 연구했다. 조사원들이 수천 시간을 보내며 1,397건의 자살사건에 대한 심리학적 부검 보고서를 완성하고 의료 및 사회보장지원 기록, 경찰 기록을 수집했으며 자살자의 의사, 간호사, 친구, 가족, 고용주 등을 면담해 각각의 자살사건을 둘러싼 정황들을 파악했다.


이러한 야심적인 프로그램의 틀 안에서 자살에 대한 연구와 예방노력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극도의 자살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한 일련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취해진 종합적인 노력으로,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첫 시도였다.


핀란드에서 이 국가적 프로그램은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시행되었고, 국제 비교그룹에 의해 1996~1998년간 비교평가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프로그램 시행 기간 동안 자살 사망률이 15퍼센트 감소했고, 이러한 하향 추세가 이어져 최고점이었던 1990년 10만 명당 30.3명에서 2004년 20.4명으로 30퍼센트 이상 감소했다. 이것은 약 50년 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종합적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통해 195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계속 증가했던 자살 사망률이 성공적으로 역전될 수 있었다.


현재 자살을 예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조치로는 의사들을 교육시키는 방법, 약이나 무기와 같은 자살 수단을 제한하는 방안, 문지기(gatekeeper) 교육 등이 있다. 리튬과 항우울증 약을 처방하는 약리적 치료와 심리치료도 어느 정도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개별심사 프로그램은 학교나 학생들 사이에서 누가 자살 위험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를 가려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제4부 문화와 교육

핀란드 종합학교

한 세기가 넘도록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초/중등을 통합하는 기본교육제도를 꿈꿔왔는데, 농업국가 핀란드가 산업화의 길을 급격히 걷던 1960년대 들어 그에 필요한 조건들이 성숙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국제적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했고, 질 좋은 상품을 생산하려면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했다. 동시에 북유럽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목표를 이루려면 공공 부문에서도 높은 교육을 받은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서비스 부문이 급격히 확대되어 사람들은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서비스 사회에 대해서도 논의하기 시작했다. 사회를 역동적으로 발전시키려면 가능한 한 모든 재능을 활용해야 했다.


핀란드에서 경제적인 요인 외에도 사회적 평등이 정치의 핵심 목표로 떠오른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1960년대 중반쯤 사회민주당은 중도당의 지지를 얻어 9년간의 통합적 기본교육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기반을 형성했다. 1968년 의회는 모든 아동과 청소년이 주거지와 부모의 재산 정도에 상관없이 높은 수준의 기본교육이자 의무교육을 9년 동안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켜 9년제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를 탄생시켰다. 1969년 이전에는 기본교육이 4년에 그쳤고, 4년 과정을 마친 졸업생들은 5년제 중등학교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입법 과정에서 가장 긴요했던 점은 양질의 기본교육을 인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개혁에 따라 신체장애나 정신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지적인 성장발달의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종합학교는 한 세대의 모든 아이를 위한 학교가 되었다.


기본교육을 시행하고 발전시키는 책임은 엄격하게 지방자치단체에 주어져 있다. 이것은 교육이 기초 서비스 중 하나로서 갖는 핵심적인 의미를 부각시켜준다. 교육과 관련된 모든 결정이 지역 주민들과 가까운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방자치와 국민교육의 관계 역사는 1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핀란드에는 450개에 이르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각 지방의 학교 운영에 수천 명의 학부모가 관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종합학교는 가장 핀란드적인 국민의 힘이며, 지역별 토착 민주주의의 원칙을 실현하고 있다.


종합학교는 오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으며, 교육이 사회의 정치/문화/경제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제적인 비교연구에서 핀란드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여러 요인이 합쳐져 이뤄진 결과다.


초/중등학교를 통합한 종합학교는 훌륭한 핀란드의 사회적 창안사례다. 양극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오늘날 사회에서 국민들을 통합해주는 요소로 더욱 중요하기까지 하다. 종합학교는 국민들의 정체성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국제적/문화적 상호교류를 촉진하기도 한다.


현재 종합학교는 핀란드의 일류 교육제도를 말해주는 표상이 되고 있다. 또한 상급 직업고등학교와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훌륭한 기초를 닦아준다. 정치, 문화, 그리고 경제적인 환경요인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만큼 종합학교의 발전을 위한 노력도 지속될 것이다. 까리 우우시뀔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학교는 매일 새로이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제5부 지방과 시민사회

1퍼센트 운동

1978년 가을, 핀란드 남부에 위치한 엠마우스 마을은 핀란드의 개발도상국 개발원조 수준이 너무 낮은 데 항의하며 2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공동체 마을의 후원자들이 회의를 열어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단식투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참여자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치적 차원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후원자들의 집회에서 1퍼센트 운동이 구상되었고 1979년 늦가을 정식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운동은 핀란드 국민들이 자신의 연간 총소득 중 최소 1퍼센트 정도는 후진국 개발협력사업 또는 다른 연대활동을 지원하는 핀란드의 개발협력 NGO 단체에 기부하도록 이끄는 활동이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저마다 이 운동의 세 가지 요구사항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1. 핀란드 정부의 공적 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자금이 1985년까지 국민총생산의 0.7퍼센트에 달할 것(핀란드 정부는 1966년부터 유엔이 정한 이 목표 달성을 약속하기만 했을 뿐이다).

2. 핀란드의 개발원조는 극빈층,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는 계층,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것.

3. 개발협력 지원금을 위한 개인별 소득 1퍼센트의 기부를 통해 우리의 개발원조 방식이 좀더 지속적인 기반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할 것.


1퍼센트 운동은 뜻밖에도 여러 곳에서 지지를 받았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소득의 1퍼센트를 기금에 기부했고, 전국적 규모의 단체들과 유명 정치/문화계 인사들도 이 운동을 지지하며 적극 참여했다. 또 이 운동의 집행부와 참여단체들은 언론의 관심을 성공적으로 끌어내고 출판물을 발간/배포했으며, 순회강연 개최와 정치적 로비를 전개하기도 했다.


기존의 개발협력 NGO 단체들이 이 운동 집행부의 활동비를 어느 정도 부담했지만, 이 운동의 아이디어와 추동력, 정치적 지도력 등은 순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집중적인 캠페인을 벌였던 3~4년간 매주 빠짐없이 모임을 갖고 활동을 전개했다.


많은 핀란드 사람들은 여전히 개발협력 또는 세계적 연대(global solidarity) 노력에 동참하기 위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기여들은 20년 전과 같은 정치적 중요성을 갖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영향력도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핀란드와 핀란드 국민들이 여전히 세계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평화 정거장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핀란드 평화연합회(Peace Union of Finland)의 건물이 평화 정거장(Peace Station)이라 불리는 것일까?


헬싱키의 사무실 빌딩으로 가득 찬 빠실라(Pasila) 지역에 있는 연합회 소유의 아름다운 2층짜리 통나무 건축물은 과거에 기차역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915년 까렐리아 지역의 밤멜요끼 기차역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에 핀란드 평화연합회와 몇몇 관련 단체는 빠실라 지역의 새로 건축된 대형 콘크리트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1984년 어느 날 연합회는 철도 당국이 빠실라 기차역 건물을 경매에 부쳐 팔고 그 자리에 헬싱키 북부 역사를 새로 건축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경매 조건은 구 건물을 해체하되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차역 인근의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로 원래 6차선 도로를 계획했던 곳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당시 핀란드 평화연합회의 일까 따이팔레 사무총장은 혹시 해체되는 기차역 건물을 그 공원으로 옮겨 지으면 전체적인 풍경이 더 나아질 뿐만 아니라 평화운동의 활동센터로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평화연합회는 그 건물 경매에 응찰하여 낙찰을 받았다.


그해 9월 8일, 당시 평화연합회 회장인 여란 폰 본스도르프 교수는 기차역의 마지막 역장이 사용했던 빨간 모자를 쓰고 기차역 출발신호 깃발을 흔들었다. 이로써 평화를 위한 새 출발(Mobilization for Peace)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건물은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원형 그대로 옮겨졌다.


이 건물에는 핀란드 평화연합회 외에도 100인위원회, 양심적병역거부협회, 국제자원봉사단을 비롯한 여러 회원단체, 그리고 여러 국가와의 우호협회들과 핀란드우호협회연합이 입주해 있다. 핀란드 평화연합회의 모든 회원단체뿐만 아니라 다른 NGO 단체들도 평화 정거장 내에 잘 갖춰지고 안락한 회의시설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평화정거장은 국제독립평화운동이 유럽핵군축 캠페인 10년대를 성공적으로 전개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졌다. 캠페인 기간 동안 이 건물은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주었고 캠페인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 후 평화연합회가 전개한 수많은 캠페인에서도 평화 정거장은 똑같은 역할을 해냈다. 새로운 세대의 평화운동가들에게도 매우 안락한 그들만의 은신처로 존재하는 이 건물은 진정한 평화를 위한 정거장이 되고 있다.



제6부 일상생활

세우라사아리 섬 성탄절 길

요즘 아이들, 특히 대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은 동화 같은 성탄절 분위기와 과거의 전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는 헬싱키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성탄절 행사를 열어주면 어떨까 고민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만끽하고 즐겼던 모든 것을 함께 가져다놓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일을 처음 추진한 사람은 두세 명이었지만 이들은 다양한 정보망을 가동해 인구, 이웃, 대학교와 헬싱키 시 당국, 국가유물위원회, NGO 대표들, 교육기관과 교회 등과 접촉해 그 뜻을 전파했다. 이러한 사명을 띤 작업이 1년 정도 계속되었고, 어린이가 있는 가정을 위한 비상업적인 성탄절 이벤트를 마련한다는 아이디어가 드디어 가치를 인정받아 상당수의 개인 참여자와 기관 참여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 사업을 위한 돈은 한 푼도 없었지만, 모든 연줄을 동원해 헬싱키 시 당국으로부터 물건 구입과 운송 등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어느 정도 받아낼 수 있었다. 만약 이 행사를 선전하기 위해 스폰서를 찾았다면 훨씬 더 수월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다행히 몇몇 협찬기관을 찾아냈고, 그들은 우리의 생각을 믿었을 뿐 자신들의 이익을 따져 지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원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장비와 전문적 식견, 그리고 자원봉사였다. 그들 덕분에 운송, 전기, 교통안내원, 휘황찬란한 조명과 홍보 포스터,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나눠줄 성탄절 죽(우유에 끓인 쌀죽)과 생강 비스킷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럼 성탄절 길은 방문객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길을 따라 노래와 음악 연주, 동화 들려주기, 놀이 코스, 연극, 짚단으로 만든 미로, 물론 산타클로스도 있었다. 또한 내가 기억하기로 첫해에는 말이 끄는 썰매도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는 어린이들이 참여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아이들이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물, 성탄절 죽을 먹는 데 필요한 그릇, 숟가락 등을 가져오게 했다.


한 번 하고 나면 이듬해에도 꼭 다시 하고 싶어져 이 행사는 지금까지 열두 해나 개최되었다. 길을 따라 새로운 활동이 많이 추가되어 요즘은 숲 속의 동물, 꼬마요정, 평화촛불공원, 천사와 생강 비스킷 전시 같은 것들이 펼쳐진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이 행사를 준비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행사 첫 해부터 거의 빠짐없이 영부인 또는 대통령이 성탄절 길의 후원자가 되어왔고 여러 해에 걸쳐 직접 방문해주었다. 헬싱키 시장과 주교 두 분도 계속 참석해주었고, 행사장 중앙 가로에서는 수년 동안 교파를 초월한 성탄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매년 2만 명 이상이 세우라사아리 성탄절 길을 찾아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다른 도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탄절 길의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다. 대담성, 열정, 그리고 협조정신을 갖고 우리가 기적에 가까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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