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청춘

   
김열규
ǻ
비아북
   
14000
2010�� 01��



>& ■ 책 소개
칼날같이 시린 경쟁 속에서힘겨워하는 20대 손자를 위해 당신의 가장 깊은 지혜를 들려주는 70대 할아버지의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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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명예교수이자 한국학의 석학인 김열규 교수가 젊은 주역들에게 자아와 고독을 시작으로 도전과사랑 그리고 낭만까지, 청춘기에 거쳐야 할 열다섯 가지 테마를 주제로 저자는 문학과 예술, 인류학과 역사학을 넘나들며 지적 호기심과 풍부한교양을 전달한다. 대학과 사회 초년병 시절인 20대를 배움의 시기라고 말하며, 20대가 배워야 할 세상의 가치와 교양을 담아냈다. 그리고 청춘은우리 삶의 모든 가치를 고민하고 경험하는 시기이기에 견딜 수 없이 아프고 힘들지만, 또한 지나고 나면 애틋하고 찬란한 시기임을 다시 한 번깨닫게 한다.

■ 저자김열규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보스턴 근교의 월든 호숫가를거닐며, 소로처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희망은 현실로 이어져 나이 이순이 되던 1991년에 홀연히 고향으로 낙향했고, 자연의시간 속에서 일상을 소요유하며 수십여 권의 책과 수백 차례의 강연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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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청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이든 지리산 자락이든 청년들을 위한 강연이라면어디든 찾아간다. 그의 청년 시절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데올로기의 숱한 싸움으로 매우 우울하고 힘들었다. 그때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책속에서 길어올린 문학적 상상과 도전 그리고 인문학적 비판과 성찰이었으며, 그러한 책의 힘을 지금의 청년들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그대, 청춘』은 우리시대 노스승이 꽃다운청춘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이다. 자아와 고독을 시작으로 도전과 사랑 그리고 낭만까지, 청춘기에 거쳐야 할 열다섯 가지 주제로 저자는 문학과미학, 인류학과 역사학을 넘나들며 지적 호기심과 풍부한 교양을 전달해준다. 청춘은 우리 삶의 모든 가치를 고민하고 경험하는 시기이기에 견딜 수없이 아프고 힘들지만 또한 지나고 나면 애틋하고 찬란한 시기이다. 청춘이 마주쳐야 할 교양과 가치를 담은 이 책은 청춘의 든든한 멘토가 되어줄것이다.

지은 책으로 『독서』『노년의 즐거움』『한국인의자서전』『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욕』『한국인의 화』『한국인의 신화』『한국의 문화코드 열다섯 가지』『고독한 호모디지털』『기호로 읽는 한국문화』 외 다수가 있다.

■차례
Day 1 시간 -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 유죄!
젊음의 시간은 폭포이다. 그래서 청춘은 질풍노도를벗한다.

Day 2 자아 - 조나단은 ‘나만의 나’를찾는 비상을 꿈꾸었다
자아는 새이다. 오로지 자기완성을 위해 비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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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야망 - 하늘과 태양과 달… 온 천지에 그대 이름을 써라!
야망은 불기둥이다. 그것은 청춘을 날아오르게 하는연료다.

Day 4 고독 -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전체이다!
고독은 불붙지 못한 성냥이다. 그 차가움 속에서 청춘은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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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도전 - 기회는 열려 있다. 불같이 달려들라!
도전은 가시밭이다. 그 너머에 청춘의꽃밭이 펼쳐져 있는!

Day 6 고통 - 우리의 삶을 저높은 곳으로 끌어주는 힘
고통은 쓰디쓴 풀이다. 그것은 청춘의 보약이다.

size=2>Day 7 결핍 -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
결핍은 박차이다. 그것이 청춘을 질주하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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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2>Day 8 방황 -헤매라, 그러면 구하리라!
방황은 미로이다. 그것은 창조로 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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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2>Day 9 슬픔 -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슬픔은 빛나는구슬이다. 그것은 청춘을 사색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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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0 죽음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오늘의 열정을 불태워라!
죽음은 주춧돌이다. 그 위에 청춘의 삶이 굳건히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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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2>Day 11 결단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결단은 달콤한 입맞춤이다. 열정과 집념이 그것을 지속시킨다.

size=2>Day 12 낭만 - 묵은 땅을 버리고 메이플라워호의 돛을올려라
낭만은 청춘의 태양이다. 그것은 신천지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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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2>Day 13 교양 - 지식을 넘어 더 넓고, 더 크고, 더 우람하게!
교양은밭갈이다. 그 옥토에서 인격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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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4 사랑 -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나는 다시 태어난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그대 이름을 쓰는 것이다. 우주와도맞바꿀 수 없는 그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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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5 웃음 - 웃어라, 온 세상이 함께 웃을 것이다
웃음은 솟구치는 분수이다. 그것은 청춘의 화사함을선물한다.





그대

그대, 청춘

 

자아 - 조나단은 "나만의 나"를 찾는 비상을 꿈꾸었다

자아는 새이다. 오로지 자기완성을 위해 비상하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어진 지금 당장의 어느 상황 속에다 자신을 내맡기기만 한다면 그는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타락한 인간이 될 것이다.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한 이 말은 얼핏 읽으면 평범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새겨 읽으면 따가운 교훈이 메아리친다. 누구나 다 가는 뻔한 길을 뒤밟아서 사는 꼴, 그걸 타락이라고 한 것은 루소의 탁견이다. 그는 우리 각자가 자기 나름으로 환경을 초월해서 삶의 행보를 내디뎌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이래서 청춘은 독보적(獨步的)이라야 한다. 젊음은 남들이 얼씬대지 않는 혼자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도도하게, 고고하게 독보(獨步)해야 한다.


판에 박은 듯한 삶, 거기엔 약동하는 생명력이 없다. 사람이라면서도 겨우 달구지 바퀴 굴러가는 꼴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기에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 그려진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갈매가 조나단 리빙스턴은 결코 평범한 새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나는 행위를 지극히 간단하게 생각하며 그 이상의 것을 굳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였다. 어떻게 해서 먹이가 있는 데까지 날아갔다가 되돌아올 수 있는가만 알면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나단은 나는 일 그 자체를 사랑했다. 다른 갈매기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조나단은 자기가 다른 갈매기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그것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모들조차도 그가 매일 혼자서 아침부터 밤까지 낮게 활공(滑空)을 시도하는 연습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나단의 행위는 남다르다. 이 별난 갈매기는 특별한 그만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 자신만의 독특한 자유의 개념을 빚어내기에 이른다. 그건 날개며 다리, 몸통 등 그의 육체가 마침내 정신이며 희망과 하나로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육체가 조나단 자신이 마음 먹은 대로 작동하고 움직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몸이 그의 뜻대로 날고 비상(飛翔)하는 것을 뜻한다.


조나단은 그 자유를 전력을 다해서, 자신의 운명을 바쳐서 실현하려 들었고 마침내 성공하고야 만다. 그래서 그는 고향 바다를 까마득히 떠나서 이상의 나라, 그의 천국에 가게 된다. 그런데 그 자유는 궁극적으로 자아를 자기 소신대로, 희망대로 실천하는 것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건 자아 탐색이고 자아 실현이었다. 자유가 그의 이상이었듯이 자아 또한 그의 이념이고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남들과 절대로 같을 수 없는 자아, 나만의 나인 자아, 그것도 높디높은 자기다운 이상과 값지고 또 값진 자기다운 이념을 실천하는 주체로서의 자아, 그것을 마음먹은 대로 추구하는 것, 그것은 조나단만의 자유일 수 없다. 그런 자아며 자유는 우리들 청춘, 우리들 젊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고독 -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다!

고독은 불붙지 못한 성냥이다. 그 차가움 속에서 청춘은 단단해진다.

오늘 우리의 젊음은 고독하다. 세상의 냉기가 그들을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어붙인다. 내몰린 듯한, 추락한 듯한 서늘한 가슴을 안고 청춘들은 서로 소통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전원을 툭! 끄고 나면, 화려하고 풍성해 보이던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만다.


그는 사회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고독을 견뎌내는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홀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그런 상황을 피하려 했다. 자신과의 은밀한 접촉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능력, 따뜻함과 자만심을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홀로 있으면 성냥갑 속의 성냥개비처럼 차가운 기운만 지닌, 아무 소용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인 『일급 비밀』(원제는 불타는 비밀)에서 주인공의 성격을 일부 묘사한 대목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고독의 몇 가지 속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첫째는, 고독하면 누구라도 제 구실이며 본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독은 어느 누군가가 단지 남에게서 멀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당사자의 본성을 상실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츠바이크의 글에서 고독의 또 다른 속성을 찾아내게 된다. 그것은 불붙지 못한, 불을 댕기지 못한 성냥개비처럼 어느 누군가가 차가운 기운에만 사무치게 되는 고독이다. 외로움에 짓눌리면 사람은 온기를 잃고 얼음덩이가 되고 만다. 외로움은 차가움이고 냉혹함이다. 고독할 때 사람은 냉혈 동물이 된다. 이것이 고독에 대한 두 번째 가르침이다.


세 번째가 남아 있다. 그것은 무리 속의 고독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성냥갑 속의 어느 한 성냥개비는 다른 무리들 속에 묻혀 있다. 그들과 살을 맞대고는 달라붙어 있다시피 한다. 그런데도 츠바이크는 그 한 개비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


귀한 고독, 삶을 위해서 또 우리들 각자의 인품을 위해서 적극적인 도움을 줄 고독을 절대적 자아의 고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순수하게 내가 누구인가를 캐기 위해서 혼자 속에 머무는 고독, 오직 혼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를 캐고 세상이며 사물의 본성을 자기 나름으로, 제 혼자만의 고유한 눈길로 들여다볼 때의 고독이라야 절대적 자아의 고독일 수 있다. 그건 긍정적인, 적극적인 고독이다.


순수한 고독, 그것은 소외가 아니다. 남들에게서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리에서 쫓겨나 있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고독, 그것은 내가 오직 나로서, 나만을 위해서, 나 혼자만을 지켜보는 순간에 이룩된다.


청춘의 고독은 이래야 한다. 순수한 고독이라야 하고 절대적 자아의 고독이어야 한다. 젊음의 고독, 그것은 수행이어야 한다. 단련이고 노력이어야 한다. 당당하고 고고해야 한다. 드디어는 남들이 줄줄이 뒤따라올 그 길을 떳떳이 고개 들고, 눈 똑바로 뜨고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소월이 노래한 대로 꽃은 온 산을 통틀어서 단지 홀로, 혼자 피어서 더 좋은 것, 우리 청춘의 고독도 그러기를 바란다.



도전 - 기회는 열려 있다. 불같이 달려들라!

도전은 가시밭이다. 그 너머에 청춘의 꽃밭이 펼쳐져 있는!

김유신은 진골(眞骨)이다. 신라에서 제일가는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각간(角干), 곧 이벌찬이었으니까 재상 집안 출신이다. 그야말로 명문거족의 후예이다. 따라서 별로 큰 노력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낸다 해도 웬만한 영화는 미리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젊은 시절부터 신분에 안주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


그는 18세에 스스로 깊은 산의 바위굴에 홀로 들어가서 고되게 검술을 닦으면서 수련을 거듭했다. 외로움과의 맞대결, 그것이야말로 김유신이 보여준 젊음의 젊음다운 첫째 징표이다. 그런데 그 도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운 도전이다. 자진해서 도전 찾기, 그것이 젊음의 젊음다운 두 번째 징후이다. 젊은 김유신은 스스로 위기를 불러들인 도전자이자, 그 위기에 맞대응하고 나선 응전자(應戰者)였다. 누구든 젊어서 무엇인가 남달리 어려운 것을 성취한 사람은 당연히 도전자이자 응전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젊은이라면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 힘겨운 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도전이다. 싸움을 거는 일이다. 겨루고 덤비는 일이다. 하지만 그 도전이 반사적으로 힘겹고 어려운 일을 도전자 자신에게 짐지우게 된다. 도전자는 이에 응해서 마주 덤벼야 한다.


김유신도 그랬다. 오래 계속된 수련에 웬만큼 지쳐갈 무렵, 그래서 한층 더 기를 쓰고 있던 바로 그 즈음, 그는 대낮에 꿈이라도 꾸듯이 아주 멀쩡하게 신비 체험을 갖는다.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있던 그의 주변, 바위굴 속이 온통 환한 빛에 싸였다. 놀라서 눈을 뜬 수행자를 백발의 신선이 높다랗게 허공에 앉아서 으리으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젊은 수행자는 엎드려서 큰절을 마치고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들었다. 신선의 손이 앞으로 뻗어왔다. 그 손길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받아서 그대의 뜻을 이루라!"


신선의 손에는 황금빛 검이 들려 있었다. 젊은 수행자는 정중하게 두 손으로 검을 받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신선은 온데간데없었다. 수행자는 검을 뽑아보았다. 와락! 황금빛이 굴 안에 넘쳤다. 눈이 부셨다. 그는 검을 가볍게 흔들면서 신선이 한 말, "그대의 뜻을 이루라"는 그 한마디를 다짐했다.


위대한 인물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이 같은 신비한 이야기를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김유신의 신비 체험은 그걸 겪는 당사자의 집념과 열망, 그리고 그걸 실천하려는 굳건하고 집요한 의지의 과장된 표현일 뿐이다. 어떤 어려움도, 장애도 넘어서서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그 실천력의 표현이다.


김유신이 손에 넣은 신검(神劍), 곧 신이 내린 검은 그가 이겨낸 고독한 수련으로, 단호한 도전으로 비로소 찬란하게 빛이 나는 검이었다. 그것은 젊은 김유신이 이겨낸 고독과 도전과 집념의 결정(結晶)이고 상징이었다.



방황 - 헤매라, 그러면 구하리라!

방황은 미로이다. 그것은 창조로 통하는 길이다.

젊음의 길은 이미 거기 내깔려 있는 것을 주워 올리면 그만인 것,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가듯이 젊음은 허허로이 그의 길을 가야 한다. 황당한 허허벌판, 텅텅 빈 비탈길, 어느 것 하나 미리 마련된 것이 없는 고갯길을 가듯이 젊음은 그 인생길을 가야 한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홀로 나서는 모험길에는 고난이 반드시 말썽을 부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험은 도전이 된다. 미리부터 알고 있는 것, 그런 것은 찾을 턱도, 헤맬 턱도 없다. 방황은 미지이며 정체불명의 것을 향한 정처 없는 발길이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아니, 모든 종류의 경주를 인생에 견줄 수는 없다. 인생에는 앞으로 나아갈 코스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마디로 하면 우여곡절(迂餘曲折), 그것이 인생항로이다. 인생은 그래서 미지수이다. 불가지(不可知), 미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길의 끝에는 마을, 그리고 또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길. 그렇다고 이것, 저것 고르는 일은 하지 마라. 이것도 저것도 번갈아 찾아든다.


눈길을 제한하는 산의 덩치는 그대의 시선을 억누르고 막는데, 드넓은 들은 그걸 풀어 놓아준다. 바위나 단층을 뛰어넘기를 사랑해야 해. 하지만 다리가 찰싹 달라붙는 돌바닥은 조심해서 걸어야 할걸.


소리로 지친 피로는 침묵으로 다스리고, 침묵에 넌더리가 나면 소리로 돌아가라. 혼자여야 한다. 만일 외로움에 마음 굳히게 되면 더러는 군중 무리 속에 흘러들어도 좋다.


안주할 땅을 골라내는 짓은 삼가야 한다. 계속되는 것의 미덕을 믿으면 안 돼. 밋밋함을 드센 향신료로 부셔야 하나니.


그래서는 정지도 헛디딤도 없고, 잡아끌 줄도 없고, 마구간도 없고, 의지할 데도 또는 마음의 괴로움도 없이 벗이여, 그대는 도달할 것이다. 그건 불멸의 기쁨의 늪이 아니다.


다양함의 큰 강물 속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시인 빅토르 세갈랑의 <착한 나그네에게 주는 조언>이란 작품이다. 그는 좋은 나그네는 혼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혼자 가는 길은 얽히고 막히고 장애도 득실댄다. 그러니 편히 묵을 땅을 고르지 말고, 무엇이든 일정한 상태로 지탱되는 것은 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머물 데도 없을, 기댈 데도 없을 길 가기의 궁극은, 그 종말은 다양함의 큰 강물 속 소용돌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세갈랑의 이 조언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통할 것 같지 않다. "무슨, 무슨 시험을 쳐서 뭐가 되어라! 이것, 저것 공부하고 익혀서 이렁저렁 자격증을 따라! 이런저런 대학에 가서는 무슨, 무슨 시험에 붙어라! 이렇고 저렇고 한 학과에 입학해서는 그런저런 직장에 취직하라!" 오늘날 젊은이들은 이렇게 살도록, 그렇게 인생길을 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부모가 그걸 요구하고, 사회가 그걸 강제한다. 심지어 교육마저도 그러고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개인차나 독자적인 개성이 없는 획일화된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런 판국에 눈을 가리고는 산을 넘고 절벽을 타고, 이어지다가 말다가 하는 길을 지쳐서 주눅 들어서 가라면 누가 따르겠는가? 어림도 없다. 하물며 그 험난한 길의 목적지가 다양함의 큰 강물 속 소용돌이라니! 이렇게 대들고, 삿대질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좀 넓고 길게 바라보자! 이런 교육과 사회 분위기 아래에서 창조적 인재를 구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교양 - 지식을 넘어 더 넓고, 더 크고, 더 우람하게!

교양은 밭갈이다. 그 옥토에서 인격이 자란다.

교양을 갖추는 것은 곧 인간성을 간직하는 길이다. 젊은 철에는 이 교양이 한결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젊은 목숨을 정신적으로 길러가는 것은 바로 교양을 기르고 닦는 것과 맞먹는다. 육신만이 발육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정서, 영혼이 자라야 한다.


마음의 단련과 재배, 정신의 수양과 경작, 정서의 수련과 육성. 이들이 없이는 교양을 꿈꿀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체중을 재듯이 교양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생리적 영양소를 따지듯 이 정신적 교양의 영양분을 잴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최상이다. 배워서 아는 사람은 버금이다. 고생해서 배우는 사람은 버금의 버금이다. 고생해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를 바닥으로 치느니라.


공자가 『논어』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생이지지(生而知之)라고 해서 태어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을 최상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공자의 말이라도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생이지지는 제 아무리 천재라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든 버금이거나 버금의 버금일 수밖에 없다. 배워서 지식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고생해서 배워 지식을 갖추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교양을 말할 때는 고생해서 배워서 알게 되는, 그 버금의 버금을 크게 존중해야 한다. 고생고생, 애쓰고 땀 흘려서 가르침을 얻는 것이 교양으로서는 최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지식을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그게 교양을 쌓는 일이다. 독서하고, 음악을 듣고, 미술관에서 회화 작품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이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의 교양은 마음의 밭에서 움튼다.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인심의 동태를 살피고, 남들의 심중을 헤아리는 것으로 우리의 교양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세상 모든 것에 눈이 뜨이고, 주위의 온갖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야 교양이 살찌겠지만 그 외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자신의 내면을, 가슴속을,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줄 아는 것이다. 명상도 좋고 사념도 좋다. 육중하게 생각에 묻힐 수 있어야 한다. 바깥으로는 멀리, 드넓게 그리고 깊게 볼 줄 알아야 하고 안으로는 웅숭깊게, 아귀차게 또 끈질기게 자신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바라문의 잠언 하나를 음미해보자.


열매가 익으면 꽃잎은 진다.

네 속에 밝은 의식이 자라기 시작하면,

너의 약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비록 천 년에 걸쳐 어둠이 천치를 뒤덮고 있었다 하더라도

빛이 그것을 뚫으면 이내 환해진다.

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해도

신이 그 속에서 눈을 뜨면 당장 환하게 밝아진다.


젊은 동안, 삶의 매 순간마다 그래야 한다. 교양이 숙성해가는 낌새, 그 탄력이 바로 젊음의 기상이라야 한다. 그래서 교양은 바로 한 인간의 인품과 인성이라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어의 휴머니티(humanity)를 교양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일차적으로 인간다움이나 인간성을 가리키는 휴머니티는 인간을 인간답게 일구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지식이나 학식도 의미한다. 이 같은 학식 또는 학문의 대표 격이 인문학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성격을 규정할 때 휴머니티가 교양과 짝을 짓게 된다. 이럴 때 교양은 인간을 인간답도록 드높은 인간성을 가꾸어 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교양은 지식이면서도 정신의 수련과 함양을 통해서 기르고 닦아질 인간성과 인품, 바로 그 자체를 가리킨다. 젊음에서 이 말은 더한층 절실해야 한다. 젊음은 성장의 최절정이고, 발육의 최정상이다. 교양도 그래야 한다. 교양이 무럭무럭 자라고 익어가는 생생한 기척으로 넘치게 젊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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