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망친 10권의 책 그리고 세상에 도움 되지 않은 5권의 책

   
벤저민 와이커(역자: 김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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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마음
   
12000
2009�� 11��



2009년 12월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이달의 읽을 만한 책 

■ 책 소개

인류를 깜빡 속인 15권의 ‘악’을고발한다! 
위대한 책에 숨겨진 15가지 악의 기원 

 


캐나다의 세인트 폴 센터와 디스커버리 연구소에서 수석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벤저민 와이커 박사는 이 책을 통해 인류에게 해로운 책이 어떤 책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쓴 저자들의 사악한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한다. 또한 이 모든 내용을 자신의 강력한 주장만큼이나 강렬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 그리고 재치 넘치는 문체로써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저자는 우리의 영혼과 도덕성을 치료해주는 일종의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습득했던 위험한 사고와 사상에 대한신랄한 비평이 그것을 증명한다. 


■ 저자 벤저민 와이커(Benjamin Wiker,Ph.D.) 
밴더빌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마큇 대학과 세인트메리 대학,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 프란시스칸 대학에서교수를 역임했다. 지금은 성서 신학을 위한 세인트 폴 센터와 디스커버리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성서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최근에는 『의미 있는 세상: 어떻게 예술과 과학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가(A MeaningfulWorld: How the Arts and Sciences Reveal the Genius of Nature)』[조너선 위트(JonathanWitt)와 공저], 『신(新) 무신론에 대한 응답: 신을 부정한 리처드 더킨스의 사건 분석(Answering the New Atheism:Dismantling Richard Dawkins’ Case against God)』[스콧 안(Scott Hahn)과 공저]을 집필했다. 현재사랑하는 아내와 일곱 자녀 그리고 염소, 닭, 토끼, 개, 고양이 등의 동물들과 함께 미국 오하이오 주의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다.


■ 역자 김근용 
미국 드폴 대학교에서사회학을 전공, 98년도부터 미국에 체류하며 다수의 사회?문화 관련 서적을 접하고 다수의 페이퍼를 썼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문화와 유산(가제)』『계급 사회(가제)』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발상은 그에 따르는결과를 초래한다


1장 혼란의 서막
1. 군주론
2.방법서설
3. 리바이어던
4. 인간 불평등 기원론


2장 10대(大) 혼란
5.공산당선언
6. 공리주의
7. 인류의 유래
8. 선악의 피안
9. 국가와 혁명
10. 문명의 축
11. 나의투쟁
12. 환영의 미래
13. 사모아의 성년
14. 남성의 성적 행위


3장 혁명은 계속된다
15. 여성의신비


맺음말 - 결론으로 말하는 제정신의 윤곽


감사의 말
참고 문헌




세상을 망친 10권의 책 그리고 세상에 도움 되지 않은 5권의 책
 
1장 혼란의 서막
군주론

혹시 ‘마키아벨리안’이라는 단어와 그와 연관된 부정적인 의미들을 찾아본 적이 있는가? 유의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아보면 연관된 형용사로 ‘일구이언하는’, ‘양면적인’, ‘거짓의’, ‘위선적인’, ‘교활한’, ‘계획적인’, ‘약삭빠른’, ‘부정한’, ‘불성실한’ 등이 검색된다. 마키아벨리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난 후,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리처드 3세』에서 ‘흉악한 마키아블’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마키아벨리에게 악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군주론』이 쓰인 지 5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무자비함과 잔인함이란 단어가 연상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남긴 최고의 고전 『군주론』은 사악한 가르침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윤리적, 종교적 양심의 가책을 일찌감치 저버린 군주들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의심할 필요도 없이 명명백백한 악이 때로는 선보다 더 필요하다고 믿게끔 하는 책이다. 이것이 바로 『군주론』의 진정한 힘이자 독이며,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통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실행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이를 통해 부정한 발상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조율되었으며 이는 우리가 부정한 행동들을 실행에 옮기게 한다.


『군주론』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이다. 단순한 충격이 아닌 몹시도 ‘교활한 충격’이다. 마키아벨리는 독자들의 의식 속에 혼돈을 유도했다. 그 혼돈을 이끌어내는 무기는 다름 아니라 『군주론』에 담긴 그의 글이다. 그는 혹시라도 남이 들을까 조심스레 속삭여 말할 내용들을 글로 명확하게 언급했고, 남들이 생각하기조차 꺼리는 것 또한 은밀하게 속삭이며 전하고자 했다.


우선 『군주론』의 본문 18장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보자. 마키아벨리가 논하고자 하는 군주는 신뢰를 지키고, 약속을 이행하며, 과로할 정도로 일에 매달리고, 매사 정직한 모습으로 묘사되는가?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은 신의를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군주의 모습이 칭송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만인이 정직한 군주에게 박수를 보내고, 또 정직이야말로 최고의 정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경에서도 수없이 거듭 이야기되는, 정직함으로 칭송받는 왕들과 거짓됨을 비난받는 왕들의 예를 이미 잘 알고 있으며 거슬러 올라가보면 고대 문헌에도 덕망 높은 군주들에 대한 칭송이 가득하다. 하지만 만인이 칭송하는 그 모습이 과연 진정으로 현명한 군주의 이상적인 모습인가? 모든 어진 왕을 전부 성공적인 군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모든 성공적인 군주가 전부 어진 왕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어질다는 것은 군주에게 단순히 성공을 일컫는 표현인가? 그래서 훗날 그 과정은 모두 무시한 채 한 나라를 성공으로 이끈 군주는 자연스럽게 어진 왕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현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유심히 관찰할 것을 권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위업을 세운 군주들’은 ‘신의를 저버렸던 이들’이었다.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데도 단순히 신의를 지키고자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만약 세상 모든 이가 신의를 지킨다면 이 가르침은 분명히 옳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이가 사악하고 당신에게 신뢰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는다면, 당신 또한 그들을 신뢰할 필요가 있을까?


단지 편의를 도모하고자 신뢰를 저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선하다는 것 자체를 너무나도 철없는 발상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군주는 진심으로 선하고자 노력하기보다 그저 남들에게 선하게 보이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들 알다시피 사람들은 외관적인 부분에 쉽게 속는다. 군주에게는 바로 그런 속임수가 필요하므로 이것은 완벽한 군주가 되기 위한 하나의 기술인 셈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란 훌륭한 거짓말쟁이이자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군주가 과연 진정으로 자비롭고, 신뢰할 만하고, 인도적이고, 정직하며, 또한 신앙심(서양 역사 속에서 정치와 종교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할 때 신앙심 또한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옮긴이)이 깊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군주가 위에 나열된 덕목들을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덕목을 갖추었음을 타인들에게 보여줄 필요는 있다고 했다. 심지어 그 덕목들을 갖추고 늘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군주에게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 반면에 그러한 덕목들을 단지 보여주기 위해 갖추는 것은 군주에게 유용하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군주는 자비롭고, 신뢰할 만하고, 인도적이고, 정직하며, 또한 신앙심이 깊은 척 행동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신의가 없고, 야만적이고, 부정직하며, 신성을 더럽힐 필요가 있을 때는 반드시 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군주는 타인들에게 어질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설령 그 어떠한 악한 방법일지라도 반드시 창조해야만 한다.


‘선을 위해 악을 행한다는 것이 허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신과 영혼, 그리고 사후 영생을 부정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바이며, 또한 그의 가르침이 빚어내는 궁극적인 효과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여기저기에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며 종교(기독교)에 경의를 표하고 때로는 신앙적인 면을 보였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마키아벨리가 신앙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으며 이를 감안해 그에게 일종의 면죄부라도 허락해야 하지 않느냐고 제안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나는 이들이 마키아벨리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놀라울 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 대해 섬뜩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다. 남들에게는 신앙심이 깊은 ‘척하라’고 가르친 이가 바로 마키아벨리 아니던가! 또, 위대한 군주가 되려면 위대한 위선자,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이가 누구인가! 이미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영주, 군주나 미래의 군주들을 가르치고자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여 마키아벨리식 ‘위대한 군주’를 양성하려고 한 것이 누구였던가!


마키아벨리 자신이 이미 선의 개념과 불멸의 영혼,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후 세계를 부정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 그 세 가지를 배척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미 그러했기에 그는 감히 ‘악한 선’과 ‘선한 악’을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주론』15장에 이러한 내용이 언급된다. 마키아벨리는 독자들에게 선과 악을 이해하는 자신의 관점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과 더불어 현실 속 국가(공화국)와 주권 안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언급했다. “많은 이들이 단지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국가와 주권을 꿈꾸는 동안” 현실주의자들은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우리 삶의 기준을 단순히 ‘무엇이 옳은가’ 혹은 ‘남들이 무엇이 옳다고 충고하는가’에 두기보다는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를 판단하여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이와 더불어 “종류를 막론하고 절대적인 선을 행하고 싶다면, 악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이가 되어라. 결국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선하지 않은 것, 즉 악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현실과 상상의 대립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실익 정책’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맹렬히 비판했던 상상 속에 존재한다는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굳이 찾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소개한 플라톤의 『국가론』일 것이다. 또 하나를 찾자면, 비슷한 주장을 펼친 키케로의 『국가론』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무엇보다 강하게 비판한 대상은 바로 기독교적 천국의 개념이다. 실제로 그의 또 다른 저서 『리비우스에 관한 논고』 이곳저곳에서 천국에 대한 비판을 찾을 수 있다. 한 예로, 마키아벨리는 “천국에 대한 기대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현세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을 저해한다” 고 말했다.


마키아벨리가 기독교를 배척한 이유는 종교가 하늘에 있는 상상의 나라를 꿈꾸는 데 인간의 에너지를 허비하게 하여 이 세상을 더욱 평화롭고 편안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삶의 터전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을 저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윤리적 규율로 인간의 두 손을 꽁꽁 묶어버리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이용해 인간들이 더더욱 필요악을 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은 이후 5백년 동안 서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속주의와 기독교 간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군주론』은 이 책에서 언급되는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책이다.


2장 10대(大) 혼란
국가와 혁명

우선 레닌의 실제 이름은 레닌이 아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라는 것을 말해둔다. ‘레닌’은 혁명 주동자로서 늘 도망자 신세였던 그가 사용했던 160개 안팎의 예칭 중에 하나로, 처음으로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린 혁명적 작품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사용된 예칭이었기에 훗날 자신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레닌이 태어난 울리야노프가(家)는 당시 억압받던 러시아의 소작농이 아니라 상류 계급의 일원이었으며, 흥미롭게도 그의 가문에는 러시아인의 피가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다. 또한 울리야노프 가문은 지주 계급으로서 군주제의 지배 아래 이득을 챙기는 부류였다. 즉,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특권을 부여받은 귀족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유혈이 낭자하는 개개인의 삶보다는 함축적인 이론에 더 관심 있었던 그는 공산주의가 약속한 ‘은혜의 땅’으로 자신이 이끌고 간 노동자 계급과 아주 제한적으로만 접촉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바로 1917년 역사상 가장 포악한 전제 군주 정부라는 낙인을 찍은 볼셰비키[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과격파(레닌이 이끈 다수파를 가리킴) - 옮긴이]의 ‘10월 혁명’을 이끈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말해둔다.


레닌은 볼셰비키 당이 황제들의 지배를 종식시킨 진보적 혁명당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바로 8개월 전에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레닌은 마키아벨리, 홉스, 마르크스에서 18세기 표트르 대제, 캐서린 칼미크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이 남긴 직간접적인 영향과 폭력적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러시아 혁명가들이 미친 영향을 적절히 섞어서 소개했다.


우선 레닌이 전반적으로 주장한 내용부터 시작해보자. 마르크스와 레닌이 보기에 역사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로 이끄는 마지막 혁명에 의해 세상의 혼란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만 하는 계급투쟁의 연속이었다. 『국가와 혁명』의 맨 첫 줄을 보면 이 책을 쓴 레닌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가장 첫 번째 임무는 바로 나라에 마르크스의 진정한 사상적 기반을 세우는 것이다.” 마치 순수한 이론적 약속 같아 보이지만, 레닌에게 이 ‘참 원칙’의 부활은 그 어떤 정치적 타협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말이든 행동이든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자비하고 완전하게 제거해야 했다. “유혈혁명은 물론이고 국가 권력을 대변하는 기구를 붕괴시키지 않으면 억압된 계층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라는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레닌은 이미 폭력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에게 자본주의나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이들과 타협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르주아, 즉 억압하는 자본주의 계급은 그들이 짓밟은 노동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전멸되어야 하며, 그들의 시체 위에 새로운 혁명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에 따라 혁명 계급에는 “공화주의 부르주아를 포함한 모든 부르주아와 정부 기구, 상비군, 경찰, 관료주의를 전부 박살내어 가루가 되도록 부수고 또 말살할 수 있는”, 그리고 “박살낸 그 모든 것을 만인의 민병대로 전환된 노동자들을 주체로 한 민주적 정부 기구로 대체할 기회”가 부여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혁명가들은 자본주의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사유재산을 강탈하여 (그들의 빈자리에)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레닌의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데카르트에게서 빌려온 사상적 기반을 쥐어짜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켰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또 혁명의 외압을 통해 목적에 맞게끔 고쳐질 수 있는 단순한 기계 부품이며, 정부는 그 부품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장치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은 그 기계 부품들의 최종 조합을 위해 마지막 장치를 휘두를 것이다. 『국가와 혁명』에 명시된 대로라면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은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부르주아들 중에서) 다수의 법칙에 따라 정책을 결정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러한 부르주아식 민주주의를 박살내어 정권을 차지하고 나면 그 방식을 프롤레타리아 계급 안에서의 다수의 법칙으로 대체할 것이며, 이 다수의 법칙은 곧 절대 법칙이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사회라는 옷에 남겨진 자본주의식 주름을 다리미로 남김없이 잘 펴고 거기에 다시 민주주의적 독재 정권을 세울 것이다.


이미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은 일종의 최종 단계이다. 레닌이 만족스러워하며 인용한 엥겔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는 국가 권력을 빼앗아 생산 수단을 국가 재산으로 전환한다. 그 이유는 모든 계급 간 차별과 적대심, 그리고 국가 자체에서 찾는다. 국가는 철폐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다.” 국가는 그 존재가 사라지기 전까지만 절대적인 존재이다. 모두가 기꺼이 서로를 위해 정치하고 타인을 짓밟고 지배할 필요가 없을 때 국가는 존재의 의미를 잃는다. 마르크스나 레닌에게 유일한 종류의 국가였던 강제적인 국가는 자발적인 국가 형태로 변모하고(더 이상 국가의 존재 의미가 모호해지면) 국가라는 존재는 아예 사라진다. 또한 레닌은 국가 없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그 누구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만인이 행복해진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소설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은 공산주의에 대해 “소매치기를 없애려고 옷에 붙은 주머니를 떼어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레닌이 행한 것을 생각하면 체스터턴의 표현은 지극히 인자한 편이다. 레닌의 관점에서 볼 때 바지를 소유한 사람은 단지 바지 위에 주머니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총살 감이다! 주머니 달린 바지를 입은 사람과 그 사람의 주머니에서 소매치기한 사람 모두 공개 처형을 당한다면,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총살당할 것이 두려워 모두 자발적으로 주머니 없는 바지를 만들어 입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가 보여준 잔인한 광기의 실례이다. 레닌의 지배 하에서 대략 6백만 명에서 8백만 명가량이 학살당했고, 레닌이 완성한 “정치적, 사회적 반대파들을 대량 살상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스탈린 시절에는 2천만 명에서 2천 5백만 명가량이 학살당했다. 모두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인 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학살은 단지 레닌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부류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만 실행된 만행은 아니었다. 그와 더불어 레닌의 궁극적 정치 목표인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이루려 할 때 나타날 법한 염려를 사전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참고로, 레닌은 마키아벨리의 절대적인 숭배자였다.


레닌은 서로 연결된 세 가지 도구를 이용해 선악을 판단하는 기존의 기준을 철폐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는 마키아벨리도 사용했던 무신론이었다. 레닌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이미 무신론자였고, 그 사실은 최근 그의 전기를 집필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레닌이 정치에 발을 담근 것 자체가 이미 윤리와 거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레닌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란 곧 한 사람의 손에 좌우되는 세상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어찌 윤리적이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해석이다.


무신론에 이은 레닌의 두 번째 도구는 천국을 부정하고 지상에서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헛된 망상이었다. 그 목적을 너무나 아름답고 필연적으로 설명하며 그 과정을 가로막는 이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세 번째 도구는 비록 마르크스주의에서 기원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레닌이 독자적으로 해석한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무신론자인 마르크스와 레닌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신의 섭리나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한 존재였다. 역사는 변증법적인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라는 지상낙원을 향해 필연적으로 한 걸음씩 전진한다. 이는 필연적인 역사 과정이기에 이런 필연성에 저항하는 모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해도 자신의 행동에 아무 죄의식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자 의지였다. 즉, 잔혹하게 쓸어버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어쩌면 레닌에게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역사적 진행을 가로막는 이들을 빠르고 확실하게 제거할수록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로 더 빨리 다가설 수 있다는 논리가 당연한 진리였을지도 모른다.


3장 혁명은 계속된다
여성의 신비

비록 수잔 안소니 같은 초창기 페미니스트들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들에게 외면당하긴 했지만 베티 프리던은 ‘제2의 페미니스트 물결’을 시작한 장본인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프리던의 사생활은 미드나 킨제이처럼 자신의 연구 발표들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녀의 연구 중에 가장 유명한 『여성의 신비』는 그녀의 사생활로 더욱 유명해졌다.


프리던은 미국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에서 보석상을 하던 해리 골드스타인과 포악하지만 아름답고 젊은 아내 미리암 호프비츠 골드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베티 나오미 골드스타인이다. 부모 모두 유대계 이민자였으며, (가정 형편은) 부유했으나 가족 간에 그리 화목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베티의 무신론은 그러한 가족 분위기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베티는 어머니에게서 폭력적인 부분을 물려받았으나 애석하게도 어머니의 놀라운 미모는 전부 그녀의 친자매인 에이미에게 돌아갔다. 베티에게 상처로 남은 커다란 시련은 바로 불같은 성질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남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가족에게는 말 그대로 마녀처럼 굴었다. 마치 자신이 남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상류층 신분인 양 남편을 철저히 무시했고, 그런 남편의 코를 쏙 빼닮은 베티는 종종 (아버지 대신) 어머니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유년기 시절에 대한 치유책이 바로 『여성의 신비』에 깔려 있는 기반이라고 보면 된다.


『여성의 신비』는 ‘전업 주부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집 밖에서 모험을 할 수 없을뿐더러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의미 있는 일에 몸담지 못하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두꺼운 책이다.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신비』에 담긴 결점들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선 프리던은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며 중노동으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지쳐 쓰러져 잠자리에 드는 대다수 남성보다는 저널리스트나 대학 교수, 광고 회사 간부, 비행기 기장, 의사처럼 전문직에서 일하는 남성들이 절대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직업이든 간에) 베티에게는 이렇게 ‘진짜’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집 밖의 모든 일이 (집 안에서의 따분함과 무료함을 치료해줄) 일종의 ‘신비’이자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그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추상적인 접근 방법은 결국 대부분의 분석을 망쳐놓았다. 프리던은 『여성의 신비』를 출판하기 이전부터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사는 저소득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 연구의 학문적 바탕이 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서 여러 해를 보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나온 그녀의 분석은 당연히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빠르게 전개된 듯해 이쯤에서 그녀의 사상적 배경을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베티 프리던은 한마디로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을 추종했고, 그와 달리 전업 주부처럼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여성의) 역할 자체를 몹시 증오했다. 이런 성향은 일을 그만 두고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면서 전보다 두 배 이상으로 온갖 고통을 주었던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괴팍한 성격에서도 비롯했다. 더 나아가 프리던은 ‘모든 여성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끝없는 집안일에 점차 불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여성의 신비』 첫 장에서 이미 명확하게 언급된다. (모든) 가정주부는 비록 어린 나이에 결혼한 (프리던 자신을 포함한) 자신들의 선택에 겉으로는 만족하는 듯 표현하지만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리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해나간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미국 여성들의 가슴속에 묻혔고, 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을 사는 미국 여성들이 이 문제에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의 이름을 찾고자) 갈망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 중산층 이상 가정의 많은 여성들이 이 문제로 혼자 고통받고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침대를 정리하고, 식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장을 봐오고, 바느질거리를 걱정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고, 오후에는 미리 만들어놓은 브라우니(일종의 초콜릿 케이크 - 옮긴이)를 손에 들려 아이들을 컵 스카우트(스카우트 연맹의 단위대로, 6~12세 아이들이 속한 유년대(幼年隊) - 옮긴이)에 데려다주고, 밤이 되면 남편 곁에 눕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이게 (내 삶의) 전부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프리던은 이렇게 삶이 온통 비애로 가득한데도 주부들이 자신을 옭아매는 수갑과도 같은 속임수에 속아 여전히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을 두고 “여성의 신비”라고 말했다. “여성의 신비”란 “그들이 그저 자신의 ‘여성스러움’에 사로잡혀 더욱 원대한 삶의 목적을 꿈꾸지 못하는 것”이며, 여성 스스로 “직업란에 전업 주부”라고 채워 넣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던은 행복으로 포장된 이런 허물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벗겨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여성 잡지와 최근의 심리학 보고서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교외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 가정의 주부들은 남편의 노력에도 커다란 가마솥에 노이로제가 되어버린 불만족을 넣고 뚜껑을 닫은 채 펄펄 끓이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 프리던은 광고나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행복한 가정주부의 모습과 달리 “목적의식이나 창의성도 없고 심지어는 (부부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육체적 쾌락마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주부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과감하게 커튼을 열어 젖혔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주부의 모습은 그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고자 했다. 프리던은 자신이 주장하던 “여성의 신비”를 분명하게 보여줄 만한 “중상류층”의 “가정주부 28명”을 찾아내고 개별 인터뷰를 통해 실체를 밝히고자 했다.


“이른바 ‘엄마’라고 불리는 존재는 누구인가? 인터뷰 응답자 28명 중에 16명은 현재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18명은 신경안정제를 항상 복용하며 그중 여럿은 자살을 시도해본 경험도 있다고 했다. 그 밖에 우울증이나 다양한 정신적 문제로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응답자도 일부 있었다. 지역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많은 ‘행복한’ 주부들이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미쳐 날뛰다가 심지어는 발가벗고 길거리로 뛰어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또한 12명은 실제로 불륜을 경험했거나 혹은 상상한다고 응답했다.”


이런 내용들로 가득한 『여성의 신비』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가정주부의 덫”이 보여주는 참혹하고 냉정한 현실에 우울해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프리던은 『여성의 신비』에서 전업 주부란 1960년대 당시의 암이나 AIDS와 같은 중대한 병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대부분 혹은 전체 가정주부의 삶을 ‘이름조차 없는 절망’이라고 묘사한 프리던의 주장은 엉터리다! 만약 그녀가 제시한 이유와 상응하든 그렇지 않든 프리던 자신을 제외한 일부 가정주부들이 그녀가 묘사한 ‘가정주부’와 모습과 맞아떨어진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일부’라는 숫자의 범위는 ‘전부 혹은 대부분’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즉, 『여성의 신비』에 언급된 수치는) ‘일부’라는 숫자가 혁명을 일으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한 프리던이 독자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고자 극단적인 표현으로 사실을 부풀린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가 여성들을 이해하는 방식과 사뭇 차이가 있기에 당장은 (여성의 진실에 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들이 점차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프리던 스스로 (자기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증거를 부풀리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불쾌한’ 사실은 “나는 인터뷰를 한 여성들 사이에서 이러한 형식이 계속 반복되는 것에 주목했다” 등의 허구로 지어낸 인터뷰가 결국에는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기능을 빼앗긴 여성들은 점점 집안일과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해야 하는 일들로 자신을 채워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여성들이) 집안일을 손에서 놓기 시작할 것”이라는 일종의 ‘사이비 법칙’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