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는 미쳤다

   
보르빈 반델로(역자: 엄양선)
ǻ
지안출판사
   
15000
2009�� 04��



>& ■ 책 소개
“연예인과 아티스트는 왜팔자가 기구한 것일까?”


& 매릴린 먼로부터 엘비스 프레슬리, 휘트니 휴스턴과 로비 윌리엄스, 다이애나왕세자비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의 슈퍼스타들의 인생에 파고들어 그들의 화려하고 뛰어난 예술성 뒤에 숨어 있는 비극적 인생과 죽음에 대해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싣고 있는 책이다.


& 이 책은 스타나 아티스트들이 부와 명성을 얻으면서 성격이 변하는 것이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성격장애 때문에 뛰어난 창의성과 대중들의 호감을 얻으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특히, 저자는현대인들이 가진 대표적인 정신질환 중 가장 심각하고 치료하기 힘든 증상인 ‘경계성 성격장애’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장애를 가진 많은 스타들이우울증에 시달리며 자해 성향과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정받지 못하거나 추락할 것을 두려워해 끊임없이스스로를 밀어붙이며 자기 삶과 투쟁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이들을 갖은 역경을 딛고 정상에 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것이다.


& 저자는 강조한다. 누구나 어느 정도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으며, 이는재앙이지만 재능이 될 수 있다고. 적당히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경계성 성격장애는 남다른 인간적 매력, 사회적 헌신, 섹스어필, 남다른창조성, 성공을 향한 굳은 의지 같은 긍정적 에너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저자 보르빈 반델로브(BorwinBandelow)
정신장애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특히 불안증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로 인정받고 있다. 독일괴팅겐대학에서 심리학과 의학을 전공했고, 현재 괴팅겐대학 의과대학 교수이자 동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불안증의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황장애와 광장공포증. 진단과 원인과 치료(Panik und Agoraphobie. Diagnose, Ursacheund Behandlung)』와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은 『불안증(Angstbuch)』 등이 있다.


■ 역자 엄양선
숙명여대 독어독문학과에서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뮌스터에 있는 베스트팔렌 빌헬름 대학에서 수학했고, 2007년 현재 숙명여대에서 강의하며 전문 번역가로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계를 움직인 6인의 전략가』『히스테리』『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린 마술그림』『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스탕달, 톨스토이』『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춤 - 즐거운 지식여행 014』『구스타프 클림트 - Art Special 2』 등이있다.


& ■ 차례
머리말 
프롤로그 _ 스타는 미쳤다
첼시 호텔에서의죽음 _ 영혼을 갉아먹는 성격장애 

1. 망가진 영혼

신도 분노한 괴팍한 명배우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도취 |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 모든 게 연극일 뿐 | 사이코패스의 실체 | 죽음까지 치닫는 성격장애


2. 경계 위에서 위태하다
크라이베이비, 크라이 | 경계성 성격장애의 증상 | 삶의 벼랑 끝에 선 중증 장애 | 그래도 살아보기 위하여 | 다중인격 증상의 진실 | 깊은 상처에젖은 슬픈 노래 |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했나 | 환경, 유전 혹은 제3의 원인 | 뇌 속에 숨은 범인을 찾아라 | 치료 불가능한천형인가


3. 좋은 마약, 나쁜 마약
죽음의 선을넘다 | 누구나 마약이 필요해 | 생존과 번식, 보상시스템 | 참을성 없는 쾌락시스템 


4. 스타 막장인생
스포트라이트 뒤의짙은 그림자 | 고통으로 별은 뜨고, 또 지고 | 법이나 도덕? 난 몰라! |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파멸을 부른 섹스 중독


5. 의문의 죽음
“음악이 끝나면 조명을꺼라!” | 죽음을 장전한 러시안룰렛 | 열반을 찾다 요절한 록스타 | 아빠가 대신 날 죽여줘 | 음모설에 휩싸인 죽음 | 죽음으로 돌진한자동차 | 삶의 경계를 넘어간 스타들 


6 .긍정의 에너지
지상에서 가장 섹시한남자 | 성격장애로 대중적 어필 | 창조성은 광기의 축복인가 |성격장애에 대한 특별한 끌림 | 성공으로 쏘아올린 로켓 엔진 | 고통 속에 핀장밋빛 인생


& 에필로그
용어해설





스타는 미쳤다


망가진 영혼

신도 분노한 괴팍한 명배우

중증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상적인 직업은 연기다. 연극배우와 영화스타 중에서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를 심심찮게 발견하는 것도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영화배우 클라우스 킨스키다.


여성을 살해한 정신병자, 못생긴 불구의 강도, 인질범, 천재적 재능을 지녔지만 광포한 지휘자, 광적이면서 신비한 매력을 지닌 혁명가, 정신분열증을 보이는 의사, 잔인한 노예거래상, 성차별적인 마초, 토막 연쇄살인범 잭, 느끼한 포르노배우, 미치광이 과학자, 공공생활을 위협해 정신병원에 수용된 정신이상자, 악마적인 뱀파이어 백작, 사드 후작 등등. 이들 배역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해낸 단 한 명의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클라우스 킨스키였다. 때로는 감수성 풍부한 정신과 의사나 천재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배역을 번갈아가며 맡았지만 똑같이 능숙한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킨스키가 지닌 예리한 시선, 번득이는 눈빛, 육감적인 입술, 반항적인 입매는 살인자, 괴팍한 성격의 기인, 정신이상자를 두루 연기하는 배우로서 완벽한 조건이다. 그가 사이코패스 범법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해낸 것은 에드거 월리스의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만이 아니다. 킨스키는 자기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연기한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실생활에서 용감한 가장이자 건실한 시민이며 빈틈없는 투자가, 가정교육을 잘 받은 신사, 성실한 납세자였다면 아무도 그에게 끌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으로 치달은 킨스키는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촬영장에서 변덕스럽고 광기에 사로잡힌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현실에서도 우스꽝스러움과 광기 사이에 있는 집요하고 강렬한 눈빛을 거둬들이지 못했다. 연습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을 만큼 즉석에서 자기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니 감독의 연기 지시는 헛소리일 뿐이라 여겼고, 대본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성격장애를 겪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 킨스키 역시 주변 여건이 아주 힘든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다.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어머니가 몸을 팔지 않게" 하려면 아버지와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부모는 싸움이 잦았고 어머니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소년 킨스키는 석탄장사, 구두닦이, 시체 운반원, 생선가게 점원 등을 전전했다. 돈이 떨어지면 금고를 털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빼먹고 낙제했을 뿐 아니라 선생님들을 두 번이나 때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배우로서 킨스키의 이력은 전쟁이 끝나면서부터다. 먼저 튀빙겐의 한 유랑극단을 찾아가 대사 시험을 치르고 계약을 체결한 뒤 50마르크의 선금을 받고 잠적해 영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뒤 햄릿을 연기한 적이 있다며 유명한 배우들 밑에서 기교를 배웠다고 거짓말하고 베를린의 극단에서 배역을 따냈다. 첫 번째 출연작이었지만 공연 내내 술에 취해 있었다. 감독이 나무라자 등 뒤에서 빈 술병을 던졌다. 나중에 이 괴짜 사나이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기도해 베를린 비트나우 요양소의 폐쇄병동에 수용됐다. 이후로 그의 인생을 지배한 것은 충동이었다.


킨스키가 출연한 영화는 족히 200편에 달한다. 그중 상당수가 B급 또는 그 이하로 분류되는 영화라는 사실은 자신의 자아도취 성향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에는 <닥터 지바고>, <노스페라투>, <보이체크>와 같은 명작도 있다. 킨스키가 일본 포르노 영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저급 영화를 마다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돈이었다. 무절제한 낭비벽 때문에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명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출연 제의를 받은 킨스키는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지만 출연료가 쥐꼬리만큼 적다는 이유로 네 엉덩이에 X해라라는 전보를 보내 거절했다. 독일 정부가 수여한 독일영화상 황금상을 받았지만 "수표가 들어 있지 않아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수여한 훈장 역시 같은 이유로 "겉만 번지르르한 허섭쓰레기"라며 돌려보냈다.


성욕 과시자 킨스키는 말년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괴팍해졌다. 영화 출연 제의는 눈에 띄게 줄었고, 인터뷰나 토크쇼에 나가서는 막가기 일쑤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머리를 산발한 채 건방진 눈빛을 던지고, 어김없이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저속한 욕설을 서슴지 않아 보는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줬다.


클라우스 킨스키는 1991년 향년 65세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킨스키는 무한한 이기주의, 제어할 수 없는 충동,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불신, 내면의 분열 등의 특징을 지닌 전형적인 자아도취성 성격장애의 화신이다. 극단적인 자기신격화가 없었다면, 세상을 향한 돈키호테식 투쟁이 없었다면 배우 킨스키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저항을 통해서만 진정 자신의 위대함을 키울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나르시시즘을 발산하지 못했다면 고등학교 아마추어 극단이나 이끌며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초라하게 느꼈을 것이다.


경망스런 행동과 독설적인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킨스키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우리도 때로 그렇게 하고 싶지만 자신없어 감행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거침없이 했기 때문이리라.



스타 막장인생

고통으로 별은 뜨고, 또 지고

새로운 음악 장르가 탄생할 때는 언제나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이런 특징을 지닌 뮤지션들이 소수민 집단과 몰락한 게토 출신이었던 것도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뮤지션들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봐도 그리 놀랍지 않다. 그들이 거치는 인생역전이란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트라우마를 겪는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악보도 읽을 줄을 몰랐고, 그럼에도 뜨거운 음악가의 피를 타고나 젊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또 그럼에도 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증과 불안증을 겪으면서 불행하고, 이성과 불안한 관계를 맺으며 알코올이나 마약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너무 일찍 로큰롤의 천국으로 올라갔다.


대표적인 예가 엘비스 프레슬리다.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가 자신의 소유지인 그레이스랜드의 저택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책과 기사가 쏟아졌지만, 팬들 가운데 엘비스가 경계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이지 않았을까?


앨비스의 가족은 백인 쓰레기로 불렸다. 흑인 빈민가에 사는 사회적 약자 백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엘비스가 세 살 때 아버지 베론이 구속되었고 수표 위조로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가족들은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했다. 앨비스와 어머니 사이는 무척 각별했고, 이런 관계는 나중에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성격장애를 지닌 많은 이들처럼, 엘비스는 반항아였다. 성공의 비밀은 아름답고 깊은 목소리뿐 아니라 1950년대 초반 미국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몇 가지 요인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그의 음악은 시끄럽고 격렬했으며 흑인처럼 노래를 불렀다. 엉덩이를 외설스럽게 흔들어댔고, 텔레비전에서는 엉덩이부터 비췄다. 언론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재능이 없고 저속하다, 미국인들의 귀를 향한 전면적인 테러, 법에 저촉되는 외설스러움, 섹스에 미친 자 등으로 묘사했다.


일찍부터 두드러졌던 엘비스의 자기도취적인 현시 욕구는 경계성 성격장애의 첫 번째 특징이다. 그러나 다른 증후들도 나타났다. 그래서 엘비스 자신도 극단적인 감정 기복으로 괴로워했다. 예컨대 때때로 방안 구석을 겨냥해 총을 쏘는 것으로 충동제어장애를 드러냈다. 엘비스에게 이론과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열네 살 때부터 엘비스를 알고 지냈던 아내 프리실라는 매사에 그의 통제를 받았다. 머리를 어떤 색으로 염색하고 눈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엘비스에게서 일일이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엘비스가 보여준 중독적인 태도는 경계성 성격장애를 갖고 있음을 시사했다. 수면제 및 진통제를 남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파괴적 의존증의 특수한 형태인 폭식증도 보였다. 특히 사탕, 아이스크림, 사과 파이, 햄버거, 감자칩 등 아이들이 즐기는 음식들을 선호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양상을 퇴행성 식습관이라고 부르는데,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퇴행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시기인 어린 시절에 대한 갈망이다.


엘비스는 우울증으로 인한 불쾌감으로 괴로워했고, 혼자 있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언제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두려고 했다.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자주 관찰되는 것처럼 엘비스 역시 이상하고 희귀한 여러 종교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했다. 어떤 공연에서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는 대신 성경 구절을 읽기도 했다.


말년에 엘비스는 불행한 생을 보냈다. 그는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바르비투르산염과 항히스타민제 같은 수면제를 상용했고, 다시 흥분시키기 위해 암페타민을 복용했다. 또 폭식증을 치료하려고 식욕감퇴제와 설사약을 먹었다. 게다가 하이드로모르핀 같은 아편제, 코데인, 테스토스테론 등 많은 종류의 약을 하루 평균 20알이나 복용했다. 이들 약은 여러 의사들로부터 동시에 처방받았고, 매일 그 양을 늘려갔다. 반면 공연은 점점 뜸해졌다. 수면제에 취해 공연할 때는 기계적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가사를 잊어버리기 일쑤였고, 늘상 무대 위에서 쓰러졌다. 많은 약을 과용한 탓에 항상 몽롱하게 취한 상태였고, 밤낮을 뒤바꿔 살았으며, 끊임없이 단 음식을 먹었다. 한때는 훌륭한 몸매를 자랑하며 모든 여성들에게 추앙받았던 남자는 결국 살이 쪄서 기괴한 몰골로 변했다. 크게 성공했음에도 주위에 거침없이 돈을 뿌렸기 때문에 늘 경제적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엘비스의 몸은 여러 가지 약물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1977년 8월 16일에는 조금 지나치게 복용했다. 부검 결과 마흔 두 살의 엘비스는 이날 중독성이 있는 알약들을 너무 많이 섞어 먹었다. 몇 가지 수면제와 진통제와 모르핀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메페리딘 같은 약이었다. 비록 예상할 수 없는 죽음의 게임을 벌여오기는 했지만 실제로 죽으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안정을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가 먹은 많은 약들이 상호작용한 결과 부정맥이 나타났고, 그뒤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폭식증으로 심장이 손상돼 있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물론 자살이라는 의견도 제기됐다. 하지만 자살을 계획하면서 네 국자의 아이스크림과 여섯 개의 비스킷을 먹고 기독교 책을 들고 화장실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의문의 죽음

열반을 찾다 요절한 록스타

커트 코베인이 자기 집 차고에서 숨졌을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커트 코베인다운 자살 사건이었다. 커트는 명랑한 아이였다. 언제나 웃음이 넘치던 유년기는 내일을 기다리기가 조바심이 날 만큼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7세 되던 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바텐더 어머니와 자동차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이혼하면서 커트는 네 명의 친척 집을 전전해야 했다. 훗날 그는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느꼈다고 한다. 아이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갔고, 또래들을 대하는 태도도 점점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결국 아동 정신과 의사에게서 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고 메틸페니데이트 제재의 약으로 치료받아야 했다.


커트는 청소년기에 소도시 애버딘에서 펑크족과 마약 중독자들이 모이는 동네를 전전했다. 머리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술을 훔치고, 상점 진열장을 깨뜨리고, 걸핏하면 싸움질을 했다. 1986년 커트는 밴드 너바나를 결성했다. 열반을 뜻하는 그룹 이름에서 이미 그가 지상에 없는 낙원을 찾는다는 것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록과 헤비메탈, 펑크를 혼합한 너바나의 음악은 소리를 지르고, 시끄럽고 파괴적이며, 거칠게 분노를 표출했다. 너바나 음악의 특징으로는 기타, 베이스, 드럼의 음량을 최대로 올려 멜로디를 단순화시킨 미니멀한 악기 편성, 기타 솔로 배제, 거친 불협화음과 불편한 멜로디, 우울하고 음울한 노랫말 등을 꼽을 수 있다. 너바나 공연에서 스피커 가까이에 있는 관객은 강력한 사운드의 압박을 견뎌야 했다. 이들의 사운드는 청년세대 전체가 부르짖는 분노의 외침이자 1980년대를 지배한, 컴퓨터 기술로 교묘하게 합성된 스튜디오 음악에 대한 투쟁구호였다.


너바나에 대한 팬들의 열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커트의 거친 목소리였다. 강렬한 목소리에서 좌절과 분노, 고통과 상처가 뿜어져 나왔다. 많은 소녀들의 열광의 대상이었지만 본인은 대중적 아이콘과는 정반대의 인물이 되고자 했다. 실제 그는 침울했고, 심각하게 생각했고,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로큰롤 순교자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대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그가 사망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소년들 중 적어도 68명은 커트 코베인의 자살에 영감을 받았다는 유서를 남겼다.


너바나의 최고 히트곡은 5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리트(Smells Like Teen Sprit)였다. 이런 성공을 예기치 못했던 너바나에게 뜻밖의 성공은 큰 충격이었다. 스타로서의 삶이 커트에게는 너무 버거웠던 것이다. 순회공연을 할 때면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극심한 위통으로 괴로워했지만 의사들도 아무런 처방을 찾지 못했다. 그는 헤로인이 통증을 완화하는 데 적합한 수단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사공포증부터 극복해야 했다. 또한 자신의 음악이 팬들에게 잘못 이해되면서 유명세를 치른 것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커트 코베인은 대단한 무기 수집광이었다. 두 번이나 무기 소장품이 경찰에 압수되기도 했다. 커트 코베인은 24세 때 스트리퍼 출신의 코트니 러브를 알게 되었다. 그녀 역시 경계성 성격장애의 기준을 모두 갖춘 여인이었다. 코트니는 자해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충동제어장애로 벌어진 행동으로 법적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마이크를 던져서 팬의 머리를 다치게 했고, 성폭행 및 가정폭력 희생 여성들을 위한 기금 마련 자선행사장에서 한 여성과 극렬한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또 자신의 연적을 병으로 때려서 경찰 공무집행 방해죄 및 치명적 무기를 이용한 상해죄, 무단침입죄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92년 코트니 러브는 커트의 아이를 가졌지만 임신 중에도 마약을 끊지 못했다.


커트 역시 헤로인에 빠져 가망 없는 삶을 이어갔다. 결국 1992년 처음으로 마약 중독자 클리닉에 수용되어야 했다. 1994년 3월에는 혼수상태에 빠져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50알의 진통제와 샴페인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것이다. 아내와 친구들, 매니저의 설득으로 헤로인 중독 치료차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 입원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병원을 탈출했고, 아내는 실종 신고를 냈다. 아내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남편의 행방을 좇았다.


커트가 차고에서 총에 맞아 숨져 있는 것을 한 전기기사가 발견했다. 엽총의 총부리는 여전히 자기 턱을 향한 채였다. 시신 옆에는 붉은 잉크로 아내와 생후 19개월 된 딸 프란시스 빈에게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혈액 검사 결과 헤로인, 알코올, 진정제가 검출되었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 사건에는 모든 요인이 다 갖춰져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트라우마 형성, 아동기의 과잉행동장애, 청소년기의 외톨이 생활, 약물 중독, 대단한 성공 속에서도 나타난 우울증,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의 자살, 유서……. 그야말로 모든 게 들어맞지 않은가? 그러나 코트니 러브가 고용했던 사설탐정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며 커트의 죽음이 자살에 의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유서라고 나온 것은 어쩌면 유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 편지는 커트가 음악계를 떠나고 싶어 하기는 했으나 지구를 떠나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기를 원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필적 전문가들은 코트니와 딸 프란시스에게 남겨진 편지를 의심했다. 게다가 경찰이 확인하지 못했던 제2의 편지가 있었다. 이 편지는 커트가 그만 코트니를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지, 본인이 자살하겠다는 내용은 아니었다.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코베인의 절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인터뷰한 여러 개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본 사설탐정은 코트니가 남자 보모인 마이클 드윗과 공모해 이혼을 계획 중인 커트를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코베인의 죽음은 그것이 진짜 자살이었는지 모두를 의심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긍정의 에너지

창조성은 광기의 축복인가

- 정신질환과 창조성의 함수

천재와 광기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에 나와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예술가와 시인들이 우울질 성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심리적 장애가 전혀 없는 예술가들도 수없이 많다. 또한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인 문제 가운데 성격장애가 가장 흔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광기를 천재성과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대개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이다. 광기와 함께 나타나는 질병들, 그러니까 정신분열증 같은 증상은 유명 예술가들에게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 프리드리히 휠덜린, 아이작 뉴턴, 노벨상 수상자인 존 포브스 내쉬(그의 일생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만들어졌다)에게 정신분열증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정확한 진단에 있어 전문가들의 의견은 언제나 엇갈렸다.


분열증적인 질병들은 흔히 아주 위중하게 진행되어 발병 후 몇 년 안에 예술적 창작력이 크게 제한받게 된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지능과 창작력이 줄어들지 않더라도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작업의 추진력이 많이 떨어지기 십상이라 뛰어난 예술적 성과를 이루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공황발작이나 사회공포증 같은 불안장애도 널리 퍼져 있다. 사회적 불안증을 앓는 사람들은 종종 현실과 동떨어져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노라 확신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자신의 작업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일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증은 환자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책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하는 능력을 해칠 만큼 창작력에 손상을 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불안은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 사이의 극단적인 경쟁에서 스스로를 다그쳐서 꼭 필요한 추진력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유명인사 중에서도 톱 클래스에서는 성격장애가 아주 대단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심리학자 펠릭스 포스트는 자신이 분석한 시인과 소설가들 중 3분의 1에서 성격 장애가 나타났다고 보고한 바 있다. 유명인들의 전기에서 마약 중독이나 자살 기도 같은 자기파괴적인 요인들이 나올 때면 늘 경계성 성격장애의 발현을 의심하게 된다.


어떤 종류의 예술이 어떤 심리적 질병과 가장 많이 연계되어 있는지 분석해보면 결과가 아주 흥미롭다. 작가, 음악가, 배우, 화가, 기타 다른 영역의 대표적 아티스트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아놀드 루드빅은 각 예술 분야를 대표하는 1,000명 이상의 유명인을 선정해 그들의 전기를 정신병의 관점에서 연구했다. 그 결과 정신적 문제에 관한 한 음악 연주자나 배우와 같은 공연예술 종사자의 숫자가 단연 앞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음악가들에게서는 술과 마약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우울증, 자살 충동, 성적 장애, 연기 중독도 많이 관찰되었다. 무대공연 예술가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들 중에는 추가로 조증을 앓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많았다. 작가, 특히 시인과 대중소설 작가(전문서적 저자는 적었다)들에게는 모든 예술가들을 통틀어 우울증이 가장 많이 나타났고, 여기에 알코올 의존증, 자살 충동, 조증, 불안증, 정신이상 등도 추가되었다. 작곡가와 화가들에게서는 우울증이 많이 나타났으며, 경우에 따라서 알코올 문제도 있었다.


루드빅의 연구에서 성격장애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독증, 우울증, 자살 충동과 성적 장애 등을 보인 예술가들은 경계성 성격장애의 기준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통계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음악가나 배우 즉, 자신의 성공을 즉각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계통의 예술가들은 작곡가나 작가처럼 창작의 열매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예술가들에 비해 경계성 성격장애 증상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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