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스기타 사토시(역자: 양영철)
ǻ
말글빛냄
   
13000
2008�� 11��



>& ■ 책 소개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이란무엇일까? 저자는 세계경제대국 일본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 일본이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이 책은 후진 정치의 빈약한 실현,일그러진 교육, 이름뿐인 남녀평등, 가혹한 노동의 현실, 환경의 후진성 등 일본 사회 전반을 낱낱이 파헤쳐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과 실태 비교를통해 일본의 진실을 밝힌다. 일본의 현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기에 대한민국 정부나 위정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 현재 일본의 상황을 기술하는 이 책은, 일본의 문제점들을 총 6장에 걸쳐소개한다. 정치·행정·사법·교육·남녀평등 그리고 사회보장·노동·환경의 현실로 좁혀 5장에 나눠 다룬다. 그리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6장에서는선진국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본다. 


■ 저자 스기타 사토시
1953년사이타마 현에서 태어났다. 오비히로 축산대학의 교수로 민주주의론, 자동차론, 연애론 등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도로행정의본질-관료의 부작위는 무엇을 불러왔는가』『사람에게 자동차는 무엇인가』『야만스런 자동차 사회』『자동차 사회와 아이들』『자동차가 상냥해지기위해서』『남성적인 연애론-포르노』『강간의 정치학-강간의 신화와 "성=인격원리"』가 있으며 그 외 번역서로는 『정언명법-칸트의 논리학 연구』 등이있다.


■ 역자 양영철 
1968년에 태어났다.일본 도키와 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드폴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MBC, EBS 다큐멘터리와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다수번역했고, 다년간 외자유치 업무에 종사했다. 2008년 현재 번역자, 저술가로 활동 중이며 PLS 대표를 맡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을매혹하는 기술, 컨셉』『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워렌 베니스의 리더십 원칙』『회의 반으로 줄이고 두 배로 잘하는 법』『뇌,맵핑마인드』『CEO를 꿈꾸는 팀장의 조건』『나의 왼발』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나는 왜 나의 조국일본을 비판하는가 


1장 후진적 정치의 현실 
정부의 사명을포기한 연금기록 소실 사건 | 관료가 법이 되는 후진적 구조 | 뿌리 깊은 정경유착 | 반세기의 일당독재 | 부족한 공무원 | 일본은독립국가인가 | 재계는 부당한 정치헌금으로 살아남는다 | 너무 많은 정당교부금과 불투명한 사용용도 | 이름만 외쳐대는 무능한 정치인들 |국민투표가 없는 부끄러운 나라 | 낡고 낡은 80년 전의 선거제도 | 사법의 독립성은 이미 진작에 없어졌다 | 보통 시민들의 삶을 알지 못하는재판관 | 배심원 제도가 시작되지만 | 결함투성이의 검찰과 경찰제도 |전단을 뿌렸다는 이유로 체포당한 시민 |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과도한중앙집권 | 덧붙여 


2장 일그러진 교육 
겨우 정원 40명의학급에서 해방되었다 | 초등학생까지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수험체계 | 출신 대학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 100년 전으로 후퇴한 교육 |교과서검정이라는 이름의 사상 통제 | 잘못된 교육보다 더 나쁜 획일적인 교육 | “교육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소” | 부패의 최대 원인은무엇인가 | 성교육에 비열한 공격을 해대는 정치인 | 유럽의 성교육은 | 너무 비싼 대학 수업료 


3장 이름뿐인 남녀평등 
할당제를정착시킨 노르웨이 | 전 세계에서 42번째 | 일본에도 남녀평등법은 있는가 | 옴부즈맨 없이는 평등도 없다 | 485 : 17.5라는 부끄러운수치 | 남성의 귀가시간이 너무 늦다 | 육아휴가를 사용하지 못하는 나라 | 방치되고 있는 보육행정 | 너무 낮은 여성의 임금 | 여성을어린아이 취급하는 후진성 | 여성은 ‘애 낳는 기계’일까 | 사실혼이 왜 나쁜가 | 혼외자식을 차별하는 일본 | 소외당하는 편모가정 | 교육비가너무 비싸서 아이도 못 낳는다 | 수치스러운 진실 | 가장 악질적인 곳은 "남녀공동참가국" | 남성도 보호받아야 한다 | 덧붙여


4장 열악한 노동의 실태 
독일인보다3개월을 더 일한다 | 노동기준법이 있어도 막을 수 없는 잔업 | 과로사, 정신질환이 증가하고 있다 | 이름뿐인 연휴 | 가혹한 출퇴근길 | 그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 노동빅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한다 | 노동시간은 늘리고, 임금은 줄이는 재량 노동제 | 잔업수당마저없어진다면 | 최악의 최저임금제 | 메말라가는 사회보장제도 | 고령자에 대한 심각한 처우 | 노후를 보장할 수 없는 연금제도 | 장애인에 대한비인간적 처사 | 보험금 지급을 기피하는 기업들 | 국민들에게 떠넘겨지는 세금 


5장 거꾸로 가는 환경정책 
탁상공론의환경 대책 | 문제는 자동차다 | 가정에서의 노력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 물류수송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 원자력발전의 이익과 위험 |자연에너지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 쓰레기를 만드는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 무책임한 국제거래 | 바이오 에탄올에 의존하는 것은 빈곤을 확대시킨다| 기술진보만 믿어서는 안 된다 | 이제는 시민이 나서야 할 때 | 일상생활을 편안하게 | 한낮에도 불을 켜는 낭비적인 행동 |아직도 많은환경문제가 남아 있다 | 트럭이 너무 많다 | 자동차 산업은 반성하고 있는가 | 일본에 넘쳐나는 소리, 소리, 소리 


6장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 
덴마크를되돌아보며 | 선진국의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여성, 아동, 국민, 환경들을 배려해야 한다 | 둘째, 선진국은 타국을 위협하지 않는다 |덧붙여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후진적 정치의 현실

일본의 정치, 행정을 살펴보면 부정부패, 불상사, 과오, 정경유착, 담합 등 없는 것이 없다. 너무 많은 후진적인 현상이 거의 매일 발생해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5,000만 건의 연금 기록이 기초연금과 통합되지 않아 연금보험료 납부 기록이 몽땅 날아간 사태였다. 사건이 알려진 후의 계산으로는 -비록 기계적인 계산이지만- 날아간 총액이 약 2조 3,500억 엔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로 인해 한 사람당 허공에 붕 뜬 기간은 3년을 약간 넘는다. 수급자 입장에서는 3년 분의 연금액이 삭감될 테니 수급액이 대폭 줄어든다. 아니, 오히려 이 기간 동안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았다고 간주되면 연금 미지급자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합리적, 능률적이라는 관료제가 이리도 도움이 안 되는 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이외에 또 있을까 싶다.


정부의 사명을 포기한 연금기록 소실 사건

또 영수증은 있는데 사회보험청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사라진 연금의 경우에는 입력 실수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직원들이 그 돈을 횡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보면 일본이 완전히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기에는 뭣하지만 후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는 실제로 관료가 공금을 횡령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이다. 그런데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도 공적 기관의 관료들이 공금을 횡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사태를 검증하기 위한 기구를 설립할 능력도 없고, 설립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다는 점에서 정부(내각)는 이미 정부로서의 사명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총무성의 연금기록문제 검증위원회가 이 문제를 담당했지만 이 위원회는 아무런 강제력도 없는 임의조사만을 했을 뿐이다. 조사를 시작할 초기만 해도 고위공무원(장관 포함)을 포함해 조사에 성역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정작 사회 보험청 장관을 제대로 인터뷰조차 하지 않았다. 5,000만 건의 연금 기록이 사라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려 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이다. 정부의 그러한 태도가 사건 자체보다 더 고약하고 악질적이다. 현재 일본은 연금제도가 붕괴하고 있다. 그것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다름 아닌 정부이다.


관료가 법이 되는 후진적 구조

직무태만, 횡령, 부정부패의 뿌리도 깊지만 관료제와 관련된 문제 중 가장 뿌리 깊은 것이 바로 법에 의한 행정이 아니라 법에 의하지 않는 행정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법을 대신해 관료 자신이 법이 되는 행정지도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관행이 오랜 기간 동안 행해져왔다. 이 행정지도가 과도한 권력을 관료에게 부여하면서 낙하산 인사, 부정 부패, 정격유착의 온상이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을 후진국으로 만들어버린 최대의 요인이 바로 이 행정지도이다.


어째서 일본에서는 관료에 의한 행정지도가 가능한 것일까. 그 요인 중 하나는 일본의 법률이 거의 대부분 정부에서 제출되고 있는 정부 법안이기 때문이다. 즉, 관료 자신이 법률을 제안하는 당사자라는 뜻이다. 일본의 법률, 특히 공법 관계의 법률은 큰 틀만을 잡아놓은 채 아직도 불확실한 부분을 남겨놓고 있다. 그 결과 세부사항은 성령, 규칙, 통달 등 다시 말해 결국 관료에게 위임되는 형태로 결정된다. 또 "때에 따라서 관료에 의한 행정명령을 필요로 한다"라고 명시해놓기도 했다. 관료들은 이것을 근거로, 아니 때로는 명확한 근거조차 없는데도 행정지도를 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을 불려왔다.



일그러진 교육

최근의 일본 교육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정부는 교육을 파탄 낼 작정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에는 교사의 존재가 필수이다. 그들 없이는 교육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교사를 위축시키고 의욕을 꺾어버리는 정책을 줄줄이 토해놓다니 정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1990년대부터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대신 지원하는 것으로 그 방향을 바꾸었다. 물론 학생들에 대한 지원은 중요하다. 학생들은 교육권(학습권)을 가지고 스스로 지식을 흡수해 성장해나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문부과학성과 각지의 교육위원회가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교사들을 지원해야 할 문부과학성과 교육위원회는 교사들을 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교사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교사들의 자주성을 박탈해 그들을 통제하고 교육을 파괴해온 것이다. 그러고 있으면서 교육에 필요한 기초적인 제반 정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런 엉터리 교육정책에 교사와 학생들 모두가 희롱당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선진국이라 자처하는 일본의 현실이다. 일본처럼 선진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교육행정을 펼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교육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소"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념에 따라 행정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특히 교육의 경우는 더 그렇다. 그 이유는 교육의 기본 원칙이 바로 교육의 자유 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자유란 공권력이 교육에 개입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현장에서의 교사의 수업(내용과 방식에서도)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의 자유는 교사의 자주성이야말로 학생들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키우는 데 가장 좋다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교사들도 잘못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여도 일일이 문책을 한다면 교육은 죽어버린다. 교사가 따라야 할 것은 오로지 단 하나, 교사로서의 양심뿐이다.


1946년, 전쟁에서 패한 일본의 교육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미국의 교육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 사절단의 보고서에는 교사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교사가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교육의 자유를 표명한 교육사절단에게 당시 다나카 켄타로 문부과학성 학교교육국장은 교육의 자유를 인정했다가 교사가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 질문에 사절단은 그러한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소수의 문제라고 대답했다. 그런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당연히 교사도 잘못을 한다. 또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교사들을 통제한다면 오히려 획일적인 이념만이 교육 현장을 지배해 다양한 교육을 해친다. 실제로 오늘날, 공산주의 등의 낡은 정치적인 이념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등 교육을 죽이는 사람은 더 이상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민당과 뜻을 같이 하는 문부과학성과 이시하라 도지사의 손발 노릇을 하는 도쿄도 교육위원회가 교육을 죽이고 있다. 문부과학성과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교육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 자체가 교사들이 잘못된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크고 심각한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통제에 의해 고정된 사상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면 자주적 판단 능력을 가진 시민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적인 시민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한다.


보다 나은 일본을 만들고 싶다면, 현실이 어떠하든지 항상 그것을 비판적으로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교육에 대한 강제행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이름뿐인 남녀평등

일본이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다른 선진국과 가장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남녀평등이다. 남녀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은 완전히 후진국이다. UN 개발계획은 인간적인 개발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일련의 지수를 고안했다. 2007년에 발표된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국민소득, 평균 수명, 교육 보급률을 기준으로 산출한 인간적인 개발지수가 총 177개국 중 8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지수에 남녀 간의 격차를 추가한 남녀 개발지수로는 13위로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의회에서 여성의 의석수, 고위 공무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 남녀의 소득 차이를 반영한 남녀 권한지수(GEM)로 보면 실질적으로 비교 가능한 75개 나라 중 42위로 순위가 떨어진다. GEM 비교 결과의 상위에는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덴마크, 벨기에 등이 포진되어 있다. 이렇듯 북유럽 국가들의 GEM 수치가 높은 것은 바로 할당제 때문이다.


할당제를 정착시킨 노르웨이

GEM에서 1위를 차지한 노르웨이도 원래는 모든 분야에서 남성이 유리한 남성 중심의 세계였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여성의 활발한 사회 참여를 요구하는 사람들(대부분이 여성이었다)의 활동에 힘입어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8년, 다시 말해서 일본의 남녀공동참가사회기본법이 만들어지기 21년 전에 노르웨이에서는 남녀평등법이 성립되었다.


이후 1981년에는 남녀평등법에 공적으로 설치되는 모든 이사회, 심의회 및 위원회는 남녀 위원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조문이 추가되었다. 1983년에는 각 정당이 선거인명부의 일정수를 여성에게 배분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1988년에는 4명 이상의 위원을 가진 공적기관은 한쪽 성이 총 구성원의 40%이상 선출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넣기에 이르렀다. 현재 노르웨이 내각에서는 이 조문에 기초해 전체 인원의 약 40%를 여성 관료가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가 GEM 수치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이러한 남녀평등의 할당제를 도입한 결과이다.


전 세계에서 42번째

이에 비해 일본은 어떤 상황인지 살펴보자. 최근 지사급 공무원에 여성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정부의 각종 심의회에도 많은 여성의원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국회는 여전히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국회에 출석하는 행정부의 고위공무원들도 대부분이 남성이다. 사법 분야에서의 남녀불균형은 다른 곳보다 더욱 심하다. 강간사건에 대해서 재판관들이 편향된 인식을 각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남녀불균형 때문이다. 심의회에서도 여성의 수는 많지만 요직을 맡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남성이다. 국회에 아이들과 가족을 응원하는 일본을 위한 중점전략 검토회의라는 것이 있다. 이 회의를 구성하고 있는 16명의 위원 중 여성의원은 불과 3명이다. 특히, 직책을 가지고 있는 7명의 위원 중 여성의원은 고작 1명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러하니 GEM 수치가 전 세계에서 42번째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후진적이고 불균형한 현재 상황을 바꿔야 하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사명이다. 정부 내부에서는 적극적인 차별 수정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이 정책은 정부만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구속력을 가지고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사회는 일본을 신뢰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인 차별 수정정책으로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중에서 할당제가 가장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다. 그것은 그 어떤 이유도 정치를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 현장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사태를 합리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 그런 남녀가 공동으로 사회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서로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는 남녀가 함께 의사 결정에 참가할 수 있도록 조건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


남녀관계는 우리들의 인간성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사회, 정치 분야로 진출하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는 나라는 선진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 남녀평등이야말로 선진국을 선진국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이다.



열악한 노동의 실태

"일본은 풍요롭지만 국민은 빈곤하다." 이 말은 철학자 보부아르가 1966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남긴 말이다. 그녀는 일본 각지를 정력적으로 돌아보며 국민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렇게 서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의 사정은 그때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생활수준이 나아지기는커녕 빈부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많은 국민들은 그저 먹고사는 데 급급하다. 이것이 바로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독일인보다 3개월을 더 일한다

일본인들이 빈곤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길고 긴 근로시간 때문이다. 2004년 현재, 풀타임 정규직 노동자(제조업)의 노동시간은 200시간의 잔업시간을 포함해 연간 2,012시간으로 보고되었다. 여기서는 국제 비교를 위해 제조업을 거론했지만 산업 전체의 평균 노동시간은 그 98%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같은 G7+1 구성국인 독일에서는 노동시간이 연간 1,600시간 정도이다.


엄밀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통계상 이 비교는 대략적으로 두 국가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두 국가의 노동시간에는 약 400시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 시간은 독일인에게는 3.1개월분의 노동시간이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독일인들이 볼 때 필요도 없이 3개월을 더 일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과 독일의 노동시간 비율은 약 5:4이다. 이것은 독일이 다섯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네 명만을 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 일본의 경우는 노동시간이 실제의 노동 실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일본 기업들은 노동자에게 엄청난 잔업을 시키면서도 그 일부분에 대해서 정규잔업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노동자들은 통계보다 더 일한다고 볼 수 있다.


가혹한 출퇴근길

일본에서는 출퇴근 시간도 살인적으로 길다. 대도시권에서는 왕복 2시간은 기본이고 3시간이 걸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실제로 「대도시 교통 센서스」에 따르면 수도권에서는 출퇴근하는 데 평균적으로 편도 67분이 걸린다. 킨키지역(오사카, 효고, 교토, 나라, 시가, 와카야마를 합친 지명)이나 나고야에서도 대부분 60분을 초과한다. 출퇴근에 이만큼 시간이 걸리면 가정생활에도 영향을 끼친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는 사람이 세 개 지역을 합해 22%이며, 7시 반에 나선다는 사람은 50%나 된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귀가시간이다. 도쿄의 남성들이 귀가하는 시간은 평균 오후 9시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늦는 사람들도 많다. 오사카에서도 밤 11시가 지나고 양복 차림의 회사원들이 통근열차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밤 12시이다. 집에 돌아가서 늦은 저녁을 먹거나 목욕이라도 하면 금방 새벽 1시가 된다. 그 다음날이 쉬는 날이 아닌 이상에야 겨우 서너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통근열차에 몸을 싣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유럽 대부분의 국가, 특히 독일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독일에서는 공공기관이 토지를 우선적으로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공공기관들은 그렇게 매입한 토지를 이용해 교외에 공영주택단지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1시간을 넘는 일은 없다. 아니 30분을 넘었다가는 정치문제화 될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토지가 투기의 대상이 되어 있어서 공공단체가 공영주택을 지을 토지조차 만족스럽게 확보할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공유지마저 재정악화로 매각할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주택정책은 점점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통근전철은 비상식적일 정도로 혼잡하다.


도시에는 막차조차도 혼잡하다. 출퇴근 시간의 혼잡함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출퇴근 시, 승객들은 전철 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선 채로 1시간 가까이 흔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거꾸로 가는 환경정책

탁상공론의 환경 대책

2006년, 독일의 하이리겐담에서 열린 선진국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발표한 지구온난화 대책이 바로 아름다운 지구 50이다. 여기서 일본 정부는 2050년까지 세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장기 목표를 발표했다(이 내용을 2008년 1월에 다보스포럼에서 후쿠다 총리가 다시 반복했다). 그렇다면 이런 선언을 하게 된 일본 정부는 과연 어떤 대책을 갖고 있을까?


애초의 교토의정서에 따르면 일본에게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에 비해 6%를 줄이라는 과제가 부과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 목표가 달성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2007년에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990년 대비 40%나 증가했다. 이런 결과는 이 기간 동안 일본 정부가 아무런 대책도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토의정서를 준비한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면서도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일본의 이런 발표는 결국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대한 일종의 요식적인 선언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일본에게는 결국 강제적인 의무가 부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 이런 발표를 하면 정부가 그런 계획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수치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EU가 같은 시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60~80%까지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에 비하면 훨씬 더 현실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EU의 발언은 일정한 실적을 내고 있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실적이 전혀 없다. 일본에게는 오직 "기술의 진보로 개선되리라"는 지극히 안일한 기대만이 있을 뿐이다.


기술진보만 믿어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는 기술혁신으로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기술혁신도 분명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산화탄소를 땅 속에 묻는 방법이 가장 궁극적인 지구온난화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일이 가능하다면 기술의 발달을 선도해 온 일본은 당연히 전 세계의 기대를 모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그 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저 배출량을 줄이지 못했다는 결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팔짱만 끼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인 탄소세를 도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을 실현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기술의 진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기술이란 현실의 규제가 있어야만 비로소 개발이 시작된다. 미국의 유력기업들의 모임인 미국 기후행동 파트너십의 규제야말로 미국의 기업을 강하게 하고, 기술혁신을 낳았으며, 국제적인 경쟁력을 키웠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업공해가 일본열도를 뒤덮었던 1960년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엄격한 통제장치를 취함으로써 기술혁신을 촉진시켰다. 그렇게 해서 대기오염, 소음, 수질오염 등을 개선했다. 1970년대의 자동차 배기가스에 대한 대책도 이와 비슷하다. 당시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의 주범인 질소산화물을 90%까지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정부가 단호한 자세로 규제를 계속함으로써 결국 이 목표를 달성시킨 것이다.


이제는 시민이 나서야 할 때

그리고 보다 광범위한 대책을 가능하게 하고 저탄소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부(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지나친 중앙집권제도의 병폐가 환경문제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중앙의 관료들은 근거도 없는 신화에 사로잡혀 지방정부의 선진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체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난 시민과 지역 행정의 노력 그리고 아이디어는 다양한 정책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결코 추상론이 아니다.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최근 각지의 지방정부 및 의회는 줄곧 획기적인 정책을 입안해왔다.


예를 들어 도쿄도에서는 중앙정부 에너지 라벨을 도입해 석탄에너지를 자연에너지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또 2008년을 목표로 도내의 각 대규모 사업장에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을 의무화하고, 탄소세를 도입하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니가노현에서는 2006년에, 현에 사는 주민들은 자가용을 사용하는 대신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를 사용하는데 협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대중교통과 자전거의 사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사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조례도 제정했다. 또 히로시마에서는 타 지역보다 앞서서 2009년부터 시내에서 배출가스를 거래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할 방침을 명확히 하고 있다.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

선진국의 조건은 무엇인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서는 전쟁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경제가 발전하고 국부가 쌓이면서 GNP(GDP)가 세계 유수의 국가들과 겨룰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다. 애당초 GNP의 크기 자체가 항상 좋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GNP는 교통사고가 일어나도 증가한다. 또 환경 파괴가 진행되어도 그것이 국민생활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면 GNP는 상승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GNP가 아니라 바로 국민이 생활하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공업화가 얼마나 진전되었고 경제가 얼마나 발전했으며 국부가 얼마나 쌓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업화가 무엇을 중시하며, 발달한 경제력을 어디에 사용하고, 그 결과 국부가 누구의 생활을 지탱하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고속 열차가 달리고, 각지에 고속도로가 깔린다고 해도 국민들이 빈곤과 열악한 환경에 시달린다면 일본은 도저히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일본은 헌법 제9조 덕분에 노골적으로 대일본주의(대국주의)를 표방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 매년 5조 엔의 돈을 군사비로 책정하고 있다. 게다가 테러 방지라는 명목으로 자위대를 해외에 파병시키려고도 한다. 그리고 재계가 이런 일들을 정부에 대한 정책 요구로 주장하고 있다. 또다시 느리기는 하지만 뚜렷하게 무비판적인 국가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는 국민의 생활보다는 자본의 움직임을 더 중시한다. 그런 이유로 자본과 재계가 의도하는 바대로 경제, 노동 시스템을 바꾸는 등 국민생활을 희생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나아가 그 움직임은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마력과도 같은 관념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바로 그 국제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삼아 대국주의의 망령이 다시금 일본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현재, 재계에서는 독점금지법이 유명무실해져 기업들은 대규모의 기업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게 거대해진 자본의 요구는 노동빅뱅을 일으켜 국민들에게 새로운 빈곤을 안겨주고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빈부격차를 넓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업은 법인세와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보험료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국민들에게 소비세의 증액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본의 대국주의가 국민의 생활을 희생시키고 있는지, 여성을 차별하는지, 교사가 아이들을 -재계가 원하는 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국민으로 만드는지, 정치, 행정, 사법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일본은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생활을 중시하고, 여성이 처한 악조건을 개선하고, 아동을 경쟁적 환경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또한 정치, 행정, 사법의 활동이 국민의 권리, 이익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적인 길을 걷게 해야 한다.


2007년 11월, 독일 연방의회 부의장이 노숙자 문제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각 나라들이 시행하고 있는 소수집단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처우야말로 그 나라가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고령자, 장애인, 여성, 아동, 노동자, 외국인에 대한 오늘날 일본의 처우를 보노라면 일본은 도저히 선진국이라 부를 수 없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