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오디세이

   
정여울
ǻ
라이온북스
   
15000
2008�� 10��



■ 책 소개
유선전화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 무선호출기시대를 광속으로 통과한 후, 우린 인터넷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무선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다. 모바일로 소통하기까지 그리고 그 다음은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인지 그 해답을 찾고자 시간여행을 떠나는 책.

 


새로운 소통법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으로 우리는 하루에도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한다. 때로는시간을 아낄 수 있고 때로는 불편하게 들고 다녀야 할 도구들을 하나의 도구로 결집해놓아 지하철에서 TV도 보고, 이메일도 체크하며, 낮에 만나지못한 사람에게 안부의 메시지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진화는 또 다른 문화의 발전과 경제적 가치를 주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만든다. 


이제 모바일은 단지 기술혁명의 상징이 아니라 현대인의 또 하나의 분신이자, 21세기커뮤니케이션 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올해로 20년이 된 모바일의 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만들고자한다. 모바일과 커뮤니케이션을 결합한 소통의 도구, 기술의 진화가 준 행복한 선물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모바일 역사의 중심에 있는 모든트렌드세터들에게 새 날을 위한 즐거운 상상을 하기를 바란다. 모바일 트렌드세터가 한 사회와 시대를 주도하는 리더가 되었듯, 미래 역시 현재상상한대로 이루어낼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책으로 사회, 문화, 경제 등에서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고 그려내기를희망한다.


■ 저자 정여울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GQ」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썼다. 2008년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하며, 라디오 프로그램 "시사플러스", "문화야 놀자" 등의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가씨,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공저)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옮긴 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1895~1919』가 있다.


■ 차례
모바일 프리즘으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커뮤니케이션을 가로지르다


Prologue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행복한 시간 여행을떠나다


Yesterday : 모바일 프리즘으로 과거를회상하다
: Combination : 종이컵 실전화, 최첨단 모바일과 공존하다
: Message : 끼적끼적……, 한장의 편지에 수많은 메시지를 쓰다
: Memory : 모바일의 전신, 유선전화를 추억하다

Today : 모바일프리즘으로 현재를 보다
: Avatar : 편안해서, 고단해서, 행복해서……, 모바일은 현대인의 분신이다
:Multimedia : 지금의 우린, 전천후 멀티태스킹의 달인이다
: Mentor : 외롭지 않은 나로 거듭나다
: Contact :편지와 일기……, 내 안의 소리치는 함성을 담아내다
: Imagine : 생각대로 행복해진 세상을 꿈꾸다


Tomorrow : 모바일 프리즘으로 미래를투영하다
: Happiness : 생각대로 이룬 기술의 진화, 소통의 행복을 꿈꾸다
: Unlimited : 진화,그 빛과 그림자에 발을 내딛다
: Inner-view : 모바일 혁명의 주인공들, 그 미래를 말하다


Epilogue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을 넘어 행복한 소통을꿈꾸다




모바일 오디세이


Prologue -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행복한 시간 여행을 떠나다
모바일 혁명은 인류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모바일 이전과 모바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문화적 파장 효과를 가져왔다. 휴대전화는 멀리 있는 너와 여기 있는 나를 연결시키는 소통의 미디어를 넘어 휴대전화의 존재 자체가 의인화되어 유사인격을 가진 반(半)생물체가 되어가고 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리거나 집에 두고 나온 날, 사람들은 지갑을 잃어버리거나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것만큼이나 불안해하게 된 것이다.


모바일 테크놀로지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전천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휴대전화는 이동성뿐 아니라 개별성과 비밀성을 증가시켰고, 휴대전화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거나 극단적인 프라이버시를 지향하는 문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휴대전화의 최대 이변은 문자메시지의 커다란 역할이다.


이제 사람들은 음성메시지보다 문자메시지가 마음을 전달하는 데 더 적합한 미디어라고 느끼곤 한다. 문자메시지는 타인의 일상을 침입하는 휴대전화의 공격성을 최소화하면서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지니는 부담감을 해소한다. 뿐만 아니라 얼굴을 보고 말하기 어려운 그 모든 사연을 간결하고 분명하게, 게다가 다양한 이모티콘 이미지로 의미를 보충할 수 있는 전천후 커뮤니케이션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브의 말처럼 우리는 살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자주 마주친다. 떠오르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가까스로 언어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언어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상황. 너무나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도저히 생각의 속도를 언어의 속도가 따라갈 수 없는 상황. 느낌은 너무도 생생한데 명료한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상황. 그럴 때마다 ‘대답이 아니지만 충분히 대답이 되는’ 또 하나의 기호를 상상하곤 한다.


이제 휴대전화는 산업과 기술의 문제를 넘어 현대인의 삶을 담아내는 거대한 문화적 용광로가 되었다. 그 어떤 집단이나 담론에도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개인의 기억’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일인 미디어’로서의 모바일. 똑같은 휴대전화 모델이 수백만 대씩 팔려나간다 하더라도 그 모델을 가진 사람에 따라라 그 휴대전화는 오직 이 세상에 하나뿐인 고유한 미디어가 된다.


모든 휴대전화에는 저마다의 여행, 저마다의 삶의 무늬가 담겨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 주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저마다 자신만의 개성을 실험하는, 생명 없는 주체로서의 모바일. 모바일은 이미 또 하나의 사이보그의 일종으로서 진화하고 있다.


세상 모든 휴대전화가 단순한 ‘상품’을 넘어 저마다의 ‘사이버 주체’로서 겪어내는 시공간의 여행. 그것을 가리켜 나는 ‘모바일 오디세이’라 부르고 싶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그 20년의 문화기행.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지구촌 곳곳에서 전적인 환영을 받은 것만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휴대전화가 일종의 감옥이라고 여겨지는 반면, 싱가포르 같은 곳에서는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전체 인구를 넘어섰다고 한다. 휴대전화는 각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 개개인의 욕망에 따라 저마다 다채롭고 이질적인 여행의 별자리를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누구나 한 대씩 가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존재로서의 모바일, 동시에 오직 하나뿐인 개인의 경험을 담은 유일무이의 특수한 미디어, 모바일 테크놀로지의 문화적 여정을 따라가는 여행기가 될 것이다.



Yesterday : 모바일 프리즘으로 과거를 회상하다
Combination : 종이컵 실전화, 최첨단 모바일과 공존하다

기술은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그 기술을 자신의 삶에 밀착시키고 삶을 변형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힘이다. 휴대전화는 도구의 혁명을 넘어 정서의 혁명이자 감수성의 혁명을 일궈냈다. 모든 이용자를 ‘수다쟁이’로 만드는 엄청난 감성적 폭발력을 지닌 모바일 세계.


우리는 흔히 새로운 기술은 과거의 기술을 쉽게 몰아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최첨단 신기술이 등장해도 여전히 아날로그적 소통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삐삐는 휴대전화가 탄생하는 순간 소멸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전히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호회까지 결성하며 삐삐만이 가진 소통의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다.


TV 드라마에서조차 휴대전화가 자주 등장하지만, 휴대전화로는 자아낼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동이 종이컵으로 만든 실전화로 창조되기도 한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꼬마 은솔이는 이혼한 엄마(오윤아 분)의 새로운 사랑을 응원해주기 위해 옆집에 살고 있는 동진 아저씨(감우성 분)에게 실전화를 건다. 채 10m가 되지 않는 가녀린 실오라기를 타고 흐르는 사랑의 메시지는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아 세상을 향한 마음의 창문을 닫아버린 은솔이를 깜찍한 사랑의 메신저로 만든다.


물론 열려진 저쪽 창문으로 힘껏 소리쳐 아저씨를 부르면 될 일이지만, 아이는 굳이 실전화를 이용해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안타까운 속삭임 때문에 아이가 전하고 싶은 사랑의 메시지는 더욱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실전화는 편리함 때문이 아니라 그 엉뚱함과 소박함, 느닷없음 때문에 더욱 더 수신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아저씨……아저씨……아저씨.”
“아저씨, 제 아빠가 되어주세요.”
“저는 착하지도 않고, 웃는 모습이 예쁘지도 않지만, 제 아빠가 되어주세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이의 진심은 복잡한 디지털 기술을 거치지 않고도 오롯이, 뚜렷이, 절절하게 전달된다. 동진은 감동한 나머지 아이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은솔아, 너는 충분히, 지금도 충분히 지금도 착하고, 웃는 모습이 예뻐.”


사람들은 기술의 편리함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기술의 발전으로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소통의 질감을 아련한 향수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신기술과 구기술을 융합하는 새로운 대안을 찾기도 한다. 유선전화의 끝없는 진화가 단적인 예다. 유선전화는 휴대전화의 끊임없는 진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유용성을 잃지 않고 있다. 유선전화는 단지 유선전화에 대한 향수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성이 여전히 인정되고, 무엇보다도 첨단 모바일 신기술을 끊임없이 유선전화의 구모델과 합체하는 유연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 유선전화는 음성통화뿐 아니라 문자메시지, 생활정보 서비스, MP3와 게임, 벨소리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컨텐츠 다운로드, 최대 15명까지 다자간 통화, 일기예보, 부재중 전화, 내선통화전환, 자동응답, 착신전환 등 다채로운 서비스로 여전히 유선전화를 애용하는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첨단 신기술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신기술의 편리함만으로는 향유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소통에 대한 향수야말로 유선전화를 끊임없이 진화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Today : 모바일 프리즘으로 현재를 보다
Contact : 편지와 일기……, 내 안의 소리치는 함성을 담아내다

유선전화 시대에는 가정에서조차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한 가족이 전화 한 대에 매달려 있는 셈이었고, 통화가 조금이라도 길어지거나 은밀해질라 치면 어김없이 부모님의 엄격한 ‘태클’이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중전화에 길게 늘어선 줄은 언제든지 내 통화가 공공영역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휴대전화의 대중화로 인해 우리에게는 진정 ‘움직이는 나만의 방’이 생겼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비밀의 방을 갖게 된 것이야말로 모바일 혁명의 핵심적인 사회적 의미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은밀하고 다정하게, 사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를 가능하게 한 일등공신은 아마도 문자메시지일 것이다. 문자메시지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덜 직접적이지만, 이메일보다는 훨씬 친밀하고 직접적이며,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쑥스럽고 어색한 감정 표현을 각종 이모티콘과 함께 풍요롭게 전달할 수 있다. 문자메시지는 면대면 접촉의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거나 면대면 접촉 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돌발상황을 미연에 제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젊은 세대들은 문자메시지를 음성통화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낀다. 유선전화의 연장선상에서 음성통화를 선호하는 기성세대에 비해 젊은 세대들은 음성통화에서는 불가능했지만 문자 메시지에서는 가능한 것을 발빠르게 포착하여 활용한다.


신호음은 전화 거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초조하게 하고 때로는 화나게도 한다. 이때 언제든지 누구와 통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전화 거는 사람의 생각에 일차적으로 제동이 걸린다. 벨소리는 전화 받는 사람의 현 상태에 대한 일종의 침입이다. 문자메시지는 상대방의 일상에 개입하되 침입하지는 않는다. 가끔 대출 관련 스팸메일이 우리의 신경을 거슬리게도 하지만 지금 당장 내 일을 접고 답신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완화시킨다. 문자메시지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지만 꼭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는 기다림의 표현이다. 또한 “당신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언제든 내게 연락해주세요.”라는 따스한 배려가 담긴 몸짓이기도 하다. 문자메시지가 음성통화보다 감정적 부담을 줄여 준다는 점에 대해 십대들은 더욱 열광한다. 무료 문자메시지 100통의 혜택뿐 아니라 더욱 다채로운 시공간에서 언제나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문자메시지를 통한 비공식적인 교감이야말로 모바일의 매력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모든 거인 양 열광적으로 떠들 수 있게 하는 것, 띄어쓰기 생략과 약어의 사용, 구어적인 표현, 발음 나는 대로 적기 등 잘못 쓴 말은 교정되지 않고 오히려 의도된 것이다. 이런 점이 문자메시지의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성격, 은밀한 사적 소통과 교감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에는 대화의 컨텐츠보다 대화의 상대가 중요해진다. 대화의 격식보다는 대화의 쾌락이, 대화의 내용보다 대화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해진다. 대화 상대가 내가 무선통신상을 통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느낌, 나아가 아무와도 교신하고 있지 않을 대보다 적어도 휴대전화와 나는 함께 있다는 공존의 감각 자체가 중요해진다. 메시지 전달이라는 전통적이고 실용적인 목적보다도 모바일 통신이 가능케 한 ‘함께 있음(Co-Existence)의 느낌, ’어디에나 있음(Pan-Existence)의 달콤한 환상이 중요해진 것이다.


문자메시지라는 새로운 미디어 때문에 자녀들과의 소통에 더 큰 어려움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부모님들도 많다. 휴대전화는 친구와 친구, 친구와 연인 사이의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강화시켰지만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사이의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에 더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부모와 교사의 교훈적 메시지를 거부하고 싶은 십대들에게는 언제든지 또래들과 연결될 수 있는 문자 메시지의 소통이 탈출구가 된다. 부모와 교사들에게는 휴대전화가 마치 아이들 옆에 있는 보디가드처럼 아이들의 세계에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또 하나의 장애물로 느껴지는 셈이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를 ‘장벽’이 아닌 또 하나의 소통의 창구로 생각한다면, 문자메시지로 인해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은 더더욱 친밀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꿈꿀 수도 있다. 모바일 테크놀로지 자체가 소통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바일 테크놀로지에 어떤 욕망과 의지를 실어 나르느냐에 따라 장애물은 도리어 드넓은 교감의 장으로 역전될 수도 있다. 특히 자녀들에게 문자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보내는 부모들에게 자녀들은 훨씬 더 친밀함을 느낀다는 것이 다양한 연구결과를 통해 입증되었다.


문자메시지는 ① 전화로 하기 어려운 민감한 사안을 더욱 쉽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고, ② 좀 더 친밀하고 정서적인 교감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게 해주며, ③ 아주 간결한 메시지 전달만으로 마음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으며, ④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거나 음성전화를 하는 것보다 필요 이상의 감정 소비를 하지 않아도 되며, ⑤ 무엇보다도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을 결과적으로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십대들의 문자메시지 예찬론의 근거들이다.


눈치 보기, 예의 차리기, 에둘러 말하기에 익숙한 고맥락 사회의 대화에 필요한 갖가지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 음성이나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고 의사전달에 실패할 수 있는 복잡한 심경을 간결한 문자메시지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문자메시지의 정서적 효율성이다.



Tomorrow : 모바일 프리즘으로 미래를 투영하다
Happiness : 생각대로 이룬 기술의 진화, 소통의 행복을 꿈꾸다

이동 중에도, 언제 어디서라도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기에 우리는 더더욱 상대방의 메시지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 그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해, 끊임없는 대기상태에 대해 항시적으로 불안을 느끼게 된다. 모두가 자유롭게 언제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다는 유비쿼터스의 환상을 가능케 한 것도 모바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아니, 이 좋은 세상에 왜 내 메시지는 너한테 전달이 안 되는 거지?“, ’기술이 유비쿼터스면 뭐해. 지금 너는 당장 내 전화를 안 받는데.‘ 하는 소통의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휴대전화 사용 문화 자체가 세대 사이에 일종의 ‘구별 짓기’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또 하나의 문화적 장벽이 생긴다는 불평을 호소하는 어른들도 많다. 결정적으로 휴대전화로 인해 부모들은 더 자주 더 깊이 자식들에게 개입하려는 욕망을 가지기 쉽고, 그로 인해 더욱 더 자식들의 일상에 개입하고 집착하는 성향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문제다.


기술 혁명은 인간의 욕망을 매일매일 업데이트시키고 욕망의 한계를 점점 확장시켜가지만, 기술의 발전이 문화의 속도와 일치할 수 없고, 기술의 발전만으로 닫힌 인간의 마음을 열 수도 없다.


문화는 언제나 인간이고 욕망이고 일상인 것이다. 유비쿼터스의 유토피아를 꿈꾸게 한 것도 모바일이지만, 유비쿼터스가 달콤한 장밋빛 환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한 것도 바로 모바일인 것이다.


문자메시지를 작성하거나 수신할 때, 우리는 사유의 여백을 가지게 된다. 독한 저주의 말이 튀어나올 때 한 번쯤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즉흥적인 감정적 표현을 썼다 지울 수도 있다. 격한 감정을 문자로 동글동글하게 다듬을 수 있고 써서는 안 될 표현은 지울 수도 있다. 휴대전화로 헤어진 애인의 얼굴을 찍은 동영상을 볼 수도 있지만, 보고 싶은 엄마의 얼굴을 영상통화로 한방에 해결할 수도 있지만, 사람의 체온과 살 냄새가 가진 스킨십의 아우라를 그 어떤 ‘헵틱’ 모바일 커뮤니케이션도 따라갈 수는 없다. 아무리 가상 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진화해도, 면대면 접촉만이 가진 고유의 질감을 대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우리는 모바일을 통해 진정 자유로워졌을까? 휴대전화를 통한 ‘하이퍼 퍼스널 커뮤니케이션의 달인’들, 십대들도 알고 있다. 결국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커뮤니케이션을 모바일이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휴대전화를 통해 더 많은 수의 친구를 찾고 싶은 것이 아니라 원래 좋아하는 사람과 더 깊은 소통을 원한다는 것을.



Epilogue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을 넘어 행복한 소통을 꿈꾸다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전화의 버튼을 누르고, MP3의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우리는 직장이나 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목적지로 흩어진다. 이 모든 기계화된 메시지를 몸에 달고 살다 보면 정작 우리의 몸이나 자연이 끊임없이 보내는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미셸 셰르의 『천사들의 전설』은 TV와 인터넷을 비롯한 전형적인 미디어뿐 아니라 먼지, 꽃가루, 흙, 물, 불, 바람 등 이 모든 크고 작은 식물들이 우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임을 환기시킨다. 이미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비주얼에 중독된 우리는 ‘메시지’의 의미가 아닌 ‘메신저’의 이미지에 현혹된다. 뉴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보다는 앵커에 주목하고, 프로그램의 제목은 기억 못해도 아나운서의 얼굴은 기억한다. 미셸 셰르는 이렇듯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호가호위하는 현상이야말로 메신저의 타락이자, 메시지의 왜곡이라고 진단한다. 진정한 메신저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순간 스스로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바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메신저의 모델이다. 어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아직도 한 줄기 바람에서 번져 나오는 냄새와 습기와 온도를 몸으로 해독하고 날씨는 물론 바다 속 물고기의 상태까지 알아맞힌다고 한다. 한 줄기 바람은 전 세계의 무수한 정보를 실어 나르는 바지런한 메신저인 셈이다.


미셸 셰르는 훌륭한 메신저는 자신의 모습을 뽐내지 않는다는 사실 뿐 아니라 메신저를 다루는 또 다른 메신저의 기능은 ‘주체’의 자리를 비우는 ‘비움’의 지혜에 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단지 이 세상 모든 것이 메시지를 나르는 메신저임을 일깨우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나를 것인가라는 ‘메신저의 철학’을 꿈꾼다.


몸 전체가 메신저를 넘어 메시지가 되는 삶이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주위의 모든 사물이 사랑의 메시지로 물든다. 메시지의 감동은 ‘내용’ 자체보다는 메신저의 간절한 소통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러브레터>의 ‘오갱끼데스까!’가 수백만 관중의 심금을 울렸던 것을 떠올려보자. 그저 의미 없는 안부인사로 유통되는 ‘오갱끼데스까’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의 메시지가 되어 울려퍼진 것은, 그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메신저의 슬픔이 스크린이라는 메신저를 통해 절박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미디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꾸만 망각한다. 우리의 눈과 귀야말로 언제든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모바일 미디어가 아닐까? 아무리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최첨단으로 발달해도, 모바일이 귀를 확장할 수 있고, 눈을 확장할 수도 있지만 눈 자체를 귀 자체를 휴대전화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모바일의 편리함에 중독되어 이 소중한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햇살의 따스함을 오롯이 느끼는 능력,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 그리하여 점점 더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서 첫마음을 잃지 않고 내 마음의 안테나가 이 세계가 뿜어내는 총천연색 주파수를 지혜롭게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기계에 우리의 감각을 의존하느라 거꾸로 우리의 감각을 한껏 확장하여 세계와 접속하는 방법을 자주 잊곤 한다. 잠시 MP3와 연결된 이어폰을 뽑아버리고, 잠시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잠시 TV와 라디오와 인터넷으로부터 로그오프하고, 우리의 촉각과 후각, 미각과 청각으로만 느껴지는 세계의 리듬을 호흡해보자. 들리는가. 우리 마음이 잠시 무한 미디어 사회의 자극에서 오롯이 쉬는 소리가.

?

우리는 모바일을 통해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되기만을 기다리지만, 오늘은 우리가 모바일을 통해 또 어떤 소리를, 어떤 느낌을, 어떤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자. 우리 몸이 악기가 되고 우리의 마음이 악보가 되어 세계에 들려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음악은 어떤 것일까? 오늘은 우리 손 안의 모바일을 통해, 우리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또 어떤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수 있을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