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중국 중국인 이야기

   
정광호
ǻ
매일경제신문사
   
7800
2008�� 02��



>■ 책 소개
이 책은 21세기 당대 중국의 정치,사회, 경제, 문화 각 분야의 키워드와 트렌드를 정리했다. 중국에 대해 정통한 저자가 그동안 쉽게 알 수 없었던 부분까지 구수한 입담으로풀어내고 있어, 중국 여행을 가거나 유학 또는 사업차 방문하는 출장자뿐만 아니라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이 흥미롭게읽을 수 있다. 또한 중국사회에서 중국인들과 부대끼며 한국인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려고노력했다.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여행서 "비행기에서 끝나는" 시리즈중국편으로, 비행기 안에서 읽고,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포켓 사이즈로 제작되어 언제어디서든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 저자 정광호 鄭光鎬 
재중(在中) 저술가이자번역가. 영남대학교 상경대학을 졸업하고, 베이징 어언문화대학교와 칭다오대학교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연수했다. 대한항공과 한국출판인회의 등에서일했으며, 2000년 중소기업청 베이징 주재원으로 중국 전역을 순회했다. 2001년 <신동아&& "국내 중국전문가 50人"에 소개된 바있다. 현재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저술 및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중국비즈니스 터닝포인트』 『중국? 중국!』이 있다. 『中國第一 商道』 『대결』 『지금 말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한마디』를 번역했으며, 『CEO 경영우언』을 편역했다.

■차례
1. 21세기 중국을 찾아서 국가·정치
 
도광양회에서 대국굴기로 | 중화민족주의의 대두 | 중국식 사회주의의미래 | 마오쩌둥, 혁명의 아이콘이 되다 | 사회주의 영웅들, 레이펑(雷鋒)에서 런창샤(任長霞)까지 | 일국양제(一國兩制) 정치실험 10년 |시짱(西藏)을 가깝게 만든 칭짱철로(靑藏鐵路) | ‘조화사회’의 선결과제, 농민공(農民工) 문제 | TIP-한국과 중국 


2. 자전거 왕국에서 자동차·휴대폰 왕국으로 사회
감동과 미담을 희구하는 사회 | 주식투자 열풍, 푸얼차 투기 | 허난(河南)사람이 어쨌기에 |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기념일들 |황금연휴를 교통지옥으로 만드는 여행 붐 | 달나 라 토지도 분양하는 이색 직업의 천국 | 자연생태 보호의 상징어가 된 ‘커커시리(可可西里)’ |입시산업을 형성하는 가오카오(高考) 열기 | 성형열풍이 불러온 인조미인 논쟁 | 유해식품 범람 속에 등장한 녹색식품 | TIP-한국인과 중국인


3. 상인과 상술의 나라 경제 
국가브랜드 제고의분수령, 베이징 올림픽 | 중국의 자존심, 하이얼과 롄샹 | 전 세계 자동차 브랜드의 전시장 | 중국의 유태인, 원저우(溫州) 상인 | 중국최고의 부촌, 화시춘(華西村) | 전통과 신용의 금자탑, 라오쯔하오(老字號) | 네티즌 2억 명을 바라보는 인터넷 산업 | 중화의 자존심을건드리지 말라, 다국적 기업과 문화충돌 | 녹묘론(綠猫論), 이젠 투자도 가려서 받는다 | TIP-한국상인 중국상인 


4. 대중이 키워낸 문화 영웅들 문화 
대중예술의 꽃,샹성(相聲)과 샤오핀(小品) | 사회체육으로 변모한 사교댄스 | ‘`80后(후)’ 세대로 성장한 ‘샤오황디(小皇帝)’ | 중국의 채플린,자오번산(趙本山) | 실존하는 유토피아, 샹그리라 | 사랑이 메마른 시대에 바치는 연가, 하이옌(海巖)의 영상소설 | 드라마 왕국, 고전을TV로 읽는다 | 혈색낭만(血色浪漫), 즈칭(知靑)의 잃어버린 한 세대 | 스러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 루쉰(魯迅) | 초고속 성장의 후유증,성공학(成功學) 열풍 | TIP- 중국어 이야기 


5. 일상 속의 삼십육계와 손자병법 역사·전통 
전통상업정신의 표상, 진상(晋商) | 역사시대를 상징하는 만주족 문화 | 처세와 경영의 바이블, 『삼십육계(三十六計)』와 『손자병법(孫子兵法)』 |중화인들의 필독서가 된 증국번(曾國藩) 가서(家書) | 민중의 영웅으로 살아있는 제갈량과 관우 | 유행가가 된 소동파(蘇東坡)의수조가두(水調歌頭) | 중국문화의 전도사 공자학원(孔子學院) | 중국 속의 이슬람 코드, 칭전(淸眞) 문화 | TIP-음식문화이야기





新중국

新중국, 중국인 이야기


중화민족주의의 대두

중국의 부상이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이면서도 위기적 요인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서술의 이면에는 일종의 착잡함이 배어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그 의의를 평하는 신문기사에 이런 언급이 있었다. 한‧중 간 수천 년 교섭사에서 처음으로 동등한 지위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역사적 사건이라고.


중화주의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상정하고 주변의 모든 민족과 국가들을 수직적 주종관계로 대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이전 시대에 이러한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지내던 우리의 조상들은 중화문명을 받들고 배우는 것을 지식인의 본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한‧중 교류의 현장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 중국이나 제3국에 유학하는 적잖은 우리의 역사학도들이 이러한 논점에 관해 중국 학생이나 교수들과 자주 갈등하고 있음을 술회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과거 한국은 중국의 속방이었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한‧중 관계의 치명적 뇌관이 될 소지가 다분한 이러한 논쟁에 관하여 새로운 논리와 패러다임을 세워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세계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꼽는 중국의 고대문명은 확실히 동아시아인들에게 고대 그리스문명이 서양사 속에서 지니는 위상에 상응하는 무게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한‧중 간 각종 상담석상에서 한방(韓方)이 중화문명의 위대함을 추켜세우면, 중방(中方)은 대개 한국의 민족적 단결력과 한국인들의 애국정신으로 화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시대 양국의 관계에 관한 문제나 당대의 정치체제, 이념 문제를 화제로 삼는 것은 금물이다. 서로 얻을 것이 없고 그 결론이 내다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화문명의 전체적 모습과 발전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지금 중국에 흡수되었건 주변 독립국가로 남아있건 중원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여타민족들이 중국의 한족과 함께 공동으로 빚어낸 문명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한(韓)민족도 중화문명을 빚어낸 참여자의 하나이며, 당당히 그 지분을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중국의 수도이자 정치적 중심이 중국의 전체 영역으로 볼 때 조금은 지리적으로 편벽된 곳인 베이징에 자리 잡고 있음에 유의하자. 오랜 세월 황하 중류의 중원지역에 자리잡았던 중국 고대국가들의 수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며 차츰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국가 분열기에 잠시 강남에 수도가 자리 잡았던 일이나 지방정권의 도읍지들은 논외로 하고, 통일국가 수도 이전의 궤적을 그리자면 대략 장안1)(오늘날의 시안(西安)), 낙양, 개봉, 베이징을 잇는 일선이 된다. 이러한 수도의 점진적 이동궤적을 만들어낸 숨은 원동력이 바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들이다. 그리고 그 결정적 동력이 된 것이 바로 몽고족의 원나라와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다.


중국을 둘러싼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 중에 과연 누가 중화문명의 형성에 가장 큰 지분과 공로를 주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서북지역도 서남지역도 아닌, 바로 우리 민족을 위시한 중원의 북방에 거주했던 민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진(西晋) 정권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원으로 진출해 북조 정권을 번갈아 세웠던 북방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기존의 중원문화와 융합시키며 호한(胡漢) 연합체제를 이룩했었다. 뒤이어 등장한 수당(隋唐)의 황실가계는 북방민족과의 혼혈이었음을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당이 멸망한 후, 중국 역사상 최고의 혼란기라 일컬어지는 오대십국을 거치면서 북방민족의 중원 진출과 지배는 이제 상시적인 일이 되다시피 했다. 진(秦) 이후 통일제국을 이룬 여러 국가들의 수도와 정치의 중심이 지금의 샨시성에서 점차 동북으로 이동해간 사실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요약하는 것이자, 중화문명의 형성과정에 대한 북방민족의 참여와 기여도를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중국 역사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은 한족이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를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투쟁의 역사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새롭게 맞닥뜨린 시대적 상황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더구나 티베트와 신장(新疆) 지역의 독립 움직임은 이런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했다. 이런 배경 아래 탄생한 것이 바로 중화민족주의다. 중화민족이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 존재했었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바로 중화주의와 민족주의를 조화시킨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이런 새로운 이념 아래 중화의 민족영웅으로 한 무제, 당태종과 더불어 칭기즈칸이나 강희제와 같은 이민족 왕조의 제왕들이 추가되었다. 오늘날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바로 중화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와 마찰을 빚었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를 둘러싼 갈등도 바로 이런 중국 내부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런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우리 민족이 중화문명의 형성에 지분이 있음을 주장하는 일은 우리의 자긍을 신장시키기보다 도리어 중화민족주의 논리에 우리 스스로를 휩쓸려들게 하는 자기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수천 년을 교섭해온 한‧중 관계는 그만큼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 200만 명에 가까운 우리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은 더욱 문제를 어렵게 한다. 동북공정과 관련한 고구려사 논쟁으로 한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중국은 의외로 이 문제를 조용히 넘기려고 애썼다. 언론 보도를 극도로 통제해 사회적 화제로 떠오르지도 않았고, 학술연구와 정치문제는 별개의 것이라며 조용히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 중국 지도부의 태도였다.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정책이 엉뚱하게 근린 국가와 예기치 못한 갈등관계를 조성하게 되었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나날이 대립각이 날카로워져가는 중‧미 관계, 아시아의 리더를 지향하는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자극하기보다는 중립의 위치에 설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 당면한 국제사회의 역학관계상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오직 인터넷을 통해 관심을 가진 일부 중국인들만이 이러한 역사논쟁에 참여했다. 당시 어느 중국 사이트에 흥미로운 리플이 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들이여!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기를. 언젠가 한국 민족이 강대해져 중국을 통치하고, 한국 출신의 인물이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그저 가슴이 답답하고 기가 막힐 뿐이다. 그리고 사고의 틀이나 방식이 우리와 많이 다른 차원에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장차 중국을 통치하겠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인가? 단지 우리 역사의 일부분을 빼앗지 말고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달라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유사 이래 중국을 정복 통치한 민족들의 말로가 어찌되었던가? 중요한 것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냉정하고 담담하게 우리의 중심을 잡고, 스스로의 논리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어차피 하루 이틀, 한두 번의 다툼으로 끝나지 않을 논쟁이기 때문이다.

달나라 토지도 분양하는 이색 직업의 천국

인구 대국 중국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종종 한국적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희한한 일들은 곧장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곤 한다. 한정된 파이를 나눠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가난하고 배고파질 수밖에 없고, 분배가 반드시 공평하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생겨난다.


중국의 각종 사회문제는 대개 과다한 인구, 빈부격차에 그 병인(病因)이 있다. 전체 인구  중 약 2억 명이 개혁개방과 경제성장에 따른 혜택을 누리는 반면 나머지 10억 명이 넘는 인구는 여기서 소외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 스트레스는 곧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이라는 사회적 지표로 드러난다. 공직자들의 끊이지 않는 부패와 수뢰사건도 박봉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의 부에 대한 갈증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검은 유혹 때문이다. 중국 공직자들의 자녀 상당수가 구미 선진국에서 유학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수준은 선진국 중산층 뺨칠 정도로 사치스럽다. 이런 사정이 비단 고위직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지방 소도시에서 작은 감투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는 사실 그들의 봉급 수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은 비정상적인 금전 수입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후진국에서 관리들의 권력은 곧 부조리와 이권 개입을 통해 금전으로 환치되기 마련이다. 언론의 가십거리로 종종 등장하는 부패 관리들의 축첩 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감수하면서까지 권력자나 외국인에게 몸을 기탁하여 사치와 허영을 충족하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이 있기에 빚어지는 일이다. 역시 그 배경에는 가난과 생활고, 취업난 등에서 비롯된 동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중국인들의 집착은 결국 사기와 짝퉁상품, 불량식품이 횡행하는 사회현상을 만들어낸다. 개혁개방 이후 발전지상주의를 신봉해온 중국 지도부는 빈부격차가 야기하는 이런 사회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2006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조화(和諧)사회론을 사회정책의 기조로 채택했다. 주로 빈부격차 해소와 의료, 교육 등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성장일변도의 정책기조에서 균형발전론으로 궤도를 수정한 것이다. 아울러 다양한 공익 캠페인을 통해 각종 자선기금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민간의 빈곤구제 활동도 장려하고 있다. 자연재해 발생 시 구호활동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출연한다든지 빈곤가정, 실학(失學)아동을 위한 자선기금에 주요 기업과 기업인들이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사회적 의무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마치 기부자 명단에 오르지 않으면 언젠가 공권력으로부터 불리한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마저 사회 저변에 존재한다.


이런 정책적 배려와 민간의 자선활동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민생을 해결해야 하는 대다수 중국 서민들의 고단한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한‧중 수교 초기 중국을 찾은 사람들은 한국에 없는 이상한 직업들을 발견하고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운전수, 자판기 음료 뽑기 도우미처럼 사람의 손이 필요없는 곳에 배치된 일꾼들, 관광지 출입구에는 표를 받는 사람, 받을 표를 확인하는 사람, 이를 넘겨받아 찢는 사람 등이 존재한다. 이런 모습은 사회주의적 완전고용에 대한 체제의 집착이 만들어낸 사회적 기현상이다. 많은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신문을 보거나 잡담을 하며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넘쳐났다. 그러나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이런 현상은 서서히 사라졌다. 체제가 보장하는, 영원히 깨지지 않는 철밥통이 사라지고 모두가 자기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직장을 찾지 못하거나 샤강(下崗, 실직) 하게 되면 길거리에 좌판을 틀고 앉거나, 자전거로 만든 인력거를 끌든가 다른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이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직업군을 탄생시킨 것이다.


기발한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는 급기야 달나라 토지를 분양하고 공인 처녀증서발급 사업을 하는 중국판 봉이 김선달을 등장하게 했다. 리제(李捷)라는 이름의 이 희대의 인물은 미국에 본부를 둔 외계 부동산 판매업체로부터 주중 달나라 대사로 지명됐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2005년부터 중국인들에게 달나라 토지를 에이커당 298위안에 팔아왔다. 토지를 분양받는 사람에게는 소유권과 함께 지하 3㎞까지 광물 개발권을 부여하는 등기증명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러한 행각으로 베이징 공상국으로부터 영업정지 처분과 함께 벌금형을 부과받은 리제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으나 결국 패소했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영감이 넘쳐나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여성들을 상대로 처녀증발급 사업에 나서 또 다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수 년 전 언론의 화제기사로 등장한 사과 대행회사는 원래 실직자들이 모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최근에는 이를 모방한 사과 대변인, 사과 대변 전문회사 등이 생겨났다. 살다보면 순간적인 감정에 북받쳐 할 말, 못할 말을 다 해놓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직접 사과하기를 몹시 망설인다. 설사 용기를 낸다 해도 상대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잘못하면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태우는 사람들의 심리에 착안해 사과 대행회사를 만들었다. 주로 부부나 연인 사이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주된 고객으로 사과 대상이나 난이도에 따라 80위안에서 최고 500위안의 대행료를 받는다. 실패할 경우에는 약속한 금액의 절반만 받는다고 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고, 신종 직업들이 생겨난다. 중국의 사회노동보장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국에는 약 2,000종의 직업이 있다고 한다. 최근 사라진 직업은 그릇 수선공, 무선호출안내원, 식자공 등이며, 새로 출현한 신종 직업에는 각종 설계, 컨설팅, 건강보건 관련 직업들이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인구 대국에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는 앞으로도 다양하고 기발한 직업들이 새로 생겨나 전 세계 매체의 해외뉴스 코너에 기삿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중국의 자존심, 하이얼과 롄샹

우리나라의 삼성, LG에 필적하는 종합가전업체인 하이얼(海尒), 컴퓨터와 주변기기 생산업체로 출발해 중국의 대표적인 IT기업으로 성장한 롄샹(聯想, 레노보)은 부상하는 중국경제의 자존심을 대변하고, 중국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기업 브랜드다.


2006년 6월 중국 언론이 해외공인 기관의 발표를 인용하여 보도한 중국 500대 기업브랜드 순위에도 하이얼과 롄샹이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이 발표에 의거한 중국의 10대 기업브랜드를 살펴보면, 3위 차이나모바일(中國移動通信), 4위 CCTV(중국중앙TV), 5위 가전메이커 창훙(長虹), 6위 교통은행, 7위 전자제품 유통기업인 GOME(國美), 8위 생명보험 회사 차이나라이프(中國人壽), 9위 CREC(中國鐵路工程), 10위 중국석유화학(中國石化, 시노켐) 이다.

산둥성 칭다오(靑島)에 본사를 둔 하이얼이 이렇게 중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국가대표 기업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고객우선주의에 의거한 철저한 품질관리, 신속한 애프터서비스 그리고 스타 경영인 장루이민(張瑞敏) 회장의 리더십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얼은 1984년 칭다오시(市)의 국영 집체공장들이 합병되면서 탄생했다. 이즈음 원래 칭다오 가전전기 공업회사의 부시장이었던 장루이민은 하이얼 냉장고 공장의 공장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회사는 큰 적자를 안고 있었고, 공인들은 공장 아무곳에나 대소변을 보는가 하면 회사의 자재나 비품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등 한마디로 관리부재의 상태였다. 그 시절 국영기업들이 지닌 병폐를 모두 갖춘 하나의 전형인 셈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결함이 있는 상품은 폐품이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결함이 있는 냉장고 76대를 망치로 부수어 버렸다. 내부혁신을 다짐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후 하이얼 직원들의 마음속에 품질의식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고, 전반적인 관리상태도 점차 개선되어 갔다.


초기의 하이얼 그룹은 이처럼 경영 적자에 시달리는 소규모 집체공장이었으나 이후 그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지금 하이얼의 과학기술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는 이 망치는 기업경영에서 사고의 혁신, 품질과 브랜드의 중요성을 중국인들에게 증언하고 있다.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 16차 전국대표대회(16大)에서 장루이민 회장은 기업가로는 처음으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임되는 영광을 누렸다. 시대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는 기업자본가, 지식예술인, 광범위한 신흥 중산부유층을 모두 공산당의 품안에 포용하기 위해 장쩌민 주석이 주창한 3개 대표론에 근거해 취해진 조치였다.


하이얼 브랜드에 거는 중국인들의 기대와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이얼이 하면 뭔가 달라!", "하이얼이면 해낼 수 있어!"라고 외치는 것이다. 서점에는 하이얼의 성공신화와 CEO 장루이민을 다룬 서적들이 불티나게 출판되고 팔린다. 특히 하이얼 세탁기와 냉장고에 대한 중국 주부들의 신뢰도는 절대적이다. 고장이 거의 없는 하이얼 제품이 오랜 세월 중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쌓아온 신용 덕분이다. 하이얼은 한국시장에도 이미 진출한 상태다.


한국에서 레노보(LENOVO)로 더 잘 알려진 롄샹은 1984년 류촨즈(柳傳志) 초대 회장을 중심으로 중국 국립과학원 산하 컴퓨터연구소의 연구원 11명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국영 벤처기업으로 닻을 올렸다. 당시 이들은 중관춘(中關村)2)(베이징의 지명으로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기도 함)의 허름한 단층 가옥에 회사를 꾸렸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의 PC시장은 IBM 등 다국적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시장의 특성에 기민하게 적응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한 롄샹은 1997년 이후 이들을 제압하고 중국 PC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롄샹은 1989년 중국 최초로 286컴퓨터를 독자 개발한 데 이어, 1993년에는 펜티엄급 PC를 개발하여 중국 최대의 컴퓨터 메이커로 부상했다. 원래 데스크톱과 노트북 등 PC 관련 제품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 등 IT 제품으로 제품군을 다각화하기 시작했고, 소프트웨어‧통신‧인터넷 사업에도 진출해 종합 IT회사로 변신중이다.

류촨즈 회장에 의해 17년간 급속한 성장가도를 달려온 롄샹은 류 회장 퇴임 직전인 2000년에 마침내 중국 IT업계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초대 류촨즈 회장에 이어 지금은 양위안칭(楊元慶)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아, 그동안의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경영방식에서 탈피해 새롭고 도전적인 경영기법을 실험하고 있다. 양 회장은 "더 빠르게 변하지 않으면 세계 정상에 이를 수 없다"고 부르짖으며, Legend로 표기하던 회사 영문이름을 Lenovo로 바꾸어버렸다. 혁신을 뜻하는 Novo를 합성한 것으로 매일 혁신하는 롄샹이 되자 라는 의미다.


롄샹은 최군 IBM의 PC 사업부문을 인수함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끈 바 있다. 중국이 토착브랜드 육성과 세계화를 위해 야심찬 기치를 내건 시점에 이루어진 이 인수합병은 중국이 단기간에 자국 브랜드를 세계적 브랜드로 도약시키기 위해 채택할 수 있는 전략적 방안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양대 기업과 더불어, 최근 첨단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중국경제의 희망주로 떠오르는 양대 산학(産學) IT 기업이 있다. 바로 세계 최대의 대학 산하 IT기업으로 일컬어지는 베이징(北京)대 계열의 베이다팡정(北大方正)과 칭화(淸華)대 계열의 칭화퉁팡(淸華同方)이다. 이들 두 대학 외에도 상하이의 푸단(復旦)대, 자오퉁(交通)대, 저장(浙江)대, 난징(南京)이공대, 둥베이(東北)대 등이 운영하는 학원기업들이 유명하며, 이들은 중국의 첨단산업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 이들 학원기업들은 교내의 과학연구 성과를 상업적으로 응용하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대부분 IT, 하이테크, 생물제약 등 첨단과학 업종을 영위한다. 특히 베이다팡정은 2005년 매출 규모가 330억 위안에 달하는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이들 학원기업은 수익의 일정 부분을 학교에 기부하고, 학교가 진행하는 각종 과학연구프로젝트를 지원하며 상호발전을 모색한다.


중국이 비록 토종 브랜드 육성을 외치고 있지만 가짜와 복제품이 만연한 시장상황은 여전히 신규 브랜드가 발전‧생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가짜상품 천국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고심하는 중국이 최근 자국 여건상 무리수를 감수하면서 지적재산권 보호의 칼을 빼든 것은 자생 브랜드 보호를 위한 고육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짝퉁제품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 진출 외자기업들에게도 하나의 희소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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