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한창기(엮음: 윤구병 외)
ǻ
휴머니스트
   
16000
2007�� 10��



>■ 책 소개
월간「뿌리깊은나무」「샘이깊은물」의발행-편집인이자, 언어운동가였던 고(古) 한창기가 자신이 창간하고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하였던 잡지에 썼던 것들과, 여러 신문과 잡지에 실렸던것들을 두루 모아 재구성한 세 권 가운데 한 권이다. 


"언어"에 대한 한창기의 생각을 담은 글들이 중심이 된 책으로, 한글, 토박이말, 언어의올바른 표현, 잘못된 쓰임, 쓰임의 변화, 우리의 언어생활 비판, 그리고 교육과 출판과 책읽기에 대한 사유를 전해준다. 서양 문화의 홍수 속에서우리말과 글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짚어보면서,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저력은 문화라고 말한다. 민중의 언어, 특히 삶속에 깊이 자리 잡아 오던 토박이말을 사랑하고, 그 말과 글 속에 담긴 문화를 진정으로 향유하던 사람. 언어의 다양한 쓰임새를 자유자재로적확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문화의 향유자. 저자는 부지불식간에 침투해 오는 서양 문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말과 글의 순수성과 의미가 어떻게변질되고 오염되어 가는지를 누구보다도 세밀하게 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러두기&&
1. 이 책에는 순수한 우리말과 우리글로 전통적인 아름다움과올곧은 정신을 표현하는 데 평생을 바친 한창기 선생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온전한 한글 표현으로 생각을 펼쳤던 선생의 뜻을 담아 한자와외래어는 물론, 아라비아 숫자까지 모두 한글로 표기하였습니다.
2. 민중의 언어를 생동감 있게 전해 주는 토박이말과 사투리 표현은 그대로살려서 표기했습니다.
3. 비표준어일지라도 시대의 분위기를 전해 주는 말들은 그대로 살려서 표기하였습니다. "자꾸", "호테루","금빳지" 들이 그런 예입니다.
4. 모든 글의 끝자락에 그 글의 출전을 표기하였습니다. 출전을 알 수 없는 글은 표기하지않았습니다.


■ 저자 한창기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로가 법조계가 아님을 깨닫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 팔군 영내에서미국인들에게 귀국용 비행기표와 영어 성경책을 팔았다. 그리고 시카고의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 사에서 한국 땅에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보급했으며, 천구백육십팔년부터 천구백팔십오년까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 몸담아 그 첫 몇 년 동안을 빼고는 줄곧 대표이사로 일했고,천구백칠십육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출판사 뿌리깊은나무 주인으로, 천구백칠십육년부터 천구백팔십년까지 월간 「뿌리깊은나무」의 발행-편집인으로, 또천구백팔십사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월간 「샘이깊은물」의 발행-편집인으로 일했다. 그는 두 월간 잡지를 통해 언론과 문화에 새바람을불러일으켰을뿐더러 민속, 미술, 예악, 언어, 건축, 복식 할 것 없이 역사와 오늘을 잇는 분야에서 한반도 전통 문화 가치의 탐색에 몰두했다.


그의 업적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구현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를테면 널리인정하듯이 뜨거운 전통 음악 사랑으로 이 나라에서 해방 후로 천구백칠십년대까지 낡은 가치의 예술로 여겨 부끄러워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판소리를다시 한반도 남반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고 즐기는 음악으로 되살려 냈다. 똑같은 곡절로 낡은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 내다 버리던 놋그릇, 백자그릇을 오늘의 생활에 어렵사리 되살린 것도 그였다. 


그런가 하면 세계와 환경과 인류의 걱정거리에 일찍이 눈을 뜬 스승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삶의 큰 몫을 빼어난 전통 가치의 세계화와 탁월한 세계 가치의 한국화에 바쳤고, 남다른 심미안과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문화 비평과 문명비평을 글로, 입으로 가멸게 남겼다. 


그는 또 한국어를 통찰한 언어학자였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이 이 나라 새세대가 사용할 언어의 흐름을 새 방향으로 바꾸었다고 다들 인정하는 것은, 그가 타고난 언어의 통찰력으로 한국어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할 그짜임새를 올바로 응용하고 발견하고 복원하여, 논리와 이치에 알맞은 글을 한반도 주민들에게 제시하고자 힘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멋쟁이로 기억하고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예술을 남달리 깊이 알고 사랑한사람으로 기억한다. 천구백삼십육년에 태어난 그는 천구백구십칠년에 예순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좀 일찍 떠났다. 


■ 편자
윤구병
 - 「배움나무」 편집장이었다가「뿌리깊은나무」 초대 편집장으로 일했다. 「뿌리깊은나무」를 그만두고 충북 대학교에서 철학과 선생을 할 때도, 나중에 변산에서 공동체를 이루고농사를 지을 때도, 또 지금도 한창기는 그에게 ‘선생’이다.


김형윤 - 윤구병을 이어 「뿌리깊은나무」의 편집장으로일했으며 《한국의 발견》을 만들 때도 책임 편집자였다. 한창기의 ‘꼼꼼한 눈’을 높이 치지만 지긋지긋할 때도 많아 좀 멀리 보고 크게 볼 줄도아시라고 망원경을 선물한 일이 있다.


설호정 - 「뿌리깊은나무」 창간 준비를 하면서 윤구병과김형윤이 그의 일터로 같이 찾아가서 ‘모셔’왔다. 「뿌리깊은나무」 편집차장을 거쳐 「샘이깊은물」에서 주간으로 일했다. 병상의 한창기가 마지막까지의지한 몇 사람 중의 하나이다.


■ 차례
엮은이의 말 - 한창기의 생각, 그 작고가느다란 것들의 아름다움 


1. 변화를 만나는 슬기 
"인간적"이 주는 기쁨과슬픔
바빠서 못 읽는 사람 
따지면서 읽는 버릇 
나는 항아리를 하나 샀다 
온 나라에 일고 있는 새 이름 바람 
탈붙은 전화 번호 
가로질러 가기도 하는 사람 
마당쇠와 예쁜이 
경상도 사투리 
그들은 이렇게 먹고 입고 산다 
그사람들의 한평생 


2. 말과 사물의 조화 
강강술래 
입으로는이렇게 말하고 글로는 저렇게 쓰고 
어느 날 오후에 생각한 "주눅과 도사림" 
고마움과 미안함의 갈등 
조그마한 제안
"있어서"와 "있어서의" 
"때문"과 "까닭"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다니 
빼앗긴 이름 
빼앗긴 말
"아뇨"의 뜻이 바꾸이기 시작한다 
"해라"와 "하게"와 "하오"와 "합쇼" 
대한민국 
"나"와 대통령 
스님과따님과 각하 
사장님과 선생님 


3. 열매보다는 뿌리를 생각하는 마음 
토박이말과 기업
껌의 민주화와 사보의 민주화 
"청주"의 복권과 청주병의 한국화를 먼저 
간판 타령 
화장품 광고의 일본-서양 흉내
흉내와 창조와 속임수 
서기 노릇 
사일구와 사점일구 
두 겹, 세 겹의 표준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
호텔과 여관 
서재필의 "목소리" 
말 못하는 가수 
개성과 규율 
반말과 다툼 
더러운 정치


4. 넓은 세상을 응시하는 혜안 
배움 
학교를"사는" 재벌 
교육적 효과와 여론 조사 
교과서와 노름판 
컴퓨터와 도깨비불 
세계 책 장수와 한국 책 장수 
북한책들이 나왔으나 
빼앗긴 잡지 이백 몇 십 가지 
슬기로운 역사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 
어려움과 수준의혼동 
사람의 잡지 


한창기 연보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마당쇠와 예쁜이

한국에서 인정되는 예술의 갈래에 동양화와 서양화와 서예가 끼어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동양화를 그리는 사람은 자기 작품에 영어 글자로 서명하는 전통이 우리 나라에 세워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의 근대 서양화가 중에서 죽은 다음에 작품의 값이 오른 유일한 세 분인 박수근, 이중섭 및 이인성은 그들 작품의 대부분에 한글로 서명했다. 누가 어느 나라의 글이나 기호로 자기의 이름을 쓰는지는 지극히 그 사람이 결정할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국 화가가 한국에서 한국인의 시선을 위해서 그린 그림에 한국 글자로 된 이름을 찾을 수 있음이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마땅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예술인들이 예술 작품 속의 서명 또는 도장 속의 이름을 한국 글자로 쓰거나 파기를 호소한다. 중국 글자로 해 봤자, 한국인들이 한국 글자보다도 더 잘 알아들을 리가 만무할 뿐만이 아니라,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읽을 때에는 자기네들 발음으로 읽기 때문에 마침내는 이름을 가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대만에 입국하려면 공항에서 입국 서식에 필요한 사항을 적어 바쳐야 한다. 이 서식에는 이름을 영어와 한자로 적도록 되어 있다. 나는 흔히 모르는 체하고 영어로만 적는다. 출입국 관리는 거의 예외 없이 한자 이름 공란을 가리키면서 한자 이름을 적으라고 한다. 나는 한자 이름이 없다고 우긴다. 그러면 거의 예외 없이 내 여권의 한글 이름 다음의 괄호 속에 있는 한자 이름을 가리킨다. 나는 그것이 내 나라에서 쓰이는 내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의 소리를 나타내는 선택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그 앞글자가 내 이름이라고, 그리고 그 글자는 영문으로 이렇게 소리 난다고 영문 이름을 가리킨다. 그래도 괄호 속에 한자를 적어 넣으라고 우기면 나는 이 한자를 한번 그 나라 말로 읽어 보라고 부탁한다. 이 세 글자는 일본에서는 일본식으로, 대만에서는 대만식으로 소리 난다. 나는 그것이 내 이름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리고 그 나라에서 내 이름을 함부로 갈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그러나 공손하게 한자 이름란에 한글로 이름을 적는다.


대만 출입국 관리의 머릿속에 우리가 가르쳐 준 한자를 제쳐 놓고 무슨 수작이냐는 비웃음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일본 출입국 관리의 무의식 속에, 한국인의 이름은 한자로 적어서 자기식으로 읽으면 된다는, 그래서 따지고 보면 우리 이름이 일본어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사고방식이 도사리고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다. 그의 사고방식 속에는 아마도 한국에서 온 놈이 무슨 외국인이라고 영어로만 적고 한자 이름을 적지 않아! 라는 아니꼬움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 경우에 아니꼬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이는 그들의 마음속에 한국인은 일본에 동화됨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미리 잠재해 왔음을 뜻한다. 그들의 이 기대에 저항하지 않으면, 아니, 그들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영속하리라.


실로 우리 이름이 우리 이름임은, 비록 한자로 적혔더라도, 첫째로 특정하게 소리가 나기에 우리 이름이다. 획수가 몇인 특정 글자를 써야 우리 이름인 것은 둘째 문제이다. 얼핏 생각해서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인습의 마술 때문이다. 사람들이 남의 이름을 소개받을 때에 굳이 한자를 따지는 것은 단순한 언어적 습관에서가 아니면, 한국말로 발음할 때에 같은 소리가 나는 여러 중국 글자 중에서 한 글자를 골라내어 그 글자의 뜻을 연상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더 잘 기억하려는 시도에서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에, 남새를 뜻하는 베지터블(vegetable)이라는 말을 기억하려고 배추 다발을 연상하는 것하고 통한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소리로만은 뜻을 못 이루는 한자 이름 대신에 차돌이 같이 한국어로도 뜻이 있는 이름을 가지면, 남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딴 수단을 동원할 필요가 자동적으로 없어진다.


사람의 이름은 모국말로 적힐 때에 가장 뜻이 있다. 그리고 모국말로 지어졌을 때에 가장 큰 뜻이 있다. 그래서 철수보다는 마당쇠가 , 그리고 영희 보다는 예쁜이가 나는 더 좋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어른은 최근에 그의 호를 죽포 대신에 대밭이라고 하기로 거의 결정했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의 많은 위대한 예술 작품에 적힌 작가의 이름 가운데에 마당쇠나 예쁜이가 보였으면 좋겠다. 이름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뿐만이 아니라, 마당쇠가 되기가 부끄럽지 않은 작가에게서 마당쇠다운 작품이 나올 것이 틀림없을 듯해서이다.


어버이에게서 흙냄새가 풍기는 이름을 얻은, 젊거나 어린 사람들이 요즈음에 여기저기에서 엿보인다. 나는 외국 공항에서 자기 이름이 아닌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내세울 필요도, 무슨 한자로 적는지를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어지는 소극적인 이유에서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 한국말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외국인에게 설명해 줌으로써 소개받는 그 사람의 기억에 그 이름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이유에서도, 이러한 이름을 얻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가득 차기를 바란다.

- 천국백칠십삼년. 배움나무



아뇨의 뜻이 바꾸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언어나 사고방식 속에서는 부정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질문에서처럼 부정적이면 예나 네였다. 대답이 예나 아뇨를 가림은 그것이 질문의 긍정성이나 부정성에 일치하는지에 달렸었지, 대답 자체가 긍정적인지 또는 부정적인지에는 절대적인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물어보아라. 아직 저녁 안 먹었니? 하면 흔히 아뇨 하면서 저녁식사를 안 했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이것은 아마도, 질문이야 무엇이었든지 대답만 부정적이면 노하는 서양 사고방식의 영향으로 생긴 의사 표시이리라.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 바라보기에는,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양인의 사고방식 중에서 훌륭한 점이 많다고 하여 서양인들이 채택하는 것은 그들의 일로 돌리고, 오늘 나는 우리의 생활 속에 그대로 또는 탈바꿈하여 스며든 서양 문화의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헌법도 정부도 기업도 학교도, 적어도 형식에 관해서만은 서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주택도 입을 거리도 먹을거리도 서양의 것을 닮아 가고 있고, 사람들은 이를 근대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기 전 조선의 문화와 생활을 배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면, 바깥 세상에서 보기에는 한국이 원시 사회로 보일 가망성도 있다. 늦게나마 서양 문화의 영향이 우리 생활에 스며들고 있음이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서 서양인들이 배워 가야 할 것도 많겠으나, 그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하나는 합리성이다. 그들이 만든 제도를 우리가 우리 일에 적용하기를 택한 것도 아마도 이 합리성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합리성의 적용이 축복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 축복을 겉으로만 받고 있다. 교사와 부모는 어린이의 개성을 존중하자고 외치면서도 매질을 한다.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는 창의력을 살찌우는 일의 중요함을 부르짖으면서도 생각하기 보다는 외우기를 익히게 한다. 대학교의 교수는, 적어도 정직하기는 하여 모르겠습니다라고 적은 학생에게보다도, 질문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답안지를 가득 채운 학생에게 더 나은 점수를 준다.


옛날에는 이와 같은 식으로 학교 교육을 받은 학생이 사회에 나와서 오늘에와 같은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들을 부리는 사회의 지도자들도 비슷한 교육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학교 교육보다도 속도가 훨씬 더 빠른 사회의 변천이 있다. 옛날에는 회사가 모양새만 서양의 것들을 닮음에 만족하던 경영진이, 회사가 모양새만 서양의 것을 닮아서는 치열해진, 국내적이거나 국제적인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특히 국제적인 사업에서는, 옛날식으로 일을 하다가는 망하기 꼭 알맞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기업인들은 자기들이 구호로 외치는 경영 합리화의 실현을 위한 헛수고로, 흔히 또 하나의 모양새에 그치는 새로운 제도들을 모색한다. 제도가 일의 성취에 상관되기는 하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일의 성취에 제일 중요한 요소는 인력이다. 그런데 빨리도 바뀌는 사회 현실은 학교 교육의 교과 과정을, 그리고 교육 방법을 더 보잘것없게 보이도록 만든다. 지도자들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외치는 경영의 합리화가 우리 나라의 현대화에 불가결하다면, 학교 교육은 마치 그 목적이 학생이 사회에 나와서 합리성을 적용하지 못하도록 함에 있는 듯이, 그리고 현대화가 제거의 대상인 듯이 수행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글로 된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대학생의 답안지가 생각에 떠오른다. 그곳에는 화제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말로 지면이 채워져 있다. 강조되어야 할 점은 빠져 있다. 뜻이 해석에 따라서는 둘, 셋, 넷이 되는 문장들이 많다. 심지어는 불러 놓고 물어보면 적은 이 스스로도 무슨 말인 줄을 모를 때도 있다. 이 현상은 글에서만이 아니라 말에서도, 행동에서도, 결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금 좋거나 싫거나 아뇨의 뜻이 바꾸이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나라의 현대화는 새 인력을 요청한다. 요청받은 인력에게 더 큰 성공의 가망성이 있다. 이 새 인력의 대열에 끼일 사람은, 비록 학교에서는 못 배웠을망정 외우기 대신에 생각, 생각하기를 적용하여 행동한다.

- 천구백칠십일년. 엉겅퀴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

눈에는 눈곱이 끼고, 손톱에는 시커먼 때가 긴 의사가 몸이 깨끗해야 건강에 좋다는 말을 해 봤댔자 설득력이 있을 수 없다. 케이비에스나 티비시나 엠비시라는 이름들이 제 이름인 것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방송국들이 아무리 길고 잦은 시간을 국어 순화 운동에 바치더라도, 그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람에 그치기 쉽다.


해방이 되자 조선 총독부의 지배 아래에 있던 우리 나라의 방송 시설이 미국 군정청의 감독을 받게 되었고, 머릿글자들이 케이와 비와 에스로 된 한국 방송 조직이라는 뜻의 영어 이름이 등장하였다. 이처럼 미군들이 지어 준 이름이 이제는 의젓한 국립 방송국이 된 한국 방송 공사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약식 이름인 것으로 여러 십 년 동안이나 내세워져 왔다.


한국에 번지는 버릇의 정당성을 우기기 위해서 흔히 일본의 경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곧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쳐야 할 이유를 초등학생이 자라서 신문도 못 읽음에 두면서도 신문더러 한자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모르고, 굳이 일본의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니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우기는 경성 제국 대학 출신의 모범적인 식민지 교육 학도로서, 그 가치관이―때때로 일본을 미워하는 애국심에서마저도―꽤 일본에 동화된 오늘의 많은 어른들과 같은 이들이 그 축에 든다. 이런 어른들은 일본에서도 국립 방송이 엔에이치케이라는 영어 약자 이름을 쓰는데, 그까짓 이름 하나를 가지고 무슨 수선이냐고들 하신다. 그러니 일본식을 들고 나와야 이해가 빠른 이들에게 말해야겠다. 적어도 엔에이치케이는 일본 표현인 니혼 효쇼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영문으로 표기한 것의 약자이기나 하다는 것을.


본디 방송국엔 제 이름 말고도 국제 호출 부호라는 것이 있도록 되어 있다. 에이치엘케이에이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국제 협약에 따라서 로마자로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귀에 익은 미국의 엔비시나 시비에스라는 이름들은 제 나라 말로 된 제 이름의 머릿글자들을 따서 만든 제 나라 말 약칭이다. 이것을 보고 서양 시늉하기를 좋아하기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일본 방송국이, 굳이 약칭이 필요하거든 제 나라 글자로 할 것을 잊고 스타일을 한번 내보려고, 비록 제 나라 말로 된 이름의 소리를 로마자로 음역한 것의 머릿글자로나마 엔에이치케이라 했다.


우리 나라 방송국들도 아마도 제 이름을 간단하게 부를 약칭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겠다. 그러나 엠비시나 티비시나 케이비에스의 소리들은 국문으로 옮겨 적었을 때에, 문화방송이나 동양방송이나 중앙방송의 글자 수보다 기껏 한 글자가 적거나 마찬가지거나 할 따름이며, 또 글자 수가 한 자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한국말 속에서 삽살개라는 말과 미꾸라지라는 말의 소리가 차지하는 시간이 실제로 같아지기 쉽고, 또 굳이 서양이름으로 말하더라도 케이비에스의 소리가 차지하는 시간과 엠비시의 소리가 차지하는 시간이 같듯이, 그처럼 덧붙는 한 음절이 조금도 시간의 낭비를 뜻하지 않는다. 방송국들이 이 이치마저도 못 알아듣는다 하자. 그러면 이 방송국들은 왜 제 이름의 약자를 문방(국)이나 동방(국)이나 중방(국)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 이름들이 로마자로 적히었을 때에 머리에 떠오르는 기호 영상의 간결성 때문이었을까? 왜 그러면 ㅁㅂ이나 ㄷㅂ이나 ㅈㅂ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방송국들이 펼쳐야 할 국어 순화 운동의 대상은 국민이기에 앞서서 자기들 스스로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방송국들이 국어 순화 운동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부끄러운 영어 이름을 갈아치우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토록 엄청나다고 알려진 수입의 조그마한 한 부분이라도 쪼개어서 텔레비전 화면의 자막에 나오기 쉬운 무식한 국어와 방송 요원들의 방송 언어를 다듬는 연구와 교육에 쏟아야 할 일들을 포함한다. 방송이 수만 명의 대중에게 국어를 순화하자고 외치는 것보다도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순화된 국어로 외쳐지는 것이 국어 순화에 더 중요하다.

- 천구백칠십육년. 뿌리깊은나무




컴퓨터와 도깨비불

컴퓨터 화면의 빛글자는 도깨비불을 떠올린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듯하고 하나인 듯하다가 별안간 몇 백 개로 둔갑한다. 장난기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차갑고 매정한 기분이 감돌기도 한다. 이 신식 도깨비불이 요새 흔히 추어올리는 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소형 컴퓨터가 무더기로 나오자 이 불이 아이들의 공부방, 어른들의 사무실 할 것 없이 널리 번지고 있다. 그 장난기가 놀이를 시켜 주고 그 능률이 일감을 덜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현대판 도깨비불이 이 나라에 건너와 국문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큰 탈이 붙었다. 공병우 박사와 송현 씨의 과학적인 세 벌식 자판은 내팽개치고 한 단추의 자음을 초성과 받침으로 두루 쓰는 비과학적인 두 벌식 자판을 과학기술처에서 컴퓨터 자판으로 내민 뒤로 컴퓨터 생산 업자들 거개가 그것을 컴퓨터의 타자틀에 앉혔기 때문에 그 자판에 찍혀 화면에 나오는 받침 있는 빛글자들은 사람의 정신을 적잖이 헛갈리게 하는 혼동을 일으킨다.


곧 글씨가 쓰거나 찍는 대로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인간의 본성과는 어긋나게 이 빛글자들은 받침이 있기만 하면 다음 글자의 초성을 찍은 다음에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간다라고 할 때에, 간을 찍으면 처음에는 엉뚱하게 가ㄴ으로 나왔다가 다음에 다의 ㄷ이 찍혀서야 느닷없이 간으로 바로잡힌다. 이 도깨비 장난은 말 그대로 엄청난 불장난이다. 손으로 간을 쓸 때에 가 밑에 쓰는 ㄴ이 엉뚱하게 가 곁에 나타나고 딴 자음 글씨를 잇따라 쓴 다음에야 가 밑에서 되살아난다고 치면 문자 생활을 하는 우리 국민이 겪어야 할 정신 착란은 엄청난 것이다. 그러면 컴퓨터 화면 앞에서 넋을 팔고 있는 이들이 그런 둔갑 글자 때문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 착란을 겪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첨단 산업의 역군들이 우리말과 우리 국민을 무서워할 줄도 좀 알아 하루빨리 자리를 같이하여, 더 늦기 전에 컴퓨터 빛글자에 붙은 이 도깨비 장난을 몰아낼 궁리를 해야 할 줄로 안다. 여태까지 나온 한글도 나온다 같은 컴퓨터 광고는 첨단 산업이 얼마나 국어와 국문을 서자로 홀대해 왔는지를 들통 냈다. 자랑을 제대로 하려면 영문도 나온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 천구백팔십사년.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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