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들려주는 ‘지혜롭게 사는 법’이 수록되어 있다.심리학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의미하는 ‘프레임’을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으로 해석하며 ‘자신의 한계를 깨는 마음 경영법’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생각의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가 이‘프레임’에 의해 생겨난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아울러 일반인들이 이런 한계에 갇혀 있게 되는 심리적인 이유와 함께 그 한계를 깨는 방법을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프레임이라는 심리학적 주제를 일상생활의 눈에 보이는 실천 방안으로 풀어낸 점이 특징이다.
■ 저자 최인철
현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한 후에 사람들의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원리를 파헤치는 심리학에 매료되어 심리학과에 재입학했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뒤 미시간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일리노이 대학교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다 2000년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의 강의는2005년 동아일보에 서울대학교 3대 명강의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학술 저널에 수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한국심리학회에서 주는 소장학자상을 수상했다. 역서로는 『생각의 지도』『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있다.
■ 차례
지은이의 글 - 심리학에서 배운 인생의지혜
프롤로그 -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 프레임
핑크대왕 퍼시 | 프레임으로 보는 세상
1. 나를 바꾸는 프레임
행복을 결정하는 것 | 삶과죽음을 결정하는 프레임 | 실패를 부르는 회피 프레임 | 틀 속에 갇힌 마음 | 히스토리와 허스토리 | 편견의 실수 | 펩시가 코카콜라를 이긴힘 | 최후통첩 게임 | 소유와 존재의 차이 | 비만 해결책 | 1장을 나가며
2. 세상, 그 참을 수 없는 애매함
감각의 불확실성| 순서의 힘 | 명왕성의 운명 | 동메달이 은메달보다 행복한 이유 | 비교 프레임의 함정 | 질문의 위력 | 2장을 나가며
3. 자기 프레임, 세상의 중심은 나
자기중심성 |나의 선택이 보편적이라 믿는 이유 | 이미지 투사 | 뇌 속의 자기 센터 | 마음의 CCTV, 조명 효과 |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알고있다 | 내가 사는 이유, 네가 사는 이유 | 3장을 나가며
4. 현재 프레임, 과거와 미래가 왜곡되는이유
후견지명 효과 | 그럴 줄 알았지 | 우리 땐 안 그랬는데 | 과거 죽이기 | 자서전의 비밀 | 서태지의 멜빵바지 |계획표의 함정 | 예측하기 힘든 내일의 감정 | 선물세트가 잘 팔리는 이유 | 마음의 면역체계 | 4장을 나가며
5.이름 프레임, 지혜로운 소비의 훼방꾼
공돈 | 푼돈 | 원래 가격 | 문화비 | 일일 이용권과 시즌 이용권 | 원호와달러화 | 신용카드와 포인트 | 5장을 나가며
6. 변화 프레임, 경제적 선택을 좌우하는 힘
선택의갈림길 | 손실 프레임과 이득 프레임 | 현장 유지에 대한 집착 | 소유 효과 | 후불제의 위력 | 6장을 나가며
7. 지혜로운 사람의 10가지 프레임
의미 중심의프레임을 가져라 | 접근 프레임을 견지하라 | ‘지금 여기’ 프레임을 가져라 | 비교 프레임을 버려라 | 긍정의 언어로 말하라 | 닮고 싶은사람을 찾아라 | 주변의 물건들을 바꿔라 | 체험 프레임으로 소비하라 | ‘누구와’의 프레임을 가져라 | 위대한 반복 프레임을연마하라
에필로그 -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참고문헌
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나를 바꾸는 프레임
틀 속에 갇힌 마음
다음 영어 단어들이 컴퓨터 화면에 한 번에 하나씩 제시된다고 생각하고 다음 단어들을 빠르게 읽어보라.
Macintosh
Mechanism
Michael
Mechanics
Machinery
혹시 마지막 단어를 읽을 때 실수하지 않았는가? ‘머시너리’로 읽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매키너리’로 읽지는 않았는가? 아마도 상당수의 독자들이 그렇게 읽을 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제시된 단어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의 마음은 이미 ‘c’나 ‘ch’를 ‘ㅋ’으로 발음하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Machinery’를 ‘매키너리’로 읽게 되었던 것이다. 프레임이 하는 일이 바로 이와 같다. 어떤 프레임이 활성화되면 그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킨다.
위 예시에서 활성화된 프레임은 아주 단기간의 경험으로 형성된 프레임이다. 불과 몇 초 사이 형성된 프레임이 이 정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한다면,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또는 한 문화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 마음의 준비를 불러일으킬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다음은 어느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에피소드다.
아버지와 아들이 야구 경기를 보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의 시동이 기차선로 위에서 갑자기 멈춰 버렸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아버지는 시동을 걸려고 황급히 자동차 키를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기차는 차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들은 크게 다쳐 응급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외과 의사가 차트를 보더니 “난 이 응급 환자의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얘는 내 아들이야”라며 절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버지는 아들과 사고를 당한 뒤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던가? 혹시 의사가 친아버지고, 야구장에 같이 간 아버지는 양아버지였을까?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제 그 의사가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읽어보라.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당신이 이 시나리오를 조금이라도 의아하게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외과 의사=남자’라는 전통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 고정관념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그 의사가 엄마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외과 의사가 엄마라는 것을 짐작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응급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 의사로 거의 자동적으로 남자를 떠올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통해 뿌리 깊게 형성돼 온 젠더 프레임의 희생양인 셈이다.
세상, 그 참을 수 없는 애매함
동메달이 은메달보다 행복한 이유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1992년 하계 올림픽 중계권을 가졌던 NBC의 올림픽 중계 자료를 면밀히 분석했는데,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정을 분석하는 연구였다.
연구팀은 실험 관찰자들에게 분석이 가능했던 23명의 은메달리스트와 18명의 동메달리스트의 얼굴 표정을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의 감정이 ‘비통’에 가까운지 ‘환희’에 가까운지 10점 만점으로 평정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게임이 끝나고 개최되는 시상식에서 선수들이 보이는 감정을 동일한 방법으로 평정하게 했다. 시상식에서의 감정을 평정하기 위해 은메달리스트 20명과 동메달리스트 15명의 시상식 장면을 분석하게 했다.
분석 결과, 게임이 종료되고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동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로 나타났다. 비통보다는 환희에 더 가까운 점수였다. 그러나 은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고장 4.8로 평정되었다. 환희와는 거리가 먼 감정 표현이었다. 객관적인 성취의 크기로 보자면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가 주관적으로 경험한 성취의 크기는 이와는 반대로 나왔다. 시상식에서도 이들의 감정 표현은 역전되지 않았다. 동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5.7이었지만 은메달리스트는 4.3에 그쳤다.
이 연구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 내용도 분석했다. 해당 선수들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거의 ~할 뻔했는데”라는 아쉬움을 많이 드러냈는지 아니면 “적어도 이것만큼은 이루었다”라는 만족감을 나타냈는지를 평정했다. 분석 결과를 보면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의 경우 아쉽다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왜 은메달리스트가 3위인 동메달리스트보다 더 만족스럽게 느끼지 못한 것인가? 선수들이 자신이 거둔 객관적인 성취를 가상의 성취와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인 성취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은메달리스트들에게 그 가상의 성취는 당연히 금메달이었다. “2세트에 서브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텐데.” 최고 도달점인 금메달과 비교한 은메달의 주관적 크기는 선수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것이다. 반면 동메달리스트들이 비교한 가상의 성취는 ‘노메달’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4위에 그칠 뻔했기 때문에 동메달의 주관적 가치는 은메달의 행복 점수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더 낮은 성취를 거둔 동메달리스트가 더 높은 성취를 거둔 은메달리스트보다 더 행복해했다는 얘기다. 이는 C+를 피하고 간신히 B-를 받은 학생이, 아깝게 A-를 놓치고 B+를 받은 학생보다 더 만족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각 자극들이 주변의 자극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듯, 성취의 크기도 다른 성취(단지 상상 속의 성취였다 할지라도)와의 비교를 통해 달리 해석된다. 이처럼 공간상의 비교, 시간상의 비교, 심지어 상상 속의 비교에 의해서도 현실은 주관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은 본질적 애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 프레임, 세상의 중심은 나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자기 프레임을 과도하게 쓰다 보면 ‘나는 남들을 잘 알고 있는데 남들은 나를 잘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자신은 결코 치우침 없이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오해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타인에 의해 끊임없이 오해받고 왜곡당하고 있지만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오해는 집단 수준으로 확대된다. 우리 집단, 우리 민족은 다른 집단이나 다른 민족에 의해 왜곡되어 그려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잘 몰라”, “도대체 브리짓 바르도가 우리 문화를 얼마나 안다고 우릴 야만인으로 규정하는가?”라고 분개하지만 우리가 다른 문화에 대해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나는 너를 잘 알지만 너는 나를 잘 모른다’라는 생각의 뿌리를 좀 더 깊게 파헤쳐보기 위해 저자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10번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몇 번 정도 만나면 그 상대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반대로 그 상대방이 자신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몇 번이나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초면이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응답을 분석한 결과,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자신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적게 걸린다고 보고했다. 다시 말해 ‘나’의 입장에서, 타인은 짧은 시간에도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이지만 나 자신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쉽게 파악될 수 없는,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나는 한눈에 척 보면 너를 알지만, 너는 척 봐서는 나를 모른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이 단 5분 만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한다면 무척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5분이면 충분히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내면이 겉으로 잘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특징적인 몇몇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걷는 모습, 머리 스타일, 옷 입는 스타일, 목소리 크기, 글씨체, 좋아하는 색깔, 자주 듣는 음악…. 이런 식의 단서들이면 충분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글씨를 조그맣게 쓰는 사람은 성격도 소심할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든지,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창의성이 없다고 믿는다든지, 심지어 라면을 먹을 때 면을 먼저 먹는지 국물을 먼저 먹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등의 황당한 주장도 나오게 된다.
만약 애인이 “넌 혈액형이 B형이라서 내 결혼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또 “당신은 너무 소심해”라고 말하는 상대방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넌 글씨를 너무 작게 써!”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발라드를 감상한다는 이유로 상사가 더 이상 창의적인 일을 맡기지 않는다면? 당신이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 분명 어이없어 하며 자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 대해 발끈할 것이다. “어떻게 감히 그런 사소한 이유를 가지고 나의 심오한 내면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자. ‘나는 너를 알지만 너는 나를 모른다’는 생각은 자기중심성이 만들어 낸 착각이고 미신일 뿐이다. 정답은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거나 ‘나는 네가 나를 아는 정도만 너를 안다’이다. ‘예수님도 고향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어’라는 멋진 비유까지 들어가면서 ‘난 지금 오해받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더 큰 오해는 ‘내가 남을 알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현재 프레임, 과거와 미래가 왜곡되는 이유
과거 죽이기
현재 프레임은 과거를 현재와 유사한 것으로 부활시키기도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현재와 전혀 다른 과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특히 어떤 사건이나 특정 시점을 계기로 스스로 발전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기대감이 높은 경우에 그렇다.
흔히 결혼을 하게 되면 전보다 더 철이 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가해진다. 결혼하고 나서 실제로 철이 더 든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결혼을 해도 철이 들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바로 결혼 전의 자기 모습을 실제보다 더 형편없게 회상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변화를 겪은 경우에도 동일한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종교에 귀의하기 전에는 자신이 벌레만도 못했다고 고백함으로써 현재 자신은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현재의 자신을 ‘챔피언’으로 보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기꺼이 ‘얼간이’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과거 죽이기’ 현상을 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사람은 심리학자 마이클 콘웨이와 마이클 로스 교수다. 이들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 기술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프로그램이 시작된 시점에서 참여 학생들은 자신의 공부 기술을 스스로 평가했다. 총 3주의 훈련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에 참여 학생들은 현재의 공부 기술을 다시 평가했고, 나아가 프로그램이 시작되던 시점에 자신이 평가한 공부 기술을 회상하도록 했다.
그 결과, 훈련 프로그램을 마친 학생들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 자신의 공부 기술을, 자신이 그 당시에 평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 좋게 회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훈련을 통해 공부 기술이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가 강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과거의 자신을 더 깎아내려서 심리적 향상을 경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학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의 얘기다. 그때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실제로 과외를 한 후에 성적이 향상된 경우도 있었지만 몇 개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 부모에게나, 과외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중간에서 과외를 주선해준 사람에게나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서로의 체면을 깎지 않으면서 과외의 정당성을 세워주는 묘책이 등장하고는 하는데, 바로 과외를 하기 전 학생의 학습 태도를 깎아내린 것이다. “전에는 책상에 30분도 앉아 있지 못했는데 지금은 1시간씩 앉아 있긴 하잖아요”라며 과거를 희생시켜 현재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과거의 영광을 과장되게 부풀려 기억함으로써 현재의 초라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한다. 은퇴한 복서는 챔피언 시절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전성기를 되돌아보고, 더 이상 천재 소리를 듣지 못하는 평범한 대학생은 잘 나가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한다. 문제는 회상의 과정에서 과거가 실제보다도 더 부풀려져서 영광스럽게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날카로운 이빨을 지닐 수 없게 된 존재들은 과거 자신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롭고 강했는지 떠올리며 현재를 보호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과거는 실제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
이름 프레임, 지혜로운 소비의 훼방꾼
신용카드와 포인트
돈에 대한 프레임은 돈의 물리적 형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신용카드는 직사각형 모양에 재질이 플라스틱일 뿐 현금과 동일한 통화 수단이다. 현금과는 달리 지출 시기가 일정 기간 늦춰진다는 특징이 있긴 하지만 신용카드도 엄연히 돈이다. 카드 대금을 갚을 때 현금으로 갚지, 플라스틱으로 갚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막상 신용카드를 손에 쥐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 당신! 소비를 즐겨라!’라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고 만다.
미국의 한 식당에서 일주일 동안 135명의 손님들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그들이 신용카드로 음식 값을 계산하는지 현금으로 계산하는지를 기록하고, 종업원들에게 주는 팁의 액수를 조사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한 손님의 수와 식사비 총액을 모두 기록했다. 그런 후에 식사비 총액이 비슷한 테이블을 구분하여 팁 액수를 비교했더니 현금으로 식사비를 계산한 손님보다 신용카드로 계산한 손님들이 팁을 더 많이 준 것으로 나타났다. 현금으로 계산한 경우 총 식사비용의 평균 14.95%가 팁으로 주어졌지만, 신용카드로 계산한 경우 평균 16.95%가 팁으로 주어졌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참여자들에게 몇 개의 상품을 보여주고 각각의 물건을 얼마에 살 용의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한 조건의 참여자들에게는 상품 목록이 제시된 책상 한편에 신용카드 로고가 그려진 상징물을 비치했고, 다른 조건의 참여자들에게는 이 상징물을 비치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신용카드 로고를 본 조건의 참여자들이 그렇지 않은 참여자들보다 제시된 상품들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겠다고 응답했다. 한 예로 남자 스웨터의 경우 신용카드 로고 조건에서는 평균 20.64달러를 지불하겠다고 응답했지만, 신용카드 로고가 없는 조건에서는 13.91달러만 지불하겠다고 응답했다. 토스터기의 경우에는 그 차이가 67.33달러와 21.50달러로 더 크게 벌어졌다.
한마디로 돈의 형태가 바뀌자 지출의 규모가 달라진 것이다. ‘신용카드=소비’라는 공식이 우리 의식 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보기만 해도 소비 행동이 유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놀라운 연구 결과라 하겠다.
신용카드가 돈의 물리적 형태를 바꿔놓은 것이라면 각종 포인트나 마일리지 점수는 돈의 물리적 형태 자체를 없애버린 경우다. 개념적인 ‘숫자’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 지폐나 동전 혹은 플라스틱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그러나 포인트도 일정한 장소에서는 엄연히 현금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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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사람들은 물리적 형태를 갖춘 현금을 쓸 때보다는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포인트를 사용할 때 훨씬 더 쉽게 써버린다. 마치 포인트 점수는 현금보다 가치가 덜한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총 자산을 계산할 때 포인트까지 포함시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뿐만 아니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한 후에 자신에게 식사 값을 더 내라고 하면 주저하면서도 그 값에 해당하는 포인트 점수는 흔쾌히 사용한다. 동행한 친구들 역시 포인트 점수로 계산을 한 친구의 식사 값은 감해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포인트를 쓰는 사람이나 그 혜택을 보는 주변 사람 모두, 포인트는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