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스터

   
최정은
ǻ
휴머니스트
   
20000
2005�� 05��



>■ 책 소개
"트릭스터"란 "장난꾸러기" 정도의 기본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대개 신화나 민담에서 트릭스터라 불릴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영리하고 재치있는 주인공으로, 사건의 한 가운데에서선과 악, 지혜와 무지,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동시에 띠면서 희화화된 융합을 이끌어내는 경우이다.


회화로부터 인문학으로 관심을 뻗쳐 나가는 저자는 트릭스터와 데코룸(사회의 일반적규율인식), 이 두 개의 축을 가지고 다양한 유럽의 고대-중세-근세를 아우르는 민담과 전설 등에 관련된 회화들을 풀어나간다. 데코룸을 넘어서는순간 트릭스터로 변화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을 지칭하고, 현인이자 바보이며 방랑자이자 혁명가인 트릭스터의 다채로운 등장을 여러 가지 고증을 통해증명한다. 단지 고대 미술의 비평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작업은 여러 가지의 의미 속에 현대화된 가치들을 향해 그 칼끝을겨눈다.


신화나 민담, 전설 등에 얽힌 코드의 확인에 머물지 않고 그 의미를 여러 방편으로 추적해들어가는 깊은 인문학적 시선이 두드러지는 책. 평소 인문학의 영역에서 폭넓은 지적 여행에 목말랐던 사람이라면 목차만으로도 구미가 당길 만한책.


■ 저자 최정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미술사학과를졸업하고 현재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서양의 중세와 근세,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 지향점을 두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아침식사’ 정물화와 16~17세기 수사학의 관계를 연구하여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차려진 식탁(Ontbijtje)’의 상징과 의미〉라는논문을 썼고, 바니타스적인 17세기 정물화 전반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책을 한길사에서출판했다.


■ 차례 
지은이의 말 
프롤로그 : 늑대는어떻게 문명화되었을까? 
I. 데코룸, 삶의 기술 
1. "오만과 편견"이 "유브 갓 메일"에게 
2. 부름과 선물, 바람 속의소리 
II. 트릭스터, 시간의 선물 
3. 모노노케 히메 
4. 시간 속에서 흩어지고 살아나는 존재 
5. 폭력과 사랑,그리고 화폐 
III. 바보와 광인은 한 배를 탄다 
6. 타자가 되어버린 자들 
7. 트릭스터의 신체 
8. 역사와이야기 
IV. 루두스, 진지하게 놀아라 
9. 살아남는 트릭스터 
에필로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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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


I. 데코룸, 삶의 기술

오만과 편견이 유브 갓 메일에게

뉴욕 길모퉁이 책방(Shop Around Corner)이라는 조그만 그림책 전문서점을 운영하는 노처녀 애니는 동거중인 애인이 있으나 누군지 확실히 모르는 인터넷 메일 상대에게 보다 마음이 끌린다. 그들은 "메일이 도착했습니다(Youve got mail)"라는 글귀에 매료되어있다. 한편 맞은편 대형 서점이 들어서자 그녀의 서점은 문을 닫아야만 할 상황에 놓인다. 그 서점의 오너인 조 폭스를 애니는 편견으로 대하고, 조 폭스 역시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는 오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문닫게 된 서점 등 인생에 닥친 위기를 타개하고자 애니는 오랫동안 마음을 전해오던 메일의 상대와 만나기로 하고, 자신을 나타내는 기호로 『오만과 편견』을 들고 있기로 한다. 그러나 자신이 망하게 만든 길모퉁이 책방의 주인이 바로 애니라는 것을 알게 된 조는 당황하며 스스로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언제 만나게 될까?


『오만과 편견』은 한마디로 모든 로맨스 서사의 원형이다. 오스틴의 소설은 고전이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인간의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고전일 것이다. 영화로 제작된 〈오만과 편견〉이 아직까지도 인기를 끌며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보다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젠트리인 다아시와 신중한 엘리자베스의 진정한 사랑은 쉽사리 성취되지 않는다. 다아시는 대단히 오만하며, 엘리자베스 또한 시종일관 편견을 갖고 그를 대한다. 그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인습적인 결점인 오만과 편견이 깨져야만 하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소설에 근세적인 미학적 판단 기준과 행동 규범을 축약한 데코룸이라는 용어가 적어도 두 번 나온다는 점이다. 데코룸은 본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의 『웅변론』과 『의무론』에 나오는 개념으로 행위와 말, 신분과 직업, 장소와 시간의 적절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조화롭게 상응해야만 한다. 이 적절하게 행동한다는 것에는 서구 사회의 문명화를 이끈 근세적 행동 규범의 원칙이 집약되어 있었다. 행위에 있어 데코룸의 강조는 그 뿌리가 깊다. 데코룸의 인식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가 말하는 서구 문명화 과정의 핵심이다. 수치심을 모르는 자는 데코룸하지 않다. 적절한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것, 행위에 있어 수치심의 경계(schaamtegrens)를 결정해주는 것이 바로 판단 규준으로서의 데코룸이다. 데코룸한 태도에 있어 결과적으로 공통적으로 추출해낼 수 있는 규준이란 중용과 절제, 절도의 정신이다.


부름과 선물, 바람 속의 소리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1995). 포와탄 부족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다. 전통적인 인디언 사회 여성의 일상사에 별 관심이 없는 그녀는 버지니아 컴퍼니의 배를 발견하고 선원인 존 스미스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식민을 위해 정착하려는 버지니아 컴퍼니를 적극적으로 도우며 인디언측과 버지이나 컴퍼니측의 임박한 전투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전통적인 인디언 여성이 해야 할 일에 흥미가 없듯, 그녀는 자기 종족의 구혼자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고, 다른 문명에서 온 남자들을 차례로 사랑하게 된다. 존 스미스에 이어 귀족인 존 롤프 등. 포카혼타스는 포와탄 부족의 대표로 런던에 가서 영국 귀족의 옷을 입고 궁정에서 춤을 춘다.


디즈니가 다시 쓰기를 시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 제국주의 서사시다. 무엇보다 국가 발생 이전 사회의 교환 방식이던 선물경제를 왜곡한 것이다. 디즈니는 호혜의 선물과 동맹을 준비했던 인디언 부족 대표들의 평화로운 모임을 군사전략회의로 바꾸어놓았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담배는 당시 버지니아 지역에서는 재배되지 않았다. 만화에서 묘사된 인디언 부락과 버지니아 컴퍼니 간의 전투는 실제로는 담배 플렌테이션의 주도권을 둘러싼 백인들끼리의 싸움이었다. 포카혼타스가 중재해야 했던 상호 불신과 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계약 위반과 학살이었다.


포카혼타스는 식민지 지식인이 맞대면해야만 하는 존재의 아이러니를 대표한다. 그녀는 종족을 몰살시키거나 만국박람회에 전시되는 신기한 동물들과 나란히 놓는 침입자들을 사랑하고 스스로 끌어들이는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포와탄 부족의 선물은 수포로 돌아가고, 포카혼타스는 운명에 농락 당한다. 포카혼타스의 딜레마.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것, 다른 문화를 택해야만 하고 적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국적인 세계, 이 세계의 재생산에는 가로질러야만 하는 이항대립이 작용한다. 유통을 만드는 데 오인의 메커니즘은 필수적이고, 그 가로지르는 방법에는 문명화의 규준이 데코룸의 원칙이 개입한다. 학문세계의 규범, 중산층의 예의범절, 암묵적 도덕, 공유하는 무언의 관습을 통해 우리는 데코룸하게, 적합하게 되어간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옛날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기에.



II. 트릭스터, 시간의 선물

모노노케 히메

이야기가 시작되면, 왕자 아슈타카는 숲에서 뛰어나온 멧돼지 모양의 괴물악령 나고가 마을로 폭주하는 것을 저지하려다 팔에 상처를 입는다. 상처. 그것은 그의 운명이다. 상처는 점점 커지며 그의 정신과 육체를 괴멸시킬 것이다. 현자는 멧돼지의 몸에 박혀 있던 쇠구슬을 아슈타카에게 내밀며, 그가 흐려지지 않은 눈으로 진실을 보아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하여 아슈타카는 서쪽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장로들은 에미시족 마지막 왕자의 이러한 저주받음을 한탄한다. 이것은 왕자 아슈타카의 치유에 대한 여정 이야기다. 결정적인 주인공은 늑대소녀인 원령공주라기보다 팔에 죽음의 상처를 입은 아슈타카다. 그런데 왜 제목이 〈모노노케 히메〉인가? 원령공주는 그의 치유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너무나 확실한 주제인 동물들의 광기 어린 분노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여기서 나는 오로지 아슈타카는 누구인가에 대해 묻고자 한다. 아슈타카의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치유자이자 구원자로서의 역할이며, 여기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아슈타카는 삶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에 대해 말하지만 초인적이고, 산은 자신이 늑대라고 말하지만 인간적이다. 그들은 전혀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동물이자 초인이다. 알지 못하는 소녀인 산을 위해 죽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아슈타카가 행하는 것은 이름 없는 보편적인 사랑이다.


나는 초재적인 사랑을 지닌 이 아슈타카라는 인물이, 융이 말하는 영혼의 완성에 관련되는 그림자의 일부인 트릭스터의 구체적인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트릭스터는 비분화되고 비문화된 상태의 존재로, 이성과 감성이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인 인간성을 나타낸다. 마스크를 쓰고 등장하는, 흉내내고 익살떠는 신인 트릭스터는 신화적인 원형으로서 모든 형태의 이야기들 속에 항상 존재해왔다. 고대와 원시사회의 가면극에, 셰익스피어의 극에, 동화에서 공주와 결혼하고 크게 성공하는 바보 같은 막내나 살해당하는 어릿광대에 트릭스터의 모습이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광대의 얼굴은 울면서 웃는다. 이들 모두가 어떤 집단의 데코룸에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이자 주변인, 장난치고 웃음 짓게 하는 희생양, 트릭스터였다. 어떤 특정집단에도 소속되지 않는 모순된 존재로서의 아슈타카는 트릭스터적인 경계인의 성격을 갖고 있다. 트릭스터의 행동은 특정집단의 규범에 지배되는 사람들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해될 수 없다. 그는 합리적 판단이 아닌 본능의 소리에 귀기울이지만 분명한 위험을 피하지 않기에 동물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인간이다.


시간 속에서 흩어지고 살아나는 존재

융이 비분화된 심성으로 심리학에 받아들인 트릭스터 개념은 인류학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생각된다. 트릭스터는 트릭을 쓰는 자라는 뜻인데, 또한 기쁨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융을 비롯하여, 트릭스터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20세기 초의 인류학자와 신화학자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시차가 있으며, 조사와 문헌학을 통해 그 내용은 풍부하게 보완되었다. 동물에서부터 초인으로까지 변화하는 트릭스터는 요컨대 모든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비분화된 심성이다.


트릭스터의 유형은 너무나도 많고 이야기마다 결말도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트릭스터들은 고픔이라는 욕망에 시달리는 존재로 정의된다. 욕망이 그들의 주요한 특성이다. 그들은 뭔가를 열심히 추구하는 마니아적, 물신숭배적인 존재다.


트릭스터들은 자연과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성속의 경계를 가며, 장소에서 장소로 영원히 편력한다. 세계의 모든 신화가 말해주듯이, 트릭스터와 시간 그리고 발명과 선물의 관계는 각별하다. 트릭스터는 무엇보다 계량된 시간이 아니라, 적합한 때의 충만한 경험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이며, 그가 여행의 여정에서 겪은 고통들 혹은 부서진 신체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문화적 선물이 된다. 그러나 트릭스터란 여전히 모순적이며 양가적이다. 그들은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며, 심지어 시간 그 자체다. 또한 트릭스터는 영원한 방랑자이자 경계를 넘어서는 자이면서 자기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자이기도 하다.


폭력과 사랑, 그리고 화폐

바보, 광기, 욕망, 분열자, 그림자. 배제되거나 폭력의 대상이었던 인간 속의 인간, 합리적 계산에 의해 위험을 피하지 않고 동물로부터 자신을 극복하여 초인, 천재, 신으로까지 상승한 인간. 가장 순수한 인간은 언제나 비분화된 존재였으며, 적대하는 집단 모두를 구원하겠다고 나서서 주어진 장의 규범의 경계를 넘고자 했던 트릭스터였다. 신화적, 이항적 사고에는 하나의 단일체제적인 주체의 다른 에고, 비분화된 내면성으로 분신(double)이 상정되어 있으며, 이들은 또한 트릭스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인류학과 신화학에서 트릭스터는 더블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희생양이 되는 그런 존재다. 트릭스터는 희생양이 되거나 아니면 크게 성공한다. 트릭스터의 트릭이 웃음을 선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나 사회가 결함을 근거로 그를 희생물로 지목할 때, 그림자는 집단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희생양들 때문에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고 신화는 말한다.


사회나 집단이 정한 적절함의 경계를 넘거나 암묵적인 금기를 어기면 부정하다고 여기거나 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경계와 가치 체계가 다른 집단 간의 길 위에 있는 트릭스터는 쉽게 금기 위반자가 된다. 그가 적합한 규칙을 새로이 정립할 경우 영웅이 되지만 인지에 실패할 경우 처형된다. 인증된 새로운 규칙은 고정되어 구조화되고 경화되며 트릭스터는 이를 다시금 넘어간다. 인간이지만 신에 가까웠던, 가치 척도로서의 최고에 해당하는 인간을 그려볼 수 있을까? 그 최종적인 모습은 그리스도다. 개별자를 뛰어넘는 이 초월적 존재, 보통의 인간보다 신성한 인간은 상징적으로는 금의 가치를 지닌 화폐의 지위에 상응한다. 인간의 사랑이란 매개되는 것인데 그리스도는 마치 태양처럼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푼다. 되돌려받음 없이 오로지 주는 우주적 에너지원, 영원한 신성의 상징인 태양은 배제된 상품, 당장의 일상생활에서는 비효용적이나 영원하고 아름다우며 순수한 가치를 지닌 금의 상징적 위치에 상응하며, 금의 가치를 떠맡은 기호인 화폐는 다시 모든 재화에 대한 교환 가능성을 상징한다. 화폐와 신인(神人)이란 개별적인 구체성으로부터 공히 초월적이다.



III. 바보와 광인은 한 배를 탄다

타자가 되어버린 자들

행동에 있어 데코룸한 것이 무엇인지는 오만으로 나타나는 다아시라는 인격을 통해서 이해가 가능하지만, 비데코룸한 것을 배제했던 편견을 고려하지 않고는 적절하게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데코룸의 미학을 만들어간 인문주의적, 이성적 인간의 이상, 행동과 사유를 부조화시키고 관용적이고 절제하며 신념 있는 귀족적인 인간의 반대급부가 바로 푸코가 말했던 광인선에 탔던 미치광이 바보들의 모든 모습이다. 『바보들의 배』는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의 하나로 간주된다. 이 책은 경구와 삽화, 시가 어우러진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지난 수세기 동안 학자들마다 이 책을 보는 견해는 완전히 달랐다. 이 책은 독자들이 만들어낸 수백 가지의 다른 읽음의 세계 속에 놓여야만 제대로 조명될 수 있다.


브란트는 사회인이고 주변적인 지식이었다. 상인이었던 조부는 슈트라스부르크 의회에서 일했으나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아 황금사자장이라는 여관을 경영했다. 세 아들 중 장남인 세바스티안이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과부가 된 바바라 브란트는 아들들의 도움으로 가계를 꾸려나갔다. 브란트는 법학을 공부한 뒤 출판업자가 되었고 나머지 아들들은 여관 운영을 도왔다. 바젤 대학 시절 브란트는 요하네스 헤인린(Heynlin)의 추종자가 되었는데 당시 그는 리얼리즘 진영에 속해 있었다. 헤인린과 마찬가지로 『바보들의 배』에서 부에 대한 브란트의 비평적 어조는 두드러진다. 그는 물질적 부에 대해 죄를 짓는 세 가지 유형의 바보들을 가진 자, 추구하는 자, 물신숭배하는 자로 구별하고 있다. 시인은 부의 힘과 악을 목청껏 고발하는데, 표면적인 신랄한 비판과는 반대로 기독교적 사회 질서와 계급적인 지층을 완고하게 옹호한다. 즉, 상식의 옹호라는 측면에서 데코룸이 적용된다.


『바보들의 배』에 실린 시는 저자가 주변 세계에서 벌어지는 물질적인 변화들에 저항하면서도 불가피하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남는 것이 문제고, 따라서 체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악덕을 비판하지 않을 수도 없으며, 이러한 모순된 상황은 길을 찾고자 애쓰는, 이성을 지닌 사람을 바보이자 미치광이가 되게 만들만한 그러한 것이다. 이른바 광인이란 타자가 되어버린 자다. 결코 바보와 광인만은 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결코 광우가 아니고자 노력하나 이미 광우인 것이다. 이미-결코 사이에 주체는 분열되어 있다. 그것이 삶이다.


트릭스터의 신체

바흐친이 읽은 라블레는 민중적인 축제 정신을 언어로 구현한 진정한 르네상스 지식인이다. 바흐친의 저작들에는 평범한 민중에 대한 사랑이 있다. 카니발적인 정신에 깃든 기존 질서와 가치의 전복과 격하, 욕설, 죽음과 탄생, 물질과 육체적 하부의 긍정, 시간을 새로이 흐르게 하는 변화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 있다. 그의 시각에서는 오줌과 똥을 비롯한 소화와 배설의 이미지들은 웃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배설물은 무엇보다 익살맞은 물질이고 육체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과 우주에 대한 긍정이 있다. 식사, 배설물, 성생활과 같은 물질적인 몸의 행위와 작용들 속에서 인간은 물질적 우주와 그 자연력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고 내부로부터 느끼고 받아들인다. 그는 교회의 다양한 상징들과 의식들을 물질적, 육체적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격하시키는 바보제를 언급하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에는 전형적인 카니발이 묘사되어 있다. 콰지모도는 성당의 종지기로 유폐되어 살지만 카니발의 뒤집힌 세계에서는 왕으로 선출된다. 그는 왕관을 쓰고 망토를 입고 개들과 함께 힘차게 행렬을 하지만 곧 조롱받고 수난 당한다. 축제를 통해 콰지모도에게 가해진 사회폭력은 이전보다 한층 가혹했다. 욕설과 구타, 가짜 왕의 처형과 참수, 허수아비 조각 찢기 등 축제의 레퍼토리에는 폭력적인 광포함이 반드시 동반되었다. 축제란 제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광장에 나와 경계가 없어지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그 충만한 기쁨은 너무나 쉽사리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중세와 우리 시대는 다른가? 우리들은 영상적인 폭력을 볼거리로 언제나 제공받고 있으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한 느낌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완전히 무디게 만든다는 점에서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역사와 이야기

짐승 같은 농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표상, 거기에는 농민들의 광포한 반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1300년 이후 1525년까지 적어도 쉰 아홉 번의 농민봉기가 있었으며, 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다. 주로 과도한 세금과 농노제에 대한 반발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유를 원했다. 인간의 자유와 품위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질문했던 사람들은 바로 농민들이었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체제 내의 타자였기 때문이다.


근세적인 도시의 발전 이후, 전원생활은 언제나 찬미되었고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소박하고 목가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파스토랄 음악, 회화, 연극, 문학 등은 노동의 근거인 현실이 아닌 부유한 도시민의 오락을 위한 가장 인위적인 이상자연을 꿈꾸었다. 귀족들에게 전원은 땀흘려 일해야 하는 일터가 아니라 로쿠스 아모룸, 신들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노니는, 음악과 조화가 있는 사랑의 장소였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의 『두 마리 개 이야기』라든지 이탈리아 영화 〈파드레 파드로네〉를 보면 목동들의 실제 생활을 알 수 잇다. 이런 사실적인 작품들을 보면, 목자들의 삶이 실제로는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본능적인 욕구와 원초적 폭력이 난무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 루두스, 진지하게 놀아라

살아남는 트릭스터

비데코룸한 인간형은 그 범위가 대단히 넓은데, 거기에는 근대적인 인간의 이상형에서 지속적으로 억압되어온 무언가가 있으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 트릭스터라는 그림자의 형태로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자의 발현에 의해 경계나 금지를 넘고자 할 때 우리는 누구나 트릭스터가 된다. 그러나 트릭스터는 단순한 도둑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메신저이자 발명가이고, 신성과 접촉하며, 새로운 길을 여는 문화영웅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완성의 여정을 떠나는 이 비분화된 인간이 배제되거나 희생되지 않는 경우, 동화에서처럼 크게 성공하는 경우란 무엇인가?


옛 유럽 민담이나 동화에서 꾀를 써 거인이나 나쁜 왕을 이기는 바보 같은 막내인 트릭스터들은 보통 기존 질서의 흐름의 상부로 편입되지만, 세계의 수많은 이야기에는 그와는 다른 해결 방식들도 보인다. 살아남는 트릭스터는 흔히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제3의 길을 택한다. 이처럼 트릭스터 이야기에는 희생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측면들이 있는데, 예컨대 아메리카 민담에서 늑대와 코요테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서부 개척기에 늑대들은 몰살당했던 반면 코요테는 그렇지 않았다. 코요테가 수많은 민담 속에 주인공으로 남게 된 것은 인간의 덮을 교묘하게 피해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요테는 생존을 위해 덫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켜갔다. 코요테의 유명한 성향, 덫을 파내고 뒤집어놓고 그 위에 오줌을 갈기거나 심지어 똥을 싸놓기도 하는 행위는 일종의 유머 감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지하게 놀아라(Serio Ludere)." 이것은 모순어법을 활용한 르네상스적 정신의 대표적인 모토다. 진정한 선물이란 시간으로써만 오며, 또한 시간으로써만 가능하다. 때문에 그것은 헤르마이온일 수밖에 없다. 이 선물인 시간은 추상화되고 계량된 시간은 아니지만, 순간도 무한도 아닌, 일정하고 한계가 있는, 나에게 주어진 경험의 시간이다. 계량된 시간이 아닌 구체적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 기회를 만드는 적합한 때로서의 오카시오는, 오로지 즐겁고 진지한 놀이(루두스)로의 밀도높은 삶의 투여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시간 자체를 끊임없이 빼앗기며 여하한 자본도 재능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길이 열린다. 기회가 열린다. 나에게는 소용없는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커다란 것일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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