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ㆍ괴물지ㆍ엠블럼 - 중세의 지식과 상징

   
최정은
ǻ
휴머니스트
   
20000
2005�� 05��



>■ 책 소개
근대를 지나가는 과정에서까마득히 잊혀진 중세 역사의 복원을 시도하는 책. 중세의 기억의 기술, 중세의 동물·괴물지, 그리고 잊혀진 문헌 양식인 엠블럼 등의 주제를애니메이션과 영화, 문학 등의 해석을 통해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중세에 천착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중세와 인문주의가어떤 모습이었는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판화들과 그림들을 제시하며, 거의 대부분 형상언어로 구성되어 있는동물지·괴물지·엠블럼을 도상해석학적으로 읽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서양문명사 속의 중세, 그리고 자본주의 발생의 초기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준다.


■ 저자 최정은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홍익미술」편집장으로 있으면서 모더니즘과 현실주의 논쟁 등에 관한 기획을 하였으며, 종합 예술지 「공간」에서미술기자를 지낸 바 있다. 논문으로 〈17세기 초 네덜란드 정물화 "차려진 식탁"의 상징과 의미〉가 있다.


■ 차례 
지은이의 말


I.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1. 이름과기억 
괴물로 변하는 그림자 
이름은 장소를 위치시킨다 
약속과 인장이라는 모티프 


2. 기억의 기술 
고대의 기억의 기술과 수사학 
시뮬라크럼과 기억의 아포리아
중세의 동물지와 기억술 
살라만더의 기억 
기억의 극장 기획 
기억의 바퀴, 기억의 인장 
무한한 세계


II. 상상동물, 그로테스크와 하이브리드
3. 그로테스크와 하이브리드 
질문, 고통, 고문 
고삐 뿔린 상상력 


4. 중세의 동물지와 괴물지 
우로보로스, 앰피스배나, 헤르마프로디테 
유혹하는괴물들, 키마이라 하피 세이렌 
완성을 향한 여정, 이벡스 켄타우로스 
일각수의 꿈, 유니콘 
화양의 인간과 사티로스
성과 속의 경계, 가고일 


III. 드라코, 유혹, 사이코마키아 
5.왕자와 용, 그리고 시간의 아포리아 
잠자는 마녀 
새벽과 아침은 어떻게 올까? 
용, 펠리컨, 그리핀


6. 영혼의 전투, 체스와 주사위놀이 
체스판의 만다라, 푸루샤 
인내의 성,휴머니즘 게누스 
가터 기사단과 황금전설 


IV. 브리콜라주, 전유의 놀이, 엠블럼
7. 아멜리에와 아멜리오레 
변경해야 할 것은 변경하면서 
동어반복과 브리콜라주 
만남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


8. 잊혀진 문헌 양식, 엠블럼 
기억과 선물 
알치아티의 엠블레마타
모토, 알레고리적 그림, 주해 
마법사들의 언어 
엠블럼과 엠블러마투라 


V. 끝없는 갈림길의 정원 
9. 거울로서의텍스트 
지금 우리는 어두운 거울을 통해 본다 
중세의 복합, 거울로서의 책 


10. 역설적 찬사, 모순어법의 양가성 
네오와 트리니티 
모든 것, 그리고아무것도 아닌 것 
스텔라마리나, 바다의 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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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ㆍ괴물지ㆍ엠블럼 - 중세의 지식과 상징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이름과 기억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것은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다. 도시 소녀 치히로는 시골로 이사가는 도중 아빠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길을 잃는다. 그들은 버려진 공원에 접어드는데, 여기서 잠시 현실계에서 이탈하여 신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무심코 신의 음식을 먹은 엄마와 아빠는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에게는 엄마와 아빠를 구해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어려운 임무가 주어진다. 치히로가 접어든 이 환상세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인간이 동물로 변하는 곳이다. 느닷없이 한 소년이 나타나 치히로를 돕는다. 하쿠라는 이 소년은 가마지기와 유바바를 찾아 무조건 일을 구하라고 충고한다. 목욕탕의 여주인 유바바는 이름을 빼앗아 사람을 지배하는 마녀다.


치히로가 위기에 빠진 처음 순간부터 나타나 도와주는 하쿠는 센이 치히로라는 본래의 이름을 완전히 망각해버리지 않도록 일깨워 주는 존재다. 그는 유바바에게 마법을 배우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계약으로 교환한 소년이며, 그 점에서 센과는 입장이 다르다. 줄거리가 진행되어가면서 우리는 그가 강의 신이며 자신의 강이 매립되어 돌아갈 곳이 없게 된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은 이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토포스다. 아마도 이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믿음은 단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 적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한다는 신화적인 사고 방식일 것이다.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은 고유성, 있어야 할 바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기억함이고 그로 되돌아감이다. 인간은 환경과 상황에 떠밀려 마땅히 있어야 할 본래 자기의 모습을 잊는다. 어느 순간 마주침과 부름이 우연한 사건으로 도래한다. 부름, 이름 부름, 망각의 잠에 빠진 타아(他我) 깨우기. 이름 부름이 지목하는 실체란 실제로는 비어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리다.


기억의 기술

기억의 기술은 형상언어 활용성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며, 오늘날 정확한 언어를 추구하는 철학과 같은 순수학문이 아닌 교육학이나 경영학 같은 실용학문들은 과거의 기억술과 동일한 것을 중시한다. 자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상에 각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대에 수사학은 일곱 가지 자유학예에 포함되었으며, 왕자의 덕을 쌓는 데 필수 불가결한 웅변술과 관련되어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수사학 교본들은 한결같이 기억의 장소(locus 혹은 topos)의 배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능변을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기억의 장소들을 불러와 배치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위한 수사학적 체계는 주의 깊게 질서 지어진 장소들의 연속 그리고 재현된 상(images)에 의존한다. 이 상들은 생동하는 그림 혹은 이미지의 담지체(imagines agentes)로 불렸으며, 그 세부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의 속성들 혹은 상징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힘은 삼손으로, 왕은 사자로, 지혜는 솔로몬으로 대체된다. 상을 만드는 기억의 규칙은 닮음과 제유, 환유이다.


중세 동물지에서 모든 기억은 기독교의 도그마로 환원되며, 인간의 완성형으로서 왕 중의 왕인 그리스도에 대한 상념은 강력하게 표현된다. 자연과학적이고 경험적인 관찰과 상상 속의 행위들 그리고 현실의 사건들은 동물지에 혼융되어 있다. 그것은 중세적인 지식의 형태를 보여준다. 동물지의 서술은 예외 없이 도덕적, 교훈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점은 긍정적, 부정적인 예시 혹은 대립되는 양방향으로 해석이 항상 갈라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도마뱀인 살라만더(salamander)는 뱀 또는 용의 상징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며 모든 독 있는 생물 중 가장 힘이 세다고 여겨졌다. 뱀은 모든 동물 중 가장 차갑고 그 특징은 독이다. 하지만 살라만더는 불꽃을 이기는 유일한 동물로, 화염 속에서 살아가기조차 한다. 그리하여 살라만더는 기독교적 상징인 동시에 연금술적 완성태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동물지는 경험적 관찰과 문헌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던 시기의 사고 방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분리하고 망각했던 그 신화적 기억은 대단히 뿌리깊은 것이다. 동물지의 해석을 통해, 지금 우리는 상징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이란 단지 미신이나 부적합한 관념에 불과한가? 표상은 우상이 지워진 결핍의 자리에, 예기치 못한 모든 사물, 모든 언어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표상을 단죄하여 거부하기보다는 형상의 역사를 살펴 기호를 해독해나가는 가운데 보다 자유로운 사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드라코, 유혹, 사이코마키아

왕자와 용, 그리고 시간의 아포리아

어디선가 "잠자는 미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은 문화제국주의로 비판받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유독 비평의 철퇴를 거의 받지 않은 고전작품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왕자는 언제나 용을 죽여야만 했다. 왜? 대단히 어려운 과업을 완수해야 왕이 되기 때문이다. 공주는 권력과 교환되는 인증의 기표에 지나지 않으며 적법한 왕권을 얻기 위한 교환가치다.


중세 미술에서 죄와 악의 상징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동물은 용이다. 용은 보물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신성한 것의 경계를 지킨다. 때문에 방패와 문장에는 용 문양이 많이 새겨졌고, 중국에서 황제의 상징은 용이었다. 용을 뜻하는 드라코(draco)는 본래 뱀을 뜻했다. 뱀의 허물벗음은 옷과 의복이라 불리는 것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시간의 부단한 순환의 상징이 되었다. 신비주의 서사에 등장하는 용은 뱀이며 그 자체가 연금술적으로 변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붉은 용과 흰 용이며, 이들 사이의 싸움이다. 붉은 용과 흰 용의 싸움은 이벵/이베인(Yvain/Ebain) 이야기에 나온다. 혈통은 우수하나 수녀에 의해 반고아로 키워진 여주인공 침묵(Silence)은 남장 기사로 궁정에 들어가 왕인 이베인에게 봉사하게 되는데, 수려한 외모로 인해 부정한 여왕 유페므(Eufeme)의 유혹을 받게 된다. 왕은 침묵에게 편지를 들려 프랑스 왕에게 사절로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서한을 읽는 즉시 편지를 전달한 사자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현명한 프랑스 왕은 처형을 미루고 기다리자는 결론을 내고, 침묵은 간신히 살아난다. 그런데 유페므 왕비는 실렌티우스(침묵)가 없는 사이에 체스터(chest : 마음, 상자) 백작과 내통한다. 배신당한 이베인 왕은 왕위를 빼앗길 궁지에 몰리는데 실렌티우스는 왕을 돕기 위해 프랑스 왕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실렌티우스는 왕을 구하고 악-용을 물리친다. 배반자 유페므는 중세 관습대로 사지를 토막내 처형되고, 실렌티우스가 여자임을 발견한 왕은 실렌티아(Silentia)를 왕비로 맞아들인다.


연거푸 상황을 잘못 판단하는 바보 이반이 마침내 침묵이라는 충실한 조력자를 얻어 용(반란군)을 물리치고 자신의 왕국에 왕으로 복귀하는 것은 흥미롭다. 황야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용과 전투를 벌이고 중심을 성취한 인간은 자신을 도운 전사 침묵을 영원한 영혼의 반려자로 택한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것일까? 여기서 돌아옴은 떠나감이고 떠나감은 돌아옴이다. 붉은 용은 황금의 나선을 그리는 흰 용, 흰 학이 된다.


영혼의 전투, 체스와 주사위놀이

흰 용과 붉은 용은 또한 랭카스터(붉은 장미)와 요오크셔(백장미)의 내란이며, 선악의 전투인 4세기 푸르덴티우스의 영혼의 전투(Psychomachia)인 체스 게임이다. 체스나 장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체스의 기원은 인도이며 페르시아와 아랍을 경유해 유럽에 들어왔다. 체스 게임을 만든 이는 9세기 바그다드에서 활약했던 알 마스유디라고 전해진다. 그는 힌두 왕 발히트(Balhit)에게 이 게임을 바쳤다고 한다.


체스와 전쟁의 연관성은 분명하다. 체스의 전투적인 성격은 그것을 왕자와 귀족의 카스트인 무사계급 크샤트리아와 관련시킨다. 체스 게임은 지배와 방어의 실습이었다. 장기의 코끼리는 체스에서 대각선으로 활동 반경이 넓은 비숍이다. 코끼리는 세계를 받치는 법의 상징이다. 퀸과 비숍은 종횡무진이다. 직선으로 가는 루크는 강력하나 마지막 일격을 위해 아껴야 한다. 고대 동방에서는 관습적이었던 전투 질서에 따라 선과 악, 빛과 어둠, 두 개의 상반된 군대가 정렬하여 싸운다. 체스판의 흰색은 빛, 어두운 색은 어둠이다. 전투는 우주가 새로 창조되기 위한 태고의 성스러운 전쟁이다.


전사 크샤트리아의 카스트를 매혹시키는 것은 고귀함과의 전쟁, 의지와 운명 사이의 관계다. 체스 게임에 의해 정확하게 그려지는 것은 그 가능성들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고도 성스러운, 중심 없는 만다라 안에서 전개된다. 영혼의 호흡(푸루샤)과 더불어 가능성들은 승부의 결말이라는 진리에 다다른다. 선택을 통해 이기거나 진다. 그러나 승부와 진리를 통해 인간은 자유롭다. 이것이 체스의 가르침이다. 전사 계급은 체스 게임 안에서 여가와 함께 그의 호전적인 모험심과 열정을 다스릴 수단을, 그리고 행위로부터 관상으로 이끌리는 적절한 길을 발견한다. 영혼의 전투, 그것은 형태의 형태, 상징의 상징, 그 안에서 삶이 전개되는 형식을 보여준다.



끝없는 갈림길의 정원

거울로서의 텍스트

악과 싸우는 선, 성 미카엘이나 페르세우스 등, 용을 물리치는 기사들은 반드시 거울방패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 페르세우스는 거울을 통해 보기에 석화되지 않고 메두사를 물리친다는 것, 그리고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거울을, 아테나가 거울방패를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거울 체험이란 과거에는 무엇이었고 앞으로는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들고 있는 거울은 무엇인가? 이것이 영원히 불변하는 정신적인 원형이라는 점에서 고대, 중세, 현대에 거울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런 점에서 〈공각기동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자아와 전적으로 같으면서도 다른 거울 반영과의 만남으로서의 전형적인 거울상 체험에 대한 서사가 있다. 뇌만 인간이고 몸은 기계인 쿠사나기는 잠수 후 보트 위로 올라와 바토우와 대화하던 중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것은 어두운 유리를 통해서였지. 그러고 나서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거야." 이것은 바로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바울의 말로 모든 관상적인 중세 철학을 이끌어낸 바울 신학의 핵심적 명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는 필연적인 상황의 제시다. 바울은 이와 같은 언어적인 거울을 통해 인식론적인 한계에 빛을 던지려 노력했다.


글자와 책은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역시 거울로 생각되었으며, 책을 읽는 것은 스스로를 관상하며 숙고하는 행위였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관상하는 행위(speculatio)는 고대부터 무엇보다 책읽기와 글쓰기와 관련이 있었고, 사물이나 세계는 사유를 위한 양식이었다. 성서의 모호성 혹은 다가성은 텍스트 자체 안에서 독자들이 읽으며 풀어내야만 하는 차이를 창조한다. 거울로서의 책에 대한 은유는, 책읽기에서 텍스트를 호두껍질로 간주한다. 껍질을 깨뜨림으로써 핵심을, 내용물을 찾는 것은 글의 의미를 찾는 일의 비유다. 우화의 서술적인 표면은 하나의 외피이며, 그 덮음을 벗겨낼 때 의미는 내부와 외부를 향해 동시에 열린다.


역설적 찬사, 모순어법의 양가성

릴의 알랭은 새로운 인간(Neo Genus Bomo)에 대한 책 『안티클라우디아누스』를 썼는데, 그 새로운 인간은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순간이라는 시간 속에 영원이 깃드는, 어떤 경제적 장 안에 있는 통과의 존재다. 알랭은 새로운 인간을 직접 묘사하는 대신, 새롭고 완벽한 인간(네오 게누스)을 찾는 이성또는 진리인 레이디(trinity)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개념들은 모두 의인화되어 표현된다. 자연(Nature)과 차이(differance)는 낙원 추방의 결과인 인간의 결점과 세계의 불완전함을 한탄하며, 새로운 인간을 만들기 위해 창조주에게 도움을 청한다. 자연은 한 영혼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새로운 구원의 인간을 완성하기 위해 세 가지 덕목(신중, 예지, 지혜)을 지닌 여주인공 지혜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녀는 새로운 인간을 찾는 여정을 가게 된다.


알랭의 의도는 독자가 이 텍스트를 거울삼아 해석의 세 겹의 층위에 따라 도덕적,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벽한 인간을 찾는 여정은 결국 늘 그리스도로 귀착된다는 것을 알랭은 숙지하고 있었다. 거울이라는 모티브는 반복된다. 새로운 인간이란, 우리가 자신의 완벽함의 가능성을 그 사람 안에서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여주인공 지혜는 믿음과 이성이라는 거울의 매개를 통해 그녀의 영웅을 찾는다. 중세의 거울은 글, 그림, 타자, 인간, 자연, 세계였다. 그것은 신의 표현이었고, 거울과의 만남이란 언제나 타자 안에 비친 자기 자신과의 조우, 반영된 자신을 깨닫게 되는 특별한 만남을 의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눈은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유성과 속성으로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 내의 존재로, 하나의 사물이자 생명체로 나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부재, 없음(無)과 만난다. 그 무는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다.


아무것도 없음과 모든 것, 아무도 아닌 사람과 상당히 중요한 누군가를 모순 없이 포괄할 수 있는 담론적 장치가 바로 양가성과 모순어법이다. 근세 문예에 나타나는 대표적 특성인 양가성은 고대 문학의 번역과 부활에 유인을 지니고 있고, 중세에 무와 무한을 다루는 방식이었으며, 해석학적인 복합이고, 상반된 가치를 하나의 새로운 신체에 포괄할 수 있는 르네상스적 전인(全人)을 지향하는 방식이었다. 역설적 찬사란 요컨대 비난하면서 동시에 찬미하는 것으로, 즐거움 가운데 교훈을 주는 것이 추천되었기에 고대 로마의 풍자문학에서 번번이 사용되었고, 본질적인 모호함 때문에 강력한 비판을 하면서도 빠져나갈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님(nothing)을 직시하는 인간의 표상은 무엇일까? 실재에는 내가 알 수 있는 것과 나의 일부로 번역될 수 있는 것들 외에 불가능한 것과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 가질 수 없는 것과 잃어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의 감각은 우울함을 만들어낸다. 그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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