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듣다, 읽다

Regarder, Eoucter, Lire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역자 : 고봉만· 류재화)
ǻ
이매진
   
15000
2005�� 04��



>■ 책 소개
『슬픈 열대』로 유명한 인류학자레비-스트로스가 쓴 미학책.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푸생, 뒤샹, 모네, 들라크루아, 보티첼리를 보고, 라모, 바그너, 베토벤, 로시니를 듣고,디드로, 랭보, 보들레르를 새롭게 읽어낸다. 화가, 음악가,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인류학, 언어학, 철학이라는 양념과 버무려 흥미롭게 서술했다.


■ 저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1908년 벨기에브뤼셀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대학 법학부와 문학부를 거쳐 1930년대 초 최연소로 철학교수 자격시험에합격했다.1935년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사회학 교수직을 맡아 브라질로 건너가 미개문명에 대한 탐구에 정열을 쏟았다.1939년 프랑스로 귀국했으나2차대전 때 유대인 박해를 피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뉴스쿨에서 강의를 했다. 종전 후 귀국,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교수로 취임해사회인류학 강좌를 창설했으며,1985년부터는 강의를 하지 않고, 프랑세즈 아카데미 회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슬픈 열대』, 『구조인류학』,『오늘날의 토테미즘』, 『야생의 사고』, 『날것과 익힌 것』, 『신화학』, 『벌거벗은 인간』 등이 있다.


■ 역자 
고봉만
 
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를졸업하고 프랑스 마르크블로크대학(스트라스부르 2)에서 「혁명과 반혁명-바르메 도르빌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프랑스와 유럽 :유럽통합의 선택에 관한 역사적 접근」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프랑스 혁명』이 있다. 현재 충북대 교수로 프랑스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고있다.


류재화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여러해 일했다. 2005년 현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크블로흐대학 박사 과정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뜨로띠 뜨로따"시리즈를 비롯해 『모자 대소동』, 『신화와 예술』,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 등이 있다.


■ 차례 
1. 푸생을 보며
2. 라모를들으며
3. 디드로를 읽으며
4. 말과 음악
5. 소리와 색깔
6. 오브제들에 관한 시선
해설 / 인류학자,예술작품에서 교훈을 얻다
인용된 문헌과 작품




보다, 듣다, 읽다

 

1. 푸생을 보며

몽타주와 콜라주 기법은 프루스트의 작품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흔히 존재하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사건들을 영화처럼 배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개념은 터무니없다.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지각하는 것은 영화적 기법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프루스트의 이런 단호한 태도가 단지 철학적/미학적 이치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서로 다른 시기와 상황들의 이야기 조각들이다. 작가는 처음에는 단순히 사실적 진실성에 맞춰 사건을 나열하지만 구성을 발전시킬수록 사실적 진실성에 머무르기는 어려워진다. 이것은 최종 결정본을 위해서 계획안을 만들고 초벌 원고를 개작하는 일과는 다르다. 몽타주와 콜라주 기법은 작품의 최종 상태 안에서도 각 모자이크 조각들이 그대로 인정되고, 각각의 개별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푸생은 이런 이중분절 과정을 잘 보여준다. 디드로는 푸생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자기가 자기여야 하는 사람들처럼 완벽하고 온전하게 그 자체로 존재한다"며 순박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들라크루아는 푸생의 작품을 프리미티비즘(원초주의) 식으로 해석하는데 "표현의 순결무구함은 어떤 관행적 제작 방식 때문에도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모든 관습에서 절대적으로 독립함으로써 푸생은 정말 보기 드문 혁신가가 될 수 있었다.


푸생의 작품을 보면, 푸생이 회화를 재발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푸생이 태어난 16세기, 최소한 그 이전 콰트로첸토(15세기라는 뜻)의 스승들에게 손길을 뻗은 인상이 역력하다. 푸생의 상상력은 간혹 너무나 순박해서 - 사실은 천재적인 재능으로 승화시킨 순박함이지만 - 19세기 말 랭보만 하더라도 푸생의 그림에서 저잣거리 그림 같은 타락한 취향을 찾기도 했다. 루앙 박물관에 있는 〈아이네아스에게 자기 무기를 보여주는 비너스〉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프네를 사랑한 아폴론〉을 보면 등장인물들은 그냥 단순하게 그 자리에 놓여진 것처럼 보인다. 들라크루아가 "다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서로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극단적인 무미건조함"을 비판한 것도 아마 이런 점들 때문이지 싶다. 1721년 프랑스 화가 앙투안 쿠아펠도 이런 점을 아쉬워했다. 푸생이 표현한 인물들은 "더 자연스럽고 덜 무미건조하며 훨씬 어색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여러 증언들이 전하는 바로는 그림 작업에 들어가기 전 푸생은 작은 밀랍인형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에 해당하는 자세를 취한 인형들을 만들어 판 위에 배치하고, 젖은 종이나 얇은 호박단으로 인형들을 싼 다음 뾰족한 작은 막대기로 두들겨가며 주름을 만들었다. 또 벽면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상자로 덮어두었는데 빛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면서 인형 옷에 생기는 그림자들을 포착했다. 물론 푸생의 선배들도 이런 방법을 활용했다. 그렇지만 이 작업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에 폐기되었다. 어느 화가도 3차원 축소모형을 푸생처럼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활용한 적이 없으며, 그림을 완성한 뒤에 이 축소 모형을 가지고 있던 예도 없다. 푸생의 인물들은 (캔버스) 천 표면 위에 그려진 것이라기보다 거의 실현불가능한 얇은 두께로 조각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너무나 완벽하게 동화시켜버린 제작방식인지라, 그것은 푸생의 사유방식이 됐다. 그토록 심사숙고해 만들어진 도시 또는 시골 풍경들이니 관객들은 그림 속으로 빠져들어가 각자 선택한 여러 행로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연장에 상응하는 시간의 연장, 그 지속 시간 속의 몽상. 푸생의 작품을 관조하는 맛이란 바로 이것이다. 관객이 무언가 경이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 부조의 출현을 푸생의 시대가 조금이나마 예고했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푸생의 작품들은 숭고하기 이를 데 없다. 세련미 면에서 보자면 〈엘리에제르와 레베카〉는 가히 최고의 경지다. 인물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아도 걸작이며, 인물들 각 그룹을 놓고 보아도 걸작이고, 그림을 이루고 있는 전체를 보아도 역시 걸작이다. 각자의 완성도 속에서 서로 정밀하게 밀리며 하나가 다른 하나 속에 꼭 맞게 끼워맞춰지는, 이른바 세 가지 별도 요소의 조직미가 잘 어우러진 결정판이다. 형태 요소와 색채 요소가 동일한 비중을 갖고 작품은 여러 차원에서 전개된다. 동시대인들은 푸생이 채색에 능한 화가는 아니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푸생이 즐겨 쓴 선명한 푸른색이 압권인 이 한 폭의 그림만 놓고도 그런 비난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공기원근법과 채색법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푸생과 앵그르는 채색을 별개로 처리하기로 했다. 일단 그림을 대강 마무리한 다음에야 색을 처리하는 식이었다. 진짜 본연의 자기 색만 고민하면 됐지, 무엇을 더 선택할 것도 없었다. 타협을 회피함으로써 데생과 채색은 각자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런 채색법은 음악 장르에서는 듣기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두 경우 모두 사실은 엄청나게 풍부한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판화가 데생과 채색의 분리를 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가와나베 쿄사이 같은 동양 쪽 화가들은 서양화가들이 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모델이 새라면 새는 계속 움직일 테니 화가는 아무것도 그리지 못할 것이다. 쿄사이는 자신이라면 하루 종일 새를 관찰한 뒤에 기억된 새의 포즈를 서너 번 선으로 재빨리 스케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쿄사이가 모사하는 것은 현재적 순간의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이 저장해놓은 이미지였던 것이다. 이 교훈은 앵그르가 푸생에게서 끄집어낸 것과 비슷하다.


푸생은 말한다. "화가가 더 능숙해지려면 사물을 지치도록 모사하는 것보다 잘 관찰하는 것이 낫다. 특히 화가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펠리비앵의 글에서 인용)." 화가는 모델을 자기 머릿속에 살게 만들고 자기 소유물인 양 거기다 상감(象嵌)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모델의 본성을 기억 속에 잘 넣고 있어서 스스로 우러나와 작품 속에 자리잡게 해야 한다." 꼭 쿄사이의 말을 듣는 것 같다. 둘을 굳이 비교하지는 않겠다. 동양의 화가와 서양의 화가가 각자 서로 다른 미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것은 자명하다.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각자의 기술을 가지고 작업한다. 앵그르는 쿄사이와 거의 같은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호주머니에 항상 수첩을 넣어 다녀야 한다. 어떤 사물이 인상을 끄는데, 전체적으로 다 그릴 시간이 없으면 연필로 네 번 정도 선으로 얼른 그려놓는다." 여기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일본 화가가 거의 날아갈 듯한 움직임과 그 특징 속에서 한 존재를 포착하려고 한 반면 앵그르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화가(푸생)는 각각의 종(種)을 일반화한다.



2. 라모를 들으며

라모의 화성론은 이미 구조적 분석을 앞질러 있다. 아직 이론을 형식화하지는 못했지만 변형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라모는 당시 음악가들에게 알려져 있던 화음 수를 서너 개로 나눴다. 먼저 장조 화음에서 출발해 첫 화음의 자리 바꿈을 통해 전혀 다른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18세기 대중들은 오늘날의 청중들이라면 대부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음의 변조에 열광했다.

전문 음악인이나 음악 연구가라면 혹시 몰라도 우리들은 이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당시 청중들이 우리들보다는 음악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들에게 그나마 익숙한 19세기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라모와 그 시대 음악은 우리들에게 덜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1840년 발자크만 해도 라모의 음악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멜로디와 하모니가 동일한 힘으로 겨루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에 더 길들여진 청중들이 우리에게는 덜 익숙한 음악에서 더 많은 것을 인지했던 셈이다.   


우리가 맛보는 음악은 -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에 이르기까지 - 우리가 씹기 좋게 만들어져 있지 않은가? 더 복잡하고 현학적인 음악의 경우 전문적인 기술의 측면은 사실상 우리의 이해 능력을 벗어난다. 그러니 음악은 우리를 머리 아픈 이해의 의무에서 면제해준다. 그리고 수동적인, 그러나 수용자들로서는 대단히 편안한 배역만 하라고 한다. 18세기 청중들의 음악적 기쁨은 아마 훨씬 더 지적이고 대단히 순도 높았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청중들과 비평가들은 한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 음조의 연결이나 조바꿈에 세심하게 신경썼다. 음악적 능력을 갖추는 게 당시에는 큰 유행이었다. 일대 혁신으로 가득찬 음악 이론들은 뉴턴의 이론과 쌍벽을 이루며 여론을 흥분시켰다. 이것은 오늘날 천체물리학과 우주학에 대한 대중과학서의 상업적 성공과 비견될 만한 대중적 인기였다. 그러나 차이점은 있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과학대중서를 읽는다. 그러나 음악이 연주되던 살롱을 들락거리던 이들은 실제 음악가 수준으로 작품을 평가할 수 있었다.


아돌프 아당은 라모가 작곡한 〈카스토스와 플룩스〉제2막에 나오는 조 바꿈이 대단한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대백과사전』에서 라모 항목을 작성한 퀴타르도 마찬가지였다. "〈카스토스와 플룩스〉는 여전히 대단한 개가였다. 대담한 화성,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조 바꿈." 이후에도 이런 해석은 한결같이 비슷하다. 이 걸작은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조 바꿈이 없는 1737년 판과 훨씬 극적이었던 1754년의 제2판. 2판에서는 서두를 빼버리고 축제, 기습 공격, 전투, 카스트로의 죽음 등이 나오는 부산스러운 1막이 바로 나온다. 2막은 스파르타 시민들의 장례식과 〈통곡하노니〉 합창부로 문을 연다. 그러나 제1판과는 다르게, 이 합창부는 〈슬픈 준비, 창백한 횃불〉 아리아와 바로 연결된다. 바장조 가락에서 연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텔라이르가 부르는 아리아 속의 내림마장조 가락으로 이동하도록 실행시키는 것이 바로 이 세 음(파, 라, 미)을 통한 조바꿈인 것이다.


텔라이르의 아리아에서, 준비되고 있는 조 바꿈의 모델에 따라 형태적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전주곡은 사실상 조 바꿈 그 자체의 전개로 인식된다. 이 전주곡은 조 바꿈 이미지에 따라 똑같은 지속 길이에서 벗어나 천천히 분산화음 처리된 세 음(여기에 저음부가 또 붙는다)을 만들어낸다. 이 전주곡은 내림미와 그 자리 바꿈 화음 주변을 빙빙 돌다 우선 거기 닿았다가 이내 떨어져 나오는가 하면 종국에는 다시 거기로 돌아간다. 이 준엄하고 엄격한 노래는 예기치 않은 여정(큰 음정들을 활용해서 그렇다)을 통해 스파르타인들이 하는 합창의 반음계를 극단까지 밀고 간 온음계로 변형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청중들이 이해한 것처럼 이 조 바꿈을 두 음조 사이의 이행으로만 볼 게 아니다. 이 혁명적인 조 바꿈은, 작곡가가 건축가의 작업 방식처럼 입체적으로 구상한 설계도를 현실화하기 위해 실제 적용한 복잡한 형식을 청중들에게 슬쩍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3. 디드로를 읽으며

1751년에 나온 『백과전서』제1권 첫머리에서 디드로는 과거 어느 선배도 풀지 못한 미(美)의 본질이라는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장담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미 라모에 관한 이론서들이 사용한 옛 철학적 개념을 반복했을 뿐이다. 추상과 구체, 형식과 내용, 개념과 사물을 분리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디드로는 관계에 대한 개념에서도 추상을 아주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인 오성을 통해서 나오는 것으로 파악한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에 관한 편지』에서 디드로는 사물을 동시에 말하면서 묘사할 수도 있는 힘을 시에서 찾던 자신의 상형문자 이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오성이 사물을 포착하는 순간, 상상력은 그것을 보고 귀는 그것을 듣는다." 그러니까 시적 담론은 하나 위에 다른 하나가 켜켜이 쌓여 있는 상형문자 같은 천처럼 보이게 된다.


디드로는 고대와 근대의 시에서 뽑아낸 다양한 예들을 가지고 이 이론을 예증한다. 또 음성학적/운율학적 각도에서 시들을 분석한다. 동일한 시 작품들에 대해 오늘날 가해지는 구조적 분석은 첫 단계로 디드로가 관찰한 내용의 대부분을 채택한다. 시를 인식하는 이런 방법은 대단히 근대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디드로의 것일까? 이런 방식은 이미 바퇴 신부한테서도 발견된다. 


디드로는 미(美)가 단순히 사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지각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관계성이란 어떤 오브제건 다 있기 때문이다. 오브제에 대단한 밀도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 내부의 자체적 관계성이다. 디드로는 단순한 관계성만 다룬다. 복잡해지면 배제시킨다. 작품 내부에서 증식된 관계성은 작품이 나머지 외부 사물들과 유지하고 있는 관계를 희생해가며 얻어진 것이다. 바로 이런 관계성 때문에 작품은 더욱 고양되고 커다란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작품 내에서 스스로 맺어지는 이런 관계성은 작품을 그것 자체로, 그리고 그것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적 실체로 만든다. 칸트가 명확하게 정의했다시피, (외부적) 목적 없는 (내부적) 목적성을 갖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적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디드로의 시도가 유산돼 버린 것은 18세기 사상가들의 급한 성미 탓이라고도 볼 수 있다. 베이컨의 사상에 푹 빠져 있던 이 사상가들은 경험이라는 지상 명령 앞에 초조해져 있었다. 경험에 대해 일종의 탐욕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경험이 모자란다 싶으면 아예 고안해냈고, 헤매는가 싶으면 다시 추상화의 늪에 빠졌다. 디드로 역시 구체적인 사례들 - 끈질긴 노력과 근면성이 더욱 요구되는 - 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개념과 사물, 감각과 정신의 이율 배반성을 뛰어넘어야 했지만 결국 이 문제 앞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4. 말과 음악

60년 전 야콥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시와 비교해서 음악의 특수성을 언어학적 용어로 설명해본다면, 그 규약의 집합체(소쉬르의 용어에 따르면 랑그, 즉 언어)는 음운론적 체계에 국한되며 음소들의 어원학적 분류체인 어휘들은 포함하지 않는다." 음악은 단어들이 없다. 악음소라 명명할 수도 있을 음들과 악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음악은 사전을 배제한다.


루소는 간혹 이것의 역명제 - 사전은 음악을 배제한다 - 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엄선된 단어사전은 지루한 장광설이 아니며 잘된 화음 모음집, 음악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화음은 아무리 훌륭한 화음일지언정 단어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루소는 음과 화음을 이런 정도까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각자 소리는 그 자체로 화음이 된다. 왜냐하면 "소리는 동시발생적인 조화로운 소리를 그것 자체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는 신의 없게 라모한테 등을 돌리면서 - 루소와 디드로, 달랑베르 등은 처음에는 열렬한 라모 예찬자였으나 1750년대 중엽부터는 이탈리아 음악에 이끌려 라모에게서 등을 돌렸다 - 이런 논거를 내밀었다. "화성(하모니)은 무용하다. 왜냐하면 화성은 이미 멜로디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음악과 다른 음악들, 즉 전통적이거나 이국적인 음악들, 예를 들어 일본 음악 같은 경우는 기본 요소가 음들이 아니라 리듬과 선율의 단위들 -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에게는 모두 공통적인 최소 단위체 - 이므로 음과 악구 사이에 어떤 중간층이 있을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경우 역시 단어 체계 같은 것은 없다.


인간들은 서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수천 개의 언어들을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상호 이해가 불가능한 언어들은 인간으로서 지니는 보편적인 경험들을 참조하면 (구체적인 경험은 각자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이해 가능한 어휘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두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음악에서는 불가능하다.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며 동시에 철학자였던 미셸-폴-기 드 샤바농은 음악은 우리 감각에 의해 지각된 효과들을 모방하지 않으며 좀더 적절하게 말해 우리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앙드레 모를레 신부의 견해에 동의했다. 음악은 단 하나의 멜로디로 축소해서 화 또는 분노를 만들어낼 수 없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글루크는 60개의 악기 아래 목소리는 지웠다. "분노는 노래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방의 문제가 모를레를 난국에 처하게 했다. 모를레는 모방이 불완전하니까 결국 모방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모방이 자연보다 더 이점이 있다는 역설이 나온다. 샤바농은 놀란다. "왜 시는, 그림은, 조각은 성실한 이미지를 줘야 하는가? 음악은 불성실한 이미지를 주는데. 그런데 만일 음악이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면 도대체 음악은 무엇인가?" 우문일까. 시각과 청각처럼 귀도 즉각적인 쾌락을 누린다. 이렇게 봤을 때, 음악은 모든 모방에서 독립해 전혀 다르게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음악은 청중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하게 된다. 음악이 직접 효력을 미치는 것은 우리 감각, 오로지 감각뿐이다(가사가 있는 성악에서는 표현의 매력보다 앞서는 어떤 매력이 있긴 하지만). 그런데 정신이 이 감각의 즐거움을 간섭한다. "소리에는 확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데, 정신은 다양한 오브제들과 자연의 다양한 효과들을 결부시켜가며 끊임없이 소리와 의미의 상관성 또는 유사성을 찾는다." 모를레도 쓰고 있지만 위대한 대가들이 그리고 싶어서 그린 동일한 물리적 오브제들이 담긴 작품들을 보면 "거의 항상 템포에서든, 리듬에서든, 음정에서든, 선법에서든 유사한 단계, 공통적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연적 또는 도덕적 현상 같은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 작품들 속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좀더 발전된 분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를레와 샤바농처럼 고유한 불변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용어는 - 음악 용어든 미술 용어든 - 그것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관계들이다.



5. 소리와 색깔

루이-베르트랑 카스텔 신부는 18세기에 시각적 클라브생(건반이 달린 발현악기(撥絃樂器). 챔발로, 하프시코드, 클라비쳄발로라고도 하며 16~18세기가 그 전성기였다)을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악기를 제작하지는 못했다. 루소, 디드로, 보들레르는 음악이 청각에 자극을 주는 것이면 몰라도 색이 시각에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는 생각을 비웃었다.


카스텔은 그 시대에 벌써 이런 말을 했다. "색깔 분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새롭다. 그 대단하신 뉴턴 씨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이 뭐라 말하든 내가 알아낸 생각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해 남겨둬야 한다고 보는 엄청난 발견들 중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카스텔의 생각은 프리즘으로 분광된 색들이 원색이라는 뉴턴의 생각과는 달랐으니, 사실상 더 후대의 신경학자들한테서나 위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텔이 신경생물학자나 물리학자 위치에서 색을 보는 건 아니다.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색을 본다. 이것이 바로 카스텔의 독창성이다. 카스텔은 색에 대한 평가가 문화에 따라 변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색깔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던 카스텔은 흥미롭고 놀라운 이론을 전개한다. "검정은 색깔들의 보고(寶庫)다. …… 검은색에서 모든 색이 파생한다." 검은색에 대한 기존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음으로써 카스텔은 하나의 선례를 만들었다. 민감한 색채 감수성에서 착상을 얻은 이론은 검은색의 가치를 전복시킬 것임을 예고했다. 말하자면 훗날 랭보가 「모음들」에서 완성하게 될 바로 그것이다.


색청(色聽) - 서로 다른 감각들간의 조응, 흔히 공감각이라고 정의되는 - 에 대해 야콥슨은 이런 지적을 했다. "진홍색처럼 상위 색채 단계에 속하는 색이나 트럼펫 같은 상위 음색 단계에 속하는 소리가 색깔 명사 에카를라트écarlate(진홍색)에 들어 있는 모음 음계 최정상인 [a]와 자음 음계 최정상인 [k] 소리들과 맺어지는 연계성을 보노라면 실로 장관이다."


랭보는 보들레르를 읽었다. 보들레르에게 역시 붉은색은, 그러니까 이리 어둡고 이리 두터운 이 색깔은 역시나 검은색과 짝을 이룬다. 완벽한 붉은색 …… 위대한 밤, 검은 밤, 붉은 오로라, 광대하고 검은 무(無) …… 피 속에 잠긴 태양 등등. 『적과 흑』을 쓴 스탕달까지 떠올리지 않아도 많은 낭만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한테서 다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음성학자들이 프랑스어에서 확인한 모음은 16개에서 18개에 이른다. 그러나 랭보는 「모음들」에서 다섯 개만 말한다. e는 하얀색, a는 검은색, i는 붉은색, u는 초록색, o는 푸른색. 랭보가 자신의 시에서 색깔 명사를 상당량 소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명사들이 연결 볼트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도 어렵다. 랭보 시에서는 색깔들의 두뇌 지도가 특히 지각 정신에 강렬한 자극을 주는 것으로, 그것의 기능적인 가치가 살아 있다.



6. 오브제들에 관한 시선

조형미술의 역사에서 사실주의는 관습적 규약 앞일까? 아니면 뒤일까? 이런 논쟁은 20세기 전환기에 크게 유행했던 주제다. 보아스는 사실주의와 관습적 규약은 항상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두 가설 중 어느 것도 장식 미술의 역사적 발전을 조망해주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의 바늘집에 관한 보아스의 논문을 읽어보면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이 논문은 최근의 조각가들이 어떻게 관습적/규약적 문양을 사실주의적 의미로 치환하면서 기꺼워하는지 잘 보여준다. 관습적 문양에서는 아무런 기술적/실용적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보아스의 이 논의 뒤에는 사실상 다른 문제가 숨어 있다. 문자 없는 민족의 예술을 볼 때는 다만 자연을 또는 관습을, 아니면 둘 다를 참조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초자연적인 것도 함께 참조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초자연적인 것을 더는 보지 못하게 된 우리는, 문자 없는 민족의 예술을 관습적인 상징물 또는 고상하게 가공된 인물 형상으로 대체해버린다. 멜라네시아에서든 미 대륙 북서부에서든 또는 다른 어느 곳에서든 관습적 표상물들은 어떤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경험의 궤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다. 표상물들은 실제 체험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규칙들이 적용된 일종의 문법 형태 같은 것이다.


보아스가 제기한 문제는 음악을 통해서도 논의해볼 수 있다. 대중적 민속 음악은 난해하고 교묘한, 흔히 하는 말로 현학 음악과 맥이 닿는다. 장식 미술이 표현(표상) 미술과 맥이 닿는 것처럼(민속 음악 : 현학 음악 = 장식 미술 : 표상 미술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시 미술은 현대 미술과 통한다 또는 현대 미술은 원시 미술을 통해 배운다는 말을 상기해볼 것). 미술에서 오브제가 있어야 장식이 되는 것처럼 음악은 춤을 지원한다. 반복구, 후렴구(음악에서는), 되풀이 모티브들(미술에서는)처럼 단순요소들을 합치고 반복시킴으로써 전체를 전개시키는 방식은 둘 다 마찬가지다.


구술은 글자 대신 단지 기억에 의존해서 위대한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호메로스의 시, 중세의 무훈시 그리고 신화들이 모두 구비문학이다. 그런데 왜 음악은 글자를, 그것도 자기만 알아보는 고유 표기법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마도 구비문학은 언어라는 일반적 사용 도구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반면 음악은 자기한테 맞는 다른 언어를 취득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그 자체의 연속성과 모든 기보법 체계에 내재해 있는 불연속성이 부딪혀 그 언어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톰슨 인디언들이 거주하던 지역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지역에서 출토된 각반을 보면 술이 달린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각반을 차면 움직이거나 쉴 때 이 술들이 서로 뒤섞인다. 이것을 만든 여자는 시각적 효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헤아린 것이 있다면 그건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느끼는 기쁨이지 별다른 건 없다. 장식적 리듬, 이 의상의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그러니까 보아스가 보기에 규칙성, 대칭성, 리듬성이야말로 모든 미적 활동의 기초다. 그러나 보아스의 형식주의는 이런 물리적 또는 신체적 구속의 직간접적 모방이 감정들 속에 그 원천이 있다는, 또는 그 모방이 어떤 메시지를 실어 나른다는 생각은 배제한다. 물론 감정이 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가된 것일 뿐이다. 흔히 미술비평이 너무 자주 뒤지는 감정적 또는 철학적 객설 따위를 몰아내버린 보아스가 이런 점에서는 상당히 옳다. 그러나 보아스의 형식주의가 운동과 동작에서 자연적이고 경험적인 토대를 찾는다는 점은 또 역설적이다.


바그너는 연속음 5개의 길이의 순열(順列)을 바꿈으로써 〈브륀힐트의 잠〉, 〈새〉, 〈라인강의 처녀들〉 같은 모티브들을 만들었다. 물론 다른 순열도 가능했다. 작곡가가 채택한 순열들이 작곡가의 정신 속에서 어떤 것은 체계를 형성하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않게 되는지 이유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사실상 여러 배열과 조합 방식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문제는 규칙성, 대칭성, 리듬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술가는 이것은 택하고 저것은 택하지 않는지를 아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창조하자마자 바로 작품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 작품은 자기 고유의 본성에 따라 알아서 발전할 뿐이다. 달리 말해 예술 작품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작품들이 또 태어나도록 생명을 주는 것이다. 동시대인들이 봤을 때 자신들이 바로 얼마 전에 감상한 작품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보이는 작품이 탄생하도록.


수천 년의 단계를 한눈에 봤을 때 인간의 열정들은 다 뒤섞여 있다. 시간은 인간들이 경험한 사랑과 증오, 맹세와 투쟁, 희망 따위에 그 무엇을 더 보태지도 빼지도 않는다. 인간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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