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최고의 생존 전문가 베어 그릴스가 전하는, 진짜 생존 이야기들
영웅이란 무엇이며 생존이란 무엇인가. 영국육군공수특전단(SAS)에서 군복무를 하고 현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맡으며 세계 최고의 생존전문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베어 그릴스가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위대한 용기를 소개한다. 극지, 사막, 바다, 정글 인간은 인간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하고 또한 이겨낸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모험 정신과 진정한 기개(Grit)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존의 욕망은 삶에 대한 위대한 용기이며,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을 투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위대한 인간 이야기에서 진정한 기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베어 그릴스
200여 개국에서 무려 12억 시청자들을 끌어모은 TV 프로그램 ‘인간과 자연의 대결(Man vs. Wild)’의 진행자 겸 프로듀서로, 12권의 저서 중에서 『진흙, 땀 그리고 눈물(Mud, Sweat and Tears)』은 13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특히 중국에서는 2012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국 특수부대 SAS에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갖가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지구에서 가장 험악한 곳들을 성공적으로 탐험하는 탐험가이자, 아동 기금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는 자선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에는 영국 스카우트 연합의 수석 스카우트로 위촉되어 전 세계에 있는 300만 명 스카우트 대원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내 사라와 세 아들 제시, 허클베리, 마마듀크와 함께 런던에 있는 바지선과 웨일스 해안에 있는 한적한 섬을 오가며 살고 있다.
■ 역자 하윤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전공하고, 회사를 다니다 뒤늦게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책에 담긴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 차례
머리말
1장 난도 파라도 : 인육의 맛
2장 줄리안 쾨프케 : 지옥의 가마솥에서 보낸 10일
3장 존 맥도월 스튜어트 : 탐험에 미친 탐험가
4장 제임스 라일리 : 사하라 사막의 용사들
5장 스티븐 캘러핸 : 바로 눈앞에서 내 몸이 썩어가고 있었어요
6장 토르 헤위에르달 : 콘티키 호의 탐험
7장 얀 발스루트 : 위대한 탈출
8장 루이스 잠파리니 : 침몰당하고, 살아남고, 고문당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9장 알리스테어 어커트 :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10장 낸시 웨이크 : 별명 ‘하얀 쥐’
11장 토마스 스튜어트 맥퍼슨 : 23000명의 나치 군과 맞선 사나이
12장 빌 애쉬 : 독방의 제왕
13장 에드워드 웜퍼 : 처참한 성공
14장 조지 말로리 :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
15장 토니 쿠르츠 : 노스 페이스의 비극
16장 피트 쇠닝 : 로프 하나로 사람들을 구하다
17장 조 심슨 : 줄을 잘라서 사느냐 얼어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18장 크리스 문 : 납치, 폭발 그리고 전진
19장 마커스 러트렐 : 최후의 생존자
20장 아론 랠스톤 : 공포의 127시간 생존기
21장 존 셔 프랭클린 경 : 죽음의 북서항로
22장 로버트 팔콘 스콧 : 하느님! 이곳은 정말 지독한 곳입니다
23장 로알 아문센 : 가장 위대한 극지 개척자
24장 더글라스 모슨 : 백색 지옥
25장 어니스트 섀클턴 : 꺾일 줄 모르는 영웅
역자의 말
베어 그릴스의 서바이벌 스토리
난도 파라도 : 인육의 맛
스무 살의 청년 난도는 가족들과 즐거운 여행을 보낼 예정이었다. 난도가 속한 우루과이 럭비 선수단은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릴 친선 경기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 냈다. 쌍발 엔진에 터보 추진 방식의 페어차일드기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갈 예정이었다. 난도의 어머니 유제니아와 여동생 수지도 동승했다.
이 우루과이 공군기 571편은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에 비행을 재개했다. 안데스 산맥의 날씨는 조종사들에게 까다롭고 위험했다. 더운 공기가 언덕을 타고 올라와 설선(만년설의 최저 경계선)에서 찬 공기와 만나게 되는데, 이때 생긴 소용돌이는 비행하는 데 치명타였다.
비행을 재개하기 전날 안데스 산맥을 비행한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산기슭에 위치한 도시 멘도사에 임시로 기착했다. 승객들은 멘도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인 13일에 조종사들은 비행을 재개해야 할지 고심했다. 하지만 선수들은 시합에 하루빨리 참가하고 싶어서 조종사들을 닦달했다. 이 일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플란천 항로를 따라 비행하던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면서 네 번이나 심하게 흔들렸다. 난도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순간 겁을 먹은 듯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들을 안심시키려고 난도가 입을 여는 순간, 비행기가 수백 미터를 급강하했다. 난도 옆에 앉아 있던 창가 쪽 승객이 창밖을 가리켰다. 암석과 눈으로 된 거대한 산비탈과 날개 끝 사이의 거리가 불과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조종사들은 고도를 높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비행기 기체 전체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격렬한 떨림과 쇠가 암석들과 충돌하면서 무섭게 찌그러지는 소리.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비행기는 산 중턱에 충돌하면서 부위들이 하나하나 사정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난도가 고개를 들자 기체 덮개 대신 하늘이 보였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통로 안에는 구름이 들이닥쳤다. 기도할 시간도,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난도는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3일 뒤에 보란 듯이 깨어났다.
생존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기체 바닥 잔해에 누워 있었다. 눈 위에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기체의 양 날개와 꼬리 부분이 잘려 나갔다. 사람들은 눈에 쌓인 돌투성이 계곡으로 떨어졌다. 주위에 보이는 거라곤 험준한 산봉우리뿐이었다. 어머니는 추락 당시 즉사한 상태였다. 이 끔찍한 사고로 15명이 이미 사망했지만 여동생도 곧 죽을 것 같았다. 수지는 살아 있었지만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게다가 내출혈이 심했고, 발은 동상에 걸려 괴사 직전이었다. 하지만 위험 수위는 점점 더 강해졌다. 안데스 산맥의 밤 기온이 무려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던 것이다.
산소가 부족해서 폐가 찢어질 듯 아팠고 눈에서 반사된 햇빛의 자외선이 눈을 자극해서 염증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반사광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눈을 뜨지 못하거나 앞을 보지 못했다. 바다나 사막에 떨어졌다면 그나마 생존 확률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바다나 사막 위에는 생명이 서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도 갖춰져 있지만 산꼭대기는 경우가 달랐다. 동물도 식물의 코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두막과 여행 가방에 들어 있던 음식을 긁어모은 다음 소량으로 분배해서 먹었다. 하지만 음식이 너무 적어서 일주일 만에 동이 나고 말았다.
낮에서 추운 밤으로, 그리고 다시 낮으로 바뀌는 나날이 반복됐다. 5일째 되던 날, 그나마 가장 건강한 생존자 네 명이 산 정상을 넘어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몇 시간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고산지대라 산소가 부족했을 뿐더러 기력이 쇠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돌아온 생존자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조난당한 지 8일 만에 수지가 난도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물은 눈의 형태로 널려 있었지만 먹을 수 없었다. 얼음은 너무 차가워서 입술에서 피가 났고 피부 조직이 벗겨져 쓰라렸다. 생존자 중 한 명이 알루미늄 판을 이용해서 눈을 녹이는 기술을 고안할 때까지 갈증으로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생존자들은 알루미늄 판에 눈을 쌓아 태양열로 눈을 녹였다. 하지만 물 한 모금으로는 배고픔을 달랠 수 없었다.
고지대의 추위에서 살아남으려면 평지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영양분이 필요했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특히 단백질이 절실했다. 이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눈 위에 널린 주검들밖에 없었다. 시체의 살은 영하의 온도에 있었던 덕분에 완벽하게 냉동되어 있었다. 난도는 생존자 중 처음으로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선택만 남았지만, 그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조종사의 시체부터 먹기로 했다. 생존자 중 네 명이 기체에서 유리 조각을 찾았다. 유리 조각을 가지고 시신에서 살코기들을 서툰 솜씨로 잘랐다. 난도가 살점을 한 조각 가져갔다. 꽁꽁 얼어붙은 인육은 미묘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냥 고기 덩어리일 뿐이야라고 자신을 세뇌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근육의 퍽퍽한 질감이 느껴졌다. 몇 번 씹고 나서 사람 고기 덩어리를 겨우 삼켰다. 죄책감은 없었다. 목숨을 이렇게라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화만 났다.
이렇게 하더라도 굶주림은 완전히 가시지 않겠지만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난생처음 인간고기를 맛 본 다음날,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여건이 좋지 않아 생존자를 찾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수색 작업이 8일 만에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정확한 사유는 조종사가 추락사고 전에 알려준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서 사고 현장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마다 생존자들은 이렇게 되뇌었다. "숨을 쉬어라. 숨을 쉴 때마다 너는 살아 있는 것이다." 산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겨울 폭풍이 닥치는 중에 수십억 톤의 눈이 기체를 덮쳤다. 눈사태는 난도와 생존자들이 자고 있던 비행기 동체 안까지 침범했다. 비행기 위로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여섯 명이 질식해서 죽었다.
눈이 두껍게 쌓여 햇빛을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눈 녹이는 도구도 쓸모가 없어졌다. 남은 고기라고는 최근에 죽은 사람들의 주검뿐이었다. 태양에 건조되지 않은 이 살코기들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고기를 먹는 일이 전과 달리 수월했다. 딱딱하고 푸석하기는커녕 부드럽고 기름기가 많았다. 게다가 생고기라서 촉촉했다.
드디어 눈보라가 그쳤다. 쌓인 눈을 치우고 빠져나오는데 8일이나 걸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식단의 잔혹한 현실이 드러났다. 뼈들은 사고 현장에 버려졌다. 아직 먹지 않은 사지와 살코기는 비행기 출구에 쌓아놓았다. 살코기에 그치지 않고 콩팥, 간, 심장, 폐까지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 시체의 두개골을 쪼개서 뇌의 백질과 회백질 부분을 퍼먹었다. 쪼개진 빈 두개골들은 눈 속에 버려졌다.
이 와중에 시체 두 구만이 멀쩡하게 누워 있었다. 난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시체는 건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난도는 그렇게 좋은 식량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드디어 생존의 문제가 존중을 눌러버리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가족들의 시체를 어쩔 수 없이 먹어버리기 전에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그는 산과 맞서 싸워야 했다.
구조를 요청하러 나갔다가 죽을 수도 있었지만, 시도도 안 해보고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난도와 그의 동료 로베르토 카네사, 안토니오 틴틴 비신틴을 비롯한 원정팀은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들이 있는 위치에서 내려가는 길은 없고 올라가는 길만 있었다. 원정대가 넘어야 할 봉우리가 안데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 중 하나(자그마치 해발 5181미터나 되는 봉우리다)인 줄은 몰랐다.
등산 전문가들조차도 익스트림 형태의 등산에서 필수인 장비들이 없다면 60일 동안 기아 직전까지 내몰렸더라도 결코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그들은 비행기 잔해에 있던 여행 가방들에서 옷을 꺼내 겹겹이 입은 데다 영양실조, 갈증, 탈진에 체온 저하 증상까지 겹쳐 몸이 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모두 제대로 된 등산은 처음이었다.
밤에 급격하게 떨어진 온도 때문에 물병에 금이 가고 부서졌다. 게다가 낮에는 살인적인 추위와 탈진 증상을 죽기 살기로 버텨야 했다. 평지와 가까워오면서 온도가 올라가자, 양말에 저장해놨던 인육이 녹으면서 썩기 시작했다. 여정이 9일째로 접어들 무렵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사람과 마주친 것이다!
10일째 되던 날 남자는 음식을 건네주었다. 난도와 로베르토는 72일 만에 처음으로 인간 고기가 아닌 음식을 먹었다. 지역 경찰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우리는 우루과이에서 온 비행기 생존자들입니다. 비행기 안에는 부상자들이 아직 열네 명이나 남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2일, 23일에 걸쳐 남은 생존자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안전지대로 갔다. 난도와 로베르토의 굽힐 줄 모르는 정신력 덕분이었다. 45명의 탑승객 중 16명이 살아남았다. 조난당한 와중에 사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알리스테어 어커트 :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1939년까지만 해도 알리스테어 어커트는 영국군에 소집된 평범한 스코틀랜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 고든 하이랜더스(The Gordon Highlanders) 보병연대 제2대대에 입대했을 당시 나이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이 부대는 싱가포르의 포트 캐닝(Fort Canning)에 배치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는 전선에 위치한 영국군 주둔지들 중 가장 편한 편에 속했다. 포트 캐닝은 은퇴한 영국인들이 시종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는 안락한 인생을 꿈꾸며 오는 곳이기도 했지만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막기 위한 거대한 대포들로 무장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영국 식민지에 있는 요새들 중 난공불락으로 꼽혔던 이곳이 함락되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전쟁은 1941년 일본군이 대규모로 싱가포르로 쳐들어오면서 영국군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적군에 붙잡힌 어커트와 동료 부대원들은 싱가포르 창이(Changi) 전쟁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한눈에 둘러봐도 끔찍한 광경이 일본군의 야만성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벌집이 된 중국군의 시체들이 지독한 악취를 내뿜으며 꼬챙이에 꽂혀 나란히 서 있었다. 원래 4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창이 수용소에는 5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하이랜더 사단 포로들은 여덟 달 동안 그곳에서 지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송되기 위해 기차로 옮겨졌다. 객차 안의 사람들의 몸을 딛고 일어서도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비좁았다. 강철 객차 안에서 구겨넣어진 포로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뒤집어쓰고, 먹고, 자면서 장장 1500킬로미터를 가야 했다. 악취와 열기, 절망이 뒤섞인 그 객차 안에서 5일 동안 많은 수의 전쟁포로들이 죽어나갔다. 정글 안에 있는 공터에 내리고 나서야 자신들이 기차를 타고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버마 정글에 철도를 놓기 위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소름끼치는 강제 노력의 현장으로 남을 장소, 바로 죽음의 철도(the Death Railway)로 더 잘 알려진 버마 철도(Burma Railway,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위해 만든 군용 철도로 미얀마와 연결되어 있었다 - 옮긴이)에 도착한 것이다.
전쟁 직후에 할리우드에서 이 죽음의 철도를 모티브로 해서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 1957년작)>라는 영화가 나왔다. 영화를 보면 영국인 포로들이 건설 현장에서 보기 대령 행진곡(Colonel Bogey)을 부르며 일본군을 비꼬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실제 포로들은 영화처럼 한가하게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다.
포로들의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벼룩과 다른 벌레들이 가득한 쌀 찌꺼기로 배를 채웠으니 몸무게가 절반이나 줄어든 게 당연했다. 게다가 각기병이나 말라리아, 뎅기열, 세균성 이질까지 유행해 수많은 포로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를 넘나들었다. 함몰된 다리 피부에서 검게 응고된 고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커트는 변소로 달려갔다. 변기 안에 있는 인분 더미 속에서 구더기들이 꿈틀댔다. 구더기들 한 무리를 한 손에 가득 쥔 다음 썩어가는 다리 위에 떨어뜨렸다. 다리 위에 안착한(?) 구더기들은 썩은 피부를 갉아먹었다. 단언컨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커트도 극심한 설사 증세에 콜레라까지 겹치는 바람에 쉴 새 없이 구토를 해댔고, 탈수 증상에 몸살이 나 온몸이 마비된 기분이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를 지독한 악취가 나는 죽음의 텐트로 보냈다. 전염병 확산 방지 목적으로 환자들을 화장(火葬)하기도 전에 죽어나가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곳에서도 어커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차라리 영양실조나 전염병은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독관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나 구타, 고문은 훨씬 강도를 더해갔다. 게다가 죽음의 철도 현장에는 사형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어느 날 현장을 탈출하려다 붙잡힌 남자가 현장을 담당하는 우스키 중위와 오카다 병장 앞으로 끌려 나왔다. 영국군 죄수들은 이 둘을 각각 흑태자(Black Prince)와 죽음의 의사(Dr. Death)라고 불렀다. 죽음의 의사는 죄수의 복부가 부풀어 오를 때까지 목과 코에 물을 한 바가지 부어넣은 다음, 가시철사를 두른 그 부위로 힘차게 점프하는 것이 취미였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오카다의 상관인 우스키가 예리하게 다듬은 사무라이 칼을 꺼내 들었다. 그 죄수는 앞일을 예감한 듯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지도 않았다. 다른 죄수들은 우스키의 검 앞에 동료의 목이 뎅겅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어느 날 이질에 걸려 야외 변소로 달려가려는데 한국인 감독관이 그를 멈춰 세우고는 온갖 더러운 추파를 날렸다. 결국 화가 난 그는 주먹으로 감독관을 때리고 말았다. 불복종 죄로 우스키 중위 앞으로 끌려 나온 어커트는 심한 구타를 당해 발가락이 부러지고 피를 철철 흘렸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흑태자는 벌로 어커트를 검은 구멍으로 보내겠다고 죄수들에게 선포했다. 검은 구멍은 대나무 우리에 포로들을 가두고 처박아 버리는 깊숙한 구덩이로 살아서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조차 없을 만큼 형편없이 작은 우리는 전에 감금됐던 죄수들이 싼 똥오줌투성이였다. 어커트는 6일 동안 갇혀 있었다.
며칠 뒤 어커트는 거의 발가벗겨진 채로(당연히 신발은 신지 않았다)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굶어서 죽거나 고문당해서 죽든지 아니면 병이나 과로사로 죽든지 간에 포로들은 어떤 식으로든 죽어 나갔다. 버마 철도 건설에 투입된 33만 명의 포로들 중 10만 명이 그렇게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1943년 말로 접어들 무렵 철도 공사 현장을 떠나 싱가포르로 돌아온 그는 일본 선박에서 자기 몸무게 - 당시 그의 몸무게는 고작 45킬로그램이 넘을까 말까였다 - 보다 무거운 군수품들을 내리는 일을 했다. 1944년 9월, 어커트는 선체에 녹이 슨, 한 일본 화물선을 타고 있었다. 일본 함대에는 총 56척의 지옥선이 있었다. 그중에 19척이 미국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당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전쟁포로 22000명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어커트가 탄 배도 그중 하나였다.
미군 어뢰가 선체를 명중시켜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조금이라도 가라앉는 걸 늦춰보려고 화물칸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쏘기 시작했다. 그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커트는 화물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친 물살에 휩쓸렸다. 보이 스카우트 시절에 여러 가지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라앉는 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 급류에 휩쓸려 물귀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헤엄쳤다. 뜨거운 기름이 힙으로 흘러 들어와 그을렸지만 계속 헤엄쳤다. 지나가는 구명정을 본 그는 배에 간신히 올라타더니 기진맥진해 쓰러져버렸다. 어커트는 5일 동안 반 시체 상태로 누워 있었다.
이쯤 해서 좀 봐주었으면 하고 독자들은 바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커트가 탄 구명정은 일본 고래잡이 어선에 발견되어 일본으로 옮겨졌다. 다시 죄수 신세로 전락해버린 어커트는 얼마 안 있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상 무기와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를 얻는다. 그가 감금된 포로수용소는 나가사키에서 불과 15킬로미터 근처에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가사키 시가 있는 방향으로부터 폭발로 인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려온 건 바로 1945년 8월 9일이었다. 밖에 나와 있던 어커트는 소리가 들린 지 몇 초도 안 돼 무시무시한 속도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밀려 쓰러졌다. 아무도 이 끔찍한 참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뜨거운 강풍은 팻맨(the Fat Man,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번째 원자폭탄 - 옮긴이)이 터지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팻맨이 터지는 순간 나가사키의 온도는 무려 4000도까지 치솟아 올랐고, 적어도 4만여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에 기가 눌린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50년 뒤에 다시 양성 종양으로 나타나 그의 생명을 위협할 줄 누가 알았을까).
자신은 그저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그의 겸손한 발언을 떠올릴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물론 약간의 행운이 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인간적인 처사와 인간성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했더라면 지옥에서 살아남기는커녕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니스트 섀클턴 : 꺾일 줄 모르는 영웅
스콧도 대단히 용감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이끌었던 탐험대원들도 포기를 몰랐다. 남극으로 향하는 스콧과 함께 디스커버리 호에 승선한 사람 중에는 장차 위대한, 혹은 가장 위대한 탐험가의 반열에 오르는 사나이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콧의 대원으로서 살벌한 남극에 첫 발을 내디딘 외골수는 훗날 스콧의 탐험대보다도 더 남쪽으로 간,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이 업적만으로 존경받아도 모자를 판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존 실화로 명성에 방점을 찍은 남자의 이름은 바로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섀클턴은 지금까지도 지상에서 가장 강한 탐험가이자 지도자의 본보기로 추앙받고 있다.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던 섀클턴은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사업가, 심지어 국회의원 MP로 활동하는 등 이곳저곳을 전전했으나 결국 종착역은 모험가였다. 틀에 박혀 살기보다는 변화무쌍한 삶을 선택한 그에게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남극은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1908년, 이번엔 대원이 아니라 대장의 신분으로 자신의 배 님로드(Nimrod) 호를 타고 남극으로 떠났다. 하지만 탐험대는 남극에 도착하기도 전에 각종 난관에 부딪혔다. 님로드 호의 최종 목표는 최초의 남극점 정복이었다. 섀클턴은 선원들의 사기 진작을 목표로 에레보스 산을 오를 소규모 원정대를 먼저 꾸렸다. 전 장에서 존 프랭클린 경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만, 에레보스는 프랭클린이 타고 온 배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어둠의 신 이름이기도 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도 이 3810미터의 고산을 감히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5일 만에 가까스로 정상에 다다른 등반대는 한 대원의 말대로 거의 반죽음 상태로 미끄러지다시피 해서 산을 내려가야 했다.
대원들은 섀클턴을 따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픈 열망에 안달이 나 있었다. 결국 이들의 목표는 실패로 끝났지만 인류 최초로 지구 최남단을 밟음으로써 종전에 스콧이 세운 남극 탐험 최장거리 기록을 갈아치웠다. 대원들은 반밖에 남지 않은 식량으로 버티며 직접 썰매를 끌었다. 고질병이었던 동상은 기본이었고, 썩은 말고기 때문에 급성 장염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매일 설사를 달고 다녔다. 기아에 시달리는 상태에서도 뒤처지는 대원들에게 자신의 식량을 기꺼이 나눠주었다.
섀클턴의 살신성인 덕에 고국으로 귀환한 일행은 영웅 대접을 받았고, 섀클턴은 기사 작위를 하사 받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정작 섀클턴의 명성을 남극 탐험사에 각인시킨 탐험은 님로드 원정대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섀클턴은 인듀어런스(Endurance) 호를 타고 다시 한 번 남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영어로 인내라는 의미의 이 이름은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예견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없었다.
1914년. 그동안 스콧이 남극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아문센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남극은 그 와중에도 섀클턴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남극 탐험에서 이뤄낼 사명은 오직 하나, 이쪽에서 저 반대편까지 남극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었다. 1914년 8월에 플리머스 항을 출발한 인듀어런스 호는 첫 정박지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남극 탐험의 최전선인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예상보다 더 일찍 유빙들과 맞닥뜨리면서 반쯤 얼은 바다를 나아가는 데 애를 먹었다. 게다가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두껍게 얼어버린 얼음들 사이로 을씨년스러운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졌다.
1915년 1월 19일, 인듀어런스 호는 얼음 바다에 갇히고 말았다. 대원들은 배 안에서 몇 달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제 아무리 튼튼한 배라도 몇 달씩이나 얼음 바다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지 선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배가 갈라지면서 목재들이 성냥개비처럼 물 위에 동동 떠다녔다. 그리고 10월 27일, 배가 가라앉았다. 집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편이 사라져버렸다. 마땅한 통신 수단이나 탈출 수단도 없었던 스물여덟 명이 설원 한복판에 고립돼 버렸다.
배가 가라앉기 전에 건져낸 식료품들을 챙겨 소형 보트 세 개를 끌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이제 남은 목표는 얼지 않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무작정 전진하는 대신 섀클턴은 자신들이 서 있는 빙하 위에 캠프를 차리고 해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빙하가 녹아 아주 천천히 북쪽으로 흘러갔다. 이 방법도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빙하 위에서 버티는 동안 가지고 있던 식량들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데리고 온 개들도 먹여야 했기 때문에 대원들은 식량을 벌충하기 위해 물개를 사냥했다. 시간이 지나 그나마 있던 물개 고기마저 귀해지자 대원들은 총으로 쏴 죽인 썰매 개들의 고기로 연명했다.
남극에서 멀어질수록 따뜻해지는 날씨 탓에 일행이 있던 빙하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반으로 갈라졌다. 바다에 빠진 한 대원은 물에 흠뻑 젖은 채 밤새도록 무너진 빙하 조각을 전전하며 추위를 피하려 애썼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돛단배를 타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금기에 잔뜩 절은 옷을 걸치고 5일 동안 바다에서 진만 뺀 선원들은 마침내 바위투성이의 황무지였던 엘리펀트 섬(Elephant Island)에 도착했다. 16개월 만에 땅을 밟아보는 기쁨에 대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평균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 적이 없는 엘리펀트 섬에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풍파를 견뎌낸 암석들이 그대로 드러난 이곳은 문명 세계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남극해 안에서도 티끌만 한 점에 불과했다.
황량한 섬에서 먹을 것을 찾기란 꽤 힘들었다. 섬에 서식하고 있는 물개와 펭귄 고기는 식량으로 먹고, 남은 지방으로 난로를 때웠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굴러다니는 조개들을 닥치는 대로 주어서 먹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으로 버티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근처를 지나다니는 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포경기지는 130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었다. 이제 무언가를 시도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섀클턴의 계획은 그나마 사지가 멀쩡한 대원들과 함께 돛단배를 타고 지구상에서 가장 살벌하고 거친 남극바다를 건너 사우스 조지아 섬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해 보였던 이 계획은 현실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가지고 있던 배들 중에서 그나마 컸던 제임스 케어드(James Caird) 호조차 10미터도 안 되는, 인듀어런스 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다. 대원들은 배 골격을 더 튼튼하게 보강하고 캔버스 천으로 유사 갑판을 만들어 혹시라도 모를 폭풍이나 풍랑에 대비했다. 가는 동안 마실 식수로 113킬로그램의 얼음덩어리도 챙겼다.
남극해를 보통 바다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남극해는 심장 약한 사람들이 웬만한 원양 정기선을 타도 기절할 정도로 풍랑이 거칠다. 30미터가 넘는 파도에 빠지는 순간, 파도 사이를 위 아래로 왔다갔다 하거나 파도에 삼켜져 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간신히 이 괴물 같은 파도를 넘긴 선원들 앞에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차가운 공기 중으로 튀어 오른 물보라가 얼어서 생긴 울퉁불퉁한 덩어리들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면서 배를 위협했다.
15일간의 사투 끝에 성난 파도 사이로 섬의 형체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하지만 고생길은 계속됐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한기를 가득 머금은 태풍이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틀 동안 근처 바다를 배회한 끝에 섬 남쪽으로 난 작은 만을 찾아내 간신히 도착했다. 문제는 포경기지가 몰려 있는 섬 북쪽 지역과 달리, 남쪽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포경기지로 가는 문턱에는 최고 높이가 1380미터에 달하는 설산들과 빙하지대가 58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이 산맥을 건넌 사람은 섀클턴 이전까지 아무도 없었다. 몸이 약해진 세 명은 남쪽에 남겨두고, 섀클턴은 등반가 경험이 있었던 대원 두 명과 함께 막무가내로 산을 넘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최고조일 때도 넘기 힘든 산을 춥고, 굶주리고 심지어 다친 상태에서 넘는다는 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일이었다. 장장 36시간 동안 역풍과 싸우며 인내력의 한계가 왔을 때쯤 정상에 다다른 일행은 그 길로 산을 내려가 스트롬니스 포경 기지에 도착해 구조를 요청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섬 반대편에 있는 동료들을 데리러 다시 돌아갔다. 구조 작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시각, 저 멀리 엘리펀트 섬에서는 스물두 명이 섀클턴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섬에 남겨진 사람들의 일상은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섀클턴 대장이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면서 하염없이 구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꿈인지 생시인지 마침내 대장 일행이 눈앞에 나타났다. 섀클턴은 그전에도 포경기지에서 구조선을 빌려 엘리펀트 섬에 가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었지만 남극해의 무시무시한 강풍과 유빙 때문에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칠레 해군에 요청해 예인선 옐초(the Yelcho)를 빌려 8월 30일 엘리펀트 섬에 도착했다. 섀클턴은 약속을 지켰다.
전에 겪었던 각종 위험과 시련들을 언제적 일이냐는 듯이, 1921년부터 남극을 일주하리라는 목표를 부지런히 세우기 시작하더니 1년 뒤에 다시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떠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남극 항해를 시작한 첫날 밤, 섀클턴은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섀클턴의 유해는 아내의 뜻에 따라 사우스 조지아 섬에 묻혔다.
비록 그의 무덤이 인적이라고 없는 남극에 홀로 있을지라도, 섀클턴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동시에 탐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생존담의 무대가 됐던 이곳에서 비로소 편안히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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