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완성한 여자 메리 퀀트

Mary Quant: My Autobiography

   
메리 퀀트(역자: 노지양)
ǻ
책읽는수요일
   
13000
2012�� 07��



■ 책 소개
color=#ff0080>여자의인생과 스타일을 완성한 미니스커트의 혁명가, 메리 퀀트의 자서전!

미니스커트와 핫팬츠를 유행시켜 패션사의 한 획을 그은 영국의 디자이너 메리 퀀트의자서전으로, 거리의 디자이너에서 세계적 브랜드의 CEO가 된 메리 퀀트의 파란만장한 삶과 창의적 생각, 그리고 세계를 유혹한 스타일의 모든 것을고스란히 담아낸 책이다. 

패션이 대중화 되어야 한다고확신했던 그녀는 1955년 킹스 로드에 자신의 첫 번째 샵 ‘바자’를 열었고, 플라스틱 칼라가 달린 블랙 드레스와 미니스커트에 어울리는팬티스타킹, 부츠, 니삭스 등 여러 감각적인 아이템을 만들며 전 세계에 ‘모드 룩’을 유행시켰다. 당시, 패션과 문화의 변방이었던 런던을변모시킨 메리 퀀트는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전성기를 맞았다. 또한 “메이크업은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다”는 신념하에 빨간색, 분홍색, 주황색이전부였던 립스틱을 100가지가 넘는 색으로 개발하고, 물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워터프루프 마스카라를 만들어 여성들에게 화장하는 즐거움을선물했다. 항상 관습을 깨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던 메리 퀀트는 비달 사순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보브 커트를 유행시키며 토탈 스타일링의세계를 열기도 하였다. 

한발 앞선 스타일과 다양한인맥, 일과 사랑의 균형, 자기창조 등 여성이라면 항상 고민하고 호기심을 가질 주제로 자신의 인생을 한 권의 책에 정리하였다. 단순히 옷과화장품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닌, ‘젊음’과 ‘창조’, 그리고 ‘도전’이란 무기로 세상을 뒤흔든 그녀만의 성공 비결을소개한다.

■ 저자 메리 퀀트(MaryQuant)
1934년 런던 블랙히스에서 태어났다. 골드스미스예술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후, 1958년 런던의킹스 로드에 첫 번째 샵 ‘바자(Bazaar)’를 열어 이 고지식한 회색의 거리를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패션의 메카로 바꿔놓았다. 미니스커트와핫팬츠를 선보여 열풍을 일으켰으며, 낡은 관습과 엄격한 금기에 도전하는 디자이너의 상징적인 이름이 됐다. 거리의 패션으로 런웨이를 점령,패션계의 비틀즈로 일컬어지며, 혁명과 젊음의 문화를 선도했다. 이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은 곧 대중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지난 세기 가장두드러진 성공을 보인, 비즈니스의 여왕으로도 유명하다. 퀀트는 사람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을 만들었다. 소비자들의 불편을 개선하고, 그 누구도발견하지 못한 욕망을 시장으로 끌어냈다. 패션 분야를 뛰어넘어 트렌드 산업 종사자들이 그녀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그녀의 전성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영국 ·미국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등 세계 곳곳에서 그녀에게 디자인 비용을 지불하고 드레스를만들고 있다. 메리 퀀트의 메이크업 브랜드는 일본 기업에서 인수해 현재 200여 개의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인테리어 사업에도 진출하여 가구와침구류 등을 디자인하며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비틀즈와 함께 대영 제국 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받았고, 산업예술가협회의 선임연구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69년에는 로열아트소사이어티에서 왕립 디자이너로 선정되었다. 2012년에는 미국「타임」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아이콘’ 100인에 뽑혔다.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여성 리더들과 CEO들은 그녀를 성공의 멘토로 손꼽고있다. 현재는 영국 남부 서리에서 아들 올란도, 세 명의 손자손녀와 살고 있다.

■ 차례
#1. 짧게 더 짧게
어둠 뒤에 찾아온 기회 | 스트리트 룩의 시작 | 스타일은 만들어져야 한다 | 가난했기에 가능했던 일 | 걸어 다니는광고판 | 젊은 감각들이 몰려오다 | 입어서 편한 옷을 만들 것 | 모두가 처음이라면 | 남성들도 패셔너블하게 |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닐소재의 발견 | 속옷을 겉옷처럼 | 팬티스타킹의 시대를 열다 | 남들도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메이크업 | 물속에서도 더 아름답게| 코스메틱에서 메이크업으로 | 패션은 디자인의 미래다 

#2. 나만의 것으로 새롭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잠자리 | 대중들 앞에서 내방식대로 말하기 | 메이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 로큰롤 정신을 옷에 입혀라 | 아이콘을 만들어라 | 이름이 중요하다 | 바르지만 말고먹으세요 | 옷으로 어려보이기 | 같은 원단도 모두 다른 느낌으로 | 세계에서 가장 멋진 아지트 | ‘꽃의 힘’을 빌려라 | 가구에도 패션을입혀라 | 터프하면서도 섬세하게 섞어라 | 반전 없는 스타일은 지루하다 | 브랜드 감성을 입은 인형 제작 | 패션 디자이너에서 카펫 디자이너로| 남성 정장의 곡선을 살려라 | 한 가지 색에 다른 색을 더해보기 | 색들의 궁합을 맞춰라 | ‘미니’ 자동차를디자인하다

#3. 홀로 그리고 함께
셀러브리티를 끌어들이는 법 | 바람둥이 남편 길들이기 | 전설의 록그룹 매니저를 어시스턴트로 | 존 레논과 친해지기 |남자와 여자가 모두 만족해야한다 | 여성 리더에게 조언을 구할 것 | 하나를 주고 둘을 얻는 법 | 내가 좋아하는 모델에 관하여 | 상대를특별하게 만드는 사진작가 | 아기를 낳는 기쁨 | 비달 사순과 나눈 최고의 우정| 못 말리는 개와 함께 사는 법 | 탁월한 소매업자에 관하여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유혹하고, 즐기는 법 | 극복될 수 없는 아픔을 안으며 | 다이애나와의 만남 | 진짜 어른들이 일하는 법 | 느껴지는 대로보게 하는 천재들 | 유명인으로 산다는 것 

#4. 같지만 다르게
세상 모든 것이 영감이 된다 | 인기의 좋은 점만 즐겨라 |음악에는 비틀즈, 패션에는 메리 퀀트 | 성공과 불운은 함께 찾아온다 | 여성을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 | 젊은 커리어 우먼을 위한 향수 |같지만 다르게, 그리고 혁명적으로! | 짜릿하고 위트 있게 |리틀 블랙 드레스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 |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할 것 | 잘차려입은 여성들의 이점 | 장식 하나로 자극하는 욕망 | 내게도 일본인 아내가 있었으면 | 어릴 때부터 손으로 감각을 익혀라 | 완벽주의에 대한환상을 버려라 | 일에 대한 강력한 흥분제 | 내일을 드로잉하라 | 도시 여성을 빛나게 하는 디자이너들 | 마음의 안정을 주는 음식들 | 내가원하는 집을 갖는 방법 | 패션 혁명가로 산다는 것 | 여자라 행복한 여자들

역자의 말





여자를 완성한 여자 메리 퀀트


짧게 더 짧게

젊은 감각들이 몰려오다

우리의 부티크, 바자는 1955년에 킹스로드에서 대망의 개점을 했다. 우리는 개점 파티도 열었다. 가게 앞 공터에 대형 천막을 치고 아주 밝고 강렬한 색의 나무 패널을 양쪽에 세운 다음,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거나 쇼핑 바구니 위에 올라서서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게 했다. 긴 탁자 위엔 간단한 먹을거리와 음료를 놓고 한쪽에 화로를 두어 환대 분위기를 만들었다.


파티는 눈길을 끌었다. 가게도 인기를 끌었다. 문 밖으로 손님들이 줄을 섰다. 열흘 후에는 처음 가져온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사실 처음 진열창에는 마네킹 없이 딱딱한 종이판에 옷과 액세서리를 납작하게 붙여 두었는데, 이러한 「에스콰이어(Esquire)」 잡지 스타일의 진열이 신선하게 느껴진 것 같다.


나는 튜닉 드레스(tunic dress), 니커보커스(knickerbockers), 힙스터 팬츠(hipster pants) 같이 첼시에 사는 내 친구들이나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을 시티스트라이프(City-stripe) 슈트나 헤링본 트위드(herringbone tweed) 같은 원단으로 디자인해서 직접 내놓기도 했다. 힙스터 팬츠도 만들었는데, 앨리그잰더가 이 바지를 즐겨 입었고 입을 때마다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다. 스커트도 힙스터 스타일로 더 짧고 더 딱 붙게 만들었다. 당시에 프랑스 디자이너인 앙드레 쿠레주도 점점 스커트 길이를 짧게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우리는 그것을 미니스커트라고 불렀다.


이제 스타킹이 필요했다. 당시의 스타킹 공장에는 내가 원하는 스타킹을 만들 기계가 없어서, 나는 연극 의상 제작자들에게 짧은 스커트와 어울리는 스타킹을 만들어 달라고 설득했다. 우리 가게 진열창에 전시된 미니스커트와 스타킹을 본, 중산모자와 양산을 쓴 도시의 신사숙녀들은 창문을 우산으로 탁탁 치면서 "에이, 몹쓸 것들", "역겨워!"라고 했지만 그러면 뭐하나? 손님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는걸.


킹스로드는 곧 미니스커트의 거리가 되었다. 미국 언론들이 거리의 양쪽에 서서 "잘 나가는 런던(swinging London)"의 모습들을 찍어갔다. 매일같이 파티가 열리는 것만 같았다. 슬론광장의 로열코트극장에서는 늘 새로운 연극이 올라가고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했으며 새로운 정신과 활기가 우리 가게까지 퍼져왔다. 배우 존 오스본, 클레어 블룸, 수잔나 요크, 오드리 헵번, 브리짓 바르도, 레슬리 캐론이 왔고, 좀 나중이지만,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사진작가 데이비드 베일리와 리처드 아베돈,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 조 로시, 진 슈림톤과 트위기 같은 모델도 우리 가게에 왔다. 사실 지금도 왜 우리 가게가 처음부터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애셔의 스카프, 모던한 주얼리, 프랑스 저지 옷들, 내가 디자인한 모자, 벨트, 가죽 제품, 남성의 긴 카디건, 오키프의 아일랜드 트위드 옷 등의 조합이 큰 관심을 이끌어냈던 것 같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킹스로드에서 우리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 사실 당사자인 우리 또한 믿기지 않았고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바자는 온갖 영화배우, 음악가, 사진작가, 모델, 영화감독들이 모여드는 사교의 공간이 되었고 밤낮 없이 성대한 파티가 열렸는데, 우리는 즐겁게 참여하면서도 속으로는 재정적으로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몇 개월 후에 날선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랬다. 파티 쿠튀르 사람들은 영국과 영국 디자이너에게 돌아가는 이 모든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내 디자인이 천박하고 허울만 넘친다고 했고 나를 "한때 반짝하고 사라질" 디자이너라고도 했다. 나 또한 내가 반짝 성공했다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속상했고 상처를 받았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은 곧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디자인 세계에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나는 패션의 미래가 재봉사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꿰매 만든 옷에 있지 않을 거라고 말해왔다. 처음부터 나는 대중들을 위한, 대량 생산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는 슬픔이 감돌지 않는가. 몇 명의 재봉사들이 지하실에 갇혀 옷을 입을지 안 입을지도 모를 한 여인을 위해 이삼 일 동안 모자 하나, 옷 한 벌을 만든다. 내 디자인은 쉽고 가벼웠고 보편화된 품위가 있었다. 내 옷들은 다른 종류의 고객들에게 말을 붙였다. 오늘날 최신 기술인 스마트폰과 아이팟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코스메틱에서 메이크업으로

메리 퀀트 코스메틱스는 1966년에 처음 출시했다. 사람들은 전체 브랜드 모양새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희고 매끈한 피부 표현에 놀라고 메이크업 효과와 색조 메이크업 제품의 대담한 색상에 놀랐다. 장미색, 야광 분홍색, 머스터드 옐로, 오렌지 스칼렛, 세피아, 무광 흰색 등 말이다. 나는 옷에 쓰이는 색들을 메이크업 제품에도 적용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특히 일본에서 가장 놀랄 정도로 성공했다.


메리 퀀트 메이크업 제품의 출시는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 곳곳에서 우리 메이크업 제품이 미친 듯이 팔려 나갔다. 고객들은 우리 매장에서 얼마든지 테스트를 해볼 수 있었다. 우리 매장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어떻게 메이크업해야 최대의 효과를 얻는지 알려주었다. 이제 무뚝뚝한 중년 여성 판매원은 없었다. 남자 직원들이 고객들을 위해 메이크업을 해주었고 젊은 여성들에게 색상을 추천해주고 자신만의 맞춤 메이크업법을 알려주었다. 메이크업 제품이 팔리고 진열되는 방식이 바뀌었고 방수 마스카라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코스메틱을 메이크업으로 바꾼 것 같다. 메이크업은 패션이고 놀이였다. 립스틱 색깔만 101가지였다.



나만의 것으로 새롭게

대중들 앞에서 내 방식대로 말하기

나는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의 무표정이 곧잘 할 말이 없는 것으로 오해받을 때면 장황할 정도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나의 디자인이나 제품을 설명하거나 옹호해야 할 때는 나는 누구보다 말을 잘하고 빨리 하게 된다. 이건 나 자신도 놀라는 부분이다. 순간순간 내 안의 어떤 성격이 다른 성격을 압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성격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미국의 한 기자가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퀀트 양, 왜 그렇게 말이 없으세요? 그게 영국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스타일인가요?"


나는 뺨 한 대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가 옳았다. 말이 없는 것도 하나의 행동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절대 수줍어하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점점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주관도 갖게 되었다. 셰리 블레어가 진행하는 유명인들과의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였다. 발언자들의 말이 너무 길어서, 내 차례가 왔을 때 난 간결하게 할 말만 했다. 그러자 U2의 보노가 나에게 한마디를 했다. "와, 정말 짧고 굵게 말씀하시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만의 말하기기법이 완성되었음을 느꼈다.


메이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내가 보기에 화장술에서 가장 큰 진보는 눈썹의 강조가 아닌가 싶다. 요즘에는 예전처럼 눈썹을 얇게 그리지도 않고 꼬리를 올렸다 내리지도 않는다. 살짝만 구부러져 중성적인 느낌을 주어 좋다. 물론 눈썹 밑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다.


파운데이션은 피부보다 약간 더 밝은 톤으로 바르고 파우더는 원래 피부보다 약간 더 짙은 색을 쓰는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 하면 투명한 피부 표현을 할 수 있다.


볼터치로는 광대뼈 살짝 위쪽과 얼굴 옆 부분을 강조한다. 볼터치에 신경 쓰자. 주름 제거 수술만큼 효과 만점이다.


립스틱은 투명하고 글로시한 것보다는 선명한 색이 더 강조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다채롭고 자유로운 색 사용이야말로 이 시대 패션의 화두가 아닐까 싶다.


반전 없는 스타일은 지루하다

슬쩍 보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자꾸 들여다보고 분석을 하게 만드는 스타일이 최고다. 첫인상을 받은 이후, 관찰자의 시선은 작은 반전과 의외의 세세한 부분에서 멈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화로워야 한다. 하지만 재킷이나 스커트, 바지나 부츠의 스타일은 마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숨어 있는 풀숲 같아야 하고, 액세서리는 그 완벽한 모습에 방점을 찍어주게 된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기 다리를 가장 예쁘게 보이게 하는 이상적인 스커트의 길이가 있다. 그러니 스커트가 무릎 위로 몇 센티미터 올라가야 하냐는 질문은 적절치 않다. 패셔너블하고 싶으면서 왜 길이에만 집착하고 신경 쓰는가? 울트라 미니스커트나 헐렁한 드레스 밑에 발목까지 오는 바지를 입으면 잘 어울린다. 무릎 바로 밑까지만 오는 니커보커스도 좋고, 카프리 크롭팬츠 길이도 좋고, 가끔은 앵클부츠를 신어서 발목을 약간만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 종아리 중간까지 오는 부츠는 약간 십대 같은 발랄함을 주고, 클래식한 길이의 승마 부츠나 긴 양말을 신어도 멋지다. 이렇게 다리에 포인트를 주면 깜찍하면서도 반전이 있는 스타일이 완성된다. 나는 발가락이 보이는 앵클부츠에 레깅스 신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고고하고 우아한 프랑스 숙녀인 척하는 것보다는 예상치 못한 곳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이 재미있다.



홀로 그리고 함께

바람둥이 남편 길들이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 카로 꼽히는 e형 재규어 운전을 배우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남편이 그 차를 신주 단지 모시듯 하고 있고 당신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사람 또한 그 남편일 경우라면 말이다.


남편 앨리그잰더는 e형 재규어를 세 대 갖고 있었다. 흰색, 검은색, 은색. 그중 한 대를 타고 프랑스 남부 여행을 갔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내가 옆에서 언제 차선을 바꾸어야 하는지 일러주어야 했다. 생트로페즈에 거의 다 갔을 무렵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로 달리는 아주 위험천만한 일도 있었다. 너무 더워 브레이크가 열에 녹아버린 것이다.


다음 날 밤, 가생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다 길을 잘못 들면서 작은 충돌 사고가 났다. 다른 차의 운전자는 파리의 주요 일간지 편집인이었다. 운전하던 남자들은 바로 튀어 나와 악수를 하더니 서로 안 다쳐서 다행이라며 끌어안고 요란하게 축하를 해주었다. 그렇게 많은 와인을 마시고 운전했어도 살아남았음을 감사하는 것이었겠지.


나는 퉁퉁 부은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병원에 갔다. 비싼 환자를 잡은 줄 알았던 병원에서는 실망했겠지만, 검사 결과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고 기념으로 X레이 사진을 주었다. 나는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얹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서 앨리그잰더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어주었다.


앨리그잰더는 그의 아버지처럼 워낙 여자를 좋아하고 바람기가 다분한 남자였다. 그 점이 우리 부부 생활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일에 미쳐서 디자인만 했으니 나 또한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때로 여자들이 내게 전화를 해 이렇게 물었다. "앨리그잰더 친구인데요. 오늘 앨리그잰더 파티에 오나요?" 그의 차에서 여자들이 남긴 작은 선물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이런 생활을 몸이 상할 때까지 즐겼다는 것이고, 건강이 나빠진 다음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달 사순과 나눈 최고의 우정

모자를 만들면서 즐거웠던 점은, 런던을 돌아다니며 모자용 리본과 트림과 장식품을 만드는 작은 공방들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어느 날은 본드스트리트의 왼쪽을 지나가다가 어떤 머리 모양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전에는 그런 머리 스타일을 본 적이 없었다. 창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비달 사순." 그는 대단했다. 머리를 자르고 매만지는 행동이 마치 별 네 개짜리 요리사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양해를 구한 다음, 앉아서 그를 그냥 구경했다. 아직 어리고 가난했던 나는 비달 사순에게 머리를 자를 만한 돈이 없었고, 그래서 언젠가 그런 돈을 꼭 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비달 사순은 내 머리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비달 사순 이전에는, 그저 머리를 자르고 다듬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비달 사순은 이것을 컷과 스타일로 만들었다. 그는, 마치 건축가처럼,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인물과 머릿결을 돋보이게 하고 두상과 얼굴을 가장 잘 살리는 형태와 질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광대뼈와 눈을 강조하고 개인의 얼굴과 개성에 최대한 효과적이게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후 그는 변주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미용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전 세계 어딜 가든, 비달 사순 머리 모양의 전도사들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치고 새로운 것을 찾아 실험하며 발전시키는 스타일리스트 부대를 만든 것이다.


헤어드라이어로 몇 시간씩 머리카락을 말리고, 두꺼운 롤러를 두피에 고정시키고, 그러면서 뜨거운 고데기로 머리를 말던 여성들에게 비달 사순은 시간을 돌려주고 간편함을 선물했다.


비달 사순, 피임약, 미니스커트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비달 사순은 늘씬하고 미끈한 다리를 강조하는 내 미니스커트 디자인의 완벽한 모자가 되었고, 내가 만드는 색조 메이크업 제품의 틀을 제공했다.


비달 사순이 뉴욕에서 첫 번째 살롱을 열기로 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도 중요한 날들 중 하루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날 나도 뉴욕에서 내 컬렉션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새벽 여섯 시에 내 머리를 잘라주겠다고 제안했고, 실제로 그 시간에 일어나서 머리를 해주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꾼 우정이었다.



같지만 다르게

젊은 커리어 우먼을 위한 향수

향수의 세계는 두 가지 대조적인 이미지의 충돌이다. 파리의 큰 공장을 갖고 있는 번쩍번쩍한 향수 연구소의 이미지, 그리고 꽃을 가득 실은 낡은 트럭이 아침 일찍 세계의 향수 수도인 그라스에 도착하는 이미지다. 향수의 개발은 보통 그라스에서 하고, 마케팅과 세부적인 일은 파리로 넘어간다. 파리에서는, 세련된 미국판 「보그」 스타일의 여성들과 전통적인 지탄 담배를 피우는 프랑스 남성들이 테이블 앞에 모여서 코를 킁킁거린다. 이것은 향수 업계에서 이미 전통으로 굳어진 방식이다.


메리 퀀트 향수를 개발한다고 생각하니, 들떠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전에 나온 내 메이크업 제품들처럼, 여기에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 혁명적인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사회가 열렸다. 논의가 계속됐다. 그리고 정확하고 간략한 제안서를 써서 파리, 그라스, 취리히, 주네브에 있는 유명 향수 회사에 보냈다. 프랑스의 다른 회사들과 상당한 경합을 벌인 향수들의 샘플이 런던으로 몇 개 왔는데, 모두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패션계 혁명의 바람이 런던을 휩쓸었지만, 아직 프랑스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샤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향수 산업은 아직까지도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대단한 후각을 가진 이 전문가들에게 아직 젊은이라는 단어는 곧 아빠의 귀여운 딸을 의미했다. 이 프랑스 남성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젊은 영국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문제였다. 엄숙하고 보수적이지만,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매력적인 중년 남성들을 자극해서 완전히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장애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향수 에티켓이라는 불문율과 싸워야 했다. 새로운 향수도 오직 유명한 프랑스 패션 하우스와  프랑스 브랜드에서만 제작될 수 있다는 불문율 말이다.


향수의 세계에서만큼은 날고 기는 영국 회사나 미국 회사도 도전장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냥 이미 유명한 프랑스 향수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꽉 막힌 사업이었다. 하지만 난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나는 그들의 편견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후각은 필요했다.


먼저 오래된 프랑스 고전 향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샤넬 넘버 5와 복제품이 너무 많아서 비누처럼 흔해진 향수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기존 향수 제품들에 무엇이 빠졌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왜 남성 향수가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까? 우리의 새로운 향수는 열었을 때 마치 남성 향수처럼 자신감이 느껴지면서도 여성적이고 섹시하고 사랑스럽고 복잡하길 원했다. 깨끗함과 에로틱함이 공존하길 바랐다. 마치 젊은 여성의 피부에서 묻어나는 바닷물의 냄새 같은 느낌으로.


그중 한 사람이 우리가 주목하는 새롭고 독립적이고 야망 있는 해방된 젊은 여성의 느낌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전문성이 발휘된 완전히 새롭고 도발적인 향수들이 우리에게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가지 독특한 향수를 골랐고 세 가지 이름을 지었다. 모두 우리가 반영하고 싶은 이미지를 잡아냈다. 그중에서 둘은 메리 퀀트 옷과 메이크업 제품을 사는 젊은 커리어 우먼의 일상적인 생활방식을 요약해서 AM과 PM이라고 지었다. 나중에 나온 세 번째 향수는 더 도발적인 느낌의 하복(Havoc)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하복은 이름 자체로도 멋졌지만 판매율도 좋았다.


메리 퀀트 향수 AM, PM, 하복의 출시와 성공 이후 아주 새롭고 과감하게 도발하는 감각적인 향수들이 국제적으로 계속 출시되었고, 그 현상을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우리가 프랑스 향수에 도전해서 다시 한 번 틀을 깨고 나간 것이다.


같지만 다르게, 그리고 혁명적으로!

물론 패션과 유행에도 논리적인 흐름과 규칙은 존재한다. 고객들이 하이넥이나 로우넥, 롱 슬리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런 옷들을 컬렉션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패션과 유행은 날씨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고 돌발 상황이 있다. 패션을 그래프로 예측할 수는 없다.


그 색상이, 그 원단이, 그 형태가 너무 많이 팔리다 보면 결국 진부해지고 지루해질까? 아니면 그 옷만큼은 언제나 예쁘게 보이기에 그 옷을 입거나 만드는 새로운 방식만 알아내면 언제나 새 것처럼 보일까? 같지만 다르게는 언제나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문제다. 사람들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전 그냥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가장 어렵다. 물론 당신도 이런 옷을 원한다. 하지만 속임수와 재주는 결국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같지만 다르게, 그리고 혁명적으로, 바로 그것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물건으로 만들고 그 물건들을 어디서나 볼 때의 기쁨은, 마치 베이징이나 베로나 같은 도시의 바에 있는 주크박스에서 비틀즈의 <예스터데이(Yesterday)>가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말하면 끝내주게 기분 좋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