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하이힐과 고무장갑
ǻ
아름다운사람들
   
13800
2012�� 03��



■ 책 소개
여우야, 마흔까지 뭐했니?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선 여자들의이야기!

마흔 언저리에 있는공통점을 가진 서로 다른 개성의 일곱 여자가 만나 마흔의 일상과 고민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사랑, 연애, 결혼, 가족 등을 주제로 일상의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그 속에서 마흔 살이 되어 느끼는 감정들과 새로운 생각들을 솔직담백하게 들려준다.
수다처럼 시작되는 마흔의 일상과 고민이 고스란히 살아서 녹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우리는 늘 급한 것 뒤에 미뤄 두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다. 마흔앓이는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주는 질문이자 선물이다. 마치 우리가 치열하게 보낸 수많은 시간이 모여 가짜 자아를 깨트리고 진짜 나를 탄생시키는 막다른 터널과도 같다. 그혼란스런 터널을 치열한 고민과 몸부림으로 뚫어 가는 일곱 여자의 분투기는 그 자체가 희망이자 용기이다. 
■ 저자 하이힐과 고무장갑
철학하기를 꿈꾸는 전직약사, 소설가를 꿈꾸는 전직 출판사 직원, 논픽션 작가를 꿈꾸는 전직 IT 개발자, 시인을 꿈꾸는 대사관 상무관, 개성 만점의 헤드헌터사CEO, 일탈을 꿈꾸는 17년차 프로마케터, 몇 차례의 창업에 도전한 감성 수필가, 이렇게 마흔 언저리에 있는 서로 다른 개성의 일곱 여자가만났다. 그들은 모두 삶의 1막과 2막이 교차하는 전환기에 서 있었고 이제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참된 스스로를 발견하고 드러내, 온전한자기로 살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 공통점은 이내 공저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연결되었고, 그렇게 ‘하이힐과 고무장갑’ 팀이 탄생하게되었다.

■차례
서문 - 삼 말 사 초, 그 불안과 설렘 

첫 번째 이야기 - 마흔, 엎드려 울었다 
부럽거나 혹은 부끄럽거나 
나, 떨려도되나요? 
마흔, 엎드려 울었다 
그의 가방에 무심코 눈길이 갔다 
오빠 한번 믿어 봐? 
나이만 많고, 여전히 철은 없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그녀들 
참을 수 없는 명함의 가벼움 
반짝반짝 두근두근 내 인생 
두 번째 이야기- 이제, 나에게로 돌아갈 시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인가요? 
내 자신이 선물이 되는 삶 
나는 헤드헌터다 
굿바이 페르소나
푸르러라, 내 잔디밭 
내가 버려야 할 것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에게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는 거지
나에게로 돌아가는 시간 

세 번째이야기 - 그래, 내 인생이다 
3,800원의 행복 
의미 있는 실험 
결혼 안식 휴가, 180일의 쉼표
보톡스, 맞아 말아? 
오피스텔 월세로 빌린 여자 
꿈을 이루는 지도를 만들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 때 
나 혼자떠난 여행 
나를 위한 향기로운 위로 
진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의 치명적 매력 
네 번째 이야기 -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하고 싶다’의 뱀을 깨우자 
인생 2막을 위한 로드맵 
안전지대 벗어나기 
20년 후 미래가 마흔의나에게 
프라다 가방 대신 철학 책을 들다 
여자 조르바, 내게 말을 걸어오다 
그 집에 살고 싶다 
10년 후, 지금의나를 위해 
강의만 듣다 마는 인생에서 
여자,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깊은 인생과 만나다 
저자 후기




마흔,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서문 - 삼 말 사 초, 그 불안과 설렘

마흔이 별 건 아니다. 긴 인생 중간 지점에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되는 당연히 필요한 단계일 뿐이다. 20대 언저리에 호되게 앓아야 할 병이었지만, 방황은 곧 좌절과 뒤쳐짐이라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부분 제대로 앓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 결과, 20년이 지나 마흔 언저리에서 마음의 병을 앓는다. 어떤 이는 가볍게, 또 어떤 이는 그것을 계기로 삶을 바꾸기도 하면서까지.


그 시기가 다가왔을 때, 그저 막막해 보이는 마흔의 벽을 넘고 싶었던 내게 마흔을 말하는 무수한 이론과 사례 연구들은 거대한 실타래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여자 마흔에 대해 실감나게 다가오는 작은 그 무엇이지, 모든 것은 아니었다. 외국의 사례도, 중년에 대한 연구 결과도, 잘난 성공인의 추억담이나 지침서도 아닌 바로 이 순간 우리들의 얘기가 필요했다. 보여 주기와 공감하기, 나만 이렇지 않다는 것, 당신도 이런 생각했냐는 것, 그리고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확인,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마흔, 엎드려 울었다

부럽거나 혹은 부끄럽거나

서울 강남구에서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아이의 방을 꾸미는 데 기백만 원의 돈을 쓸 수 있는, 소위 소득 상위층 키즈맘의 소비 성향을 분석하던 그 조사실에서 인터뷰이와 마케터로 그녀들은 다시 만났다.


문제는 마케터로 캐스팅된 김 대리의 어쩔 수 없는 패배감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세련되게 차려입은 옷과 장신구들, 여유로운 생활이 가져오는 특유의 편안함과 느긋한 태도, 늦은 아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느긋하게 교양과 문화를 즐기는 그녀들의 삶의 패턴은 전쟁 같은 직장 생활에 푹 찌든 워킹우먼들에게는 꿈에도 부러운 여왕 팔자다. 고작 30대 중반인 인터뷰이의 남편이 한 달에 800만 원씩이나 꼬박꼬박 가져다준다는 말엔, 관찰룸 여기저기서 부러움의 탄식소리마저 튀어나왔다.


"학교 때 공부도 진짜 못하고, 소극적이어서 친구도 별로 없던 앤데, 20년 만에 팔자가 확 달라졌네요. 에잇! 죽어라 공부해서 명문 대학 나오면 뭐해요? 나는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던 시간이 이젠 밤을 새우며 일을 하는 것으로 바뀐 것뿐인데, 쟨 아주 귀티가 철철 흐르네요. 내 자식한테는 공부만 죽어라 시키지 말아야겠어요. 외모 예쁘게 가꾸고, 잘 놀다가 시집만 잘 가면 팔자 한 방에 피는 건데……."


새삼 몰랐던 세상의 이치도 아니고, 허영심도 남을 헐뜯는 버릇도 없는 그녀였지만 18년 전엔 분명 자신보다 뒤처져있다고 믿었던 친구에게 추월당한 듯한 느낌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억울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복잡한 심경.


김 대리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툭툭 털어 넘기라고 했지만, 과연 나의 경우라면 어떠했을까? 나는 과연 김 대리보다 감정의 동요가 덜했을까? 아직은 어린 그녀가 느꼈을 감정은 단편적인 비교와 일시적인 질투였겠지만, 마흔에 이른 나는 그보다 좀 더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질투와 자괴감으로 며칠간 깊을 우울 속으로 푹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마흔이 도둑고양이처럼 조용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 앞에 다가왔다. 전문성과 성숙함, 단단한 배포로 무장한 채 흔들림 없는 자기 길을 갈 거라고 믿었던 마흔이란 나이. 하지만 나의 마흔은 달랐다. 스무 살의 어설프고 나약하고 이기적인 모습에선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젊은 날의 당당함과 무모한 도전 정신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어처구니없는 초라함.


내 나이 마흔에 만나리라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자괴감과 마주치고 말았다. 이런 착잡한 시기에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콧대 높던 시절의 옛 친구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 낭패스러움을 어찌 감당할까.


마흔 즈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택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프로가 되고 싶었던 꿈, 그리고 후배들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선배가 되겠다는 꿈 앞에선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을 감출 자신이 없다. 마흔이 가까워질수록 치명적인 자존심이 걸린 두 가지 인생의 목표 앞에서, 보잘것없는 내 모습이 서글퍼 망연자실해지는 시간이 잦아졌다.


이제라도 지금의 분야에서 혹은 다른 분야를 찾아 십 년을 정진하면 당신도 늦지 않았다는 말에 애써 기대보지만, 누군가의 사소한 성공 이야기 하나에도 질투와 조급함에 사로잡혀 내 페이스를 잃고 무너지곤 한다. 미혹함이 없이 제 길을 간다는 나이에 오히려 누군가를 바라보며 부러움과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일이 부쩍 늘었다. 제 분야에서 독보적인 빛을 발하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부러움과 부끄러움의 대상이 된다.


나는 왜 저들처럼 치열하지 못했던가?

나에게도 아직 빛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을까?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기에 보잘것없는 내 모습이 더욱 가슴 아픈, 오늘도 마흔의 하루가 지나간다.


나 떨려도 되나요?

남편이 오래도록 보아온 나는, 남편이 찍어 준 사진처럼 항상 피곤하고 지친 나이든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남편은 더 이상 나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았다. 남편 또한 오래도록 내 찬사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멋져, 당신 최고야,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해" 이런 말은커녕 "왜 이리 게을러, 왜 이렇게 나에게 무관심해, 아휴, 정말 정 때문에 산다"라고 서로를 타박하는 말을 일상으로 달고 살았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로맨스가 점점 사라져 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심해져 가면서 누군가에게 떨림과 설렘을 느끼는 관계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곤 했다. 여자로서 애틋하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그 느낌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유혹의 손길도 없었고 실제 유혹당하고 싶을 만치 매력적인 떨림을 느낀 이성도 없었다. 로맨스에 대한 갈망은 소설을 읽으면서 대리만족하는 것으로 채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현실에서는 사랑의 다양한 진짜 얼굴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본 주부는 사교춤 대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자신을 위해 사교춤을 함께 배우는 조용한 성품의 남편이 주는 잔잔한 사랑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영국 여자는 조울증을 앓고 있는 남자친구를 떠나지 않고 그의 절망과 비탄을 함께 견뎌 내고 있다. 인도 여자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을 남자를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로맨스 소설을 읽는 그녀들은 저마다 감당해야 할 현실의 냉혹하고도 무덤덤한 얼굴을 참고 견디기 위해 오늘도 은밀히 로맨스 소설을 탐독하고 있다. 나 역시 내가 부족한 만치 부족한 남편에게 만족하며 현실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서로의 뱃살을 쿠션 삼아 두드리며 등을 기대고 함께 걸어가는 남편과의 동지애도 농익은 사랑의 하나임은 틀림없으리라.


남편이 나를 향해 프리티와 뷰티풀을 외칠 수 있도록 다시 환하게 그를 향해 웃어 주든, 다른 이성에게 마음이 떨리는 것을 허락하든,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의 생생한 기쁨으로 환하게 다시 웃고 싶다. 이래서 마흔이 위험한가 보다.


마흔, 엎드려 울었다

첫째 아이가 온몸으로 열을 토해냈던 지난해,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태어나 세 번째 입원이었다. 작년, 아이는 밤마다 열이 났고 미친 듯이 온몸을 긁어 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성 세균이 아이를 못살게 군다고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대처할 방법 또한 찾을 수 없으니 막막했다. 아이가 온몸을 박박 긁을 때마다 내 가슴이 할퀴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만 아이를 안으로, 내 안으로 품어 가라앉히려 하는데, 아이는 자꾸만 내 가슴을 뚫고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병원에 입원한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서야 비로소 나는 아이보다 더 온몸과 마음이 뜨거워지며 엄마가 아닌 어미가 되었다.


나는 어미라는 말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짐승에게도 통용되는 것을 보면, 어미는 엄마라는 말보다 훨씬 본능적이고 동물적이며 생명이 분출하는 끈끈함에 더 가까운 말인 것 같다. 그래서 그 말은 내게 촉촉하고, 질기며 무엇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이제 아이가 아프면 나는 어미가 되어 아이를 핥듯이 샅샅이 손으로 핥는다. 어루만진다. 아마도 그때 내 손은 짐승 어미의 혀와 같았을 것이다. 아이의 온몸을 속속들이 어루만져 자신의 체온으로 열을 내리게 한다. 온전히 아이와 일대일, 생명 대 생명으로 마주한다. 어쩌면 아이는 제 어미의 핥아 냄을 기대하며 뜨거운 열을 몸 밖으로 끌어냈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있는 내 나이 즈음의 직장 동료들은 다들 한 번은 육아냐 일이냐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회사를 나가는 다른 여자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또한 두려워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친한 동료들은 정말 잘 지내는지를 궁금해하며 물어본다. 아이를 사랑하고 걱정이 되면서도 아이에게만 집중할 자신이 없다는 그녀들, 솔직히 말하면 돈에 대한 두려움이 제일 크다고 말하는 그녀들도 있었다. 나는 고민을 늘어놓는 동료들에게 나 역시 또 다른 인생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밖에는 해 줄 것이 없었다. 인생은 제로섬이라는 것. 결국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지금 손에 든 것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나 자신보다 엄마의 자리를 선택한 것이 실수는 아니었을까? 최선이었을까? 이것에 대한 물음표를 내내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내 선택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최고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나에게로 돌아갈 시간

굿바이 페르소나

2008년 12월 초, 희망퇴직 안내문이 게시되었다. 인수 합병된 지 1년 3개월 만이었다. 올 게 왔구나. 몇 년 동안 늘 퇴직의 뜻을 품고 살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터에 결단의 순간을 맞닥뜨린 심정이었다. 30대가 저무는 겨울이었다. 중간 관리자까지는 그런대로 잘 흘러왔지만, 앞으로 고위 관리자의 위치를 노리며 조직 생활에 몰입할 것인지 내 관심사에 기반을 둔 2막 인생을 찾아야 할지 판단해야 할 시점이었다.


안내문 게시 후 일주일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퇴직을 결심했다. 다소 갑작스런 퇴직이긴 했지만,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여유도 누리고, 때마침 맞은 아이들 방학 동안 좋은 엄마 노릇도 하고, 미뤄 두기만 했던 여행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접한 일상은 당황스러웠다. 의무감처럼 일련의 일들을 치르고도 집에만 있으려니 모든 사회적 연결 고리가 끊어진 듯 적막했다.


그렇게 서너 달을 보낸 어느 날, 퇴직자 카페 모임을 통해 무료 코칭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코칭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 반,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라도 얻겠다는 기대감 반으로 도심 어느 찻집에서 코치와 만났다. 한 시간여의 코칭 끝 무렵, 코치가 당시 내 마음을 형상화해서 낱말로 말해 보라 했을 때였다. 무척 망설이다 한참 만에 새싹이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감정이 폭발한 듯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진짜 네 삶을 살아라 하는 메시지를 담은 새싹이 겨울 찬바람을 뚫고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땅 위로 오롯이 고개를 내밀려 애쓰는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낯선 코치 앞에서의 눈물. 내 속엔 아주 강력한 바람이 자기 존재를 알아봐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그것, 과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낯선 경험은 나에 대한 탐구를 가속시켰다. 마음속 열망에 귀 기울이며 새로운 삶에 목말라 하던 그 즈음 『그로잉』이란 책을 읽고, 저자 문요한 씨가 운영하던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커뮤니티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방황하던 나그네가 갈 길을 찾은 기분이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책으로 인생의 다음 막을 연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러는 한편, 나는 또 다른 세계에도 발을 내딛고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시리즈 강의에 참석한 것이다. 대학 때에도 학생 운동에 관심 없었던 내가, 마흔이라는 나이에 한 번도 강의에 빠지지 않았고, 호프집 뒤풀이 토론과 종강 후 1박 2일 MT에도 참여했다. 그런 모습이 주최 측에는 인상적으로 보였는지, 이듬해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프랑스 편 취재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파리 현지에서 쓴 나의 첫 기사는 의외의 호평을 받으며 기획 취재의 첫 헤드라인 기사로 오르게 되었다. 혹시나 했던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그 계기는 내게 기자를 꿈꾸게 했다. 내 다음 천직이 혹시 기자일지도 몰랐고, 이럴 때가 아니면 만나보지 못할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해야겠다 싶었다. 기회 속에 내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런 만남과 행사가 잦아질수록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든 의욕을 잃었다. 한쪽은 내면의 소리로부터, 다른 한쪽은 외부적 상황으로 둘 다 내 길이 아니었다 하는 의혹으로 심각한 회의의 시간이 이어졌다.


진정으로 내 성장과 변화를 바랐다면 어느 한 길이 막혔다 하여 그리 실망스러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길이란 여럿이고 또 다른 길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그건 바로 이제까지 간판이 되어 주던 회사를 대체할 또 다른 사회적 페르소나로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과 자기계발 계의 유명한 인물의 위상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탐색과 방황은 계속되었다. 그 해가 저물어 가는 늦가을에 글쓰기 모임에 등록했다. 기자, 연구원, 책으로 2막 인생 출발하기. 이 모든 소망의 중심에 글쓰기가 있었다.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오래된 수단이자, 버리고 싶지 않은 친구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잡아 주던 것들을 모두 놓아 버리자 글쓰기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글쓰기 선생님의 열정은 가뭄 속 단비처럼 내게 함빡 전달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 그 에너지를 접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 얼마 후 가을이 시작된 첫 날, 글쓰기 선생님의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선생님은 말보다 행동으로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이란 만트라를 직접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 장면을 축하했다. 그리고 내 삶에도 그 순간을 옮겨 오고 싶었다. 이제까지와는 좀 더 다르게 구체적이고 절실해진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삶의 지금 단계에선 글쓰기가 나의 선택이고 그에 따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 내 인생이다

진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의 치명적 매력

2010년 1월, 한 강좌에서 공지영을 만났다. 실물로 본 그녀는 늘씬한 키에, 쉰에 가까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해사한 얼굴이었다. 파마기가 살짝 남은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앞머리는 내려 더 어리게 보였다. 목소리는 명료했고,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저서로 알게 된 저자를 실물로 보면 생각했던 것과의 차이에 당혹감을 느낄 때가 적지 않은데, 첫눈에 그녀는 딱 자기 글 그대로라는 느낌이었다.


편안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글을 잘도 쓰는 용한 작가로만 여겼던 그녀가 내 마음에 쏙 들어오게 된 것은, 그녀가 힘든 시절을 자기 식으로 극복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였지만, 30대 중반부터 마흔 초반까지 무려 7년 동안 펜을 들지 않은 적이 있었다. 글을 쓰는 그녀를 향한 과다한 시선과 이런저런 말들이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세 번째 결혼마저 위기로 몰렸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글쓰기 밖에 없는 그녀에게 7년간의 공백은 너무도 큰 타격이었다. 예전의 유명세로 원고 청탁은 받았지만, 단 두 문장을 쓰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 글을 써 내지 않으면 시장 바닥에 나가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겨우 할 수 있었다고, 이혼 위자료라도 충분히 받았다면 그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중에 그녀는 솔직히 고백했다. 세 번째 이혼을 망설이던 그녀에게 용기를 준 것은 친정아버지였다. "나는 네가 세 번 이혼하는 것 정말 싫다. 그런데 네가 불행한 건 더 싫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 이혼을 선택한 그녀를 치유해 준 것은 뜻밖에도 사형수들이었다. 인간에 대한 절망감이 밥 좀 더 먹어 봐라는 작은 관심으로 변해 가는 사형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이미 형이 집행된 사형수 5명이 남기고 간 자전적 노트를 읽으면서, 그녀는 글쓰기에 대한 의식까지 변화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글쓰기를 해왔던 그녀도 글쓰기가 사람을 치유하고 진실을 말하게 하는 교정력의 힘까지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자신의 7년간의 글쓰기 공백에는 외부로부터의 흔들기 외에도 자기 글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나 하는 내적인 고민이 맞닿은 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형수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그때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직업적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 세 번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한때 자기 인생이 엎질러진 물감 같다고 여겼던 그녀였지만, 공지영은 그 시기를 바닥으로 박차고 다시 솟아올랐다.


내가 소설가 못하면 어때? 내 인생이 그것뿐만은 아니잖아. 소설이 전부였던 여자의 극적인 사고의 전환.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그녀는 소신에 따른 정치적 발언과 행동에도 거침이 없다. 그녀는 이제야말로 진정으로 제 모습으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든 진짜 자기로 사는 사람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 그 점이 바로 나를 끌리게 한다. 마흔은 자기 본성을 돌아보는 시간이라 한다. 이제까지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싶을 때, 마흔은 모자란 한쪽으로도 귀를 기울여보라 속삭인다. 그것이 때론 반갑지 않은 편견이나 불행이나 절망과 함께 찾아오기도 하겠지만, 그 순간일수록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일지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면 삶은 분명히 마음속 빛을 꺼내 보여 준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를 딱 필요한 시점에 그녀에게서 발견했다.


TV 프로그램의 MC가 말했다.

"위대한 소설가보다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으셨던 거군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내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다.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여자,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서른이 되기 전에 죽어 버리는 거야.


어느 철없는 여학생의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닥종이 인형작가로 유명한 김영희 씨의 친구가 여고 시절 늘 했던 말이란다. 김영희 씨가 1940년대 태어났으니, 그 말을 나누었을 즈음이 1960년대 초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꿈 많은 여고생들이 살고 싶었던 삶과 그 당시 여자의 삶과의 거리감이 얼마나 컸으면 그런 말까지 했겠나 싶다.


그러나 그 시절에서 다시 20여 년 가까이 흐른 지금, 마흔 초반을 보내고 있는 나는 그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여자라는 사실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좋아지기까지 한다.


철학자 강신주 씨는 사회적 의무의 갑옷을 입고 힘겨워하는 모습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100미터 전력 질주하기에 비유했다. 나의 20대, 30대가 그런 모습이었다면, 결혼과 출산, 육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직장 생활에서도 풀려난 지금은 이브닝드레스를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제 마흔둘, 아이들이 컸다지만 아직 엄마의 손과 관심이 필요한 때이고, 멀리 지방에 있는 양가 어른들에 대한 책임도 마음 한편에서 지울 수 없다. 거기에 내가 직장을 그만두자 집안일에선 아예 손을 떼고 숨어 있던 마초적 성격을 가끔 드러내기도 하는 남편에게선, 내가 바라는 수준으로 장기적 삶의 동반자 역할을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의 가치는 빛난다. 생의 본질에 여자의 삶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늙은 어르신 중 한 분이 홀로 남는다고 하면 다들 할머니가 오래 사시길 내심 바란다. 사회나 남편도 제 몫을 다한 중년 여자들의 자기 삶 찾기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러니 시간이 더 흘러 50대 중반쯤 되면, 지금보다 한결 홀가분하게 최신 운동복을 입고 막판 스퍼트를 올릴 것이 분명하다. 이런 추세는 이미 일반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50대, 60대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이 우울한 일이 아니라 즐거운 상상으로 변하고, 지금의 40대는 이리저리 얽힌 관계를 잘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내 삶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한 과도기, 전환기로 잘 보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부모 세대만 해도 꿈만 같았던 인생 후반기의 또 다른 삶. 글 앞부분에서 얘기한 그 여고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 여고생은 60대 노부인으로 건강을 뽐내며 "나이 서른이 뭘 아니? 아직 애 아니니" 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때때로 내게 가혹하게 여겨졌던 시간은 이제 나의 적이 아니라 친구다. 그것도 갈수록 든든한 내 편이 되는 동지 같은 존재다. 동지와 함께 가야 할 길을 아는 것, 내가 서 있는 마흔의 과제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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