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모리 겐(역자: 김온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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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21
   
13000
2011�� 12��



■ 책 소개
안정된 직장을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과감히 선택한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직업과 자립에 대한 새로운생각!

회사라는 안정된 공간을 벗어나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살아가는 보통 청년 13명의 자립 스토리를 담았다. 도쿄, 나가노, 오키나와 등 일본 각지를 돌며 이들을 심층 취재한저자는 장인 정신으로 제품을 만들며, 혹은 농업의 틈새시장을 찾아, 도시가 아닌 지방에서 그리고 일반 영리기업이 아닌 NPO(Non-ProfitOrganization, 비영리 민간단체)로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이들의 궤적을 촘촘히 밟아나간다. 전직 타이밍, 실천으로 옮기게 된 계기와구체적인 행동 사례, 중간에서 벌어진 돌발 상황과 각각의 리스크까지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며 날 것 그대로의 ‘홀로서기’ 과정을보여준다.

저자는 일의 시작부터 삶의 방식까지 천차만별인이들에게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13명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먹고산다’는 신념을 확신한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주도권을가지고 다양한 직업을 창출하고 있는 13명의 이야기는, 매일 가슴 속에 사표를 품고 다니는 우리 직장인들에게, 그리고 대기업 취업만이 목표인 이시대의 청년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 저자 모리 겐
1968년 일본 도쿄 출생으로,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1990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과학, 경제 및 종합 월간지 기자로 일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독립 행정법인 과학기술진흥기구의비상근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과학기술, 경제 및 고용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등에서평을 포함한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역자 김온누리
일본 리츠메이칸 아시아태평양 대학교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학과 자연 생태학을 공부하고, 현재 도쿄 대공공정책대학원에서 수학 중이다. 환경 정의와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및 사회 체계와 관련된 것들에 관심을 두고있다.

■ 기획희망제작소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의제들에 대해 정책적 대안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싱크탱크이다. 시민의 힘으로 움직이는 시민참여형 연구소이자 정부나 기업의 출연금 없이 설립된 독립적 민간 연구소이다. 지역과 농촌을 주목하고 작은 기업과 퇴직자들이 튼튼하게 서는 사회를지향한다.

■차례
추천 서문 
들어가며 

제1장 장인으로 살아가기 
1.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참행복한 일이다 
손 염색 장인, 아오키 마사아키

2. 자신이 결정한 일을 얼마나 계속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신발 장인, 노지마 고스케
3. 오랜 방황 속에서도 지켜낸 최후의 보루 
가죽 장인, 기노시타히데유키

제2장 지역에서살아가기
4. 도요타에서 작은 섬으로 - 이곳에서도 일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메구리노와 대표,아베 유지

5. 고향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다
주조사, 가네자카 유코

6.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끝까지 추구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건축가, 바바 마사타카

제3장 소규모 사업으로 살아가기
7. 취미와 취향을 일의 원점으로 하다 
카페주인, 하시모토 도오루

8. 언제나 갈팡질팡 헤매면서도
장인.com대표, 사쿠라이 신야

제4장 농업으로 살아가기
9. 돌아가는 길도 실패도 꿈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하기
농원주, 미야카와 데츠지

10. 배우는과정에서부터 자신만의 독자색을 내보일 것 
피클 농가, 가와타니 이쿠미

11.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의 뿌리에서 찾아내다 
양돈 농가, 미야키 유스케
제5장 NPO로 살아가기
12. NPO로도 먹고살수 있는 체계를 만들다 
테라 르네상스 대표, 오니마루 마사야

13. 계약직으로 일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세계로 
ACE 대표, 이와츠키유카




나는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들어가며

최근 수십 년간 일하는 방식과 고용을 둘러싼 가치관은 이리저리 흔들려 왔다. 경제 환경의 변화에 의해 고용이나 일하는 방법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대세에 끌려 다니며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 결과 2011년 현재 대세는 대학생의 취직 트렌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리스크를 기피하는 안정 지향형이다. 요즘 고교생의 제1장래희망 역시 공무원이다. 인구 감소, 저출산, 고령화 등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젊은이들이 일에 꿈이 없는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안정된 직장을 얻는 것, 돈을 번다는 것은 중요하기에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과연 인간이 일을 하는 목적은 안정과 돈뿐인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지금까지의 안정 지향적이고 방향성 없는 대세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농업을 예로 들어보자. 농업 종사자의 수는 전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어 지금도 눈에 띄는 변화의 기미는 없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농업을 시작하는 신규 취농자의 비율이 증가했고 2009년에는 11.4%에 이르렀다.


다음 예로는 NPO(비영리 민간단체) 법인을 들 수 있다. 1998년 특정 비영리 활동 촉진법이 설치된 후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 2010년에는 4만여 개의 NPO가 생겨났다. 유턴(U-turn: 도시에서 살다가 귀향하여 정착하는 것)이나 아이턴(I-turn: 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이 아닌 다른 지방에 정착하는 것) 등 도시를 떠나 지방에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례들의 공통점이라면,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자신의 인생이나 사는 보람을 가장 중요한 축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법인을 시작한 경우, 그들은 무작정 규모나 이익의 확대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처지와 상황에 맞게 소신 경영을 하고, 자신이 파악할 수 있고 실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벌이보다도 그 일을 통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지속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가치의 기준은 외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둔다. 이른바 자립적인 자영(自營)이다.


꽤 전부터 다양성이 살아 있는 사회를 추구하자라는 구호는 여러 곳에서 들려왔지만, 실제로 그러한 사회를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책에 나온 분들과 같이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런 사회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장인으로 살아가기

자신이 결정한 일을 얼마나 계속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신발 장인, 노지마 고스케]

1975년 시즈오카 현 출생. 도요 대학 법학부 졸업.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검도라는 하나의 길만을 바라보며 걸어온 인생이지만 대학 2학년 때 좌절을 맛봄. 교재회사에서 일한 적도 있으나 신발 장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뒤, 신발의 생산지 아사쿠사로 이사하여 신발 제조회사에 취직. 일과 수업을 병행하다가 2006년에 독립하여 현재 교토에 신발 공방 깃카보를 설립하고 신발 장인으로 정진하고 있음.


개업 이래 주문은 도중에 끊긴 적 없이 계속 이어져왔다. 항상 100켤레 정도의 주문이 밀려 있어서 손님들은 보통 3∼4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다. 거기에다 매월 들어오는 신규 주문은 20∼40켤레 정도라고 한다. 주문이 밀리더라도 매월 같은 양만 만들어내므로 매출은 80∼120만 엔 정도로 일정한 편이다. 한 켤레씩 주문생산하기 때문에 대량생산은 불가능하다. 이게 노지마 씨 공방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판매 규모를 보고는 법인일 거라 짐작했는데 노지마 씨가 법인 사업이 아닌 개인 사업이라고 전했다.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 하긴 하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단지 제가 제대로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좋은 물건을 만들고, 그 대가로 즐겁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을 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이 직업으로 몇 천만 엔, 몇 억 엔은 벌 수도 없을뿐더러, 그만큼을 번다고 한들 있으면 써버렸겠죠."


대학 입학 전까지는 장래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던 노지마 씨가 지금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맞이한 것은 대학 재학 시절이었다. "대학 2학년 때까지의 제 인생은 오로지 검도뿐이었어요." 같은 학년 상위 그룹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기자 추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에 밀려 대회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더욱이 고액의 합숙비에 의문을 품게 되어 검도부를 탈퇴하고 만다. 그러고는 돌연 패션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1998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양복 재단사나 제화공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이렇다 할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일단 고향인 시즈오카 현 가케가와 시로 되돌아왔다. 당시 그는 이제까지의 인생에 대한 후회 때문에, 제화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인생에 대해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졸업한 지 2년이 지난 2000년 봄, 신발로 먹고 살겠다는 결단을 하게 된다.


"신발을 업으로 삼기 전까지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신발로 먹고 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는, 그에 따른 테마와 의의를 정하고, 그렇게 정한 것은 제대로 지키자고 결심했습니다. 최소한의 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매일 밥만 먹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보내는 것도 인생은 인생이니까요. 그러나 정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 보다 즐겁지 않을까요. 이건 사명감 같은 극적인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면 스스로가 더 즐겁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생활의 안정이라든지 돈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고 그것을 팔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돈이 주는 것 이상의 충족감을 줍니다. 손님의 발을 재고 한 켤레의 신발을 만들면, 손님이 그걸 신고는 딱 맞네요.라며 미소를 짓습니다. 그 좋아하는 표정을 볼 때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고 기쁠 때입니다."



지역에서 살아가기

고향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다

[주조사, 가네자카 유코]

1972년 오키나와 현 출생. 주식회사 그레이스 럼 대표. 오키나와 대학 졸업. 아스텔 오키나와 등을 거쳐 오키나와 전력회사의 공모 벤처 미나미다이토 섬의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의 사업화 제안이 채택되어 창업함.


주조회사의 대표라고는 하나 가네자카 씨는 원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회사원으로 일하던 중 자신이 기획한 미나미다이토 섬의 사탕수수를 이용한 럼주 제조 비즈니스 플랜이 응모전에서 채용되어 창업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가네자카 씨가 만들어내는 럼주는 미나미다이토산 사탕수수만으로 만들어진다. 진정한 의미의 신토불이 술. 이것이 가네자카 씨가 고집하는 절대적 철칙이다.


그녀는 원래 술을 좋아해서 이와모리 소주는 가볍게 네 잔까지 들이켜고 남편과 함께 마시면 1병은 금세 마신다. 술을 즐기는 성향이 주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발단이 되었다.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01년 겨울에 찾아왔다. 그녀는 친구가 운영하는 바에서 코코넛 럼주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는데, 무심코 가까이 있었던 럼주 병의 라벨을 보다가 원재료: 사탕수수라고 쓰인 글귀를 발견했다. 그걸 보고는 어, 사탕수수라면 오키나와에서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사탕수수는 오키나와에서 흔한 작물이지만, 대부분 제당용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건네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렇다면 미나미다이토 섬이 좋지 않을까?" 남편은 해운 관계 일을 하고 있어서 섬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러는 거예요. 미나미다이토 섬의 주요 산업이 사탕수수 제당이라고. 그래서 인터넷으로 조사해보니 예전에 이 섬에서 사탕수수로 럼주를 만들려고 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이러한 미나미다이토 섬의 사정을 알게 된 가네자카 씨는 만약 섬에서 럼주 제조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지역 진흥 혹은 마을 재건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도쿄에서 사업을 할 때는 문서나 돈이 중요하지만, 이곳 그레이스 럼 공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우선시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네자카 씨가 짧은 시간 안에 사업을 실현시키면서 태풍처럼 사람을 끌어들여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이 사회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을 하나둘 동지로 만든 비결을 묻자 가네자카 씨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양조부터 경영까지 저는 생짜 아마추어예요. 그래서 오히려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또 가르쳐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솔직하게 나가면 친절하게 대해주시더라고요. 이런 방식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파견 사원에서 정사원, 그리고 주조회사 사장이라고 하는 가네자카 씨의 극적인 변화는 이미 수많은 방송 매체에서 이야기했듯이, 변화하는 현 시대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매체에서도 그레이스 럼은 경제적인 성공 사례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조업은 원재료나 인원, 공장 설비 등 제조상의 제약이 많기 때문에, 몇 십억 엔 정도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그것보다도 오키나와에 대한 애착과 사탕수수라고 하는 특산물을 활용한 미나미다이토 섬의 부흥이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보통 직장 여성 몇 백만 명 중 한 사람에 불과했던 여성이 사업을 여기까지 일궈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뜨거운 근성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소규모 사업으로 살아가기

돌아가는 길도 실패도 꿈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하기

[농원주, 미야카와 데츠지]

1969년 후쿠오카 현 출생. 아이치 대학 문학부 졸업. 스미토모 건설에서 근무하던 중 홋카이도로 이동하여 환경시민단체 에코 네트워크에서 일함. 2000년 환경 친화 잡화전문점 리틀트리(Little Tree)를 오픈. 2006년에는 현재의 농원을 설립함.


"농지를 지금보다 더 넓힐 수 있지만, 이 이상이 되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져요. 농기구도 더 마련해야 하고요. 캠핑장을 짓겠다는 꿈이 있기 때문에 캠핑장 자리는 남겨둬야 하거든요. 이 꿈에 집중하기 위해서 캠핑장과 별 상관없는 건 필요 이상으로 하지 않으려고요."


1992년 아이치 대학을 졸업한 그는 거품경제의 마지막 수혜세대이다. 그는 졸업 후 스미토모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주요 업무는 건설 현장과 관련된 사무 업무였어요. 공사에 드는 경비, 고용 인원, 또는 자재를 포함한 건설 현장에 관련된 포괄적인 사항들을 관리하는 일이었죠. 사무실 건물이나 대학의 신축 공사 등 회사에서 맡아 오는 일들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일하는 보람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몇 년이 지나 전근을 너무 자주 해야 하는 부분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근이 잦은 탓에 도시 개발 일을 하고자 했던 그의 꿈은 현실에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계속 건설 현장만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미야카와 씨에게 이런 생활은 가장 피하고 싶은 방식의 삶이었다.


그가 회사를 그만둘 당시 가지고 있던 가장 큰 화두는 일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와 역할이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실제로 사표를 낸 것은 1995년 6월로 경제 침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 미야카와 씨는 그런 변화를 감지하긴 했지만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계속 밀고 나아갔다.


하지만 땅이 있다고 해서 금방 아무런 준비 없이 농사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 농장과는 달리 사업이나 일로 농장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소유한 토지를 상업용 농작지로 사용이 가능한지 여부와 지불한 세금액을 해당 지역의 농업위원회로부터 심사받아야 한다.


"이미 하는 일이 있는 상황에서 농업을 해보려고 하니까 자연스레 겸업농가로 분류가 되더라고요. 하지만 구로마츠나이 마을의 겸업농가에 대한 심사 기준 자체가 그때까지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정식 상업농가로 인정받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몇 번이고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이래저래 방도를 찾던 차에 우선은 마을에서 제공하는 농업 연수부터 받기로 했죠."


그는 유기농업을 8년간 계속해온 농가를 포함해 3곳에 연수 의뢰를 했다. 매주 주말마다 꼬박 8시간 정도 이 농가에서 연수를 받고, 평일에도 출근 전에 들러 일을 배웠다. 수확기에는 아예 연일 농가로 출근하는 식이었다. 실질적으로 반년 정도 이 농가들에 신세를 지며 배운 결과, 농업 연수 과정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자연 농법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친구의 영향이 컸다. 그 친구로부터 미야카와 씨는 "농업을 하겠다면, 농약은 절대 사용 안 하는 게 좋아"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들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관행을 쫓기보다는 나만의 방식으로 농사를 해나가자고 굳게 다짐했죠." 이런 결의를 바탕으로, 그가 전문 농업인으로 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 2006년 봄의 일이다.


이렇게 농장을 시작해 자리를 잡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그의 아내는 좀 의아해 했다고 한다. "아내가 캠핑장을 하는 게 꿈인 사람이 왜 농장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내의 말이 맞긴 맞아요. 하지만 저도 생각하는 바가 있고 아직 캠핑장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니라고 설명했죠. 캠핑장을 설립하는 계획이 농장을 시작하면서 좀 늦춰질 수는 있겠지만 농장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은  캠핑장과도 연관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거의 반강제로 설득한 거예요."


그도 차츰 농장 생활에 익숙해져 지금은 영락없는 농사꾼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고민거리가 많다. 예를 들어, 유기농 재배와 농약 재배의 차이에 별로 관심이 없는 소비자들의 의식수준은 요즘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농장을 하다 보면 이런 고초를 말끔히 잊게 해줄 만큼 큰 기쁨과 보람도 얻는다고 한다. "나중에 캠핑장을 찾은 손님들이 캠핑장이 자리 잡은 그 땅에서 나고 자란 농작물을 먹을 수 있게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농장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산지식도 쌓게 된 것 같아요. 이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맛있고 질 좋은 작물들도 수확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것이 가장 보람됩니다."



NPO로 살아가기

NPO로도 먹고살 수 있는 체계를 만들다

[테라 르네상스 대표, 오니마루 마사야]

1979년 후쿠오카 현 출생. 리츠메이칸 대학 법학부 졸업. 다양한 NGO 활동에 참여했고 2001년 대학 재학 중에 테라 르네상스(Terra Renaissance)를 설립. 캄보디아에서의 지뢰 제거 지원, 일본 내에서의 평화 교육, 소형 무기의 불법 거래 규제와 관련된 캠페인, 우간다와 콩고에서 전(前) 소년병의 사회 복귀 지원 사업을 실시하고 있음.


최근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에 공헌하는 사회적기업가라고 하는 일이 각광을 받고 있다. 사회적 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이나 목적은 각양각색이지만, 사회적기업은 영리 목적의 기업에서 다루기 어려운 사업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니마루 씨는 이런 붐이 일어나기 전부터 착실하게 사회적기업가로서 경력을 쌓아왔다. 대학 재학 중에 테라 르네상스를 만들어 이를 토대로 일과 경험을 쌓아온 것이다. 남들 다 하는 취직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일찍이 학생 사회적기업가로 일을 시작한 케이스다. 학생 시절 설립한 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현재, 테라 르네상스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서 테라 르네상스가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테라 르네상스의 수입 구조다. 일본의 많은 NPO 단체들은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원금과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지만, 테라 르네상스는 다른 단체들과 비교해 그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 물론 정부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으면, 활동 자금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지원금을 받지 못했을 때 일거에 프로젝트나 활동 규모가 수축될 수밖에 없다. 주로 자체 회비에 의존하고 있는 테라 르네상스는 그런 위험성이 적다. 이것이 이 단체의 장점이다.


그 외에 테라 르네상스가 단기간에 쌓은 실적 역시 주목을 받고 있다. 우간다의 소년병 사회 복귀 지원 프로젝트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현지에 배치된 전속 직원들의 활동을 통해 지금까지 약 150명의 소년병들을 배움의 장소로 되돌려 보냈다. 캄보디아에도 전속 직원들을 두고 지뢰 제거 지원, 지뢰 관련 교육, 초등학교 건설 등의 활동들을 실시했다. 사실 캄보디아에서의 지뢰 제거 활동이 실제 현지에서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나를 따져보면, 아직 갈 길이 먼 수준이다.


차분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니마루 씨는 단지 사회공헌을 하고 싶었다기보다 사회를 위한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 여러 능력과 기술을 단련해 먹고살 수 있는 일을 결부시키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NPO는 민간 기업과 다르기 때문에 이익이 크게 남을 수가 없다. 남더라도 그 이익은 다시 사회 공헌 활동을 위해 쓰인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테라 르네상스 그리고 그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사회에 관심을 가졌던 오니마루 씨의 관심과 적성이 사회 공헌 = 일이라는 공식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매년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 테라 르네상스에서는 예산을 바탕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간다나 콩고 등지에서 해야 할 사업을 정하고 나서 기부 활동을 해나간다. 목표와 각오를 정한 뒤 활동하는 쪽이 주위를 설득하기 쉽고, 스스로에게도 기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법인 NPO인 경우에는 사업체와 마찬가지로 금전적인 경영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NPO의 이런 경영적인 면을 간과하기 때문에 요즘 사회적기업 창업에 대한 오해도 많다고 느낀다고 한다. 학생 중에도 사회 공헌 사업을 하고 싶다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떻게 자금을 돌리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오니마루 씨는 사회적기업가라고 하는 타이틀을 막연히 동경하기만 해서는 이 장사를 해나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돈을 이용하여 목숨을 구하고 있는 겁니다. 캄보디아에서도 우간다에서도 돈은 목숨 다음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적기업을 시작할 때는 항상 자금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웬만한 민간 기업보다도 더 열심히 그리고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에게 돈은 어떤 존재인지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이 NPO입니다."


그렇다면 오니마루 씨에게 돈은 무엇일까? "제게 돈은 자기 성장, 자아실현,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 그뿐입니다. 또 일한다고 하는 것도 제게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럼 왜 다른 사람을 위한 사회를 위한 공헌 사업을 택했는지 자주 질문하시더군요. 강연에서 자주 말하는 건, 결국 일한다는 것은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위하는, 누군가를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가령 서비스업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어서 대가를 얻는 일이지 않습니까? 사회적 공헌도 사회의 실정을 가르치고, 그것을 사람들이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꿈을 파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팔아 그것을 직접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대로 벌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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