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간력

   
과화(역자: 차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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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비즈니스
   
12000
2008�� 06��



■ 책 소개
소설과 역사의 차이를 분석해 『삼국지』를"역발상"으로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삼국지』의 주요 영웅인 조조, 여포, 유비, 손권, 사마의, 제갈량, 곽가, 관우, 조운을 통해 삼국시대라는 독특한 시기의 얽히고 설킨 역사를 소개하면서, 난세를 풍미했던 이들의 모습에 투영된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흥미롭게 파헤친 책이다.특별히 아홉 사람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현대인의 역할 모델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제시된 9인의 영웅들을 통해 누가 "적"이며"동지"인지 알려주고, 나아가 어떻게 그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의관계"를 바람직하게 풀어나가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인간학"의 교과서인 『삼국지』의 영웅들을 통해 스스로를돌아보고 "사람"과 "세상"을 보는 혜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과화
길림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같은대학원에서 한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사와 기자,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다가 중국 유명 잡지에 문장을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국 시대별역사인물 연구 작업에 오랫동안 몰두하면서 강연활동을 계속하고 그 성과를 발표해왔다. 대표작으로는 『다시 보는 홍루몽』『역사는 기회를 알려주지않는다』 등이 있다.


■ 역자 차혜정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한중통역번역학과를졸업한 뒤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공부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면서 가톨릭대학교 및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에서 중국어 통번역 강의를 하고있다. 옮긴 책으로는 『CEO의 생각을 읽어라』『중심 리더십』『착점』『30대 직장인을 위한 자기경영노트』『역경에서 배우는 진리』『제왕의길』『바다의 역사로 보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해적이야기』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 『삼국지』 영웅들을 통해 사람을읽는다 


제1장 조조 - 소인배의 모습을 한 진정한 군자 
두얼굴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다ㅣ거만한 웃음 뒤에 숨겨진 진실ㅣ귀신같은 용병술?ㅣ소인배인가 군자인가 


제2장 여포 - 역사가 만들어낸 풍운아 
사람은 여포가으뜸이요, 말은 적토마가 최고ㅣ의리가 없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ㅣ의리의 반대편에 섰다고 소인배는 아니다ㅣ장수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ㅣ책략이있고 없음은 군자만이 알지니ㅣ장점도 많았으나 단점이 치명적ㅣ천하는 누구에게나 몫이 있다 


제3장 유비 - 제왕술의 대가 
황금빛 명함ㅣ거짓인생의 일면들ㅣ백수건달이 매력적인 이유ㅣ유방의 제왕술을 역할모델로 삼다 


제4장 손권 - 적의 적은 나의 편 
패왕의계승자ㅣ흐름을 파악하는 눈, 장점을 아는 눈ㅣ당근요법과 채찍요법ㅣ반쯤은 꿈꾸고 반쯤은 깨어 있으며ㅣ준마도 늙으면 둔한 말보다 못하다


제5장 사마의 - 인내심의 교과서 
제갈량이 사마의를두려워한 까닭ㅣ꾀병으로 정권을 얻다ㅣ신비의 베일 뒤에 감춰진 계략ㅣ참는 자에게 내려진 선물ㅣ최후의 승자가 받은 가혹한 저주 


제6장 제갈량 - 인품으로 무능을 덮다 
좋은 시절은오래가지 않으니ㅣ쩨쩨한 전략가ㅣ뜻은 컸으나 무능했던 천재ㅣ신출귀몰할 수가 없었던 처지ㅣ읍참마속의 모순ㅣ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다ㅣ인품은 능력보다위대하다 


제7장 곽가 - 똑똑한 아첨쟁이 
주인을 고르는안목ㅣ십승십패설의 진실ㅣ세상이 놀란 계책ㅣ살아서는 계책을, 죽어서는 공을ㅣ제갈량과의 차이 


제8장 관우 - 신이 된 무장 
강호 제일의킬러ㅣ억지로 지킨 충절과 의리ㅣ여우와 너구리 사이에서 홀로서기 


제9장 조운 - 이미지의 위력 
우상형 영웅의이모저모ㅣ첫 출전부터 강렬한 이미지ㅣ둘을 죽여 수백을 물리치다ㅣ오호상장의 실상 




삼국지 인간력


여포 - 역사가 만들어낸 풍운아

의리가 없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여포는 분석하기에는 복잡한 다면적 인물이다. 고순처럼 철저한 충성심도 없으며 유비의 의형제들처럼 의리도 없었다. 사람들은 여포가 두 번씩이나 양아버지를 맞았다가 결국 그 둘을 배신해 살해했다는 패륜적 행위를 들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신자로 평가한다. 물론 여포는 양아버지인 정원과 동탁을 살해하여 일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동탁을 배신한 행위는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는 긍정적인 의미로 평가해야 한다.


『삼국지』에서는 여포가 정원의 양아들이며 재물을 탐내서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에게 항복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에는 여포가 정원을 아버지로 모셨다는 언급이 없으며 가족처럼 대했다는 구절만 있을 뿐이다. 동탁이 금은보화로 여포를 매수했다는 말도 없다.


당시 동탁은 전장군이었다. 관직의 고하로 보자면 대장군 아래 선봉을 맡은 전장군이라는 동탁의 관직은 궁성의 주변을 순시하며 경호와 방비를 맡던 무관직인 정원의 집금오보다 훨씬 높았다. 따라서 동탁이 일단 명령을 내리면 여포는 거역할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여포는 결코 정원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장수인 부곡장령이 아니라 한의 관리였기 때문이다. "하진, 묘부곡은 소속이 없어 모두 동탁이 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동탁은 황제를 구한 공이 있어 황제의 생사 여부를 손에 쥐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다. 그의 말은 황제의 성지와 같은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나관중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는 동탁이 전횡을 부리기 전이다. 낙양에 입성할 때만 해도 백성의 환영을 받았다. 『후한서(後漢書)』 동탁열전(董卓列傳)에 보면 동탁은 처음에는 많은 인재를 발탁했다고 적혀 있다. 동탁이 기용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명사나 명문의 후예로 각 방면에 두루 뛰어나고 인덕이 있었다. 그러나 동탁의 심복은 오히려 직급이 낮은 자리에 임명했다.


만약 그 후로 동탁이 폭정을 하지 않고 조조처럼 수중의 병권과 천자를 잘 이용했다면 여포는 주인을 잘 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전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명분상으로도 동탁이 정원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우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동탁은 황제를 대행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속에 한나라 왕조의 존재가 살아있는 한 중앙 정부는 제후 따위로는 비교할 수 없는 권위와 호소력이 있었다. 이런 점을 볼 때 당시 상황에서 여포가 동탁에게 의탁한 것이 어쩌면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사실 여포처럼 가족을 살해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던 일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절대 권력인 황권을 빼앗고자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내는 짓을 저질렀는데도 명군이라는 역사적 평가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유비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을 저지른다. 조조를 사주하여 여포를 죽이도록 한 유비는 조조와 손권과의 패권 다툼에서 밀려 설 땅을 잃자 저열한 수단으로 집안 형제인 유장의 기반인 서촉을 빼앗아버린다. 가련한 유장은 유비를 형제로 보고 죽음을 무릅쓴 간언을 무시한 채 성문을 활짝 열고 돈과 예물까지 준비해 친히 유비를 마중하러 나간다. 결국 그의 행위는 이리를 집안으로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성 안으로 들어온 유비는 순식간에 성을 점령하고 마지막에는 유장을 서촉에서 쫓아버렸다.


당태종이 죽인 대상은 친형제였고, 유비가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한 집안의 형제였다. 이들과 비교하면 여포가 죽인 사람은 자기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아버지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유독 여포만 비난하고 유비를 칭송하며 이세민의 업적을 찬양하는가? 이는 분명 봉건적 전통관념이 조화를 부렸거나 아니면 승자는 왕이요 패자는 죄인이 되는 난세의 철학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최악의 평가를 내려도 여포가 의리를 저버리는 인물이라는 불명예를 씌워버릴 수 없는 행위가 몇 가지 있다. 여포가 왕윤을 도와 동탁을 살해한 후에 왕윤이 동탁의 잔당들을 없애려 하다가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킨 일이 있었다. 당시 이각, 곽사는 병사를 일으켜 장안을 공격했다. 여포는 이를 막지 못하자 일단 장안에서 후퇴하여 다른 전략을 도모하려 했다. 난리 통에도 여포는 먼저 왕윤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왕윤이 장안을 고수하며 한사코 떠나려하지 않았다. 아무리 권해도 막무가내인 왕윤을 설득하느라 여포는 처자식을 챙길 시간마저 놓쳐버렸다. 결국 처자식을 포기하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여포가 처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에게 처자식을 버리는 것이 어찌 옷 한 벌을 버리는 정도의 아픔이었겠는가.


여포가 유비와 서주에서 싸울 때 유비의 처자식이 두 번이나 여포의 수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밤을 틈타 서주를 습격할 때였다. 여포는 서주를 손에 넣은 후 군사 100명을 보내 유비의 집을 지키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일하는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내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보살폈다. 그리고 나중에 유비의 처자식을 무사히 돌려보내주었다. 처음에 여포가 유비의 가족을 곱게 돌려보낸 일이 당시 두 집안이 겉으로나마 동맹군이었고 양쪽의 대립이 첨예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졌다면, 두 번째 상황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이때는 조조와 유비가 동맹을 맺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사실을 안 여포가 크게 노해 유비를 치러 간 것이다. 곧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싸움이 벌어졌고 여포는 유비의 유일한 수성인 패성을 함락했다. 이때 미축이 유비의 가족을 해치기를 간청하자 여포가 대답했다. "나는 현덕과 오랜 친구인데 어찌 그의 처자식을 해할 수 있겠느냐?" 그러고는 즉시 유비의 가족을 서주에 데려다주었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여포는 위급할 때도 왕윤을 구했고 두 번이나 유비의 처자식을 살려서 보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여포는 인덕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었다.

 


유비 - 제왕술의 대가

유방의 제왕술을 역할 모델로 삼다

한나라를 연 고조 유방과 그의 먼 후손으로 촉한의 황제가 된 유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유방은 뜻을 세우기 전에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유비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이 대범했다면 유비는 말이 없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아랫사람을 잘 다스렸다. 유방이 서소하, 조삼, 번쾌 같은 당대 호걸들과 교분을 쌓은 것처럼 유비도 관우와 장비 같은 호걸을 곁에 두었다.


여공은 유방에게 딸을 주어 관계를 맺었고 유원기는 유비를 금전적으로 도왔다. 이런 점은 유비가 유방을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비의 어행은 유방의 젊은 시절을 많이 닮았기에 유원기도 아무 주저없이 오랫동안 자금 지원을 해줬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선물투자라고 할 수 있다.


관리 측면을 볼 때 유방과 유비는 각자 노선이 달랐지만 누가 앞서고 누가 뒤처지는지 구별할 수 없다. 유비는 눈물과 정성으로 세력가와 인재를 불러 모아 마침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문제는 많은 인재를 유치하면서 자신의 대권을 신변의 대장들에게 나눠주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유비가 분산형 관리 방식을 채택하여 권력을 분산해 마지막에는 자신의 권력마저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훗날 형주를 수비하던 대장 관우가 유비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은 것도 이 관리 방식의 폐단을 드러낸다. 그러나 유비가 인재를 붙잡아두는 데는 이 방법이 먹혔다. 그를 보좌하던 사람 중 제 발로 다른 사람에게 가는 인재가 없었던 것도 유비가 인재를 아끼고 감정 노선을 걸었던 까닭이다. 감성으로 인재를 잡고 사업에 남게 하는 유비의 관리 방법은 제갈량마저 죽는 날까지 유비의 사업에 몸을 바치도록 했다.


유방은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되, 최종 결정권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 오랫동안 있던 한신(韓信)에게도 요직을 개방하여 대범한 면을 보였다. 또한 형수와 사통하고 금품을 수뢰하는 등 부도덕한 행실을 한 진평 같은 인물에게도 핵심 기밀을 관리하도록 맡겼으니 그의 큰 도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의 판단은 오로지 유방의 몫이었다.


유방과 유비는 둘 다 제왕술(帝王術)의 대가였다. 유방이 한 발 앞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비야말로 중국 역사상 제왕술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와 비슷한 제왕술을 구사한 황제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 정도를 들 수 있다. 제왕술의 핵심은 단연 교활함이다. 표면적으로는 인의와 덕을 내세워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사람을 갖고 놀면서도 당사자가 이를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유비의 제왕술은 유방을 능가했다. 물론 사람을 다스리는 교묘한 기술, 심지어 교활함을 인자함으로 덮는 기술까지, 무엇하나 유방에게서 배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기가 막히게도 닮은꼴이다. 우선 두 사람 다 미천한 깡패 출신으로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천하호걸과 사귀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비는 미투리 장사로 가장 천한 직업이었으며, 유방은 무직으로 돌다가 하급 관리인 사수정장이 되었다. 성격도 비슷하다. 유비는 너그럽고 말이 없으며, 유방은 대범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두 사람 다 황제가 되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유비가 어릴 때 황제 놀이를 했다면 유방은 진나라 황제의 행차를 보면서 "대장부가 저 정도는 되어야지!" 하며 탄식했다.


두 사람 다 농민을 위한 봉기로 사업을 일으켰다. 유방은 진 말기의 진승/오광의 난, 유비는 황건적의 난을 평정했다. 유방은 장량 등 삼두마차를 이용했으며, 유비는 와룡 제갈량과 봉추 방통을 곁에 두었다. 두 사람 다 인의를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불의를 저질렀다. 유방은 항우에게 의탁했다가 항우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졌다는 핑계로 배신했고, 유비는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의대조를 앞세워 그를 배반했다.


두 사람 다 패전의 장수이다. 유비는 싸워서 이긴 것보다 진 횟수가 많았으면서도 기반을 잡았다. 유방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도 결국 천하를 통일했다. 둘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가정은 돌보지 않았다. 유방은 처를 오랫동안 모른 척했고, 유비는 처를 의복 정도로 생각했다. 전쟁에서 패해 도망갈 때도 두 사람 다 처자식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유비는 선조 유방의 제왕술을 열심히 모방했다. 유비에게도 유방과 다른 점이 많았으며 그 점이 유방보다 뛰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제왕술에서 유비는 결코 유방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유방은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 깡패 출신인 반면, 유비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서당에 다녀서 유교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턱대고 따라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게다가 그의 스승들은 유명한 유학자인 정현과 노식이었기에 유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비의 제왕술이 유방보다 못하다는 것이 유고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알고 보면 큰 관계가 있다. 공자는 인으로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유비가 유학을 배우면서 마음속에 인의의 기운이 싹텄다. 그 결과 유비와 유방의 대처는 완전히 달랐다. 유비는 관우, 장비가 죽은 후 인의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유비가 동오를 친 이유가 단순히 원수를 갚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일거에 삼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잘못된 결정은 관우, 장비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군대를 몸소 이끌고 출정할 유비가 아니었다.


입장을 바꿔서 제왕술의 진정한 대가가 유방이었다면 그토록 충동적일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 죽인다고 위협하자 유방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자기에게도 한 그릇 달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는 인의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유방보다 못한 행동을 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천하의 한 부분을 놓쳐버렸다. 유방의 적수 항우는 유비의 적수 조조보다 못했으니 천하의 다른 한 부분도 놓쳐버렸다. 유비가 죽어서 그의 선조 유방을 만났을 때 자신의 이런 성적표를 제출하면서 뭐라고 했을까?



사마의 - 인내심의 교과서

참는 자에게 내려진 선물

사마의의 인내심은 삼국 인물 중 단연 으뜸이다. 전투에서 패해 상방곡의 불 속에 갇혀 있을 때 다행히 큰 비가 내려서 부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촉군이 아무리 도발해 와도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제갈량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싸움만 하면 승리할 자신이 있었던 제갈량은 그냥 참고 있자니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꾀를 내서 사마의에게 선물을 보냈다. 이 선물을 받고도 얼굴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 선물이 이상한 것이었다. 사마의가 열어보니 여자들이 쓰는 머리 수건과 흰옷이 들어 있었다. 편지도 한 통 들어 있었다.


"무릇 대장이란 중원의 병력을 통솔하여 자웅을 겨루어야 마땅한데 토굴에 들어앉아 칼과 화살을 피하고 있으니 부녀자와 무엇이 다르오? 내 사람을 시켜 부녀자들이 쓰는 머리 수건과 흰 옷을 보내니 나와서 싸울 마음이 없으면 두 번 절하고 받으시오. 혹시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내다운 포부가 남아 있거든 빨리 회답하여 날을 정해 싸우시오."


이 글을 읽고 나자 사마의는 마음속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마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맛의 액체가 담긴 병이 쏟아진 느낌이었다. 쓴맛, 짠맛, 신맛 등 온갖 맛이 다 들어 있었다. 유일하게 단맛만 없었다. 사마의는 속으로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얼굴에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공명이 나를 부녀자로 보는가?" 그리고 옷과 머리 수건을 받고 사자를 후하게 대접해서 보냈다. 사마의의 의지는 오히려 전보다 굳어졌다. 다름 아닌 계속 참고 기다리는 것. 사마의를 약 올려서 움직이게 하려던 제갈량의 선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지금이야 여성들이 활개를 치고 남자들보다 목소리가 큰 세상이지만 당시 여자들의 지위는 상당히 낮아서 "여자와 소인배는 거두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여자들이 쓰는 물건을 보낸 것은 크나큰 모욕이었다. 상대가 격분한 나머지 출전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사마의는 위나라 대도독의 신분으로 평소 같으면 이런 일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애써 참은 것은 전세가 위나라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보다는 후방의 보급을 받기 어려운 촉나라 군대의 약점을 이용해 지구전으로 버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았던 사마의는 양측의 정세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버티겠다고 결심을 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갔다. 상대가 아무리 모욕을 주어도 참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사마의의 참을성은 결코 피동적인 참을성이 아니라 상대, 특히 제갈량의 동정을 살펴 기회를 잘 포착하는 참을성이었다. 제갈량의 사자를 후하게 대접한 것은 그에게 유용한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서였다. 사자가 전해준 말은 이랬다. "승상께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늦게 주무시며 곤장 20대를 칠 만한 일은 친히 보십니다. 드시는 것은 하루 몇 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들은 사마의는 생각했다. 식사는 적게 하고 하는 일이 많으니 어찌 오래가랴? 제갈량이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예측한 것이다. 정세를 보니 촉나라도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여겼다.


제갈량의 모욕을 견뎌낸 사마의의 인내는 드디어 풍성한 전과로 돌아왔다. 오나라의 지원군도 합비에서 위나라에게 패하자 촉나라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양면에서 공략을 받던 국면이 저절로 풀린 것이다. 제갈량은 이 소식에 장탄식을 하며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 후 바람이 불더니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촉군은 결국 전략적 후퇴를 한다며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사마의가 머리 수건과 흰 옷을 받은 일을 두고 비웃는 사람도 있고,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다"라는 말로 사마의가 겁이 많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장부란 굽혀야 할 때 굽힐 줄 알아야 한다. 당시 사마의가 분을 참지 못하고 싸움에 나섰다면 사나이의 용기는 보여주었을지 몰라도 촉군의 중원 진출을 막는 방어막은 뚫려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큰 손실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전에 위의 장수 장합이 죽은 것도 제갈량의 유인에 넘어가 그렇게 된 것이다.


중국 역사에는 인내와 관련된 고사가 많다. 불한당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지나갔다는 한신은 그 순간을 인내했기에 마침내 성공하여 왕에 오를 수 있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여 참패를 당한 전례도 많다. 항우가 양지로 떠나기 전 대사마 조구에게 성고를 잘 지키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조구는 처음에는 참을성 있게 잘 버텼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모욕하자 그만 꾹 누르고 있던 화를 폭발하여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러다 반도 못 건너서 공격당하니 결국 조구는 자살하고 군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항우가 승리하고 돌아와 보니 성에는 이미 한나라 군의 기가 꽂혀 있었다. 사마의는 이런 역사의 교훈을 잘 받아들였으며, 인내심을 가르치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곽가 - 똑똑한 아첨쟁이

십승실패설의 진실

곽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이른바 십승실패설(十勝十敗設)이다. 조조가 원소와 대결해서 승산이 있을지 몰라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곽가가 청산유수처럼 10가지 이유를 대면서 조조의 승리 가능성을 증명했다. 곽가의 말을 빌려 그 내용을 알아보자.


"첫째, 원소는 예절이 번거롭고 형식이 많으나 주공께서는 모든 일을 자연의 이치에 맡기니, 이는 도로(道)써 이기는 것입니다.

둘째, 원소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움직이나 주공께서는 순리대로 다스리시니, 이는 의(義)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셋째, 환제, 영제 이래 정사가 타락하여 오늘날 이리 되었건만 원소는 이를 관대히 보았고 주공께서는 강력한 법을 세워 다스렸으니, 이는 치(治)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넷째, 원소가 겉으로는 관대한 것처럼 보이나 안으로는 시기심이 많아서 친인척에게만 일을 맡기오나 주공께서는 겉은 대범하고 마음은 사리에 밝아 사람을 쓰시되 오직 재능을 보고 하시니, 이는 도(度)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다섯째, 원소는 꾀는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한 반면 주공께서는 계책만 세우면 즉시 행하시니, 이는 지모(智謀)로 이기는 것입니다.

여섯째, 원소는 오로지 명성만 믿고 사람을 거두지만 주공께서는 지성으로 사람을 대접하니, 이는 덕(德)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일곱째, 원소는 가까이에 있는 자만 생각할 줄 알고 멀리 있는 자는 소홀히 하는 반면 주공께서는 널리 사람을 아끼시어 멀고 가까운 구별이 없으니, 이는 인(仁)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여덟째, 원소는 남의 말을 듣고 사람을 의심하지만 주공께서는 꿋꿋하시니, 이는 명(明)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아홉째, 원소는 시비가 분명치 못하오나 주공께서는 법도가 엄정하오니, 이는 문(文)으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열째, 원소는 허세를 좋아하고 병법의 요점을 모르지만 주공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무리를 이기며 용병술이 귀신같으시니, 이는 무(武)로써 이기는 것입니다."


곽가가 제기한 10가지는 정치 조치, 정책 법력, 조직 노선 및 개인의 사상과 소양, 도량, 성격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곽가의 십승십패설은 조조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조조에 대한 곽가의 격려와 그렇게 해달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조조가 이 10가지를 지켜 천하통일을 이뤄서 자신도 출세하고자 하는 희망사항이었다. 이 십승십패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보내고 있으며, 심지어 그런 것이 과연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살펴보자.


당시 원소와의 하북 결전을 앞두고 조조의 진영은 술렁이고 있었다. 신하들의 의견도 낙관파와 비관파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했다. 낙관파의 대표 주자로는 순욱과 가후, 비관파에는 공융이 있었다. 곽가는 원소 진영을 떠나면서 그가 큰일을 못 이룰 인물이라고 큰소리를 친 것으로 보아 당연히 낙관파다. 순욱과 곽가는 곧 닥쳐올 하북 결전을 열심히 분석했다. 여기에는 순욱과 곽가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상으로 곽가의 십승십패설은 순욱이 내놓은 사승사패설보다 앞섰다. 곽가는 조조의 휘하로 들어올 당시인 건안 원년(196년) 9월을 전후로 십승십패설을 건의해 조조에게 큰 찬사를 받았다. 순욱의 사승사패설은 조조가 완성 전투에서 패했을 때인 건안 2년(197년) 정월에 나왔으니 시간적 차이는 크지 않은 편이다.


내용을 보면 곽가의 십승십패설은 웬만한 분야는 모두 포함하고 있고, 순욱의 사승사패설은 도(道), 지모(智謀), 무(武), 명(明)의 4가지를 거론했지만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사승사패설이 간단명료하면서도 객관적인 사례를 설명했다면 곽가의 십승십패설은 조조에게 아부하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사승사패설을 기본으로 확장한 듯하다.


순욱의 사승사패설은 이론을 내놓은 시점의 사건으로 보아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다. 먼저 원소의 오만함에 조조가 분노를 했고 종요 등은 조조가 장수보다 불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순욱이 알아보고 이런 논점을 내놓은 것이다. 순욱의 사승사패설이 진수의 정사에는 수록되고 곽가의 십승십패설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注)』 부자(傅子) 편을 인용했다는 점을 들어 십승십패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부자에 기반한 곽가의 십승십패설 중 핵심 부분과 순욱의 소견은 기본적으로 같다. 그 중 한 쪽이 거짓이라면 부자의 주장도 왜곡된 것이다. 둘 다 실제로 존재했다면 순욱의 주장이 좀 더 합리적이고 실천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진수가 둘 중 하나인 순욱의 것만 수록했던 것이다.


곽가의 십승십패설이 아부성 내용으로 채워졌다고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원소가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없으며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필연적인 실패 요인을 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십승십패설은 원소와 조조를 비교/분석해서 내놓은 논점이다. 어찌되었건 핵심을 논하면 되는 것이다. 십승십패설이 곽가의 아부 근성을 반증한다면 심하게 비판하고 심지어 그의 인품까지 들먹이는 사람도 많은데 이는 옳지 않다. 곽가가 정말 아첨쟁이라면 십승십패설처럼 급진적인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 원소에게 의탁하려나 그를 버리고 조조에게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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