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진화론

   
이현정
ǻ
동아일보사
   
12000
2007�� 10��



>■ 책 소개
삼성전자 최초 여성 임원인 이현정 상무의에세이. 이 책의 저자 이현정은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벨 연구소, AT&T, 루슨트 테크놀로지, 실리콘 밸리 벤처기업CEO를 거친 21년 동안 그는 미국의 최첨단 하이테크·IT 분야에서 연구·개발·마케팅을 두루 경험했다. 그리고 2003년 1월 한국 삼성전자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영입돼 디지털솔루션센터를 거쳐 글로벌 마케팅 본부에서 해외 협력 업무를 담당했다. 이 책은 그녀가 한국 생활 20여년,외국 생활 20여년을 하면서 보고 느낀 우리나라의 저력과 문제점, 발전전략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의 1부는 이현정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배경 설명이 없으면 뒤에 나오는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부는 반은 한국인 반은 외국인인 그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 3부는 한국 기업 이야기다. 4부는 저자와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스라엘 출신 유대인인 남편 마네 박사와 대니얼, 조너선 두 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3부에서 이야기한"가정 관리와 조직 관리"의 실전 전략을 보여준다. 


■ 저자 이현정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미국 일리노이 대학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 박사, 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를 수료했다. AT&T, 벨 연구소, 루슨트테크놀러지에서근무했으며, 코리 네트웍스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삼성전자 상무로 재직 중이다. 


■ 차례
추천사 - 우리가 몰랐던 명쾌한 대한민국리포트
들어가며 - 청개구리의 독백을 시작하며 


1부 "나"라는 사람 
1. 냄비와 컴퓨터 
2.사업계획서와 경력계획서 


2부 한국, 한국인, 한국 문화 
1. 비보이와 구글
2. 발달심리와 국민 정서 
3. 안방과 쪽방 
4. 프로크루스테스와 하인스 워드 
5. 대치동 엄마와 센터폴드
6. 두 번째 기회와 한탕주의 
7. 카스트라토와 카운터테너 
8. 반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9. 정상과 이상
10. 공짜와 진짜 
11. Du와 Es 


3부 한국의 기업 문화 
1. 국민체조와 다빈치
2. 수직선과 수평선 
3. 윗물과 고인 물 
4. 충성과 이성 
5. 밥상과 책상 
6. 카나리아와 탄광
7. 쌀밥과 잡곡밥 
8. 애물단지와 보물단지 
9. 진품과 짝퉁 
10. 가정관리와 조직관리 
11. 가진 것과주어야 할 것 


4부 나 그리고 가족 
1. 번데기와 진주 
2.초상화와 자화상 
3. 장미와 기저귀 
4. 족쇄와 동아줄 
5. 비빔밥과 곰국 
6. 엄마와 아줌마 
7. 천동설과지동설 
8. 호리병 마술사와 바이올리니스트 
9. 메디치가와 동상이몽 
10. 2인 병실과 6인 병실 
11. 사진 한장과 차 한 잔 


나가며 - 청개구리의 독백을 마치며





대한민국 진화론


발달심리와 국민 정서

나는 한국인이면서 외국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를 내부와 외부 2가지 시선으로 동시에 본다. 때로는 안에만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거나 놓친 것들을 보게 된다. 그중 하나가 한국인의 발달심리다.


나는 심리학 분야 가운데 임상심리와 발달심리에 관심이 많다. 임상심리라면 심각한 정신병을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신병은 정상인들에게도 쉽게 관찰되는 징후가 점차 심해지면서 어느 순간 정상 오차 범위를 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임상심리는 어떤 환경에서 이런 모든 징후가 그 다음 단계로 진화되는지를 시사한다. 발달심리는 아이들이 어떤 정서적, 지적 과정을 지나면서 성숙한 인간을 발전해 나가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발달심리 중 중요하게 다루는 항목 하나가 정체성의 정립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아성찰이다.


임상심리와 발달심리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골수 프로이트파 심리분석학자가 아니더라도, 어렸을 때의 정서적 상처가 성인이 된 뒤 사회 부적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단계별로 이루어져야 할 지적, 신체적, 정서적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아이는 심리적 불안정을 경험할 수 있고, 이것이 제때 발견되어 해결되지 않으면 그 여파는 어른이 된 뒤에는 더욱 다루기 어려운 심리질환으로 나타난다.


한 국가와 민족의 발달심리

나는 발달심리가 한 국가, 민족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칼 융의 ‘집단 잠재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이론을 무당의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발상이겠지만 한 국가와 민족의 포괄적 국민의식, 정서 발달, 정체성이 확립되어가는 과정도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거치는 정서적, 지적 발달의 단계와 같다. 즉 사람이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는 것처럼 국민, 국가라는 공동체도 이와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웬만한 부모가 다 인정하듯이 청소년기는 가장 예민한 시기다. 아이와 성인 사이에 끼어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묻는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편차가 심하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란 아이들은 이 과정을 수월하게 넘기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방황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발달장애라는 변수를 더해 보자. 철수는 신체와 정신의 발달이 늦은 편이다. 발달장애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철수는 놀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가정환경도 열악해서 부모는 철수를 제대로 돌봐줄 틈이 없다. 학업 성적도 한참 뒤처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철수가 훌쩍 자란다. 더불어 가정 형편도 좋아지고 성적도 오른다. 이렇게 되면 철수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 적절한 자아 발전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아이는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자신의 과거를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평소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소한 일로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평가와 칭찬에 집착한다. 심지어 예전 자기와 비슷한 아이가 있으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따돌리는 아이들의 편에 서서 그 아이를 괴롭힌다. 왜 그럴까? 철수의 모든 외적 환경은 개선되었지만, 열등감이 내재화되어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철수라는 아이를 통해 오늘의 한국, 한국인의 집단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민족이다. 고구려 시절 한때 드높았던 위상은 너무 먼 옛날이야기다. 늘 침범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고, 식민지 국민으로 살았다. 한국전쟁 휴전 후 남한의 경제 수준은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우리는 5천 년간 발달장애를 경험한 민족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다. 우리는 자신감에 충만해야 하고, 여유로워야 하고, 예전의 우리같이 아직도 힘들어하는 이웃에 대해 연민의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비굴함과 우월감의 뿌리는 열등의식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그 공백을 메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힘 있고 선망하는 집단으로부터 인정받으려 자기최면을 걸며 그 집단에 편입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나는 어이없는 TV 광고를 보았다. 그 광고는 백인들이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한국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잘난 백인들이 우리에게 ‘뿅’ 갔으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가, 라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이 광고를 보며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자긍심을 느껴야 하는가?


자신감의 부재를 해결하는 또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언론에 뜨는 상당 부분의 외신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엽기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번은 말레이시아 경찰서에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집단 성추행을 당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모든 언론의 인터넷판에 빠짐없이 보도된 기사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소개된 말레이시아 기사가 하필 할머니 성추행 기사인가. 만일 미국이나 유럽 언론이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는 사건만 달랑 대서특필했다면, 우리는 그 나라 대사관 앞에서 촛불 시위를 했을 것이다.


나를 이를 단순히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우리 국민들이 동남아시에 여행 가서 보여 주는 행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애써 그들을 무시함으로써 “이제 나는 너와 같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세계 최초’,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를 남발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지난 50년간 전 세계에서 전례 없는 일을 해낸 민족이다. 자랑스러운 것이 너무도 많다. 이런 우리가 내재화된 열등감이 남아 있는 피해망상형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자연 미인이 덕지덕지 화장을 해서 오히려 추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발달장애의 과거를 잊어야 한다. 남의 칭찬에 목숨 걸지 말자. 남이 수긍할 만한 자긍심을 갖고 그것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먼저 근거 없는 세계 최고, 최초라는 구호를 버리자.


내부 비판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고칠 건 고치자. 감추어두었다가 나중에 외부에 밝혀져서 망신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밖으로부터의 비판도 객관적으로 논의해 보자. 건전한 비판 없이는 성장도 없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하여 아직까지 힘들게 사는 다른 나라 국민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시각을 키워보자. 그들이 주류가 되었을 때 좋은 동업자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할 때다.



카나리아와 탄광

카나리아는 탄광 사고의 주원인인 함몰 현상이 일어나기 전 흔히 발생하는 메탄가스에 유난히 예민하여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소량의 메탄가스에도 이상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광부들은 카나리아가 든 새장을 가져다 놓고, 카나리아의 상태를 보아 즉시 철수했다. 지금도 영어 표현에는 ‘Canaries in the coal mine(탄광의 카나리아)’라는 문구가 있다. 어떤 사회, 조직에서 일어나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에 대한 조기경보, 또는 경종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흔히들 기업의 정체성, 조직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업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나 공감대 같은 것들을 논한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떨까? 탄광의 카나리아가 새장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메탄가스의 존재를 감지하는 순간 탄광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탄광을 빠져나오는 카나리아를 보며 탄광에 유해 가스가 퍼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친김에 한 단계 더 진화된 궤변을 늘어놓자. 카나리아의 종류에 따라 다른 가스에 반응을 보인다고 하자. 그러면 날아서 도망치는 카나리아가 어떤 종류인지 알면 어떤 유해 가스가 차오르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카나리아처럼 떠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그 조직의 실체를 알 수 있다. 물론 자발적으로 떠나는 경우에 한해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은 그 조직이 좋든 싫든 간에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로 투표한다

영어에 ‘발로 투표한다’는 표현이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은 현재의 조직에서 떠나는 것으로 그 조직에 불신임 표를 던지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여 시장 조사를 해서 유권자의 심리를 파악하려 든다. 기업을 떠나면서 한 표 던지고 가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정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눈앞에서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일다.


고학력 인재들이 구직난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요즘,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을 더욱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도 나가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실력 있고, 진취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외치는 글로벌 성장을 위한 창조, 혁신, 블루오션을 자신의 경력 관리 차원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열악한 인력 시장에서 당차게 나가는 한 사람 뒤에는 비슷한 이유로 나가고는 싶지만 여건이 되지 못하여 남아 있는 10명, 20명의 조직원들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나갈 여건이 되지 않아 남아 있는 사람이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고로 회사를 이끌어 갈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왜 떠나고 싶어 하는지 원인을 알아내어 해결하지 않으면 조직의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상사와의 갈등 때문에 이직 고려 중

나는 근래에 상당히 재미있는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았다. 조사 항목 중 하나가 “당신은 어떤 때 이직을 생각하는가?”였다. “회사에 비전이 보이지 않을 때”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미국 대기업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 이직을 고려하는 이유에 대해 또 하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답이 있었다. “상사와의 갈등”이었다. 미국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는 대답이었기에 나는 흥미를 가졌다. 왜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해외 선진 기업이라고 상사와의 갈등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빈도가 우리에 비하면 훨씬 낮다. 대부분 부하 직원이 경험하는 상사와의 갈등은 업무 자체에 대한 상사의 권한 때문이라기보다 업무 외의 면에서 보이는 상사의 행동 때문이다. 업무와 관계없는 개인의 성격, 성향 또는 사생활에 대해 상사가 언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상사가 있다면 징계 대상이고 소송 대상이다. 또 조직 문화상 상사로서의 권한을 남용하는 경우도 드물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비인격적인 언행을 하는 것도 금기다. 물론 어디나 좋지 않은 면에서 튀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빈도의 차이다.


서구의 대기업에서는 기업 내에서 직종을 바꾸거나 다른 조직으로 전배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 전배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을 받아주는 조직을 찾으면 현재 조직에서는 이것을 막지 않는다. 자신의 의사와 어긋나는 전배 역시 회사 쪽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개인의 경력 관리나 성향, 기호를 최대한 수용하는 것이 기업의 인사 방침이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사내 전배에서 개인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회사 안에서 선택의 폭이 적은 한국의 직장인들이 상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이직을 고려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상사와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 된 배경에는 그 기업에 전반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기업 문화, 조직의 가치관이 있다.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는 상사는 어느 날 갑자기 돌연변이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언행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거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당한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유수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의 대기업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런 기업들은 전 세계의 우수 인재를 확보해야 하고, 국제적인 일류 기업으로서 보편타당한 가치관에 맞추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데기와 진주

몇 년 전 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아이들이 한국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아이들과 걷다가 번데기 노점상을 보니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랐다. 얼른 한 봉지 사서 먹으라고 권했더니 아이들은 거의 까무러쳤다. 어떻게 벌레를 먹느냐고, 엄마는 정말 야만인이란다. 또, 웬만한 것은 다 “너희들 교육을 위해서”라고 둘러대는데 이번에는 무슨 말로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합리화할 거냐고 묻는다. ‘말발’ 하면 지지 않는 나인지라 역시 할 말은 있었다. “번데기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야 하는데 고치 안에서 어물쩍거리다 때를 놓쳐서 통째로 삶겨 내 간식이 되었거든. 그러니까 너희들도 안일하게 살면 안 돼.”


사실과는 동떨어진 말이다. 번데기는 비단의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실을 뽑기 전 삶길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희생자일 뿐이다. 과학적인 설명이야 어떻든 간에 말해놓고 보니 그럴싸하게 들린다. 만일 번데기가 삶기기 전에 나방이 되어 뛰쳐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치 안은 어둡고 좁다. 이런 환경에 잘 적응해서 안착한 누에는 삶아진 번데기 신세가 된다. 하지만 어둡고 비좁은 환경에서 뛰쳐나온 누에는 나방이 되어 날아간다.


불평분자가 세상을 업그레이드한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유난히 잘 적응하는 사람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적응은 필요하지만 무차별적인 적응은 건전한 비판의식의 부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적응은 일종의 지적 태만이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잘 소화해내면 그 환경은 나아질 수 없다. 냄비 속 개구리가 점점 올라가는 물의 온도에 서서히 적응하다 죽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나는 불평분자들이 세상을 한 단계가 더 업그레이드한다고 믿는다.


한강의 기적은 현실에 대한 우리 국민의 줄기차고 극성스러운 불평불만 때문에 가능했다. 역사상 보기 드문 초고속 민주화도 이런 끈질긴 불평불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물질이 자기 살에 낀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조개가 자신의 물질로 덮어씌우려는 과정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불평불만 예찬론’에도 조건이 있다. 불평 자체가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평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동기여야 한다. 참을 수 없기에 현재 상황을 바꾸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환경 밖으로 나간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대응책 없는 불평불만은 다른 사람까지 짜증나게 만드는 사회악일 뿐이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현재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끝없는 불평과 그것에 대한 대응책의 연속이다. 노년에 허리 아프고 다리 아파서 골골거릴 것 같은 내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 열심히 걷고 열심히 뛴다. 내면으로 허한 것을 메우려고 명품으로 자신을 도배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싫어서 역사와 철학 책을 읽는다. 럭셔리 리조트에서 개성 없이 퍼지는 것이 싫어서 고비사막을 달렸고 아마존 정글을 헤맸다. 나는 가끔 남편한테 말한다. “나는 왜 이런 모양으로 태어났을까? 웬만하면 좋은 게 좋다고 하며 살면 편할 텐데.” 남편의 대답이다. “그러면 당신이 아니지. 그랬다면 당신과 내가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지금 당신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불만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왔기에 얻은 것들이 아닐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나의 모든 것들은 부족한 것들에 대한 나의 불만과 그것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불평불만을 해소하고 인생을 즐겁게 살자

불평불만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승화하는 데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불만의 대상이다. 내가 가장 맹렬하게 불평하는 대상은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다. 부적절한 현실을 해결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불평불만 대상 1호다. 반대로 나의 불평불만 대상에서 빠지는 3가지가 있다. 남편 그리고 두 아이들이다. 세 사람은 내가 무조건 받아들인다. 내 눈에 무언가 씌어서 단점이 안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완벽하지 못한 점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총체적인 모습을 더할 수 없이 사랑하기에 받아들인다.


나는 나보다 열악할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한 불평은 자제하는 편이다. 웬만하면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보는 것이 내 마음에 안 들지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해도 다행이라고 여긴다. 물론 골수 문제아는 이런 배려의 대상에서 빠진다.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그렇다. 가장 싫어하는 부류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라면, 나의 불평지수는 최고도에 이르고 무엇이든 행동으로 나타난다.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은 3가지다. 첫째는 현 상황을 개조하는 것이다. 잘만 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다. 둘째는 현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비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빠져나와야 할 때 빠져나오지 못해서 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단 언제, 어떻게 나와야 하느냐는 신중한 고려의 대상이다.


사업이 아닌 개인적인 면에서 본다면 내가 가장 세심히 다루는 것은 감정과 이성의 균형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무작정 뛰쳐나오는 것은 잠시 기분은 시원할지 몰라도 긴 안목으로 보아 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일단 고비를 넘겼다 해도 궁극적으로 나와야 할 상황이라면 적절한 시기를 찾는다. 나 자신을 타임머신에 태워 적절한 미래 시점에 옮겨 놓고 현재의 상황을 되돌아보면, 지금 현실에서는 안 보이는 해결점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나 자신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현재 있는 상황은 몹시 불편하다. 감정적으로는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1년 뒤 나는 내가 이 고비를 넘기고 조금 더 시간을 번 것에 대해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감당해야만 했던 정서적 피해의 후유증에서 오는 해가 얻는 것보다 많은가?’


셋째는 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말과는 상반되는 논리지만, 때로는 개선할 수도, 그렇다고 달아날 수도 없는 상황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방법은 조금 다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적어도 다른 어떤 반대급부의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을 찾는 과정에서 그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보물이다.


3가지 방법 중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절대 “내 팔자야!” 하며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부족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마인드는 그 사람이 사는 방식 그 자체를 다르게 한다. 나는 누구나 정말로 갖고 싶지만 자신의 손 밖에 있는 무엇인가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의 부재를 수용하지 않고 그것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질 수 없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나를 힘들게 한 당신이 고맙다

내가 가진 모든 진주의 시작은 나를 불편하게 했던 작은 모래 조각들이었다. 흔히 조직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과도한 업무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라고 한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귀한 진주의 핵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한 당신이 고맙다. 당신 덕분에 나는 은빛 영롱한 진주를 만들었다. 당신 같은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나는 하나씩 더 아름다운 진주를 내 목에 걸 것이다. 당신 덕분에 나는 번데기가 되는 신세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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