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미국 방송 프로그램 중비즈니스 뉴스 부문 1위인 NBR(Nightly Business Report) 방송이 2004년 1월 프로그램 방영 25주년을 맞아 워튼스쿨과공동으로 지난 25년간 가장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한 비즈니스 리더 25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NBR 시청자들이 자유 지정한 7백여 명 가운데워튼스쿨 교수 6명으로 이루어진 심사위원회에서 25인의 리더를 최종적으로 선정했다. 이 책에서는 이들 25명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이 어떻게세상을 변화시킨 리더로 성장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 저자
무굴 판댜(MukulPandya) - 무굴 판댜는 워튼스쿨의 경영 지식 포털 [
로비 셸(Robbie Shell) -로비 셸은 [
■ 역자 신문영
미시간 대학에서경제학을 공부한 뒤 워싱턴 대학에서 MBA와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소재 법무법인 Darzen & Brubaker와하버드 대학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전략경영과 리더십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 차례
서문
Chapter 1 인텔 앤드루 그로브의리더십
Chapter 2 리더십과 기업문화
허버트 켈러허
메리 케이 애시
제임스 버크
Chapter 3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리더
잭 웰치
피터 드러커
윌리엄 조지
Chapter 4 새로운 블루오션 시장을개척하다
존 보글
찰스 슈왑
무하마드 유누스
Chapter 5 보이지 않는 시장을 뚫어본비전
스티브 잡스
테드 터너
조지 소로스
Chapter 6 싸게 팔아 경쟁에서이기다
샘 월튼
마이클 델
제프 베조스
Chapter 7 브랜드를키우다
오프라 윈프리
리 아이아코카
리처드 브랜슨
Chapter 8 빠른 학습능력
빌 게이츠
프레드릭 스미스
루이스 거스너
Chapter 9 뛰어난 리스크관리
워런 버핏
앨런 그린스펀
피터 린치
Chapter 10 결론: 세상을 변화시킨 리더십의교훈
옮긴이의 글
세상을 변화시킨 리더들의 힘
인텔 앤드루 그로브의 리더십
세상을 변화시킨 리더 중 으뜸
1950년대 중반, 미국 뉴욕 시립대학 공과대학생이었던 앤드루 그로브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헝가리 난민 출신으로 받았던 1년 장학금이 만료되면서 동시에 조기 졸업을 하기 위해 화공학 과목을 반드시 수강해야 했다. 화공학128 과목은 당시 학과장 앨 사비에 슈미트(AL Xavier Schmidt) 교수가 가르쳤다. 수강 신청을 허락받기 위해 슈미트 교수와 면담을 해야 했는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당시 스무 살의 앤드루 그로브는 마침내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슈미트 교수를 붙들고 통사정을 했다. 사정이 이러이러하다고 말하는 그로브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슈미트 교수는 마치 고문관이 피의자를 심문하듯 다짜고짜 물었다.
"슈미트 교수는 내가 그전에 어느 교수의 무슨 과목을 수강했는지, 학점은 어떠했는지 캐물었습니다." 앤드루 그로브는 물리학 과목 하나에서 낙제했지만 같은 과목을 재수강했을 때 A학점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결국 슈미트 교수는 그로브를 자신의 강의에 받아들였다. 나중에 그로브는 이렇게 말했다.
"슈미트 교수는 짧은 질문을 통해 나를 시험했던 겁니다. 나의 잠재적인 능력을 테스트한 것이었지요."
슈미트 교수와의 담판은 앤드루 그로브의 발자취 속에서 거듭 발견하는 패턴을 대변한다. 1968년 인텔을 공동 창업한 이후 35년간 숱한 위기 때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앤드로 그로브의 리더십 아래 인텔은 2003년 매출액 3백억 달러와 7만8천 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다.
"난 까다롭기로 유명한 슈미트 교수의 조교로 일하며 복사, 타자, 파일 정리, 기타 등등 무엇이든 심부름을 했고 졸업할 때까지 그 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슈미트 교수를 "꾸밈없고 직선적이며 상대를 불문하고 진실을 요구하는 성격, 말한 것을 반드시 실행하는 인물" 로 의식했고, 이는 학생이었던 그가 평생 닮은꼴로 몸에 체득한 리더십의 원전이 되었다.
"나는 어떤 상황이건 내 앞에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사실은 핑계거리다), 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는 등,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둘러댄다. 그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적당히 좋은 게 좋다는 생각은 결국 윤리적 문젯거리 또는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온다."
리더십과 기업 문화
허버트 켈러허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창업한 허버트 켈러허에게는 첫 비행기를 띄우는 일부터 첩첩난관이었다. 기존 항공사들로서는 획기적으로 낮은 운임을 내세워 새롭게 취항하려는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달가울 리 없는 터라, 무려 3년에 걸친 법적 소송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 변호사 출신이면서 창업 당시 법률고문이었던 켈러허는 이와 같은 방해 공작에 맞서 연방대법원까지 가는 필사적인 법적 투쟁을 거쳐 비로소 1971년 첫 비행기가 뜨는 것을 보게 된다. 그 후에도 이어지는 경쟁사들의 소송은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본거지인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에서 몰아내려는 소송으로 치달았고, 켈러허의 말대로 경쟁 기업들의 총공세를 이겨내야 했다.
이 일은 결국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몰아내려 했던 경쟁 기업 두 곳의 임원들이 담합 협의로 기소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기내식 대신 땅콩이 나오고, 승무원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오락을 펼치며, 범고래 모양의 비행기 외관을 꾸미는 등, 시가 총액 기준 미국 최대의 항공사로 도약했다. 창업 초기에 겪었던 수모와 어려움이 사우스웨스트 항공 기업 문화 밑바탕에 유머와, 임직원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애사심과, 관료주의를 스스로 경계하는 유전인자를 심어놓은 것이었다.
회사를 세우자마자 소송에 휘말려 비행기도 띄우지 못한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첫발은 켈러허 외 몇몇 투자자들, 그리고 냅킨 위에 그린 사업 계획서가 전부였다. 켈러허와 그의 몇 안 되는 동료들은 상대편에서 나온 변호사 부대와 맞서야 했다. 켈러허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끈기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상식적이고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체념했을 때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이었지요. 텍사스에서 당시 상황을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활주로를 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넷 중 한 명 정도였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상식 수준이라면 그것은 예리한 통찰이 될 수 없고, 예리한 통찰력은 상식일 수 없다."
1973년, 경쟁 기업들이 또다시 댈러스 도심 공항 사용권을 가지고 소송을 걸어왔을 때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승무원, 정비사, 화물 하역 근로자 등 전 임직원이 힘을 합쳐 회사를 위해 뛰었다.
"우리는 모두 위기의식을 느꼈고, 전쟁터에서 싸우는 전사들과 같은 심정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때 경험을 통해 임직원 모두가 이 업계에서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한 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젖 먹던 힘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지요. 우리는 모두 십자군 원정에 자원한 군사가 되었고, 이후 우리의 기업문화에 그런 정신이 뿌리내린 겁니다."
켈러허는 서비스 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객제일주의를 처음부터 높이 사지 않았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에는 자기 일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가진 임직원이 있을 때 비로소 고객 만족이 있다는 철학이 있다. 어느 임원의 말처럼 사우스웨스트 항공에서 대표이사를 만나려면 관리 담당 임원보다 화물을 싣고 내리는 직원이 되라는 전설이 있다. 화물 담당 직원의 일이 관리 담당 임원의 일보다 중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켈러허의 설명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리더
잭 웰치
진정 뛰어난 리더라면 진실해야 한다. 진실성과 리더십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인도 독립 운동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리더십을 생각해보자.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온갖 부조리한 법으로 통치할 때, 간디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는 비폭력/평화적/비협조 운동을 펼쳤다. 이 말은 진리를 고집한다는 뜻인데, 상대방에게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인내와 동정심으로 상대방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한다는 목적의식을 대변했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시작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그의 고국 인도로 옮겨간 후 불길처럼 번져 수천만 명이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
간디는 "혹독할 정도로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도달하려는 의지가 바로 사티아그라하의 본질이다"라고 기록한 바 있다. "사티아그라하는 요란하지 않고 천천히 발전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 힘이 나타날 때는 곧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다."
이러한 진리는 정치계는 물론 사업 세계에서도 깊은 교훈을 준다. 엔론(Enron), 월드콤(WorldCom), 파라마트(Parmalat) 등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기업 부정 사태가 연이어 터지는 이 시대에 리더십을 말하면서 비전 못지않게 진실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변화와 기회를 포착하는 안테나 역할과 함께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라면 비전을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다른 이들의 신뢰와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신뢰를 얻는 유일한 길은 정직과 진실한 도덕성이다. 가식적인 사람은 잠시 동안은 성공의 길을 달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신뢰와 존경을 얻지 못하고 실패한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구성원을 포함해 이사회 멤버, 언론, 증권사 애널리스트, 시민단체 등 모든 이들로부터 "그 사람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맑은 날씨든 굳은 날씨든 숨기거나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말하는 리더다" 라고 인정받을 때, 비로소 그들 모두가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따르는 리더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잭 웰치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를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 GE의 텔레비전 제조 라인이 있는 뉴욕 주 북부 시러큐스로 향했다. 1980년대 초에는 이 공장에서 텔레비전 한 대를 생산하는 것보다 싼 가격에 품질 좋은 일제 텔레비전 한 대를 수입할 수 있었다.
"천재가 아니어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GE는 경쟁 우위를 상실한 채 사양 산업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낮은 진입 장벽과 외국 기업들이 몰려오는 상황이었습니다. GE의 최고경영자로서 내가 당면한 도전은 1980년대에 들어 급격히 몰려온 세계화 도전을 맞아 회사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조차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조직을 뒤흔드는 일이었습니다."
잭 웰치는 숨기거나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습관이 조직에 뿌리내리면 그것이 곧 기업 문화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솔선수범해서 있는 그대로 말하기를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숨기고 조작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 머지않아 그 조직의 유전자 속에는 정직함과 진실함이 싹트게 된다.
새로운 블루오션 시장을 개척하다
존 보글
196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증권 호항기에는 펀드 매니저의 대다수가 고수익에 익숙했다. 그러나 1973년 무한정 오를 것 같던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버블이 꺼지면서 시가 총액의 50퍼센트 가량이 흔적도 없이 증발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본사를 둔 웰링턴 투자신탁운용(Wellington Management Company)은 무려 3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빠져나가는 위기에 이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사 주식이 반 토막 나는 상황에 몰린다. 결국 이듬해 1974년 봄, 웰링턴 이사회는 대표이사 존 보글을 전격적으로 해임하기에 이른다.
"비즈니스맨에게 실직만큼 큰 위기는 없습니다."
보글 회장이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나 털어놓은 말이다. 당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보글은 자신을 해임한 이사회 앞에서 약간의 쇼맨십을 섞어 상식 수준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제안을 했다. 이미 타격을 입은 펀드와 전혀 다른 성격의 펀드를 신설하여 맡겨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는 이사회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뱅가드 그룹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99년 9월 24일, 창립 25주년 기념행사에서 존 보글은 뱅가드 그룹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설명했다. "청지기 정신, 뱅가드 그룹의 존재 이유와 사업 이념을 집약한 말입니다. 뱅가드 그룹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관리자이자 보호자이며, 투자자의 펀드, 투자자에 의한 펀드, 투자자를 위한 펀드입니다."
워튼스쿨의 피터 캐펠리 교수는 존 보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뱅가드 그룹 이전에 투자자를 위한 펀드가 없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보글 회장이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펀드 업게 인사이더로서 난관을 뚫고 새 펀드를 시작할 수 있었고, 동시에 업계 관행에 얽매이지 않을 만큼 아웃사이더의 참신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캐펠리 교수는 또, 보글 회장이 펀드 업계 최초로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펀드 매니저가 주식시장의 평균 실적을 뛰어넘기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는 연구 결과, 그리고 투자자 수익을 갉아먹는 온갖 수수료에 관한 연구를 사업에 적용한 일을 가리킨다.
보글 회장에 따르면, 뱅가드 그룹이 이처럼 낮은 비용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투자자들이 직접 펀드 운용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뱅가드 그룹의 성공 요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만이 가진 독특한 차별적 경쟁 우위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독특한 차별성을 바탕으로 제품 또는 서비스 상품을 구성한 후, 다른 업체들이 쉽게 모방하거나 경쟁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더 낮은 비용 구조를 가진 펀드는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시장을 뚫어본 비전
스티브 잡스
벤처 사업 창업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 가운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새로운 기술로 멋진 제품을 내놓아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승승장구하는데 갑자기 대기업이 같은 시장에 진출을 결정한다. 엄청난 자금과 마케팅 조직을 무기로 달려드는 대기업의 도전을 맞아 벤처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와 같은 시나리오는 실제 창업에 성공하는 리더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구덩이에 빠져 결국 장렬한 죽음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용광로에 담금질한 강철과 같이 변할 것인가. 애플 컴퓨터와 픽사 스튜디오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는 1980년대 초 이와 같은 도전에 직면한다.
1976년 약관 21세의 스티브 잡스는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과 함께 집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했다(이론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은 아마 두 사람이 창업을 의논한 곳은 잡스의 침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지만, 아무튼 애플 컴퓨터를 조립한 곳은 분명 차고 한구석에 있던 작업대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차고에서 떠나 사무실을 얻었다).
1970년대 중반은 컴퓨터가 무선 햄 라디오처럼 기술자나 아마추어 애호가의 취미 정도로 여겨지던 때였다. 전파상에 가서 회로기판을 비롯해 부품을 포함한 조립 키트를 사서 일일이 조립하는 컴퓨터로 계산 기능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애플 컴퓨터의 첫 번째 컴퓨터 애플Ⅰ(AppleⅠ)이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바이트 숍(Byte Shop)이라는 전파상에서 50대를 발주했다. 애플 컴퓨터의 두 창업자도 멤버였던 팔로알토 홈브루 컴퓨터 클럽(Palo Alto Homebrew Computer Club) 회원들이 여러 대를 샀다. 1977년 개량판 애플Ⅱ(AppleⅡ)를 출시하면서 확실한 사업 기반을 갖추었고, 퍼스널 컴퓨터 시장도 본격적인 확장을 경험한다. 애플Ⅱ의 뿌리는 애플Ⅰ이었지만 연한 베이지색 본체와 컬러 그래픽을 구현한 점에서 달랐다. 그리고 비지캘크(Visicalc)라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돌리면 복잡한 연산을 빠르고 쉽게 할 수 있었다.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임원이었던 마이크 마쿨라(Mike Markula)를 영입하면서 자금 조달에도 숨통이 트였다. 1970년대가 막을 내릴 즈음에는 미국 어디에서나 대당 1천2백 달러나 하던 애플 컴퓨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83년에 이르러 IBM PC는 애플 컴퓨터를 제치고 PC업계 정상에 오른다. 애플 컴퓨터와 잡스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잘 놀던 판에 갑자기 덩치 큰 훼방꾼이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생각한 답은 다른 판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잡스는 제록스사 팔로알토 연구소(PARC)에서 개발한 알토(Alto;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이루어진 명령 체계와 메뉴판으로 운영하는 방식)라는 컴퓨터를 보고 그림으로 이루어진 소프트웨어가 움직이는 컴퓨터라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 예감했다. 누구든지 별다른 훈련이나 학습을 하지 않고도 쉽게 쓸 수 있는 신개념 PC가 별도로 훈련을 거쳐야 쓸 수 있는 IBM PC를 압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브랜드를 키우다
오프라 윈프리
오늘날 오프라 윈프리가 미국인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기까지 얼마나 험한 인생 역정을 거쳤는지 알고 싶다면 그녀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1970년대 중반, 약관 스물두 살의 나이에 텔레비전 저널리스트로서 위치가 불안해지자 그녀는 고향 내슈빌에서 동부 볼티모어로 옮겨 저녁 뉴스 공동 앵커를 맡는다. 오프라 윈프리를 줄곧 따라다녔던 문제는 그녀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한다.
"불이 난 현장에 출동하여 불길 속에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여자와 함께 눈물을 쏟는 저널리스트로 비쳤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우아하고 냉정한 방송인인 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불길 속에 일곱 아이들을 모두 잃어버린 엄마를 보고 어떻게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지요? 어떻게 그 여자를 부둥켜안고 함께 통곡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방송국 동료들은 그녀가 정확히 대본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 볼티모어 지리에 서툰 점, 프로그램을 공동 진행하는 남자 앵커와 불편한 사이인 것을 숨기지 못하는 점 등 이유를 들어 윈프리를 따돌렸다. 방송국 경영진은 그녀의 용모를 헐뜯으며 옷 입는 스타일을 바꾸고 헤어스타일가지 바꾸도록 종용했다. 방송국에서 기용한 발음 교정 코치는 뉴스를 진행하려던 오프라 윈프리의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야 하고, 조금 더 강한 톤으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아홉 달 만에 그녀는 앵커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다행히 새로 부임한 방송국 경영자가 오프라 윈프리를 아침 방송 토크쇼의 공동 진행자로 발탁한다. 당시 아침 시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던 〈필 도나휴(Phil Donahue)쇼〉를 겨냥한 피플 아 토킹(People are Talking)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두 명의 진행자와 게스트 출연자, 그리고 청중이 함께 자유로운 주제로 대본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6년간 이 프로그램을 열정적으로 진행하면서 〈필 도나휴 쇼〉를 제치고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그녀는 저널리스트들이 게스트를 맞아 틀에 박힌 질문을 하는 것과 달리 시청자들이 정말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녀만의 솔직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만들어준 모태가 된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일찍부터 자신의 브랜드가 사업의 성패를 판가름할 것을 예측하고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이 받아들이는 따뜻한 인간미로 대표되는 이미지 관리에 철저했다. 따라서 그녀는 오프라 윈프리라는 브랜드와 관련하여 사업 전반에 걸쳐 엄격한 관리 통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기업 공개를 하면 더 많은 자금을 동원하여 더 큰 사업을 할 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개인 사업체로 유지하고 있으며, 임직원들 모두에게 평생 비밀 유지 계약을 받아내기 때문인지 아직 아무도 그녀의 브랜드 이미지에 흠집을 낼만한 내용의 글을 쓰거나 말을 한 적이 없다.
빠른 학습 능력
빌 게이츠
성공 뒤에는 고민거리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경쟁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와 투지로 똘똘 뭉친 빌 게이츠가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는 글로벌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이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에 힘입어 마이크로소프트는 고속 성장을 거듭했고,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갑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은 동전의 양면처럼 부작용도 따른다. 바로 이 시장 지배력 때문에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는 큰 도전을 받는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소송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넘어지거나 주춤하지 않고 성장을 이어나가야 하는 도전이었다. 미국에서 2000년 판결대로라면 마이크로소프트는 반 토막으로 잘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비록 강제로 쪼개지는 운명은 피했지만 앞으로도 마이크로소프트를 주목하는 눈길은 여전히 매서울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성토하는 목소리는 10여 년 전부터 있었다. 유력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1992년 11월 "반칙왕 빌 게이츠(Does Bill Play Fair)?"라는 기사에서 당시 불과 17년의 역사밖에 안 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매우 빨리, 그리고 무척 커졌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전 세계PC의 80퍼센트가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인 MS-DOS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12년이 지난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는 전 세계 PC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기업으로도 매도하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하나의 표준 운영 체계 틀 안에서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호환성을 이루었다는 점은 높이 사야 한다. 문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계 소프트웨어 말고도 응용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다양한 기업들과 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낙관주의자들은 빌 게이츠의 리더십으로 이들과의 대결이나 경쟁을 피하고 협력과 전략적 제휴에 의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빠른 전략 실행으로 무장한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게 이끌 수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이는 초창기에 벤처 기업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를 지난 30년간 초고속 성장으로 이끌어 온 빌 게이츠의 리더십 - 시장 변화에 민감하고 변화를 기회로 탈바꿈시키는 데 기민한 - 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