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로 산다는 것

   
김영익
ǻ
스마트비즈니스
   
12000
2006�� 07��



>size=2>color=#595959>■ 책 소개
1958년 전남 함평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친 뒤 불굴의 노력과 의지로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로 거듭난 이 시대의 진정한 "프로"김영익의 자전적 에세이.


color=#595959 size=2>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교회에서 학업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던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처한 혹독한 환경과 처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길은 반드시 있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오롯이 살아온세월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더 좋은 희망을 갖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책을 썼다.


size=2>color=#595959>■ 저자 김영익 
전라남도의 깡촌 함평에서태어난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중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배웠다. 의자도 없어서 마룻바닥에 엎드려배웠다고 했다. 농고에 입학했지만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했다. 전남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때가 스물두 살, 서강대학교석사과정을 마치고 사병으로 입대한 때가 스물아홉 살, 그리고 대신경제연구소에 입사한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


color=#595959 size=2>입사 이후 지금까지 그의 출근 시간은 새벽 6시다. 술 마시고 새벽 2시에 들어가도어김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소위 "아침형 인간(그의 표현에 따르면 농부형 인간)"의 표본인 셈이다. 그는 또한 증권회사 재직 중에서강대학교에서 박사과정(야간대학원이 아닌 정식과정)을 졸업했다. 스카이(SKY, 서울대/연대/고대를 말함) 출신이 대부분인 증권가에서 몇 안되는 "지방대 출신"으로서 차별을 느꼈지만,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했다.


color=#595959 size=2>지난 2000년의 주가 급락, 9/11 테러 직전의 주가 폭락과 그후의 반등, 2004년5월의 주가 하락과 2005년 주가 상승 등을 줄줄이 맞히면서 그는 여의도의 족집게 스트래티지스트(strategist, 증권사 연구원 중 개별기업이 아니라 주식 시장 전체의 흐름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사람)로 떠올랐다.


color=#595959 size=2>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계속해서 경고했다.


color=#595959 size=2>그는 언론사에서 펀드매니저들을 상대로 조사해 발표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순위에 최근5년 동안 연속해서 선정되었고, 대한민국 증권인상과 베스트 이코노미스트 부문, 스트래티지스트 부문에서 모두 1, 2위를 차지하는 프로 중의프로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이런 실력을 인정받아 2005년 투자전략실장에서 리서치센터장으로 승진했다. 동기들 중 가장 빠른 임원승진이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예순 살이 넘어도 계속 공부를 하고 직접 자료를 쓰는 스티븐 로치(모건스탠리의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처럼 되는 것이 그의 목표다. 

■ 차례
추천의 글 철학을 갖춘애널리스트에게 박수를 보낸다 
감사의 글 좋은 환경이 아니라면, 좋은 희망을 가져라 
프롤로그 "프로"란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의결정체!"


size=2>color=#595959>제1장 가난한 시골 소년, 거인을 꿈꾸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의 하루 
교복을 입고 싶었던 깡촌의 어린 나무꾼 
야학, 넓은 세계를 향한 꿈을 싹틔우다
난생 처음 교복을 입던 날 
검정고시,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러운 이력 
잡초 뽑고 퇴비 다루던 농업고등학생의 꿈
경제학의 세계에 매혹당하다 
가난 이상의 무엇, 거인을 꿈꾸다 
경찰에 잡혀갈까 마음 졸이며 지내던 고학생 
기회는 잡는자의 몫이다 
늦은 나이의 군 입대,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 


size=2>color=#595959>제2장 내 인생 최고의 재테크, 한결같은 노력과정성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의 시작, 대신증권 입사 
증권회사 새내기, 주식투자로 손해보다 
공부하고,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공부벌레 증권맨 
개인의 자기계발이 회사를 키운다 
노력은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게 만든다
내 능력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기 
방송 스타일 VS 지면 스타일, 언론의 속성을 알다 
새로운 기회, 영국옥스퍼드에 입성하다 


size=2>color=#595959>제3장 경험과 직감의 전략가, 애널리스트의 세계
9·11테러, 나의 유명세에 한 몫 거들다 
프로라는 외로운 자리, 등수와 몸값으로 결정되다 
내 얼굴이 대신증권의 얼굴이다
한결같은 습관이 프로를 만든다 
합리적 근거를 가진 용기는 끝까지 사수하라 
애널리스트의 세계, 과학과 직감의 놀라운 조화
신뢰, 나를 지켜준 힘 
나의 꿈, 철학을 지닌 노익장 애널리스트가 되는 것


size=2>color=#595959>제4장 프로, 그 이름의 성공학 
오늘이 내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맥도날드보다 치밀하고 과학적인 애널리스트 세계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하라 
아름드리그늘을 준비하라 
인생 반전의 즐거움, 습관을 바꾸는 작은 실천철학 
패러다임 변화의 코드를 읽어라 
자기 비전은 자기 영역에서시작한다 
‘쉬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보다 더 중요한 ‘아프지 말라’ 


color=#595959 size=2>에필로그 - 희망의 또 다른 이름, 프로로 산다는것




검정고시 출신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로

프로로 산다는 것


제1장 가난한 시골 소년, 거인을 꿈꾸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의 하루

아침형 인간 열풍이 불기 훨씬 전부터 나는 철저히 아침형 인간이었다. 전날 술을 마시거나 대설주의보가 내린 한겨울에도 지켜온 규칙이다. 기상시간은 새벽 4시. 일어나자마자 막 도착한 두 개의 조간신문을 읽고 간단하게 맨손 체조를 한다. 아침 식사는 거르지 않는다. 아침 6시. 회사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세계 시장 동향을 점검하고 관련 내용을 펀드매니저들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것이다. 주식, 채권, 외환시장 외에 원유 시장 동향도 점검한다. 그리고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각종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한다. 애널리스트에게 데이터 보유는 필수적이다. 8시부터 30분 동안 모닝미팅이 끝난 후, 1시간 동안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챙기는 일이 있다. 바로 「파이낸셜 타임즈」를 정독하며 세계의 정치 및 경제 환경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다. 오전 10시 사이에서 오후 6시 사이에는 주로 설명회나 강의를 다니는 일과가 많다. 하루 평균 2회 이상이다. 강의가 없는 저녁에는 보통 8시 전후에 귀가한다. 30분 정도 학교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를 한 후 10시 무렵에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친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령 베스트 애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 하나, 매일 변하지 않는 꾸준한 노력뿐이다. 이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리이며, 증권 세계를 넘어서서 내 인생을 아우르는 인생 철학이다. 하지만 지금 여의도 증권가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파이낸셜 타임즈」를 정독하며 주가를 분석하는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는, 한때 교복을 입어보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던 얼굴 새까만 시골의 촌 소년이었다.


교복을 입고 싶었던 깡촌의 어린 나무꾼

1970년대 초, 친구 윤중이와 나의 얼굴은 비 오는 듯 흐르는 땀으로 흥건하게 얼룩졌다. 오늘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 풀과 작은 나무를 베어 지게에 한 짐 쌓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부는 퇴비로 쓰고 나머지는 밥을 짓는 데 불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산 밑자락에서 잠시 무거운 어깨를 풀고 있는 사이, 친구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교복을 입은 그 애들이 행여나 지게를 진 누추한 행색의 나를 발견할까 두려웠다. 다행히 풀이 무성한 작은 언덕이 내 모습을 잘 감춰주었다. 땀은 진실한 노동의 결실이요 상징이건만, 당시에 나는 그런 걸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윤중이와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었지만, 윤중이도 나도 다른 친구들과 달리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할 정도로 집이 가난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꽤 부유하게 살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 살림이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부족할 것 없는 훈장집 아들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한 집의 보잘것없는 소년이 되었다. 그때 내 꿈은 중학교 문턱에 가보는 것이 아니었다. 중학생이 아니라도 좋으니 내 또래 친구들이 입은 교복, 빳빳하게 다린 그 교복을 한 번이라도 입어봤으면 하는 것, 그게 다였다. 무거운 지게를 진 채 초여름 땡볕에 땀을 흘리면서도 내 가슴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황량했다.


난생 처음 교복을 입던 날

"너, 공부하지 않을래?"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해졌다. 나보다 2년 선배인 양만 형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한 교회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 집에서 밥상으로 쓰는 상을 아무거나 하나씩 가져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세 분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하나라도 더 전달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중학교 교과서를 얻어 영어도 배웠고, 수학문제도 풀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생 처음 중학교 교복을 입을 수 있게 된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비록 정식 중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제 나도 중학교 공부를 하는 어엿한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두 손에 교복을 받아든 날, 내 눈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주말마다 교복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첫 휴가 나오기 전날의 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의 뒤에 세 줄로 날을 세웠고 바짓단도 칼날같이 세워 다렸다.


경제학의 세계에 매혹당하다

이후 나는 검정고시 합격증을 따내고 광주상고에 진학하려다, 경제형편으로 인해 장학금을 주는 함평농고에 입학했다. 고교생활은 1년 반으로 끝났다. 2학년 여름방학 때 대입자격 검정고시에 거뜬히 합격했기 때문이다. 9월, 누나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대입은 중학교 공부와 차원이 달랐다. 전기였던 고려대학교와 후기였던 성균관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2년 동안의 독학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만을 절감했다. 게다가 고교 졸업 직후 직장에 다니며 1년 동안 내 학원비와 생활비를 대주었던 누나도 슬슬 지쳐갔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학비가 싼 국립대학인 전남대학교로 가기로 결정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오던 전날 밤, 누나와 난 많이도 울었다. 문학 공부의 소망을 접고, 상대적으로 일자리 잡기가 유리하다는 상과대학에 주저 없이 원서를 넣은 것은 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액 장학금을 기대했지만, 내 이름은 부분 장학금 명단에 있었다. 1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경제학과를 골랐다.


2학년 때 처음 들은 경제원론이라는 과목은 첫 수업부터 바로 이거다!라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매력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다. 나는 경제학이란 부(富)를 연구하고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연구라는 구절에 깊이 매혹되었다. 바로 내가 찾던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슨의 책을 한 줄 한 줄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 가며 숨은 뜻까지 찾아내려고 했다.


가난 이상의 무엇, 거인을 꿈꾸다

어린 시절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보다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의지였던 것 같다. 가난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바람 이상의 무엇… 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뒤에는 경제학과 졸업 이상의 무엇, 거기서 나아가 경제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꿈이 생기자 공부에 더욱 몰두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후 1980년 7월 30일의 학교교육의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이라는 조치로 인해 과외가 전면 금지되고, 생활고로 인해 소위 입주 과외라는 불법행위까지 하면서 나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이 덕분에 조기 졸업이 가능했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기회는 잡는 자의 몫이다

금전적인 어려움은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학금이 거의 없는 대학원에서, 학비를 면제받는 유일한 방법은 조교가 되는 것이었지만, 조교 대부분은 서강대 학부 출신이 맡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김광두 교수의 조교가 될 수 있었는데, 김 교수가 주최하는 경제학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 서당에서 배운 붓글씨 쓰는 법을 활용해 경제학회 회의 식순을 붓으로 썼고, 학회에 참석하는 교수들의 가슴에 달 명패도 만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김 교수의 조교로 임명되었다. 기회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기회란 잡는 자의 몫이다. 어느 경험 하나라도 헛된 것이 없음을 그때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늦은 나이의 군 입대,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

서강대 대학원을 마칠 때가 가까워지자 군대문제가 나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석사장교라는 제도에 기대를 걸었다. 나는 대학을 한 학기 빨리 졸업했기 때문에 대학원 졸업 역시 8월에 해야 했다. 당시에는 석사장교 시험이 매년 3월에 한 번 있었다. 나는 이 시험을 치기 위해 졸업을 한 학기 미뤘지만, 뜻밖의 벽에 부딪혔다. 이 시험은 우수한 학생에게 자격을 주는 제도인데, 나는 대학원을 5학기 동안 다녔으니 공부를 잘한 학생이 아니고, 그래서 응시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8월 문교부에 전화해서 확인했다고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스물 아홉 살 되던 해, 나는 늦은 나이로 논산 훈련소에 사병으로 입소했다. 첫날 밤 군복에 이름표를 달면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늦은 나이의 군 입대는 내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석사장교 응시자격을 얻었더라면 나는 경제학과 교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착오로 인해 그 길은 멀어졌고, 그것을 계기로 교수가 아닌 증권분석가의 길로 들어서게 될 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살다 보면 늘 예상치 못한 복병들이 뒤통수를 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복병들의 공격조차 또 다른 기회로 변신시킬 수 있다.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세우고 있으면 길은 늘 새로 열리고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안내한다. 내 인생의 모든 과정은 새로운 길 위를 똑바로 걷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었다.



제2장 내 인생 최고의 재테크, 한결같은 노력과 정성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의 시작/증권회사 새내기, 주식투자로 손해보다

나는 증권회사야말로 자본시장의 생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직장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나이 제한이었다. 입사 지원서조차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김광두 교수를 찾았다. 마침 김 교수의 가까운 친구가 대신증권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단 원서는 받아주되 채용 여부는 회사 차원에서 결정하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신증권에 입사했다.


나는 본사 영업부로 발령받았다. 신입사원 주제에 선배들이 알려준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주가 전망을 해줘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1988년 말에는 증권주가 가격의 제한 폭까지 오르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닐 정도로 연일 치솟았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친척들의 돈으로 증권주를 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자마자 많이 올랐다.


1989년 봄에는 회사에서 신입직원들에게도 특별 보너스를 300%나 지급했다. 그러나 축제는 참담하게 끝났다. 친척들이 맡긴 주식투자는 줄줄이 손해를 봤다. 그에 따른 손실의 일부는 내 돈으로 보충을 해주어야 할 정도였다. 공부도 하지 않고 주식을 사고 판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주식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구입해 주식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영업점에서 3개월 동안 근무한 뒤 나는 대신경제연구소로 발령 받았다. 경제와 증권 시장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가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개인의 자기계발이 회사를 키운다

대신경제연구소 내에는 나의 위치는 내 전공이 고려된 경제조사실이었다. 여기서 나는 실장으로부터 통화수요함수를 측정하고 예측하는 모델을 만들 것을 지시 받았는데, 이것이 나의 첫 보고서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계량분석에 있어 대신경제연구소내 최고가 되기로 다짐했고, 혼자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내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단계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박사 과정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1985년 대학원을 마친 후 7년여 만에 나는 아침 6시에 출근하면, 8시까지 2시간을 활용해 옛 노트를 펼쳤고, 새로운 교재를 갖고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92년 12월에 박사 과정 입학을 달성할 수 있었다.


노력은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게 만든다

1993년 3월에 박사과정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박사과정을 빨리 끝내려면 더 많은 과목을 수강해야 했지만, 나는 학생이기 이전에 대신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이고 회사 일이 우선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시간 부족이었다. 아침 6시 이전에 출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주중에는 회사와 학교, 그리고 주말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젊은 학생들과 같이 보냈다. 2학기 때부터는 세 과목을 신청했다. 오직 공부만 하는 학생들에게도 한 학기에 세 과목을 소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담당 교수들은 직장인에게 조금의 여유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강대학교는 서강고등학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학칙이 엄격했다. 출석 점검은 엄격했고, 일곱 번 빠지면 여지없이 학점은 F로 나왔다. 또한 과제도 많이 내주었다. 우리는 과제를 나눠서 풀기로 했는데, 동료들이 문제를 풀어오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나는 다른 사람들을 기대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나 혼자서 다 풀기로 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의 우직한 노력뿐이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 전에, 남는 시간을 모두 할애해봤는지 스스로를 솔직히 돌아볼 일이다.


내 능력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기

내 능력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박사 과정의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고, 요구하는 학점 이수도 마쳤으며, 종합시험과 제2외국어 시험도 통과했다. 하지만 학위 논문이 문제였다. 처음 제시받은 복잡한 수식이 적혀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유동성 효과를 거시경제모델에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연구는 내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련 없이 다른 주제를 찾아 논문을 작성했고, 박사 과정에 등록한 지 4년 반 만인 1997년 8월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새로운 기회, 영국 옥스퍼드에 입성하다

2000년은 나에게 대망의 해였다. 당시 대신증권의 양재봉 회장이 나를 넌지시 불렀다. "그동안 회사에 많은 공헌을 했으니 연수를 다녀오게.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가능한 최고경영자 과정을 선택했으면 좋겠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내 앞에 펼쳐졌다. 옥스퍼드 경영대학원의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입학허가서를 보내왔다. 하루 100만 원 이상, 5주에 5,600만 원이라는 교육비 지출은 회사 입장에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기왕 주어진 기회이니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그 기회를 활용하리라 마음먹었다. 옥스퍼드에서의 수업은 그야말로 힘든 과정이었다. 우선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경영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해봤기 때문이다. 수업은 대개 토론 형태였다. 최고경영자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 회사 경영을 하거나 회사에서 재무나 인사를 담당하는 중역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견해를 밝혔다. 나는 내가 속한 조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연수기간 동안 하루 3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다. 토론이 끝나면 자료를 정리하고 복사하는 심부름까지 주저하지 않았다.


힘든 옥스퍼드 시절, 그것은 나에게 공부의 기회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도 남겨주었다. 매일 저녁  만찬 시간에 세계 각국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포도주와 함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제학만 공부했던 나에게 경영전략, 리더십, 재무론 등의 수업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더구나 세계 각국에서 온 인재들과 함께 공부한 경험은 내 시야를 세계로 확장시켜주었다. 현재 이코노미스트, 스트래티지스트의 역할과 더불어 40여 명의 리서치센터 연구원을 이끌어 가는 나에게, 그때 배운 지식과 경험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제3장 경험과 직감의 전략가, 애널리스트의 세계

9․11테러, 나의 유명세에 한 몫 거들다

나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묘하게도 9.11 테러였다. 2000년 12월 잠시 500포인트 밑으로 떨어졌던 주가는 2001년 들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주가예고지표에는 그 해 9월에 주가가 다시 크게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 지표를 신뢰했다. 그래서 9월에 주가가 500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하며,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매도하라"고 권유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해 9월 전혀 예상치 못했던 9.11 테러가 뉴욕에서 일어났다. 주가는 500포인트 아래로 추락했다. 그 당시 한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가 찾아왔다. 앞으로 주가 전망에 대해서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연말에 주가가 700포인트 정도까지 오를 것이기 때문에 지금 주식을 사야 합니다."


그러자 기자는 장사꾼같은 얘기말고 사실을 말해달라고 거듭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증권사 직원들은 주가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참으로 참담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에게는 물건을 팔기 위한 장사꾼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그 기자를 돌려보내고 씁쓸히 주가가 변동하는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다른 방송사의 기자 인터뷰 요청이었다. 그는 "앞으로의 주식 시장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렇게 코멘트 해주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인터뷰에 응했고, 그 날 이후 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2001년 말에는 거의 700에 근접했다.


어쨌든 나는 9.11 테러 때의 주가 급락과 그 이후 급등을 정확하게 전망하면서 증권 시장에 유명 인사로 등장했다. 그 해의 애널리스트 평가에서 나는 스트래티지스트 분야에서 2위로 올랐다. 2004년도에도 나는 주가 방향을 거의 정확하게 맞혔다. 2003년 말 2004년 주가 전망에 대해, 4월까지 오르고 5월~8월에는 큰 폭으로 떨어지며 그 이후 다시 지속적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그 해 주가는 4월에 939까지 오른 후 4월 말부터 5월 사이에 폭락했으며 이러한 하락세는 8월 초 717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주가가 계속 오름세를 보였다.


프로라는 외로운 자리, 등수와 몸값으로 결정되다

나는 주가의 흐름을 제대로 진단하면서 2004년에는 증권 시장과 관련된 거의 모든 상을 독차지했다. 애널리스트들의 몸값은 등수에 따라 정해지며, 몸값은 바로 자존심이다. 리서치 센터에는 세 가지 부류의 연구원들이 있다. 각종 기업과 산업을 분석하는 애널리스트, 경제성장, 물가, 금리, 환율 등 거시경제 변수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이코노미스트, 경제, 산업, 기업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투자전략을 제시하는 스트래티지스드가 이들이다.


이들이 바로 증권 시장에서 평가를 받게 된다. 매일경제와 한국경제 등 주요 언론사들이 매년 상ㆍ하반기로 나눠 두 번씩 각 분야별로 순위를 매긴다. 이 평가 결과에 따라 애널리스트들의 몸값이 달라진다. 언론에서는 보통 각 분야별로 1위~5위까지를 발표하는데, 이 순위에 드는 것이 애널리스트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이다. 특히 1위를 차지한 일부 애널리스트는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고,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한다.


나는 2002년부터 이코노미스트 분야에서 계속 1위로 평가받았다. 2004년 이후 평가에서는 스트래티지스트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애널리스트 평가 이후 이 두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 한결같은 노력과 공부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생존전략이다. 미래는 결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현재와 과거의 자료만 잘 분석할 수 있다면 펼쳐질 미래의 모습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 최고라는 것, 프로라는 자리처럼 외로운 자리가 없다.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은 누구에게 의논하거나 질문해볼 상대가 없다. 오로지 답만을 제시해야 하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최고라는 자리다.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프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 구절이 있듯이 외로움을 견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프로다.


합리적 근거를 가진 용기는 끝까지 사수하라

2004년 8월 중순부터 나는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사라고 권유했는데, 주가는 8월 초 710대에서 10월 초에 890 포인트까지 상승하다, 10월 초부터 중국의 갑작스러운 금리인상으로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시적으로 810선이 깨지기도 하는 등 나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은 겪었다. 최고경영자부터 펀드매니저, 일반 투자자까지 모두가 나에게 압력이었다. 그럼에도 갖고 있는 모델을 전부 검토한 결과는 그래도 낙관 쪽이었다. 결과적으로 주가는 808 포인트까지 떨어졌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연말에는 895까지, 그 다음해 1월에는 900을 넘어섰다. 합리적 근거를 가진 용기는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 그때그때 압력에 못 이겨 수정해서 전망하곤 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용기는 자신을 신뢰하는 힘에서 나온다.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이겨내야 프로라는 수식어를 당신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애널리스트의 세계, 과학과 직감의 놀라운 조화

나는 주가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변수를 전망하고 평가를 받는다. 이런 과정에서 나와 견해가 정반대인 전문가들과 토론장에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때로는 언론에서 싸움(?)을 붙이기도 한다.


2005년 봄, 한 생명보험회사에서 설명회를 요청했다. 회의실에는 그 회사의 주요 자산 운용 담당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뿐만 아니라 외국계 회사의 스트래티지스트도 초청했다. 내가 우리나라 증권 시장에서 대표적인 낙관론자로 인식된 반면, 그는 비관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유동성 축소, 기업수익 부진 등 5가지 이유를 들면서 주가가 790까지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주식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주가는 980 선에서 움직일 때였다. 그 후 4월에 주가가 한때 917까지 하락했지만, 다시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2005년 9월에는 1,200선을 넘었다.


애널리스트에게는 실제 주가가 자신의 전망과 다르게 움직일 때가 가장 힘들다. 2002년 3월, 조선일보에서 "증권가 족집게 2인 주가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K증권 L이사의 견해를 비교했다. 그때 나는 2, 3개월 정도 주가가 하락하고 그 이후 상승할 것으로 보았지만, 주가는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올랐다. 그때 10월 한 투자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때문에 주식을 사지 못했고, 그래서 돈 벌 기회를 놓쳤다면 그는 내게 무척 화를 냈다.


2002년 하반기에도 주가 전망이 어긋난 적이 있었다. 10월, 11월 종합주가지수가 900을 넘을 것으로 전망했는데 주가는 730가지 오르는 데 그쳤다. 이때에도 회사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졌다. 당시 대신증권의 소매영업 담당 임원은 주가 전망이 틀려 영업에 차질이 생겼으니 내 부하직원에게 사표를 쓰라고 했다. 부하 직원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투자전략실을 책임지는 실장이라는 위치에 있던 내가 사표를 썼다. 그러나 당시 대신경제연구소 담당 임원은 좀 더 지켜보자며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 후 통계분석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통계뿐 아니라 통찰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증권 시장을 분석하기 위해서 애널리스트는 두뇌 회전이 빨라야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증권 시장을 전망할 경우 오른쪽 뇌의 이성적 판단뿐만 아니라 왼쪽 뇌의 종합적 사고력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감으로 주식투자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직감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과거와 현재에 만들어놓았거나 만들고 있는 자료에서 비롯된다. 애널리스트는 그동안 축적된 지식에 근거한 무의식적 판단, 즉 직감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을 신뢰하는 힘이 모여야 직감력이 생기는 것이다.


신뢰, 나를 지켜준 힘

사람들이 나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거액의 연봉을 받거나, 주식투자에서도 큰돈을 벌고있지 않을까 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 연봉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다. 더구나 증권저축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도적으로 주식투자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대신증권은 연봉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내 월급도 여느 임직원과 큰 차이가 없다. 물론 다른 동료들보다 빨리 승진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왜 더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로 옮기지 않느냐?"


나에게도 이직의 기회는 몇 번 있었다. 물론 높은 연봉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중국 속담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대신증권 설립자인 양재봉 회장이 바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같은 존재였다. 양회장과 더불어 대신경제연구소 나영호 전 사장도 나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나는 대신증권이라는 물에서 신뢰를 쌓고 매일 노력한 끝에 이 자리에 섰다. 그 물에서 나는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내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내가 몸담은 곳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면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상대방 혹은 회사의 신뢰를 저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신뢰란 나비가 제 스스로 날개를 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안달부리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 이것이 신뢰가 아닐까? 나를 믿고 기다려준 대신증권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신뢰를 차마 저버릴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나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제4장 프로, 그 이름의 성공학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대학교 1학년 때,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등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한 영어 교과서에 헬렌 켈러의 "Three Days to See(내가 만일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썼다. 앞을 볼 수 있는 사흘 동안, 첫날은 친구들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바치고,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며,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날은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글 마지막 부분에는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매일매일 내일 당장 죽을 사람처럼, 온 마음을 다해 살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 주위에 있는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잘못한 일은 없을까? 또한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있는가?


우리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지지 못했지만 헬렌 켈러가 온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더 좋은 환경이 없다면 남들보다 더 특별한 꿈을 가지고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오직 스스로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잃을 것도 없다는 말이 된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좋지 않는 환경이 성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아름드리 그늘을 준비하라

입사 초기, 내가 회사 임원들의 눈에 띈 것은 상사 덕도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7시 30분 대신증권에서는 임원회의가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경제조사실의 실장이 이 회의에서 주간 경제동향을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담당 실장은 집이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회사의 출퇴근 시간에 구속을 별로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다.


입사 초기부터 나는 아침 6시에 출근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어느 날 7시 15분쯤 전화벨이 울렸다. "아무래도 회의 시간까지 출근할 수 없으니 대신 임원회의에 들어가서 보고하라"는 실장의 보고였다. 처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 진행자가 발표를 하라고 말할 때까지 나는 주위를 살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료만 쳐다보았다. 자료를 잡고 있는 손이 떨렸고 목소리도 그 떨림에 가세했다. 그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회의보고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아침에 게으른 실장 덕분에 회사의 주요 임원들 앞에 설 수 있었던 셈이다.


나무는 꽃과 열매와 잎사귀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제 몫의 꽃과 열매와 잎사귀를 키웠다가 떨쳐내지만 묵묵히 제 몫의 그늘도 함께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 실장은 통찰력이 있고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정시에 출퇴근해야 하는 직장인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를 키우고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준비된 자로서 성공의 지름길을 찾았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준비된 자만이 가능하다.


자기 비전은 자기 영역에서 시작한다

나는 1989년 대신경제연구소 입사 후 지금껏 이코노미스트로 남아 있다. 2001년 8월, 옥스퍼드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당시 대신경제연구소 나영호 사장은 나에게 기업분석실장 자리를 권유했다. 실제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나는 재무론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7주 동안 배운 실력으로 20명 넘은 애널리스트들을 이끌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큰 흐름을 잡아 앞서 갈 수는 있었지만, 기업분석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몰라 그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던 분야에서 한 우물 파는 쪽을 택했다. 나영호 사장은 나의 이런 뜻을 들어주었고 이코노미스트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때 만약 기업분석실을 맡았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한 우물을 계속 팠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전문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일할 영역을 확보하는 것, 나만의 우물을 파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진정한 이코노미스트에게는 은퇴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62세에 은퇴해야 한다는 규정이 100년 전 유럽에서 전해진 사고방식이란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는가? 그때의 평균수명은 46세였다. 지금의 평균수명으로 계산해 보면 104세가 된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62세에 은퇴를 한다면 우리는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로 나뉜 삶에서 가장 긴 은퇴기를 아무런 목적 없기 그냥 흘러 보내야 한다. 와인을 음미하고 골프를 치면서 은퇴생활을 하겠다는 비전은 꿈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이 될 것이다. 나는 그 골목을 돌아 최대한 현역으로 뛰고 싶다.


쉬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보다 더 중요한 아프지 말라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은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이지만 아침 6시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나의 일과만 봐도 건강이 필요충분조건임을 알 수 있다. 어떤 후배들은 나를 가끔 철인으로 부르지만 모든 일에는 실제로 철인 수준의 건강이 요구된다. 내가 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선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틈만 나면 달리고 산에 간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군대에서 배운 맨손 체조를 5분 정도 하고 나서 10여 분 명상을 한다.


세계의 금융을 움직이는 화교들. 돈에 대한 이들의 무서운 집념을 보여주는 세 가지인 쉬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 아프지 말라 중에서도 제일로 꼽는 것이 건강이다. 조국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살이에서 몸의 건강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온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들은 비행기를 타면 안전준수 사항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자기 자신부터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그 다음이 자식과 주위 사람들의 산소마스크를 착용시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자기 자신부터 안전해야 주위의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분명한 예이다.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건강에 투자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기본인 건강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비싼 돈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령의 애널리스트가 될 때까지 나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건강관리를 계속할 것이다.



에필로그 - 희망의 또 다른 이름, 프로로 산다는 것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도전한 날, 4시간 30분을 목표로 뛰었지만, 처음 뛰는 풀코스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슬슬 포기가 눈앞에 아른거리다가, 28킬로미터 지점에서 약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나오자, 더 이상 뛰지 못하고 5분 정도는 걸어서 갔다. 당장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바나나를 주는 데가 나타났고, 바나나를 두 개 먹었더니 신기하게 다시 힘이 났다. 나는 다시 달렸다. 하지만 마지막 2킬로미터를 달릴 힘이 더 이상 없었다. 그때 등뒤에서 부드럽게 미는 힘이 느껴졌다. 산들바람이었다. 이 작은 바람이 불어 등을 밀어 주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바람에게 고마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나는 결국 완주했다.


증권가도, 마라톤도, 결국 모두가 상통하는 것이다. 한결같은 정성과 노력이 결실을 맺게 해준다. 나의 이 책이 많은 사람들, 힘들어 풀썩 주저앉고 싶은 사람들에게 등뒤의 작은 산들바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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